왕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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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찬은 후한 말, 삼국 시대 초기의 인물로, 자는 중선(仲宣)이며, 현재의 산둥성 웨이산 현 일대에 해당하는 산양군 출신이다. 그는 뛰어난 문장가이자 기억력과 산술에도 능했으며, 조조 휘하에서 시중을 지냈다. 채옹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두터운 신임을 얻었으며, 조조의 위나라 건국에 기여했다. 41세에 사망했으며, 조비는 그의 장례식에서 당나귀 울음소리를 내며 그를 기렸다. 왕찬은 건안 칠자 중 한 명으로, 대표작으로 《칠애시》, 《등루부》 등이 있으며, 역사서 《영웅기》를 편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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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왕찬 |
| 원어 이름 | 王粲 |
| 로마자 표기 | Wang Can |
| 자(字) | 중선(仲宣) |
| 출생 및 사망 | |
| 출생 | 177년 |
| 출생지 | 산둥성웨이산현 |
| 사망 | 217년 2월 17일 (향년 40세) |
| 사인 | 병사 |
| 관직 및 작위 | |
| 관직 | 시중 |
| 봉작 | 관내후 |
| 가족 | |
| 아버지 | 왕천 |
| 자녀 | 왕예 (양자) 두 명의 아들 (친자) |
| 주요 활동 | |
| 직업 | 정치인, 시인 |
| 섬긴 세력 | |
| 초기 | 유표 → 유종 |
| 후기 | 조조 |
2. 생애
왕찬은 뛰어난 기억력을 가졌으며, 흐트러진 바둑판의 돌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박학다식하여 조조가 의례 제도를 제정할 때 반드시 그가 주관했다. 또한, 임기응변에 능한 변론가였으며, 그의 상주나 논문은 종요·왕랑과 같은 대신들도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였다. 산술에도 능통하여 산법을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재능 덕분에 조조가 시찰할 때 동행하여 수레에 함께 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조조의 신임을 얻는 정도는 시중 동료인 화협·두습에 미치지 못했고, 왕찬은 그들을 질투했다.[11]
2. 1. 출생과 가문
왕찬은 고평현(高平縣, 현재의 산둥성 웨이산현 일대) 출신으로, 산양군 사람이다. 그는 후한 소제 때 섭정이었던 대장군 하진의 장사(長史) 왕겸(王謙)의 아들로 태어났다.[3] 왕찬의 증조부 왕공(王龔)과 조부 왕창(王暢)은 각각 순제와 문제 때 삼공의 벼슬을 지냈다.[4]왕찬의 가문은 증조부와 조부가 모두 삼공에 오른 명문가였다. 아버지 왕겸은 하진의 장사였으나, 하진이 자신의 딸과 왕겸의 혼인을 주선하려 하자 이를 거절하여 면직되었고, 이후 병으로 사망했다.
2. 2. 어린 시절과 채옹과의 만남
헌제가 동탁 때문에 장안으로 천도하였을 때 왕찬 또한 장안으로 이주하였다. 채옹은 좌중랑장(左中郎將)으로 있었는데 왕찬을 만나보고 그를 기이하게 생각했다.당시 채옹은 재능과 학문이 탁월하여 조정에서 귀하게 여기고 중요시 하였으며, 항상 빈객들의 말과 수레가 채옹이 사는 마을과 채옹의 집을 가득 메웠다.
채옹은 왕찬이 문밖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신발까지 거꾸로 신고 나가 그를 영접하였다. 왕찬이 들어오자 빈객들은 그가 나이가 어리고 생김새가 작고 초라했으므로 모두 매우 놀랐는데, 채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람은 왕공(王公)의 손자로서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으며, 나도 그보다 못하오. 그러니 우리 집에 있는 서적과 문학 작품을 모두 그에게 주어야겠소."'''[7]
2. 3. 형주 유표 의탁과 조조 귀부
190년(초평 원년), 동탁의 장안 천도 때 왕찬도 함께 이주했다. 그곳에서 대학자로 명성이 높았던 채옹의 큰 총애를 받아 그의 장서를 물려받게 되었다.17세에 사도의 초빙을 받았고, 황문시랑으로도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이후 전란이 끊이지 않는 장안을 떠나[9], 형주자사 유표에게 의탁했다. 유표는 처음에 왕찬에게 딸을 주려 했으나, 그의 용모가 추하고 경솔한 행동을 문제 삼아 용모가 단정한 왕찬의 종형 왕개에게 딸을 시집보냈다.[10]
208년(건안 13년), 유표가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인 유종을 설득하여 조조에게 귀부하도록 했다. 이후 조조의 초빙을 받아 승상연이 되었고, 관내후 작위를 받았다. 이후 군사제주를 거쳐 213년(건안 18년) 조조가 위공에 즉위하자 시중에 임명되었다.
2. 4. 조조 휘하에서의 활약과 위나라 건국 기여
헌제가 동탁 때문에 장안으로 천도하였을 때 왕찬 또한 장안으로 이주하여 좌중랑장(左中郎將) 채옹의 눈에 띄었다. 채옹은 재능과 학문이 탁월하여 조정에서 귀하게 여기고 중요시 하였으며, 항상 빈객들이 채옹의 집을 가득 메웠다. 그런 채옹도 왕찬이 문밖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신발까지 거꾸로 신고 나가 그를 영접하였고, 왕찬이 들어오자 빈객들은 그가 나이가 어리고 생김새가 작고 초라했으므로 모두 매우 놀랐다. 채옹은 '"이 사람은 왕공(王公)의 손자로서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으며, 나도 그보다 못하오. 그러니 우리 집에 있는 서적과 문학 작품을 모두 그에게 주어야겠소."'라고 말하며 왕찬을 칭찬했다.[4]왕찬은 17세에 사도 순우가의 초빙을 받아 조서를 받아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임명되었지만, 당시 장안이 혼란스러웠으므로 취임하지 않고, 형주로 가서 유표에게 의탁했다. 유표는 왕찬의 용모가 추하고 신체가 허약하지만 대범한 성격이었음을 알았지만 중용하지 않았다.
208년, 유표가 죽은 후 왕찬은 유표의 아들 유종에게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권했고, 유종이 왕찬과 다른 신하들의 의견대로 조조에게 항복하게 되자 왕찬 역시 조조에게 초빙받아 그를 섬기게 되었고 승상연(承相椽)으로 임명되었으며, 관내후의 작위를 하사받았다.[5] 후에 왕찬은 군모제주(軍謀祭酒)로 승진했으며 213년 위나라가 건립되고 나서는 시중(侍中)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조조가 옛 제도를 참고하여 의례(義禮) 제도를 제정할 때에는, 반드시 왕찬에게 책임자를 맡겼다.
216년 말, 왕찬은 라이벌 군벌 손권에 대한 조조의 네 번째 원정에 동행했다. 그 후 217년 봄, 길에서 41세(동아시아식 나이)로 병사했다.[6]
2. 5. 죽음과 후계
조조에게 귀부한 유종을 따라 왕찬 또한 조조에게 초빙받아 승상연(承相椽)으로 임명되었으며, 관내후 작위를 받았다. 이후 군모제주(軍謀祭酒)로 승진했으며, 위나라 건국 후에는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3] 조조는 옛 제도를 참고하여 의례(義禮) 제도를 제정할 때 왕찬에게 책임자를 맡겼다.건안 21년(216년), 왕찬은 조조를 따라 오나라 정벌에 나섰으나, 이듬해인 건안 22년(217년) 봄, 길에서 41세의 나이로 병사했다.[3] 조비는 왕찬의 장례식에서 왕찬이 생전에 당나귀 울음소리를 좋아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조문객들에게 당나귀 울음소리를 내어 그를 보내주자고 제안했다. 이에 모든 조문객들이 당나귀 울음소리를 흉내 냈다고 한다.[6]
왕찬의 두 아들은 건안 24년(219년) 위풍의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되었고, 왕찬의 대는 끊겼다.[3] 그러나 왕찬의 방계 친척인 왕업이 왕찬의 양자로 지정되어 가계를 이었다.[6] 왕업은 왕찬의 책 1만 권을 물려받았다.[10]
3. 일화
조조가 한수(漢水) 해안가에서 주연을 베푼 자리에서, 왕찬은 원소와 유표를 비판하고 조조에게는 축하의 말을 올렸다. 왕찬은 원소가 인재를 기용하지 않아 선비들이 떠나고, 유표는 시세 변화를 관망만 하여 명군이 될 수 있다고 착각했다고 비판했다. 반면 조조는 인재를 등용하고 천하를 평정하여 문인과 무인이 함께 기용되고 영웅들이 힘을 다하고 있으니, 이는 삼왕(三王)과 같은 품행이라고 칭송했다.[7]
왕찬의 뛰어난 기억력을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길가의 비석 내용을 한 번 읽고 완벽하게 암송했으며, 흩어진 바둑알의 위치를 정확하게 복원하는 능력을 보였다. 사람들은 이를 믿지 못하고 시험했지만, 왕찬은 한 알도 틀리지 않게 바둑알을 원래대로 복원해냈다.[8]
왕찬은 계산에 능하여 산법(算法)을 만들기도 했고, 글재주가 뛰어나 붓을 들면 바로 문장이 이루어졌으며, 한 번 쓴 문장은 고치는 일이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사람들은 왕찬이 미리 글을 기억해 둔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따라갈 수 없었다.
젊은 시절 채옹은 왕찬을 보고 경외했다고 전해진다. 채옹은 왕찬을 맞이하기 위해 신발을 거꾸로 신을 정도로 극진히 존경했으며, 자신의 모든 책과 글을 주겠다고 할 정도로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7]
4. 평가
왕찬은 붓을 잡으면 곧바로 글을 지을 정도로 문재(文才)가 뛰어났으며, 60편에 가까운 시, 부(賦), 논(論), 의(議)를 저술했다. 「등루부(登樓賦)」, 「칠애시(七哀詩)」 등이 대표작이며, 역사서 『영웅기』를 편찬하기도 했다. 조식과 깊이 교류하여 「왕중선뢰(王仲宣誄)」라는 명작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왕찬에 대한 당대와 후대의 평가는 다소 엇갈렸는데,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4. 1. 당대와 후대의 평가
조비(曹丕)는 오관장(五官將) 시절, 동생 평원후(平原侯) 조식(曹植)과 함께 문학을 좋아하여 왕찬을 포함한 건안칠자인 서간(徐幹), 진림(陳琳), 완우(阮瑀), 응창(應瑒), 유정(劉楨)과 친구로 지냈다.조비는 건안칠자들이 모두 죽은 후, 원성현(元城縣)의 현령 오질(吳質)에게 편지를 써서 왕찬을 평가했다.
'''"중선(왕찬)은 사(辭)와 부(賦)에 뛰어났지만, 안타깝게도 그 몸이 병약한 까닭에 문장을 세우지 못했소. 그러나 그가 만든 작품은 너무 뛰어나 고인들도 그의 재주를 넘지 못하오."'''[1]
조비는 덧붙여 건안 칠자 모두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옛날 백아(伯牙)는 유일하게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는 친구였던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었고, 공자(孔子)는 자로(子路)가 죽자 원통하여 육장(肉醬)을 엎었소. 전자는 음악을 이해하는 자의 조우를 애통해 한 것이고, 후자는 자신이 아끼던 제자가 죽은 것 때문에 상심한 것이오. 건안칠자들은 비록 백아나 공자에게 미치지는 못해도 한 시대의 준걸이오."'''[1]
왕찬은 문재(文才)가 뛰어나 붓을 잡으면 곧바로 글을 지어 고칠 필요가 없을 정도여서, 사람들은 그가 미리 생각해 둔 것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이상 노력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노력한 결과였다. 60편에 가까운 시, 부(賦), 논(論), 의(議)를 저술했으며, 대표작으로 「등루부(登樓賦)」, 「칠애시(七哀詩)」 등이 있다. 역사서 『영웅기』도 편찬했다. 조식과도 친교가 깊어, 「왕중선뢰(王仲宣誄)」는 조식의 뢰명(誄銘) 중에서도 특히 심정이 넘쳐흐르는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조비는 저서 『전론』에서 "현대 문학가 7인"(소위 건안 칠자) 중 한 명으로 왕찬을 언급하며, "사부(辞賦)를 잘 짓고, 때로는 뛰어난 기질을 보이는 서간도 왕찬의 상대가 아니다"라고 그의 문재를 높이 평가했다. 오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그의 문장은 골격이 약하고 활력이 부족하다"는 단점도 지적했지만, 서간과 진림 등과 함께 "과거의 문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한 시대를 빛낸 준재임에는 틀림없다"고 평했다.
『삼국지』 왕찬전 주석에 인용된 『위략』에는 위탄에 의한 "살찌고 어리석은 정직함이 흠이다"라는 평가가 있다.
『삼국지』의 편자인 진수는 왕위이유부전 평에서 왕찬에 대해 "특히 측근 관료로서 위나라 일대의 제도를 만들었다"고 그 공적을 칭찬한 후, 인물로서는 "허심탄회하고 큰 덕성을 가진 서간의 순수함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했다.
4. 2. 현대적 재평가
조비는 저서 『전론』에서 "현대 문학가 7인"(소위 건안 칠자) 중 한 명으로 왕찬의 이름을 언급하며, "사부(辞賦)를 잘 짓고, 때로는 뛰어난 기질을 보이는 서간도 왕찬의 상대가 아니다"라고 그의 문재를 높이 평가했다. 오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그의 문장은 골격이 약하고 활력이 부족하다"는 단점도 지적했지만, 서간과 진림 등과 함께 "과거의 문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한 시대를 빛낸 준재임에는 틀림없다"고 평했다.[1]삼국지』 왕찬전 주석에 인용된 『위략』에는 위탄에 의한 "살찌고 어리석은 정직함이 흠이다"라는 평가가 보인다.[1]
『삼국지』의 편자인 진수는 왕위이유부전 평에서 왕찬에 대해 "특히 측근 관료로서 위나라 일대의 제도를 만들었다"고 그 공적을 칭찬한 후, 인물로서는 "허심탄회하고 큰 덕성을 가진 서간의 순수함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했다.[1]
5. 작품
왕찬은 당대에 정평이 난 시인이었다. 그는 다른 여섯 명의 시인들과 함께 건안체()라고 알려지게 될 시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들은 통틀어 "건안 칠자"(建安七子중국어)라고 불렸다. "건안"은 헌제 치세(196년~220년)의 연호였다.
후한 말기 내전은 건안시에 특징적인 장엄하면서도 마음을 뒤흔드는 어조를 부여했으며, 삶의 덧없음에 대한 애가는 이 시기 작품의 중심 주제였다. 중국 문학사에서 건안시는 초기 민요에서 학문적인 시로의 전환이었다. 왕찬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는 전쟁 시기에 백성들의 고통을 애도하는 오언시인 《칠애시》(七哀诗중국어)이다. 왕찬은 또한 《영웅기》()라는 역사책을 썼다.
문재(文才)가 뛰어나 붓을 잡으면 곧바로 글을 지어 고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전부터 생각해 둔 것을 쓰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이상 불가능할 정도로 노력한 결과였다고 한다. 60편에 가까운 시, 부(賦), 논(論), 의(議)를 저술했다. 대표작으로 「등루부(登樓賦)」, 「칠애시(七哀詩)」 등이 있다. 또한 역사서 『영웅기』도 편찬했다. 조식과도 친교가 깊어, 「왕중선뢰(王仲宣誄)」는 조식의 뢰명(誄銘) 중에서도 특히 심정이 넘쳐흐르는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6. 가족 관계
아들이 두 명 있었는데, 왕찬이 죽은 지 2년 후인 건안 24년 위풍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연루되어 둘 모두 처형되었고, 왕찬의 대는 끊기고 말았다.[1]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Wang Zhongxuan Lei
[3]
서적
Houhanshu
[4]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5]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6]
서적
Shishuo Xinyu
[7]
서적
Sanguozhi
[8]
서적
Sanguozhi
[9]
서적
문선
[10]
서적
삼국지
[11]
서적
삼국지
[12]
서적
조자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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