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카섬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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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카섬 대학살은 1942년 2월, 싱가포르 함락 직후 일본군이 방카 섬에서 자행한 전쟁 범죄이다. SS 바이너 브룩 호가 침몰한 후 살아남은 호주 간호사 22명과 민간인 여성 1명이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한 후 해변으로 끌려가 기관총으로 살해당했다. 생존자는 비비안 불윈켈 한 명뿐이었다. 이 사건은 가해자가 특정되지 않아 처벌받지 못했으며, 생존자 불윈켈은 증언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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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카섬 대학살 | |
|---|---|
| 사건 개요 | |
| 명칭 | 방카섬 학살 |
| 다른 명칭 | 반카섬 사건 |
| 발생 위치 | 인도네시아 방카섬 라지 해변 |
| 좌표 | 남위 2도 1분 34초 동경 105도 6분 39초 |
| 날짜 | 1942년 2월 16일 |
| 사건 종류 | |
| 유형 | 학살 |
| 피해자 | |
| 사망자 |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간호부대 소속 간호사 22명 바이네르 브룩의 선원을 포함한 호주 및 영국 군인 60명 (일부 부상자) 기타 민간인 (인원수 불명) |
| 가해자 | |
| 주체 | 일본 제국 육군 |
| 가담 부대 | 제229연대 |
| 사용 무기 | 총검, 기관총 |
| 배경 | |
| 관련 전쟁 | 태평양 전쟁 |
| 결과 | |
| 영향 | 군인, 간호사 및 민간인 사망, 일본군 연대 대대장의 자살로 재판 종결 |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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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학살의 배경
1942년 2월, 싱가포르 전투에서 싱가포르가 함락되기 직전 탈출한 SS 바이너 브룩 호가 일본군 항공기의 공격으로 침몰한 후, 약 100명의 생존자들이 인도네시아 방카 섬의 라지 해변에 모였다. 이들 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간호사 22명과 부상병, 민간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1]
생존자들은 먼톡에 주둔한 일본군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했고, 바이너 브룩 호의 한 장교가 이를 위해 파견되었다.[1] 그가 떠난 사이, 최고참 간호사였던 아이린 멜빌 드러먼드는 민간인 여성과 아이들에게 먼저 먼톡으로 이동하도록 제안했고, 이들은 해변을 떠났다.[2] 남은 간호사들은 부상자들을 돌보기 위해 해변에 머물렀으며, 눈에 잘 띄도록 큰 적십자 표식을 한 대피소를 마련했다.
얼마 후, 항복 의사를 전달하러 갔던 장교가 약 20명의 일본군 병사들과 함께 돌아왔다. 일본군은 걸을 수 있는 남성 부상자 전원에게 해변의 곶 너머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그곳에서 남성들은 일렬로 세워졌고, 일본군은 기관총을 설치했다. 상황을 직감한 영국 해군 소속 스토커(화부) 로이드(Stoker Lloyd) 등 몇몇이 바다로 뛰어들어 탈출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의 총격으로 로이드를 제외하고 모두 사망했다. 로이드 역시 총상을 입었으나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1]
간호사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짧은 총성을 들었다. 이후 일본군 병사들이 돌아와 간호사들 앞에서 자신들의 칼과 소총을 정비하기 시작했다.[1] 이는 곧이어 벌어질 여성들에 대한 학살의 불길한 전조였다.
2. 1. 싱가포르 함락과 피난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2년, 일본 제국 육군은 싱가포르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일본에 항복하기 직전인 2월 11일과 12일, 민간인과 일부 군인들이 싱가포르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약 140명의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간호사들도 싱가포르를 떠났다.[11] 이들 중 65명의 간호사를 포함하여 여성과 아이들 약 300명은 싱가포르를 떠나는 마지막 배 중 하나인 SS ''바이너 브룩''(SS ''Vyner Brooke'') 호에 탑승했다.[1][12]
2월 14일 오후, 바이너 브룩 호는 인도네시아 방카 해협에서 일본군 항공기 9대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1][12] 이 공격으로 간호사 2명이 즉사했고, 배에 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생존자들은 구명보트 등에 의지해 흩어졌으며, 상당수가 방카 섬의 라지 해안(Radji beach)으로 표류했다.[12] 표류 과정에서 간호사 12명이 추가로 익사했다.[12]
해안에 도착한 생존자 중에는 간호사 22명을 포함해 약 100명이 있었으며, 이들은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 인도네시아) 방카 섬의 라지 해변 인근에서 다시 모였다. 이들은 부상자들을 돌보며 구조를 기다렸다. 다음 날, 다른 곳에서 배가 침몰하여 표류하던 영국 병사 20명을 포함한 약 100명의 생존자들이 추가로 합류했다. 한편, 같은 날 기후 보병 제229연대 제1대대(대대장: 오리타 유 대위) 소속 일본군이 방카 섬에 상륙했다.[12]
2. 2. SS 바이너 브룩 호 침몰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2년 2월 12일, 싱가포르가 일본 제국 육군에게 함락되기 직전에 사라왁 왕국의 로열 요트였던 '''SS 바이너 브룩(SS ''Vyner Brooke'''')''' 호는 싱가포르 전투 중 도시를 떠났다. 당시 싱가포르에서는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일본에 항복하기 직전인 2월 11일과 12일에 걸쳐 민간인과 일부 군인들이 탈출하고 있었으며, 약 140명의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간호사들도 포함되었다. 이 중 65명의 간호사를 포함하여 부녀자와 아이들 약 300명은 싱가포르를 떠나는 마지막 배 중 하나인 바이너 브룩 호에 승선했다.[1][12]2월 14일 오후, 바이너 브룩 호는 인도네시아의 방카 해협에서 일본군 항공기(한 기록에 따르면 9대[12])의 폭격을 받고 침몰했다.[1][12] 이 공격으로 간호사 두 명이 즉사했고,[1] 배가 침몰하는 과정에서 12명의 간호사가 추가로 익사했다.[12]
배의 생존자 다수는 구명보트 등을 이용해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 인도네시아) 방카 섬의 라지 해변(Radji beach) 근처로 표류했다.[1][12] 이곳에서 생존 간호사 22명을 포함하여 약 100명의 생존자들이 다시 모였다. 이 그룹에는 부상병, 소수의 어린이와 민간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다른 곳에서 격침되어 표류한 약 100명의 승객(20명의 영국 병사 포함)이 이들과 합류했다. 같은 날, 오리타 유(大田雄) 대위가 이끄는 일본 기후 보병 제229연대 제1대대가 방카 섬에 상륙했다.[12]
생존자 중 ''바이너 브룩'' 호의 한 장교가 먼톡에 주둔한 일본군에게 항복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1] 그가 떠난 후, 간호사 중 최고참이었던 육군 간호장교 아이린 멜빌 드러먼드는 민간인 여성과 아이들에게 먼톡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했고, 그들은 해변을 떠났다.[2] 남은 간호사들은 부상자들을 돌보기 위해 해변에 머물렀으며, 큰 적십자 표식이 있는 대피소를 마련했다.
3. 학살의 경위
1942년 2월, 싱가포르 전투 막바지에 싱가포르를 탈출한 SS 바이너 브룩 호가 일본군 항공기의 공격으로 방카 해협에서 침몰하였다.[1][12] 이 배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간호사 65명을 포함하여 부상당한 군인, 민간인 남녀와 아이들이 타고 있었으며, 공습과 침몰 과정에서 이미 일부 간호사를 포함한 사상자가 발생했다.[1][12]
배에서 탈출한 생존자 약 100명은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 인도네시아)의 방카 섬 라지 해변(Radji Beach)에 상륙했다. 이들 중에는 간호사 22명도 포함되어 있었다.[1] 생존자들은 섬에 주둔한 일본군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대표를 보냈으나, 곧 해변에 도착한 일본군 병력은 남성 생존자들을 먼저 살해하고, 이후 간호사들과 민간인 여성을 바다로 몰아넣어 기관총으로 사살하는 등 참혹한 학살을 자행했다.[1][23]
이 학살에서 비비안 불윈켈 간호사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1] 그녀는 복부에 총상을 입었지만 일본군이 떠날 때까지 죽은 척하며 생존했고, 이후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일본군에게 항복하여 3년간의 포로 생활을 견뎌냈다.[1][4] 불윈켈은 전쟁이 끝난 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소(도쿄 전범 재판)에서 방카 섬에서 벌어진 학살의 참상을 증언했다.[4]
3. 1. 방카섬 상륙과 조우
1942년 2월 12일, 사라왁 왕국의 로열 요트였던 SS 바이너 브룩 호는 싱가포르 전투에서 싱가포르가 일본 제국 육군에게 함락되기 직전에 싱가포르를 떠났다. 이 배에는 부상당한 군인들과 제2/13호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병원 소속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간호사 65명, 그리고 민간인 남녀와 아이들 약 300명이 타고 있었다.[1][12] 이틀 뒤인 2월 14일 낮, 배는 방카 해협에서 일본군 항공기 9대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1][12] 이 과정에서 간호사 2명이 사망했고, 배가 침몰하는 동안 12명의 간호사가 추가로 익사했다.[1][12]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 약 100명의 생존자들은 구조 보트 등에 의지해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 인도네시아)의 방카 섬 라지 해변(Radji Beach) 근처에 흩어져 상륙했다. 생존자 중에는 간호사 65명 중 22명도 포함되어 있었다.[1] 생존자들은 먼톡(Muntok)에 주둔한 일본군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바이너 브룩'' 호의 장교 한 명을 대표로 파견했다.[1]
같은 날인 2월 14일, 일본 기후현 출신 병력으로 구성된 보병 제229연대 제1대대(대대장: 오리타 유折田優 대위)가 방카 섬에 상륙했다.[22][12] 이들은 섬 북서쪽의 문톡에 본부를 설치했다.[22]
생존자들 중 최고 선임자였던 육군 간호장교 아이린 멜빌 드러먼드(Irene Melville Drummond)는 민간인 여성과 아이들에게 먼저 문톡을 향해 출발할 것을 제안했고, 그들은 이를 따랐다.[2] 다른 간호사들은 부상자들을 돌보기 위해 해변에 남았으며, 적십자 표지판을 세운 임시 대피소를 마련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항복 의사를 전달하러 갔던 ''바이너 브룩'' 호의 장교가 약 20명의 일본군 병사들과 함께 해변으로 돌아왔다.[1]
3. 2. 일본군 부대 주둔
1942년 2월, 싱가포르 전투 막바지에 침몰한 바이너 브룩 호의 생존자 약 100명이 방카섬 라지 해변에 도착했다. 이들 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간호사 22명과 부상병, 민간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1] 생존자들은 먼톡에 주둔한 일본군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수간호사 아이린 드러먼드의 제안으로 민간인 여성과 아이들은 먼저 문톡으로 향했고, 일부 간호사들은 부상병 간호를 위해 적십자 표식을 한 대피소에 남았다.[2]같은 날, 일본 기후현 출신 보병 제229연대 제1대대(대대장: 오리타 유우(折田優|오리타 유우일본어) 대위)가 방카섬에 상륙했다.[22] 일본군은 섬이 이미 다른 일본군 부대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섬 북서쪽의 문톡(Muntok)에 대대 본부를 설치하며 주둔을 시작했다.[22]
3. 3. 문톡으로의 이동
1942년 2월 12일, 사라왁 왕국의 로열 요트 SS 바이너 브룩 호는 싱가포르 전투에서 싱가포르가 일본 제국 육군에게 함락되기 직전에 싱가포르를 떠났다. 이 배에는 부상당한 군인들과 제2/13호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병원의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간호사 65명, 그리고 민간인 남녀와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1] 이 배는 일본군 항공기의 폭격을 받아 침몰했으며, 이 과정에서 간호사 두 명이 사망했다.[1]
생존자들은 구조 보트에 흩어져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 인도네시아)의 방카 섬 라지 해변 근처에 도착했다. 65명의 간호사 중 22명을 포함하여 약 100명의 생존자들이 해변에서 다시 만났다.[1]
같은 날, 일본 기후현 보병 제229연대 제1대대 (대대장: 오리타 유우折田優 대위)가 방카섬에 상륙했다.[22] 섬이 이미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것을 안 생존자들은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바이너 브룩'' 호의 장교 한 명이 섬 북서쪽에 위치한 문톡(Muntok)에 본부를 설치한 일본군에게 항복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1][22]
장교가 떠난 후, 간호사 중 최고참이었던 육군 간호장교 아이린 드러먼드(Irene Drummond, 1905~1942)는 민간인 여성들과 어린이들에게 먼저 문톡을 향해 걸어가자고 제안했고, 그들은 이를 따랐다.[2][1] 동행하지 못한 간호사들은 부상병들을 간호하기 위해 그 자리에 남아 적십자 표시를 한 대피소를 가설하였다.[22]
3. 4. 학살의 시작

1942년 2월 12일, 싱가포르 전투에서 싱가포르가 일본 제국 육군에게 함락되기 직전, 사라왁 왕국의 로열 요트였던 '바이너 브룩' 호는 싱가포르를 떠났다. 배에는 부상당한 군인, 제2/13 호주 종합병원 소속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간호사 65명, 그리고 민간인 남녀와 아이들 약 300명이 타고 있었다.[1][11][12] 이틀 뒤인 2월 14일, 배는 방카 해협에서 일본군 항공기의 폭격을 받아 침몰했다.[1][12] 이 과정에서 간호사 두 명이 사망했고[1], 다른 12명은 익사했다.[12]
간호사 22명을 포함한 약 100명의 생존자들은 구조 보트에 나눠 타고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 인도네시아)의 방카 섬 라지 해변 근처에 도착했다.[1] 생존자 중 '바이너 브룩' 호의 한 장교가 먼톡에 주둔한 일본군에게 항복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1] 그가 떠난 후, 간호사 중 최고 선임이었던 아이린 멜빌 드러먼드는 민간인 여성과 아이들에게 먼저 먼톡으로 가도록 제안했고, 이들은 해변을 떠났다.[2] 남은 간호사들은 부상자들을 돌보기 위해 해변에 남았고, 눈에 잘 띄도록 큰 적십자 표지판이 있는 임시 대피소를 만들었다.[2] 같은 날, 기후 보병 제229연대 제1대대(대대장: 오리타 유 대위)가 방카 섬에 상륙했다.[12]
얼마 지나지 않아 항복 의사를 전하러 갔던 장교가 약 20명의 일본군 병사들과 함께 돌아왔다.[1] 일본군은 걸을 수 있는 모든 남성 부상자들에게 해변의 곶 너머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1][23] 남자들이 이동하자 일본군은 그들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하고 총검으로 찔러 살해했다.[23][1] 배의 기관부원이었던 스토커 로이드(Stoker Lloyd)는 위험을 직감하고 바다로 뛰어들었고, 다른 몇몇도 그를 따랐으나 일본군의 총격으로 로이드를 제외하고 모두 사망했다. 로이드는 총상을 입었지만 간신히 탈출하여 의식을 잃고 해변 다른 곳으로 떠내려갔다.[1]
남성들을 살해한 일본군 병사들은 간호사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와 여성들 앞에서 칼과 소총을 정비했다.[1] 이후 일본군 장교는 남은 간호사 22명과 민간인 여성 1명에게 바다로 걸어 들어가라고 명령했다.[1][23] 여성들이 허리 깊이까지 물에 들어갔을 때, 해변에 설치된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23][1] 이 총격으로 비비안 불윈켈 대위를 제외한 모든 여성이 살해당했다.[1][23] 들것에 누워 있던 중상자들 역시 일본군에 의해 총검으로 살해되었다.[1] 역사가 리넷 실버, 방송인 테스 로렌스, 전기 작가 바바라 앤젤 등이 수집한 증거에 따르면, 간호사 대부분은 살해되기 전 일본군에게 강간당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생존자 불윈켈은 전쟁 후 이 사실에 대해 증언하려 했으나, 호주 정부에 의해 제지당했다고 알려졌다.[3]
복부(또는 횡격막)에 총상을 입은 불윈켈 대위는 물가에 떠밀려 내려왔고, 일본군이 떠날 때까지 죽은 척하며 숨어 있었다.[23][1] 그녀는 이후 덤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며칠 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고,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총검 공격에서 살아남은 영국군 병사인 패트릭 킹슬리(Patrick Kingsley) 일병을 만났다. 불윈켈은 킹슬리와 자신의 상처를 돌보며 12일간 함께 지냈다.[1][23] 이후 의식을 되찾은 스토커 로이드도 합류했다.[1] 가혹한 환경에서 더 이상 생존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들은 결국 일본군에게 항복했다. 킹슬리는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기 전 부상 악화로 사망했고[23][1], 불윈켈과 로이드는 포로가 되었다.[4][1]
3. 5. 강간 의혹
1990년대 초, 멜버른 대학교 교수였던 다나카 토시유키는 여성 간호사들이 총살당하기 전에 일본군에게 강간당했을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30][19]2019년 4월, BBC는 호주의 역사학자 리넷 실버(Lynette Silver), 작가 바버라 앤젤(Barbara Angell), 방송인 테스 로렌스(Tess Lawrence)가 수집한 연구 결과와 증거 자료들을 통해, 학살 사건의 유일한 생존 간호사였던 비비안 블린켈과 다른 대부분의 간호사들이 살해되기 전에 일본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보도했다.[31][32][20][21][3]
그러나 블린켈은 피해자의 명예를 고려한다는 호주 정부의 명목 아래 도쿄전범재판 당시 성폭행 피해 사실 증언을 금지당했다.[31][32][20][21] 호주 정부는 블린켈을 사실상 "입막음"하고,[3] 사건 발생 전 간호사 피난을 지연시킨 과거 정부의 판단을 은폐하려 했으며, 증언 기록 일부 파기 및 간호사 의복 수선 등의 행위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20][21] 블린켈은 생전에 촬영된 비디오 인터뷰를 통해 일본군에 의한 성폭행이 있었음을 직접 증언하기도 했다.[31][32]
호주 정부에 따르면, 학살의 가해자들은 여전히 특정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범죄에 대한 어떤 처벌도 피했다".[3]
4. 전후 처리
전쟁이 끝난 후, 학살의 유일한 생존 간호사인 비비안 블린켈은 1947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소(도쿄 전범 재판)에 출석하여 자신이 겪은 참상을 증언했다.[4] 또 다른 생존자인 스토커 로이드 역시 포로 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오스트레일리아 당국에 생존 간호사들의 소식을 알리고 그들을 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일본 측은 생존 간호사들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학살 책임자를 밝히고 처벌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주요 용의자의 자살 등으로 인해 가해자를 특정하지 못하고 재판은 종결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 참조)
4. 1. 재판과 처벌

싱가포르 주재 오스트레일리아 군사 법원은 보병 제229연대장이었던 다나카 료사부로(田中良三郞) 소장(사건 당시 대령)을 체포했다. 그러나 제229연대는 과달카날에서 전멸하여 재판정에 출석할 증언자가 없었다.
같은 연대 제1대대장이었던 오리타 마사루 소령(사건 당시 대위)은 1948년 6월 16일 시베리아에서 마이즈루로 귀환하였고, 6월 19일 미군에 신병이 인도되어 스가모 구치소에 구금되었다. 방카섬 대학살의 유일한 생존자인 비비안 블린켈 대위는 유일한 증인으로서 도쿄 재판에 출석하여 증언했다.[4]
오리타 소령은 미결 구금 중이던 1948년 9월 8일[16][25] 혹은 9월 13일[26]에 유리창 수리용 도구로 목의 혈관을 잘라 자살하였다.[17][27] 오리타 소령이 자살하면서 기소되지 않았고[18][28], 사건은 범행을 실행한 자들을 특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살의 책임자는 밝혀지지 않은 채 재판이 종결되었다.[8][29]
4. 2. 비비안 블린켈의 생애
비비안 블린켈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간호사로 복무했다. 1942년 2월 12일, 싱가포르 전투에서 싱가포르가 일본 제국 육군에게 함락되기 직전, 그녀는 부상병, 동료 간호사 64명, 민간인들과 함께 사라왁 왕국의 로열 요트 SS 바이너 브룩 호를 타고 싱가포르를 탈출했다.[1] 그러나 배는 일본군 항공기의 폭격을 받아 침몰했고, 이 과정에서 간호사 두 명이 사망했다.[1]
블린켈을 포함한 약 100명의 생존자들은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 인도네시아)의 방카 섬 라지 해변에 도착했다. 생존자 중에는 블린켈을 포함한 간호사 22명이 있었다. 배의 장교가 먼톡의 일본군에게 항복 의사를 전달하러 간 사이, 선임 간호장교 아이린 멜빌 드러먼드의 제안으로 민간인 여성과 아이들은 먼톡으로 이동했다.[2] 블린켈과 다른 간호사들은 부상자들을 돌보기 위해 해변에 남았다. 그들은 큰 적십자 표지판이 있는 대피소를 세웠다.
얼마 후, 일본군 병사 약 20명이 돌아와 걸을 수 있는 남성 부상자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 기관총으로 학살했다. 스토커 로이드라는 남성만이 총상을 입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간호사들이 짧은 연발 총성을 들은 후, 일본군 병사들이 돌아와 그들 앞에서 칼날과 소총을 청소했다.[1] 역사가 리넷 실버, 방송인 테스 로렌스, 전기 작가 바바라 앤젤 등이 수집한 증거에 따르면, 일본군은 간호사 대부분을 강간한 후 살해했다. 블린켈은 살아남았지만, 전쟁 후 강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호주 정부에 의해 "입막음"되었기 때문이다. 호주 정부에 따르면, 학살의 가해자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고 "그들의 범죄에 대한 어떤 처벌도 피했다".[3] 격렬한 성폭행을 당한 후, 일본군 장교는 22명의 간호사와 민간인 여성 1명에게 파도로 걸어가라고 명령했다.[1] 해변에 기관총이 설치되었고, 여성들은 허리 깊이 바다에 들어갔을 때 기관총에 의해 살해되었다. 블린켈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살해되었다.[1] 들것에 남겨진 부상병들은 총검으로 찔려 살해되었다.[1]
횡격막에 총상을 입은 블린켈은 일본군이 떠날 때까지 물 속에 꼼짝없이 누워 있었다. 그녀는 덤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며칠 동안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다. 깨어났을 때, 그녀는 일본군에게 총검으로 찔리고 살아남은 배의 부상당한 영국군 병사인 패트릭 킹슬리 일병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의 상처와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고 스토커 로이드를 만났다. 그들은 가혹한 환경에서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항복하는 것이 낫다는 데 동의했다. 12일 후, 블린켈과 킹슬리는 일본군에게 항복했다. 킹슬리는 포로 수용소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지만, 블린켈은 3년을 포로 수용소에서 보냈다.[4] 로이드는 그들 다음에 항복했고, 전쟁의 나머지 기간을 포로로 보냈다. 그의 수용소가 해방되었을 때, 그는 당국이 생존한 간호사들에 대해 알도록 했고, 그들을 계속 찾았다. 일본군은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부인했고, 그들의 수용소는 정글 깊숙한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찾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블린켈은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1947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소(도쿄 전범 재판)에서 학살에 대한 증언을 했다.[4] 같은 해 전역하여 멜버른 교외의 페어필드 감염병원(Fairfield IDH)의 수간호사가 되었다. 이후 방카섬 대학살 희생자들을 위한 기금을 설립하였고 후에 호주간호대학의 학장이 되었다.[15]
5. 추모
오스트레일리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에서는 1955년부터 2월 16일과 가장 가까운 일요일에 세인트 메리스의 여성 기념 운동장에서 방카섬 대학살 추모 행사를 연례적으로 개최하고 있다.[33][5] 이곳에는 드러먼드(Drummond)를 비롯해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출신으로 희생된 육군 간호 장교 6명을 기리는 명패가 세워져 있다.[6]
대학살 80주년을 맞은 2022년, 호주 간호 대학 재단은 방카 섬 대학살에서 사망한 간호사 21명 각각의 이름을 딴 장학금을 설립하고, 호주 전쟁 기념관 부지에 생존자 비비안 불윈켈의 조각상을 세우기 위한 기금 모금을 주도한다고 발표했다.[7]
불윈켈은 1947년 제대한 후 멜버른의 페어필드 감염증 병원(Fairfield Infectious Diseases Hospital영어) 간호부장을 역임했으며, 방카 섬 희생자를 위한 기금을 설립하고 이후 호주 간호 대학의 학장이 되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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