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훈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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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훈의 난은 868년, 당나라 말기에 무녕군 소속 병사들이 주도한 반란이다. 서주 지역의 특수성과 교병들의 불만이 배경이 되었으며, 계주 주둔 중 귀향 요구가 좌절되면서 시작되었다. 반란군은 방훈을 중심으로 서주를 점령하고 세력을 확장하려 했으나, 정부군의 반격과 내부 분열로 인해 실패했다. 방훈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추구하며 민심을 잃었고, 이념 부재와 약탈 행위로 인해 지지 기반을 잃었다. 결국 869년,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방훈은 사망하면서 난은 종결되었다.
당나라 말기, 각지의 번진(藩鎭) 절도사(節度使)들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병사들의 급여를 줄이면서 장병들의 불만이 커졌다. 이로 인해 장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절도사를 몰아내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새로운 절도사를 옹립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반대로 장병들을 지나치게 우대하며 비위를 맞추는 절도사들도 있었다.
859년 남조의 世隆|세륭중국어이 황제로 즉위하여 자립하고, 당나라와 토번이 쇠퇴하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서주(徐州)에서 3,000명의 병사를 모집하여 현재의 광서 지역으로 부임시키는 조칙을 내렸다. 이는 비적화된 서주의 교병을 활용하려는 목적이었다. 부임 기한은 안녕이 회복될 때까지였으며, 일단 3년으로 정해졌다. 이로 인해 서주의 교병 800명이 계주로 부임했으나, 3년이 지나도 교대 이야기가 없었고, 결국 6년이나 지나버렸다. 교병들은 탄원해도 연장되는 상황에 분노하여 마침내 행동을 시작했다.[1]
2. 반란의 배경
서주를 중심으로 한 무녕번진은 교통의 요충지라는 특성상 병사들이 우대를 받았고, 목종 때 절도사 왕지흥이 2,000명의 정예 부대를 편성한 이후 더욱 특권을 누렸다. 후임 절도사들 역시 이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다.
862년, 서주의 교병(驕兵)들은 신임 절도사 온장(溫璋)을 몰아냈다. 이는 온장이 엄격하다는 평판이 있었기 때문인데, 오히려 이 사건은 그들에게 파멸을 가져왔다. 온장의 후임으로 구보의 난을 진압한 왕식이 부임했기 때문이다. 왕식은 부임 직후 군대를 동원해 서주의 교병들을 공격했고, 살아남은 교병들은 도적이 되었다. 정부는 이들에게 자수를 권유하는 포고를 발표했다.
이후 조정은 서주에서 병사를 모집하여 현재의 광서 지역으로 보내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남조의 자립 시도에 대처하고, 도적이 된 서주 교병들을 활용하려는 의도였다. 당초 3년 기한으로 부임했으나, 6년이 지나도록 교대 이야기가 없자 교병들은 분노하여 868년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양료판관 방훈을 맹주로 추대하고 서주로 귀환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방훈의 난의 시작이다.
3년 기한을 어긴 조정 측의 잘못도 있었기에, 조정은 적극적인 토벌을 하지 않았다. 교병들은 통과하는 지역에서 환대를 받으며 서주로 향했고, 도중에 옛 동료들이 합류하여 병력이 늘어났다. 서주 관찰사 최언증은 이들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조정 내에서는 이들의 난폭함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교병들 역시 조정을 신뢰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방훈은 "정부는 우리를 능지처참하고 일족을 몰살하려 한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싸워서 죽고, 다시 부귀를 누리자"라며 부하들을 선동했고, 서주의 교병들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2. 1. 서주 지역의 특수성
서주를 중심으로 4개 주를 관할하는 무녕번진은 악명 높은 번진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는 서주 지역이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며, 목종 때 절도부사로 부임한 왕지흥 이래 2,000명으로 구성된 7군 엘리트 부대가 배치되어 우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왕지흥 이후에도 다양한 특전을 누렸고, 후임 절도사들 역시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급급했다.
2. 2. 교병의 불만과 절도사 축출
안록산의 난 이후, 당나라 말기에 접어들면서 병사들의 반란이 종종 발생하였다. 이는 지방의 번진(藩鎭)에 파견된 절도사(節度使)가 넉넉한 예산을 벌기 위해 필요 경비를 삭감하자, 군인들의 급여가 대폭 감소하여 이에 불만을 품은 장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절도사를 축출하고 자신들과 적성이 맞는 절도사를 추대한 데 따른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장병들을 지나칠 정도로 우대하여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절도사도 있었다.
서주(현 장쑤성 쉬저우 시)를 본거지로 삼아 서주・사주(泗州, 현 장쑤성 화이안 시)・숙주(宿州, 현 안후이성 쑤저우 시)・호주(濠州, 현 안후이성 추저우 시)의 4주를 지배했던 무녕군(武寧軍) 번진은 평판이 좋지 않은 번진으로 유명했다. 이는 서주 일대가 수륙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 일대의 장병들이 특별한 우대를 받고 있었던 데 따른 것이었다. 당 목종 연간에 무녕군 절도부사(武寧軍節度副使)에 임명된 왕지흥은 서주에 부임하면서 2천 명의 날래고 사나운 정예병들을 모집하여 7개 군단으로 나누어 정예부대를 창설했다. 그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권이 주어져 왕지흥이 다른 번진으로 전임된 이후에도 그 특권은 계속되었고, 후임 절도사들도 줄곧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하였다.
862년 7월, 서주의 교병(驕兵, 무녕군 번진의 정예병들은 서로 각자의 지위와 특권을 세습하였기 때문에 '교병(驕兵)'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들이 신임 무녕군 절도사인 온장(溫璋)을 축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온장이 엄격한 관리라는 평판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상사(上司)를 내놓으라는 교병들의 메시지였지만, 이것이 그들의 파멸로 이어졌다. 온장의 후임으로 부임해 온 무녕군 절도사가 구보의 난을 단 일격에 진압한 명신 왕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왕식은 구보의 난을 막 진압한 직후였기 때문에, 구원군으로 출진해 있었던 충무군(忠武軍, 본거지는 현 허난성 쉬창 시)과 의성군(義成軍, 본거지는 현 허난성 안양 시)의 두 번진 병력을 임시로 지휘하고 있었다. 구보의 난이 진압되면서 이들 두 번진 장병들을 위로하여 해산시키는 단계에서 잠시 동안 그들에게 서주의 교병들을 몰살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수천 명의 교병들이 일거에 떼죽음을 당하였고, 이처럼 예상치도 못한 왕식의 무력 조치로 무녕군 번진은 괴멸되어 해체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마침내 무녕군 번진은 소멸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녕군 번진 소속의 교병들 전원을 몰살시키지는 못했다. 살아남은 교병들은 비적(匪賊)이 되었다. 정부는 1개월 이내에 자수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포고를 발령하게 되었다.
2. 3. 계주 부임과 귀향 요구 좌절
864년, 남조가 교지(현 베트남 북부 일대)를 점령하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서주(徐州)와 사주(泗州) 일대(구 무녕군 번진 관할 지역)에서 3천여 명의 병사를 모집하여 남조 방위 최전방인 옹주(邕州, 현 광시 좡족 자치구 난닝 시)에 주둔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당나라와 토번의 쇠약을 틈타 자립하려던 남조에 대처하고, 동시에 비적(匪賊)이 된 서주의 교병(驕兵)들을 활용하려는 의도였다. 이들은 해당 지역이 안정될 때까지 주둔할 예정이었고, 그 기한은 우선 3년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실제 모집에 응한 인원은 약 2천 명뿐이었다. 이들 중 800명이 계주(桂州, 현 광시 성 구이린 시)에 부임하게 되었다.
3년이 지나도 교체 명령이 없었고, 결국 6년이나 지났다.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귀향을 탄원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1년 더 주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고향에 돌아갈 희망이 사라지자 교병들은 크게 분노했고, 결국 도적 출신의 전직 무녕군 장교인 도우후(都虞侯) 허길(許佶) 등의 주도로 반란을 일으켰다.
868년 7월, 계주의 관찰사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후임자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틈을 타, 교병들은 계주도장(桂州都將) 왕중보(王仲甫)를 살해하고 식량 창고를 약탈했다. 그들은 양료판관(糧料判官) 방훈을 우두머리로 추대하고 서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방훈의 난의 시작으로 기록된다.
비록 반란을 일으켰지만, 당초 3년 주둔을 약속하고도 6년으로 연장한 조정 측에도 책임이 있었기에, 조정은 적극적으로 토벌에 나서지 않았다. 교병들은 호남도(湖南道, 현 후난성 일대)를 지나 장강을 따라 악악도(鄂岳道, 현 후베이성 남동부 일대)・선흡도(宣歙道, 현 안후이성 남부 일대)・절서도(浙西道, 현 저장성 북부 일대) 등을 거쳐 동쪽으로 북상하여 회남도(淮南道, 현 안후이성 중부 일대)에 이르렀다. 그들은 통과하는 주와 현에서 환대를 받으며 서주로 향했고, 도중에 도적이 된 옛 동료들이 합류하면서 1천 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서주는 서사도 관찰사(徐泗道觀察使) 최언증(崔彦曾)의 관할이었다. 교병들과 관찰사 사이에 사신이 오갔고, 조정은 일단 이들을 받아들일 방침이었으나, 난폭한 행동을 일삼아 온 이들을 받아들여도 좋을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조정 내에서 이러한 주장이 힘을 얻었다. 또한, 교병들도 조정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심과 공포 속에서 방훈은 야망을 품게 되었고, 부하들을 다음과 같이 선동하였다.
이로써 서주의 교병들은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3. 반란의 전개
868년 7월, 계주의 관찰사가 전근하고 후임이 도착하지 않은 시기를 틈타, 서주의 교병들은 도장 왕중보를 살해하고 료량판관 방훈을 맹주로 추대하여 서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방훈의 난의 시작으로 여겨진다.[1]
3년 교대 약속을 6년으로 연장한 조정 측에도 잘못이 있었기에 조정은 교병 토벌을 하지 않았다. 교병들은 통과 지점의 현에서 환대를 받으며 서주로 다가갔고, 이때 비적화되었던 원래의 동료들을 흡수하여 1,000명으로 늘어났다.[1]
서주는 서주와 사주의 관찰사 최언증의 관할이었다. 교병과 관찰사 사이에 사자가 왕래했고, 조정은 교병들의 언동을 사면하는 방침이었으나, 난폭한 무리들을 쉽게 용서해도 되는가 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한편, 교병 측도 정부를 신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심 속에서 방훈은 야망을 품게 되었다.[1]
최언증과 그의 부하들이 백성들에게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여 평판이 매우 나빴기 때문에, 최언증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백성과 호족들이 방훈의 군세에 가담하여 민란으로 발전했다. 868년 9월(《신당서》에는 10월)에는 서주와 수부였던 팽성이 함락되었고, 최언증과 부하들은 창자가 뽑히는 형벌을 받은 뒤 일족이 몰살당했으며, 서주는 교병들의 손에 떨어졌다.[1]
이러한 실적을 바탕으로 방훈은 조정에 위협을 가해 절도사가 되려고 했으나, 조정 측은 방훈이 이끄는 반란군의 토벌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1]
조정은 방훈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시간을 벌고, 강승훈, 왕안권, 대가사를 토벌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강승훈은 사타족 등 내지에 있던 이민족에게 참전을 요청하여 허락받았다. 반란군과 관군은 서주와 사주를 둘러싸고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는데, 반란군은 대가사의 군세를 빈 성으로 유인하여 안개가 껴 시야를 확보하지 못하게 된 틈을 타 기습하여 관군을 전멸시켰고, 대가사는 전사했다. 방훈은 절도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정부 고관으로부터 "귀하가 절도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라는 서신을 받자 전투를 중지해 버렸다.[1]
반란군이 움직임을 멈춘 사이에 관군은 송주에 군세를 집결시켰다.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은 방훈은 병력과 물자를 모으려 했지만, 이 시기에 반란군의 결점이 드러나 패배로 이어지게 된다.[1]
3. 1. 반란의 시작과 서주 진격
868년 7월, 계주의 관찰사가 인근 지방으로 전근을 가면서 후임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기를 노린 교병들은 계주도장(桂州都將) 왕중보(王仲甫)를 살해하고 식량창고를 약탈하였다. 그들은 양료판관(糧料判官, 식량과 사료와 관련된 사무를 감독하는 관리) 방훈을 자신들의 우두머리로 추대하여 서주로의 귀환을 개시한 것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이것이 방훈의 난의 시작으로 되어 있다.[1]
3년 교체를 약속했으나 6년으로 주둔 기간을 연장한 조정 측의 처사에 반발한 교병들은 모반을 일으켰지만, 조정은 토벌에 들어가지 않았다. 교병들은 호남도(湖南道, 현 후난성 일대)를 지나 장강을 따라 악악도(鄂岳道, 현 후베이성 남동부 일대)・선흡도(宣歙道, 현 안후이성 남부 일대)・절서도(浙西道, 현 저장성 북부 일대) 등을 거쳐 동쪽으로 북상하여 회남도(淮南道, 현 안후이성 중부 일대)에 이르렀다. 그들은 통과 지점의 주와 현에서 환대를 받으면서 서주로 향했다. 이때 도적이 된 원래 동료들이 합류하면서 1천 명으로 늘어났다.[1]
당시 서주는 서사도 관찰사(徐泗道觀察使) 최언증(崔彦曾)의 관할이었다. 교병들과 관찰사 사이에 사자가 왕래했고, 조정은 일단 허락할 방침이었지만, 난폭한 무리들을 받아들여도 좋은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조정 내부의 주된 기류가 되었다. 교병 측도 조정을 신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심 속에서 방훈은 다음과 같이 부하들을 선동하며 야망을 드러냈다.[1]
이로써 서주의 교병들은 반역을 개시했다. 최언증과 그 부하들이 백성에게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여 평판이 나빴기에, 당시 정치에 불만을 품은 백성과 호족들이 방훈의 군세에 가담하면서 민란의 성격으로 발전하였다.[1]
3. 2. 방훈의 야망과 서주 점령
龐勛|방훈중국어은 부하들에게 조정에서 자신들을 능지처참하고 일족을 모두 죽이려 한다고 선동하며, 차라리 싸워서 죽고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주장했다.[1]
당시 서사도 관찰사였던 최언증과 그 부하들은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어 평판이 매우 나빴다. 이 때문에 정치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과 호족들이 방훈의 군대에 합류하면서 민란의 성격으로 발전했다.[1]
868년 음력 9월(《신당서》에는 음력 10월) 팽성이 함락되었고, 최언증은 사로잡혔다. 그의 부하들은 장이 도려내지는 극형을 당하고 일족은 몰살되었다. (단, 최언증은 방훈군이 서주를 점거한 이후에 토벌하러 온 정부군 앞에서 방훈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로써 서주는 교병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어서 방훈군은 회수 어귀를 점거하여 장안의 당나라 황실을 위협하였다. 장강과 회수 일대는 대혼란에 빠졌고, 이후 그 일대의 많은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방훈군의 진격에 호응하면서 방훈군은 기세를 크게 떨쳤다. 그 과정에서 참가한 인원은 총병력 20만 대군에 이르게 되었다.[1]
3. 3. 조정의 대응과 초기 전투
조정은 우선 방훈 측에 사자를 보내 시간을 벌면서, 강승훈을 방훈 토벌군의 총대장으로 삼고 왕안권(王晏權)과 대가사(戴可師)를 서주남면행영초토사(徐州南面行營招討使)로 임명하여, 남북 양쪽에서 세 방향으로 일제히 진격하여 방훈군을 서주성 아래에서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1] 이와 동시에 각지의 군대에 동원령을 내려 총병력 20만 대군의 정부군이 서주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1] 이때 강승훈은 내지에 있던 사타족 기마군단을 토벌전에 참가시켜 줄 것을 요청하여 허락받았다.[1] 이로써 교병과 정부군 사이에서 서주와 사주 일대를 둘러싼 격렬한 공방전이 869년에 시작되었다.[1]
방훈 토벌군의 대장 중 한 명인 대가사는 3만 명의 우림군(羽林軍)을 이끌고 빠른 속도로 진군하여 회하를 건너 사주 동남쪽에 있던 도량성(都梁城, 현 장쑤성 우치현 동남쪽)을 점령하였다.[1] 이때 방훈군은 야음을 틈타 은밀히 철수하여 성을 탈출, 대가사의 군세를 빈 성으로 유인하여 정부군의 실력을 피해 가면서 그 허점을 노려 급습할 작정이었다.[1] 대가사가 도량성에 들어서자 성은 텅 비어 있었고, 대가사는 승리했다고 여기고 아무런 방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1]
다음날, 안개가 많이 끼어 시야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방훈군의 장수 왕홍립(王弘立)이 호주(濠州, 현 안후이성 추저우 시)에서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와서 성 안으로 쇄도해 들어왔다.[1] 안개 속에서 보이지 않는 시야를 틈타 정부군을 습격했고, 대가사는 서주 정예병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1] 결국 3만 명의 정부군은 전멸하였고, 수백 명만이 살아남아 전장을 이탈하였다.[1] 대가사도 단기필마로 탈출하다가 어지러운 싸움 속에서 죽고 말았다.[1]
이처럼 첫 전투의 승리로 전세는 방훈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1] 그러나 방훈은 무녕군 절도사의 자리에 미련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의 고위 관료로부터 절도사가 될 수 있도록 힘써 보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으면 전투를 중지해 버리기 일쑤였다.[1] 결국 방훈은 기선을 제압할 절호의 기회를 완전히 놓쳐 버렸고, 자신은 천하무적이라고 자랑하면서 과도한 향락에 빠져들기 시작했다.[1] 그 사이에 정부군은 송주(宋州, 현 허난성 상추 시)에 군세를 집결시켰다.[1]
4. 반란의 실패와 종말
방훈의 난은 정부 전복이 아닌 사치스러운 생활을 추구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반란군은 빠르게 타락했다. 병사들은 강제 징집되었고, 물자는 호족과 부호들로부터 약탈당했으며, 재산을 숨긴 자는 일족이 몰살당하는 상황이었다. 최언증의 가혹한 정치에서 벗어나고자 반란에 참여했던 호족 이연 등은 이에 실망하여 잇따라 이탈했다. 강승훈은 투항을 유도하는 작전을 펼쳐, 전투 없이도 반란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사면초가에 빠진 방훈은 승려에게 시주하거나 신에게 의지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1]
869년 9월, 방훈은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석산에서 서쪽으로 이동했지만, 강승훈이 이끄는 8만 명의 보병과 기병에게 추격당했다. 송주의 남성을 점령하기도 했지만, 곧 쫓겨났고, 변하를 건너 주야적심(이극용의 아버지)이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았다. 반란군은 제수를 건너 도망치려 했으나, 이연이 다리를 끊고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도망칠 곳을 잃은 반란군은 궤멸되었고, 방훈도 혼란 속에서 사망했다. 이로써 방훈의 난은 허무하게 끝났다.[1]
4. 1. 방훈군의 약점과 내분
방훈이 반란을 일으킨 궁극적인 목적은 정부 전복이 아니라, 단지 스스로 호화로운 생활을 추구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에, 이념은 전혀 없었다. 이 때문에 현지 주민들 중 남자들을 강제 연행하여 군대에 편입시키고, 호족이나 부호들로부터 물자를 전부 약탈했다. 특히 남자 한 명이라도 숨기거나 재물을 조금이라도 숨겨놓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물론이고 일족들을 전원 몰살시킬 정도였다.[1]최언증의 학정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방훈의 지배가 최언증보다 너무 심한 상황에 이르자, 이에 실망한 많은 사람들이 배반하였다. 기현(蘄縣, 현 안후이성 쑤저우 시 융차오 구)의 토호(土豪)인 이연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1]
방훈군 내부에서도 점차 분열이 시작되었다. 방훈군의 장수 중 한 사람인 맹경문(孟敬文)은 방훈을 배반하고 정부군 측에 투항하려다가 서주에서 방훈에게 살해되기도 하였다. 강승훈도 투항을 받아들이는 작전을 채용하면서 방훈군은 싸워 보지도 않고 소멸해 가고 있었다. 사면초가인 상황에서는 아무런 조치조차 취할 수도 없었고, 단지 승려에게 시주를 하거나 소원을 비는 것 정도 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방훈군의 세력은 급속도로 약체화되기 시작하였다.[1]
설상가상으로, 방훈이 파견한 숙주(宿州, 현 안후이성 쑤저우 시)의 수장(守將) 장현임(張玄稔) 등이 방훈을 배신하고 정부군 측에 항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처럼 정부군에 투항하는 배신자들이 속출하면서, 방훈군은 숙주와 서주에서 정부군에게 잇달아 패배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방훈군의 본거지인 서주 팽성이 정부군에게 함락되어 방훈군의 핵심 장병(즉, 계주에서 국경 경비를 서고 있다가 반란을 일으킨 서주의 교병들)들의 친족들과 관련자 수천 명이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로써 정세는 마침내 승패가 결정되고 말았다.[1]
4. 2. 정부군의 반격과 방훈의 최후
방훈이 반란을 일으킨 궁극적인 목적은 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스스로 호화로운 생활을 추구하려는 데 있었다. 이 때문에 현지 주민들 중 남자들을 강제 연행하여 군대에 편입시키고, 호족이나 부호들로부터 물자를 전부 약탈했다. 특히 남자 한 명이라도 숨기거나 재물을 조금이라도 숨겨놓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물론이고 일족들을 전원 몰살시킬 정도였다.[1] 방훈군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은 최언증의 학정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는데도 방훈의 지배가 최언증보다 너무 심한 상황에 이르자, 이에 실망하여 배반하였다. 안후이성 쑤저우 시 기현(蘄縣)의 토호(土豪)인 이연(李兗)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1]방훈군 내부에서도 점차 분열이 시작되었다. 방훈군의 장수 중 한 사람인 맹경문(孟敬文)은 방훈을 배반하고 정부군 측에 투항하려다가 서주에서 방훈에 의해 살해되기까지 하였다. 강승훈도 투항을 받아들이는 작전을 채용하면서 방훈군은 싸워 보지도 않고 소멸해 가고 있었다. 사면초가인 상황에서는 아무런 조치조차 취할 수도 없었고, 단지 승려에게 시주를 하거나 소원을 비는 것 정도 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방훈군의 세력은 급속도로 약체화되기 시작하였다.[1]
설상가상으로, 방훈이 파견한 숙주(宿州, 현 안후이성 쑤저우 시)의 수장(守將) 장현임(張玄稔) 등이 방훈을 배신하고 정부군 측에 항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처럼 정부군에 투항하는 배신자들의 속출로, 방훈군은 숙주와 서주에서 정부군에게 잇달아 패배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방훈군의 본거지인 서주 팽성이 정부군에게 함락되어 방훈군의 핵심 장병(즉, 계주에서 국경 경비를 서고 있다가 반란을 일으킨 서주의 교병들)들의 친족들과 관련자 수천 명이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로써 정세는 마침내 승패가 결정되고 말았다.[1]
869년 9월, 방훈은 서주에서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석산(石山)으로부터 서쪽으로 철수하였으나 강승훈이 이끄는 보기(步騎, 보병과 기병) 8만 명의 정부군에 쫓기게 되었고, 정부군은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방훈의 주력부대는 송주 남성(南城)을 습격하여 일단 그곳을 점령하였으나, 거기서도 쫓기다가 변수를 건너 남쪽의 박주(亳州, 현 안후이성 보저우 시)에 이르러서 정부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사타족의 추장 주야적심이 수천 명의 기마군단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방훈을 박주에서 추격하였다.[1]
결국 방훈은 사타족 기마군단의 적수가 되지 못해 대패하였고 기현으로 퇴각하여 환수(渙水)를 건너 달아나려고 했으나, 항장(降將) 이연이 도하하는 다리를 끊어 파괴해 버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달아날 곳을 잃은 방훈군은 정부군의 공격을 받고 괴멸되었고, 방훈도 어지러운 싸움 속에서 살해되었다. 살아서 탈출한 자들은 겨우 1천여 명뿐이었다. 반란은 1년 만에 평정되었고, 이렇게 해서 방훈의 난은 마침내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1]
5. 방훈의 난에 참가한 주요 인물
이 두 사람은 반란 후반기에 당나라 정부군에 투항했고, 이후 당나라 조정에서 절도사를 역임했다.
6. 역사적 평가와 의의
방훈의 난은 말기 당나라에서 발생한 장병들의 반란 중 하나로, 단순한 사치와 욕구 충족이라는 자포자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1]
서주를 중심으로 한 무녕번진의 교병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절도사를 몰아내고, 새로운 절도사를 옹립하는 등 권력을 남용했다. 이는 당시 절도사들이 장병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급급했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1]
방훈은 최언증의 가혹한 정치에 불만을 품은 민중과 호족들의 지지를 얻어 난을 일으켰지만, 결국 자신의 욕심과 반란군의 타락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민중의 지지를 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지도자의 자질과 도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1]
강승훈이 이끄는 관군은 사타족 등 이민족의 힘을 빌려 반란을 진압했는데, 이는 당시 당나라의 군사력이 약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외세의 힘을 빌려 내부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점을 보여준다.[1]
결론적으로, 방훈의 난은 당나라 말기의 사회적, 정치적 혼란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으로, 권력 남용, 민중의 불만, 지도자의 자질, 외세 의존 등 다양한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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