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구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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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구녀관은 1887년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의 지원을 받아 메리 스크랜튼에 의해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 병원이다. 여성 진료를 위해 이화학당 근처에 설립되었으며, 초대 원장 메타 하워드가 진료를 시작한 10월 31일을 개원일로 기념한다. 초기에는 여성과 어린이를 주로 진료했으며, 의료 선교와 의학 교육을 병행했다. 1912년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과 통합되어 동대문 부인병원으로 발전했으며,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으로 이어져 한국 여성 의료의 발전에 기여했다.
조선 말기, 유교적 내외법(內外法)의 영향으로 여성들은 남성 의사에게 몸을 보이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사회 분위기가 강했다. 이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아프더라도 제대로 된 진료를 받기 어려웠으며, 간단한 질병조차 치료받지 못해 고통받거나 심지어 사망에 이르는 안타까운 경우가 많았다.[1]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WFMS)의 후원으로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은 당시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기를 꺼렸던 여성들을 위해 병원 설립을 추진했다. 이는 이화학당 설립에 이은 또 다른 중요한 사업이었다.
2. 설립 배경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화기 조선에 파견된 서양 선교사들은 의료 환경의 개선, 특히 소외된 여성들을 위한 의료 서비스 제공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WFMS)의 지원으로 입국한 메리 스크랜튼 여사는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화학당을 설립한 데 이어, 여성들이 남성 의사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치료받을 수 있는 여성 전문 병원의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1] 이는 당시 조선 여성들이 처한 의료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중요한 발걸음이었다.
2. 1. 설립 주체
보구녀관(普救女館)은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Wome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Methodist Episcopal Church|eng, WFMS)의 후원으로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1832~1909) 여사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병원이다.[1] 1886년 한국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튼 여사는 남성 의사에게 직접 진료받기를 꺼렸던 당시 여성들에게 의료를 제공하고자 이화학당 근처에 보구녀관 설립을 주도하였다.[1] 초대 원장 메타 하워드(Meta Howard, 1862~1930) 여의사가 진료를 시작한 1887년 10월 31일을 설립일로 삼고 있으며, 이 날은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의 설립 기념일이다.[1]
3. 초기 역사 (1887-1912)
1887년 10월 31일, 초대 원장 메타 하워드 여의사가 정동의 한옥 건물에서 진료를 시작하며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병원인 보구녀관(普救女館)이 문을 열었다. 이 날은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의 설립 기념일로 이어지고 있다. 하워드 원장은 많은 환자를 돌보았으나, 과중한 업무로 인해 2년 만에 귀국했다.
1890년 10월 후임으로 부임한 로제타 셔우드 홀 여의사는 환자 진료뿐 아니라 이화학당 학생들을 대상으로 의학 교육을 실시하여 의료 인력 양성에도 힘썼다. 또한, 병원 내에서 기독교 선교 활동도 병행되었다.
병원의 이름인 '''보구녀관(普救女館)'''은 '널리 여성을 구하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1] 보구녀관은 1912년 릴리언 해리스 메모리얼 병원(동대문 부인병원)과 통합되기 전까지 한국 여성 의료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다.
3. 1. 설립과 운영
보구녀관(普救女館)은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WFMS)의 후원으로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여사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병원이다. 1886년 한국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튼 여사는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기를 꺼렸던 당시 여성들을 위해 학당 근처에 병원 설립을 추진했다.
설립일은 초대 원장 메타 하워드(Meta Howard) 여의사가 진료를 시작한 1887년 10월 31일이다. 이 날은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의 설립 기념일로 이어지고 있다.
병원 위치는 현재 정동제일교회 100주년 기념 예배당이 있는 정동 33번지로 추정된다. 이곳은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가 스크랜튼 여사를 통해 구입한 부지의 일부(구 주소 정동 32-1번지)였다. 스크랜튼 여사는 이 부지에 이화학당을 짓고, 아들인 스크랜튼 의사는 바로 옆에 시병원(施病院)을 세웠다. 보구녀관은 시병원과 인접한 곳의 한옥 한 채를 사들여 개조한 건물이었다. 전통 한옥의 사랑채를 고쳐 대기실, 진료실, 수술실, 약제실 등을 갖추었으며, 이 구조는 원장이 바뀌어도 유지되었다.
환자는 대부분 여성이었고, 때로는 어머니가 데려온 어린이 환자도 있었다. 진료비는 기본적으로 무료였으나, 형편이 되는 환자에게는 약값을 받았다. 입원 환자 중 약 1/4은 약값 외에 입원 기간 동안 먹을 식량을 가져오거나 간병할 가족과 함께 오기도 하였다.
초대 원장 하워드 의사는 진료 시작 후 첫 10개월 동안 1,127건, 다음 10개월 동안 1,423건의 진료를 보았다. 이는 주말을 제외하면 하루 평균 6~7명의 환자를 돌본 셈으로, 왕진 등 다른 업무까지 고려하면 의사 한 명에게는 매우 많은 업무량이었다. 결국 하워드 의사는 과로로 건강이 나빠져 2년 만에 귀국했다. 후임으로는 1890년 10월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여의사가 부임했으며, 그녀 역시 하루에 약 10명의 환자를 돌보는 등 과중한 업무를 감당했다.
3. 2. 의료 활동
여성병원으로서 보구녀관의 환자는 대부분 여성이었으며, 때로는 어머니가 데려온 어린이도 진료했다. 진료비는 기본적으로 무료였으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환자에게는 약값을 받았다. 입원 환자 중 약 4분의 1은 약값 외에 입원 기간 동안 먹을 식량을 직접 가져오기도 했고, 간병을 위해 가족이 함께 오기도 했다.
초대 원장인 하워드 의사는 진료 시작 후 첫 10개월 동안 1,127건, 다음 10개월 동안 1,423건의 환자를 돌보았다. 이는 주말을 제외하면 하루 평균 6~7명의 환자를 진료한 것으로, 왕진 등 다른 업무까지 고려하면 의사 한 명에게는 매우 많은 업무량이었다. 결국 하워드 의사는 과로로 건강이 나빠져 2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후임으로는 1890년 10월 로제타 셔우드 홀 여의사가 부임했다. 로제타 홀 의사 역시 하루에 약 10명의 환자를 돌보는 등 많은 업무를 감당했다.
보구녀관에서는 환자 진료 외에도 의료 선교와 의학 교육 활동을 병행했다. 매일 예배와 성경 공부 시간을 마련하여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로제타 홀 의사는 의학 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녀는 이화학당 학생 5명(김점동 포함)을 선발하여 '의료보조훈련반'(Medical Training Classeng)을 조직하고 직접 의학 과목을 가르쳤다. 이 중 김점동(결혼 후 박에스더)은 로제타 홀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는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3. 3. 명칭 논란
현대에 이르러 많은 사례에서 보구녀관을 '보구여관', '保救女館'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오기이며, 역사적인 맥락을 짚어볼 때 '''보구녀관(普救女館)'''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
‘보구녀관’이라는 명칭은 1888년 12월 스크랜튼 여사의 요청으로 당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선녀보구원(善女普救院)’이라는 편호를 내려준 데서 유래했다. ‘선녀보구원’은 이후 유사한 의미인 '''보구녀관(普救女館)'''이 되었으며, 영어로는 House for Many Sick Womeneng, 음차로는 Po Goo Nyo Goaneng이라 불렀다. 이는 '普救女(널리 여성을 구하는)'와 '館(집)'이 결합된 조어 방식으로, '여관'이라는 표기는 틀리며 영어 발음에서도 'Nyo Goan'임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한편,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는 표기는 『동아일보』 1926년 10월 17일자 기사 「삼대 여성이 본 문화반세기」에 처음 등장하였다. 영어 음차 표기, 조어 방식, 그리고 그 이전의 각종 사료에서 모두 '''보구녀관(普救女館)'''으로 표기했던 사실들을 고려할 때, 이는 한글과 한자 모두 잘못 표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화여자대학교 이화뉴스를 통해 이대서울병원 준공과 보구녀관 복원 소식을 전할 때에도 해당 복원물의 명칭을 '''보구녀관'''으로 명확히 밝히고 있다.[1]
4. 발전과 통합 (1912-현재)
1912년, 동대문에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동대문 부인병원)이 새로 건립되면서 정동에 있던 보구녀관은 이 병원과 통합되었다. 이로써 보구녀관은 독립적인 의료 기관으로서의 운영을 마치고, 그 기능과 역할은 동대문 부인병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4. 1. 볼드윈진료소와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
1893년 3월 중순, 볼드윈 부인(Lucinda B. Baldwin)의 기부금으로 동대문에 볼드윈진료소가 설립되어 정식 진료를 시작하였다. 이로써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는 서울에서 보구녀관과 볼드윈진료소 두 곳의 진료소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후 릴리안 해리스 의사가 한국에 도착하면서 볼드윈진료소는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입원 병실 부족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새로운 병원 건물 건립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이에 따라 1908년부터 새 병원 공사가 시작되었고, 1912년에 건물이 준공되었다. 새 병원이 완공되면서 볼드윈진료소는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동대문 부인병원)’으로 확장, 개편되었으며, 정동에 있던 보구녀관은 동대문 부인병원과 합병되었다.4. 2. 통합과 변화
1893년 3월 중순, 볼드윈 부인(Lucinda B. Baldwin)의 기부금으로 동대문에 볼드윈진료소가 세워져 진료를 시작했다. 이로써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는 서울에서 보구녀관과 볼드윈진료소 두 곳을 운영하게 되었다. 릴리안 해리스 의사가 한국에 도착하면서 볼드윈진료소 운영이 본격화되었고, 입원 병실 부족으로 새 병원 건립 요구가 커졌다. 1908년 공사를 시작하여 1912년 새 병원 건물이 완공되면서 볼드윈진료소는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동대문 부인병원)'으로 바뀌었고, 정동에 있던 보구녀관은 이 병원과 합병되었다.보구녀관의 마지막 담당 의사였던 힐만이 1914년에 귀국한 후, 영문 잡지나 한국 사료에서는 보구녀관이 계속 운영되었다는 기록을 찾기 어렵다. 보구녀관 건물은 이후 이화학당 건물로 사용되다가 1921년에 헐리고 그 자리에 에드가 후퍼 기념 유치원(이화유치원)이 세워졌다. 1958년 이화유치원이 신촌으로 옮겨가자 젠슨 부인(M.K. Jensen, 1904~1998)이 이 건물을 사들여 정동교회에 기부했고, 정동교회는 1960년에 건물을 헐고 젠슨 기념관을 새로 지어 부속 건물로 사용했다. 1979년 정동제일교회가 '100주년 기념 예배당'을 지으면서 이 젠슨 기념관 건물도 철거되었다.
5. 역대 보구녀관 담당 의사
1897.11.16. - 1898.4.
(Rosetta Sherwood→Rosetta S. H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