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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아손 부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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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아손 부파반은 라오스의 정치인으로,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라오스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유학하여 정치학 학위를 받았으며, 라오 인민 혁명당에서 주요 직책을 두루 거쳤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시장 경제 도입을 추진했으나, 2010년 사임했다. 사임 후 당에서 물러났지만, 경제 개발 전략·계획 연구반장에 취임하며 정치적 재기 가능성을 보였다. 그는 테크노크라트로서 실무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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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아손 부파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10년 부아손
원어 이름ບົວສອນ ບຸບຜາວັນ
로마자 표기Bouasone Bouphavanh
직책
제5대 라오스 인민민주공화국 총리임기 시작: 2006년 6월 8일
임기 종료: 2010년 12월 23일
국가 주석: 춤말리 사야손
이전: 분냥 보라치트
이후: 통싱 탐마봉
부총리임기 시작: 2003년 10월 1일
임기 종료: 2006년 6월 8일
국가 주석: 캄타이 시판돈
개인 정보
출생일1954년 6월 3일
출생지살라반 주 반 타오 푼, 라오스 왕국
소속 정당라오스 인민혁명당
배우자솜리 부파반
학력 및 경력
출신 학교소련 사회과학 아카데미
명예 박사센슈 대학 (2009년) 뉴스

2. 생애 및 경력

부아손 부파반은 라오스의 정치인으로, 젊은 시절 혁명 운동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라오스 인민 혁명당의 주요 간부를 거쳐 라오스의 총리직을 역임했다. 그의 생애와 정치 경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라오스 남부의 살라완 주에서 태어났다. 1962년부터 1974년까지 살라반 주와 참파삭 주에 있는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라오스 내전 말기인 1974년부터 혁명 운동에 참여했으며, 이 때문에 이른바 "혁명 3세대"로 분류된다.[3] 1975년, 비엔티안이 파테트 라오에 함락되기 직전에는 이전 정권에 대한 항의 시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학생 운동가였다.

1985년부터 1990년까지 소련 모스크바에 있는 공산당 연구소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1986년부터 1990년까지는 모스크바의 소련 사회과학 아카데미에 유학하여 정치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4]

2. 2. 정치 입문

라오스 내전 말기인 1974년부터 혁명 운동에 참여하여 이른바 "혁명 3세대"로 분류된다.[3] 1975년 비엔티안이 파테트 라오에 함락되기 직전에는 학생 운동가로서 이전 정권에 대한 항의 시위를 이끄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75년 12월 라오스 인민 민주 공화국 건국 후에는 참파삭 주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1980년 4월 9일 라오스 인민 혁명당에 입당했으며, 전 당 지도자 캄타이 시판돈의 후계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듬해인 1981년부터 1986년까지 당 중앙위원회 사무국에서 근무했다. 이후 1986년부터 1990년까지 소련 모스크바의 사회과학 아카데미(공산당 연구소)에서 유학하며 정치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4] 귀국 후 다시 당 중앙위원회 사무국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2. 3. 정치 경력

라오스 내전 말기인 1974년부터 혁명 운동에 참여하여, 이른바 "혁명 3세대"에 속한다[3]. 1975년 비엔티안이 파테트 라오에 함락되기 직전에는 이전 정권에 대한 항의 시위를 주도한 학생 운동가였으며, 당시 전 당 지도자 캄타이 시판돈의 후계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1975년 12월 라오스 인민 민주 공화국 건국 후에는 참파삭 주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1980년 4월 9일 라오 인민 혁명당에 입당했으며, 이듬해인 1981년부터 1986년까지 당 중앙위원회 사무국에서 근무했다. 1990년 소련 유학[4]을 마치고 귀국한 후 다시 당 중앙위원회 사무국에서 일했다.

1994년에는 총리 부속 부부 장관에 취임했다. 1996년 3월에 열린 제6차 당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당시 서열 40위), 중앙위원회 사무국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제9차 당 대회까지 중앙위원직을 유지했다. 당시 최고 지도자 캄타이 시판돈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2001년 3월 제7차 당 대회에서는 당내 서열 11위로 급상승하며 당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고, 중앙위원회 사무국장에도 재임명되었다. 2003년 10월 1일, 제5기 국민 의회 제4차 회의에서 부총리로 임명되면서 혁명 3세대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2006년 3월 제8차 당 대회에서는 당 정치국원으로 재선출되어 당내 서열 7위가 되었다. 이 대회에서 혁명 1세대 마지막 대표자인 캄타이 당 의장이 은퇴하면서 지도부의 세대 교체가 이루어졌고, 부아손은 당 서기장으로 임명된 2세대 춤말리 사이냐손과 함께 새로운 지도부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같은 해 4월 제6기 국민 의회 의원 총선거에서 비엔티안 특별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6년 6월 8일, 제6기 국민 의회 제1차 회의에서 춤말리가 국가 주석으로 선출되자, 부아손은 총리로 임명되었다. 취임 직후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새 정부는 행동적이며, 시민에 대해 책임을 진다"고 밝혔다[5].

2009년 11월, 하토야마 유키오 당시 일본 총리 등과 함께한 부아손 부파반(오른쪽에서 두 번째)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외국으로부터의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등 시장 경제 도입을 추진했다. 또한 2007년 5월 실무 방문을 시작으로, 2009년 5월과 2010년 5월 니혼게이자이 신문사 주최 "아시아의 미래" 포럼 참석, 2009년 11월 일본·메콩 정상 회의 참석 등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하여 양국 간 우호 관계 강화에 힘썼다.

그러나 2010년 12월 23일, 제6기 국민 의회 제10차 회의 폐회식에서 갑작스럽게 총리직 사임을 발표했다. 표면적인 사임 이유는 "가정 사정"이었으나[6][7], 라오스 정부 관계자는 "부아손이 라오스 법률을 위반하는 행위를 저질러 스스로 사임을 신청했다"고 언급했다[8]. 또한, 당내 보수파가 그의 빠른 경제 개혁 속도에 비판적이었으며, 여성 문제나 건강 문제 등도 거론되며 사임 압박을 받았다는 시각도 있다.

2011년 3월 제9차 당 대회에서는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지 못하고 정치국원에서도 물러났다[9]. 하지만 2013년 2월 14일, 당 서기국 결의에 따라 경제 개발 전략·계획 연구반이 설치되자 그 책임자로 임명되었다[10]. 이 연구반은 "향후 국가 방침과 목표를 정하는 중요한 기관"으로 여겨져, 그의 정치적 복귀 가능성을 시사하는 인사로 분석되기도 했다[10].

2. 4. 라오스 총리 재임 (2006-2010)

2006년 3월 라오스 인민 혁명당 제8차 당 대회에서 당 정치국원으로 재선출되어 당내 서열 7위가 되었다. 이 당 대회에서는 혁명 1세대 마지막 대표자인 캄타이 시판돈 당 의장이 은퇴하며 지도부의 세대 교체가 이루어졌다. 부아손은 당 서기장으로 선출된 2세대 춤말리 사이냐손과 함께 새 지도부의 핵심이 되었다. 같은 해 4월 제6기 국민 의회 의원 총선거에서 비엔티안 특별시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2006년 6월 8일, 제6기 국민 의회 제1차 회의에서 춤말리가 국가 주석으로 선출되었고, 부아손은 총리로 임명되었다. 취임 직후, 부아손은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새 정부는 행동적이며, 시민에 대해 책임을 진다"라고 표명하며 적극적인 국정 운영 의지를 보였다.[5]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부아손은 외국으로부터의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등 시장 경제 도입을 추진했다. 외교적으로는 특히 일본과의 관계 강화에 힘썼다. 2007년 5월 실무 방문 빈객으로 일본을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2009년 11월에는 당시 일본 총리였던 하토야마 유키오와의 일본·메콩 정상 회의 참석을 위해, 그리고 니혼게이자이 신문사 주최 "아시아의 미래" 포럼 참석을 위해 2009년 5월과 2010년 5월에도 일본을 방문했다.

그러나 2010년 12월 23일, 제6기 국민 의회 제10차 회의 폐회식에서 갑작스럽게 총리직 사임을 발표했다. 공식적인 사임 이유는 "가정 사정"으로 발표되었지만[6][7], 라오스 정부 관계자는 그가 라오스 법률을 위반하는 행위를 저질러 스스로 사임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8] 또한, 부아손의 빠른 경제 개혁 속도에 대해 당내 보수파의 비판이 강해졌고, 이들이 부아손의 여성 문제나 건강 문제 등을 거론하며 사임을 압박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2. 5. 총리직 사임

2010년 12월 23일, 제6기 국민 의회 제10차 회의 폐회식에서 갑작스럽게 총리직을 사임했다. 공식적인 사임 이유는 "가정 사정"으로 발표되었으나[6][7], 실제로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라오스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부아손이 라오스 법률을 위반하는 행위를 저질러 스스로 사임했다고 한다[8]. 또한, 이전부터 당 내 보수파는 부아손이 추진하는 시장 경제 도입 등 경제 개혁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비판을 강화했으며, 그의 여성 문제나 건강 문제 등도 거론하며 사임을 압박했다는 분석도 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2011년 3월에 열린 제9차 당 대회에서는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지 못했고, 정치국 위원에서도 제외되었다[9]. 이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2013년 2월 14일, 당 서기국 결의에 따라 신설된 경제 개발 전략·계획 연구반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10]. 이 연구반은 향후 국가 방침과 목표를 정하는 중요한 기관으로 여겨졌으며, 이 인사를 통해 부아손이 다시 정치적으로 복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왔다[10].

2. 6. 사임 이후

2011년 3월의 제9차 당 대회에서는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지 못했고, 정치국원에서도 물러났다[9]

그러나, 2013년 2월 14일 당 서기국 제31호 결의 공포에 따라 경제 개발 전략·계획 연구반이 설치되자, 해당 연구반장에 취임했다[10] 이 연구반은 "향후 국가 방침과 목표를 정하는 중요한 기관"으로 평가되며, 이 인사는 부아손의 정치적 복귀를 위한 발판이라는 분석도 있다[10]

3. 정치적 입장 및 평가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을 피해 생략)

3. 1. 정치적 입장

수상 취임 이전부터 테크노크라트로서 실무 능력이 높이 평가받았다. 또한 원칙과 윤리적 가치를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보수적인 성향으로 여겨진다. 부아손이 이끈 정부는 '전문가'를 다수 포함하여 성과, 효율, 팀워크를 지향했으며, 더 나은 통치를 목표로 삼았다[11].

3. 2. 평가

수상 취임 이전부터 테크노크라트로서 실무 능력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부아손은 원칙과 윤리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각에서는 보수적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가 이끄는 정부는 '전문가'가 많다는 특징을 가지며, 성과, 효율, 팀워크를 지향하고 더 나은 통치를 목표로 삼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11]

4. 가족 관계

부아손 부파반은 사무 리 부인과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참조

[1] 웹사이트 Family problems • Inside Story https://insidestory.[...] 2011-01-19
[2] 뉴스 ラオスのブアゾーン首相に名誉博士称号贈る https://www.senshu-u[...] 2021-09-14
[3] 문서 山田(2002年3月)によるラオス人民革命党中央委員会の分類では、第一世代は1930年代・1940年代、第二世代は1950年代、第三世代は1960年代以降に革命闘争に参加した世代で、革命闘争に参加しなかった世代は第四世代に分けられる。
[4] 문서 日本国外務省のホームページやヴォーラペット(2010年)168ページより。山田(2002年3月)137ページによると、この留学で博士号を収得したという。
[5] 문서 ヴォーラペット(2010年)、184ページ。
[6] 뉴스 ラオス首相が辞任、後任に国民議会議長 https://web.archive.[...] 読売新聞 2010-12-23
[7] 간행물 Assembly approves new PM http://www.na.gov.la[...] The National Assembly of the Lao PDR 2010-12-24
[8] 뉴스 ラオス 首相が任期途中で辞任 http://www3.nhk.or.j[...] 日本放送協会 2010-12-24
[9] 간행물 Lao communists vote to keep party chief http://news.malaysia[...] malaysia.msn.com 2011-03-21
[10] 문서 山田(2014年)、283ページ。
[11] 문서 ヴォーラペット(2010年)、182ペー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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