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토야마 유키오
1. 개요
하토야마 유키오는 일본의 저명한 정치 명문가 출신으로, 증조부와 조부가 중의원 의장과 총리를 역임했다. 도쿄대 공대를 졸업하고 스탠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정계에 입문하여, 자민당, 신당 사키가케, 민주당을 거치며 당 대표를 역임했다. 2009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하며 총리로 지명되었으나, 정치자금 문제와 미군 기지 이전 문제 등으로 지지율이 하락하여 2010년 사임했다. 총리 퇴임 후에는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중국과 한국과의 외교에 힘썼으며, 공화당을 창당하여 정계 복귀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조부의 '우애' 사상에 기반하며, 자유주의 정치를 주장했다.
| 이름 | 하토야마 유키오 |
|---|---|
| 본명 | 하토야마 유키오 (鳩山 由紀夫) |
| 로마자 표기 | Hatoyama Yukio |
| 출생일 | 1947년 2월 11일 |
| 출생지 | 일본 도쿄도 분쿄구 |
| 국적 | 일본 |
| 배우자 | 하토야마 미유키 |
| 자녀 | 하토야마 기이치로 |
| 부모 | 하토야마 이이치로, 하토야마 야스코 |
| 친척 | 하토야마 가문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
| 대학교 | 도쿄대학 공학부 계수공학과 졸업 |
|---|---|
| 대학원 | 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 수료 |
| 학위 | 철학 박사 (Ph.D.) |
| 전직 | 센슈 대학 경영학부 조교수 |
|---|---|
| 현직 | 동아시아공동체연구소 이사장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국제자문위원회 위원 카이푸 에너지 그룹 명예회장 겸 수석 고문 |
| 명예 교수 | 시안 교통대학교 명예교수 |
| 정당 이력 | 자유민주당 (1993년 이전) 신당 사키가케 (1993년–1996년) 민주당 (1996년–1998년) 민주당 (1998년–2012년) 무소속 (2012년–2020년) 공화당 (2020년–2022년) 무소속 |
|---|
| 국회의원 | 중의원 의원 (8선) |
|---|---|
| 선거구 | 홋카이도 4구 (1986년–1996년) 홋카이도 9구 (1996년–2012년) |
| 당선 횟수 | 8회 |
| 의원 임기 시작 | 1986년 6월 23일 |
| 의원 임기 종료 | 2012년 12월 16일 |
| 득표율 | 122,345표 (40.2%) (2009년) |
| 내각 관방 부장관 | 호소카와 내각 |
| 내각 관방 부장관 임기 시작 | 1993년 8월 9일 |
| 내각 관방 부장관 임기 종료 | 1994년 4월 28일 |
| 민주당 대표 | 제2대, 7대 |
| 민주당 대표 임기 시작 | 1999년 9월 25일 |
| 민주당 대표 임기 종료 | 2002년 12월 10일 |
| 민주당 대표 임기 시작 | 2009년 5월 16일 |
| 민주당 대표 임기 종료 | 2010년 6월 4일 |
| 총리 | 제93대 내각총리대신 |
| 총리 임기 시작 | 2009년 9월 16일 |
| 총리 임기 종료 | 2010년 6월 8일 |
| 천황 | 아키히토 |
| 총리 후임 | 간 나오토 |
| 총리 전임 | 아소 다로 |
| 수상 | 정치학 명예 박사 (부산대학교, 20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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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 | 하토야마 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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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침례교도 -
쿠메 사유리
일본의 싱어송라이터이자 음악 선교사인 쿠메 사유리는 1979년 '쿠보타 사키'라는 예명으로 데뷔하여 '이방인'으로 큰 인기를 얻었으나, 1984년 결혼 후 연예계를 은퇴하고 본명으로 교회 음악과 예술을 융합한 활동을 하고 있다. -
일본의 산업공학자 -
신고 시게오
신고 시게오는 도요타 생산 방식 발전에 기여한 일본의 산업공학 전문가이자 경영 컨설턴트로, SMED 시스템과 포카요케 개념을 개발하여 생산성 및 품질 향상에 기여했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 신고상은 린 생산 방식과 운영 우수성을 장려하는 상이다. -
일본의 산업공학자 -
도요다 에이지
도요다 에이지는 도요타 자동차의 사장과 회장을 역임하며 도요타 생산 방식 확립, 품질 경영, 렉서스 출시 등을 통해 도요타 자동차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일본의 기업인이다. -
브리지스톤 사람 -
하토야마 야스코
브리지스톤 창업주 이시바시 쇼지로의 장녀이자 하토야마 가문의 일원인 하토야마 야스코는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두 아들의 정치 활동을 지원했으며, 특히 민주당 창당 시 기부하며 "대모"라는 별칭을 얻었다. -
브리지스톤 사람 -
하토야마 구니오
하토야마 구니오는 1948년 도쿄에서 태어나 자유민주당 등에서 활동하며 중의원 의원을 지냈고, 아베 신조 내각에서 법무대신, 아소 다로 내각에서 총무대신을 역임했으며, 2016년 사망했다.
2. 생애
하토야마 유키오는 1947년 도쿄도 분쿄구에서 태어났다. 하토야마 가문은 미국의 케네디 가문에 비견될 정도로 저명한 일본 정치 명문가이다. 그의 외증조모 하토야마 하루코는 교리쓰 여자대학의 공동 설립자였다. 할아버지 하토야마 이치로는 총리를 역임했으며, 1956년 자유민주당의 창립자이자 초대 당수였다. 이치로는 총리로서 소련과의 수교를 회복하여 일본의 국제연합 가입의 길을 열었다.
아버지 하토야마 이이치로는 외무대신을 역임했으며, 어머니 하토야마 야스코는 브리지스톤 창업자 이시바시 쇼지로의 딸이다. 하토야마 야스코는 두 아들의 정치적 야망에 재정적으로 기여하여 일본 정계에서 "대모"로 알려져 있다. 1996년 구니오와 유키오가 구 민주당을 공동 창당할 때, 하토야마 야스코는 수십억 엔을 기부하여 신생 정당 설립을 도왔다.
남동생 하토야마 구니오는 아소 다로 내각에서 총무대신을 역임했다.
하토야마 유키오는 1969년 도쿄 대학 공학부를 졸업하고, 1976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산업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탠퍼드 유학 중 일본 식당에서 일하던 미유키를 만나 1975년 결혼했다. 아들 하토야마 기이치로는 도쿄 대학 도시공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방문 연구원으로 재직했으며, 2024년 총선에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하토야마 유키오는 도쿄 공업대학 조교수(1976~1981), 센슈 대학 부교수(1981~1984)를 역임했다.
2.1. 정계 입문 전
도쿄도 고이시카와구(현 분쿄구)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하토야마 가즈오는 중의원 의장을 지냈고,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는 1950년대에 총리를 지냈으며, 초대 자유민주당 당수를 역임했다. 외조부 이시바시 쇼지로는 브리지스톤 창업자다. 부친 하토야마 이이치로는 참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1970년대에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동생 하토야마 구니오는 여러 부처의 장관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도쿄 대학 공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공과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도쿄 공업대학, 센슈 대학에서 경영학 조교수로 재직하다 1984년 정계 입문을 위해 퇴직했다.
2.2. 정계 입문 및 민주당 창당
1986년 자민당에 입당하여 다나카파의 신인으로서 중의원 선거에 홋카이도를 지역구로 출마해 득표율 2위로 당선되었다. 1988년에는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라는 초파벌적 정치집단을 결성, 리쿠르트 뇌물수수 사건 등의 당내 비리를 폭로하였고, 이 집단은 신당 사키가케로 이어졌다.
1993년 자민당을 탈당하고 신당 사키가케에 참여하였고, 호소카와 내각에서는 내각 관방 정무부장관을 담당하였다. 이후 성립된 자사사 연립 정권 하에서는 사키가케의 간사장을 맡았다. 1996년에는 사키가케를 일신하여 새로이 창당하고자 하였으나 실패, 그 해 간 나오토, 동생 구니오 등과 함께 구 민주당에 참여했고, 1998년 개편된 민주당 결성에 참여하여 간사장을 맡았다.
하토야마와 그의 동생 구니오는 어머니 야스코의 수십억 엔 기부금을 사용하여 당을 공동으로 창당했다. 구니오는 결국 당이 초기 중도적 기반에서 좌편향되었다고 판단하여 민주당을 탈당하고 자민당에 복귀했다. 유키오는 1998년 다른 여러 야당과의 합병 과정에서도 당에 남았다.
2.3. 민주당 대표 및 총리 취임
하토야마는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민주당 대표 및 야당 대표를 역임했으며, 오자와 이치로의 당시 자유당과의 합병설을 둘러싼 혼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그는 민주당 사무총장을 역임한 후 2009년 5월 11일 오자와의 사임에 따라 당 대표를 계승했다. 2009년 5월 16일 당 대표 대의원 투표에서 219표 중 124표를 얻어 라이벌인 오카다 가쓰야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그의 독특한 헤어스타일, 눈에 띄는 눈, 기이한 태도 때문에 지지자와 반대파 모두에게 "ET" 또는 "외계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아내는 그가 기존 일본 정치인들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런 별명을 얻었다고 말한다. 일본 언론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또 다른 별명은 비둘기를 소재로 한 동요 "포포포, 하토 포포"의 첫 소절에서 따온 "포포"였다. 하토야마 성의 첫 번째 글자는 일본어로 '비둘기'를 뜻한다.
하토야마 유키오는 높은 지지율로 총리직에 취임했다. 민주당은 자민당과 관련된 사치스러운 공공사업 예산을 삭감하고 그 돈을 감세와 가계 보조금으로 돌릴 것을 약속했다. 그가 자민당의 정책과 단호하게 결별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다.
그러나 경기 침체 속에서 민주당이 높은 기대치를 충족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하토야마의 인기는 곧 하락하기 시작했다. 2010년 5월 그는 불신임 투표의 위기에 직면했고, 2010년 6월 2일 총리직 사퇴를 발표했다.
하토야마 유키오는 1년도 채 총리직에 있지 않았지만, 퇴임 당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 영유아 가정에 대한 국가 보조금 도입.
* 공립 고등학교 수업료 폐지.
* 쌀 농가를 위한 개별 가구 소득 지원 사업 도입.
* 미혼모 가정을 위한 추가 생활 지원 수당 복원.
* 아동 수당 도입과 10년 만에 처음으로 의료 서비스 보수 체계가 인상됨에 따라, 육아, 간병, 의료 등을 포함한 사회 보장 예산이 9.8% 증가하는 등 사회 복지 지출 대폭 증가.
* 교육 예산 8.2% 증가.
* 더 많은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제도 확대.
* 모든 근로자에 대한 고용 보험 적용 확대.
* 실업자 의료비 감소.
* 보수 체계 및 의료 서비스에서의 연령 차별 관행 폐지.
* "노인과 육아 가정 지원 시설이 딸린 공공 임대 주택 개발" 지원 확대를 "의료 시설이 딸린 공공 임대 주택"으로 확대.
* 저소득 장애인을 위한 무료 복지 서비스 및 장비 도입.
2.4. 총리 재임 기간 (2009-2010)
하토야마 유키오는 높은 지지율 속에 총리직에 취임했지만, 경기 침체와 민주당에 대한 높은 기대치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인기가 하락했다. 2010년 5월에는 불신임 투표 위기에 직면했고, 결국 2010년 6월 2일 총리직 사퇴를 발표했다.
총리 취임 이후, 선거 공약 이행을 놓고 자민당 등과 대립하고, 사민당, 국민신당 등 연립 여당과도 마찰을 빚었다. 주요 공약은 아동수당, 고속도로 무료화, 오키나와현 미군 후텐마 기지 이전 등이었는데, 특히 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미국의 심기를 자극해 대미 관계에 어려움을 초래했다. 5월 말까지 이전지를 확정하지 못하면 총리직을 사임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전 비서의 정치자금 비리 등으로 야당의 공격을 받았으며, 큰 정부의 복지 수준을 주장하면서도 선거를 이유로 증세에는 반대하는 포퓰리즘적 성향을 보여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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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30일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은 단독 정당으로 역사상 최다인 308석을 획득했다. 같은 해 9월 16일,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 국민신당, 사회민주당과 연립 여당을 구성하여 제93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전후 최초의 이과 계열 출신이자, 미야자와 기이치 이후 16년 만의 국립대학 출신 총리였다. 또한, 신제대학으로서의 도쿄대학 출신 내각총리대신은 사상 최초였다.
2010년 4월, 미국의 잡지 『타임』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리더 부문에서 하토야마를 6위에 선정하며, "(자민당에 의한) 사실상의 일당 지배 체제를 기능하는 민주주의로 바꾸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에 대한 우왕좌왕과 자신의 "정치와 돈" 문제가 표면화되면서 지지율은 하락했다. 결국 2010년 6월 2일, 하토야마는 민주당 양원 의원 총회에서 내각총리대신직 사퇴를 표명했다. 6월 8일 내각총리대신에서 사임했으며, 재임 기간은 266일이었다.
2.4.1. 주요 정책 및 업적
하토야마 유키오는 총리 취임 후, 민주당의 선거 공약 이행을 추진했지만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사민당, 국민신당과의 연립 정권 내 마찰, 오키나와현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로 인한 미국과의 관계 악화 등이 있었다. 특히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는 대미 관계에 어려움을 초래했다.
전 비서의 정치자금 비리, 증세 없는 복지 확대 주장 등으로 비판받았고, 결국 2010년 6월 2일 총리직에서 사임, 간 나오토가 총리직을 승계했다.
하토야마 유키오의 주요 정책 및 업적은 다음과 같다.
* 영유아 가정 국가 보조금 도입
* 공립 고등학교 수업료 폐지
* 쌀 농가 개별 가구 소득 지원 사업 도입
* 미혼모 가정 추가 생활 지원 수당 복원
* 아동 수당 도입 및 10년 만의 의료 서비스 보수 체계 인상
* 사회 복지 예산 9.8% 증가
* 교육 예산 8.2% 증가
* 장학금 제도 확대
* 모든 근로자 대상 고용 보험 적용 확대
* 실업자 의료비 감소
* 의료 서비스 연령 차별 관행 폐지
* 저소득 장애인 무료 복지 서비스 및 장비 도입
경제 정책으로는 구조 개혁을 강조하며, 고이즈미 내각의 재정 투입을 비판했다. 아소 내각의 1차 보정 예산 재검토를 통해 3조 엔에 가까운 재원을 확보한 점을 긍정 평가했다. 소비세 증세 필요성은 인정하나, 불경기 속 증세 논의는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자위대 해외 파병에 대해서는 테러리즘 방지, 이라크 인도적 지원, 소말리아 해적 대책 등 국제 질서 유지를 위한 활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해상보안청 역할 우선, 필요시 시빌리언 컨트롤 하 자위대 파병 인정 등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참여, 헌법 개정 필요성도 언급했다.
2.4.2. 외교 정책
하토야마 유키오는 민주당(DPJ)의 선거 공약을 대표하여 일본의 외교 정책 초점을 미국 중심에서 아시아 중심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또한, 일본의 외교 정책 결정이 배후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진다는 대중적 인식을 바탕으로 미국과의 외교 정책 결정 과정을 더욱 투명하게 만들고자 했다.
민주당의 선거 공약에는 미국과의 관계 재검토가 포함되어 있었다. 1960년 일미 안보 조약 체결 50주년을 맞아 하토야마 유키오는 일본의 역할에 대한 더 큰 독립성을 의미하는 "긴밀하고 동등한" 일미 관계를 요구했다.
하토야마 유키오는 아프가니스탄에서 8년 동안 지속된 연료 공급 임무를 종식시켰는데, 이는 이 임무가 오랫동안 일본의 평화헌법 위반으로 비판받았기 때문에 매우 상징적인 조치였다. 워싱턴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하토야마 유키오는 아프가니스탄 재건을 위해 5의 민간 원조를 제공했다.
하토야마 유키오는 또한 미군 푸텐마 해병대 기지 이전 문제에도 직면했다. 미국 정부는 하토야마 유키오가 2006년 합의에 따라 기지를 오키나와의 인구 밀집도가 낮은 지역으로 이전하고 8,000명의 해병대를 괌으로 이동시키기를 바랐다. 민주당 내 일각에서는 미국이 오키나와 섬에서 군사 기지를 완전히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하토야마 유키오는 오키나와 주민 여론과 워싱턴과의 강력한 유대 관계 유지 욕구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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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미군 재편
후텐마 비행장 이전지에 대해 "현외 이전에 현민의 마음이 하나라면, 최소한 현외 방향으로 우리도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며, 오키나와현 외 이전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현외 이전에 관해서는 미국 연방 정부가 '기밀 유출'로 강한 반감을 샀다. 2010년 4월 13일, 워킹 디너에서 오바마 대통령과의 약 10분간의 의견 교환에 대해,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니스트 앨 카멘은 자신의 칼럼에서 "루피(loopy: 어리석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라고 비웃었다. 이 호칭은 그 후에도 사용되었고, 영국의 가디언지에서도 보도되었다.
현외 이전 문제에 대해서는 2010년 5월 4일에 "배우면 배울수록 (미국 해병대의 각 부대가) 연계하여 억제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알게 되었다"고 하여, 최종적으로는 현외 이전 문제를 미루게 되었다. 하토야마는 현외 이전은 민주당 매니페스토가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상의 공약이었다고 타나카 히데유키는 "당시 이 하토야마 대표 발언에 대해 민주당 내에서 큰 반론이나 논의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최소한 현외]는 정권의 공약이다."라고 말했고, 당시 당 부간사장이었던 호소노 고시도 "작년 중의원 선거 전에 현외라고 말한 하토야마 대표 아래에서 선거를 치렀다. 나는 당의 공약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류큐 신보는 공약 철회로 비판했다. 일본경제신문은 후텐마 기지 이전의 실패를 "죄 만사에 해당하는 실정"이라고 평가했다.
아시아 중심 외교 정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하토야마 유키오는 "일본 열도는 일본인만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등 인근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 하토야마 유키오는 2020년까지 아시아 자유무역지대를 추진하고 하네다 공항을 24시간 국제선 허브로 제안하는 등 동아시아 지역과의 경제 통합을 심화시키려고 노력했다. 2010년 1월, 그는 한국의 대통령을 환영하며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 시대를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 관계를 요구했다.
;일중 정상 회담
2009년 9월 21일,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 하토야마는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회담하여, 티베트 문제는 "중국의 내정 문제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며, 내정 문제라는 인식을 보인 후 "그만큼 대화를 통해 훌륭하게 해결되기를 기대한다"고 하여 중국 측에 의한 평화적인 해결을 기대했다.
;한국
한국과의 역사 인식 문제에 관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는 자세를 보였다. 또한 동아시아 공동체 구축을 향해 한국을 제일의 파트너로 하고, 안보 분야에서도 연계를 심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하토야마 논문
하토야마는 『Voice』(2009년 9월호)에 기고한 논문 [https://web.archive.org/web/20090814210523/http://www.hatoyama.gr.jp/masscomm/090810.html 나의 정치 철학]에서 미국의 경제 정책과 일미 관계의 현황을 비판했고, 『뉴욕 타임스』가 8월 27일에 논문의 초역을 게재했다. 그러자 미국과 대만에서 "반미적"이라고 보도되었다. 하토야마는 후일 "반미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국
2009년 11월 13일,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아시아 순방의 첫 방문국으로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같은 날 일미 정상 회담과 환영 만찬(수상 주최)이 개최되었지만, 하토야마는 다음 날인 14일 새벽에 같은 날 오전에 예정되어 있던 일본 홍보 센터 개설식과 APEC 회합에 참석하기 위해 싱가포르로 출발했고, 손님인 오바마를 국내에 남겨둔 채 주최자인 하토야마가 일본을 떠난 것에 대해 일부로부터 비판받았다.
2.4.3. 정치자금 문제 및 사임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취임 이후, 선거 공약 이행을 놓고 자민당 및 연립 여당과 마찰을 빚었다. 특히 오키나와현 미군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는 미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는 5월 말까지 이전지를 확정하지 못하면 사임하겠다고 약속했다.
전 비서의 정치자금 비리 역시 야당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2009년 12월, 하토야마가 부적절하게 보고된 4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기부자 명단에는 사망자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검찰은 범죄 행위 증거 불충분으로 그를 기소하지 않았지만, 비서 한 명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2009년, 하토야마 유키오의 자금관리단체인 "유애정경곤화회"의 정치자금수지보고서에 고인으로부터의 헌금이 기재된 사실이 드러났다. 5명의 "고인"이 5년간 약 1200을 헌금한 것으로 되어 있었고, 실제 헌금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도 기재되어 있었다. 하토야마는 회계 담당 비서의 독단적인 행동이라고 해명하고 비서를 해고했다.
하토야마의 지역구인 홋카이도 9구의 도의원, 시의원 등 42명이 하토야마가 대표를 맡고 있는 "민주당 홋카이도 9구 총지부"에 매년 12월 25일에 헌금한 사실도 밝혀졌다.
2009년 10월, 실모로부터 5년간 약 900의 자금 제공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자금 중 일부가 위장 헌금의 원자금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하토야마는 증여세를 납부했다.
2009년 11월, 주식 매각 차익 약 72을 신고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하토야마는 착오였다고 해명하고 자산 정정 신고서를 제출했다.
결국 2010년 6월 2일, 하토야마는 총리직 사임을 발표했다. 주된 사임 이유는 후텐마 해병대 항공기지 이전 공약 미이행이었다. 그는 당내 거물인 오자와 이치로의 금전 스캔들도 사퇴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했다.
2.5. 총리 퇴임 후
하토야마 유키오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정치 활동을 계속했다.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소비세를 5%에서 10%로 인상하는 법안을 제출했을 때, 이 법안에 반대표를 던진 민주당 중의원 의원 57명 중 한 명이었다. 이로 인해 민주당 당적이 6개월 동안 정지되었으나, 이후 3개월로 감소되었다.
오자와 이치로의 국민생활우선회에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에 남아 소비세 인상과 원전 재가동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 2012년 7월 20일에는 총리 관저 앞에서 시위대에게 연설하며 원전 재가동은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2012년 12월 16일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이 소비세 인상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 참여를 지지하지 않는 후보는 공천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자, 하토야마는 2012년 11월 21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013년 3월 21일, 호이푸 에너지 그룹의 명예 회장 겸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정계 은퇴 후에도 트위터를 통해 정치 현안에 대해 정기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2023년에는 트위터에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대한 핵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허위 주장을 했다가 번역 문제였다고 사과하기도 했다.
2024년 10월, 그의 아들 기이치로는 총선에서 국민민주당 후보로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2.5.1. 외교 및 안보 관련 활동
하토야마 유키오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민주당 내에서 활동하며 소비세 인상과 원전 재가동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에도 하토야마는 외교 및 안보 관련 활동을 활발히 이어갔다. 2013년 1월에는 난징을 방문하여 일본의 전쟁 범죄 피해자들에게 일본 정부의 사과를 표명하고,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양국 간의 분쟁을 인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2015년 3월에는 크림반도를 방문하여 크림반도 주민투표가 "합헌적"이라고 주장했다.
2015년 8월에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방문하여 일본의 한국 점령에 대한 후회를 표명하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추모비 앞에서 사죄의 뜻을 밝혔다.
하토야마는 초월명상 기법을 실천하고 있으며, 2015년 5월 마하리시 경영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명예 학위를 받았다.
2020년에는 슈토 노부히코와 함께 교화당을 창당했으나, 2022년 9월 탈당했다.
; 한국
한국과의 역사 인식 문제에 관해서 하토야마는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는 자세를 보였다. 동아시아 공동체 구축을 위해 한국을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여기며, 안보 분야에서도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피해자들에게 보상하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밝혔다. 역대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서는 피해자들의 마음을 짓밟고 국익을 손상시켰다고 비판하며, 국익의 관점에서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반대했다.
2022년 6월, 한국 아리랑TV와의 인터뷰에서 2015년 위안부 문제 한일 합의에 대해 "일본 정부의 '이 문제를 다시는 거론하지 마라'는 태도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며, "위안부 피해자들은 진정한 사과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키시다 푸미오 총리가 외무상 시절 체결한 합의를 무효화하기는 어렵지만, "합의를 토대로, 무한 책임 요소(가해자는 피해자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사과해야 한다)를 추가하여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같은 인터뷰에서 "일본은 20년에서 30년 동안 경제가 저성장 상태였기 때문에, 경제가 급성장한 한국이나 중국과 같은 이웃 나라에 대해 질투심이 생겼다. 이것이 혐한이라는 혐오감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민당은 우익 성향이 강하고, 한국에 대한 혐오감을 자극하여 지지율을 높이고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방법이다", "일본이 한국과 경제적으로 밀접하게 협력하여 경제 회복을 도모하는 것이 (일본 경제 저성장의)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2015년 8월, 한국 방문 중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추모하며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그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 지배하던 시대에 독립운동가들을 이곳에 수용하고 고문이라는 잔혹한 형벌을 가해 생명을 빼앗은 것을 듣고 마음속으로부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죄송하고 사과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2022년 5월에는 윤석열 당시 대통령 당선인과 회담을 갖고 한일 우호 관계 증진에 뜻을 같이했다. 다음 날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6월에는 아리랑TV 인터뷰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미래지향적인 지도자"라고 평가하며, 한일 간 "'조건 없이' 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일중 정상 회담
2009년 9월 21일,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 하토야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회담하여, 티베트 문제는 "중국의 내정 문제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며, 내정 문제라는 인식을 보인 후 "그만큼 대화를 통해 훌륭하게 해결되기를 기대한다"고 하여 중국 측에 의한 평화적인 해결을 기대했다.
; 미국
2009년 11월 13일,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아시아 순방의 첫 방문국으로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같은 날 일미 정상 회담과 환영 만찬(수상 주최)이 개최되었지만, 하토야마는 다음 날인 14일 새벽에 같은 날 오전에 예정되어 있던 일본 홍보 센터 개설식과 APEC 회합에 참석하기 위해 싱가포르로 출발했고, 손님인 오바마를 국내에 남겨둔 채 주최자인 하토야마가 일본을 떠난 것에 대해 일부로부터 비판받았다.
; 주일 미군 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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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텐마 비행장 이전지에 대해 "현외 이전에 현민의 마음이 하나라면, 최소한 현외 방향으로 우리도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며, 오키나와현 외 이전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현외 이전에 관해서는 미국 연방 정부가 '기밀 유출'로 강한 반감을 샀다. 2010년 4월 13일, 워킹 디너에서 오바마 대통령과의 약 10분간의 의견 교환에 대해,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니스트 앨 카멘은 자신의 칼럼에서 "루피(loopy: 어리석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라고 비웃었다. 이 호칭은 그 후에도 사용되었고, 영국의 가디언지에서도 보도되었다.
현외 이전 문제에 대해서는 2010년 5월 4일에 "배우면 배울수록 (미국 해병대의 각 부대가) 연계하여 억제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알게 되었다"고 하여, 최종적으로는 현외 이전 문제를 미루게 되었다.
2.5.2. 공화당 창당 및 정계 복귀 시도
2019년 10월 25일, 하토야마 유키오는 새로운 정치 단체인 "공화당" 창당을 목표로 준비회를 발족시켰다. 2030년까지 국회의원 30명 규모의 정당으로 성장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하토야마는 자신이 주창하는 "공화주의(共和主義)"에 대해 "함께 화합한다는 의미로, 이는 일본에서 태어난 이념"이라고 설명하며, 미국 공화당과 같은 군주가 없는 공화제와는 다른 개념이므로 현행 상징 천황제와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입헌민주당 간부는 "취미로 정당을 만들지 말아 달라"며 하토야마의 신당 창당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2020년 7월 14일, 공화당이 정식으로 출범했고, 하토야마는 공화당의 총재에, 스도 노부히코 전 중의원 의원이 당수에 취임했다.
2022년 6월 10일, 하토야마는 기자회견을 통해 차기 중의원 선거(제5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정계 복귀를 노린다는 의사를 밝혔다. 오키나와현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로 혼란을 초래한 것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오키나와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출마 예정 선거구는 "결정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같은 해 7월 제26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공화당에서 도쿄도 선거구에 당원 다무라 마나, 가나가와현 선거구에 당수 스도 노부히코가 각각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고, 공탁금이 몰수되었다.
2024년 5월 현재, 하토야마의 사무소는 공화당 설립에는 관여했지만, 현재는 당과의 관계는 전혀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3. 사상
하토야마 유키오는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의 영향으로 '우애'를 강조하였다. 그것은 유럽 연합의 선구자 리하르트 니콜라우스 폰 코우덴호페칼레르기(Richard Nikolaus von Coudenhove-Kalergi) 백작의 '우애'이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자유, 평등, 우애'라는 세 단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이 세 단어는 현재 프랑스의 나라 표어이다. 또한 이 '우애'는 프리메이슨의 이념이다.
그는 “자유주의는 사랑(애, 愛)이고, 이 사랑은 우애이다”라는 논리로 우애에 근거한 자유주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2001년에 오하시 교센(大橋巨泉)이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맹해 중도좌파 정당으로서 성격을 선명히 하자”고 주장한데 대해 하토야마는 “민주당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할 수 없다”고 부인한 바 있다.
하토야마는 “자유주의는 사랑이며, 이 사랑이 바로 유애이다”라고 하여, 할아버지 하토야마 이치로가 즐겨 사용했던 유애라는 말을 자유주의의 근본에 두고 있다. 하토야마 이치로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전전(戦前)의 통수권 침범 문제의 책임을 물어 공직 추방되었고, 추방 해제 직전인 1951년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프리메이슨 회원인 리하르트 니콜라우스 에이지로 쿠덴호프=카렐리 백작을 만나 그의 유애 사상에 감명을 받고, 쿠덴호프=카렐리의 저서를 직접 번역 출판했다. 이듬해, 유애청년동지회(현·일반재단법인 일본유애협회)를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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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도 할아버지의 유애 사상과 쿠덴호프=카렐리의 유애 사상을 정치 활동의 기본으로 삼고, 하토야마 유애숙 등 유애라는 이름이 붙은 조직, 단체 등을 설립했다. 하토야마는 자기 존엄성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자신을 높여서 비로소 타인에게 친절하게 행동할 수 있으며, 자애가 이타를 낳고, 의견이 달라도 그것을 허용하고, 인품을 신뢰하며 우정을 맺을 수 있다는 자기 존엄성의 존중이 유애 정신의 본질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개인을 기본으로 하여, 당의구속에서 해방된 개인의 자유에 의한 연합, 자유주의를 유애, 즉 자기 존엄성의 존중으로 해석한 “자유주의 연합”을 달성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4. 가계도
하토야마 유키오 가문은 "일본의 케네디 가문"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본 정계의 명문가이다.
* 고조부: 하토야마 히로후사(미사쿠 가쓰야마 번사)
* 고조모: 와타나베 쓰토무(시나노 국 마쓰모토 번사)
* 증조부: 하토야마 가즈오(변호사, 정치가, 중의원 의장)
* 증조모: 하토야마 하루코(공립여자대학 설립자)
* 증조부: 데라다 사카에(귀족원 의원)
*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변호사, 정치가, 제52·53·54대 내각총리대신)
* 이치로가 거처로 지은 서양식 건물 하토야마 회관(분쿄구 오토와)에는 당시 많은 정치가들이 방문하여, 전후 정치의 전환점이 된 자유당(현 자유민주당)의 창설과 일소 국교 회복 준비가 이루어졌다. 현재는 기념관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 조모: 하토야마 가오루(공립여자대학 학장) (호적상 이름은 '하토야마 가오루')
* 외조부: 이시바시 쇼지로(브리지스톤 창업자)
* 고모부: 하토야마 히데오(도쿄대학 법학부 교수)
* 고모: 가즈(사법대신 스즈키 기사부로에게 시집감)
* 부: 하토야마 이이치로(외무대신)
* 모: 하토야마 야스코(브리지스톤 창업자 이시바시 쇼지로의 장녀)
* 고모: 노부코(아버지쪽, 지휘자 와타나베 아키오에게 시집감)
* 누이: 와코(하토야마 우애학원 학원장, 공학박사, 쓰쿠바대학 명예교수 이노우에 다몬 부인)
* 남동생: 하토야마 구니오(제10대 총무대신)
* 처: 하토야마 미유키 (다카라즈카 가극단 졸업생. 다카라즈카 가극단 재단 당시 예명은 와카 미유키)
* 장남: 하토야마 기이치로(중의원 의원, 전 도쿄대학 대학원 공학계 연구과 전임강사)
* 제수: 하토야마 에밀리(전 탤런트)
* 조카: 하토야마 다로(정치가, 전 도쿄도 의회 의원, 총무대신 정무비서관)
* 조카딸: 다카미 하나코(가수, 일러스트레이터)
* 조카: 하토야마 지로(중의원 의원, 전 오카와시 시장, 전 법무대신 정무비서관)
* 사촌: 나리게 시게루(기타리스트, 이시바시 쇼지로 차녀 덴코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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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 가문은 17세기부터 미사쿠 가쓰야마 번주였던 미우라 씨의 가신으로, 1764년 미우라 씨의 이봉에 따라 미카와 국 니시오(현 아이치 현)에서 가쓰야마로 이주했다. 이후 대대로 미우라 가문에 봉직하며 주로 에도 번저에서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메이지 유신 당시 당주인 하토야마 시게에몬(주에몬이라는 표기도 있음) 히로후사는 에도 유수거역으로서 번의 에도 저택을 관리했다고 한다.
1862년, 분큐 개혁으로 참근교대가 3년에 1번으로 완화되면서 각 번도 비용이 많이 드는 에도 저택을 폐쇄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하토야마 가문도 가쓰야마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하토야마 가즈오는 6세 때 가쓰야마에서 생활을 시작했지만, 약 5년간 생활한 후 에도로 돌아왔다. 이러한 경위에서 하토야마 가즈오의 증손자에 해당하는 하토야마 유키오와 하토야마 구니오는 연고를 찾아 여러 번 가쓰야마를 방문했다.
하토야마 가문의 묘소는 가쓰야마 번주 미우라 가문의 보리사인 안양사에 있지만, 일부는 하토야마 형제에 의해 오카야마 현 마니와 시 구세의 중원사로 개장되었다.
5. 역대 선거 결과
| 선거명 | 회차 | 의원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선 여부 | 비고 |
|---|---|---|---|---|---|---|---|---|---|
| 1986년 총선거 | 38회 | 중의원 의원 | 홋카이도 제4구 | 자유민주당 | 93,001 | 16.1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90년 총선거 | 39회 | 중의원 의원 | 홋카이도 제4구 | 자유민주당 | 85,516 | 14.7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93년 총선거 | 40회 | 중의원 의원 | 홋카이도 제4구 | 신당 사키가케 | 111,824 | 21.1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 1996년 총선거 | 41회 | 중의원 의원 | 홋카이도 제9구 | 민주당(1996) | 131,936 | 52.79 | 1위 | 당선 | |
| 2000년 총선거 | 42회 | 중의원 의원 | 홋카이도 제9구 | 민주당(1998) | 131,500 | 45.45 | 1위 | 당선 | |
| 2003년 총선거 | 43회 | 중의원 의원 | 홋카이도 제9구 | 민주당(1998) | 141,442 | 50.02 | 1위 | 당선 | |
| 2005년 총선거 | 44회 | 중의원 의원 | 홋카이도 제9구 | 민주당(1998) | 150,050 | 49.26 | 1위 | 당선 | |
| 2009년 총선거 | 45회 | 중의원 의원 | 홋카이도 제9구 | 민주당(1998) | 201,461 | 66.36 | 1위 | 당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