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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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2007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유물로,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가장 오래된 사리장엄구이다. 백제 위덕왕 시기인 577년에 제작되었으며, 청동제 사리합, 은제 사리호, 금제 사리병으로 구성된 3중 구조를 갖는다. 청동제 사리합 명문을 통해 사찰 건립 배경과 사리기의 제작 시기를 알 수 있으며, 백제 왕실 공예품으로서의 가치와 희소성을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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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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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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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번호 | 국보 제327호 |
지정 종류 | 국보 |
지정 날짜 | 2019년 6월 26일 |
시대 | 577년 (백제 위덕왕 24)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충절로 2316번길 34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
상세 정보 | |
종류 및 수량 | 1건 3점 (청동제 사리합 1, 은제 사리호 1, 금제 사리병 1) |
재질 | 청동, 은, 금 |
크기 | 사리합 높이 10.3cm, 사리호 높이 6.8cm, 사리병 높이 4.6cm |
2. 발견
부여 왕흥사지 목탑터의 심초석 남쪽 중앙 끝단에 마련된 장방형 사리공 내부에서 사리장엄구 일괄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은 가장 바깥의 청동제 사리합 안에 은제 사리호, 그 안에 다시 금제 사리병을 넣어 3중으로 사리를 봉안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백제 시대 사리장엄의 면모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청동제 사리합에서는 577년 (정유년)에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며 사리를 봉안했다는 내용의 명문(銘文)이 확인되었다. 이 명문은 사찰의 건립 시기와 배경 등을 알려주는 중요한 역사적 단서가 된다.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사리장엄구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2. 1. 사리장엄구 구성
부여 왕흥사지 목탑터의 심초석 아래 사리공에서 발견된 이 사리장엄구는 3중으로 구성된 봉안 방식을 보여준다. 가장 바깥은 청동제 원통형 사리합, 그 안에는 은제 사리호, 가장 안쪽에는 금제 사리병을 두었다. 이는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당시에 가장 귀한 재질로 여겨졌던 금, 은, 동을 순서대로 사용하여 백제 사리장엄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중요한 사례이다.청동제 사리합은 바닥이 납작한 원통형 몸체의 위아래와 뚜껑에 각각 두 줄의 음각선이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져 있다. 뚜껑 중앙에는 원래 연꽃 봉오리 모양(연봉형)의 손잡이가 있었으나, 발견 당시 부러져 있었고 현재는 복원된 상태이다.
은제 사리호는 청동 합 안에 놓였던 것으로, 목이 길게 서 있고 몸체는 둥글며 낮은 굽을 가진 항아리 형태이다. 뚜껑 중앙에는 연봉형 손잡이가 솟아 있고 그 주위로 연꽃 잎 무늬가 유려하게 새겨져 있다. 목 부분에 보이는 접합 흔적은 금제 사리병을 안에 넣기 위해 위쪽과 아래쪽을 따로 제작하여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호의 안쪽 바닥에는 금제 사리병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하기 위한 별도의 받침대가 마련되어 있다.
금제 사리병은 가장 안쪽에 안치된 것으로, 굽이 있으며 아래쪽으로 갈수록 볼록해지는 호리병 형태이다. 가장자리에는 한 줄의 음각선이 새겨져 있다. 뚜껑 가운데에는 보주(寶珠) 모양의 손잡이가 솟아 있으며, 그 주위로 6개의 연꽃잎이 장식되어 있다.
2. 2. 명문 내용
청동제 사리합 표면에는 총 6행 29자로 이루어진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
이는 "정유년(丁酉年, 577년) 2월 15일에 백제 왕 창(王昌)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刹)을 세웠다.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神)의 조화로 세 매가 되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명문은 왕흥사의 건립 시기와 사리기의 제작 시기가 577년임을 명확히 알려준다. 또한, 절을 세운 주체가 백제 위덕왕이며, 그 목적이 일찍 세상을 떠난 왕자를 기리기 위함이었음을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이 사리기는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시기가 빠른 사리장엄구로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3. 국보 승격 사유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가 국보로 지정된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부여 왕흥사지(王興寺址)라는 출토지가 분명하고 청동제 사리합 명문을 통해 577년(백제 위덕왕 24년)이라는 절대 제작 연대가 확인되었다.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등 문헌 기록을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둘째, 백제 사비시기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발원하여 만든 왕실 공예품으로서,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조형미와 당대 최고 수준의 제작 기술을 보여주어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는 6세기 후반 백제 공예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셋째,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사리기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제작 연대가 명확한 기년명(紀年銘) 사리장엄구로서도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라는 점에서 희소성이 크다.
이러한 절대 연대의 확실성, 백제 왕실 공예품이라는 역사적·예술적 가치, 현존 최고(最古) 사리기로서의 희소성, 그리고 우리나라 공예 및 조형예술사에서 차지하는 높은 위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국보로서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인정되었다.
3. 1. 역사적 가치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2007년 문화재청 산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부여 왕흥사지(王興寺址)에서 발굴한 유물로,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사리기이다. 출토지가 분명하며, 청동제 사리합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백제 위덕왕 24년인 577년에 제작되었다는 절대 연대가 확인되었다.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같은 문헌 기록을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이 사리기는 백제 사비 시대에 위덕왕(威德王)이 죽은 왕자를 위해 발원하여 만든 왕실 공예품이다. 제작 연대가 명확히 기록된 기년명(紀年銘) 사리장엄구 중 가장 시기가 이르다는 점에서 희소성이 높다. 절대 연대가 확인되고 백제 왕실에서 제작했다는 점, 그리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리기라는 점 등에서 높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또한, 이 사리기는 공예사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6세기 후반 백제 공예 기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며, 525년에 제작된 무령왕릉 출토 은제탁잔(銀製托盞)의 영향을 받아 7세기 전반 미륵사지 사리기에 영향을 준 과도기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역사적, 예술적 가치와 희소성을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되었다.
3. 2. 예술적 가치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백제 사비시기 위덕왕대에 제작된 왕실 공예품으로서 높은 공예사적 가치를 지닌다. 전반적인 형태와 세부 구조물을 만들고 붙이는 기법, 표면을 깎고 다듬는 기법 등에서 수준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어 당시 백제 장인의 숙련된 솜씨를 엿볼 수 있다.특히 단순하면서도 단아한 형태, 보주(寶珠) 모양의 꼭지와 그 주위를 장식한 연꽃 문양 등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조형적 특징은 525년에 만들어진 무령왕릉 출토 은제탁잔 등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나아가 7세기 전반 미륵사지 미륵사지 사리기의 조형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이 사리기는 6세기 후반 백제 공예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백제 왕실 공예품으로서의 예술적 가치와 더불어, 한국 공예 및 조형예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국보로서의 가치가 높다.
3. 3. 희소성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사리기이다. 특히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발원하여 만든 기년명(紀年銘) 사리장엄구로서, 제작 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진 유물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높은 희소성을 지닌다. 이러한 희소성은 절대 연대의 확실성, 백제 왕실 공예품으로서의 역사적·예술적 가치와 더불어 이 유물이 국보로 지정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4.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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