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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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2월 8일부터 9일까지 북한의 정당, 사회 단체, 인민위원회 등의 회의를 통해 수립된 임시 정부이다. 김일성이 위원장을 맡았으며,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소련의 지원 아래 북한 지역에 세워진 인민위원회를 기반으로 했다. 1946년 3월 김일성이 발표한 20개조 강령에 따라 토지 개혁, 주요 산업 국유화, 노동법 제정 등 사회주의적 개혁을 추진했다. 이러한 개혁은 북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토지 개혁을 통해 농민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지주 계층의 반발과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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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정치 | |
지도자 직책 | 위원장 |
지도자 | 김일성 |
지도자 임기 | 1946년–1947년 |
기타 정보 | |
데모님 | 알 수 없음 |
면적 | 알 수 없음 |
면적 순위 | 알 수 없음 |
GDP(PPP) | 알 수 없음 |
GDP(PPP) 연도 | 알 수 없음 |
HDI | 알 수 없음 |
HDI 연도 | 알 수 없음 |
공용어 | 알 수 없음 |
각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종교 참조. |
2. 역사
1945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항복하면서 한반도 전역에 인민위원회가 세워졌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이 인민위원회의 행정을 인정했으며, 1945년 10월 3일 소련 민정청을 수립했다.[1]
소련은 북한에 중앙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초기 시도로 1945년 10월 8일 5도 행정국을 설치하고,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민족주의 지도자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조만식은 소련이 북한 지도자로 지지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1] 5도 행정국은 북한 5개 도 인민위원회 대표들로 구성된 임시 자치 기구였으며,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 간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다.[1] 그러나 5도 행정국은 1946년 1월 조만식이 모스크바 삼상 회의 신탁 통치에 반대하고 소련과의 이념 대립으로 체포되면서 해체되었다.[1]
1946년 2월 8일과 9일, 북한의 정당, 사회 단체, 인민위원회 및 행정국 대표들이 모여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였다. 김일성이 위원장을 맡은 이 위원회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한의 실질적인 임시 정부가 되었다. 1946년 3월, 김일성은 20개조 강령을 발표하여 토지 개혁과 주요 산업 국유화 등 개혁을 추진했다.[1] 소련 민정청은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와 함께 운영되었지만, 자문 역할만 수행했다.[1]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11월 1946년 북한 지방 선거를 실시했다. 이는 1947년 2월 북조선 인민회의 선거를 위한 준비였으며, 1947년 2월 21일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북한의 후임 임시 정부가 되었다.[1]
2. 1. 해방 직후 한반도 상황과 인민위원회
1945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항복하면서, 한반도 전역에 인민위원회가 세워졌다. 이 인민위원회의 행정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인정받았다.[1]2. 2. 소련군정의 시작과 북한 지역의 변화
1945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항복하면서, 한반도 전역에 인민위원회가 세워졌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이 인민위원회의 행정을 인정했으며, 1945년 10월 3일에는 소련 민정청이라는 점령 당국을 수립했다.2. 3. 5도 행정국과 조만식
소련은 북한에 중앙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초기 시도로 5도 행정국을 설치했다. 1945년 10월 8일, 민족주의 지도자이자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조만식이 5도 행정국 위원장을 맡았다. 조만식은 북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소련이 미래의 북한 지도자로 지지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1] 5도 행정국은 북한 5개 도 인민위원회 대표들로 구성된 임시 자치 기구였으며,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 간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다.[1] 그러나 5도 행정국은 1946년 1월 조만식이 소련에 의해 체포되면서 해체되었다. 이는 조만식의 모스크바 삼상 회의 신탁 통치 반대와 이념 대립에 따른 결과였다.[1]2. 4.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의 성립
1946년 2월 8일부터 9일까지 북한의 정당, 사회 단체, 인민위원회 및 행정국 대표들이 모여 회의를 열고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였다. 이 위원회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위원장을 맡아, 북한 지역의 실질적인 임시 정부 역할을 수행했다. 1946년 3월, 김일성은 20개조 강령을 발표하여 토지 개혁과 주요 산업 국유화 등 북한의 개혁을 추진했다.[1] 소련 민정청은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와 함께 운영되었지만, 자문 역할만 수행했다.[1]
3. 조직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10개의 부서와 3개의 국(이후 4개의 국으로 증가)으로 구성되었다.[3] 운수국장은 한희진에서 허남휘로, 상업국장은 한동찬에서 장시우로 교체되었다. 1946년 9월에는 노동국이 신설되어 오기섭이 노동국장이 되었고, 리종원이 새로운 선전국장이 되었다.[3]
3. 1. 위원회 구성과 주요 인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2월 8일부터 9일까지 북한의 여러 정당, 사회 단체, 행정 기관 및 인민 위원회 회의를 통해 구성되었다.[2] 회의에는 조선공산당, 민주당, 독립동맹, 조선노동조합총동맹, 조선농민총동맹, 여성동맹, 민주청년동맹, 종교 단체, 조선소련문화협회 등 다양한 단체에서 137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2]김일성은 회의 첫날 북한의 정치 상황과 림시인민위원회 설립 문제에 대해 보고했다. 2월 9일에는 김일성을 위원장, 김두봉을 부위원장, 강량욱을 서기장으로 하는 23명의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이 선출되었다.[2][3]
이름 | 소속 |
---|---|
김일성 | 공산당 |
김두봉 | 독립동맹 |
무정 | 공산당 |
강량욱 | 민주당 |
최용건 | 민주당 |
리문환 | 무소속 |
한희진 | 무소속 |
리순근 | 공산당 |
리봉수 | 공산당 |
한동찬 | 무소속 |
장정식 | 공산당 |
윤기영 | 민주당 |
최용달 | 공산당 |
김덕영 | |
방우용 | 독립동맹 |
홍기주 | 민주당 |
현찬형 | 조선노동조합총동맹 |
리 기영 | 조선소련문화협회 |
강진곤 | 조선농민총동맹 |
박정애 | 민주여성동맹 |
홍기황 | 민주당 |
강용군 | 노동조합 |
방수용 | 민주청년동맹 |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10개의 부서와 3개의 국(이후 4개 국으로 증가)으로 구성되었다.[3]
직책 | 이름 | 정당 |
---|---|---|
위원장 | 김일성 | 공산당 |
부위원장 | 김두봉 | 독립동맹 |
서기장 | 강량욱 | 민주당 |
공업국 | 리문환 | 무소속 |
운수국 | 한희진 | 무소속 |
농림국 | 리순근 | 공산당 |
상업국 | 한동찬 | 무소속 |
우편국 | 조용열 | 공산당 |
재정국 | 리봉수 | 공산당 |
교육국 | 장정식 | 공산당 |
보건국 | 윤기영 | 민주당 |
사법국 | 최용달 | 공산당 |
안전국 | 최용건 | 민주당 |
계획국 | 정진태 | 공산당 |
선전국 | 오기섭 | 공산당 |
총무국 | 리주연 | 공산당 |
이후 한희진은 운수국장 직에서 허남휘로, 한동찬은 상업국장 직에서 장시우로 교체되었다. 오기섭은 1946년 9월 노동국이 신설된 후 노동국장이 되었고, 리종원이 새로운 선전국장이 되었다.[3]
3. 2. 부서 구성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10개 부서와 3개 국(이후 4개 국으로 확대)으로 구성되어 북한 지역의 행정을 담당했다.[3] 각 부서와 국의 책임자는 다음과 같다.직책 | 이름 | 정당 |
---|---|---|
공업국 | 리문환 | 무소속 |
운수국 | 한희진 | 무소속 |
농림국 | 리순근 | 공산당 |
상업국 | 한동찬 | 무소속 |
우편국 | 조용열 | 공산당 |
재정국 | 리봉수 | 공산당 |
교육국 | 장정식 | 공산당 |
보건국 | 윤기영 | 민주당 |
사법국 | 최용달 | 공산당 |
안전국 | 최용건 | 민주당 |
계획국 | 정진태 | 공산당 |
선전국 | 오기섭 | 공산당 |
총무국 | 리주연 | 공산당 |
이후 운수국장은 한희진에서 허남휘로, 상업국장은 한동찬에서 장시우로 교체되었다. 1946년 9월에는 노동국이 신설되어 오기섭이 노동국장으로 임명되었고, 리종원이 새로운 선전국장이 되었다.[3]
4. 개혁
1946년 3월 23일, 김일성은 북조선에서 시행될 개혁의 기초가 된 20개조 정강을 발표했다.[7]
20개조 정강은 다음과 같은 주요 내용을 담고 있다.
- 일본 제국주의 통치의 잔재를 청산하고, 반민주적인 세력에 대한 투쟁, 언론, 출판, 집회, 신앙의 자유 보장
-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권리 보장, 민주적인 사법 제도 확립, 인민 복지 증진을 위한 경제 발전 추구
- 대기업, 운송 기관, 은행 등 국유화, 토지 개혁을 통한 농민에게 토지 무상 분배
- 8시간 노동제 시행 및 최저 임금 규정, 의무 교육 제도 실시, 국가 문화, 과학 및 예술 발전
20개조 정강에 기초하여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개혁 정책들을 추진했다.
- 토지 개혁 (1946년 3월 8일): 일본인, 친일 협력자 등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 분배[8]
- 노동법 제정 (1946년 6월 24일): 8시간 노동제, 동일 임금, 사회 보험 등 규정[8]
- 남녀평등권 법령 제정 (1946년 7월 22일): 여성에게 참정권, 재산권 등 남성과 동등한 권리 부여[8]
- 주요 산업 국유화 (1946년 8월 10일): 북조선 전체 산업의 90% 국유화[8]
- 농업 현물세 도입 (1946년 12월 27일): 농민이 수확량의 25%를 세금으로 납부[8]
4. 1. 20개조 정강
1946년 3월 23일, 김일성은 북한에서 시행될 개혁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는 20개조 정강을 발표했다.[7]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4. 2. 토지 개혁
1946년 3월 8일, 북조선에서 토지개혁이 실시되었다. 이 개혁으로 일본인과 일본 관련 단체, 친일 협력자, 지주, 종교 단체의 토지가 몰수되었다.[8] 몰수된 토지는 42만 가구에 무상으로 분배되었다.[8] 이를 통해 북조선 전체 토지의 52%, 토지 소유권의 82%가 재분배되었다.[8]이러한 토지개혁은 김일성이 1946년 3월 23일에 발표한 20개항 강령에 기초한 것이었다. 20개항 강령의 주요 내용 중 토지 개혁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일본인, 조선인, 반역자, 소작농업을 하는 지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고 소작제도를 폐지한다.
- 몰수한 토지를 모두 무상으로 농민의 소유로 전환한다.
- 국가가 모든 관개시설을 무료로 관리한다.
이러한 내용은 북조선의 토지개혁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4. 3. 노동법 제정
1946년 6월 24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노동자의 권익 보호와 관련된 여러 조항을 담은 노동법을 제정했다.[8]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동 시간: 1일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위험한 작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에게는 7시간 노동제를 적용했다.[8]
- 아동 노동 금지: 14세 미만 아동의 노동을 금지했다.[8]
- 동일 임금 및 사회 보험: 노동자에게 동일 임금과 사회 보험을 제공했다.[8]
이러한 노동 정책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사회주의적 경제 체제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지만, 급격한 변화로 인해 기업 운영에 어려움을 초래했다는 평가도 있다.
4. 4. 남녀평등권 법령
1946년 7월 22일 북조선에서 남녀평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8] 이 법률은 1946년 3월 23일 김일성이 발표한 20개항 강령에 기초하고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별, 신앙, 재산 소유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권리를 보장한다.
- 이전 일본 제국주의 통치 시대에 사용되었고 그 영향을 받은 모든 법률 및 사법 제도를 폐지하고, 민주적 원칙에 따라 인민 사법 제도를 선출하고 모든 시민에게 법에 따른 평등한 권리를 보장한다.
이 법령을 통해 북조선 여성들은 참정권을 얻고, 재산 상속 및 소유, 이혼의 자유 등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
4. 5. 주요 산업 국유화
1946년 8월 10일, 북조선 전체 산업의 90%에 해당하는 1,034개의 주요 산업 시설이 국유화되었다.[8] 이는 김일성이 1946년 3월 23일에 발표한 20개항 강령에 기초한 조치였다. 20개항 강령에는 대기업, 운송 기관, 은행, 광산 및 산림을 국유화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4. 6. 농업세
1946년 12월 27일, 북조선 농민들은 수확량의 25%를 농업세로 납부하기로 결정했다.[8] 이는 국가 재정 확보와 식량 공급 안정을 위한 조치였다.참조
[1]
서적
Economic systems in South and North Korea: the agenda for economic integration
Korea Development Institute
[2]
웹사이트
Establishment of the Provisional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http://contents.hist[...]
2019-01-11
[3]
웹사이트
Organization and Role of the Provisional People's Committee of North Korea
http://db.history.go[...]
2019-01-11
[4]
웹사이트
20-Point Platform
http://ournation-sch[...]
2019-01-11
[5]
서적
Economic systems in South and North Korea: the agenda for economic integration
https://archive.org/[...]
Korea Development Institute
[6]
웹인용
북한, ‘國章 교체’에서도 김일성 우상화 빼놓지 않았다
https://www.dailynk.[...]
2024-01-24
[7]
웹인용
20점 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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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1
[8]
웹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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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b.history.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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