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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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게오르크는 157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되어, 분열된 영지를 통합하고 프로이센을 흡수했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유대인 추방, 재산 몰수 등의 정책을 시행했으며, 궁정 유대인 리폴트를 처형했다. 루터교 신앙을 강화하고, 1574년 베를린에 인문주의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등 긍정적인 면모도 보였다. 그의 치세는 엄격한 긴축 정책과 종교적 갈등, 유대인 박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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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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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
통치 기간 | 1571년 1월 3일 – 1598년 1월 8일 |
선임자 | 요아힘 2세 헥토르 |
후임자 | 요아힘 프리드리히 |
왕가 | 호엔촐레른 |
아버지 | 요아힘 2세 헥토르 |
어머니 | 막달레나 폰 작센 |
배우자 | 조피아 레그니츠카 (1545년 결혼, 1546년 사망) 자비나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1548년 결혼, 1575년 사망) 엘리자베트 폰 안할트-체르프스트 (1577년 결혼) |
자녀 | 요아힘 프리드리히,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에르트무테, 포메른 공작 부인 안나 마리아, 포메른 공작 부인 조피, 작센 선제후 부인 크리스티안,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 변경백 막달레나, 헤센-다름슈타트 방백 부인 요아힘 에른스트,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아그네스, 포메른 및 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 부인 프리드리히 9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엘리자베트 조피아, 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 부인 게오르크 알베르트 2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
출생일 | 1525년 9월 11일 |
출생지 | 쾰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신성 로마 제국 |
사망일 | 1598년 1월 8일 |
사망지 | 쾰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신성 로마 제국 |
매장지 | 베를린 대성당 |
종교 | 루터교 |
2. 생애
요한 게오르크는 루터교 신봉자로서 칼뱅주의에 반대했지만, 종교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각처,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에서 온 프로테스탄트 망명객은 환영하고 보호했다. 그러나 이들 국가의 종교 전쟁에 개입해달라는 요청은 거절했다.[3]
1573년, 요한 게오르크는 브란덴부르크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자산을 몰수했으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 그는 아버지 요아힘 2세의 조폐국장이자 궁정 유대인이었던 리폴트를 경제적 곤궁의 범인으로 지목하여 처형하고, 유대인들에게 가혹한 정책을 시행했다.[3] 유대인들은 브란덴부르크에서 추방되었고, 대부분 프라하나 폴란드로 이주해야 했다. 요한 게오르크는 유대인의 브란덴부르크 정착을 금지했지만, 이 규정은 167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포고령에 의해 개정되었다.
1577년, 마르틴 루터 사후 신학 논쟁을 종결하기 위한 화해 신조에 서명했고,[7] 변경령 내 교회의 모든 목사와 교사를 1577년 7월 22일에 베를린으로 불러 루터파 신앙 고백을 하게 했다.[8] 1580년에는 콩코르디엔 서에도 서명했다.[9]
그는 중용과 불변성을 중시하여 새로운 것을 싫어했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의 역법 개혁을 도입하지 않았다.
요한 게오르크는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 조피 레그니츠카에게서 요아힘 프리드리히를 얻었다. 두 번째 부인 사비나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는 친척인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이었다. 세 번째 부인은 엘리자베트 폰 안할트였다.
2. 1. 초기 생애
브란덴부르크 쾰른안데어슈프레에서 요아힘 2세 헥토르어와 작센의 막달레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560년, 브란덴부르크 주교 요아힘 폰 뮌스터베르크는 요한 게오르크를 지지하여 브란덴부르크 주교령을 포기했고, 게오르크가 그 통치자가 되었다.1571년 아버지 요아힘 2세의 뒤를 이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 취임했다. 조부인 선제후 요아힘 1세가 사망한 후, 브란덴부르크 영지는 아버지 요아힘 2세의 선제후령과 그의 동생 요한의 브란덴부르크-퀴스트린 변경백령으로서의 노이마르크 영지로 분할되었다. 1570년, 요한 게오르크는 장남 요아힘 프리드리히와 숙부 브란덴부르크-퀴스트린 변경백 요한의 딸 카타리나를 결혼시켰다. 다음 해인 1571년 요한이 아들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브란덴부르크-퀴스트린 변경백령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에 편입했다.
2. 2.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1571년 아버지 요아힘 2세의 뒤를 이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 취임했으며, 분열된 브란덴부르크를 정리한 뒤 프로이센을 흡수하였다. 프로이센은 본래 폴란드의 속령으로, 1568년 프로이센의 초대 공작 알브레히트 프로이센이 사망하자 알브레히트의 어린 아들인 알브레히트 2세 프리드리히의 후견인이자 섭정, 공동 통치자 역할을 수행했다.[11]알브레히트 프로이센은 브란덴부르크선제후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의 손자이자 요한 게오르크의 할아버지인 요아힘 1세 네스토르의 사촌 동생이었다. 알브레히트 2세 프리드리히는 그보다 나이가 28세나 어렸으나 요한 게오르크에게는 당숙부 뻘이 되었다. 그는 모든 서류, 물자에 대한 절약정책을 꼼꼼히 단행하여 집사(Oekonom)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한편 농민들을 희생시키면서 귀족과 지주들에게 특권을 주었기 때문에 귀족, 지주들의 지지를 받았다. 루터교 신봉자였던 그는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각처, 그리고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에서 오는 프로테스탄트 망명객을 환영하고 보호하였으나, 이들 나라의 종교전쟁에 개입해달라는 프로테스탄트 제후국 군주나 귀족, 지식인들의 요청은 거절하였다.
요한 게오르크는 아버지의 통치 기간 동안 누적된 250만 길더에 달하는 막대한 부채에 직면하여 곡물세를 도입했는데, 이로 인해 일부 농민들은 과세가 면제된 귀족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그는 1573년 브란덴부르크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자산을 몰수했으며, 그들의 귀환을 금지했다.[3] 그는 칼뱅주의의 부흥에 반대하는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지만,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전쟁에서 온 칼뱅주의 난민들의 입국을 허용했다. 1574년 7월 13일, 그는 베를린 최초의 인문주의 교육 기관인 베를린 그라우엔 클로스터 김나지움을 설립했다.
1570년, 요한 게오르크는 장남 요아힘 프리드리히와 숙부 브란덴부르크-퀴스트린 변경백 요한의 딸 카타리나를 결혼시켰다. 다음 해인 1571년 요한이 아들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브란덴부르크-퀴스트린 변경백령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에 편입했다.
요한 게오르크는 1571년 1월 3일 쾨페니크 성에서 사망한 아버지 요아힘 2세로부터 250만 길더의 빚을 물려받았다. 베를린에 있는 아버지의 하인들의 모든 집을 수색하고 봉쇄하도록 조치했으며, 동시에 베를린의 유대인에 대한 박해 행위를 허가하여, 클로스터 거리 북쪽(현재는 카를 리프크네히트 거리 북쪽)에 있는 소 유대인관(클라이너 유덴호프)의 시나고그는 파괴되고, 대부분의 유대인의 집이 약탈되었다.[3] 약탈자들은 훔친 약속 어음을 불태웠다. 그와는 반대로, 상인 그리벤과 같은 루터교의 중요한 채권자는 선제후의 보호에 의존할 수 있었다. 요한 게오르크는 그 후, 이처럼 공격이나 피해를 입은 유대인에게 통행 금지령을 내렸다.
요한 게오르크 리폴트는 아버지의 조폐국장이자 궁정 유대인이기도 했던 벤 풀힘을 경제적 곤궁의 범인으로 유죄 판결하고, 1571년에 국가 수입 횡령과 부당 이득 혐의로 고발했다. 궁정 유대인으로서 리폴트는 대출자였기 때문에, 지급되는 이자로 돈을 벌고 있었다. 요아힘 2세 생전에도 이자 액수에 대한 불만이 있었지만, 요아힘 2세는 이를 거부했다. 리폴트는 브란덴부르크의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에 있는 루터파 금융업자가 더 높은 금리를 부과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지만, 영내의 통화 가치가 하락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요아힘 2세의 죽음은 리폴트의 귀족, 상인, 기타 채무자뿐만 아니라 새로운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에게도 유대인 채권자를 내쫓을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횡령 재판에서, 법정은 모든 자료를 조사한 후, 리폴트의 무죄를 선고했다. 그뿐만 아니라, 재판관은 요아힘 2세가 리폴트에게 여전히 89 탈러 5 그로셴 은화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4]
그 동안, 브란덴부르크 수상 람파트 디스텔마이어 수상은 리폴트의 채무자에게 상쇄 질권을 넘겨주고, 법적 근거도 없이 변제 없는 약속 어음을 발행했다. 그러나 반대파는 멈추지 않았고, 공판 전 구류 3개월 후에 자택 연금 상태에 있던 리폴트는 석방되지 않았지만, 1573년에 자택 연금이 종료되기 3일 전에, 리폴트는 허위 혐의를 받았다. 마술과 살인 혐의로, 카롤리나 형사 법전 제44조에 따라 수치스러운 재판에 회부되었다.[5][6] 마술 혐의로 고문 사용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요한 게오르크 리폴트는 고문을 받아, 고용주이자 보호자인 요아힘 2세를 독살했다는 자백을 했다.
리폴트는 1573년 1월 28일에 사형 판결을 받고, 사지가 찢기는 형벌에 처해졌다. 리폴트의 죽음은 요아힘 2세 아래에서 영내 누구보다도 고액의 강제 징수금과 세금을 지불해야 했던 변경백령의 유대인에게, 더욱 어려운 시기가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요한 게오르크는 늦어도 1573년 2월 1일까지 추방을 명령했지만,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자산을 청산하여 게오르크에게 지불해야 했다. 유대인 대부분은 프라하로 갔고, 또, 많은 이들이 폴란드로 가서, 폴란드 왕카지미에시 3세가 유대인에게 보호장을 발행했다. 요한 게오르크는 유대인이 브란덴부르크에 정착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이 규정은 1671년에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포고령에 의해 처음으로 개정되었다.
이러한 잔혹한 과도한 정책 이후, 요한 게오르크는 1574년 7월 13일에 베를린에 최초의 인문주의 교육 기관, 그레이 수도원의 프로테스탄트 김나지움을 설립했다. 무엇보다도, 요한 게오르크는 아버지의 고액의 궁정에서의 지출을 보충하려 노력했다. 쿠어마르크의 채무 초과에 대한 우려와, 빚의 효율적인 관리와 변제로 인해, 요한 게오르크는 경제가(''Oeconomicus'')라는 별명이 붙었다.
제국 내 루터파 지역이 1577년에 마르틴 루터의 사망 후, 신학 논쟁을 화해 신조에 의해 종결하려 했을 때, 요한 게오르크는 문서에 서명했고,[7] 변경령 내 교회의 모든 목사와 교사를 1577년 7월 22일에 베를린으로 불러, 루터파에 대해 신앙 고백을 시켰다.[8] 또한, 요한 게오르크는 1580년의 콩코르디엔 서에도 서명했다.[9]
중용과 불변성을 중시한 선제후는 새로운 것을 싫어했다. 또한, 베틴 가문이나 유럽의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군주처럼, 교황 그레고리 13세의 역법 개혁을 도입하지 않았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요아힘 프리드리히가 선제후가 되었다.
2. 3. 프로이센과의 관계
1571년 아버지 요아힘 2세의 뒤를 이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 취임했으며, 분열된 브란덴부르크를 정리한 뒤 프로이센을 흡수하였다. 프로이센은 본래 폴란드의 속령으로, 1568년 프로이센의 초대 공작 알브레히트 프로이센이 사망하자 그의 어린 아들인 알브레히트 2세 프리드리히의 후견인이자 섭정, 공동 통치자 역할을 수행했다.[11]알브레히트 프로이센은 브란덴부르크선제후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의 손자이자 요한 게오르크의 할아버지인 요아힘 1세 네스토르의 사촌 동생이었다. 알브레히트 2세 프리드리히는 그보다 나이가 28세나 어렸으나 요한 게오르크에게는 당숙부 뻘이 되었다.
1568년 그의 친척 알베르트 1세가 사망하자, 프로이센 공국은 그의 미성년 아들 알베르트 프리드리히에게 상속되었다. 요한 게오르크의 아버지는 프로이센 공국의 공동 상속인이었다. 1577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프로이센 공작 알베르트 프리드리히와 공동 섭정이 되었다.
2. 4. 종교 정책
요한 게오르크는 루터교 신봉자였으며, 칼뱅주의에 반대했다. 그러나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프랑스에서 종교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칼뱅주의 난민들의 입국은 허용했다.[3] 그는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각처,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에서 온 프로테스탄트 망명객을 환영하고 보호하였으나, 이들 나라의 종교전쟁에 개입해달라는 프로테스탄트 제후국 군주, 귀족, 지식인들의 요청은 거절하였다.1573년, 요한 게오르크는 브란덴부르크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자산을 몰수했으며, 귀환을 금지했다. 그는 아버지 요아힘 2세의 조폐국장이자 궁정 유대인이었던 리폴트를 경제적 곤궁의 범인으로 지목하여 처형하고, 유대인들에게 가혹한 정책을 시행했다. 유대인들은 브란덴부르크에서 추방되었고, 대부분 프라하나 폴란드로 이주해야 했다. 요한 게오르크는 유대인의 브란덴부르크 정착을 금지했지만, 이 규정은 167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포고령에 의해 개정되었다.
1574년 7월 13일, 그는 베를린 최초의 인문주의 교육 기관인 베를린 그라우엔 클로스터 김나지움을 설립했다.
1577년, 마르틴 루터 사후 신학 논쟁을 종결하기 위한 화해 신조에 서명했고,[7] 변경령 내 교회의 모든 목사와 교사를 1577년 7월 22일에 베를린으로 불러 루터파 신앙 고백을 하게 했다.[8] 1580년에는 콩코르디엔 서에도 서명했다.[9]
그는 중용과 불변성을 중시하여 새로운 것을 싫어했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의 역법 개혁을 도입하지 않았다.
2. 5. 유대인 추방과 리폴트 사건
요한 게오르크는 아버지 통치 기간 동안 쌓인 250만 길더의 빚을 해결하기 위해 곡물세를 도입했다. 이로 인해 일부 농민들은 세금 면제를 받는 귀족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1573년, 그는 브란덴부르크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자산을 몰수했으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3]요한 게오르크는 아버지 요아힘 2세의 재정 담당이자 궁정 유대인이었던 리폴트를 경제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1571년, 리폴트는 국가 수입 횡령과 부당 이득 혐의로 고발되었다. 리폴트는 대출을 통해 이자를 받아 돈을 벌고 있었는데, 요아힘 2세 시절에도 이자 금액에 대한 불만이 있었지만, 요아힘 2세는 이를 무시했다. 리폴트는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의 루터파 금융업자들이 더 높은 금리를 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지만, 당시 통화 가치 하락을 고려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요아힘 2세가 사망하면서, 귀족, 상인, 기타 채무자들뿐만 아니라 요한 게오르크에게도 유대인 채권자를 몰아낼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횡령 재판에서 법정은 모든 자료를 검토한 후 리폴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오히려 재판관은 요아힘 2세가 리폴트에게 89 탈러 5 그로셴 은화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4]
하지만 반대파는 멈추지 않았고, 3개월간의 구류와 자택 연금 후에도 리폴트는 석방되지 않았다. 1573년, 자택 연금이 끝나기 3일 전, 리폴트는 마술과 살인이라는 거짓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카롤리나 형사 법전 제44조에 따라 마술 혐의에 대한 고문이 허용되었고, 요한 게오르크는 리폴트를 고문하여 요아힘 2세를 독살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5][6]
1573년 1월 28일, 리폴트는 사형 선고를 받고 사지가 찢기는 형벌에 처해졌다. 요한 게오르크는 1573년 2월 1일까지 유대인 추방을 명령했고, 유대인들은 자산을 처분하여 요한 게오르크에게 빚을 갚아야 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프라하로 떠났고, 많은 이들이 폴란드로 가서 폴란드 왕카지미에시 3세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요한 게오르크는 유대인들이 브란덴부르크에 정착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이 규정은 167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포고령에 의해 처음으로 바뀌었다.
2. 6. 교육 정책
요한 게오르크는 1574년 7월 13일, 베를린 최초의 인문주의 교육 기관인 베를린 그라우엔 클로스터 김나지움을 설립했다.[3] 이곳은 프로테스탄트 김나지움이었다.[7]2. 7. 가족 관계
요한 게오르크는 세 번 결혼했다.배우자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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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피 레그니츠카 (1525년경 – 1546년 2월 6일) | 요아힘 프리드리히 (1546년 1월 27일 – 1608년 7월 18일) |
사비나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1529년 5월 12일 – 1575년 11월 2일) | |
엘리자베트 폰 안할트 (1563년 9월 15일 – 1607년 10월 5일) |
요한 게오르크 사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베를린 승리의 거리에 동상을 중심으로 한 기념비군이 설치되는 등 다양한 기념물들이 제작되었다.
3. 유산
3. 1. 베를린 승리의 거리 조각
조각가 마르틴 볼프는 베를린에 있던 승리의 거리 조각을 위해 요한 게오르크의 동상을 중심으로 한 기념비군 21개를 설계했다. 가슴에 십자가를 든 요한 게오르크의 동상은 종교 문제에 대한 선제후의 엄격함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 게오르크는 팔걸이 의자 등받이에 앉아 있으며, 그 위에는 슈판다우 요새의 설계도가 놓여 있다. 양옆에는 요새의 주요 건축가였던 로푸스 추 라이나르 백작과, 게오르크의 엄격한 긴축 정책을 지지한 람파트 디스텔마이어 수상의 흉상이 있었다. 그 기념비군의 제막식은 1901년 12월 18일에 거행되었다.
4. 평가
(소스에 내용 없음)
참조
[1]
웹사이트
Princess Sabine zu Brandenburg, Electress of Brandenburg
http://www.ourfamily[...]
2015-11-14
[2]
웹사이트
Sabine Princess of Brandenburg
http://www.tree.fami[...]
2015-11-14
[3]
서적
Geschichte der Juden in Berlin und in der Mark Brandenburg
Kedem, Berlin
1937
[4]
서적
Geschichte der Juden in Berlin und in der Mark Brandenburg
Kedem, Berlin
1937
[5]
서적
Brandenburgische Geschichte
http://books.google.[...]
Akademie Verlag, Berlin
1995
[6]
서적
Geschichte des teutschen Handels. Der Schiffarth, Fischerei, Erfindungen, Künste, Gewerbe, Manufakturen, der Landwirthschaft, Polizey, Leibeigenschaft, des Zoll-, Münz- und Bergwesens, des Wechselrechts, der Stadtwirthschaft, und des Luxus
http://books.google.[...]
Helwing, Hannover
1792
[7]
서적
Bekenntnisschriften der evangelisch-lutherischen Kirche
[8]
서적
"Geh aus, mein Herz, und suche Freud …" Zum historischen Kontext der Lieder von Paul Gerhardt
https://berlingeschi[...]
[9]
서적
Bekenntnisschriften der evangelisch-lutherischen Kirche
[10]
서적
Der Kaiser und die Siegesallee. Réclame Royale
Dietrich Reimer Verlag, Berlin
1998
[11]
문서
요한 게오르크에게는 종조 할아버지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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