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슬라우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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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레슬라우 조약은 1742년 7월 28일 베를린에서 조인된 조약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을 종결시켰다. 이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 공국의 대부분과 클라츠코 백국을 프로이센에 할양했으며, 프로이센은 차기 신성 로마 황제 선거에서 프란츠 1세에게 투표하기로 했다. 조약 체결 이후에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지속되었으며, 이 조약으로 결정된 국경선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현재 체코와 폴란드의 국경선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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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2년 오스트리아 - 코투지츠 전투
코투지츠 전투는 1742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지휘하여 승리한 전투로, 슐레지엔 지배를 굳건히 하고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을 종결하는 데 기여했으며, 프로이센은 이 전투를 통해 사기와 기병 훈련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 브레슬라우 조약 | |
|---|---|
| 조약 정보 | |
| 이름 | 브레슬라우 조약 |
| 원어 이름 (독일어) | Vorfrieden von Breslau |
| 원어 이름 (체코어) | Vratislavský mír |
| 원어 이름 (폴란드어) | Pokój wrocławski |
| 서명일 | 1742년 6월 11일 |
| 서명 장소 | 브로츠와프, 실레시아 |
| 효력 발생일 | 1742년 7월 28일 |
| 효력 발생 조건 | 베를린 조약 |
| 서명국 |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
| 사용 언어 | 프랑스어 |
| 개요 | |
| 내용 | 제1차 실레시아 전쟁 종결 |
| 관련 | 클라인슈넬렌도르프의 비밀 협약 |
2. 배경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1713년 국사 조칙에 따라 왕위를 계승한 상황을 이용하여 1740년 실레지아(슐레지엔)를 침공하여 점령했다. 오스트리아는 실레지아를 되찾기 위해 여러 차례 군사적 대응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1] 오히려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은 프랑스, 작센, 바이에른 등이 보헤미아에서 군사 작전을 펼치면서 전쟁은 확대되었다.
특히 1742년 5월 17일 코투지츠 전투에서의 패배는 오스트리아에게 큰 타격이었다.[1]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동쪽의 프로이센과 서쪽의 프랑스 및 그 동맹국들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심각한 군사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2] 이러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의 전통적인 동맹국이었던 영국은 오스트리아가 대 프랑스 전쟁에 집중하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프로이센과의 강화를 강력히 요구했다. 영국은 오스트리아에 막대한 전쟁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2] 마리아 테레지아는 영국의 요구를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웠다. 결국 이러한 군사적, 외교적 압박 속에서 영국의 중재 하에 프로이센과의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고, 이는 브레슬라우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1]
2. 1. 클라인-슈넬렌도르프 밀약과 코투지츠 전투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1713년 국사 조칙에 따라 보헤미아 여왕으로 즉위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1740년부터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영토였던 실레지아(슐레지엔)를 점령했다. 오스트리아는 침략자를 몰아내려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프리드리히 2세의 동맹국인 프랑스, 작센, 바이에른 군대는 인접한 보헤미아 영토에서 군사 작전을 펼쳤다.
1741년 가을부터 비밀리에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고, 클라인-슈넬렌도르프 밀약으로 잠시 정전하기도 했으나 양국은 곧 전투를 재개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보헤미아를 침공하여 1742년 5월 17일 코투지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실레지아를 넘겨주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코투지츠 전투에서 패배하고 보헤미아의 프랑스군을 격퇴하는 데도 실패하자, 프로이센과 프랑스라는 양쪽의 적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또한, 전통적인 동맹국인 영국은 참전의 조건으로 프로이센과의 강화를 맺고 프랑스에 전력을 집중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영국으로부터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를 계속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결국 유럽에서의 추가적인 전쟁 확산을 막으려 했던 대영 제국의 특사 존 카마이클, 3대 하인드퍼드 백작(프리드리히 2세에게 "악당"으로 조롱받기도 함)의 중재를 통해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2. 2. 영국의 중재
클라인-슈네렌도르프 밀약으로 잠시 정전했던 전쟁은 곧 재개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슐레지엔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1742년 5월 17일 벌어진 코투지츠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에게 패배했다.[1] 또한 보헤미아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격퇴하는 데도 실패하면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 프랑스 양쪽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2]이러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의 전통적인 동맹국이었던 영국은 참전의 조건으로 프로이센과의 강화를 우선하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집중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영국은 오스트리아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영국의 요구를 더 이상 무시하기 어려웠다.[2]
1741년 가을부터 비밀리에 평화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지만,[1] 코투지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하면서 협상에 속도가 붙었다. 유럽 대륙에서의 전쟁 확대를 막고자 했던 대영 제국은 특사인 제3대 하인드퍼드 백작 존 카마이클을 파견하여 양국 간의 평화 협상을 중재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하인드퍼드 백작을 "악당"이라고 조롱하기도 했으나, 결국 영국의 중재를 통해 평화 조약 체결이 이루어졌다.[1]
3. 내용
-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이탈한다.
-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 공국의 거의 모든 지역과 보헤미아의 클라츠코 백작령을 프로이센에 할양한다.
- 국경은 수데테 산맥과 오파바강을 기준으로 정해졌다.
- 테신 공국, 크르노프 공국, 오파바 공국의 대부분 지역과 니사 공국의 일부는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으로 남아 오스트리아 영토로 남았다.
- 영국과 네덜란드가 슐레지엔의 세수를 담보로 가지고 있던 오스트리아 채권 약 170만 탈러는 프로이센이 인수한다.
- 프로이센은 다음 신성 로마 황제 선거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1세에게 투표하기로 약속한다.
이 조약은 일반적으로 '브레슬라우 조약'으로 불리지만, 실제 서명은 베를린에서 이루어졌다.[1] 이 조약은 1742년 7월 28일에 최종적으로 체결된 베를린 조약 (1742)과 함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일부인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시켰다. 이 조약을 통해 확정된 슐레지엔의 분할 경계선은 이후 약간의 변경(1920년 흘루친 지역 합병 등)을 제외하고는 오늘날 체코와 폴란드 사이 국경의 기초가 되었다.
4. 결과 및 영향
브레슬라우 조약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양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로이센은 슐레지엔 대부분과 클라츠코 백국을 획득하며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핵심 산업 지역인 슐레지엔을 상실하며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조약은 1742년 베를린 조약과 함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일부인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시키는 역할을 했다.[1] 공식 명칭과는 달리 실제 조약 서명은 베를린에서 이루어졌다.[1] 또한, 이때 확정된 슐레지엔 분할 경계는 이후 약간의 조정을 거쳐 오늘날 체코와 폴란드 사이 국경의 기초를 형성하게 되었다.
4. 1. 프로이센의 성장과 오스트리아의 손실
조약의 결과, 프로이센은 영토를 크게 확장하며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반면, 오스트리아는 핵심 영토인 슐레지엔 대부분을 상실하는 손실을 입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조약을 통해 상당한 영토를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에 할양해야 했다.조약의 주요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이탈한다.
-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 공국의 거의 전역과 보헤미아의 클라츠코 백국을 프로이센 왕국에 할양한다.
- 할양되는 영토의 경계는 수데테 산맥과 오파 강을 기준으로 정해졌다. 다만, 테셴 공국, 크르노프 공국과 오파바 공국의 오파 강 남쪽 지역 대부분, 그리고 니사 공국의 남쪽 일부는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으로 남아 오스트리아 영토로 유지되었다.
- 프로이센은 영국과 네덜란드가 가지고 있던, 슐레지엔의 세수를 담보로 한 오스트리아 채권 약 170만 탈러를 인수한다. 이는 오스트리아의 재정적 부담을 일부 덜어주는 대신 프로이센이 슐레지엔 지역에 대한 경제적 권리까지 확보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 프로이센은 다음 신성 로마 황제 선거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1세에게 투표하기로 약속한다. 이는 프로이센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제위 계승을 간접적으로 지지하는 대가로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담겨 있었다.
이 조약은 공식 명칭인 '브레슬라우 조약'과는 달리 실제로는 베를린에서 서명되었다.[1] 1742년 7월 28일에 체결된 베를린 조약과 함께, 이 조약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일부인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시켰다.
이때 확정된 슐레지엔의 분할 경계는 이후 체신 슐레지아 분할과 1920년 흘루친 지역의 합병 등 약간의 변경을 제외하고는 오늘날 체코와 폴란드 사이 국경의 기초가 되었다.
4. 2. 체코-폴란드 국경
브레슬라우 조약의 조건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 공국의 거의 전역과 클라트스코 백작령을 프로이센에 할양했다. 이로 인해 새로운 국경선이 설정되었는데, 수데티산맥과 오파바강을 기준으로 삼았다.그러나 모든 슐레지엔 지역이 프로이센으로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테센 공국, 크르노프 공국, 오파바 공국의 대부분, 그리고 니사 공국의 일부는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으로 남게 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1742년에 확정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경계선은 이후 역사적 변동을 거치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20년의 체신 슐레지아 분할과 흘루친 지역 합병과 같은 일부 예외적인 조정을 제외하면, 이 경계선은 오늘날 체코와 폴란드 사이 국경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참조
[1]
서적
Lodge p. 4
[2]
서적
Lodge p.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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