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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투지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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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투지츠 전투는 1742년 5월 17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직접 지휘하여 승리했으며, 이 전투는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지배를 굳건히 하고, 브레슬라우 조약을 통해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을 종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전투를 통해 프로이센은 사기가 화력보다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었고, 기병 훈련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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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투지츠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코투지츠 전투
"코투지츠와 차슬라우 전투" (G. P. 부쉬의 판화)
일부제1차 슐레지엔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날짜1742년 5월 17일
장소보헤미아, 코투지체
좌표49°56′57″N 15°23′40″E
결과프로이센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오스트리아
교전국 2프로이센 왕국
지휘관 및 지도자
오스트리아로트링겐 공자 카를 알렉산더
카를 요제프 바트야니
레오폴트 요제프 폰 다운
리히텐슈타인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대왕
레오폴트 2세, 안할트-데사우 공
빌헬름 디트리히 폰 부덴브로크
프리드리히 지그문트 폰 발도우
병력 규모
오스트리아25,000 – 30,000명
프로이센25,000 – 28,000명
사상자 및 피해
오스트리아사망, 부상, 실종 5,100 – 7,000명, 포로 1,200명
프로이센사망, 부상, 실종 4,900 – 7,000명
추가 정보
프리드리히 대왕
프리드리히 대왕

2. 배경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1762년경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 영토인 슐레지엔을 점령했다. 1742년 봄, 오스트리아군은 로렌의 카를 공작의 지휘 아래 반격을 준비하며 보헤미아로 진격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 역시 군대를 이동시켜 오스트리아군의 움직임에 대응했다. 1742년 5월, 양측 군대는 쿠트나 호라 인근의 작은 마을 호투시체(Chotusice)에서 예상치 못하게 마주치게 되면서 코투지츠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2. 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하고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합스부르크 군주국을 계승하면서 시작되었다. 본래 살리카법에 따라 여성의 상속이 금지되었으나, 1713년 국사 조칙을 통해 마리아 테레지아가 부친의 지위를 이을 수 있도록 미리 정해두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지만, 바이에른, 프로이센, 작센과 같은 신흥 세력들은 국사 조칙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에 반대했다. 이들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합스부르크 영토 중 중요한 산업 지역인 보헤미아 왕관령(슐레지엔, 모라비아, 보헤미아 포함)을 침공했다. 특히 프리드리히 2세는 제국 전체 수입의 10%를 차지하는 부유한 지역인 슐레지엔을 점령하여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을 일으켰고, 이는 오스트리아에 큰 경제적 타격을 주었다.

1741년 4월, 프리드리히 2세는 몰비츠 전투에서 승리하며 슐레지엔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이 프라하를 점령했다. 바이에른의 카를은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했고, 1742년 2월 12일에는 1437년 이래 처음으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 아닌 신성 로마 제국 황제(카를 7세)가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겨울철 공세를 통해 반격에 나섰다. 1742년 2월 말, 폰 케벤휠러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뮌헨을 포함한 바이에른의 대부분과 보헤미아의 상당 부분을 탈환했다.

오스트리아는 정규군 외에도 판두어와 같은 비정규 부대를 활용한 게릴라전으로 프로이센군의 보급선과 통신선을 교란하며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이에 프로이센의 한 장교는 "이 도둑과 강도들은... 제대로 된 용감한 군인처럼 전투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1742년 3월 모라비아로 진격하여 지드호비체에 주둔하며 을 위협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한편, 오스트리아는 보헤미아 각지의 수비 병력을 모아 로렌의 카를 공작 휘하에 28,000명의 야전군을 편성하여 프라하 탈환을 준비했다. 로렌의 카를은 신중하고 방어적인 성향의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군의 움직임에 맞서 공세로 전환하여 보헤미아 북동부로 이동했다. 5월 16일, 그는 쿠트나 호라에 보병 10,000명을 배치했고, 안할트데사우의 레오폴트가 이끄는 18,000명의 병력이 하루 행군 거리 뒤에서 따르고 있었다.

카를의 오스트리아군은 예상보다 가까이 있었다. 5월 16일 오후,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레오폴트 부대의 후위와 마주쳤다. 오스트리아 주력군과 접촉했음을 인지한 레오폴트는 프리드리히 2세와의 합류를 서둘렀다. 5월 17일 새벽 2시, 지친 프로이센군은 쿠트나 호라에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 호투시체(Chotusice)에 멈춰 섰고, 이는 코투지츠 전투의 서막이 되었다.

2. 2.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침공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하고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전까지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여성이 상속받을 수 없다는 살리카법의 적용을 받았으나, 1713년 국사 조칙으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 프로이센, 작센과 같은 신흥 세력의 도전을 받았다. 이들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과 국사 조칙의 유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이들 국가는 유럽의 주요 산업 지역이었던 보헤미아 왕관 지역(슐레지엔, 모라비아, 보헤미아 포함)을 침공했다. 특히 프리드리히 2세는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을 일으켜 슐레지엔을 점령했다. 슐레지엔은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 전체 수입의 약 10%를 차지하는 매우 부유한 지역이었기에, 이곳을 빼앗긴 것은 오스트리아에 큰 타격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1741년 4월 몰비츠 전투에서 승리하며 슐레지엔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2. 3. 1742년 봄의 전황

1742년 봄, 프로이센군은 모라비아에서의 작전을 포기하고 보헤미아 북동부로 물러나 휴식과 증원을 통해 전력을 재정비했다. 프리드리히 2세엘베강 방어선을 유지하며 프라하에 주둔한 프랑스군과의 연락을 유지하려 했지만, 브로이 공작과의 협조가 원활하지 않고 작센이 전선에서 이탈하자 불만을 느껴 단독으로 강화를 추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포데빌스에게 영국을 통해 오스트리아와의 평화 교섭을 다시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모라비아를 되찾은 오스트리아군은 카를 공자와 쾨니히스에그의 지휘 아래 북서쪽으로 진격했다. 이들의 목표는 프로이센군과 프라하 사이의 연락을 차단하고 동쪽에서 프라하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작센군이 철수하면서 사자바 강 유역의 방어선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진군할 수 있었다. 선두에 선 후사르 부대 일부는 엘베강까지 도달하여 프로이센군이 설치한 보급 기지를 위협했다.

오스트리아군의 움직임을 파악한 프리드리히 2세는 프라하와의 연락선을 지키기 위해 전투를 결심하고, 프로이센군을 쿠르짐에 집결시켰다. 오스트리아 후사르가 콜린의 다리를 점령했다는 보고를 받자,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군보다 먼저 쿠텐베르크를 확보하여 엘베 강 남쪽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고 보급 기지를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5월 15일, 그는 직접 전군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쿠르짐을 먼저 출발했으며, 나머지 주력 부대는 젊은 데사우 공이 보급 부대와 함께 지휘하며 뒤따랐다.

3. 양군의 기동

1742년 봄, 모라비아에서의 작전을 포기한 프로이센군보헤미아 북동부로 철수하여 병력을 재정비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엘베강 유역을 확보하여 프라하프랑스군과 연락을 유지하고자 했으나, 브로이와의 협력 부족과 작센 공국의 이탈에 실망하여 영국을 통한 오스트리아와의 단독 강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한편, 카를 공자와 쾨니히스에그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은 모라비아를 되찾은 후, 프로이센군과 프라하의 연락을 차단하며 동쪽에서 프라하를 공격할 계획으로 북서쪽으로 진군했다. 작센군 철수로 방어선이 없어진 사자바강을 따라 오스트리아군은 저항 없이 진격했고, 선발 후사르 부대는 엘베 강에 도달하여 프로이센군의 보급 기지를 위협했다.

오스트리아군의 움직임을 파악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라하와의 연락선을 지키기 위해 결전을 결심하고 쿠르짐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오스트리아 후사르가 콜린의 다리를 점령했다는 보고를 받자, 대왕은 오스트리아군보다 먼저 쿠텐베르크를 점령하여 엘베 강 남쪽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고 기지를 확보하기로 결정했다. 5월 15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약 1만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쿠르짐을 출발했으며, 젊은 데사우 공작이 지휘하는 주력 부대와 보급 부대가 뒤따랐다.

5월 16일, 쿠텐베르크로 향하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포드호르잔 언덕 남쪽 빌리모우에서 수천 명 규모의 오스트리아군을 발견했다. 대왕은 이 부대를 블타바강 방면에서 온 로프코비츠의 군대로 오판하고, 젊은 데사우에게 빈터펠트를 보내 새벽에 차슬라프로 향하라고 지시했다. 대왕은 행군을 멈추고 방어 태세를 갖추며 밤새 기습에 대비했다.

그러나 이 오스트리아군은 동쪽에서 온 카를 공작 군대의 선봉이었다. 카를 공작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예상보다 빠르게 서진하고 있었으며, 몰비츠 전투 때와 달리 잘 정비된 군대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빌리모우에서 프로이센군을 발견한 카를 공작은 공격을 결심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북쪽 로노우로 행군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근처에 젊은 데사우가 이끄는 더 큰 규모의 프로이센 주력 부대가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같은 날, 빌리모우에서 오스트리아군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은 프리드리히 대왕은 로프코비츠가 동쪽으로 이동했다고 다시 오판했다. 그는 슈메타우를 보내 젊은 데사우에게 차슬라프에 도착하면 북서쪽에 진지를 구축하고 쿠텐베르크의 대왕군과 연락선을 확보하여 엘베 강을 통한 보급을 받으면서 오스트리아군의 쿠텐베르크 진격을 막으라고 명령했다. 이후 대왕군은 쿠텐베르크로 행군을 재개했다.

보급 부대를 분리하고 행군하던 젊은 데사우는 새로운 명령을 받고 대왕군을 따라 포드호르잔에 도착했다. 그곳의 오스트리아 경보병을 몰아낸 직후, 그는 바로 근처 로노우에 카를 공작의 본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프로이센 정찰대는 빌리모우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카를 공작 군을 발견하지 못했다.

우세한 적을 눈앞에 둔 젊은 데사우는 위험을 감지하고 즉시 대왕에게 합류를 요청하는 보고를 보냈다. 차슬라프 선점이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북쪽의 코투지츠로 쉬지 않고 행군했다. 차슬라프 주변에 이미 전개된 오스트리아 경기병 및 경보병과의 교전으로 프로이센군의 행군은 지체되었다. 한편, 갑자기 나타난 젊은 데사우 군의 규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지형적으로 공격이 어렵다고 판단한 카를 공작은 공격을 보류했다.

밤이 되자 젊은 데사우 군은 코투지츠 마을 주변을 확보하고 북쪽에 진지를 구축했다. 첫 전령이 오스트리아군에게 붙잡혀 대왕으로부터 회신이 없자, 젊은 데사우는 뷔로우를 다시 보내 합류와 식량 보급을 요청했다. 굶주린 병사들은 묽은 죽으로 버텼지만, 주변을 배회하는 오스트리아 경보병 때문에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 무렵 쿠텐베르크를 점령하고 콜린에 병사를 보내 엘베 강 보급로를 확보하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카를 공작 군과의 거리가 아직 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야에 뷔로우가 도착하여 젊은 데사우의 위급한 상황을 보고하자 비로소 실제 상황을 파악했다. 대왕은 즉시 식량을 코투지츠로 보내고, 군대는 새벽 전에 출발하여 아침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카를 공작은 나다스디의 후사르 부대로부터 프로이센군은 쿠텐베르크에 주둔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이를 기습 공격하기 위해 야간 행군을 결정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로노우의 진지에 차량과 텐트를 남겨두고 차슬라프로 이동했다.

5월 17일 이른 아침, 카를 공작 군은 차슬라프에 도착하여 쿠텐베르크로 향하기 위해 마을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전 5시경, 오스트리아군 선봉 부대는 차슬라프 북쪽 브르슈렌카 강 부근에서 젊은 데사우의 경계 부대와 예상치 못하게 접촉하여 교전을 벌였다. 오스트리아군은 16일 조우 이후에도 젊은 데사우 군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기에 이 접촉은 예상 밖이었다. 당황한 카를 공작과 쾨니히스에크는 계획을 변경하여 눈앞의 적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코투지츠를 향해 북상했지만, 브르슈렌카 강을 건너는 데 시간이 걸려 공격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는 이미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로 인해 카를 공작은 프로이센군이 분산된 상태에서 공격할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4. 전투

프리드리히가 도착할 때까지 진지를 사수하라는 지시를 받은 레오폴트는 코투지츠 남쪽에 병력을 배치했다. 보병은 남동쪽을 향하고 기병은 양 측면에 배치되었는데, 좌익은 발도(Waldow)가, 우익은 폰 부덴브로크(von Buddenbrock)가 지휘했다. 레오폴트는 프리드리히의 보병이 도착할 공간을 남겨두었다. 한편, 로렌 공작 카를(Charles of Lorraine)은 프리드리히의 도착 전에 공격하려 했으나, 준비 지연으로 오전 7시가 되어서야 공격 준비를 마쳤다. 그가 차슬라프(Čáslav)에서 북쪽으로 진격하면서 군대가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쳐, 부덴브로크의 기병에게 측면 공격의 기회를 주게 되었다.

프리드리히는 오전 8시에 전장에 도착하여 보병 전열 배치를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프로이센 기병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프로이센 기병은 초기에 오스트리아 기병을 격퇴했지만, 덥고 건조한 날씨 탓에 피어오른 거대한 먼지 구름이 시야를 가려 큰 혼란이 발생했다. 혼란 속에서 일부 부대는 엉뚱한 방향으로 공격했고, 오스트리아의 바트야니(Karl Josef Batthyány)와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은 기병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이후 양측 기병대는 서로의 보급 마차를 약탈하는 데 몰두하며 전투의 상당 시간 동안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오전 9시경, 오스트리아 포병이 코투지츠를 포격하기 시작했고, 다운(Daun)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보병이 마을을 공격했다. 레오폴트 휘하의 프로이센군은 집집마다 저항하며 싸웠으나 점차 밀려났다. 오스트리아군은 마을에 불을 질렀고, 피어오르는 연기는 먼지 구름과 뒤섞여 지휘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오전 10시 30분경, 프리드리히의 주력 보병 24개 대대가 전열을 갖추고 왼쪽으로 기동하여 코투지츠 외곽의 오스트리아 보병에게 사격을 가했다. 기병대가 전장에서 이탈하여 측면이 노출된 상황에서 카를 공작은 전투를 무승부로 끝내기로 결정하고 차슬라프를 통해 전면적인 후퇴를 명령했으며, 일부 중포를 남겨두어야 했다. 리히텐슈타인의 기병이 프로이센군의 추격을 저지하는 동안 오스트리아군은 후퇴했고, 정오 무렵 전투는 중단되었다.

4. 1. 전개

오전 5시, 프리드리히의 군대는 노이호프에 집결하여 코투지츠를 향해 신속히 행군을 시작했다. 코투지츠에 먼저 도착해 있던 레오폴트 2세(젊은 데사우)는 프리드리히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진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그는 새벽에 도착한 보급 마차의 식량을 병사들에게 분배하는 동안, 언덕 위에서 정찰을 통해 여러 대열의 오스트리아군이 접근하여 전열을 갖추는 것을 확인했다.

전장은 코투지츠와 차슬라프 사이에 위치했으며, 브르슈렌카 강이 남서에서 북동으로 흐르고 서쪽에는 클레나우카 강, 동쪽에는 도프로바 강이 흘러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었다. 코투지츠 서쪽에는 언덕을 사이에 둔 큰 연못이 있었고, 동쪽은 브르슈렌카 강과 접한 습지대로 전투에 부적합한 지형이었다. 레오폴트 2세는 이 지형을 고려하여 연못을 우익 방어선 끝으로, 브르슈렌카 강변을 좌익 방어선 끝으로 설정했다. 그는 언덕 위에 중포를 배치하고, 우익 기병대는 폰 부덴브로크의 지휘 아래 언덕 뒤와 연못 사이에 배치했다. 보병대는 언덕에서 마을까지 전열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좌익 기병대는 발도(Waldow)가 지휘했으며, 브르슈렌카 강변 지형의 제약으로 인해 코투지츠 후방에서 북쪽의 제우쉬비츠 마을에 걸쳐 남북 방향으로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레오폴트 2세는 프리드리히 본대의 보병이 도착했을 때 합류할 공간을 예비로 남겨두었다. 그러나 좌익 보병 지휘관 예체는 레오폴트 2세의 지시를 잘못 이해하여, 코투지츠 마을 남쪽 고지에 진형을 구축했다[2]. 이로 인해 좌익 보병대는 우익 보병대나 발도의 기병대보다 전방으로 돌출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로렌 공작 카를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프리드리히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공격을 개시하려 했지만, 준비 지연으로 오전 7시가 되어서야 공격 준비를 마쳤다. 차슬라프에서 북쪽으로 진군하는 과정에서 오스트리아군의 대열이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치게 되었고, 이는 프로이센 우익의 부덴브로크 기병대에게 측면 공격의 기회를 제공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전 7시 30분경, 프리드리히의 본대가 연못 북쪽을 통해 전장에 도착하여 레오폴트 2세 군의 후방에 합류하며 제2 전열을 형성했다. 오전 8시, 프리드리히는 전장을 직접 시찰하고 오스트리아군의 접근을 확인한 후, 본대 보병의 전열 배치를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프로이센 기병대에게 포병의 엄호 아래 돌격을 명령했다. 프로이센 기병은 오스트리아 기병대를 성공적으로 밀어냈지만, 건조한 날씨로 인해 발생한 극심한 먼지 구름이 시야를 가리면서 큰 혼란이 발생했다. 일부 프로이센 기병 부대는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돌격했으며, 이 혼란을 틈타 오스트리아의 바트야니와 리히텐슈타인은 흩어진 기병대를 재정비할 수 있었다. 이후 양측 기병대는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서로의 보급 마차를 약탈하는 데 몰두하며 사실상 전투에서 이탈하는 무질서한 모습을 보였다.

오전 9시경, 오스트리아 포병이 코투지츠 마을에 포격을 개시했고, 다운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보병대가 마을을 습격했다. 마을을 방어하던 레오폴트 2세 휘하의 프로이센군은 집집마다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수적 우위에 밀려 점차 후퇴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마을에 불을 질렀고, 피어오르는 연기는 먼지 구름과 뒤섞여 전장의 가시성을 극도로 악화시키며 양측 모두 지휘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오전 10시 30분경, 프리드리히의 본대 보병 24개 대대가 마침내 거대한 방진(사각형 진형)을 갖추고 전열 정비를 마쳤다. 이들은 왼쪽으로 기동하여 코투지츠 외곽에 포진한 오스트리아 보병대를 향해 강력한 화망을 구성하며 사격을 개시했다.

양측 기병대가 모두 전장에서 이탈하여 측면이 무방비 상태에 놓이자, 로렌 공작 카를은 더 이상의 전투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무승부로 전투를 종결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차슬라프 방향으로 전면적인 후퇴를 명령했으며, 이 과정에서 일부 중포를 포기해야만 했다. 리히텐슈타인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프로이센군의 추격을 저지하는 엄호 작전을 펼치는 동안 오스트리아 주력군은 질서 있게 후퇴했고, 정오 무렵 전투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4. 2. 프로이센군 기병의 돌격

프리드리히 2세는 오전 8시에 전장에 도착했다. 그는 보병 부대가 전열을 갖출 시간을 벌기 위해, 프로이센 기병에게 야전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즉시 돌격할 것을 명령했다. 이는 몰비츠 전투의 경험 이후 기병 전력 강화에 힘쓰고, 적극적인 기병 운용으로 오스트리아군 기병을 제압하려 했던 프리드리히 2세의 의도가 반영된 결정이었다.

좌익에서는 부덴브로크가 이끄는 기병 군단이 코투지츠 마을 서쪽 연못 남쪽에서 오스트리아군 좌익 기병을 향해 비스듬히 돌격했다.

  • 게슬러가 지휘하는 흉갑 기병대는 호에넴스 기병 군단의 제1전열을 성공적으로 돌파했으나, 재집결하는 과정에서 호에넴스의 제2전열과 바치아니의 흉갑 기병대로부터 정면과 측면에서 반격을 받아 격퇴되었다.
  • 게슬러 부대에 이어 돌격한 로텐부르크의 용기병 제2전열은 돌격 방향이 왼쪽으로 치우쳐 오스트리아군 보병 전열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로텐부르크는 그대로 보병 전열에 돌격을 감행했지만, 오스트리아 보병의 견고한 방진에 막혀 격퇴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오스트리아 기병이 후방을 공격하면서 로텐부르크의 용기병 부대는 패주했고, 로텐부르크 자신도 팔과 가슴에 부상을 입었다.
  • 마지막으로 돌격한 프로이센의 녹색 경기병(Hussars)은 혼란에 빠진 아군을 구원하려 했으나, 당시 프로이센군에게는 생소했던 녹색 제복 때문에 일부 병사들은 오히려 적에게 후방을 공격당했다고 오인하여 혼란이 가중되기도 했다.


우익에서는 발도우가 이끄는 기병 군단이 브르슈렌카 강 주변의 습지대라는 불리한 지형에도 불구하고 몰비츠 전투의 치욕을 씻기 위해 돌격을 감행했다.

  • 선두에서 브레도우의 흉갑 기병 3개 연대가 돌격했지만, 리히텐슈타인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우익 기병의 맞대응 돌격에 의해 격파되었다. 선두의 2개 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발도우는 중상을 입고 전장에 쓰러졌다.
  • 후열의 프린츠 프로이센 연대는 바치아니의 왈라키아 부대가 측면을 위협하는 와중에도 간신히 부대 편제를 유지하며 오스트리아 기병 전열을 돌파했다. 이들은 큰 피해를 감수하며 오스트리아 보병 전열 뒤를 돌아 서쪽의 부덴브로크 기병 군단과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돌격에 참여했던 3개 연대는 병력의 절반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3]
  • 브레도우를 뒤따르려던 베르데크의 용기병 제2전열은 전열을 갖추기도 전에 오스트리아 기병의 공격을 받아 코투지츠 후방으로 밀려났다.


양측 기병대는 격렬하게 충돌했지만, 전투 초기부터 덥고 건조한 날씨로 인해 발생한 극심한 흙먼지가 시야를 가려 효과적인 지휘를 어렵게 만들었다. 혼란 속에서 일부 부대는 목표를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돌격하기도 했으며, 양측 기병대는 서로의 보급 마차를 약탈하는 등 무질서한 행동으로 전투의 상당 시간 동안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기병 지휘관들은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기병들은 개별적으로 전투를 이어나갔다.

4. 3. 코투지츠 마을 공방전

오전 9시경, 오스트리아 포병은 코투지츠 마을을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4] 이후 다운(Daun)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보병 부대가 마을을 습격했다. 마을을 방어하던 젊은 데사우 휘하의 프로이센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군의 공격과 포격에 밀려 집집마다 저항하며 천천히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프로이센군 종군 목사 제게발트(Segewalt)는 총알이 빗발치는 속에서도 병사들에게 신과 왕의 이름으로 굳건히 버틸 것을 호소하며 독려했다.[4]

오스트리아군은 남쪽뿐만 아니라 동쪽에서도 마을을 공격했으며, 건물에 의지해 저항하는 프로이센군을 몰아내기 위해 가옥에 불을 질렀다. 마을 안에서는 양측 군대 사이에 치열한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불길을 피해 쫓겨난 프로이센 병사들은 마을의 서쪽이나 북쪽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잠시 후 불은 코투지츠 마을 전체로 번져나가 오스트리아군 병사들조차 안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프로이센군은 오히려 이 불타는 마을을 방벽처럼 활용할 수 있었다.

더욱이 불타는 마을에서 피어오른 맹렬한 연기는 전투 중 발생한 총화의 검은 연기와 뒤섞여 전장 전체의 시야를 크게 악화시켰다. 이 짙은 연기는 양측 군대의 지휘와 전투 효율을 떨어뜨렸으며, 결과적으로는 공격을 이어가야 했던 오스트리아군에게 더 불리하게 작용했다. 젊은 데사우는 마을에서 후퇴한 병사들을 다시 모아 전열을 정비하고, 불타는 마을을 방어선 삼아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막아내려 했다.[5]

4. 4. 프로이센군 주력의 공격

오전 9시 30분경, 전장 서쪽에서는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 기병 간의 전투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군 기병은 프로이센군 기병을 서서히 압박하여 결국 패주시켰다. 프로이센군 기병은 연못 남쪽에서 쿠텐베르크 방향으로 도주했고, 오스트리아군 기병은 이들을 추격했다. 한편, 동쪽에서는 전황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카를 공자와 쾨니히세크가 젊은 데사우의 보병을 압박하기 위해 대부분의 보병 전력을 코투지츠 주변에 집중시켰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군 좌익에 대한 방비가 소홀해졌으나, 오스트리아 지휘부는 프로이센군 보병의 정확한 배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눈앞의 전투에 집중하느라 좌익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

남쪽에서 공격해 온 오스트리아군은 언덕, 코투지츠 마을, 그리고 젊은 데사우 부대의 좌익 전열에 시야가 가려져 그 배후에 남아 있는 프로이센군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카를 공자는 젊은 데사우의 격렬한 저항을 보고 상당한 병력이 있다고 추측했지만, 실제로는 오스트리아군 보병 주력이 상대하고 있던 것은 프로이센군 전체 보병의 약 3분의 1에 불과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본래 붓덴브로크가 이끄는 우익 기병의 성공을 기다려 보병을 진격시킬 계획이었으나, 기병이 예상과 달리 패주하자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 좌익 기병은 패주하는 프로이센군 기병을 추격하느라 프로이센군 보병의 측면을 공격하거나 자군 보병의 좌익을 보호하는 역할을 포기했다. 이 상황을 간파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즉시 오스트리아군에 대한 공격을 결심했다.

오전 10시 30분경, 프리드리히 대왕이 직접 이끄는 21개 보병 대대[6]가 마침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 오스트리아군 좌익 측면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들은 충분한 휴식을 취해 체력과 사기가 높았으며, 기계처럼 정돈된 대열로 신속하게 전진했다. 다수의 3파운드 대대포의 지원 사격 아래, 프로이센 보병 주력은 오스트리아군 좌익 측면을 강타했다. 압도적인 프로이센군의 공격에 오스트리아군 좌익 보병은 순식간에 무너져 중앙으로 밀려났고, 오스트리아군 전체 전선이 동쪽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공격에 발맞춰 젊은 데사우 역시 총반격을 명령했다. 양쪽에서 가해진 프로이센군의 총공세에 오스트리아군은 유리했던 상황에서 순식간에 파국으로 치달았다. 동쪽으로 계속 전진하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부대에 의해 차슬라프(Čáslav)로 향하는 퇴로가 차단될 위험에 처하자, 카를 공자와 쾨니히세크는 즉시 철수를 결정하고 오스트리아군은 총퇴각에 들어갔다. 오스트리아군은 불슈렌카(Brslenka) 강 다리에 후위 부대를 배치하여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게 했다. 오후 0시경, 대부분의 오스트리아 부대는 큰 손실 없이 강을 건너 차슬라프를 통해 철수하는 데 성공했지만, 코투지츠 마을에 고립되었던 일부 부대는 도프로바(Doubrava) 강을 건너 동쪽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프로이센 기병은 퇴각하는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하며 전과를 더욱 확대했다[7].

5. 결과

코투지츠 전투는 프로이센의 명확한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는 프리드리히 2세가 실질적으로 군대를 지휘하여 거둔 첫 번째 주요 승리로 평가받는다.[9] 전투 후 오스트리아군은 사기가 저하되었고,[8] 내부적으로 군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11]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승리를 바탕으로 오스트리아와의 강화를 추진했으며,[5] 이는 결국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을 종결시키는 브레슬라우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이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은 슐레지엔 대부분 지역을 확보하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5. 1. 프로이센의 승리

코투지츠 전투는 몰비츠 전투처럼 명확한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 전투는 프리드리히 2세의 군사적 재능이 처음으로 시험받은 무대였다. 몰비츠 전투 당시 프리드리히 2세는 전투 도중 퇴각하여 역할이 제한적이었기에, 실질적으로 코투지츠 전투가 그가 군 지휘관으로서 경험한 첫 번째 주요 전투라고 할 수 있다.[9] 전투의 승패는 결정적인 순간에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공격한 프로이센군 주력의 공격으로 결정되었다. 다만, 프리드리히 2세가 처음부터 이를 의도하고 보병을 대기시켰다는 견해는 후대의 참모본부 전사의 해석이라는 시각도 있다.[9]

전투 승리 후, 프로이센군 진영에서는 즉각적인 대규모 추격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프리드리히 2세는 "그대의 말이 전적으로 옳지만, 나는 그들을 너무 심하게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5]고 말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소규모 부대만을 단거리 추격에 투입했다. 이는 프로이센군 역시 기병 전력 손실이 컸고 병사들의 피로가 심했으며, 주변에 오스트리아 경기병 부대가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승리를 통해 오스트리아와 강화 조약을 맺을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었다. 또한, 프로이센군 철수 후 전장을 프랑스군에게 유리하게 넘겨줄 생각도 없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날 가장 큰 공을 세운 젊은 데사우를 원수로 승진시키며 그 공적을 치하했다.

코투지츠 전투의 전장 기념비


패배한 오스트리아군은 철수 후 도이치브로트에서 사자바 강을 건너 남하하여, 몰다우 강 유역의 로프코비츠 군과 합류를 시도했다. 전투 후 2~3일 사이에 600명 이상의 오스트리아군 탈영병이 프로이센군 진영으로 넘어오면서,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군의 사기 저하를 확인할 수 있었다.[8]

프리드리히 2세는 훗날 이 전투를 회고하며 양측 지휘관 모두 실수를 저질렀다고 평가하고, 이를 통해 장래의 실패를 피할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지적했다.[10] 그는 오스트리아군의 쾨니히제크가 기습을 의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차슬라우 공격이나 야간 경계부대 공격으로 프로이센군에게 정보를 제공한 점, 해가 뜬 후 즉시 공격하지 않고 시간을 끌어 프로이센 본대 합류를 허용한 점, 전장 중앙의 언덕을 선점하지 않은 점, 코투지츠 마을에 불을 질러 오히려 자신의 공격로를 막은 점, 우익에 집중하느라 좌익을 방치한 점 등을 비판했다.

자신의 군대에 대해서도 프리드리히 2세는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우선 자신이 직접 선행 부대를 이끌 것이 아니라 다른 지휘관에게 맡기고 본대 지휘에 집중했어야 했다고 자평했다. 또한 젊은 데사우의 지휘에 대해서도 야간 경계 강화 및 적의 공격 대비 미흡, 코투지츠 남동쪽 슈피스라우 농장 확보 실패로 좌익 기병 운용에 제약을 초래한 점 등을 지적했다. 특히 코투지츠 마을은 방어 거점으로 부적합하며, 이곳에 전열을 배치한 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는 젊은 데사우가 사전에 오스트리아군의 공격 가능성을 낮게 평가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술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2세는 자군 병사들의 우수성이 승리에 기여했다고 칭찬했다. 특히 프로이센 기병대는 몰비츠 전투의 실패 이후 상당한 발전을 보여주었다. 비록 전투 중 무질서함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는 기마술 부족 등 훈련의 필요성을 드러낸 것이었고, 이후 집중적인 훈련을 통해 개선되었다. 부덴브로크의 돌격을 이끌었던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폰 게슬러는 이 전투 후 중장으로 진급하고 흑수리 훈장을 받았으며, 1745년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에서 프로이센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 된 기병 돌격을 지휘하게 된다.

모리스 드 사크스와 같은 동시대 군사 사상가들처럼, 프리드리히 2세 역시 화력보다는 사기가 적의 대형을 무너뜨리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몰비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 보병의 훈련된 진격에 무너졌던 것처럼, 코투지츠 전투에서의 꾸준한 압박은 로렌 공작 카를로 하여금 무승부를 제안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2차 슐레지엔 전쟁이 시작된 1744년, 프리드리히 2세는 장교들에게 보병의 핵심 임무는 신속하게 대형을 갖추고 이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오스트리아 측에서는 패배를 통해 군의 문제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특히 리히텐슈타인 공작은 포병 전력의 격차를 절감하고, 사재를 털어 포병 개혁에 착수하는 계기가 되었다. 군 전체의 본격적인 개혁은 아직 요원했지만, 훗날 개혁을 주도하게 될 다운은 이 전투에서 보여준 지휘 능력과 용기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11]

코투지츠 전투 직후인 5월 말, 몰다우 방면에서는 로프코비츠 군이 부트바이스 서안의 프라우엔베르크를 공격했으나, 프랑스의 브로이 원수가 이끄는 원군에게 자하이에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때 프랑크푸르트에서 돌아온 프랑스의 벨-일은 오스트리아군을 보헤미아에서 몰아낼 좋은 기회라고 보고 프리드리히 2세에게 공동 작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전력 감소와 보급 문제를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이는 표면적인 이유였고, 실제로는 프랑스군과의 공동 작전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차례의 패배를 겪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두 개의 강력한 적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이 무리임을 통감했다. 당시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던 영국은 프로이센과의 강화를 전쟁 승리의 필수 조건으로 계속 압박하며 원조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 할양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1742년 6월, 브레슬라우 조약이 체결되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강화했고, 이로써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은 종결되었다. 프로이센은 마침내 숙원이었던 슐레지엔 대부분을 획득했고, 프랑스군을 남겨둔 채 신속하게 보헤미아에서 철수했다. 오스트리아는 12월에 프라하를 탈환했다. 이로써 코투지츠 전투는 기본적인 전략적 상황 자체를 크게 바꾸지는 않았지만,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 확보라는 결정적인 성과를 안겨주었다.

5. 2. 브레슬라우 조약

코투지츠 전투 이후 기본적인 전략적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카를 공작은 여전히 프라하를 향해 이동할 수 있었고, 프로이센군은 모라비아에 주둔하며 을 위협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왕가는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슐레지엔 탈환은 장기적인 목표였지만, 당장 프로이센을 격파하기는 어려웠기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다른 지역에서 입지를 다지기 위해 프로이센과의 임시 휴전을 고려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 역시 자금과 병력이 부족했고, 동맹인 프랑스가 단독으로 평화 협상을 추진할 것을 의심하고 있었기에 휴전에 긍정적이었다. 코투지츠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군에 대한 대대적인 추격을 명령하지 않았다. 이는 프로이센군의 손실과 피로도 컸지만, 무엇보다 이 승리를 발판으로 오스트리아와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 조약을 맺으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5] 그는 프랑스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8]

한편, 코투지츠 전투와 자하이에 전투에서의 연이은 패배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프로이센과 프랑스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이 무리임을 깨닫게 했다. 또한,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던 영국은 프로이센과의 강화를 전쟁 승리의 전제 조건으로 계속 요구하며 압박했다.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 할양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1742년 6월, 브레슬라우 조약이 체결되면서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프로이센은 염원하던 슐레지엔 대부분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프로이센군은 보헤미아에서 신속하게 철수했고, 오스트리아는 그해 12월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프라하를 탈환할 수 있었다.

6. 영향

코투지츠 전투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양측 모두에게 군사적인 측면과 국제 관계 측면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프로이센에게는 프리드리히 2세가 직접 지휘하여 거둔 실질적인 첫 승리로, 군대의 강점과 함께 기병 훈련 등 보완해야 할 약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또한 이 전투를 통해 프로이센과의 군사력 격차를 인식하고, 이후 포병을 중심으로 한 군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11]

국제적으로는, 전투 이후 양측 모두 전쟁 지속에 부담을 느끼면서 평화 협상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결국 1742년 6월 11일 브레슬라우 조약이 체결되어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이 종결되었으며, 이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6. 1. 군사적 교훈

모리스 드 사크스와 같은 동시대인들처럼, 프리드리히는 사기가 화력보다 적의 대형을 파괴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결론 내렸다. 몰비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 보병의 꾸준하고 훈련된 진격을 보고 도망쳤던 것처럼, 코투지츠 전투에서의 경험은 로렌 공작 카를에게 무승부를 제안하게 만들었다. 제2차 슐레지엔 전쟁이 1744년에 시작되었을 때, 프리드리히는 장교들에게 보병이 단 두 가지, 즉 신속하게 대형을 갖추고 이를 유지하는 것만 잘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이 전투는 또한 프로이센 기병대가 여전히 훈련, 특히 기마술 훈련이 더 필요하다는 점을 드러냈다. 돌격 시 무질서함의 한 원인은 많은 기병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며, 이는 1743년 이후 집중적인 훈련의 대상이 되었다. 부덴브로크의 돌격을 이끌었던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폰 게슬러는 이 전투 후 중장으로 진급하고 흑수리 훈장을 받았으며, 훗날 1745년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에서 프로이센 승리의 핵심 요인이 된 기병 돌격을 지휘하게 된다.

프리드리히 2세는 코투지츠 전투를 몰비츠 전투와 같이 명확한 프로이센의 승리이자, 자신의 군사적 재능이 처음으로 시험받은 전투로 평가했다. 몰비츠 전투에서는 도중에 전장을 이탈하여 역할이 제한적이었기에, 실질적으로 이 전투가 지휘관으로서 경험한 첫 번째 전투였던 셈이다[9]。 그는 승패를 결정지은 것이 결정적인 순간에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공격한 프로이센군 주력의 공격이었다고 보았으나, Showalter에 따르면 프리드리히가 처음부터 이를 의도하고 보병을 대기시켰다는 견해는 참모본부 전사의 후대 해석일 가능성이 있다[9]

프리드리히는 훗날 "양군의 장군 모두 유죄로 해야 할 실수를 범했지만, 이를 잘 고찰하면 장래에 유사한 실패를 회피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쓰며 전투를 비평했다[10]。 그는 오스트리아 지휘관 쾨니히스에크가 프로이센군 기습을 의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차슬라우 공격이나 야간 경보병 공격으로 정보를 노출시킨 점, 공격 타이밍을 놓쳐 프로이센 본대 합류 시간을 준 점, 전장 중앙 언덕을 선점하지 못한 점, 코투지츠 마을에 불을 질러 공격로를 차단한 점, 우익에 집중하느라 좌익을 방치한 점 등을 비판하며 "그는 손에 잡으려고 하는 순간 승리를 놓치고, 항복의 치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패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평가했다.

자신의 군대에 대해서도 프리드리히는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우선 자신이 직접 선행 부대를 이끌 것이 아니라 다른 지휘관에게 맡기고 본대를 지휘했어야 했다고 자평했다. 또한 젊은 데사우의 지휘에 대해서도 야간 경계 미흡, 코투지츠 남동쪽 슈피스라우 농장 확보 실패, 방어에 불리한 코투지츠 마을에 전열을 배치한 점 등을 지적했다. 코투지츠가 전장이 된 것 자체가 젊은 데사우가 사전에 공격 가능성을 경시한 결과라고 보았다.

그럼에도 프리드리히는 이러한 전술적 약점을 극복하고 승리한 자군 병사들의 우수성을 칭찬했다. 프로이센 기병 역시 최종적으로는 부족함이 있었지만, 몰비츠 전투의 실패 이후 큰 발전을 보였다.

반면, 충분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오스트리아군 내부에서는 문제점을 인식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특히 리히텐슈타인 공작은 포병 전력의 격차를 절감하고, 이후 사재를 털어 포병 개혁에 착수하는 계기가 되었다. 군 전체의 본격적인 개혁은 아직 요원했지만, 훗날 오스트리아군 개혁을 주도하게 될 다운은 이 전투에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지휘력을 발휘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11]

6. 2. 국제 관계의 변화



코투지츠 전투 이후에도 기본적인 전략적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카를 공작은 여전히 프라하를 향해 진격할 수 있었고, 프로이센군은 모라비아에 머물며 을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양측 모두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프로이센은 가장 강력하고 위험한 적이었지만, 당장 격파하기는 어려웠다. 슐레지엔 탈환은 오스트리아의 오랜 목표였으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다른 지역에서 오스트리아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프로이센과의 일시적인 휴전을 고려하게 되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역시 휴전을 원했다. 그는 자금과 병력이 부족했고, 동맹국인 프랑스가 단독으로 평화 조약을 맺을 것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1742년 6월, 브레슬라우 조약이 체결되면서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은 막을 내렸다. 이 조약에 따라 프로이센군은 보헤미아에서 철수했고, 오스트리아는 그해 12월 프라하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조약은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를 인정하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Art of Warfare in the Age of Marlborough
[2] 서적 Frederick the Great The Magnificent Enigma
[3] 서적 Frederick the Great The Magnificent Enigma
[4] 서적 Frederick the Great The Magnificent Enigma
[5] 서적 Frederick the Great A Military Life
[6] 서적 Frederick the Great The Magnificent Enigma
[7] 서적 世界の戦史6 ルイ十四世とフリードリヒ大王
[8] 서적 Frederick the Great The Magnificent Enigma
[9] 서적 The War of Frederick the Great
[10] 서적 Posthumous works Volume 1 HISTORY of MY OWN TIMES
[11] 서적 The Army of Maria Theresa
[12] 간행물 1911 Encyclopedia Britann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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