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바사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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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빅토르 바사렐리는 1906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페치에서 태어난 헝가리 출신의 프랑스 화가로, 옵아트의 선구자로 불린다. 부다페스트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1930년 파리로 이주하여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색채와 광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1940년대 후반부터 기하학적 추상 미술 스타일을 개발하여 옵아트를 발전시켰으며, 1970년대에는 고르드와 엑상프로방스, 페치, 부다페스트에 미술관을 설립했다. 바사렐리는 1997년 파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작품은 현대 미술과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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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바사렐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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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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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버샤렐리 죄죄 |
출생 | 1906년 4월 9일 |
출생지 | 페치, 오스트리아-헝가리 |
사망 | 1997년 3월 15일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
국적 | 헝가리, 프랑스 |
분야 | 회화, 조각 |
교육 | 뮈헤이 |
주요 작품 | http://www.wikiart.org/en/victor-vasarely/zebra-1938(c. 1930년대) |
웹사이트 | 빅토르 바사렐리 웹사이트 |
예술 경향 | |
사조 | 옵 아트 |
2. 초기 생애 및 교육 (1906-1930)
헝가리 페치에서 태어나 부다페스트에서 성장한 바자렐리는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1927년 포기하고 사립 포돌리니-볼크만 아카데미에서 전통적인 아카데믹 회화를 배웠다. 1928년부터 1929년까지는 산도르 보르트니크의 사립 미술학교인 "Műhely"(뮈헤이, 작업장을 뜻하며 1938년까지 존재)에 입학했는데, 이곳은 당시 부다페스트의 바우하우스 연구 중심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műhely"는 자금 부족으로 인해 응용 그래픽 아트와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에 집중했다. 1929년에는 "푸른 습작"과 "녹색 습작"을 그렸다. 1930년에는 동료 학생인 클레어 스피너와 결혼하여 두 아들 앙드레와 장-피에르를 낳았다. 바자렐리는 부다페스트에서 볼 베어링 회사에서 회계 및 광고 포스터 디자인을 담당하며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포스터 예술가로 활동했다.
2. 1. 헝가리 시절 (1906-1930)
바사렐리는 페치에서 태어나 피에슈차니(당시 푀슈테니)와 부다페스트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슬로바키아 출신 어머니와 티미쇼아라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직업은 레스토랑 보이장이었다. 1908년 가족이 부다페스트로 이주하면서 아버지의 성인 '바샤르헤이'를 사용하게 되었다.1921년부터 1925년까지 상업 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배우고 비즈니스 서신 자격을 얻었다. 동시에 1922년에는 사립 회화 학교 Podolini-Volkmann Academy|포돌리니-볼크만 아카데미영어에서 인체 데생 등 전통 회화 기법을 배웠다.
1925년부터 제약 회사에서 경리 사무원으로 일하며 디자인 업무를 처음 의뢰받았다.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2년 만에 중퇴하고, 1929년 가을부터 산도르 보르트니크가 설립한 사립 미술학교 "무헤이"(Műhely, 작업장을 의미)에 입학하여 바우하우스 운동을 연구했다. 무헤이는 자금 부족으로 응용 그래픽 아트와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에 집중했다.
무헤이에서 만난 클라라 스피너(Klára (Claire) Spinner, 1909–1991)와 1930년에 결혼했다. 같은 해, 볼 베어링 회사에서 경리 및 광고 포스터 디자인을 담당하며, 1929년에는 회화 작품 "푸른 연구"와 "녹색 연구"를 제작했다.
3. 파리에서의 활동과 옵 아트의 발전 (1930-1997)
바사렐리는 1930년 헝가리를 떠나 파리에 정착하여 그래픽 아티스트이자 크리에이티브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옵아트의 기반을 다졌다. 그는 광고 대행사 하바스, 드라거, 데밤베즈에서 일하며(1930-1935) 경력을 쌓았다. 이 시기 바사렐리는 다른 예술가들과의 교류는 제한적이었지만, 산도르 보르트니크의 "műhely"를 모델로 한 기관을 설립할 생각을 하고 교육 자료를 개발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바사렐리는 파리 근교 아르쾨유에 아틀리에를 열고, 1961년에는 센에마른의 아네-쉬르-마른에 정착했다. 이후 30년 동안 그는 기하학적 추상 미술 스타일을 발전시키며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지만, 최소한의 형태와 색상을 사용했다.
그의 초기 작품 경향은 다음과 같다.
- '''1929–1944: 초기 그래픽''': 질감 효과, 원근법, 그림자 및 빛을 실험했다. "얼룩말"(1937), "체스판"(1935) 등이 이 시기 대표작이다.
- '''1944–1947: Les Fausses Routes – 잘못된 길''': 입체파, 미래주의, 표현주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화풍을 실험했다. 자크 프레베르는 바사렐리를 초현실주의자로 분류하기도 했다. "자화상"(1941), "장님"(1946) 등이 이 시기 작품이다.
- '''1947–1951: 기하학적 추상 미술(옵티컬 아트) 개발''': 바사렐리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찾았다. 파리 뎅페르-로슈로 지하철역의 흰색 타일 벽에서 영감을 받은 "뎅페르", 브르타뉴 해안 벨 일에서 발견한 조약돌과 조개 껍질에서 영감을 받은 "벨-일",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의 고르드의 입방형 주택에서 영감을 받은 "고르드/크리스탈" 연작 등이 있다.
3. 1. 파리 이주와 초기 활동 (1930-1944)
바자렐리는 1930년 헝가리를 떠나 파리에 정착했다. 그는 색채와 광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성공을 목표로 파리로 이주했다. 그는 하바스, 드라거, 데밤베즈 (1930–1935)에서 그래픽 아티스트이자 크리에이티브 컨설턴트로 일했다. 1935년 이후에는 의료 출판사의 광고 및 장정을 담당했으며, 산도르 보르트니크의 "műhely"를 모델로 한 그래픽 디자인 전문 학교를 설립하려 했으나 실패했다.1939년, 바자렐리는 파리의 생제르맹데프레에 있는 카페 드 플로르에서 드니즈 르네를 처음 만났다. 르네는 훗날 키네틱 아트와 옵아트를 전문으로 하는 파리의 유명 화상이 되었으며, 바자렐리의 작품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바자렐리는 남프랑스 로트주의 Saint-Céré|생세레프랑스어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3. 2. 옵 아트의 발전과 국제적 명성 (1944-1970)
바사렐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파리 중심에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교외인 아르쾨유에 아틀리에를 열었다.[3] 1961년, 그는 센에마른의 아네-쉬르-마른에 정착했다.이후 30년 동안 바사렐리는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지만 최소한의 형태와 색상을 사용한 기하학적 추상 미술 스타일을 개발했다.
- 1951–1955: 키네틱 이미지, 흑백 사진: "고르드" 작품에서 키네틱 이미지를 개발했으며, 겹쳐진 아크릴 유리 패널은 시점에 따라 역동적이고 움직이는 인상을 만들어냈다. 흑백 시대에 그는 두 가지 색상으로 사진을 변환하여 프레임을 단일 패널로 결합했다. 1954년 건축가 카를로스 라울 비야누에바와 공동으로 설계한 베네수엘라 중앙 대학교를 장식하는 세라믹 벽화 "말레비치에 대한 찬사"는 이 시대의 주요 작품이다. 칼더, 뒤샹, 만 레이, 소토, 팅겔리의 작품이 데니스 르네 갤러리에서 "르 무브망"(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다. 바사렐리는 "옐로우 매니페스트"를 출판했다. 그는 구성주의 및 바우하우스 선구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시각적 키네틱"(''플라스틱 키네틱'')은 유일한 창조자로 간주되는 관람자의 인지에 의존하며, 옵티컬 일루전을 가지고 논다고 주장했다.

- 1955–1965: 플래니터리 민속, 순열, 연작 미술: 1959년 3월 2일, 바사렐리는 "플라스틱 단위" 기술에 대한 특허를 받았다. 기하학적 형태의 순열은 색깔이 있는 사각형에서 잘라내어 재배열된다. 그는 엄격하게 정의된 색상과 형태 (빨강 3개, 녹색 3개, 파랑 3개, 보라 2개, 노랑 2개, 검정, 흰색, 회색; 원 3개, 사각형 2개, 롬보이드 2개, 긴 직사각형 2개, 삼각형 1개, 절단된 원 2개, 타원 6개)를 사용하여 나중에 확대하고 번호를 매겼다. 이 "플라스틱 알파벳"에서 그는 조수들이 만든 형태와 색상의 끝없는 순열인 연작 미술을 시작했다. (창작 과정은 표준화된 도구와 비인격적인 행위자에 의해 생산되어 예술 작품의 독창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1963년 바사렐리는 "플래니터리 민속"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팔레트를 대중에게 선보였다.
- 1965–: 육각형에 대한 오마주, 베가: "육각형에 대한 찬사" 연작은 색상 변화를 추가하여 들여쓰기와 릴리프의 끝없는 변형으로 구성되어 "옵티컬 일루전의 영구적인 모바일"을 만든다. 1965년 바사렐리는 윌리엄 C. 자이츠가 감독한 현대 미술관 전시회 "반응하는 눈"에 포함되었다. 그의 "베가" 연작은 구형 팽창 격자로 볼륨의 착시를 만든다.

3. 3. 말년 (1970-1997)
1970년, 바사렐리는 고르드에 500점 이상의 작품을 전시한 자신의 첫 전용 박물관을 열었으나, 1996년에 폐쇄되었다.[3] 1976년에는 엑상프로방스에 바사렐리 재단을 설립했는데, 이는 바사렐리가 직접 설계한 독특한 구조의 박물관이었다.[3] 이 박물관은 조르주 퐁피두 프랑스 대통령에 의해 개관되었다.[3] 현재 이 박물관은 훼손된 상태이며, 전시된 작품 중 일부는 천장에서 새는 물로 인해 손상되었다.[3]같은 해인 1976년, 그의 대형 키네틱 오브젝트 "조르주 퐁피두"가 파리의 퐁피두 센터에 설치되었고,[3] 그의 출생지인 헝가리 페치에 바사렐리 박물관이 설립되어 바사렐리가 기증한 많은 작품들을 전시했다.[3] 같은 시기, 그는 독일 로젠탈 도자기 제작사 "스튜디오 리니에"를 위해 장식한 티모 사르파네바의 고급 식기류 "수오미"를 500점 제작하여 산업 디자인 분야에도 도전했다.[4]
1982년, 우주 비행사 장-루 크레티앵은 프랑스-소련 우주선 살류트 7에 탑승하여 바사렐리가 특별히 제작한 154점의 실크스크린 인쇄를 우주로 가져갔으며, 이는 이후 유네스코를 위해 판매되었다.[3] 1987년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지치 궁전에 두 번째 바사렐리 박물관이 400점 이상의 작품과 함께 설립되었다.[3]
바사렐리는 1997년 3월 15일 파리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4. 바자렐리의 유산
바사렐리는 옵 아트의 선구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작품은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기하학적 추상 미술 스타일은 다양한 재료와 최소한의 형태 및 색상을 사용하여 독특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했다.[3]
바사렐리는 "플라스틱 단위"라는 개념을 창안하여, 기하학적 형태와 색상의 조합을 통해 무한한 시각적 변주를 만들어냈다. 이는 예술 작품의 창작 과정을 표준화하고, 예술가의 개입을 최소화하여 작품의 독창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연작 미술의 중요한 예시가 되었다.[3]
그의 작품은 현대 미술관의 "반응하는 눈" 전시회(1965)를 비롯한 주요 전시에 소개되었으며, 퐁피두 센터와 같은 주요 기관에 설치되기도 했다.[3] 1982년에는 그의 작품이 우주로 보내져 유네스코를 통해 판매되는 등, 그의 예술적 영향력은 지구 밖까지 확장되었다.[4]
바사렐리는 1997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지만, 그의 예술적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4. 1. 영향
옵아트의 선구자로 불리는 빅토르 바사렐리의 영향력은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난다. 1969년 발매된 데이비드 보위의 앨범 '데이비드 보위' 영국 초판 커버에는 바사렐리의 작품이 배경으로 사용되었다.[5]2019년에는 파리 조르주 퐁피두 센터에서 바사렐리의 작품을 모은 임시 전시회 '형태의 공유'가 열렸다.[6]
2024년 7월에는 알라차트의 아르카스 아트 센터에서 아르카스 컬렉션 소장 바사렐리 작품을 영구 전시하기 시작했다.[7]
4. 2. 수상 내역
- 1964년: 구겐하임 상
- 1970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 브뤼셀 예술 평론가상
- 밀라노 트리엔날레 금메달
4. 3. 미술관
참조
[1]
문서
Birth registered at county archives of Pécs
http://www.bml.hu
[2]
뉴스
Victor Vasarely, Op Art Patriarch, Dies at 90
https://www.nytimes.[...]
1997-03-18
[3]
뉴스
La façade de RTL signée Vasarely bientôt démontée Le Figaro 22.10.2017
https://tvmag.lefiga[...]
Le Figaro
2017-10-22
[4]
간행물
Faenza-Goldmedaille für SUOMI
[5]
서적
David Bowie All the Songs: The Story Behind Every Track
Running Press
2021
[6]
웹사이트
Vasarely – Sharing Forms
https://www.centrepo[...]
2019-05-07
[7]
웹사이트
Arkas Sanat Alaçatı İki Farklı Sergiyle Açıld
https://medya.arkas.[...]
2024-07-27
[8]
문서
Stripes
RotoVision
2006
[9]
문서
Birth registered at county archives of Pécs
http://www.bml.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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