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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뉴스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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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뉴스 지역은 빌뉴스를 포함한 주변 지역을 포괄했던 역사적 지역으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간의 영토 분쟁의 대상이었다. 1920년 폴란드의 군사적 행동 이후 서쪽 경계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의 행정 경계선이 되었지만, 리투아니아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동쪽 경계는 소련-리투아니아 평화 조약에 의해 정의되었으나, 실제 국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현재는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국경을 기준으로 서부와 동부로 나뉘며, 서부 빌뉴스 지역은 리투아니아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중앙 리투아니아'라는 용어는 루치안 젤리고프스키가 세운 중앙 리투아니아 공화국을 지칭한다. 빌뉴스 지역은 중세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핵심 지역이었으나, 폴란드 분할 이후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리투아니아, 폴란드, 벨라루스 간의 분쟁 지역이 되었다. 1939년 소련에 의해 리투아니아에 반환되었고, 이후 소련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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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뉴스 지역

2. 영역 및 용어

현재 리투아니아 영토와 비교한 동부(갈색) 및 서부(주황색) 빌뉴스 지역


빌뉴스 지역은 처음에는 명확한 경계 없이 빌뉴스와 그 주변 지역을 아울렀다. 이 지역은 1918년 리투아니아폴란드가 독립을 되찾은 후 양국 간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1920년 가을 폴란드의 군사 행동 이후, 서쪽 경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의 ''사실상'' 행정 경계선이 되었지만, 리투아니아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동쪽 경계는 소련-리투아니아 평화 조약으로 정해졌으나, 실제 국경이 아닌 정치적 비전으로만 남았다.

오늘날 이 지역의 동쪽 경계는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국경 사이에 있으며, 빌뉴스 지역을 서부와 동부로 나눈다. 빌뉴스를 포함한 서부 빌뉴스 지역은 현재 리투아니아의 일부로, 전체 면적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리투아니아는 1939년 10월 10일 소련으로부터 약 6880km2를, 1940년 8월 3일 벨로루시 SSR로부터 2650km2( 드루스키닌카이와 Švenčionys 포함)를 획득했다. 동부 빌뉴스 지역은 벨라루스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 이 지역의 어떤 부분도 폴란드에 속하지 않으며, 관련 국가들은 더 이상 영토 주장을 하지 않는다.

''중앙 리투아니아''는 루치안 젤리고프스키가 연출된 반란 이후 선포한 단명한 괴뢰 국가인 중앙 리투아니아 공화국을 가리킨다.

2. 1. 지리적 범위



빌뉴스 지역은 처음에는 정확한 경계를 갖지 않았지만 빌뉴스 및 주변 지역을 포괄했다. 이 지역은 1918년 리투아니아폴란드 두 나라가 독립을 재확립한 후 양국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했다. 1920년 가을 폴란드의 군사 행동 이후 이 지역의 서쪽 경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의 ''사실상'' 행정 경계선이 되었다. 리투아니아는 이 행동이나 경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동쪽 경계는 소련-리투아니아 평화 조약에 의해 정의되었으나, 국가 간의 실제 경계로 전환된 적이 없으며 정치적 비전으로만 남았다. 총 면적은 약 32250km2였다.

오늘날 이 지역의 동쪽 경계는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국경 사이에 위치한다. 이 국경은 빌뉴스 지역을 서부와 동부로 나눈다. 빌뉴스를 포함한 서부 빌뉴스 지역은 현재 리투아니아의 일부이며, 전체 빌뉴스 지역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리투아니아는 1939년 10월 10일 소련으로부터 약 6880km2를, 1940년 8월 3일 벨로루시 SSR로부터 2650km2(드루스키닌카이와 Švenčionys 포함)를 획득했다. 동부 빌뉴스 지역은 벨라루스의 일부가 되었다. 이 지역의 어떤 부분도 현대 폴란드에 속하지 않으며, 어느 국가도 더 이상의 영토 주장을 하지 않는다.

''중앙 리투아니아''라는 용어는 루치안 젤리고프스키가 합병된 지역에서 자신의 연출된 반란 이후 선포한, 단명한 괴뢰 국가인 중앙 리투아니아 공화국을 지칭한다. 이 국가는 폴란드의 군사적 보호 아래 18개월 동안 존재한 후, 1922년 3월 24일 폴란드에 합병되어 폴란드의 영토에 대한 주장을 마무리했다.

2. 2. 용어의 의미

"중앙 리투아니아"라는 용어는 루치안 젤리고프스키가 자신의 연출된 반란 이후 선포한, 단명한 괴뢰 국가인 중앙 리투아니아 공화국을 지칭한다. 이 국가는 폴란드의 군사적 보호 아래 18개월 동안 존재한 후, 1922년 3월 24일 폴란드에 합병되어 폴란드의 영토에 대한 주장을 마무리했다.

3. 빌뉴스 분쟁

폴란드 언론의 풍자화(1925~1935년경):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원수와 리투아니아에 대한 풍자화로, 빌뉴스 지역에 대한 리투아니아의 타협 거부를 비판한다. 피우수트스키 원수는 "합의"라고 적힌 소시지를 개(리투아니아라고 적힌 목줄을 착용)에게 제공한다. 개는 "빌노, 빌노, 빌노"라고 짖으며 "빌노를 준다고 해도 그로드노와 비아위스토크를 위해 짖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다.


폴란드 시대의 빌노 보이보드십


1919년 폴란드군 병사들이 빌뉴스 대성당 광장에서 열병하는 모습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독립하면서 빌뉴스 지역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폴란드는 인구 통계를, 리투아니아는 지리적, 역사적 근거와 빌뉴스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였다는 점을 들어 영유권을 주장했다.[3]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이 지역의 폴란드인과 벨라루스인들을 "슬라브화된 리투아니아인"으로 간주했다.

1917년 9월, 빌뉴스 회의에서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이 발표되어 빌뉴스를 수도로 하는 독립 리투아니아 국가가 선포되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정부는 병력 모집에 실패했고, 1918년 말 빌뉴스와 주변 지역에 폴란드 자위대가 창설되어 폴란드군에 편입되었다. 1919년 초, 리투아니아 Taryba는 빌뉴스를 떠났고, 폴란드-소련 간 첫 군사 충돌이 발생했다.

폴란드-소련 전쟁 중 이 지역은 소련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리투아니아-소련 전쟁 이후 1920년 7월 소련-리투아니아 평화 조약에 따라 리투아니아에 양도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실제 통제는 소련에 남아 있었고, 1920년 바르샤바 전투 이후 폴란드군이 진격하면서 소련은 이 지역을 리투아니아에 넘겨주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연합국은 1922년까지 리투아니아에 대한 외교적 승인을 보류했다. 양국 간 협상과 국제 중재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920년까지 분쟁 지역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부분으로 나뉘었다.

1920년대 국제 연맹은 두 차례 국민 투표를 시도했지만 양측 모두 참여하지 않았다. 루치얀 젤리고프스키의 반란 이후 폴란드는 이 지역을 장악하고 중부 리투아니아 선거를 조직했으나, 리투아니아인, 유대인, 벨라루스인들은 폴란드 군사 통제를 이유로 보이콧했다.

폴란드 정부는 1920년 7월 소련-리투아니아 협약을 인정한 적이 없으며, 리투아니아는 1918~192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경을 인정하지 않고 중앙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주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1922년 중앙 리투아니아 공화국은 폴란드에 합병되었고, 국제 연맹은 이를 승인했다. 리투아니아는 카우나스를 임시 수도로, 빌뉴스를 공식 수도로 간주하며 양국은 전쟁 상태를 유지했다. 1938년 폴란드 최후 통첩 전까지 양국은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다.

일부 역사가들은 빌뉴스 상실이 리투아니아 국가 존립을 보호했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소련과의 동맹에도 불구하고 리투아니아는 1920년 여름 소련의 침략 직전이었으나, 폴란드의 승리가 소련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리투아니아에 독립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3. 1. 역사적 배경

중세 시대에 빌뉴스와 그 주변 지역은 초기 리투아니아 민족 국가의 핵심이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중심지였다.[1][2]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해체된 후에는 리투아니아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18세기 후반 폴란드 분할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어 빌나 현이 설치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군에 점령되어 Ober-Ost 민간 행정부에 속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고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이 지역은 리투아니아, 폴란드,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 간의 분쟁 지역이 되었다.

폴란드는 주민 대다수가 폴란드인이라는 점을, 리투아니아는 빌뉴스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며 서로 영유권을 주장했다.[3]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이 지역의 폴란드인과 벨라루스인들을 "슬라브화된 리투아니아인"이라고 주장했다.

1917년 9월, 독일의 후원으로 리투아니아 활동가들이 빌뉴스 회의를 조직하여 리투아니아 의회를 선출하고, 빌뉴스를 수도로 하는 독립 리투아니아 국가를 선포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정부는 이 지역 주민들로부터 병력을 모집하지 못했고, 볼셰비키에 대항하여 지역을 방어하는 데 실패했다. 1918년 말, 빌뉴스와 주변 지역에 폴란드 자위대가 창설되어 폴란드군에 편입되었다. 1919년 초, 리투아니아 Taryba는 독일 주둔군과 함께 빌뉴스를 떠났고, 폴란드-소련 간 첫 군사 충돌이 발생했다.

폴란드-소련 전쟁 중, 이 지역은 리투아니아-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리트벨)의 일부로 소련의 통제를 받았다. 리투아니아-소련 전쟁 이후 볼셰비키 러시아는 1920년 7월 12일 리투아니아와 소련-리투아니아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분쟁 지역을 리투아니아에 양도했다. 그러나 실제 통제는 볼셰비키가 유지했다. 1920년 바르샤바 전투 이후, 진격하는 폴란드군이 지역을 탈환할 것이 분명해지자 볼셰비키는 이 지역을 리투아니아에 넘겨주었다. 폴란드군은 리투아니아보다 먼저 분쟁 지역 대부분을 탈환했고, 빌뉴스는 리투아니아가 확보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연합국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긴장 때문에 1922년까지 리투아니아를 외교적으로 승인하지 않았다. 양국 간 협상과 국제 중재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920년까지 분쟁 지역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로 나뉘었다.

1920년대 국제 연맹은 두 차례 국민 투표를 시도했지만 양측 모두 참여하지 않았다. 루치얀 젤리고프스키의 반란 이후 폴란드는 이 지역을 장악하고 중부 리투아니아 선거를 조직했으나, 리투아니아인, 유대인, 벨라루스인들은 폴란드의 군사 통제를 이유로 보이콧했다.

폴란드 정부는 1920년 7월 12일의 러시아-리투아니아 협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협약은 폴란드-소련 전쟁 중 소련군이 폴란드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리투아니아에 약속한 것이었다. 반면 리투아니아는 1918~1920년의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경을 인정하지 않고 중앙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주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1922년 중앙 리투아니아 공화국은 폴란드에 합병되었고, 국제 연맹은 이를 승인했다. 리투아니아는 빌뉴스를 공식 수도로, 카우나스를 임시 수도로 간주하며 계속 영유권을 주장했고, 양국은 1938년 폴란드 최후 통첩 전까지 전쟁 상태를 유지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빌뉴스 상실이 전시 기간 동안 리투아니아 국가 존립을 보호했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소련과의 동맹과 폴란드와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리투아니아는 1920년 여름 소련의 침략 직전이었고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전환될 뻔했다. 폴란드의 승리와 폴란드가 리투아니아 독립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소련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리투아니아에 독립의 기회를 제공했다고 평가한다.

1939년, 소련은 소련-리투아니아 상호 원조 조약 체결을 제안했다. 이 조약에 따라 빌뉴스 지역의 약 5분의 1이 리투아니아로 반환되는 대신, 리투아니아에 2만 명의 소련군 주둔이 허용되었다. 리투아니아는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소련의 압박으로 결국 수락했다. 빌뉴스 지역은 1940년 6월까지 리투아니아 행정 하에 있다가 소련에 병합되었다.

소련은 얄타 회담에서 빌뉴스 지역을 획득했고, 이후 리투아니아 SSR의 일부가 되었다. 약 15만 명의 폴란드인이 리투아니아 SSR에서 폴란드로 송환되었다.

3. 2. 분쟁의 전개

중세 시대에 빌뉴스와 그 주변 지역은 초기 리투아니아 민족 국가의 핵심이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중심지였다.[1][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독립하면서 이 지역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폴란드는 인구 통계를, 리투아니아는 지리적, 역사적 근거와 빌뉴스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였다는 점을 들어 영유권을 주장했다.[3]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이 지역의 폴란드인과 벨라루스인들을 "슬라브화된 리투아니아인"으로 간주했다.

1917년 9월, 빌뉴스 회의에서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이 발표되어 빌뉴스를 수도로 하는 독립 리투아니아 국가가 선포되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정부는 병력 모집에 실패했고, 1918년 말 빌뉴스와 주변 지역에 폴란드 자위대가 창설되어 폴란드군에 편입되었다. 1919년 초, 리투아니아 Taryba는 빌뉴스를 떠났고, 폴란드-소련 간 첫 군사 충돌이 발생했다.

폴란드-소련 전쟁 중 이 지역은 소련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리투아니아-소련 전쟁 이후 1920년 7월 소련-리투아니아 평화 조약에 따라 리투아니아에 양도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실제 통제는 소련에 남아 있었고, 1920년 바르샤바 전투 이후 폴란드군이 진격하면서 소련은 이 지역을 리투아니아에 넘겨주었다.

리투아니아 포스터 ''억압된 빌뉴스를 기억하라'', 1930년대


제1차 세계 대전 연합국은 1922년까지 리투아니아에 대한 외교적 승인을 보류했다. 양국 간 협상과 국제 중재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920년까지 분쟁 지역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부분으로 나뉘었다.

1920년대 국제 연맹은 두 차례 국민 투표를 시도했지만 양측 모두 참여하지 않았다. 루치얀 젤리고프스키의 반란 이후 폴란드는 이 지역을 장악하고 중부 리투아니아 선거를 조직했으나, 리투아니아인, 유대인, 벨라루스인들은 폴란드 군사 통제를 이유로 보이콧했다.

폴란드 정부는 1920년 7월 소련-리투아니아 협약을 인정한 적이 없으며, 리투아니아는 1918~192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경을 인정하지 않고 중앙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주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1922년 중앙 리투아니아 공화국은 폴란드에 합병되었고, 국제 연맹은 이를 승인했다. 리투아니아는 카우나스를 임시 수도로, 빌뉴스를 공식 수도로 간주하며 양국은 전쟁 상태를 유지했다. 1938년 폴란드 최후 통첩 전까지 양국은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다.

일부 역사가들은 빌뉴스 상실이 리투아니아 국가 존립을 보호했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소련과의 동맹에도 불구하고 리투아니아는 1920년 여름 소련의 침략 직전이었으나, 폴란드의 승리가 소련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리투아니아에 독립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1939년, 소련-리투아니아 상호 원조 조약에 따라 빌뉴스 지역의 약 1/5이 리투아니아에 반환되었고, 리투아니아는 소련군 주둔을 허용했다. 빌뉴스 지역은 1940년 6월까지 리투아니아 행정 하에 있다가 소련에 병합되었다.

소련은 얄타 회담에서 빌뉴스 지역을 받았고, 이후 리투아니아 SSR의 일부가 되었다. 약 15만 명의 폴란드인이 리투아니아 SSR에서 폴란드로 송환되었다.

3. 3. 1939년 이후의 상황

1939년 소련은 소련-리투아니아 상호 원조 조약 체결을 제안했다. 이 조약에 따라 빌뉴스시 자체를 포함한 빌뉴스 지역의 약 5분의 1이 리투아니아로 반환되었고, 그 대가로 리투아니아에 2만 명의 소련군 주둔을 허용하는 내용이었다. 리투아니아는 처음에는 이를 거부했지만, 소련이 군대를 리투아니아에 진입시킬 것이라고 압박했고, 결국 리투아니아는 이 제안을 수락했다. 소련은 이전에는 빌뉴스 지역 전체를 리투아니아의 일부로 인정했지만, 실제로는 1/5만 리투아니아에 양도했다.[3] 1940년 6월까지 빌뉴스 지역은 리투아니아 행정 하에 있었고, 이후 리투아니아 전체가 소련에 병합되었다.

리투아니아군이 1939년 게디미나스 대로에서 열병하는 모습


얄타 회담에서 소련이 빌뉴스 지역을 획득했고, 이후 빌뉴스 지역은 리투아니아 SSR의 일부가 되었다. 약 15만 명의 폴란드인이 리투아니아 SSR에서 폴란드로 송환되었다.

4. 민족 구성

빌뉴스 지역의 민족 구성은 역사적으로 복잡하게 변화해 왔다.

1897년 러시아 인구 조사에서는 빌나 현에서 벨라루스어 사용자가 56.05%로 가장 많았고, 폴란드어 사용자는 8.17%였다.[4] 그러나 1916년 독일 인구 조사와 1919년 폴란드 인구 조사에서는 빌뉴스와 그 주변 지역에서 폴란드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빌뉴스 시는 폴란드인과 유대인이 거의 같은 비율이었고, 리투아니아인은 2~2.6%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러한 인구 조사는 리투아니아 측에서 편향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 인구 조사(1921년, 1931년)에서는 리투아니아인이 5%에 불과했고, 폴란드인이 약 60%를 차지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정부는 이 지역 폴란드인 대다수가 폴란드화된 리투아니아인이라고 주장했다.

유대인 학살과 인구 이동 이후, 1989년에 리투아니아인이 빌뉴스 지역에서 50.5%로 다수 민족이 되었다.[10]

4. 1. 역사적 민족 구성 변화

이 지역은 원래 리투아니아 발트족이 거주했다. 동슬라브 및 폴란드 문화의 영향과 정착으로 사회는 점진적으로 루테니아화와 폴란드화되었다.[4] 노먼 데이비스에 따르면 빌뉴스는 17세기에는 문화적으로 폴란드인이었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도시와 가장 가까운 주변 지역이 서서히 슬라브족화되었고, 단일 민족의 리투아니아인 지역이었던 빌뉴스 지역은 벨라루스-폴란드-리투아니아의 다민족 지역이 되었다. 벨라루스인 인구는 17세기와 18세기 초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지역(북부 아슈먀니, 트라카이, 슈벤초니스 및 빌뉴스 군)으로 이주했으며, 리투아니아 정착지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1897년 러시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빌나 현은 벨라루스어 사용자가 우세했으며(56.05%), 폴란드어 사용자는 인구의 8.17%에 불과했다.[4] 러시아는 지역 폴란드인 인구가 주로 귀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역 농민은 폴란드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독일(1916년)과 폴란드(1919년) 인구 조사는 빌뉴스와 그 주변 지역이 폴란드인 다수를 차지했음을 보여주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말, 빌뉴스 주민의 50%가 폴란드인이었고 43%가 유대인이었다. 주변 마을은 주로 폴란드인으로 간주되는 벨라루스어 사용자가 거주했다. 또한 특정 정치 상황에 따라 스스로의 민족 정체성을 선택한 대규모 그룹이 있었다. 1916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리투아니아인은 인구의 18.5%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 인구 조사 동안 빌뉴스 지역이 크게 확장되어 리투아니아인 인구의 비율이 희석되었다. 1921년과 1931년의 전후 폴란드 인구 조사에 따르면,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리투아니아인은 5%였으며, 빌뉴스 남서쪽, 남쪽(디에베니슈케스 앙클라브), 동쪽(게르베차이 앙클라브) 및 슈벤초니스 북쪽에 몇 개의 거의 순수한 리투아니아인 거주지가 있었다. 후자의 세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대다수는 폴란드인(약 60%)으로 구성되었고, 리투아니아 정부는 지역 폴란드인의 대다수가 사실 폴란드화된 리투아니아인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단순한 말'' 방언은 샬치닌카이 구와 빌뉴스 구의 일부 지역에서 폴란드인에게 모국어이며, 그 화자들은 자신을 폴란드인으로 여기고 ''Po prostu'' 언어가 순수한 폴란드어라고 믿는다.[5] 소련이 점령하여 벨라루스로 넘어간 빌뉴스 지역의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지역인"(Tutejszy)을 포함한 인구는 여전히 강한 폴란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 언어가 코드화되지 않은 벨라루스 방언[6]임에도 불구하고, 기층 유물이 리투아니아어에서 유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7] 그 화자들은 자신을 폴란드인으로 여기고 ''Po prostu'' 방언이 순수한 폴란드어라고 믿는다.

유대인 학살, 이동 및 이주 이후, 리투아니아인은 1989년 빌뉴스 지역에서 명실상부한 민족적 다수(50.5%)가 되었다.[10] 빌뉴스 시의 리투아니아인 비율은 20세기 전반 2%에서 1970년 42.5%로 증가했고, 2001년에는 57.8%로 증가했다(도시 전체 인구는 여러 배 증가). 2021년에는 67.1%였다.

폴란드인들은 여전히 빌뉴스 주변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1989년 빌뉴스 구 인구의 63.6%와 샬치닌카이 구 인구의 82.4%를 차지했다. 2011년까지 그 수는 빌뉴스 구 인구의 52.07%와 샬치닌카이 구 인구의 77.75%로 감소했다.[11]

4. 2.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민족 구성

이 지역은 원래 리투아니아 발트족이 거주했지만, 동슬라브 및 폴란드 문화의 영향을 받아 점차 루테니아화와 폴란드화가 진행되었다.[4] 1897년 러시아 인구 조사에서는 빌나 현에서 벨라루스어 사용자가 우세(56.05%)했고, 폴란드어 사용자는 8.17%에 불과했다.[4] 그러나 러시아는 지역 폴란드인 인구가 주로 귀족이며, 농민은 폴란드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4]

이후 독일(1916년)과 폴란드(1919년)의 인구 조사에서는 빌뉴스와 그 주변 지역에서 폴란드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4] 당시 빌뉴스는 폴란드인과 유대인이 거의 비슷했고, 리투아니아인은 2~2.6%에 불과했다.[4] 그러나 리투아니아 측에서는 이러한 인구 조사가 편향되었다고 비판했다.[4]

제1차 세계 대전 말, 빌뉴스 주민의 50%는 폴란드인, 43%는 유대인이었다. 주변 마을에는 주로 폴란드인으로 간주되는 벨라루스어 사용자가 거주했다.[4] 1916년 독일 인구 조사에서는 리투아니아인이 18.5%였으나, 이 조사에서는 빌뉴스 지역이 크게 확장되어 리투아니아인 비율이 희석되었다.

전후 폴란드 인구 조사(1921년, 1931년)에서는 리투아니아인이 5%에 불과했고, 폴란드인이 60%를 차지했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지역 폴란드인의 대다수가 실제로는 폴란드화된 리투아니아인이라고 주장했다.[4]

오늘날 샬치닌카이 구와 빌뉴스 구 일부 지역에서는 폴란드인들이 '단순한 말(Po prostu)' 방언을 모국어로 사용하며, 자신들을 폴란드인으로 여긴다.[5]

4. 3. 현대의 민족 구성

제2차 세계 대전과 유대인 학살, 폴란드 인구 이동 등의 영향으로 빌뉴스 지역의 민족 구성은 크게 변화했다. 1989년, 리투아니아인은 빌뉴스 지역에서 50.5%를 차지하며 다수 민족이 되었다.[10] 특히 빌뉴스 시의 리투아니아인 비율은 20세기 전반 2%에서 1970년 42.5%로 크게 증가했으며, 2001년에는 57.8%, 2021년에는 67.1%까지 증가했다.

폴란드인은 여전히 빌뉴스 주변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1989년 빌뉴스 구 인구의 63.6%, 샬치닌카이 구 인구의 82.4%를 차지했다. 2011년 조사에서는 빌뉴스 구 인구의 52.07%, 샬치닌카이 구 인구의 77.75%로 감소했지만, 여전히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11]

샬치닌카이 구와 빌뉴스 구 일부 지역에서는 폴란드인이 "단순한 말(Po prostu)" 방언을 모국어로 사용하며, 자신들을 폴란드인으로 여긴다.[5] 이들은 해당 언어가 순수한 폴란드어라고 믿는다. 소련 점령으로 벨라루스로 넘어간 빌뉴스 지역의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지역인"(Tutejszy) 인구 또한 강한 폴란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6][7]

참조

[1] 간행물 Lithuania Propria
[2] 웹사이트 Viduramžių Lietuva http://viduramziu.li[...] 2007-04-11
[3] 웹사이트 Józef Piłsudski - wróg niepodległości Litwy czy jej wybawca? http://www.pogon.lt/[...] Veidas 2005-08-25
[4] 웹사이트 Demoscope http://demoscope.ru/[...]
[5]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www.istorija.[...] 2009-10-22
[6] 웹사이트 Jankowiak: Polacy na Wileńszczyźnie mówią gwarą białoruską https://kresy24.pl/j[...] 2015-08-27
[7] 웹사이트 Ethnic Processes in Southeastern Lithuania in the 2nd half of the 20th c. http://www.istorija.[...] 2004-08-17
[8] 웹사이트 Первая всеобщая перепись населения Российской Империи 1897 г. Виленский уезд, весь. http://demoscope.ru/[...]
[9] 웹사이트 Первая всеобщая перепись населения Российской Империи 1897 г. Виленский уезд без города http://demoscope.ru/[...]
[10] 웹사이트 Migracijos procesai Vilniuje: kaip ir kodėl per sovietmetį keitėsi Vilniaus gyventojų sudėtis https://www.15min.lt[...] 2021-06-20
[11] 웹사이트 Gyventojai gyvenamosiose vietovėse http://www.osp.stat.[...] "[[Statistics Lithuania]]" 2013-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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