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제프 피우수트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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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1867년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폴란드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1918년 폴란드의 독립을 이끌고 국가 원수를 역임했다. 그는 러시아 제국에 대항하는 활동을 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 군단을 조직하여 활약했다. 1920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승리하며 폴란드의 독립을 굳건히 했지만, 이후 권위주의적 통치를 펼치기도 했다. 그는 외교적으로 프랑스, 영국 등과 동맹을 맺으려 노력했고, 1935년 사망 후 폴란드의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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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프 피우수트스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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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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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유제프 클레멘스 피우수트스키 |
로마자 표기법 | Józef Klemens Piłsudski |
IPA 표기 | /ˈjuzɛf ˈklɛmɛns pʲiwˈsutskʲi/ |
출생일 | 1867년 12월 5일 |
출생지 | 주우프, 빌나 현, 러시아 제국 (현재 리투아니아) |
사망일 | 1935년 5월 12일 |
사망지 | 바르샤바, 폴란드 |
소속 정당 | 폴란드 사회당 (1893–1918) → 무소속 |
배우자 | 마리아 피우수트스카 (1899년 결혼, 1921년 사망) 알렉산드라 피우수트스카 (1921년 결혼) |
자녀 | 반다 피우수트스카 야드비가 피우수트스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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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 |
국가 원수 | 국가원수 재임 시작: 1918년 11월 22일 재임 종료: 1922년 12월 14일 총리: 옌드제이 모라체프스키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 레오폴트 스쿨스키 브와디스와프 그랍스키 빈첸티 비토스 안토니 포니코프스키 아르투르 실리빈스키 율리안 노바크 전임: 섭정평의회 후임: 가브리엘 나루토비치 (대통령) |
총리 | 총리 재임 시작: 1926년 10월 2일 재임 종료: 1928년 6월 27일 대통령: 이그나치 모시치츠키 전임: 카지미에시 바르텔 후임: 카지미에시 바르텔 부총리: 카지미에시 바르텔 |
군사 경력 | |
소속 | 폴란드 군단 폴란드 육군 |
복무 기간 | 1914년–1923년 1926년–1935년 |
계급 | 폴란드의 원수 |
참전 | 혁명 제1차 세계 대전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
훈장 | [[파일:POL Order Orła Białego BAR.svg|x20px|link=백수리 훈장 (폴란드)]] 백수리 훈장 [[파일:POL Virtuti Militari Srebrny BAR.svg|x20px|link=비르투티 밀리타리|비르투티 밀리타리 은십자장]] 비르투티 밀리타리 은십자장 [[파일:POL Virtuti Militari Komandorski BAR.svg|x20px|link=비르투티 밀리타리|비르투티 밀리타리 사령관십자장]] 비르투티 밀리타리 사령관십자장 [[파일:POL Virtuti Militari Wielki BAR.svg|x20px|link=비르투티 밀리타리|비르투티 밀리타리 사령관십자성장]] 비르투티 밀리타리 사령관십자성장 [[파일:POL Krzyż Niepodległości z Mieczami BAR.svg|x20px|link=독립십자장]] 독립십자장 폴란드 재건국 훈장 2등급 폴란드 재건국 훈장 1등급 [[파일:POL Krzyż Walecznych BAR.svg|x20px|link=용맹십자장 (폴란드)]] 용맹십자장 (4회) [[파일:POL Złoty Krzyż Zasługi BAR.svg|x20px|link=공훈십자장 (폴란드)|공훈십자금장]] 공훈십자금장 [[파일:Ordine imperiale della corona di ferro, austria.png|x20px|link=철왕관장 (오스트리아-헝가리)]] 철왕관장 (오스트리아-헝가리) [[파일:Grand Crest Ordre de Leopold.png|x20px|link=레오폴 기사단]] 레오폴 기사단 [[파일:Order of the Southern Cross Grand Collar Ribbon.png|x20px|link=남십자 기사단]] 남십자 기사단 [[파일:Czechoslovak War Cross 1918 Ribbon.png|x20px|link=체코슬로바키아 1918년 전쟁 십자장]] 체코슬로바키아 1918년 전쟁 십자장 [[파일:EST Order of the Cross of the Eagle 1st Class BAR.png|x20px|link=수리십자장]] 수리십자장 [[파일:EST Cross of Liberty Military Leadership.png|x20px|link=자유십자장 (에스토니아)]] 자유십자장 (에스토니아) 핀란드 백장미 훈장 5등급 [[파일:FIN Order of the White Rose Knight 1st Class BAR.png|x20px|link=핀란드 백장미 훈장]] 핀란드 백장미 훈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 [[파일:Medaille militaire ribbon.svg|x20px|link=메다예 밀리테르]] 메다예 밀리테르 욱일대수장 [[파일:Order of the Karađorđe's Star with Swords rib.png|x20px|link=카라조르제 성장]] 카라조르제 성장 [[파일:Lacplesis Military Order Ribbon.png|x20px|link=라츠플레시스 훈장]] 라츠플레시스 훈장 [[파일:PRT Military Order of the Tower and of the Sword - Grand Cross BAR.png|x20px|link=탑검 기사단]] 탑검 기사단 [[파일:OrderofCarolI.ribbon.gif|x20px|link=카롤 1세 훈장]] 카롤 1세 훈장 용감공 미하이 훈장 3등급 용감공 미하이 훈장 2등급 용감공 미하이 훈장 1등급 [[파일:Cavaliere di gran croce OMS BAR.svg|x20px|link=사보이아 군사훈장]] 사보이아 군사훈장 |
기타 | |
종교 | 루터교 → 천주교 |
2. 생애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 지역(현재 리투아니아 잘라바스)의 몰락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러시아 정부가 금지했던 폴란드어 읽기와 쓰기, 폴란드 역사를 배우며 독립 정신을 키웠으며, 이는 훗날 피우수트스키의 독립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84년 어머니 마리아가 사망했다.
2. 1. 유년기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1867년 12월 5일 지금의 리투아니아 영토인 잘라바스 지방에서 태어났다. 피우수트스키 가문은 대대로 이 지역 장원의 지주였으며 유제프가 태어날 당시 잘라바스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다. 잘라바스는 원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원인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였으나, 18세기 말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그리고 프로이센 왕국에 의해 이루어진 폴란드 분할 이후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60]
피우수트스키 가문은 폴란드의 귀족인 슐라흐타 신분이었고[61], 대대로 폴란드에 대한 애국심을 지니고 있었으며[62], 러시아 제국에 편입된 후에도 스스로를 폴란드인, 즉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민이라 여겼다.[63][64] 유제프는 가문의 차남이었다.
유제프는 빌뉴스에 있는 러시아 김나지움을 다녔는데 그리 재능있는 학생은 아니었다.[65] 훗날 피우수트스키의 평생 숙적이 되는 펠릭스 제르진스키가 1년 후배로 같은 학교에 다녔다.[66] 제르진스키는 볼셰비키의 비밀경찰을 창설한 인물이다.[66] 러시아의 지배하에서 유제프와 그의 형제들은 어머니에게 폴란드어와 문학, 그리고 역사를 배웠다.[67]
1863년 유제프와 이름이 같았던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의 지배에 저항하는 1월 봉기에 참여하였다.[60] 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 러시아 제국은 리투아니아인들에 대한 러시아화 정책을 실시하였고, 이의 일환으로 유제프는 러시아 정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곳에서는 러시아 황제에 대한 충성과 러시아 정교회 신앙을 강요하였다.[68][69]
2. 2. 유형 시기와 사회주의 활동
1885년 피우수트스키는 하르키우 대학교 의예과에 입학하여 나로드니키의 일파인 인민의 의지당(Народная Воляru)에 가입하였다.[70] 1886년 학생 운동을 그만두고 타르투 대학교에 입학하고자 하였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거부되었다.[60]1887년 3월, 피우수트스키는 알렉산드르 3세 암살을 모의한 빌뉴스 사회주의 조직과 연계되었다고 오인되어 체포되었다. 그러나 실제 이 조직에 연계되었던 것은 그의 형 브로니쇼우였고, 그는 이 일로 시베리아 동부에서 15년의 징역형을 살았다.[71] 유제프는 비교적 관대하게 처분되어 5년간의 유배형을 받고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72] 유배지로 수송되기까지 몇 주간 이르쿠츠크의 형무소에서 복역하였으며, 이후 레나강 유역의 키렌스크와 툰카 등지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73] 배고픔을 참지 못한 유형수들이 봉기를 일으켜 관리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피우수트스키는 이빨 두 개를 잃었다.[74] 시베리아의 겨울 기온은 영하 40도까지 떨어졌고, 이로 인해 피우수트스키는 건강이 나빠져 죽을 지경이 되었다. 결국 1888년 피우수트스키는 병요양을 위해 6개월간의 복역 중지 결정을 받았다.[75]
유형 기간 동안 피우수트스키는 시베리아로 추방된 수많은 폴란드인들을 만났다. 시비라크라 불린 이들 가운데는 1863년 1월 봉기의 지도자였던 브로니쇼우 슈와르츠도 있었다.[76] 피우수트스키는 모국어인 폴란드어를 비롯하여 프랑스어, 독일어, 리투아니아어, 러시아어에 능통하였으며,[77] 나중에는 영어도 배웠다.[78] 지역 관리는 이 폴란드 귀족이 다른 유형인들로부터 10루블 이상을 받지 못하도록 하였다.[79]

1892년 유형 생활을 마친 피우수트스키는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실라레 지역인 아도마바스 마노르에 살게 되었다. 1893년 폴란드 사회당에 입당하였고[60] 리투아니아 지부 설립을 도왔다.[80] 그는 폴란드 사회당에서 극좌적 성향을 보였으나, 당의 공식 입장인 인터내셔널리즘과는 다르게 민족주의적인 성향도 함께 보였다.[81]
1894년 피우수트스키는 지하신문이자 당 기관지인 로보트니크(Robotnik, 노동자pl)를 발행하였다. 피우수트스키는 로보트니크의 주필로서 발행인 겸 편집인이었다. 1895년 폴란드 사회당의 지도자가 된 피우수트스키는 당 강령을 수정하여 폴란드의 독립을 폴란드 사회당의 중요 목표로 설정하였다.[70]
1899년 7월 15일, 폴란드 사회당의 지하 조직활동가였던 피우수트스키는 같은 지하 조직 활동을 하던 마리아 유슈키에초코바 네 코플로스카와 결혼하였다.[82][83][84] 그러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않았고 피우수트스키는 젊은 사회당원이었던 알렉산드라 슈체르빈스카와 내연의 관계를 가졌다.[81] 1921년 마리아가 사망하자 피우수트스키는 알렉산드라와 결혼하였다. 피우수트스키와 알렉산드리아 사이에서 두 딸 반다와 야디가가 태어났다. 피우수투스키의 두 번째 결혼 역시 순탄하지는 않았다.[85]
1900년 러시아 당국에게 로보트니크의 비밀 인쇄소가 발각되자 피우수트스키는 다시 죄수가 되었고 바르샤바 인근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01년 피우수트스키는 정신병을 가장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호텔로 옮겨진 틈을 타 탈옥하였다.[60]
2. 3. 러일 전쟁과 군사 조직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이 폴란드의 독립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러시아 지배하의 폴란드인들은 독립을 최대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었고 피우수트스키가 이끌던 폴란드 사회당 역시 폴란드의 주권 회복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하고 있었다.[61] 피우수트스키는 일본에 러시아군 내의 폴란드인을 통해 정보를 제공하고,[86] 일본군에 붙잡힌 러시아군 가운데 폴란드인을 선별하여 러시아와 대적할 폴란드 군단을 설립할 수 있다고 약속하였다.[87]1904년 가을, 피우수트스키는 러시아에 대항하는 저항 운동을 목적으로 준군사조직인 폴란드 사회당 전투단을 창립하였다.[88] 전투단은 첫 무력 시위로 1904년 10월 28일 바르샤바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의 코사크 기병대를 기습하였고, 11월 13일 공식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교전을 선언하였다.[89] 피우수트스키의 준군사조직은 초기에는 주로 정탐 활동이 주된 임무였으나, 1905년에 들어서자 수류탄으로 러시아 정치인을 암살하는 활동을 시작하였다.[90]
1905년 러시아 혁명 시기,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 왕국 부흥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1905년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 사회당을 통해 총파업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4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벌였다. 러시아 정부는 두 달이 지나서야 파업을 저지할 수 있었다. 피우수트스키는 우치의 봉기를 지원하기 위해 준군사조직을 보냈다. 1905년 우치 봉기에서 피우수트스키의 폴란드 사회당 전투단과 왕당파였던 로만 드모프스키의 국민민주당은 상호 교전으로 유혈 사태를 일으켰다. 1905년 12월 22일, 피우스트스키는 폴란드의 모든 노동자가 봉기할 것을 요청하였다.[88]
1906년 러시아 제국은 유화 정책의 하나로서 초대 러시아 두마의 구성을 선포하고 총선에 들어갔다. 드모프스키의 국민민주당이 두마 총선을 지지한 것과 달리, 폴란드 사회당은 두마 선거 자체를 보이콧하였다. 피우수트스키는 두마 체제에 편입하는 것으로는 폴란드의 독립을 달성할 수 없으며, 오직 혁명적 봉기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여겼고,[91] 드모프스키를 "낡은 정책"이라 비판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회민주주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젊은 정책"을 표방하였다.[70]
피우수트스키와 그의 지지자들은 폴란드가 독립을 이룰 때까지 차르 러시아에 대해 혁명적인 저항을 계속해야 한다는 "혁명 강령"을 지지하였다.[60] 1909년 폴란드 사회당은 피우스트스키의 주장을 당의 주요 강령으로 채택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 사회당의 지도자로서 확고한 위치에 올랐다.[92]
유럽에 전쟁이 있을 것이라 판단한[93] 피우수트스키는 장차 폴란드군의 핵심이 될 군사조직을 육성하였다. 피우수트스키는 이를 통해 18세기 이래 세 제국에 의해 분할되어 왔던 폴란드의 독립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1906년 피우수트스키는 오스트리아 당국의 묵인 아래 크라코프에 군사학교를 설립하여 800여 명의 정예 대원을 양성하였다. 이들은 1906년에만 336명의 러시아 관리를 살해하였다. 피우수트스키의 준군사조직은 1908년 2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1908년 9월 26-27일, 이들 준군사조직은 바르샤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세금을 운반하던 우편 열차를 기습하였다.[91] 당시 약탈한 금액은 200,812 루블이었으며,[94] 피우수트스키는 이를 통해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95]
1908년 이후 피우수트스키는 준군사조직을 적극 저항 연맹(Związek Walki Czynnej, ZWCpl)으로 재편하였다. 이들은 훗날 폴란드군 부사관의 주력을 이루었다.[70] 한편, 1910년에는 두 개의 준군사조직이 별도로 창설되었고, 1912년에는 총포협회가 창설되었다. 총포협회는 1914년 1만 2천여 명으로 성장하였다. 1914년 피우수트스키는 "이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무력 뿐이다"라고 선포하였다.[91]
2. 4. 제1차 세계 대전과 폴란드 군단
필수츠키는 다가올 유럽 전쟁과 미래 폴란드군의 지휘부를 조직할 필요성을 예상했다. 그는 18세기 후반 폴란드를 정치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만든 세 제국으로부터 폴란드의 독립을 확보하고자 했다. 1906년 필수츠키는 오스트리아 당국의 묵인 하에 크라쿠프에 준군사 부대 훈련을 위한 군사학교를 설립했다.1908년 필수츠키는 그의 준군사 부대를 블라디스와프 시코르스키, 마리안 쿠키엘, 카지미에시 소스노프스키가 이끄는 "활동적 투쟁 연맹"(''Związek Walki Czynnej'', ZWC)로 개편했다. ZWC의 주요 목적은 미래 폴란드군을 위한 장교와 하사관을 훈련하는 것이었다. 1910년, 폴란드의 오스트리아 지역에, 하나는 리비우(현재 리비우, 우크라이나), 다른 하나는 크라쿠프에 두 개의 합법적인 준군사 조직이 설립되어 군사학 훈련을 실시했다. 오스트리아 관리들의 허가를 받아 필수츠키는 폴란드 군대 훈련을 위한 위장으로 일련의 "스포츠 클럽"을 설립한 다음 사수 연맹을 설립했다. 1912년 필수츠키는 ("미에치스와프"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사수 연맹(''Związek Strzelecki'')의 사령관이 되었다. 1914년까지 그들의 수는 12,000명으로 증가했다. 1914년 파리에서 강연을 하던 중 필수츠키는 "이제 칼만이 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저울에 무게를 더한다"고 선언하며, 폴란드의 독립은 분할 세력에 대한 군사 투쟁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7]
1914년 파리 회담에서 필수츠키는 다가오는 전쟁에서 폴란드가 독립을 되찾으려면 러시아가 중앙 세력(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에게 패배해야 하고, 중앙 세력은 다시 프랑스 제3공화국,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그리고 미국에게 패배해야 한다고 예언했다.[8]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 8월 3일, 크라쿠프에서 필수츠키는 사수 협회(Riflemen's Association)와 폴란드 저격수 부대(Polish Rifle Squads) 대원들을 중심으로 제1 사단(First Cadre Company)이라는 소규모 정예 부대를 편성했다. 같은 날, 블라디스와프 벨리나-프라주모프스키(Władysław Belina-Prażmowski) 지휘하의 벨리나의 일곱 기병대(The Seven Lancers of Belina)는 8월 6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간 공식적인 선전포고에 앞서 러시아 국경을 정찰하러 파견되었다.

필수츠키의 전략은 그의 부대를 국경 너머 북쪽으로 러시아령 폴란드(Congress Poland)로 진격시켜 러시아군이 철수한 지역을 돌파하여 바르샤바에서 전국적인 혁명을 촉발하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제한된 병력을 사용하여 바르샤바의 가상 "임시 정부"의 승인을 받았으며, 오스트리아의 명령을 최대한 활용하고, 주도권을 잡고, 해방된 도시에 폴란드 기관을 설립했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그의 부대를 정찰이나 주요 오스트리아 부대 지원에만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1914년 8월 12일 필수츠키의 부대는 키엘체 주(Kielce Governorate)의 키엘체(Kielce)를 점령했지만, 필수츠키는 주민들의 지지가 예상보다 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14년 8월 27일 필수츠키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내에 폴란드 군단(Polish Legions in World War I)을 창설했고,[9] 그의 제1여단(I Brigade of the Polish Legions)을 직접 지휘했다. 그는 여러 승전을 이끌었다. 그는 또한 1914년 가을 영국 정부에 그의 군단은 러시아와만 싸울 것이며 프랑스나 영국과는 결코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비밀리에 알렸다.
필수츠키는 군단원들이 프랑스 혁명에서 영감을 받은 "시민"(Obywatel)으로 불리도록 명령했고, 그는 "사령관"("Komendant")으로 불렸다. 필수츠키는 그의 부하들로부터 큰 존경과 충성심을 받았다. 폴란드 군단은 1917년까지 중앙 세력 편에서 러시아와 싸웠다.[10]
1914년 8월 필수츠키는 폴란드 군사 조직(Polska Organizacja Wojskowa)을 설립했는데, 이는 폴란드 정보 기관의 전신으로서 스파이 활동과 파괴 활동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었다.[11]

1916년 중반, 폴란드 군단이 2,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면서 러시아의 공세를 지연시킨 코스튜흐누프카 전투(Battle of Kostiuchnówka) 이후, 필수츠키는 중앙 세력이 폴란드의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자신의 사임과 군단 장교들의 사임을 제안하며 이 요구를 지지했다. 1916년 11월 5일 중앙 세력은 러시아에 맞서 동부 전선(Eastern Front (World War I))으로 보낼 수 있는 폴란드군의 수를 늘리고, 독일군을 서부 전선(Western Front (World War I))으로 증원하기 위해 폴란드의 독립을 선포했다.
필수츠키는 중앙 세력이 세운 폴란드 왕국(Kingdom of Poland (1916–1918))에서 복무하는 데 동의했고, 새로 결성된 폴란드 섭정 정부(Polish Regency government)의 군사 장관으로서 폴란드 국방군(Polnische Wehrmacht)을 책임졌다. 1917년 초 러시아 혁명 이후 중앙 세력의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필수츠키는 그의 부하들이 더 이상 "독일 식민지군"으로 취급되지 않고 러시아와만 싸우도록 고집하며 점점 더 비타협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중앙 세력의 전쟁 패배를 예상하고 패배하는 편에 서기를 원치 않았다.
1917년 7월 "선서 위기"(oath crisis) 이후 필수츠키가 폴란드 병사들에게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충성 맹세(loyalty oath)를 할 것을 금지했을 때, 그는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 투옥되었다.[12] 폴란드 부대는 해산되었고 병사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편입되었으며, 폴란드 군사 조직은 독일 목표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필수츠키의 체포는 그를 분할 세력 모두에 맞설 의지가 있는 지도자로 여기기 시작한 많은 폴란드인들 사이에서 그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1918년 11월 8일, 1918년 11월 11일 휴전 협정 3일 전, 필수츠키와 그의 동료인 카지미에시 소스노프스키(Kazimierz Sosnkowski) 대령은 마그데부르크에서 독일인들에게 풀려났고 곧 바르샤바로 향하는 기차에 탑승했다. 붕괴되는 독일은 필수츠키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세력을 창출하기를 바랐다.
2. 5. 폴란드 재건과 국가 원수
1918년 11월 11일, 폴란드는 해방되었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열차를 타고 바르샤바에 도착하여 독일군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노력했다. 얼마 되지 않아 슐레지엔과 대폴란드에서 폴란드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자신들을 탄압하는 독일인들에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포즈난은 폴란드의 품으로 돌아왔다. 실롱스크의 경우 3번에 걸친 봉기 끝에 폴란드의 손 안에 들어왔다.[13] 폴란드는 남동부 지방에서도 우크라이나인들과 전쟁을 치렀고, 양측에서 25,0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피우수트스키는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소련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는 아직 안정되지 못했다. 폴란드의 철도 시스템과 법전은 통일되지 않았고, 1920년까지 6가지의 통화가 폴란드 각지에서 유통되었다. 통일된 철도 광궤와 시스템은 물론 존재하지 않았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가 지배했던 지역의 폴란드인들은 각각 자신들을 바르미아인, 폴란드 왕국인, 실롱스크인이라 생각하는 등 3국에 점령되어 있던 폴란드의 과거도 이러한 상태에 영향을 끼쳤다.
1918년 11월 11일, 피우수트스키는 섭정위원회로부터 폴란드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새로 독립한 국가를 위한 국가 정부 수립을 맡았다. 같은 날(폴란드의 독립기념일), 그는 폴란드의 독립을 선포하고 바르샤바에서 독일 주둔군과 오베르 오스트(Ober Ost)의 다른 독일군 철수 협상을 벌였다. 5만 5천 명이 넘는 독일군이 무기를 폴란드인들에게 남겨둔 채 평화적으로 폴란드를 떠났고, 이후 몇 달 동안 총 40만 명이 넘는 독일군이 폴란드 영토를 떠났다.
1918년 11월 14일, 피우수트스키는 국가 운영을 임시적으로 감독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11월 22일, 그는 옌드제이 모라체프스키(Jędrzej Moraczewski)의 새 정부로부터 부활한 폴란드의 임시 국가수반(Tymczasowy Naczelnik Państwa)이라는 직함을 공식적으로 받았다. 바르샤바의 섭정위원회, 이그나치 다신스키(Ignacy Daszyński)의 루블린 정부, 크라쿠프의 폴란드 청산위원회(Polish Liquidation Committee) 등 여러 폴란드 군사 조직과 임시 정부가 피우수트스키를 지지했다. 그는 주로 사회주의자인 연립 정부를 수립하고, 8시간 노동제, 무상 의무교육, 여성 참정권과 같이 폴란드 사회당이 오랫동안 필요하다고 주장해 온 많은 개혁을 도입하여 큰 혼란을 피했다. 국가 원수로서 피우수트스키는 당파 정치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바르샤바에 도착한 다음 날, 그는 지하 저항 운동에서 함께 일했던 오랜 동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그에게 사회주의 방식으로 "동지"(Towarzysz)라고 부르며 혁명적 정책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그는 이를 거부하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동지 여러분, 저는 사회주의라는 빨간 트램을 독립이라는 정류장까지 타고 왔고, 거기서 내렸습니다. 여러분은 원한다면 종점까지 계속 갈 수 있지만, 이제부터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도록 합시다!" 하지만 이 인용문의 진위는 논란이 있다.[13][14] 피우수트스키는 어떤 정당도 지지하지 않았고, 자신의 정치 조직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연립 정부를 만들 것을 옹호했다.
피우수트스키는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군대의 폴란드 출신 참전 용사들로 폴란드군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러시아령 폴란드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고, 독일군의 체계적인 약탈로 인해 이 지역의 부는 최소 10% 감소했다. 1919년 1월 바르샤바를 방문한 영국 외교관은 "극심한 빈곤과 비참함의 증거는 거의 모든 곳에서 볼 수 있었는데, 저는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게다가 폴란드는 이전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지역의 서로 다른 법률, 경제 및 행정 체계를 통합해야 했다. 법률 제도 9개, 통화 5개, 철도 시스템 66개(기관차 165종)가 있었고, 각각 통합될 필요가 있었다.

전기 작가 바츠와프 옌드제예비치는 피우수트스키가 결정 과정에서 매우 신중했다고 묘사했다. 피우수트스키는 이용 가능한 모든 관련 정보를 수집한 다음, 최종 결정에 도달하기 전에 시간을 들여 신중하게 검토했다. 그는 장시간 근무했고, 간소한 생활 방식을 유지하며 저렴한 식당에서 혼자 소박한 식사를 했다. 그는 많은 폴란드 국민들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수년간의 지하 활동으로 인한 고독한 사람이라는 평판과 거의 모든 사람을 불신하는 성격 때문에 다른 폴란드 정치인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피우수트스키와 최초의 폴란드 정부는 서방에서 불신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중앙 강국과 협력했고 다신스키와 모라체프스키 정부가 주로 사회주의 정부였기 때문이다.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가 폴란드 총리 겸 신정부 외무장관이 된 1919년 1월이 되어서야 폴란드는 서방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바르샤바의 피우수트스키 정부와 파리의 로만 드모프스키 정부, 두 개의 별개 정부가 폴란드의 합법 정부임을 주장했다. 폴란드가 단일 정부를 갖도록 하고 내전을 피하기 위해 파데레프스키는 드모프스키와 피우수트스키를 만나 그들에게 힘을 합칠 것을 설득했고, 피우수트스키는 임시 국가 원수 겸 최고 사령관을 맡았으며, 드모프스키와 파데레프스키는 파리 평화 회의에서 폴란드를 대표했다. 베르사유 조약의 87~93조와 1919년 6월 28일에 체결된 베르사유 소조약은 국제 무대에서 폴란드를 공식적으로 독립 주권 국가로 확립했다.
피우수트스키는 부활한 폴란드에서 폴란드인을 주요 민족으로 보고 독일 단치히(현재 폴란드 그단스크)를 통해 푸른 군대를 폴란드로 보내려고 시도한 로만 드모프스키와 자주 충돌했다. 1919년 1월 5일, 드모프스키의 지지자들(마리안 야누샤이티스-제고타와 우스타히 사피에하)이 피우수트스키에 대한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919년 2월 20일, 폴란드 의회(세임)는 1919년 소헌법을 통과시키면서 그의 직책을 확인했지만, 피우수트스키는 결국 자신의 권력을 의회에 양도할 의향이 있음을 선포했다. 그의 직함에서 "임시"라는 단어가 삭제되었고, 피우수트스키는 가브리엘 나루토비치가 첫 번째 폴란드 대통령으로 선출된 1922년 12월 9일까지 국가 원수직을 유지했다.
피우수트스키의 주요 외교 정책 구상은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이어지는 "미에지모제"(''Międzymorze'') (폴란드어로 "바다 사이")로 불리는 연방(라틴어로 ''인터마리움'')이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외에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라트비아, 에스토니아가 포함될 예정이었고, 어느 정도 분할 이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본뜬 것이었다. 피우수트스키의 계획은 독립을 포기하기를 거부한 대부분의 예상 회원국과 기존의 세력 균형 구조에 대한 너무 과감한 변화라고 생각한 연합국으로부터 반대에 부딪혔다. 역사가 조지 샌포드에 따르면, 피우수트스키는 1920년경에 자신의 인터마리움 프로젝트의 그 버전이 실행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중앙 및 동유럽 동맹 대신,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1918~191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1919~1920년, 젤리고프스키의 반란으로 절정에 달함),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국경 분쟁(1918년 시작), 그리고 가장 주목할 만하게 폴란드-소련 전쟁(1919~1921년)을 포함한 일련의 국경 분쟁이 발생했다. 윈스턴 처칠은 "거인들의 전쟁은 끝났고, 난쟁이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라고 말했다.
2. 6.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의 모든 국경 지역은 불안정했다. 동쪽에서는 폴란드군이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군과 충돌했고, 피우수트스키는 1918년 11월 12일 폴란드군 총사령관으로서 최초의 명령으로 리비우(Lviv)에서의 폴란드의 투쟁을 지원하도록 했다.[1]
피우수트스키는 볼셰비키가 독립 폴란드와 동맹을 맺지 않을 것이며, 그들과의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예측했다.[2] 그는 볼셰비키의 서쪽으로의 진격을 주요 문제로 간주했지만, 백군보다 폴란드에 덜 위험한 세력으로 여겼다.[3] 피우수트스키는 서방 열강으로부터 소외된 볼셰비키와 함께하는 것이 복원된 러시아 제국과 함께하는 것보다 폴란드에 더 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4][5] 레닌의 볼셰비키 정부에 대한 공격에 참여하라는 앙탕트 코르디알의 압력을 무시함으로써, 피우수트스키는 1919년 여름과 가을에 볼셰비키 정부를 구했을 가능성이 높다.[6]

1918~1919년 소비에트 서쪽 공세와 일련의 격화되는 전투로 폴란드군이 동쪽으로 진격한 후, 1920년 4월 21일 피우수트스키 원수(1920년 3월부터 계급)는 우크라이나 지도자 시몬 페트류라와 바르샤바 조약이라는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 폴란드-우크라이나 조약의 목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과 유사한 동맹 관계 속에서 독립적인 우크라이나와 폴란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7] 피우수트스키의 지휘하에 있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군대는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군에 대한 성공적인 공세를 시작했고, 1920년 5월 7일 거의 전투 없이 키예프를 점령했다.[8]
볼셰비키 지도부는 폴란드의 행동을 침략으로 규정하여 국내에서 자신들의 대의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9] 소비에트는 벨라루스에서 반격을 시작하여 우크라이나에서 반격을 가해 폴란드로 진격했고[10] 권력 투쟁에서 독일 공산당을 지원하기 위해 독일을 향해 진격했다.[11] 소비에트 공산주의 이론가 니콜라이 부하린은 ''프라우다''에 기고하여 바르샤바를 넘어 "런던과 파리로 바로" 진군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희망했다.[12] 소비에트 사령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의 1920년 7월 2일자 명령은 다음과 같다. "서쪽으로! 백색 폴란드의 시체 위에 세계적인 대화재로 가는 길이 놓여 있다. 빌뉴스, 민스크(Minsk), 바르샤바로 진군하라!"[13] 그리고 "폴란드의 시체를 넘어 베를린으로 나아가라!"[14]

1920년 7월 1일, 급속히 진격하는 소비에트 공세를 고려하여 폴란드 의회인 세임(Sejm)은 피우수트스키를 의장으로 하는 국가 방위 평의회를 구성하여 분열된 세임을 일시적으로 대체하여 신속한 의사 결정을 내리도록 했다.[15] 민족민주당은 볼셰비키의 일련의 승리가 피우수트스키의 잘못이라고 주장했고[16], 그의 사임을 요구했으며, 심지어 그를 반역죄로 고발하기도 했다.[17] 7월 19일, 그들은 평의회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통과시키지 못했고, 이로 인해 드모프스키가 평의회에서 탈퇴하게 되었다.[18] 8월 12일, 피우수트스키는 빈첸티 비토스(Wincenty Witos) 총리에게 사임 의사를 표명했고, 군사적 해결책이 실패하면 속죄양이 될 것을 제안했지만, 비토스는 그의 사임을 거부했다.[19] 협상국은 폴란드에 항복하고 볼셰비키와 협상에 들어갈 것을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피우수트스키는 계속 싸울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20]
피우수트스키의 계획은 폴란드군이 비스와(Vistula) 강을 건너 후퇴하고, 바르샤바와 비에프르츠(Wieprz) 강의 교두보를 방어하는 한편, 이용 가능한 사단의 약 25%를 남쪽에 집결시켜 반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피우수트스키가 지휘하는, 약 2만 명의 새롭게 편성된 비교적 소규모 "예비군"(또는 "타격부대", "Grupa Uderzeniowa"로도 알려짐)에 할당되었다. 이들은 소련 서부 및 남서부 전선(Front (Soviet Army)) 사이에 폴란드 정보부가 확인한 취약 지점을 통해 바르샤바 남쪽의 비스와-비에프르츠 삼각지대에서 북쪽으로 기습적인 공격을 주도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공격은 소련 서부 전선을 예비군과 분리하고, 그들의 이동을 교란시킬 것이었다. 결국, 시코르스키 군과 "타격부대" 사이의 격차는 동프로이센(East Prussia) 국경 근처에서 좁혀지면서 포위된 소련군의 괴멸을 가져올 것이었다.[21]
피우수트스키의 계획은 고위 장교들과 군사 전문가들로부터 "아마추어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는데, 그들은 피우수트스키의 정규 군사 교육 부족을 지적했다. 그러나 폴란드군의 절망적인 상황은 다른 지휘관들이 이 계획을 지지하도록 설득했다. 이 계획의 사본이 소련에 입수되었을 때, 서부 전선 사령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는 그것을 계략으로 생각하고 무시했다. 며칠 후, 소련은 바르샤바 전투에서 패배하여 소련의 진격을 저지했고, 이는 붉은 군대에게 있어 최악의 패배 중 하나였다.[22] 국민민주당 세임 의원 스타니스와프 스트론스키는 피우수트스키의 "우크라이나 모험"에 대한 그의 불만을 표현하기 위해 "비스와의 기적"(Cud nad Wisłą)이라는 말을 만들었다.[23] 스트롱스키의 말은 스트롱스키의 풍자적인 의도를 알지 못하는 애국적이거나 경건한 폴란드인들에 의해 피우수트스키를 칭찬하는 말로 받아들여졌다.[24]
피우수트스키는 전쟁 전략을 구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타데우시 로즈바도프스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25] 나중에 피우수트스키의 지지자들은 그를 폴란드 전략의 유일한 저자로 묘사하려고 했고, 그의 반대자들은 그의 역할을 축소하려고 했다.[26] 반면, 서구에서는 한때 폴란드 주둔 프랑스 군사 사절단의 막심 베이강 장군의 역할이 과장되었다.[27]
1921년 2월, 피우수트스키는 파리에 방문하여 프랑스 대통령 알렉상드르 밀레랑과의 협상에서 그해 후반에 체결될 프랑스-폴란드 동맹의 기반을 마련했다.[28] 1921년 3월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을 종식시킨 리가 조약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에 분할했다. 피우수트스키는 이 조약을 "겁쟁이 짓"이라고 불렀다. 이 조약과 루찬 젤리고프스키 장군의 젤리고프스키의 반란에 대한 그의 비밀 승인은 리투아니아인들로부터 빌뉴스를 점령한 사건으로, 피우수트스키의 연방주의적 인테르마리움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중앙 리투아니아 군이 빌뉴스를 점령한 후, 피우수트스키는 그들을 "형제로 여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의회에서 피우수트스키는 "나는 카우나스에 손을 뻗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우리의 승리를 충격과 슬픔의 날로 여기는 형제들을 무시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15] 1921년 9월 25일, 피우수트스키가 첫 번째 동부 무역 박람회(Targi Wschodnie) 개막식을 위해 리비우(Lwów, 현재 리비우)를 방문했을 때, 우크라이나 독립 기구, 우크라이나 군사 조직을 포함한 단체를 대신하여 행동한 스테판 페닥의 암살 시도의 표적이 되었다.[29]
2. 7. 사나치아 체제와 권위주의 통치

필수츠키의 쿠데타 이후 사나치아(Sanacja) 정부(1926~1939)는 권위주의적 방법을 사용하여 의회 통치의 부패와 무능력을 억제하고, 공공 생활에 "도덕적 건강"을 회복하려 했다. 1928년부터 사나차 정부는 ''정부 협력을 위한 무당파 연합(Non-partisan Bloc for Cooperation with the Government)''(BBWR)으로 대표되었다.[1][2][3][17]
1926년 5월 31일, 폴란드 국회(Sejm)는 필수츠키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지만, 필수츠키는 대통령직의 권한이 제한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대신 그의 오랜 친구인 이그나치 모시치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모시치키는 필수츠키를 군무장관(국방장관)으로 임명했고, 필수츠키는 이후 11개의 연속 정부에서 이 직책을 유지했으며, 그중 두 정부(1926년~1928년, 1930년)를 이끌었다. 그는 또한 군 최고 사령관(General Inspector of the Armed Forces)과 전쟁평의회 의장직을 역임했다.
필수츠키는 주요 개혁 계획은 없었으며, 급진적인 좌익 지지자들과 거리를 두고 자신의 쿠데타를 "혁명적 결과가 없는 혁명"이라고 선언했다. 그의 목표는 국가 안정, 정당 영향력 축소(정당을 부패와 비효율의 원인으로 비난), 군대 강화였다. 이후 폴란드 정부에서 그의 역할은 독재 또는 "준독재"로 불렸다.
필수츠키는 인기와 효과적인 선전 기구를 통해 권위주의적 권력을 유지했으며, 1926년 8월 2일 헌법 개정안으로 세임의 권한이 축소되었다. 1926년부터 1930년까지 필수츠키는 주로 선전에 의존하여 야당 지도자들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그의 독재적 정책은 1930년대 1930년 폴란드 의회 선거를 앞두고 정적들을 투옥 및 재판(브레스트 재판(Brest trial))하고, 1934년 비아로자(Biaroza)에 정치범을 위한 베레자 카르투스카 수용소(Bereza Kartuska Detention Camp)를 설립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일부 수감자들은 잔혹하게 학대당했다. 1930년 BBWR 승리 후, 필수츠키는 군사 및 외교 문제에 집중하고 내부 문제는 그의 대령들에게 맡겼다. 정적 체포 및 투옥은 국제적 비난을 받았고 폴란드 명성을 훼손했다.
필수츠키는 폴란드 민주주의에 환멸을 느꼈고, 과격한 발언(세임을 "매춘부"라고 부름)과 불신임 투표에 대한 대응으로 무장 장교를 세임 건물에 보낸 행위는 정치적 도전에 대한 권위주의적 대응의 선례로 여겨졌다. 그는 의회 제도를 대통령 제도로 전환하려 했지만 전체주의 도입에는 반대했다. 1935년 4월 새 헌법 채택은 필수츠키 지지자들이 강력한 대통령직을 제공하도록 조정했지만, 4월 헌법(April Constitution)은 2차 세계 대전까지 적용되었고, 망명 정부도 유지했다.
필수츠키 정부는 합리적-법적 권위(rational-legal authority)보다 카리스마적 권위(charismatic authority)에 의존했다. 그의 추종자 중 누구도 합법적인 후계자가 될 수 없었고, 사망 후 사나차(Sanacja)는 분열되어 폴란드는 이전 의회 정치 다툼으로 되돌아갔다.
필수츠키 정부는 제2 공화국 인구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소수 민족의 상황을 개선하고 국가를 안정화했다. 필수츠키는 민족 민주당의 "민족 동화"를 "국가 동화" 정책으로 대체하여 시민들은 민족성이 아닌 국가 충성심으로 판단되었다. 그는 "국가 동화" 정책을 폴란드 유대인에게까지 확대했다. 1926년부터 1935년까지 필수츠키는 많은 폴란드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이었고, 특히 총리 카지미에시 바르텔(Kazimierz Bartel) 하에서 상황이 개선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필수츠키를 반유대주의 억제와 공공 질서 유지를 위한 유일한 희망으로 여겼고, 안정의 보증인이자 친구로 그를 위해 투표하고 정치 블록에 참여했다. 1935년 필수츠키 사망은 폴란드 유대인 삶의 질 저하를 가져왔다.
1930년대 대공황(Great Depression), ''OUN'' 테러 공격과 정부 진압 등 여러 발전으로 소수 민족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동부 갈리치아 탄압, 독일계 소수 민족과의 긴장 등 소수 민족 불안은 외교 정책과도 관련 있었다. 정부는 반유대주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지만, 유대인(인구의 8.6%)은 대공황 관련 경제적 이유로 불만이 커졌다. 필수츠키 생애 말기, 정부와 소수 민족 관계는 점점 더 문제가 되었다.
2. 8. 외교 정책
필수츠키의 주요 외교 정책 구상은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이어지는 "미에지모제"(폴란드어로 "바다 사이")로 불리는 연방(라틴어로 ''인터마리움'')이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외에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라트비아, 에스토니아가 포함될 예정이었고, 어느 정도 분할 이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본뜬 것이었다. 필수츠키의 계획은 독립을 포기하기를 거부한 대부분의 예상 회원국과 기존의 세력 균형 구조에 대한 너무 과감한 변화라고 생각한 연합국으로부터 반대에 부딪혔다. 역사가 조지 샌포드에 따르면, 필수츠키는 1920년경에 자신의 인터마리움 프로젝트의 그 버전이 실행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중앙 및 동유럽 동맹 대신,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1918~191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1919~1920년, 젤리고프스키의 반란으로 절정에 달함),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국경 분쟁(1918년 시작), 그리고 가장 주목할 만하게 폴란드-소련 전쟁(1919~1921년)을 포함한 일련의 국경 분쟁이 발생했다. 윈스턴 처칠은 "거인들의 전쟁은 끝났고, 난쟁이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라고 말했다.
필수츠키는 국제 무대에서 폴란드의 독립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의 후견인이자 외무장관인 요제프 베크의 도움을 받아 그는 프랑스와 영국과 같은 서방 강대국과 루마니아, 헝가리와 같은 우호적인 이웃 국가들과의 동맹을 통해 폴란드에 대한 지지를 구했다. 프랑스-폴란드 군사 동맹과 소협상의 일부인 폴란드-루마니아 동맹을 지지했던 필수츠키는 프랑스와 영국 정부가 추구하는 유화 정책에 실망했는데, 이는 그들이 로카르노 조약에 서명한 것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필수츠키는 소련과 독일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고자 했으며, 필수츠키 집권 기간 동안 독일과 소련과의 관계는 대부분 중립적인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 필수츠키 집권 하에 폴란드는 이웃 국가인 루마니아, 헝가리, 라트비아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와는 긴장 관계를 유지했고, 리투아니아와는 더욱 악화된 관계를 유지했다.
필수츠키가 끊임없이 두려워했던 것은 프랑스가 폴란드를 희생하여 독일과 합의에 도달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1929년 프랑스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규정한 것보다 5년 앞선 1930년에 라인란트에서 철군하기로 합의했다. 같은 해 프랑스는 독일과의 국경을 따라 마지노선 건설 계획을 발표했고, 1930년에 마지노선 건설이 시작되었다. 마지노선은 프랑스가 독일이 가까운 미래에 베르사유 조약에서 설정한 한계를 넘어 재무장할 것이며 프랑스가 방어 전략을 추구할 의도임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1921년 폴란드가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했을 당시 프랑스는 라인란트를 점령하고 있었고, 독일 제국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한 폴란드의 계획은 라인란트에 있는 프랑스 기지를 이용한 북독일 평원으로의 프랑스 공세라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라인란트에서 프랑스의 철군과 마지노선으로 상징되는 방어 전략으로의 전환은 폴란드의 외교 및 방위 정책의 전체 기반을 완전히 뒤엎었다.
1932년 6월, 로잔 회담이 열리기 직전 필수츠키는 새로운 독일 총리 프란츠 폰 파펜이 폴란드를 희생하여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에리오에게 프랑스-독일 동맹을 제안하려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필수츠키는 구축함 ORP 비체르를 단치히 항구로 보냈다. 비록 이 문제는 명목상으로 폴란드 해군의 단치히 접근 권한에 관한 것이었지만, 비체르를 파견한 실제 목적은 에리오에게 파펜과의 거래에서 폴란드를 불리하게 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단치히 위기는 프랑스에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했고 폴란드 해군의 단치히 접근 권한을 개선했다.
폴란드는 1932년 소비에트-폴란드 불가침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에 대한 비판은 이것이 이오시프 스탈린이 주로 우크라이나에서 그의 사회주의 반대자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는 것이다. 이 조약들은 필수츠키의 프로메테우스주의 프로그램의 지지자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1933년 1월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한 후, 필수츠키는 프랑스에 독일을 상대로 예방 전쟁을 제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프랑스 또는 폴란드 외교 문서에서 그러한 예방 전쟁 제안이 실제로 제기되었다는 증거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독일과의 폴란드 조약에 대한 비판가들은 필수츠키가 히틀러의 공격성을 과소평가하고 독일에 재무장할 시간을 주었다고 비난했다. 히틀러는 소련에 대항하는 독일-폴란드 동맹을 여러 차례 제안했지만, 필수츠키는 이를 거절하고 독일 또는 소련과의 잠재적인 전쟁에 대비할 소중한 시간을 확보하려 했다. 필수츠키는 죽기 직전 요제프 베크에게 독일과 중립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프랑스와의 폴란드 동맹을 유지하며 영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폴란드의 정책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두 불가침 조약은 동맹국과 이웃 국가들의 눈에 폴란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필수츠키는 아마도 이 조약들의 약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조약을 맺고 우리는 두 개의 의자에 걸터앉아 있다. 이것은 오래갈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의자에서 먼저 떨어질 것이며, 언제 그럴 것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2. 9. 사망
1935년 5월 12일,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바르샤바의 벨베데르 궁전에서 간세포암으로 사망했다.[24] 그의 사망 소식이 발표된 후 30분 만에 자발적인 추모 행사가 시작되었다. 이 행사에는 군인,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폴란드 군단 출신, 폴란드 군사 조직 구성원, 1919~1921년 전쟁 참전 용사, 그리고 국가 원수, 총리,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 시절 그의 정치적 동료들이 참여했다.폴란드 공산당은 즉시 피우수트스키를 "파시스트이자 자본가"라고 비난했다.[24] 반면, 사회주의자들과 폴란드 기독교 민주당은 애도를 표했고, 농민당은 분열된 반응을 보였으며, 로만 드모프스키의 국민민주당은 완곡한 비판을 표했다.

피우스 11세 교황과 아우구스트 흘론드 추기경을 포함한 고위 성직자들도 공식적으로 애도를 표했다. 교황은 자신을 피우수트스키의 "개인적인 친구"라고 불렀다. 폴란드의 여러 민족 및 종교 소수자들도 애도를 표하며 그의 종교적 관용 정책을 칭찬했다. 특히 유대인 소수자들은 그의 편견 없는 태도와 엔데츠야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 때문에 그를 존경했다.[25][26]

국제적으로는 국제 연맹에서 추모식이 거행되었고, 아돌프 히틀러, 이오시프 스탈린, 베니토 무솔리니 등 전 세계 국가 원수들로부터 수십 건의 애도 메시지가 도착했다.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피우수트스키를 위한 예배를 지시했는데, 이는 히틀러가 제3제국 지도자로서 미사에 참석한 유일한 경우였다.[27]

1935년 5월 15일부터 18일까지 바르샤바와 크라쿠프에서 국장이 거행되었으며, 장례 열차가 폴란드를 순회했다.[28] 5월 18일 크라쿠프에서 열린 마지막 장례 행렬에는 약 30만 명이 참석했다.[29] 그의 뇌는 연구를 위해 빌뉴스 대학교에 기증되었고, 심장은 빌뉴스 라소스 묘지에 있는 그의 어머니 묘에 안치되었다.
1937년, 크라쿠프 바벨 대성당의 성 레오나르드 지하실에 2년간 안치되었던 피우수트스키의 유해는 은종 아래 대성당 지하실로 이전되었다. 이 결정은 '바벨 갈등'으로 이어진 격렬한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3. 유산과 평가
1935년 피우수트스키의 유언에 따라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가 폴란드 대통령직과 폴란드군 통수권을 이어받았다. 리츠시미그위는 1936년 11월 폴란드 원수 직위에 올랐다.[97] 그러나 폴란드 정부가 점차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으로 변하면서, 리츠시미그위는 대통령직을 유지한 온건파 이그나치 모시츠키와 대립하게 되었다.[30] 1938년 리츠시미그위와 모시츠키 대통령은 화해했지만, 집권 세력은 민간인 중심의 "대통령의 사람들"과 군인 중심의 "원수의 사람들"로 분열되었다.[30] 이러한 정치적 분열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망명 정부에서도 이어졌다.[31][3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피우수트스키의 정치 이념은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정책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33] 초기에는 전간기 폴란드 제2공화국과 함께 비난받았으나, 1956년 탈스탈린화와 폴란드 10월 사건 이후 역사 서술에서 점차 중립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에는 다시 폴란드의 국민 영웅으로 공개적으로 인정받았다. 1995년 5월 12일 사망 60주년을 맞아 폴란드 의회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독립의 창시자이자 유럽 전체와 그 문명을 위협하는 외세의 공격을 막아낸 승리의 지도자로, 조국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여 영원히 우리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피우수트스키는 대부분의 폴란드인들에게 20세기 폴란드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34][35] 1795년의 제3차 폴란드 분할 이후 123년 만에 폴란드의 독립을 이끌어낸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 시대에는 독재자로서 나치 독일과 조약을 맺어 1939년 폴란드 침공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적인 평가도 있었다.
피우수트스키는 말년에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언론의 자유를 제한했지만, 그의 체제 하에서는 형식적으로나마 다당제가 존재했고 반대 정당의 기관지 발행도 자유로웠다. 또한, 전통적으로 반기독교적 사상으로 인해 유대교도에 대한 불신감이 강했던 폴란드에서, 피우수트스키는 유대인에 대한 온건한 정책을 펼쳤다. 이는 피우수트스키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다민족 공존 사회를 재현하고자 하는 '야기에우워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에 발행된 10즈워티 기념지폐에 그의 초상화가 사용되었다.
3. 1. 대중 문화
제1군단 보병 사단, 장갑열차 51호("''I Marszałek''"— "최초의 원수"), 루마니아 제634 보병 대대[36] 등 여러 군사 부대가 피우수트스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피우수트스키 언덕(크라쿠프에 있는 4개의 인공 언덕 중 하나), 현대 폴란드 역사에 관한 뉴욕시 연구 센터이자 박물관인 미국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연구소, 바르샤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체육대학교, 여객선 , 군함 , 경주마 ''Pilsudski'' 등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많은 폴란드 도시들이 자신들의 "피우수트스키 거리"를 가지고 있다.[37]

바르샤바에는 피우수트스키의 거주지였던 벨베데르 궁전과 피우수트스키 광장 사이 1마일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세 개의 동상이 있는등 많은 폴란드 도시들에 피우수트스키의 동상이 있다.[37] 2020년, 바르샤바 전투 10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수례유벡에 있는 피우수트스키의 영지가 박물관으로 개관했다.[38]
피우수트스키는 이미 그의 생전부터 수많은 픽션 작품의 등장인물이었다.[39] 여기에는 율리우스 카덴-반드로브스키가 쓴 1922년 소설 ''Generał Barcz''(바르츠 장군)가 포함된다.[40] 후대 작품으로는 야체크 두카이가 쓴 2007년 소설 ''Ice''(''Lód'')가 있다.[41] 폴란드의 국립 도서관은 피우수트스키와 관련된 500권 이상의 출판물을 목록에 올렸고,[42] 미국 미국 의회 도서관은 300권 이상을 목록에 올렸다. 피우수트스키의 삶은 안드제이 트조스-라스타비에츠키가 감독한 2001년 폴란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Marszałek Piłsudski''의 주제였다.[43] 그는 또한 야체크 말체프스키(1916년)와 보이치에흐 코사크(칼에 기대고 있는 모습, 1928년; 그의 말 ''Kasztanka''를 타고 있는 모습, 1928년)와 같은 예술가들의 그림뿐만 아니라 사진과 풍자화의 주제이기도 했다.[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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