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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에두아르트 베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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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헬름 에두아르트 베버는 독일의 물리학자로, 수리 전자기론의 개척자이다. 1846년 '베버의 법칙'을 발견하고, 전류계, 지자기, 감응기 등을 고안하여 전기의 절대 단위계를 도입했다.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와 함께 지자기 연구를 수행했으며, 1833년 괴팅겐에 지자기 관측소를 설립하고, 1836년부터 1841년까지 국제적인 지자기 관측을 실시하여 세계 최초의 자기 지도를 발표했다. 또한, 1855년에는 루돌프 콜라우슈와 함께 전자기 단위와 정전기 단위의 비율을 측정하여 그 값이 빛의 속도와 일치함을 증명했다. SI 단위 중 자속의 단위인 웨버(Wb)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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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에두아르트 베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고틀리프 비어만의 빌헬름 에두아르트 베버 초상화, 1885년
고틀리프 비어만, 1885년
전체 이름빌헬름 에두아르트 베버
출생일1804년 10월 24일
출생지비텐베르크, 작센 선제후국, 신성 로마 제국
사망일1891년 6월 23일
사망지괴팅겐,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안장지슈타트프리드호프, 괴팅겐
국적독일
거주지할레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로마자 표기독일어: 'ˈvɪlhɛlm ˈeːdu̯aʁt ˈveːbɐ
영어: /ˈveɪbər/
학문
모교할레 대학교
박사 지도 교수요한 슈바이거
박사 제자에른스트 아베
프리드리히 콜라우슈
에두아르트 리케
주요 제자고틀로프 프레게
아르투어 슈스터
분야물리학
소속 기관할레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
라이프치히 대학교
연구 분야베버 전자기학, 가우스와 베버 전신, 'c' 표기, 베버 (단위)
가족
아버지미하엘 베버
형제에른스트 하인리히 베버 (형)
에두아르트 베버 (형)
수상
수상 내역ForMemRS (1850년)
코플리 메달 (1859년)
푸르 르 메리트 (1864년)
마테우치 메달 (1879년)
서명
빌헬름 에두아르트 베버의 서명
서명

2. 생애

괴팅겐에 있는 가우스와 베버의 기념상


빌헬름 베버는 비텐베르크에서 신학 교수였던 아버지 미하엘 베버(Michael Weberde)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세 형제 중 둘째였으며, 형제들 모두 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할레 대학교와 괴팅겐 대학교를 졸업하고, 할레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1831년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의 추천으로 괴팅겐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837년, 베버는 하노버 왕국의 새 왕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헌법을 폐지하자 이에 항의하는 '괴팅겐 7인' 사건에 연루되어 괴팅겐 대학교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1843년 라이프치히 대학교 물리학 교수로 초빙되었고, 1849년 다시 괴팅겐 대학교로 복직하여 물리학 교수 및 천문대장으로 재직했다.

베버는 괴팅겐에서 사망했으며, 막스 플랑크와 같은 묘지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빌헬름 에두아르트 베버는 1804년 비텐베르크에서 신학 교수였던 아버지 미하엘 베버(Michael Weberde)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2] 형제들 모두 과학적 재능을 보였다. 비텐베르크 대학교가 해체된 후, 1815년 그의 아버지는 할레로 전근했다. 빌헬름은 아버지에게서 처음 교육을 받았고, 이후 할레의 고아원 겸 문법학교를 다녔다.

1822년 할레 대학교에 입학하여 자연철학을 공부했다. 대학교에서 그는 수업과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두각을 나타냈으며, 1826년 박사 학위를 받고, 할레 대학교의 사강사(Privatdozent)가 되었다. 1828년에는 할레 대학교의 초빙교수가 되었다. 초기에는 주로 음향학을 연구했으며, 1826년 박사 논문과 1827년 교사 자격 논문은 리드 오르간의 음향에 관한 것이었다. 형인 에른스트 베버와 함께 소리의 간섭에 관한 실험을 하기도 했다.

1831년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의 추천으로 괴팅겐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2. 2. 학문적 경력

1822년 할레 대학교에 입학하여 1826년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할레 대학교에서 사강사(Privatdozent) 및 초빙교수(Ausserordentlicher Professor)로 재직했다.[7] 1831년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의 추천으로 괴팅겐 대학교의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3][4] 그의 강의는 흥미롭고 유익하며 시사하는 바가 컸다고 알려져 있다. 베버는 학생들이 실험을 통해 물리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대학 실험실에서 무료로 실험하도록 장려하였다.

1833년 가우스와 함께 괴팅겐의 천문대와 물리학 연구소를 연결하는 최초의 전자기 전신을 건설하였다.[3][4]

1837년 하노버 정부의 헌법 폐지에 항의하여 (괴팅겐 7인) 대학에서 해임되었다. 그 후 영국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였고, 1843년부터 1849년까지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물리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849년 괴팅겐 대학교로 복직하였다.

가우스와 함께 자기 연구를 수행했으며, 1864년에는 전류에 대한 절대 측정 시스템을 포함하는 ''전기 역학 비례 측정(Electrodynamic Proportional Measures)''을 발표했다. 이는 현재 사용되는 측정 시스템의 기초가 되었다.

1855년 루돌프 콜라우슈와 함께 정전기 단위와 전자기 단위의 비율이 의 속도와 일치하는 숫자를 생성한다는 것을 증명했다.[5] 이 발견은 맥스웰의 추측으로 이어져 전자기파라는 것을 시사했다.

그의 주요 연구 업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연도주요 업적
1826년할레 대학교 졸업, 박사 학위 취득 후 할레 대학교 사강사가 됨.
1828년할레 대학교 초빙교수가 됨.
1831년가우스의 추천으로 괴팅겐 대학교 교수가 됨.
1833년괴팅겐에 지자기 관측소를 건설. 또한 새뮤얼 모스에 앞서 전신기를 제작.
1837년“괴팅겐 7인” 사건에 연루되어 실직.
1840년헤르만 폰 헬름홀츠의 검류계를 개량하여 전류의 절대 단위를 측정.
1846년전류력계를 개발하여 두 개의 도선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앙페르보다 훨씬 정확하게 측정하고, 도선 내의 대전 입자가 따르는 식을 제시(베버의 법칙).
1852년가우스와 함께 전자기 단위계를 만듬. 또한 분자 전류에 의한 반자성을 설명.
1856년전자기 단위계와 정전기 단위계의 변환 상수(베버 수 c)를 루돌프 콜라우슈와 함께 측정하여 그 값이 3.1074x108m/s임을 발견. 이는 광속과 매우 가까운 값임. 하지만 베버 자신은 베버 수 c와 광속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음.[7]
1871년원자는 양전하와 그 주위의 음전하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기는 이러한 대전 입자의 이동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


2. 3. 만년

베버는 1870년대에 교수직에서 물러났고, 1891년 괴팅겐에서 사망했다.[7] 1859년 왕립학회(Royal Society)로부터 코플리 메달(Copley Medal)을, 1879년에는 코테니우스 메달(Cottaeus-Medaille)과 마테우치 메달(Matteucci Medal)을 수상하였다.[7] 1881년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의 제안에 따라 국제 전기 회의(International Electrical Congress)에서 베버의 단위계가 채택되었다.[7] 1895년 자속의 단위를 "웨버(Weber)"로 할 것을 제안했으며, 1948년 국제 도량형 총회(CGPM)에서 자속의 단위 "웨버"가 승인되었고, 1960년 웨버가 국제 단위계(SI)의 조합 단위가 되었다.[7]

3. 업적

베버는 수리 전자기론의 개척자로, 1846년 베버의 법칙을 발견하여 전기 역학적 현상의 기초를 세웠다. 전류계, 지자기, 감응기 등을 고안하고 전기의 여러 양의 절대 단위계를 도입하였다. SI 단위 중 자속을 나타내는 웨버(Wb)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베버의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전자기학 연구: 가우스와 함께 지자기를 연구하고, 베버의 법칙을 통해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려 했다. 헬름홀츠가 발명한 검류계를 개량하여 전류력계(다이나모미터)를 제작했다.
  • 지자기 연구: 가우스와 함께 자기 연구를 수행했으며, 1864년에는 전류에 대한 절대 측정 시스템을 포함하는 '전기 역학 비례 측정'을 발표했다. 카를 볼프강 벤자민 골트슈미트와 공동으로 ''지구 자기력 아틀라스''를 저술했다.
  • 전자기 단위계 확립: 가우스와 함께 전자기 단위계를 만들고, 1855년 콜라우슈와 함께 정전기 단위와 전자기 단위의 비율(베버 상수)을 측정하여 그 값이 광속에 매우 가깝다는 것을 증명했다.
  • 기타 연구: 1852년 패러데이에 의해 발견되었던 반자성앙페르의 분자 전류 모델을 사용하여 설명하고, 1871년 원자 구조에 대한 가설을 제시했다. 열전도와 전기 전도도 하전 입자의 운동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3. 1. 전자기학 연구

가우스의 초청으로 괴팅겐에 온 베버는 가우스와 함께 지자기 연구를 시작했다. 1833년 괴팅겐에 지자기 관측소를 설립하고, 자신이 개발한 정밀한 자력계를 사용하여 1836년부터 1841년까지 국제적인 지자기 관측을 실시하여 세계 최초의 자기 지도를 발표했다.[3][4] 이때 연구소와 가우스가 있는 천문대 사이에 상업적으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세계 최초의 실용적인 전신 장치를 설치했다.

가우스는 이 무렵 자기의 단위를 질량·시간·길이와 같은 기본 단위로 표현하는 단위계를 만들고 있었지만, 베버는 여기에 전기 단위를 정의했다. 또한, 헬름홀츠가 발명한 검류계를 개량하여 전류력계(다이나모미터)를 제작했다. 이것은 코일 속에 다른 코일을 매달아 놓은 것으로, 코일의 회전에 따라 교류 전류와 전압을 측정할 수 있었다.

베버는 이 측정 결과를 바탕으로 전기를 양전하와 음전하를 띤 입자의 흐름으로 생각하고, 하전 입자에 작용하는 힘을 나타내는 식을 제시했다. 이 식은 "베버의 법칙"이라고 불리며, 하전 입자의 행동으로 전자기 현상을 통일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전류의 상호 작용력과 전자기 유도의 힘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너지 보존 법칙을 만족하는지 여부가 불분명하여 헬름홀츠와 긴 논쟁을 벌였다.

또한 이 식에는 전자기 단위계와 정전기 단위계의 비율 c (베버 상수)가 나타난다. 베버는 1855년에 이 값을 루돌프 콜라우슈(Rudolf Kohlrausch)와 함께 측정하여 그 값이 광속에 매우 가까운 3.1074E8 m/s임을 발견하고 1856년 논문에 기록했다. 하지만 베버 자신은 이것이 광속에 가깝다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6] 이 사실은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나중에 맥스웰전자기학 이론의 중요한 복선임이 밝혀졌다. 1856년 논문에서의 베버 상수의 기호 c는, 후에 celeritas(라틴어로 "속도"라는 뜻)의 "c"와 함께 광속 기호의 원형이 되었다.

1852년 베버는 패러데이에 의해 발견되었던 반자성을, 개개의 분자 주위를 흐르는 미소한 전류에 의해 자성이 결정된다는 앙페르의 분자 전류 모델을 사용하여 설명했다.

베버는 1871년에 원자가 양전하와 그 주위를 도는 음전하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압이 걸리면 음전하가 원자 사이를 이동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통찰이 정확하다는 것이 확인된 것은 20세기 러더퍼드보어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그는 열전도와 전기 전도도 하전 입자의 운동으로 이해하려고 했으며, 후의 전자론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베버의 전자기학은 고전적인 원격 작용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결국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근접 작용적인 전자기학에 의해 대체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밀한 측정과 객관적인 단위의 정의는 전자기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2. 지자기 연구

가우스와 함께 자기 연구를 수행했으며, 1864년에는 전류에 대한 절대 측정 시스템을 포함하는 ''전기 역학 비례 측정(Electrodynamic Proportional Measures)''을 발표했는데, 이는 현재 사용되는 측정 시스템의 기초를 형성한다.[3][4] 카를 볼프강 벤자민 골트슈미트와 공동으로 저술한 ''지구 자기력 아틀라스: 이론 요소에 따라 설계됨 (Atlas des Erdmagnetismus: nach den Elementen der Theorie entworfen)''[3][4]은 일련의 자기 지도를 담고 있으며, 자기 관측소 설립에 그의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 1833년에는 괴팅겐에 지자기 관측소를 건설했다.

3. 3. 전자기 단위계 확립

가우스와 함께 자기학을 연구하여 1864년 전하의 절대 단위 체계를 포함하는 논문을 발표했다.[3][4] 가우스는 이 무렵 자기의 단위를 질량·시간·길이와 같은 기본 단위로 표현하는 단위계를 만들고 있었지만, 베버는 여기에 전기 단위를 정의했다. 또한, 헬름홀츠가 발명한 검류계를 개량하여 전류력계(다이나모미터)를 제작했다. 이것은 코일 속에 다른 코일을 매달아 놓은 것으로, 코일의 회전에 따라 교류 전류와 전압을 측정할 수 있었다.

1855년 루돌프 콜라우슈(1809~1858)와 함께 정전기 단위와 전자기 단위의 비율이 빛의 속도와 일치하는 숫자를 생성한다는 것을 증명했다.[5] 이 발견은 맥스웰의 추측으로 이어져 전자기파라는 것을 시사했다. 또한, 빛의 속도를 나타내는 문자 "c"의 최초 사용은 콜라우슈와 베버의 1856년 논문에서였다.

1852년 베버는 패러데이에 의해 발견되었던 반자성을, 개개의 분자 주위를 흐르는 미소한 전류에 의해 자성이 결정된다는 앙페르의 분자 전류 모델을 사용하여 설명했다.

베버는 1846년에 전류력계를 개발하여 두 개의 도선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앙페르보다 훨씬 정확하게 측정하고, 도선 내의 대전 입자가 따르는 식을 제시했다. 이를 "베버의 법칙"이라고 한다.

1852년에는 가우스와 함께 전자기 단위계를 만들었다.

1856년에는 전자기 단위계와 정전기 단위계의 변환 상수(베버 수 c)를 콜라우슈와 함께 측정하여 그 값이 3.1074 x 108 m/s임을 발견했다. 이는 광속과 매우 가까운 값이다. 하지만 베버 자신은 베버 수 c와 광속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7]

1881년 윌리엄 톰슨의 제안에 따라 국제 전기 회의(International Electrical Congress)에서 베버의 단위계가 채택되었다.

1895년 자속의 단위를 “웨버”로 할 것을 제안했다.

1948년 국제 도량형 총회(CGPM)에서 자속의 단위 “웨버”가 승인되었다.

1960년 웨버국제단위계(SI)의 조합 단위가 되었다.

3. 4. 기타 연구

가우스와 함께 지자기 연구를 시작했다. 1833년 괴팅겐에 지자기 관측소를 설립하고, 자신이 개발한 정밀한 자력계를 사용하여 1836년부터 1841년까지 국제적인 지자기 관측을 실시하여 세계 최초의 자기 지도를 발표했다. 또한 이때 연구소와 가우스가 있는 천문대 사이에 상업적으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세계 최초의 실용적인 전신 장치를 설치했다.[6]

가우스는 자기의 단위를 질량, 시간, 길이와 같은 기본 단위로 표현하는 단위계를 만들고 있었지만, 베버는 여기에 전기 단위를 정의했다. 또한, 헬름홀츠가 발명한 검류계를 개량하여 전류력계(다이나모미터)를 제작했다. 이것은 코일 속에 다른 코일을 매달아 놓은 것으로, 코일의 회전에 따라 교류 전류와 전압을 측정할 수 있었다.[6]

베버는 이 측정 결과를 바탕으로 전기를 양전하와 음전하를 띤 입자의 흐름으로 생각하고, 하전 입자에 작용하는 힘을 나타내는 식을 제시했다. 이 식은 "베버의 법칙"이라고 불리며, 하전 입자의 행동으로 전자기 현상을 통일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전류의 상호 작용력과 전자기 유도의 힘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너지 보존 법칙을 만족하는지 여부가 불분명하여 헬름홀츠와 긴 논쟁을 벌였다.[6]

또한 이 식에는 전자기 단위계와 정전기 단위계의 비율 c(베버 상수: Weber's constant)가 나타난다. 그래서 베버는 1855년에 이 값을 콜라우슈(Rudolf Kohlrausch)와 함께 측정하여 그 값이 광속에 매우 가까운 3.1074E8임을 발견하고 1856년 논문에 기록했다. 단, 베버 자신은 이것이 광속에 가깝다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6] 이 사실은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나중에 맥스웰전자기학 이론의 중요한 복선임이 밝혀졌다. 또한 이 1856년 논문에서의 베버 상수(Weber's constant)의 기호 c는, 후에 celeritas(라틴어로 "속도"라는 뜻)의 "c"와 함께 광속 기호의 원형이 되었다.[6]

1852년 베버는 패러데이에 의해 발견되었던 반자성을, 개개의 분자 주위를 흐르는 미소한 전류에 의해 자성이 결정된다는 앙페르의 분자 전류 모델을 사용하여 설명했다.[6]

베버는 1871년에 원자가 양전하와 그 주위를 도는 음전하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압이 걸리면 음전하가 원자 사이를 이동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통찰이 정확하다는 것이 확인된 것은 20세기 러더퍼드보어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또한 그는 열전도와 전기 전도도 하전 입자의 운동으로 이해하려고 했으며, 후의 전자론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6]

베버의 전자기학은 고전적인 원격 작용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결국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근접 작용적인 전자기학에 의해 대체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밀한 측정과 객관적인 단위의 정의는 전자기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6]

4. 수상 경력

5. 유산

자기선속의 국제단위계 단위인 베버(기호: '''Wb''')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7]

6. 형제

참조

[1] 사전 Weber http://www.dictionar[...] Random House Webster's Unabridged Dictionary
[2] 문서 Wilhelm Weber House plaques, Wittenberg
[3] 웹사이트 Book Details Page: Atlas Des Erdmagnetismus: Nach Den Elementen Der Theorie Entworfen https://archive.org/[...] World Ebook Fair 2012-08-27
[4] 서적 Atlas Des Erdmagnetismus: Nach Den Elementen Der Theorie Entworfen http://www.alibris.c[...] Alibris 2012-08-27
[5] 서적 Volta and the History of Electricity https://www.ifi.unic[...] Universita degli Studi di Pavia and Editore Ulrico Hoepli 2023-03-11
[6] 웹사이트 Wilhelm Eduard Weber http://www-groups.dc[...]
[7] 웹사이트 Wilhelm Eduard Weber http://www-groups.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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