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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 반세르비아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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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라예보 반 세르비아 폭동은 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역에서 발생한 반 세르비아 정서로 인한 폭력 사태를 의미한다. 특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크로아티아 지역에서 반 세르비아 시위와 폭동이 조직되었으며, 세르비아인 상점과 재산에 대한 약탈, 공격이 자행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은 폭동을 묵인하거나 장려했으며, 종교 지도자 및 극우 정치 세력도 이에 가담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다수의 세르비아인이 사망하고 부상을 입었으며, 많은 세르비아인이 투옥되거나 추방되었다. 사라예보 반 세르비아 폭동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배경이 되었으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세르비아인에 대한 대규모 박해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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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한 사라예보 사건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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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 반세르비아 폭동
개요
1914년 6월 29일,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인에 대한 공격의 여파로 모인 군중들
1914년 6월 29일,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인에 대한 공격의 여파로 모인 군중들
발생일1914년 6월 28일~29일
발생 시간알려지지 않음
위치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라예보
원인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 이후의 반세르비아 감정
참가자오스트리아 당국에 의해 장려된 사라예보의 보스니아 무슬림 및 크로아티아인
결과
사망자세르비아인 2명 사망
부상자알려지지 않음
실종자알려지지 않음
재산 피해세르비아인이 소유한 수많은 가옥 및 건물
수사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범 지원 혐의로 100명 이상의 세르비아인 체포
세르비아인이 아닌 58명 체포

2. 역사적 배경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과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암살 행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 반 세르비아 정서를 크게 불러일으켰고, 이는 세르비아인에 대한 폭력 사태로 이어졌다.[3] 암살 사건이 일어난 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른 지역, 특히 오늘날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크로아티아 영토에서 전국적인 반 세르비아 폭동과 시위가 조직되었다.[3][4]

2. 1. 사라예보 사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 이후, 19세의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 학생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행위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전역에 반 세르비아 정서가 고조되었고, 이는 세르비아인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졌다.[3] 암살 사건이 일어난 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다른 지역, 특히 오늘날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크로아티아 영토에서 전국적인 반 세르비아 폭동과 시위가 조직되었다.[3][4]

프린치프의 공모자들은 대부분 세르비아계 민족으로, 남슬라브 연합을 목표로 하는 청년 보스니아(Mlada Bosna|믈라다 보스나sh)라는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무슬림 조직원들이었다.[12]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세르비아 왕국이 암살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암살 사건 직후 세르비아계 민족에 대한 포그롬이 조직되어 며칠 동안 지속되었다.[5][6] 이는 암살 당일 대공과 그의 부인의 안전을 책임졌던 오스카 포티오레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총독에 의해 조직되고 장려되었다.[7][8][9][10]

요시프 프랑크의 추종자들이 주도한 최초의 반 세르비아 시위는 6월 28일 저녁 초에 자그레브에서 조직되었다. 다음 날, 도시 내 반 세르비아 시위는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고, 포그롬으로 특징지을 수 있었다. 도시의 경찰과 지역 당국은 반 세르비아 폭력을 막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11]

2. 2. 반세르비아 정서의 확산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 이후, 19세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 학생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행위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전역에 반 세르비아 정서가 고조되었고, 이는 세르비아인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졌다.[3] 암살 사건이 일어난 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다른 지역, 특히 오늘날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크로아티아 영토에서 전국적인 반 세르비아 폭동과 시위가 조직되었다.[3][4] 프린치프의 공모자들은 대부분 세르비아계 민족으로,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무슬림으로 구성된 남슬라브 연합을 목표로 하는 청년 보스니아(Mlada Bosna|믈라다 보스나sh) 조직원들이었기에,[12]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곧 세르비아 왕국이 암살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암살 사건 직후 세르비아계 민족에 대한 포그롬이 조직되어 며칠 동안 지속되었다.[5][6] 이는 암살 당일 대공과 그의 부인의 안전을 책임졌던 오스카 포티오레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총독에 의해 조직되고 장려되었다.[7][8][9][10]

요시프 프랑크의 추종자들이 주도한 최초의 반 세르비아 시위는 6월 28일 저녁 초에 자그레브에서 조직되었다. 다음 날, 도시 내 반 세르비아 시위는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고, 포그롬으로 특징지을 수 있었다. 도시의 경찰과 지역 당국은 반 세르비아 폭력을 막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11]

3. 폭동의 전개

오스카 포티오레크(Oskar Potiorek) 오스트리아-헝가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총독의 선동으로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자그레브보다 조금 늦게 반 세르비아 폭동이 시작되었다.[11] 로마 가톨릭 보스니아 주교 요시프 슈타들러(Josip Štadler)의 조수였던 이반 샤리치(Ivan Šarić)는 세르비아인을 "독사"와 "굶주린 늑대"로 묘사하는 반 세르비아적인 시를 썼다.[12]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 무슬림 폭도들은 슈타들러의 궁전인 성심 대성당에 모였다.[12] 저녁 10시경, 200명 정도의 무리가 세르비아 상인 글리고리예 예프타노비치 소유의 호텔 에우로파를 공격하고 파괴했다.[12] 군중들은 주로 세르비아 상점, 저명한 세르비아인의 거주지, 세르비아 정교회 예배 장소, 학교, 은행, 세르비아 문화 단체 프로스브예타 및 ''스르프스카 리예치'' 신문 사무실을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13] 이 과정에서 세르비아인 두 명이 사망했다.[13] 알로이지예 미시치(Alojzije Mišić) 모스타르-두브노 로마 가톨릭 교구 주교는 반 세르비아 폭력을 비난한 몇 안 되는 가톨릭 사제 중 한 명이었다.[12]

오스카 포티오렉


요시프 슈타들러


다음날인 1914년 6월 29일, 오전 8시경 더욱 공격적인 시위가 시작되어 곧바로 유대인 학살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11] 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인들은 사라예보 거리로 모여들어 소리 지르고 노래하며 검은 천으로 덮인 오스트리아 국기와 오스트리아 황제, 고(故) 대공의 사진을 들고 다녔다. 요십 반차시를 포함한 현지 정치 지도자들은 군중들에게 연설했다.[13]

요십 반차시가 사라예보에서 군중에게 연설하는 모습


정치 지도자들이 연설 후 사라지자,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으로 이루어진 무리들이 사라예보 세르비아인 소유의 재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16] 이들은 먼저 세르비아 학교를 공격한 다음 세르비아인 소유의 상점, 기타 기관 및 개인 주택을 공격했다.[11] 세르비아인 소유 은행은 약탈되었고, 세르비아인 상점과 집에서 가져온 물건들은 인도와 거리에 흩뿌려졌다.[2]

그날 저녁, 포티오레크는 사라예보와 지방 전체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법 집행 기관이 불법 행위에 대처할 수 있도록 조치가 승인되었지만, 폭도들이 세르비아인과 그들의 재산을 계속 공격했기 때문에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17] 사라예보 세르비아 정교회 대성당과 도시의 대주교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보안군의 개입으로 파괴를 면했다는 공식 보고가 있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의 시신이 사라예보 기차역으로 운송된 후, 도시의 질서는 회복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폭동 중 살인 및 폭력 행위에 대해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사라예보 특별 법원을 설립하는 법령을 발표했다.[18]

3. 1. 1914년 6월 28일

오스카 포티오레크(Oskar Potiorek) 오스트리아-헝가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총독은 반 세르비아 폭동을 선동했다.[11] 요시프 슈타들러(Josip Štadler)는 "이 땅의 파괴적인 세력"을 근절하는 데 동의했다.[12][14]

사라예보에서 반 세르비아 시위는 1914년 6월 28일에 시작되었으며, 자그레브에서 시작된 시위보다 조금 늦었다.[11] 이반 샤리치(Ivan Šarić)는 로마 가톨릭 보스니아 주교 요시프 슈타들러(Josip Štadler)의 조수였는데, 세르비아인을 "독사"와 "굶주린 늑대"로 묘사하는 반 세르비아적인 시를 썼다.[12]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 무슬림 폭도들은 먼저 슈타들러의 궁전인 성심 대성당에 모였다.[12] 저녁 10시경, 200명 정도의 무리가 세르비아 상인 글리고리예 예프타노비치 소유의 호텔 에우로파를 공격하고 파괴했다.[12] 군중들은 주로 세르비아 상점, 저명한 세르비아인의 거주지, 세르비아 정교회 예배 장소, 학교, 은행, 세르비아 문화 단체 프로스브예타 및 ''스르프스카 리예치'' 신문 사무실을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13] 폭력에는 많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상류층과 군 장교들이 참여했다.[13] 이 과정에서 두 명의 세르비아인이 사망했다.[13] 알로이지예 미시치(Alojzije Mišić) 모스타르-두브노 로마 가톨릭 교구 주교는 반 세르비아 폭력을 비난한 몇 안 되는 가톨릭 사제 중 한 명이었다.[12]

그날 밤 늦게, 말에 탄 무장 군인 10명이 잠시 개입한 후 도시는 질서를 회복했다. 오스카 포티오렉(Oskar Potiorek)이 이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방 정부, 시 경찰, 슈타들러와 그의 조수 이반 샤리치는 "이 땅의 파괴적인 세력"을 근절하기로 합의했다.[11][14] 시 정부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사라예보 시민들에게 성스러운 의무를 다하여 파괴적인 세력을 근절함으로써 도시의 수치를 씻을 것을 요청했다. 포고문은 포스터로 인쇄되어 그날 밤과 다음 날 아침 도시 전역에 배포되고 게시되었다. 요시프 반카스(Josip Vancaš)의 진술에 따르면, 포고문의 저자는 정부의 사라예보 담당 위원이었으며, 정부 고위 대표 및 콜라스 남작과의 합의를 바탕으로 작성했다.[15]

3. 2. 1914년 6월 29일



1914년 6월 29일, 오전 8시경 더욱 공격적인 시위가 시작되어 곧바로 유대인 학살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11] 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인들은 사라예보 거리로 모여들어 소리 지르고 노래하며 검은 천으로 덮인 오스트리아 국기와 오스트리아 황제, 고(故) 대공의 사진을 들고 다녔다. 현지 정치 지도자들은 이 군중들에게 연설을 했고, 요십 반차시도 폭력 사태 이전에 연설을 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13] 그가 사건에서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부 정치 지도자들은 군중을 모으고 그들을 세르비아인 소유의 상점과 집으로 향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했다.[13] 정치 지도자들은 연설 후 사라졌고,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으로 이루어진 빠르고 작은 무리들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사라예보 세르비아인 소유의 재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16] 그들은 먼저 한 세르비아 학교를 공격한 다음 세르비아인 소유의 상점, 기타 기관 및 개인 주택을 공격했다.[11] 세르비아인이 소유한 은행은 약탈되었고 세르비아인 상점과 집에서 가져온 물건들은 인도와 거리에 흩뿌려졌다.[2]

그날 저녁, 포티오레크는 사라예보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이후 지방 전체에도 계엄령이 내려졌다. 법 집행 기관이 불법 행위에 대처할 수 있도록 조치가 승인되었지만, 폭도들이 세르비아인과 그들의 재산을 계속 공격했기 때문에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17]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사라예보 세르비아 정교회 대성당과 도시의 대주교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보안군의 개입으로 파괴를 면했다고 한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의 시신이 사라예보 기차역으로 운송된 후, 도시의 질서는 회복되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폭동 중에 저질러진 살인 및 폭력 행위에 대해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라예보 특별 법원을 설립하는 법령을 발표했다.[18]

4. 주요 가담 세력 및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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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각계의 반응

언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정치인, 외교관 등 각계각층에서 사라예보 반세르비아 폭동에 대한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사라예보의 가톨릭 언론과 관영 언론은 세르비아인들이 폭탄을 숨기고 있다는 험담과 반세르비아 전단을 발행하며 폭동을 부추겼다.[11] 사라예보 신문은 세르비아계 민간인과 재산에 대한 폭동을 "러시아의 유대인 학살 이후"와 같다고 보도했고,[23] 빈의 보수 신문은 "사라예보는 유대인 학살 현장과 같다"고 보도했다.[24] 일부 보고서는 경찰이 폭동을 방치했으며,[25]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이 세르비아인들의 피해를 방관했다고 전했다.[16] 이보 안드리치는 이 폭력을 "사라예보 증오의 광란"이라고 묘사했다.[21]

슬로베니아 보수 정치인 이반 슈스테르시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남슬라브족 중 극우 세력을 제외한 다수는 반세르비아 폭력에 반대하거나 비난했다. 특히 달마티아의 남슬라브족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은 폭력에 참여하지 않았다. 권리당, 크로아티아-세르비아 연합, 가톨릭 주교 알로이쥐예 미시치와 안톤 보나벤투라 예글리치의 신문 등은 세르비아인과의 연대를 표명했다. 7월 초, 정부의 반세르비아 입장을 지지하는 세력은 국가 지원을 받는 반동 세력뿐이었으며, 세르비아인과 남슬라브족 간의 연대 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17] 그러나 슬로베니아 보수 정치인 이반 슈스테르시치는 "세르비아인의 두개골을 부수라"며 폭력을 촉구했다.[17]

반세르비아 폭동은 러시아 제국의 입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 러시아 신문은 "사건의 책임은 세르비아 왕국이 아니라 오스트리아를 보스니아로 밀어넣은 자들에게 있으며, 러시아는 슬라브족을 독일의 멍에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보도했다.[26] 밀로라드 에크메치치에 따르면, 한 러시아 보고서는 사라예보에서 1,000채 이상의 집과 상점이 파괴되었다고 밝혔다.[27]

사라예보 주재 이탈리아 영사는 이 사건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고 말했으며, "세르비아인의 친구라고는 할 수 없는" 독일 영사는 사라예보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과 같은 상황을 겪고 있다고 보고했다.[11]

5. 1. 사라예보 시민

요조 수나리치, 세리프 아르나우토비치, 다닐로 디모비치 등 사라예보의 저명한 정치인들은 세 종교 공동체를 대표하여 포티오레크를 방문, 세르비아인에 대한 공격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19] 6월 29일과 30일 포티오레크가 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사라예보의 세르비아인 상점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상류층 여성들조차 약탈과 강도 행위에 참여했다.[20] 많은 사라예보 주민들은 군중에게 박수를 보내고 창문에서 이 사건들을 지켜봤으며, 당국은 시의 비세르비아계 인구로부터 시위대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고 보고했다.[13]

작가 이보 안드리치는 이 폭력을 "사라예보 증오의 광란"이라고 언급했다.[21]

5. 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남슬라브 정치인



저자 크리스토퍼 베넷에 따르면, 헝가리 당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제국 내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의 관계는 통제 불능으로 치달았을 것이다.[22] 슬로베니아 보수 정치인 이반 슈스테르시치는 비세르비아인에게 "탐욕스러운 과대망상이 깃든 저 세르비아인의 두개골을 부수라"고 촉구했다.[17]

극우 세력을 제외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른 남슬라브족, 특히 달마티아의 남슬라브족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은 반세르비아 폭력에 참여하지 않거나 이를 비난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권리당, 크로아티아-세르비아 연합, 그리고 가톨릭 주교 알로이쥐예 미시치와 안톤 보나벤투라 예글리치의 신문을 포함하여 세르비아인들에게 공개적으로 연대 의사를 표명했다. 7월 초까지 정부의 반세르비아 입장에 대한 유일한 지지는 국가가 지원하는 반동 세력으로부터 나왔으며, 아직 미발달된 형태이긴 하지만 세르비아인과의 일종의 남슬라브족 연대가 존재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17]

그러나 저자 비데르뢰와 제프리스는 크로아티아 정치 지도자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맹렬한 충성심을 보였다고 언급하며, 일반적으로 크로아티아인들이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훨씬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전체 인구 대비 전선 전투원의 비율이 더 높다는 점을 언급했다.

5. 3. 언론 및 외교관

사라예보의 가톨릭 언론과 관영 언론은 세르비아인들이 숨겨진 폭탄을 가지고 있다는 험담과 적대적인 반세르비아 전단을 발행하여 폭동을 부추겼다.[11] 사라예보 신문은 세르비아계 민간인과 그들의 재산에 대한 폭동이 "러시아의 유대인 학살 이후"와 같다고 보도했다.[23] 6월 29일, 비엔나의 보수 신문은 "사라예보는 유대인 학살 현장과 같다"고 보도했다.[24] 일부 보고서는 사라예보의 경찰이 폭동이 일어나도록 방치했다고 전하며,[25]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이 사라예보 세르비아인들이 살해당하고 재산이 불타는 것을 방관했다는 보고도 있었다.[16]

반세르비아 폭동은 러시아 제국의 입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한 러시아 신문은 "사건의 책임은 세르비아 왕국이 아니라 오스트리아를 보스니아로 밀어넣은 자들에게 있으며, 따라서 러시아의 도덕적 의무는 슬라브족을 독일의 멍에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라고 보도했다.[26] 밀로라드 에크메치치에 따르면, 한 러시아 보고서는 사라예보에서 1,000채 이상의 집과 상점이 파괴되었다고 밝혔다.[27]

사라예보 주재 이탈리아 영사는 이 사건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세르비아인의 친구라고는 할 수 없는" 독일 영사는 사라예보가 자체적인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겪고 있다고 보고했다.[11]

6. 여파 및 결과

폭동으로 인해 며칠 후 구타로 인한 부상으로 페로 프리야비치와 니콜라 노지치치 두 명의 세르비아인이 사망했다.[1] 이틀간 50명이 사라예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1] 형제의 향신료 가게를 지키다 총에 맞은 크로아티아인도 사망했고, 폭탄 소지 소문으로 인해 한 무슬림이 자살했다.[1] 세르비아 상점과 집은 약탈당해 재고와 돈이 사라졌고, 이는 사라예보 세르비아 소수 민족의 사업과 산업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슈츠코르프라는 민병대를 설립해 세르비아인들을 박해했다.[35] 약 5,500명의 세르비아인이 투옥 및 추방되었고, 그중 700~2,200명이 감옥에서 사망했으며, 460명은 사형을 선고받았다.[32][33][34] 약 5,200가구의 세르비아인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추방당했다.[34] 이는 민족성을 이유로 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시민 대상 최초의 대규모 박해였으며, 슬로베니아 작가 벨리코냐는 이를 불길한 전조로 묘사했다.[36]

6. 1. 인명 및 재산 피해

며칠 후, 구타로 인한 부상으로 페로 프리야비치와 니콜라 노지치치 두 명의 세르비아인이 사망했다.[1] 이틀간의 폭동으로 50명이 사라예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1] 형제의 향신료 가게를 지키다 세르비아인에게 총을 맞은 크로아티아인도 사망했다. 한 무슬림은 자신이 폭탄을 소지하고 있다는 소문 때문에 자살했다.[1] 세르비아 상점과 집에서 약탈로 인해 모든 재고와 돈이 사라졌다. 사라예보 세르비아 소수 민족이 이 분야에서 두드러졌기 때문에, 황폐화는 세르비아 소유의 사업과 산업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1]

6. 2. 슈츠코르프(Schutzkorps)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에 주로 무슬림으로 구성된[32][33][34] 특별 민병대인 슈츠코르프를 설립하여 세르비아인들을 박해했다.[35]

6. 3.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인 추방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은 약 5,500명의 세르비아인을 투옥하고 추방했는데, 이 중 700명에서 2,200명이 감옥에서 사망했다.[32][33][34] 세르비아인 460명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주로 무슬림으로 구성된[32][33][34] 슈츠코르프라는 특별 민병대가 세르비아인을 박해했다.[35] 그 결과 약 5,200가구의 세르비아인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추방당했다.[34] 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시민을 민족성을 이유로 대규모 박해한 최초의 사건이었으며, 슬로베니아 작가 벨리코냐는 이를 앞으로 닥쳐올 일에 대한 불길한 전조로 묘사했다.[3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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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3] 서적
[4] 서적 Reports Service: Southeast Europe series https://books.google[...] American Universities Field Staff. 201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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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Balkan inferno: betrayal, war and intervention, 1990–2005 https://books.google[...] Enigma Books 2013-12-07
[7] 서적 Scholar, patriot, mentor: historical essays in honor of Dimitrije Djordjević https://books.google[...] East European Monographs
[8] 서적 Reports Service: Southeast Europe series https://books.google[...] American Universities Field Staff. 2013-12-07
[9] 서적 Istorijski časopis https://books.google[...] 2013-12-07
[10] 서적 The Assassination of the Archduke: Sarajevo 1914 and the Murder that Changed the World https://books.google[...] Pan Macmillan
[11] 서적
[12] 서적 Tito and the Rise and Fall of Yugoslavia https://books.google[...] Faber & Faber 201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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