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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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1572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가톨릭교도들의 위그노(개신교) 학살 사건이다. 1562년부터 이어진 종교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가톨릭과 위그노 간의 갈등, 왕권 다툼, 주변 국가의 개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했다. 콜리니 제독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파리에서 시작된 학살은 지방으로 확산되었고, 1만 명에서 3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낳았다. 학살의 주체와 원인에 대해서는 왕실, 종교적 요인, 정치적·사회적 요인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며, 가톨릭 교회는 1997년에야 이 사건에 대한 개입을 인정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종교 전쟁과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예술 작품의 소재로도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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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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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위치 | 프랑스 왕국 |
날짜 | 1572년 |
부분 | 프랑스 종교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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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
유형 | 폭도 폭력 학살 대량 살인 |
사망자 | 5,000–30,000명 |
가해자 | 가톨릭 폭도 |
동기 | 반프로테스탄트주의 |
프랑스어 명칭 | 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 (마사크르 드 라 생-바르텔레미) |
설명 | |
개요 | 생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은 1572년에 프랑스에서 발생한 가톨릭 교도들의 위그노 학살 사건이다. |
원인 | 종교적 갈등 정치적 암투 |
결과 | 위그노 세력 약화 프랑스 종교 전쟁 심화 |
2. 배경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종교 개혁 이후 프랑스 사회를 뒤흔든 종교적 갈등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건이었다. 장 칼뱅의 사상이 프랑스 내에 확산되면서 개신교 신자들, 즉 위그노가 세력을 형성했고, 이는 다수파인 가톨릭과의 깊은 반목으로 이어졌다. 결국 1562년부터 프랑스는 가톨릭과 위그노 간의 내전 상태, 이른바 위그노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수차례의 전쟁과 불안정한 평화가 반복되던 가운데, 1570년 8월 8일 생제르맹 조약이 체결되어 세 번째 종교 전쟁이 종식되었다. 이 조약은 위그노에게 이전보다 관대한 종교적 자유를 허용했지만, 가톨릭 강경파의 극심한 반발을 샀고 평화는 위태롭게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양측의 화해를 도모하고자 위그노 지도자인 나바라의 앙리(훗날 앙리 4세)와 국왕 샤를 9세의 여동생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결혼을 추진했다. 1572년 8월 18일 파리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위그노 지도자 콜리니 제독을 비롯한 수많은 위그노 귀족들이 파리에 모였다.
그러나 결혼식 불과 나흘 뒤인 1572년 8월 22일, 콜리니 제독이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저격당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암살 미수 사건은 위그노 진영의 격렬한 분노를 일으켰고, 이들은 국왕에게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파리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163]。 이는 곧이어 벌어질 대규모 학살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2. 1. 프랑스 종교 개혁과 위그노의 등장
1517년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며 시작된 종교 개혁의 물결은 프랑스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서는 르페브르 데타플 등이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등 복음주의에 기반한 초기 개혁 움직임이 있었다.[106] 하지만 이는 파리 대학교 신학자들과 파리 고등 법원의 반대에 부딪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개혁파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점차 세력을 넓혀갔으며[107], 1550년대에는 장 칼뱅의 지도 아래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이들 프랑스 개신교 신자들은 가톨릭 측에 의해 '위그노'(Huguenot)라고 불리게 되었다. 위그노라는 명칭은 '동맹자'를 뜻하는 독일어 'Eidgenosse'에서 유래했으며, 처음에는 가톨릭 교도들이 개신교도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했다.[220][117]
프랑수아 1세 국왕은 초기에는 개혁 사상에 비교적 관대했으나, 격문 사건 이후 탄압 정책으로 돌아섰고[108], 그의 뒤를 이은 앙리 2세는 특별 이단 심문 법정까지 설치하며 박해를 더욱 강화했다.[109]
이에 맞서 위그노들은 1559년 첫 전국 교회를 열어 신앙 규정과 교회 규칙을 제정하며 조직적인 대응에 나섰다.[110] 이들은 부르봉 왕가의 앙투안 드 부르봉과 그의 동생 루이 1세 드 콩데 공작 등 주요 귀족들의 지지를 얻으며 세력을 키워나갔다.[111]
1559년 앙리 2세가 사고로 사망하고 어린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하자, 왕비 메리 스튜어트의 외삼촌인 프랑수아 드 기즈 공작과 샤를 드 기즈 드 로렌 추기경 형제가 실권을 장악했다.[112]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기즈 가문은 위그노에 대한 탄압을 주도하며 종교 갈등을 심화시켰다.[113]
1560년 프랑수아 2세가 요절하고 동생 샤를 9세가 왕위에 오르자,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섭정을 맡아 미셸 드 로피탈 등 온건파를 등용하며 가톨릭과 위그노 간의 화해를 시도했다.[114][115] 푸아시 회담 등을 통해 종교적 타협을 모색했으나, 양측의 입장 차이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고[116], 이는 이후 위그노 전쟁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2. 2. 위그노 전쟁 (1562-1598)

종교 개혁가 장 칼뱅의 사상이 프랑스에 퍼지면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가톨릭 측으로부터 "위그노"라고 불리게 되었다. 1562년 이후 프랑스는 가톨릭과 위그노 간의 내란, 즉 위그노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왕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내전을 피하고자 1562년 생제르맹 칙령을 발표하여 위그노에게 제한적인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 그러나 가톨릭 강경파인 기즈 공작 프랑수아의 병사들이 바시에서 위그노를 학살하는 사건(바시 학살)이 발생하면서 내전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118]。 이것이 제1차 위그노 전쟁의 시작이었다.
위그노 지도자인 콩데 공과 콜리니 제독은 군대를 모아 여러 도시를 공격하고,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햄프턴 코트 조약을 맺어 지원을 요청했다[119]。 샤를 9세의 국왕군은 반격하여 루앙을 점령했지만, 이 과정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국왕군 사령관이 된 나바라 왕 앙투안이 전사했다. 드뢰 전투에서 국왕군이 콩데 공을 사로잡아 가톨릭 측이 우세해지는 듯했으나, 오를레앙 포위 공격 중 기즈 공작 프랑수아가 암살당했다. 기즈 가문은 이 암살의 배후로 콜리니 제독을 지목하며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120]。 강경파 지도자였던 기즈 공작의 사망은 카트린이 평화를 중재할 기회를 제공했고, 1563년 양측은 화의를 맺었다.
약 4년간의 불안정한 평화가 이어졌지만, 1567년 위그노 측이 스페인과 가까워지는 왕가에 불안을 느껴 국왕 샤를 9세를 확보하려 한 모의 기습 사건으로 인해 다시 내전이 발발했다(제2차 전쟁). 이듬해인 1568년 롱주모 조약으로 잠시 평화가 찾아왔으나, 곧 깨지고 제3차 전쟁으로 이어졌다. 위그노 세력은 대서양 연안의 요새 도시인 라 로셸로 퇴각했으며, 나바라의 여왕 잔 달브레도 당시 15세였던 아들 앙리 드 부르봉과 함께 합류했다[121]。 잔 달브레는 카트린에게 "우리는 신과 신앙을 버리느니 죽기로 결의하고 이곳에 왔다"는 편지를 보내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122]。
1569년 자르나크 전투에서 왕제 앙주 공 앙리(훗날 앙리 3세)가 이끄는 국왕군이 승리하고 위그노 지도자 콩데 공이 전사했다. 이로써 잔 달브레의 아들인 앙리 드 부르봉(훗날 앙리 4세)이 위그노 진영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했다[124]。 위그노 군대는 한때 위기에 몰렸으나, 콜리니 제독의 지휘 아래 세력을 회복하고 파리로 진격했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국왕군은 결국 1570년 8월 8일 생제르맹 조약 (1570년)을 체결하며 위그노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종교적 관용을 베풀 수밖에 없었다[125]。
생제르맹 조약은 3년간의 내전(제3차 위그노 전쟁)을 종식시켰지만, 평화는 여전히 위태로웠다. 강경파 가톨릭 교도들은 이 조약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특히 강력한 가톨릭 귀족 가문인 기즈 가문은 여전히 궁정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위그노 지도자 콜리니 제독은 1571년 9월 다시 왕의 자문회에 복귀하여 샤를 9세의 신임을 얻었다. 독실한 가톨릭 교도들은 위그노의 정치적 복귀에 충격을 받았지만, 왕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샤를 9세는 왕실 재정의 어려움과 위그노의 군사력을 고려하여 평화 유지와 콜리니의 영향력을 실질적으로 지지했다. 위그노는 라 로셸, 라 샤리테쉬르루아르, 코냑, 몽토방 등 요새화된 도시들을 계속 통제하고 있었다.
두 종교 간의 평화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카트린은 자신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위그노 지도자인 나바라의 앙리(잔 달브레의 아들이자 훗날 앙리 4세)의 결혼을 추진했다.[5] 이 결혼식은 1572년 8월 18일로 예정되었으나, 전통적인 가톨릭 신자들과 교황 그레고리오 13세, 그리고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카트린의 이러한 화해 정책을 강력히 비난했다.
한편, 학살이 일어나기 몇 년 전부터 위그노 진영에서는 존 칼뱅의 사상 변화에 영향을 받아 군주제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칼뱅은 1561년 저서에서 왕이 신에게 불복종하면 권력을 잃는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이전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위그노 작가들에게 받아들여져 국민 주권 사상으로 발전했고, 가톨릭 측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12] 이러한 반군주제적 사상은 학살 이후 "군주참칭론자"(Monarchomachs)들에 의해 더욱 확산되어, 왕의 폐위나 암살까지 주장하게 만들었다.[13] 학살은 프랑스 개신교가 단순히 왕의 정책에 반대하는 것을 넘어 군주제 자체에 도전하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14]
1572년 5월, 루이 드 나사우가 이끄는 프랑스 위그노 군대가 네덜란드로 넘어가 몽스와 발랑시엔 등 가톨릭 도시들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면서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이는 스페인에 맞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이끌던 오라녜 공 빌럼(루이의 형)을 지원하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프랑스를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끌어들일 위험이 있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콜리니 제독이 다시 샤를 9세를 설득하여 네덜란드 문제에 개입하도록 부추겼다고 믿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 1572년 8월 18일, 나바라의 앙리와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결혼식이 파리에서 거행되었다.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콜리니 제독을 비롯한 수많은 위그노 귀족들이 파리에 모였다. 그러나 불과 나흘 뒤인 8월 22일, 콜리니 제독이 저격을 당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분노한 위그노는 국왕에게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163]。 이 암살 미수 사건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이틀 후인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가톨릭 강경파 기즈 공 앙리 세력이 콜리니 제독을 살해했고, 샤를 9세의 명령 하에 궁정에 있던 위그노 귀족들이 대거 학살당했다. 그러나 사태는 왕실의 통제를 벗어나 파리 시내 전체로 번졌고[101], 광분한 가톨릭 시민들이 위그노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학살은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어 희생자 수는 약 1만~3만 명으로 추정된다. 나바라의 앙리는 체포되어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했다.
이 학살로 위그노 전쟁이 끝나기는커녕, 위그노는 군주참칭론을 내세우며 더욱 격렬하게 저항했다[102]。 또한 가톨릭 내부에서도 강경파의 잔혹함에 반발하는 온건파(폴리티크파)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2년 후 샤를 9세가 사망하고, 1576년에는 나바라의 앙리가 파리를 탈출하여 다시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다[234]。 이후 내전은 새 국왕 앙리 3세(샤를 9세의 동생), 가톨릭 동맹의 기즈 공 앙리, 그리고 위그노 진영의 나바라의 앙리가 대립하는 이른바 '세 앙리의 전쟁'으로 더욱 격화되었다. 기즈 공 앙리와 앙리 3세가 연이어 암살된 후, 1589년 부르봉 왕조의 시조인 나바라의 앙리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여 앙리 4세가 되었다. 길고 참혹했던 위그노 전쟁은 1598년 앙리 4세가 위그노에게 일정한 제한은 두었지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낭트 칙령을 반포하면서 마침내 막을 내렸다[220][103]。
2. 3. 생제르맹 앙 레 조약 (1570)
위그노 전쟁 중 세 번째 전쟁은 1570년 8월 8일 생제르맹 앙 레 조약(생제르맹 조약) 체결로 종결되었다.[125] 위그노 군대가 콜리니 제독의 지휘 아래 파리 인근까지 진군하자,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왕실은 위그노 측에 이전보다 더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며 평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125]
이 조약으로 위그노는 제한적인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라 로셸, 라 샤리테쉬르루아르, 코냑, 몽토방 등 4곳의 요새화된 도시를 안전 보장 도시로 확보했다.[126] 이는 위그노에게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과 군사적 방어 능력을 부여하는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이 평화는 매우 불안정했다. 가톨릭 강경파, 특히 프랑스 궁정에서 영향력을 잃어가던 기즈 가문은 이 조약에 강한 불만을 품고 수용을 거부했다.[120] 반면, 위그노 지도자 콜리니 제독은 1571년 9월 왕의 자문회(국무 회의)에 복귀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했다.[127]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은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의 궁정 복귀에 충격을 받았지만, 왕대비 카트린 드 메디치와 국왕 샤를 9세는 왕국의 재정적 어려움과 위그노의 만만치 않은 세력을 고려하여 평화를 유지하고 콜리니 제독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했다.[127] 샤를 9세는 점차 콜리니 제독에게 깊이 의지하며 그를 "좋은 친구",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였다.[127] 콜리니는 국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생제르맹 조약의 내용을 위그노 측에 유리하게 적용시키려 노력했다.[128]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양측의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다. 1571년 말, 파리에서는 위그노를 감쌌다는 이유로 처형된 필리프 드 가스티누의 옛 저택 터에 세워진 십자가 철거 문제를 둘러싸고 가톨릭 시민들과 위그노 지지 세력 간의 충돌이 벌어져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129][130]
두 종교 간의 평화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카트린 드 메디치는 자신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가톨릭)와 위그노 지도자 잔 달브레 여왕의 아들이자 나바르의 왕위 계승자인 나바르의 앙리(프로테스탄트, 훗날 앙리 4세)의 결혼을 추진했다.[5] 1572년 8월 18일로 예정된 이 결혼은 위그노와의 화해를 상징하는 중요한 행사였지만,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와 스페인의 펠리페 2세를 비롯한 가톨릭 강경파는 카트린의 위그노 포용 정책과 이 결혼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한편, 1572년 5월에는 루이 나사우가 이끄는 위그노 군대가 네덜란드로 넘어가 스페인에 대항하는 네덜란드 반란을 지원하며 몽스와 발랑시엔 등 가톨릭 도시들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31] 이는 프랑스가 스페인과의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으며,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콜리니 제독이 샤를 9세를 부추겨 네덜란드 문제에 개입하려 한다고 의심했다.[131][132]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 생제르맹 조약이 가져온 평화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
3. 학살의 전개
1572년 8월 18일, 가톨릭 신자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위그노인 앙리 드 나바르의 결혼식이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서 거행되었다.[17] 이 결혼은 프랑스 종교 전쟁으로 분열된 프랑스 내 가톨릭과 위그노 세력 간의 화해를 명목으로 카트린 드 메디치가 주선한 정략결혼이었다. 그러나 앙리 드 나바르의 어머니인 잔 다르브레는 종교적 차이를 이유로 결혼에 반대했으며,[133] 가톨릭 측에서도 교황 비오 5세를 비롯한 강한 반대가 있었다.[134] 잔 다르브레는 결혼 협상을 위해 파리에 머물던 중 1572년 6월 8일 사망했는데,[143] 위그노 측에서는 카트린이 독살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144]
결혼식을 위해 많은 위그노 귀족들이 파리로 모여들었으나,[145] 강경 가톨릭 도시였던 파리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흉작과 과도한 세금, 사치스러운 결혼식 준비 등으로 민심이 동요하는 가운데,[147][148] 위그노에 대한 적대감은 더욱 커져갔다.[146] 결혼식 자체도 신랑인 앙리가 미사에 참석하지 않고 성당 밖에 머무는 등[142] 불안정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결혼식 후 며칠간 축제가 이어졌지만 긴장은 해소되지 않았다.[152]
결혼식 며칠 뒤인 8월 22일, 위그노의 주요 지도자인 콜리니 제독이 파리 시내에서 총격을 받아 심각한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18] 이 암살 시도는 학살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위그노들의 보복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과 정치적 불안감이 커지는 가운데, 샤를 9세와 카트린 드 메디치 등 왕실 측은 위그노 지도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8월 24일 새벽,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파리 생제르맹로세루아 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위그노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콜리니 제독이 가장 먼저 살해되었고,[23] 이후 학살은 파리 전역으로 번져 수많은 위그노들이 무참히 살해당했다. 파리에서의 학살은 며칠간 계속되었으며, 이후 몇 주에 걸쳐 툴루즈, 보르도, 리옹, 루앙 등 프랑스 전역의 다른 도시들로 확산되어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31]
3. 1. 콜리니 암살 미수 사건 (1572년 8월 22일)
1572년 8월 18일, 가톨릭교도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위그노인 앙리 드 나바르의 결혼식 이후,[17] 콜리니 제독과 주요 위그노들은 파리에 남아 생 제르맹 평화 조약에 대한 몇 가지 불만을 국왕과 논의했다.며칠 뒤인 8월 22일,[18] 콜리니가 루브르에서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던 중 위층 창문에서 총격을 받아 손과 팔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154] 암살범은 모르베르 백작 샤를 드 루비에(1505년경–1583년)로 추정되며,[17] 혼란을 틈타 도주했다. 총격이 이루어진 집은 기즈 가문의 소유였다.[155] 콜리니는 숙소로 옮겨져 외과의사 앙브루아즈 파레에게 치료를 받았고, 파레는 팔꿈치에서 탄환을 제거하고 손상된 손가락을 절단했다.[156]
국왕 샤를 9세는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함께 콜리니를 문병했고, 눈물을 흘리며 범인을 찾아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156]
암살 시도의 배후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 기즈 가문: 로렌 추기경과 그의 조카인 기즈 공작, 오말 공작 등이 유력한 용의자로 꼽힌다. 이들은 10년 전 기즈 공작 프랑수아가 암살된 사건의 배후로 콜리니를 지목하고 복수를 원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총격이 기즈 가문 소유의 집에서 이루어졌다는 점도 이 가설을 뒷받침한다.
- 알바 공작: 스페인의 펠리페 2세를 대신하여 네덜란드를 통치하던 알바 공작에게 콜리니는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콜리니는 네덜란드 반란을 지원하여 스페인 세력을 몰아내려 했으며, 실제로 몽스의 개신교도들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 카트린 드 메디시스: 전통적으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배후이다. 카트린은 콜리니가 샤를 9세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으며, 특히 그의 주도로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둘러싸고 스페인과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막기 위해 암살을 계획했다는 것이다.[19][157] 훗날 왕제 앙주 공작 앙리(훗날 앙리 3세)는 자신과 어머니 카트린, 그리고 안나 데스테(기즈 공작 프랑수아의 미망인)가 암살을 공모했다고 증언했으며,[158] 샤를 9세의 누이 마르그리트 역시 어머니와 앙주 공작이 연루되었다고 기록했다.[159]
이 외에도 스페인 왕이나 교황이 콜리니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설도 있다.[160][161][162]
3. 2. 파리에서의 학살 (1572년 8월 24일)
가스파르 2세 드 콜리니 암살 미수 사건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18] 샤를 9세 국왕은 위그노 지도자 중 가장 존경받던 콜리니와 가까웠으나, 그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콜리니를 신뢰하지 않았다. 개신교 신자들이 보복할 것을 우려한 왕과 측근들은 부상당한 콜리니를 찾아가 범인 처벌을 약속했다. 그러나 저녁 식사 중 개신교 신자들이 몰려와 정의를 요구하며 일부는 위협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20] 콜리니의 매형이 이끄는 4,000명의 병력이 파리 외곽에 주둔하고 있어[15] 위그노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은 커져만 갔다. 가톨릭 신자들은 위그노가 기즈 가문이나 파리 시민들에게 복수할 것을 우려했다.

8월 23일 저녁,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튈르리궁에서 알베르 드 공디, 레츠 백작을 포함한 이탈리아 출신 고문들과 회의를 열고, 이후 샤를 9세를 만나 위기 상황을 논의했다. 회의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샤를 9세와 카트린은 위그노 지도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홀트(Holt)는 이 결정이 파리에 남아 있던 "두세 다스 정도의 귀족"을 대상으로 했다고 추정한다.[21] 다른 역사가들은 몇몇 명백한 지도자들을 제외하고, 이 시점에서 목표가 된 지도자들의 구성이나 규모에 대해 추측하기를 꺼린다. 콜리니처럼, 제거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원과 보디가드로 활동하는 신사 그룹을 동반했기 때문에, 그들을 살해하는 것은 부하들을 죽이는 것 또한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이 결정 직후, 파리 시 당국이 소환되었다. 그들은 도시의 문을 닫고 시민들을 무장시켜 개신교 신자들의 봉기를 막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왕의 스위스 용병에게는 주요 개신교 신자 명단을 살해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오늘날 사건의 정확한 연대기를 파악하거나 살해가 시작된 정확한 순간을 아는 것은 어렵다. 루브르궁 근처, 프랑스 왕들의 교구 교회였던 생제르맹로세루아 교회의 종을 쳐서(자정에서 새벽 사이) 신호가 보내졌을 가능성이 높다. 스위스 용병들은 루브르 성에서 개신교 귀족들을 쫓아낸 후 거리에서 학살했다.
8월 24일 새벽, 기즈 공작이 직접 이끄는 무리가 콜리니 제독을 침대에서 끌어내 살해하고 창밖으로 던졌다. 건물 안에 있던 공포에 질린 위그노 귀족들은 처음에는 지도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저항했지만,[23] 콜리니 자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동시대 프랑스 역사가인 자크 오귀스트 드 투에 따르면, 콜리니를 살해한 사람들 중 한 명은 그가 자신의 운명을 얼마나 침착하게 받아들이는지 보고 충격을 받았으며, "그처럼 큰 위험 속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그처럼 굳건하게 죽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24]

생제르맹 조약 이후 고조되었던 긴장은 대중적 폭력 사태로 폭발했다. 일반 시민들은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하여 도시 전역에서 개신교 신자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개신교 신자들이 집에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사슬로 거리를 막았다. 시체는 수레에 실려 센강에 던져졌다. 파리에서의 학살은 왕의 중단 시도에도 불구하고 3일 동안 지속되었다. 홀트는 "일반적인 학살은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궁정의 어떤 엘리트가 그것을 의도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결론 내리며, 지도부에 속하지 않은 개별 개신교 신자들을 구하기 위해 가톨릭 궁정 신하들이 개입한 여러 사례를 나열했다.[25] 인물군상학을 조사한 제레미 포아(Jeremy Foa)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학살은 멸절해야 할 개신교 신자 명단을 이미 작성해 둔 일단의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찬성하든 반대하든 대다수의 인구는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26]
8월 24일 정오, 성스러운 무고한 자들의 묘지에서 몇 달 동안 시들었던 산사나무 덤불이 성모상 근처에서 다시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이것은 파리 시민들에게 이러한 다수의 살인에 대한 신성한 축복과 승인의 징표로 해석되었다.[22]
두 명의 주요 위그노인 나바르의 앙리(당시 19세)와 그의 사촌 콩데 공(당시 20세)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둘 다 파리에서 탈출한 후 개종을 포기할 것이다.[27] 일부 해석에 따르면, 이 위그노들의 생존은 기즈 가문이 너무 강력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카트린의 전반적인 계획의 핵심이었다.
8월 26일, 왕과 측근들은 파리 고등법원에 출두하여 사건의 공식적인 버전을 확립했다. "리 드 쥐스티스를 열어, 샤를은 왕실에 대한 위그노의 음모를 좌절시키기 위해 학살을 명령했다고 선언했다."[28] 그 후 도시 일부에서 살인이 계속되는 동안 행렬을 포함한 희년 축하 행사가 열렸다.[28]
3. 3. 지방으로의 확산
샤를 9세는 8월 24일, 지방 총독들에게 폭력을 방지하고 1570년 칙령의 조항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보냈다.[29] 그러나 파리에서의 학살 소식이 퍼져나가면서, 8월부터 10월 사이 툴루즈, 보르도, 리옹, 부르주, 루앙,[30] 오를레앙, 모, 앙제, 라 샤리테, 소뮈르, 가이악, 트루아 등 총 12개 도시에서 위그노 학살이 잇따라 발생했다.[31] 대부분의 경우 파리 학살 소식이 전해진 직후 학살이 시작되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한 달 이상 지연되기도 했다. 역사학자 맥 P. 홀트(Mack P. Holteng)에 따르면, "지방 학살이 발생한 12개 도시 모두 공통적으로 한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한때 '상당한' 수의 개신교도가 존재했던 가톨릭 다수 도시였다. ... 또한 이들은 첫 3차례의 종교 전쟁 동안 심각한 종교적 분열을 경험했다... 더욱이 이들 중 7개 도시는 이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공유했는데... [그들은] 실제로 첫 번째 종교 전쟁 동안 개신교 소수에 의해 점령되었었다..."[29]일부 도시의 가톨릭 세력은 왕이 학살을 명령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도시를 방문한 이들이나 지역 귀족, 혹은 그의 대리인이 왕의 지시를 전달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32] 기즈 가문이 학살을 부추겼을 가능성은 있지만, 샤를 9세가 직접 명령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33] 왕의 동생인 앙주 공작이 왕의 이름으로 학살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이는 사례도 있었다. 낭트에서는 시장이 이 편지를 공개하지 않고 일주일간 보류하다가 다행히 왕의 반대 명령이 도착하기도 했다.[34]
학살의 양상은 도시마다 달랐다. 어떤 도시에서는 폭도들이 학살을 주도하고 시 당국이 이를 진압하려 했으며, 다른 도시에서는 소수의 군인과 관리들이 폭도의 개입 없이 위그노들을 체포하고 살해했다.[35] 보르도에서는 예수회 소속 에드몽 오제(Edmond Augerfra)의 9월 29일 선동적인 설교가 며칠 후 발생한 학살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36]

학살의 여파는 단순히 희생자 수에 그치지 않았다. 학살이 발생한 도시들에서는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많은 위그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루앙의 경우, 수백 명이 살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개종과 이주로 인해 위그노 공동체 규모가 16,500명에서 3,000명 미만으로 급감했다. 폭력을 겪지 않은 도시에서도 위그노 인구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37] 학살 이전 프랑스 인구의 약 10%를 차지했던 위그노는 16세기 말에는 7~8%로 감소했으며, 이후 루이 14세 시대의 박해와 낭트 칙령 폐지를 거치며 더욱 줄어들었다.[38]
이러한 지방 학살은 결국 네 번째 종교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4. 학살의 주체와 원인
콜리니 제독 암살 시도 실패는 대학살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콜리니는 가장 존경받는 위그노 지도자였으나,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신임은 얻지 못했다. 암살 시도 이후 분노한 위그노 귀족들은 국왕 샤를 9세에게 진상 규명을 강력히 요구했고[163], 일부는 왕비 앞에서 위협적인 언사를 하기도 했다[164]。 콜리니의 매제가 4,000명의 병력과 함께 파리 교외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165]은 위그노의 보복에 대한 가톨릭 측의 두려움을 증폭시켰다[166]。
위기감을 느낀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1572년 8월 23일 밤, 튈르리 궁전에서 이탈리아 고문들과 회의를 가진 뒤 샤를 9세를 설득했다. 이전까지 콜리니에게 우호적이었던 샤를 9세는 결국 위그노 지도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167]。 왕실은 위그노들이 콜리니 암살 시도에 대한 복수로 무장 봉기할 것을 우려하여, 결혼식 때문에 파리에 모여 있던 위그노 지도자들을 선제적으로 숙청하기로 결정한 것이다[171]。 다만 샤를 9세의 명령이 위그노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카트린이 제시한 특정 지도자 명단에 한정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169][170]。
결정이 내려지자 파리 시 당국은 성문을 닫고 시민들을 무장시켰으며[172], 국왕의 스위스 용병에게는 명단에 오른 위그노 지도자들을 살해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학살의 시작 신호는 8월 24일 새벽, 루브르 근처 생 제르맹 로세루아 교회에서 울린 종소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173]。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당일 새벽, 기즈 공작 앙리가 보낸 이들이 콜리니 제독의 숙소를 습격하여 그를 살해하고 시신을 창밖으로 내던졌다. 암살자들은 그의 머리를 베어 왕과 왕비에게 바치려 했고, 남은 시신은 분노한 군중에 의해 잔혹하게 훼손되어 센 강변 교수대에 매달린 뒤 불태워졌다[174]。 이후 루브르 궁에 머물던 위그노 귀족들도 스위스 용병에 의해 안뜰로 끌려나가 학살당했다[175]。 나바라 왕 앙리와 그의 사촌 콩데 공 앙리 1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는 약속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27]。
교회 종소리를 신호탄으로 파리 시내 곳곳에서 위그노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177]。 그러나 상황은 곧 왕실의 통제를 벗어나 통제 불능의 민중 폭동으로 번졌다[178]。 가톨릭 민병대와 군중은 위그노 상점을 약탈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179][180]。 시신들은 마차에 실려 센 강에 버려졌다[181]。 국왕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의 학살은 3일간 계속되었으며[182][183], 이 과정에서 철학자 피에르 라뮈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고, 혼란 속에서 가톨릭 신자들도 다수 살해되었다[184]。
8월 26일, 샤를 9세는 파리 고등 법원에 출석하여 "왕실에 대한 위그노의 음모를 막기 위해 학살을 명령했다"고 공식 발표하며 사건을 정당화하려 했다[185]。
파리에서 시작된 학살은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어 가을까지 이어졌다. 역사가 쥘 미슐레는 이를 두고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하루가 아니라 한 계절이었다"고 표현했다[186]。 샤를 9세는 8월 24일 지방 장관들에게 폭력 중단 명령을 내렸지만[187], 툴루즈, 보르도, 리옹, 부르주, 루앙[188], 오를레앙, 모, 앙제, 라 샤리테, 소뮈르, 가이악, 트루아 등 12개 이상의 도시에서 학살이 잇따랐다[189][190]。 지방 학살의 배경은 다양했으나, 국왕의 명령이 있었다고 믿거나[191], 지방 귀족이나 관료의 지시에 따르거나[193], 종교적 선동에 휩쓸린 군중에 의해 자행되는 경우가 많았다[194][195][196]。 반면 낭트처럼 시장의 기지로 학살을 피한 도시도 있었다[197]。 학살과 피난, 강제 개종 등으로 인해 많은 도시에서 위그노 공동체는 급격히 위축되었다[198]。
국내외 가톨릭 세력은 초기에는 학살을 위그노의 위협에 대한 정당방위로 간주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학살 소식을 듣고 테 데움(감사 찬송)을 부르도록 명하고 기념 메달 발행과 프레스코화 제작을 의뢰했으며[212][213], 샤를 9세에게 황금 장미를 수여했다[211]。 스페인의 펠리페 2세 국왕도 만족감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217]。 학살 직후 양측은 제4차 위그노 전쟁을 준비하며 다시 전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4. 1. 왕실의 역할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카트린 드 메디치와 그녀의 가톨릭 고문들이 학살을 주도했다고 본다. 이들은 망설이는 샤를 9세 국왕에게 압력을 가하여 위그노 지도자들의 처형을 결정하게 했다는 것이다.[77]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이러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며 샤를 9세의 주도적인 역할이나 다른 인물의 개입 가능성을 탐색한다.샤를 9세는 위그노 지도자 중 가장 존경받던 콜리니 제독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치에게는 신뢰를 얻지 못했다. 1572년 8월 22일 콜리니 제독 암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위그노들의 보복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왕실 내에서 커졌다.[20] 8월 23일 저녁, 카트린은 샤를 9세를 만나 위기 상황을 논의했다. 이 회의의 정확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샤를 9세와 카트린이 위그노 지도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21] 일부 역사가들은 이 결정이 왕의 주저함 속에서 내려졌다기보다는, 드니 크루제의 주장처럼 샤를 9세 스스로가 프로테스탄트 봉기의 위협을 감지하고 선제적으로 권력을 지키기 위해 내린 결단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78]
또 다른 해석은 왕의 동생이자 야심가였던 앙주 공작 앙리의 역할을 강조한다. 역사가 홀트(Holt)는 학살 음모의 주동자로 앙주 공작, 비라그 재상, 느베르 공작, 그리고 레츠 백작 곤디를 지목한다.[77] 특히 티에리 와네겔렌은 콜리니 암살 시도 실패 후, 앙주 공작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기즈 가문 및 파리 시 당국과 결탁하여 학살을 주도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카트린과 샤를 9세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앙주 공작의 개입을 알게 된 후 학살을 위그노 음모에 대한 대응으로 포장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80] 반면, 장 루이 부르종은 폭력적인 반(反)위그노 성향을 가진 파리 시민들과 기즈 가문의 압력이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즉, 샤를 9세는 기즈 가문이나 민중 봉기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해 마지못해 학살을 용인하거나 명령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79]
학살이 시작된 후, 8월 26일 샤를 9세는 파리 고등법원에 출두하여 "왕실에 대한 위그노의 음모를 좌절시키기 위해 학살을 명령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28] 이는 학살을 왕명에 따른 정당한 행위로 규정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샤를 9세가 8월 24일 지방 총독들에게 폭력 중단과 1570년 칙령 준수를 명령한 것[187]과는 달리, 앙주 공작은 왕의 이름으로 지방에 학살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192] 왕실 내부의 역할과 의도에 대한 혼란을 더한다.
두 명의 주요 위그노 왕족, 즉 나바르의 앙리(당시 19세)와 그의 사촌 콩데 공(당시 20세)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는 약속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27] 일부 해석에 따르면, 이들의 생존은 기즈 가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견제하려는 카트린 드 메디치의 계산된 행동이었을 수 있다.
이 학살은 당대부터 마키아벨리주의의 산물로 해석되기도 했다. 특히 위그노 작가들은 카트린 드 메디치와 이탈리아 출신 고문들을 비판하며, 학살이 치밀하게 계획된 비정한 책략이었다고 주장했다.[62][72] 이러한 인식은 크리스토퍼 말로우의 희곡 ''파리 학살'' (1593) 등 문학 작품을 통해 확산되었다.
결론적으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에서 왕실의 정확한 역할, 즉 카트린 드 메디시스, 샤를 9세, 앙주 공작 앙리 등이 각각 어느 정도의 책임을 지는지, 학살이 사전에 계획된 것인지 아니면 우발적 상황에 대한 대응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역사가들 사이에 다양한 해석과 논쟁이 존재한다.
4. 2. 종교적 요인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발표로 시작된 종교 개혁의 물결은 프랑스에도 영향을 미쳤다. 르페브르 데타플과 같은 인물들이 프랑스어 성경 번역 등 초기 개혁 운동을 이끌었으나[106], 파리 대학교 신학부와 파리 고등법원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07].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 사상은 빠르게 확산되었고, 1550년대에는 장 칼뱅의 지도 아래 프랑스 개신교 세력, 즉 위그노가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위그노라는 명칭은 원래 가톨릭 측에서 사용한 멸칭으로, '동맹자'를 뜻하는 독일어 'Eidgenosse'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220][117].프랑수아 1세는 초기에는 개혁파에 관대했으나 격문 사건 이후 탄압으로 돌아섰고[108], 그의 아들 앙리 2세는 특별 이단 심문 법정을 설치하며 박해를 더욱 강화했다[109]. 이에 맞서 위그노들은 1559년 제1회 전국 개혁파 교회 회의를 열어 조직을 정비하고[110], 부르봉 왕가의 나바라 왕 앙투안과 그의 동생 콩데 공작 루이를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했다[111].
1559년 앙리 2세가 사고로 사망하고 어린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하자, 왕비 메리 스튜어트의 외삼촌인 기즈 공작 프랑수아와 로렌 추기경 샤를이 실권을 잡았다[112].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던 기즈 가문은 위그노를 가혹하게 탄압했고, 이에 반발한 앙부아즈 음모가 발생했으나 실패로 돌아가 많은 위그노 귀족들이 처형되었다[113].
1560년 프랑수아 2세가 요절하고 샤를 9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섭정을 맡아 미셸 드 로피탈을 등용하며 가톨릭과 위그노 간의 화해를 모색했다[115]. 카트린은 푸아시 회담을 열어 종교적 타협을 시도했으나, 양측의 깊은 신학적 견해 차이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116].
이러한 종교적 갈등 속에서 파리는 특히 극단적인 반(反)위그노 정서가 강한 도시였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위그노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존재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고 여겼다. 특히 가톨릭 설교자들은 위그노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며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고, 나바라의 앙리(위그노)와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가톨릭 공주)의 결혼을 신성 모독으로 여기며 격렬하게 반대했다[6].
종교적 긴장은 사회적 불안과 맞물려 더욱 심화되었다. 흉작과 세금 인상으로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8], 왕실 결혼식의 사치스러운 모습은 평민들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특히 1569년 처형된 위그노 필리프 드 가스틴의 집터에 세워졌던 가톨릭 십자가를 평화 조약에 따라 1571년 철거하는 과정에서 큰 소요가 발생하여 약 50명이 사망하고 재산 피해가 발생하는 등[9], 종교적 상징물을 둘러싼 갈등이 폭력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훗날 학살이 벌어졌을 때, 가스틴 가문의 친척들은 초기 희생자들 중 하나였다[10].
학살이 발생하자, 국내외 가톨릭 세력은 이를 위그노의 위협에 대한 정당방위 혹은 신의 뜻에 따른 이단 척결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학살 소식을 듣고 테 데움(감사 찬송)을 부르도록 명하고[212], 황금 장미를 샤를 9세에게 수여했으며[211], 학살을 기념하는 메달 발행과 조르조 바사리에게 관련 프레스코화 제작을 의뢰했다[212][213]. 교황청은 학살을 신성한 징벌로 해석하여, 1572년 9월 11일을 레판토 해전 승리와 위그노 학살을 함께 기념하는 축일로 지정하기도 했다[213]. 이러한 반응은 당시 가톨릭 강경파가 위그노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 역시 학살 소식에 만족감을 표했다고 전해진다[217].
지방에서 벌어진 학살에서도 종교적 선동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보르도에서는 예수회 소속 에드몽 오제의 선동적인 설교 이후 며칠 만에 학살이 자행되었다[195][196].
그러나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학살을 긍정한 것은 아니었다.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2세는 학살을 "부끄러운 일"이라며 비난했고[218], 프랑스 내 온건파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종교적 통일이라는 명분 아래 자행된 잔혹한 폭력에 대한 회의감이 커져갔다. 이들은 점차 종파적 이익보다 국가의 안정을 우선시하는 폴리티크파로 결집하게 된다[219][220].
4. 3. 정치적, 사회적 요인
생제르맹 조약으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위그노) 간의 3년간의 내전은 일단락되었으나, 평화는 매우 불안정했다. 강경 가톨릭 세력, 특히 강력한 귀족 가문인 기즈 가문은 이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프랑스 궁정 내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반면, 위그노 지도자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은 1571년 9월 왕의 자문회에 복귀하며 위그노의 정치적 입지를 회복했다.왕대비 카트린 드 메디치와 그녀의 아들 샤를 9세 국왕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유지하려 했다. 이는 왕실 재정의 어려움과 라 로셸, 라 샤리테쉬르루아르, 코냑, 몽토방 등 주요 도시를 장악한 위그노의 군사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트린은 평화를 공고히 하고자 자신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공주와 위그노 지도자 잔 달브레 여왕의 아들이자 나바르의 왕위 계승자인 앙리 4세의 결혼을 추진했다.[5] 하지만 이 결혼은 1572년 8월 18일로 예정되었으나,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와 펠리페 2세를 비롯한 국내외 가톨릭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학살이 일어나기 몇 년 전부터 위그노 진영에서는 존 칼빈의 사상 변화에 영향을 받아 군주제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칼뱅은 1561년 저서에서 왕이 신에게 불순종하면 권력을 잃는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불경한 왕에게도 복종해야 한다는 이전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위그노 작가들은 이를 국민 주권 사상으로 발전시켰고, 이는 가톨릭 측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12] 이러한 반군주제 사상은 학살 이후 군주반대론자들을 중심으로 더욱 확산되어, 왕권 자체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13][14]
결정적인 위기는 1572년 8월 22일, 콜리니 제독에 대한 암살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샤를 9세는 자신이 신임하던 콜리니가 공격받자 범인 처벌을 약속했지만, 위그노들의 거센 항의와 보복 위협은 궁정을 긴장시켰다.[20] 특히 콜리니의 매형이 파리 외곽에 4,000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가톨릭 측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15]
위그노의 보복을 두려워한 카트린 드 메디치는 8월 23일 밤, 튈르리 궁전에서 이탈리아 출신 고문들과 대책 회의를 열었다. 이후 샤를 9세와 만나 논의한 끝에, 위그노 지도자들을 선제적으로 제거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논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이 결정에는 콜리니를 포함한 수십 명의 위그노 귀족들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1]
이 결정 직후 파리 시 당국이 소집되어 도시 문을 걸어 잠그고 시민들을 무장시켜 위그노의 봉기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왕의 스위스 근위대에게는 주요 위그노 인사들을 살해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학살의 신호는 8월 24일 새벽, 루브르 박물관 근처 생제르맹로세루아 교회의 종소리로 알려졌으며, 이는 곧 파리 전역에서 벌어질 끔찍한 학살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5. 학살의 결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프랑스 위그노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정치, 사상, 사회 전반에 걸쳐 깊고 오래 지속되는 영향을 미쳤다.
학살은 위그노의 저항 의지를 더욱 강화시켰고, 폭군에 대한 저항 이론인 모나르코마키 사상의 등장을 촉진했다.[222] 동시에 학살의 잔혹성은 종교적 극단주의를 경계하고 국가 안정을 우선시하는 온건파 가톨릭 신자들, 즉 폴리티크파의 성장을 가져왔다.[226][227] 이러한 사상적 대립은 이후 프랑스의 정치 지형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장 보댕과 같은 인물은 국가 주권 이론을 발전시키며 혼란을 수습하고 강력한 왕권을 통해 국가 질서를 회복하려는 시도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228][229][230][231][232]
정치적으로 학살은 제4차 위그노 전쟁을 촉발했으며, 프랑스 내전은 왕위 계승 문제와 얽히면서 더욱 격화되어 이른바 '세 앙리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발루아 왕가는 단절되었고, 위그노 지도자였던 나바라의 앙리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앙리 4세로 즉위하여 부르봉 왕가 시대를 열었다.[239]
앙리 4세는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1598년 낭트 칙령을 반포하여 위그노에게 제한적인 신앙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보장했다.[103] 그러나 이는 잠정적인 해결책이었으며, 이후 위그노의 권리는 점차 축소되어[243] 루이 14세 시대에 퐁텐블로 칙령으로 낭트 칙령이 폐지되면서 위그노에 대한 관용 정책은 막을 내렸다.[117] 이로 인해 많은 위그노가 해외로 망명했고, 프랑스 내 개신교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245]
학살의 계기가 되었던 앙리 4세와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정략결혼은 결국 파탄에 이르러 1599년 이혼으로 마무리되었다.[242]
5. 1. 희생자 수
학살로 인한 희생자 수에 대한 추정치는 매우 다양하다. 로마 가톨릭 옹호자들은 2,000명으로 추산하는 반면, 학살에서 살아남은 동시대 위그노인 쉴리 공작은 70,000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39][199]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아직까지 집계되지 않았으며,[40][200] 현대 역사가들의 추정치 역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파리의 경우, 유일하게 비교적 정확한 수치는 시 당국이 일주일 동안 센 강변에서 시신 1,100구를 수습하고 매장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불했다는 기록이다. 다른 기록과 관련된 시신 수는 이를 바탕으로 추산된다.[48][209][210]
살해된 희생자 중에는 철학자 페트루스 라무스와 리옹의 작곡가 클로드 고디멜도 포함되어 있었다. 리옹에서 론 강으로 던져진 시체들 때문에 아를 사람들은 석 달 동안 강물을 마시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49]
학살의 여파는 실제 살해된 사람들의 수를 훨씬 넘어섰다. 학살 이후 몇 주 동안, 특히 폭력이 발생했던 도시들에서는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많은 위그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예를 들어, 루앙에서는 수백 명이 학살당했으며, 이후 개종과 안전한 곳으로의 이주가 이어지면서 위그노 공동체 규모는 16,500명에서 3,000명 미만으로 급감했다. 폭력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도시들에서도 위그노 인구는 크게 줄어들었다.[37] 학살 직전 프랑스 인구의 약 10%를 차지했던 위그노는 16세기 말에는 7~8%로 감소했으며, 이후 루이 14세 시대의 박해와 낭트 칙령 폐지를 거치며 더욱 줄어들었다.[38] 학살은 곧바로 제4차 종교 전쟁으로 이어졌다.
5. 2. 정치적 영향
국내외 가톨릭 신자들은 처음에는 학살을 위그노의 쿠데타 위협에 대한 정당방위로 간주했다.[211]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샤를 9세에게 황금 장미를 수여하고,[211] 테 데움을 부르도록 명했으며, "위그노 학살 1572년"(Ugonottorum strages 1572|우고노토룸 스트라게스 1572la)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기념 메달 발행을 지시했다.[212] 또한 조르조 바사리에게 학살 장면을 담은 프레스코화 제작을 의뢰하기도 했다.[213] 학살은 신성한 징벌로 해석되었고, 교황은 1572년 9월 11일을 레판토 해전 승리와 위그노 학살을 기념하는 합동 축일로 지정했다.[213] 그러나 학살의 참상이 점차 알려지면서 교황청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콜리니 제독 암살 미수범으로 지목된 샤를 드 몰베르와의 면담을 거부했다.[215][216]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학살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고 전해진다.[217] 반면, 샤를 9세의 장인이었던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2세는 학살을 "부끄러운 일"이라며 격분했다.[218]프랑스 내부에서는 학살의 잔혹성에 충격을 받은 온건파 가톨릭 신자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종교적 통일보다는 국가의 안정을 우선시하며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는 폴리티크파를 형성하게 되었다.[219][220]
학살은 위그노의 저항 의지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전까지 장 칼뱅은 신민의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나[221], 학살 이후 위그노 내부에서는 무력 저항을 정당화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 과정에서 폭군은 타도될 수 있다는 모나르코마키(폭군방벌론자) 사상이 등장했다.[222] 대표적인 이론가로는 테오도르 드 베즈(『신민에 대한 위정자의 권리에 관하여』, 1573년)와 뒤 프레시 모르네와 랑게(『폭군에 대한 반항의 권리』) 등이 있다.[222] 베즈는 위정자가 인민의 동의 없이 권력을 행사할 경우 저항이 가능하다고 보았으나, 저항 주체는 개별 인민이 아닌 삼부회나 대귀족으로 제한했다.[223][224] 『폭군에 대한 반항의 권리』는 더욱 체계적인 저항 이론을 제시하며 위그노 저항 사상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225]
한편, 폴리티크파는 모나르코마키가 군주 저항의 근거로 신과의 계약이나 교황의 승인을 중시하는 경향을 비판하며, 종교 문제에 대한 관용적 해결을 통해 국가의 정치적 통일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26][227] 대표적인 폴리티크 사상가인 장 보댕은 근대적 주권 개념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228] 보댕은 국가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로 파악하고, 지배자인 국왕에게 속한 절대적이고 불가분한 권력으로서 주권을 정의했다.[229][230][231] 이를 통해 귀족 등 중간 권력의 저항권을 인정하는 모나르코마키 이론을 부정하고 국가 통일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232]
학살 이후 위그노는 라 로셸을 거점으로 저항을 이어가 제4차 위그노 전쟁이 발발했다. 1573년 불로뉴 칙령으로 잠시 화의가 성립되었으나, 위그노는 1574년 제1회 개혁파 정치 회의를 열어 독자적인 징세권과 상비군 보유를 결의하며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다.[227] 같은 해 샤를 9세가 사망하고 동생 앙리 3세가 즉위했다. 이후 전쟁과 휴전이 반복되는 가운데, 나바라의 앙리(훗날 앙리 4세)는 1576년 궁정을 탈출해 개신교로 재개종하고[234], 1581년 위그노의 "보호자"(Protecteur|프로텍퇴르프랑스어)로 추대되었다.[235] 1584년 왕위 계승자였던 앙주 공작 프랑수아가 사망하자, 살리카법에 따라 개신교도인 나바라의 앙리가 제1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236] 이에 위기감을 느낀 가톨릭 강경파는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기즈 공작 앙리를 중심으로 가톨릭 동맹( la Ligue|라 리그프랑스어 )을 결성했다.[235] 내란은 국왕 앙리 3세, 가톨릭 동맹의 기즈 공작 앙리, 위그노의 나바라의 앙리가 대립하는 이른바 '세 앙리의 전쟁'으로 격화되었다. 1588년 파리에서 바리케이드의 날 사건으로 가톨릭 동맹이 우위를 점하자, 앙리 3세는 같은 해 블로아 삼부회에서 기즈 공작 앙리를 암살했다.[237] 이때 병상에 있던 모후 카트린 드 메디치는 아들의 행동을 한탄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238] 이듬해 1589년, 앙리 3세 자신도 가톨릭 동맹 측 수도사 자크 클레망에 의해 암살되면서 발루아 왕가는 단절되었다.
나바라의 앙리가 앙리 4세로 왕위를 계승하여 부르봉 왕가를 열었으나, 가톨릭 세력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1593년 앙리 4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자[239], 가톨릭 세력의 저항은 약화되었고 이듬해 파리에 입성할 수 있었다. 오랜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앙리 4세는 1598년 낭트 칙령을 반포하여 위그노에게 제한적이나마 신앙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보장했다.[103] 이로써 30년 이상 지속된 위그노 전쟁은 막을 내렸다.[241]
그러나 낭트 칙령으로 보장된 위그노의 권리는 이후 점차 축소되었고[243], 루이 13세 치세하 리슐리외 추기경에 의해 1627-28년 라 로셸 포위전에서 위그노의 거점 라 로셸이 함락되면서 정치적, 군사적 특권을 대부분 상실했다.[244] 결국 루이 14세 치세인 1685년 퐁텐블로 칙령으로 낭트 칙령이 완전히 폐지되면서 신앙의 자유마저 박탈당했다.[117] 이로 인해 많은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나 해외로 망명하게 되었고, 현대 프랑스에서 개신교도는 소수 종교 집단으로 남게 되었다.[245]
5. 3. 국제적 반응

학살 소식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가톨릭 진영의 수장인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학살 소식을 듣고 이를 축하하며 '하느님께 찬양'이라는 뜻의 Te Deum|테 데움la 성가를 부르도록 명하고 특별 감사 미사를 집전했다. 또한 학살을 기념하는 메달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다만, 1572년 5월에 막 교황이 된 그레고리오 13세가 Te Deum|테 데움la을 부른 것은 위그노에 대한 승리 소식만을 보고받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250] 로마에서는 학살을 축하하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3일 동안 불을 밝혔다고 전해진다.[251] 다른 가톨릭 국가들의 반응은 엇갈렸으며,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학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6. 학살에 대한 평가와 논란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룸)
6. 1. 가톨릭 교회의 인정
로마 가톨릭교회는 오랫동안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사건에 교회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부인해왔다. 그러나 1997년 8월 2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 청소년 축제 강론에서 처음으로 이 사건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책임을 인정했다. 그는 "오직 용서만이 결실있는 대화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말하며 관용을 촉구했다.[252]6. 2. 역사적 해석의 변화

학살로 사망한 사람들의 추정치는 로마 가톨릭 옹호자의 2,000명에서, 학살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동시대 위그노교도 막시밀리앙 드 베튄의 70,000명까지 다양하다.[39] 사상자에 대한 정확한 수치는 아직까지 집계되지 않았으며,[40] 현대 역사가들의 저술에서도 상당한 범위의 추정치가 나타나지만, 역사가의 전문성이 깊어질수록 수치는 낮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낮은 쪽에서는 파리에서 약 2,000명,[41] 지방에서 3,000명으로 추산되는데, 후자는 1978년 필립 베네딕트의 추정치이다.[42] 다른 추정치로는 총 10,000명으로, 파리에서 약 3,000명,[44] 지방에서 7,000명으로 추산된다.[45] 높은 쪽에서는 총 20,000명,[46] 또는 역사학자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와 D. 윌슨이 인용한 "당대의 공정하고 객관적인 추정"에 따르면 총 30,000명에 달한다.[47]
파리의 경우, 유일하게 정확한 수치는 일주일 동안 시신 1,100구를 수집하고 매장하기 위해 시에서 노동자들에게 지불한 금액이다. 다른 지불과 관련된 시신 수는 이를 기준으로 계산된다.[48]
살해된 사람들 중에는 철학자 페트루스 라무스와 리옹의 작곡가 클로드 고디멜이 있었다. 리옹에서 론 강으로 떠내려온 시체 때문에 아를 사람들은 석 달 동안 물을 마시지 못했다고 한다.[49]
6. 3. 문화적 영향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종교적 광신과 폭력이 빚어낸 참혹한 역사적 사건으로, 후대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며 다양한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문학
-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우는 번역된 위그노 문헌과 영국으로 피난 온 프랑스 난민들을 통해 사건을 접하고, 이를 바탕으로 강한 반가톨릭 및 반프랑스 성향의 희곡 ''파리의 대학살''을 썼다. 그의 다른 초기 작품들에도 학살의 영향이 나타난다고 평가된다.[96]
- 루이-세바스티앙 메르시에는 1772년 희곡 ''리지외의 주교 장 앙뉘에''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으나, 프랑스 혁명 시기까지 공연되지 못했다. 이 작품은 엘리자베스 인치발드에 의해 ''대학살''이라는 제목으로 각색되어 1792년 영국에서 영어로 상연되었다.[96]
- 조제프 셰니에의 희곡 ''샤를 9세''는 프랑스 혁명기에 큰 성공을 거두며 학살을 통해 반군주제, 반종교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했다.[246] 셰니에는 정치인으로서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하는 등 자신의 신념을 실천에 옮겼으나, 후에 온건파로 몰려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97][247]
- 프로스페르 메리메는 ''샤를 9세 치세 연대기''(1829)에서,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는 ''라 렌 마고''(1845)에서 이 사건을 소설화했다. 특히 뒤마의 소설은 낭만주의적 시각으로 역사를 그려냈으며, 1954년(잔 모로 주연)과 1994년(이자벨 아자니 주연) 두 차례 영화화되었다.
- 마크 트웨인은 그의 에세이 "여행자를 위한 원고에서 (1879): 프랑스인과 코만치족"에서 학살을 "세상에서 고안되고 성취된 종류 중 가장 훌륭한 사건"이라며 풍자적으로 비판했다.[99]
- 진 플레이디의 ''여왕 이세벨''(1953), 팀 윌록스의 ''파리의 열두 아이들''(2013), 켄 폴레트의 ''불기둥''(2017) 등 여러 현대 역사 소설에서도 학살 사건을 중요한 배경 또는 소재로 다루었다. 폴레트의 소설은 학살의 책임을 기즈 가문에게 돌리는 관점을 취했다.
오페라
회화
- 라파엘전파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는 마이어베어의 오페라 ''위그노 교도들''에서 영감을 받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위그노''(1852)를 그렸다.[98][249] 이 작품은 가톨릭 여성이 위그노 연인에게 신변 보호를 위해 가톨릭 표식을 달라고 권하지만, 남성이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이를 부드럽게 거절하는 애틋한 장면을 묘사했다.[98][249]
- 요스트 암만은 1573년 판화에서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의 암살 장면을 묘사했다.
영화 및 드라마
- D. W. 그리피스 감독의 영화 ''관용''(1916)은 여러 시대의 불관용을 다룬 옴니버스 영화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을 주요 이야기 중 하나로 포함시켰다. 영화는 카트린 드 메디치가 학살을 계획하고 아들 샤를 9세에게 승인을 강요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 BBC 미니시리즈 ''엘리자베스 R''(1971)에서는 학살 소식이 영국 궁정에 전해졌을 때의 반응과 이것이 양국 관계에 미친 영향을 다루었다.
- 영국의 SF 드라마 ''닥터 후''의 1966년 시리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은 학살 직전의 파리를 배경으로 하며, 카트린 드 메디치가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묘사했다.[100] 해당 에피소드는 현재 소실되어 오디오만 남아 있다.
- 미국 드라마 ''뱀 여왕'' 시즌 2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도 학살 사건을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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