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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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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라예보 사건은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의해 암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대한 보복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암살 배후에는 세르비아 군사 정보부의 지원을 받은 비밀 결사 '흑수단'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세르비아 정부의 관여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사건 이후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테러리스트로, 일부 세르비아인들에게는 민족 영웅으로 평가되며, 사건의 책임과 역사적 의미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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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 사건
위치 정보
페르디난트가 사망한 장소를 보여주는 지도
지도: 페르디난트가 사망한 장소
사건 개요
사건명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소피, 호엔베르크 여공작 암살 사건
다른 이름사라예보 공격
발생 위치라틴 다리 근처, 사라예보, 오스트리아-헝가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 통치령
좌표위치
사망자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 소피, 호엔베르크 여공작
발생 날짜1914년 6월 28일
사용된 무기FN 1910 반자동 권총
사건 결과제1차 세계 대전의 촉매제
관련 인물
피의자가브릴로 프린치프 외 다수
기소 혐의대역죄
유죄 판결가브릴로 프린치프 외 다수
형량20년형: 프린치프 외 3명
교수형: 다닐로 일리치 외 2명
재판 및 처벌
추가 정보
영상 자료브리태니커 영상
사건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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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878년 베를린 조약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만 제국령 보스니아를 점령하고 통치하게 되었지만, 명목상 주권은 여전히 오스만 제국에 있었다. 같은 조약으로 세르비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세르비아 왕국이 되었고, 밀란 1세가 즉위하였다. 세르비아의 오브레노비치 왕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03년 5월,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군 장교들이 왕궁을 습격하여 국왕 알렉산다르 1세 부부를 살해하고,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페타르 1세를 새 국왕으로 추대했다. 새 왕조는 민족주의적이고 친러적인 성향을 띠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906년에는 관세 전쟁이 발생했고,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자 세르비아는 강력히 반발했다. 1912년1913년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에 승리하여 코소보북마케도니아를 확보했다.

세르비아의 군사적 성공과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은 "대세르비아"를 꿈꾸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을 고무시켰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반오스트리아, 대세르비아주의적 혁명 운동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1908년에는 세르비아 민족주의 조직 나로드나 오드브라나가 결성되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인들에게 반오스트리아 사상을 퍼뜨렸다. 1911년 5월에는 "흑수단" (Crna Rukasr)으로 알려진 비밀결사 "통합 아니면 죽음" (Ujedinjenje ili smrtsr)이 결성되었다. 나로드나 오드브라나와 흑수단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혁명 운동에 깊이 침투했다.

1910년 6월, 젊은 보스니아의 보그단 제라지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총독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자살했다. 그의 행동은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영감을 주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연방주의 강화를 지지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슬라브족 지역을 제3 왕관으로 통합하는 구상을 가졌다. 이는 세르비아 민족통일주의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할 수 있어 세르비아 민족통일주의자들에게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개혁을 막는 것이 암살 동기 중 하나였다고 진술했다.

2. 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

1878년 베를린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만 주를 점령하고 관리할 권한을 얻었지만, 오스만 제국은 공식적인 주권을 유지했다. 같은 조약에 따라 열강(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국, 프랑스, 독일 제국, 이탈리아, 러시아 제국)은 세르비아 공국을 완전한 주권 국가로 공식 인정했고, 4년 후 밀란 1세가 왕위에 올라 왕국이 되었다. 당시 오브레노비치 왕가 출신의 세르비아 군주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약으로 정해진 국경 내에서 통치하는 것에 만족했다.[1]

1903년 5월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왕립 육군 장교들이 세르비아 왕궁을 급습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공격자들은 알렉산드르 1세 오브레노비치 국왕과 그의 왕비 드라가 왕비를 살해하고,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페트르 1세를 새로운 국왕으로 임명했다.[2]

새로운 왕조는 더욱 민족주의적이었고, 러시아와는 더 우호적이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는 덜 우호적이었다.[3] 그 후 10년 동안 세르비아는 세력을 키우면서 14세기 제국을 회복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이웃 국가들과 분쟁을 벌였다. 이러한 갈등에는 1906년부터 시작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관세 분쟁(일반적으로 "돼지 전쟁"이라고 함)[4], 1908~1909년의 보스니아 위기(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에 대한 세르비아의 항의로 끝맺음, 1909년 3월 보상 없이 세르비아가 묵인함)[5], 그리고 1912~1913년의 두 차례 발칸 전쟁이 있었다.[6]

세르비아의 군사적 성공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에 대한 세르비아의 분노는 세르비아 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과 오스트리아-헝가리 통치에 불만을 품은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을 고무시켰다.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은 세르비아 문화 단체들에 의해 민족주의적 감정이 자극되었다.[7][8] 1908년 밀로반 밀로바노비치의 주도로 벨그라드에서 결성된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 나로드나 오드브라나는 문화 활동이라는 구실 아래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의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약화시키는 활동을 벌였다.[9][10]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는 젊은 보스니아로 알려진 지역 혁명 단체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의 목표는 보스니아에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식민 통치 종식과 모든 남슬라브인의 통일이었다.[11][12]

2. 2.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발흥

1878년 베를린 조약으로 세르비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1882년, 밀란 1세가 즉위하면서 세르비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세르비아의 오브레노비치 왕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1]

1903년 5월,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군 장교들이 왕궁을 습격했다. 알렉산다르 1세 국왕과 왕비는 총에 맞아 살해되었고, 시신은 잔혹하게 훼손된 후 궁전 창밖으로 던져졌다.[2] 이 쿠데타로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페타르 1세가 새 국왕으로 즉위했다.[3]

새 왕조는 민족주의적이고 친러적인 성향을 띠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4] 1906년에는 관세 전쟁이 발생했고,[5]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자 세르비아는 강력히 반발했다.[6]

1912년1913년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에 승리하여 코소보북마케도니아의 영유권을 확보했다.[7] 이로 인해 세르비아의 영토와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8]

세르비아의 군사적 성공과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은 "대세르비아" 실현을 목표로 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을 고무시켰다.[9]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반오스트리아, 대세르비아주의적 혁명 운동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대두되었다.[10] 또한, 세르비아 본국의 "문화적" 단체들은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의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했다.[11] 1908년에는 세르비아 민족주의 조직 나로드나 오드브라나가 결성되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인들에게 반오스트리아 사상을 퍼뜨렸다.[12]

1911년 5월에는 테러를 통해 대세르비아를 실현하려는 비밀결사 "통합 아니면 죽음" (Ujedinjenje ili smrtsr)이 결성되었으며, "흑수단" (Crna Rukasr)으로 더 잘 알려졌다.[13] 나로드나 오드브라나와 흑수단의 네트워크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혁명 운동에 깊이 침투했다.[14]

1910년 6월, 젊은 보스니아의 보그단 제라지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총독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자살했다.[15] 그의 행동은 가브릴로 프린치프 등 미래의 암살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16]

2. 3. 보스니아 내 민족주의 운동

1878년 베를린 조약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를 통치하게 되자, 보스니아 내에서는 이에 반발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세르비아와의 통합을 추구했다.[18]

세르비아의 군사적 성공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과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을 고무시켰다.[18] 이들은 세르비아 문화 단체들의 지원을 받으며 민족주의적 감정을 키웠다.[18]

1908년 10월 8일, 밀로반 밀로바노비치의 주도로 벨그라드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 나로드나 오드브라나가 결성되었다.[19] 이 단체는 문화 활동을 명목으로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의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약화시키는 활동을 벌였다.[19]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는 젊은 보스니아로 알려진 지역 혁명 단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식민 통치를 종식시키고 모든 남슬라브인의 통일을 목표로 했다.[20] 1911년 5월, 대세르비아 건설을 목표로 하는 비밀결사 흑수단이 나로드나 오드브라나의 핵심 회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21] 흑수단과 나로드나 오드브라나의 네트워크는 젊은 보스니아와 같은 지역 혁명 운동에 침투했다.[20]

젊은 보스니아는 사회 혁명을 국가 해방의 필수적인 결과로 간주했고, 구성원은 대부분 세르비아인이었지만, 상당수의 크로아티아인과 일부 무슬림도 참여했다.[20]

1910년 6월 3일, 젊은 보스니아와 관련된 보그단 제라지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오스트리아 총독 마리얀 바레샤닌 장군을 암살하려고 시도했다.[22] 제라지치가 바레샤닌에게 발사한 총알과 자신의 머리에 박은 총알은 가브릴로 프린치프를 포함한 미래의 암살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23] 프린치프는 제라지치가 자신의 첫 번째 모델이었다고 말했다.[23]

1912년 봄, 젊은 보스니아인들이 연루된 음모에서 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인 학생인 루카 유키치는 크로아티아 총독 슬라브코 쿠바이 백작을 암살하려고 시도했다.[24]

2. 4.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정책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부인 조피아 호텍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연방주의 강화를 지지하였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슬라브족 지역을 제3 왕관으로 통합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재편성하는 삼중 제국 구상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27] 이러한 구상은 슬라브 왕국이 세르비아 민족통일주의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세르비아 민족통일주의자들에게 위협으로 인식되었다.[28]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이후 법정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개혁을 막는 것이 암살 동기 중 하나였다고 진술했다.[25]

3. 사건 경과

1914년 6월 28일 사건 경과를 나타낸 공식 보고서 지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차량 행렬 경로를 보여주는 지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 당시 타고 있던 1911년형 그라프 & 슈티프트(Gräf & Stift) 28/32 PS 더블 파에톤(Double Phaeton), 비엔나 군사 박물관(Museum of Military History, Vienna)(2023)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아침, 다닐로 일리치는 암살자 6명을 차량 행렬 경로에 배치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일행은 일리자 온천에서 사라예보까지 기차로 이동하여 오스카르 포티오렉 총독이 사라예보 중앙역에서 맞이했다.[53] 대기 중이던 6대의 자동차 중 첫 번째 차에는 실수로 특별 경호대장과 현지 경찰관 3명이 탔고, 특별 경호대원들은 남겨졌다.[53] 두 번째 차에는 사라예보 시장과 경찰서장이, 세 번째 차에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소피, 포티오렉 총독, 프란츠 폰 하라흐 중령이 탔다. 이 차는 지붕이 접힌 그라프 & 슈티프트 28/32 PS 오픈 스포츠카였다.[53] 차량 행렬은 먼저 군사 병영을 짧게 시찰한 후, 오전 10시에 아펠 부두를 거쳐 시청으로 향할 예정이었다.[53]

사라예보는 경비가 허술했다. 현지 군 사령관은 군대 배치를 제안했으나, 시민들을 불쾌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방문객 보호는 사라예보 경찰에게 맡겨졌는데, 당일 근무 경찰은 약 60명뿐이었다.[27]

암살자 중 메흐메드바시치와 바소 추브릴로비치는 행동하지 않았다.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는 밀랴츠카 강 근처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폭탄은 빗나가 다음 차 아래에서 폭발하여 16~20명이 부상당했다.[53] 차브리노비치는 청산가리를 삼키고 강에 뛰어들었으나, 얕은 수심과 약효 문제로 자살에 실패하고 경찰에 체포되었다.[2]

차량 행렬은 시청으로 향했고, 다른 암살자들은 행동하지 못했다. 시청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시장 페힘 추르치치(Fehim Čurčić)의 환영 연설을 중단하고 항의했다가, 곧 진정하고 연설을 들었다.[53] 이후 대책을 논의했으나, 포티오렉 총독은 병력 배치를 거부했다.[53]

사라예보에서의 용의자 체포
(가브릴로 프린치프 체포 장면으로 알려졌으나, 페르디난트 베어라는 목격자라는 설이 있다.)[53]

프린치프의 FN 1910 권총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소피는 부상자 방문을 위해 계획을 변경하고, 하라흐 백작이 대공 차량 왼쪽 발판에 섰다.[53] 오전 10시 45분, 부부는 다시 세 번째 차에 탔다.[53] 포티오렉은 안전을 위해 차량 행렬이 도심을 피해 병원으로 직진해야 한다고 결정했으나, 운전자들에게 알리지 못했다.[53] 결국 대공의 운전사 레오폴트 로이카(Leopold Lojka)[3]는 라틴 다리에서 우회전했다. 포티오렉의 보좌관이 병원에 있어, 운전자에게 경로 변경을 알릴 수 없었다.[53]

첫 암살 실패 후, 프린치프는 라틴 다리 근처 식료품점 앞으로 이동했다. 이때 대공 차량 행렬이 옆길로 우회전했고,[53] 포티오렉이 운전자에게 멈추라고 외치자 차가 멈춘 곳 근처에 프린치프가 있었다. 그는 차량 발판으로 다가가 1910 모델 .380구경 권총으로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소피를 쏘았다.[53] 프린치프는 자살하려 했으나 체포되었다.[53] 총격 후 소피는 즉시 의식을 잃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도 곧 의식을 잃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소피, 소피! 죽지 마! 우리 아이들을 위해 살아!"였다.[53] 부부는 오전 11시 30분에 사망했다.[53]

3. 1. 암살 계획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독립하여 세르비아와 합치는 것을 원했던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군대 사열을 위해 사라예보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네델코 차브리노비치 및 4명의 혁명가 학생들과 함께 암살 음모를 준비했다.[53]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제국 내에서 게르만인과 슬라브인이 평등하게 지내게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세르비아 민족주의 단체는 이러한 온건 정책이 오히려 세르비아인의 결집 의지를 약화시킨다고 여겼다.[53]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 슬라브계 민족이 동맹에 참여할 수 있는 제3의 왕국을 수립하려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구상은 통일된 단일 민족 국가를 열망하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위협이 되었다.[54]

프린치프, 그라베주, 차브리노비치는 1914년 5월 28일 배를 타고 벨그라드를 떠나 샤바츠까지 이동하여 세르비아 국경 수비대의 포포비치 대위에게 작은 카드를 전달했다. 포포비치는 그들에게 세르비아 프르바노비치 대위에게 보내는 편지를 제공하고, 세관원 세 명의 신원을 가정하여 로즈니차라는 작은 국경 도시까지의 기차표 할인을 받을 수 있도록 양식을 작성해 주었다.

5월 29일, 프린치프, 그라베즈, 차브리노비치가 로즈니차에 도착했을 때, 프르바노비치 대위는 국경을 몰래 넘는 가장 좋은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세 명의 세입 세무관을 불렀다. 세무관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프린치프와 그라베즈는 차브리노비치의 반복적인 작전 보안 위반으로 그와 다툼을 벌였다. 차브리노비치는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무기를 프린치프와 그라베즈에게 넘겼다. 프린치프는 차브리노비치에게 혼자 즈보르니크로 가서 그라베즈의 신분증을 사용하여 공식적으로 국경을 넘은 후 투즐라로 가서 다시 합류하라고 말했다.

5월 30일 아침, 프르바노비치의 세무관들이 모였고 부디보이 그르비치 하사가 그 임무를 맡아 프린치프와 그라베즈를 이끌고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를 갈라놓는 드리나 강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인 이사코비치 섬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5월 31일 무기와 함께 섬에 도착했다. 그르비치는 테러리스트들과 그들의 무기를 세르비아 나로드나 오드브라나 요원들에게 넘겨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 내로, 안전가옥에서 안전가옥으로 이동하게 했다. 프린치프와 그라베즈는 6월 1일 저녁에 오스트리아-헝가리로 넘어갔다. 프린치프와 그라베즈, 그리고 무기들은 요원에서 요원으로 넘겨졌고 6월 3일 투즐라에 도착했다. 그들은 무기를 나로드나 오드브라나 요원인 미슈코 요바노비치에게 맡기고 차브리노비치와 다시 합류했다.

나로드나 오드브라나 요원들은 그들의 활동을 나로드나 오드브라나 의장인 보지다르 얀코비치에게 보고했고, 얀코비치는 당시 세르비아 임시 총리인 니콜라 파시치에게 보고했다. 파시치에게 제출된 보고서에는 새로운 군사 음모자인 세르비아 코스타 토도로비치 소령의 이름이 추가되었다. 파시치의 보고 브리핑에서 나온 필기 메모에는 암살자 중 한 명의 별명("트리프코" 그라베즈)과 탄코시치 소령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나중에 보고서, 파시치의 필기 메모 및 추가적인 확인 문서를 압수했다.

차브리노비치의 아버지는 사라예보 경찰관이었다. 투즐라에서 차브리노비치는 아버지의 친구인 사라예보 경찰 형사 이반 빌라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연히도 프린치프, 그라베즈, 차브리노비치는 빌라 형사와 같은 기차를 타고 사라예보로 향했다. 차브리노비치는 형사에게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를 방문하는 날짜를 물었다. 다음날 아침, 차브리노비치는 동료 암살자들에게 암살이 6월 28일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알렸다.

6월 4일 사라예보에 도착한 프린치프, 그라베즈, 차브리노비치는 각자의 길을 갔다. 프린치프는 일리치와 연락을 취하고 하지치에 있는 그의 가족을 방문한 후 6월 6일 사라예보로 돌아와 일리치의 어머니 집에 머물렀다. 그라베즈는 팔레에 있는 그의 가족과 합류했다. 차브리노비치는 사라예보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다.

6월 14일, 일리치는 무기를 사라예보로 가져오기 위해 투즐라로 갔다. 미슈코 요바노비치는 무기를 설탕이 가득 든 큰 상자에 숨겼다. 6월 15일, 두 사람은 각자 기차를 타고 도보이로 가서 요바노비치는 일리치에게 상자를 건넸다. 같은 날 오후, 일리치는 사라예보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고, 사라예보 외곽에서 지역 기차로 갈아탄 후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빨리 전차로 갈아탔다. 어머니 집에 도착하자 일리치는 소파 아래 여행 가방에 무기를 숨겼다. 그런 다음, 약 6월 17일, 일리치는 브로드로 여행을 갔다. 재판에서 질문을 받은 일리치는 자신의 여행 이유에 대해 혼란스러운 설명을 했는데, 처음에는 암살을 막기 위해 브로드에 갔다고 말했다가 나중에는 브로드에서 사라예보로 돌아와 암살을 막았다고 말했다.

일리치는 6월 27일부터 무기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날까지 일리치는 베오그라드에서 온 암살자들의 신원을 현지에서 모집한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밤, 메흐메드바시치가 말했듯이, 일리치는 사라예보의 한 카페에서 프린치프를 소개하며 '내일 우리와 함께할 메흐메드바시치'라고 말했다. 세 사람은 프랑스에 있는 흑수단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방 책임자 블라디미르 가치노비치에게 엽서를 보냈다.

벨그라드에서 사라예보까지 암살자들의 이동 경로


벨그라드에서 사라예보까지 무기의 이동 경로

3. 2. 암살 당일 (1914년 6월 28일)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아침, 다닐로 일리치는 암살자 6명을 차량 행렬 경로에 배치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일행은 일리자 온천에서 사라예보까지 기차로 이동했다.[53] 오스카르 포티오렉 총독이 사라예보 중앙역에서 이들을 맞이했다. 대기 중이던 6대의 자동차 중 첫 번째 차에는 실수로 특별 경호대장과 현지 경찰관 3명이 탔고, 특별 경호대원들은 남겨졌다.[53] 두 번째 차에는 사라예보 시장과 경찰서장이, 세 번째 차에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소피, 포티오렉 총독, 프란츠 폰 하라흐 중령이 탔다. 이 차는 지붕이 접힌 그라프 & 슈티프트 28/32 PS 오픈 스포츠카였다.[53] 차량 행렬은 먼저 군사 병영을 짧게 시찰한 후, 오전 10시에 아펠 부두를 거쳐 시청으로 향할 예정이었다.[53]

사라예보의 경비는 허술했다. 현지 군 사령관은 군대 배치를 제안했으나, 시민들을 불쾌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방문객 보호는 사라예보 경찰에게 맡겨졌는데, 당일 근무 경찰은 약 60명뿐이었다.[27]

첫 번째 암살자 메흐메드바시치는 행동하지 않았다. 바소 추브릴로비치도 마찬가지였다. 일리치는 밀랴츠카 강 근처에 네델코 차브리노비치를 배치하고 폭탄을 주었다. 오전 10시 10분,[53]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차가 접근하자 차브리노비치는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접힌 덮개에 맞고 도로에 떨어져 다음 차 아래에서 폭발, 16~20명이 부상당했다.[53] 차브리노비치는 청산가리를 삼키고 강에 뛰어들었으나, 얕은 수심과 약효 문제로 자살에 실패했다.[2] 경찰은 그를 체포했다.

차량 행렬은 시청으로 향했고, 다른 암살자들은 행동하지 못했다.

시청에 도착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시장의 환영 연설을 중단하고 항의했다가, 곧 진정하고 연설을 들었다.[53] 이후 대책을 논의했으나, 포티오렉 총독은 병력 배치를 거부했다.[53]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소피는 부상자 방문을 위해 계획을 변경했다. 하라흐 백작이 대공 차량 왼쪽 발판에 섰다.[53] 오전 10시 45분, 부부는 다시 세 번째 차에 탔다.[53] 포티오렉은 안전을 위해 차량 행렬이 도심을 피해 병원으로 직진해야 한다고 결정했으나, 운전자들에게 알리지 못했다.[53] 결국 대공의 운전사 레오폴트 로이카(Leopold Lojka)[3]는 라틴 다리에서 우회전했다. 포티오렉의 보좌관이 병원에 있어, 운전자에게 경로 변경을 알릴 수 없었다.[53]

(프린치프 체포 장면으로 알려졌으나, 페르디난트 베어라는 목격자라는 설이 있다.)[53]

첫 암살 실패 후, 프린치프는 라틴 다리 근처 식료품점 앞으로 이동했다. 이때 대공 차량 행렬이 옆길로 우회전했다.[53] 포티오렉이 운전자에게 멈추라고 외쳤고, 차가 멈춘 곳 근처에 프린치프가 있었다. 그는 차량 발판으로 다가가 1910 모델 .380구경 권총으로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소피를 쏘았다.[53] 프린치프는 자살하려 했으나 체포되었다.[53] 총격 후 소피는 즉시 의식을 잃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도 곧 의식을 잃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소피, 소피! 죽지 마! 우리 아이들을 위해 살아!"였다.[53] 부부는 오전 11시 30분에 사망했다.[53]

사라예보 사건의 경위를 4단계로 보여주는 그림

4. 사건의 영향

사라예보 사건은 단순히 한 지역에서 발생한 암살 사건을 넘어, 유럽 전체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Serbien muss sterb[i]en!'' ("세르비아는 죽어야 한다!"; 마지막 단어는 운율로 변경됨).
이 선전 만화는 오스트리아가 원숭이 같은 세르비아인을 짓누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건 직후, 사라예보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여러 지역에서는 반(反)세르비아 폭동이 발생했다.[7] 특히 오늘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크로아티아 지역에서 전국적인 반세르비아 포그롬과 시위가 조직되었다.[7] 이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총독 오스카 포티오렉에 의해 조직되고 자극을 받았다.[8] 사라예보에서는 폭동으로 인해 두 명의 세르비아인이 사망하고, 약 1,000채의 세르비아인 소유 주택, 상점, 학교 및 기관이 파괴되거나 약탈당했다.[7] 작가 이보 안드리치는 사라예보의 폭력을 "증오의 사라예보 광란"이라고 묘사했다.[7]

1914년 6월 29일, 사라예보에서의 반세르비아 폭동 이후 거리 풍경


암살 이후,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딸은 아버지가 새로운 황태자인 카를 대공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황제는 암살에 대해 "큰 걱정에서 벗어난 일"이라고 말했다.[7]

암살자들은 모두 체포되었으며[9],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은 이들을 사라예보로 데려오고 무기를 제공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했다. 공모자 중 유일한 보스니아계 무슬림인 메흐메드바시치는 몬테네그로 왕국에서 체포되었지만, 송환되기 전에 탈출했다.[6]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조피 황태자비의 시신은 전함 SMS 비리부스 우니티스(SMS Viribus Unitis)를 통해 트리에스테로, 이후 특별 열차를 이용해 빈으로 운구되었다. 장례식은 황실 가정의 오베르슈토프마이스터이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숙적이었던 몬테누오보 공작 알프레드 2세가 주관하였으며, 황제의 묵인 하에 암살된 부부에 대한 무시로 가득 찬 행사로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외국 왕족들은 초대받지 못했고, 황실 가족만 참석했으며, 사망한 부부의 세 자녀는 소수의 공개 행사에서도 제외되었다. 대공의 친구였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초대를 받았지만 참석을 거절했다. 장교단은 장례 열차에 경례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관의 공개 조문은 심하게 단축되었다. 대공과 그의 아내는 아르츠슈테텐 성(Artstetten Castle)에 안치되었다.[5]

4. 1.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남슬라브 운동을 부추기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들은 사라예보 사건을 구실로 세르비아와 전쟁을 결심하고 동맹국 독일 제국에 협조를 요청했다. 빌헬름 2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 이른바 "백지 수표"를 약속했다.[56] 이는 1878년에 체결된 독오 동맹에 따른 것이었지만, 1908년 보스니아 위기 이후 동맹 관계가 역전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주도권을 쥐게 된 상황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의 지원을 믿고 7월 23일 세르비아에 48시간 시한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모든 반(反)오스트리아 단체 해산.

# 암살 관련자 처벌.

# 반(反)오스트리아 단체 관련 관리 파면.

# 오스트리아 관리가 세르비아 내 조사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

이 조항들은 세르비아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었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가 이를 거부하고 전쟁을 일으키기를 의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최후통첩에는 거부 시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내용이 없어, 세르비아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은 이를 "시한이 정해진 요청문"으로 분류했다.[57]

세르비아 정부는 1, 2, 3항은 수용했지만, 4항은 받아들일 수 없어 최후통첩을 거부했다.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7월 29일 러시아 제국이 총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의 빌헬름 2세러시아 제국프랑스 제3공화국에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러시아는 무응답, 프랑스는 자국 이익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답했다.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각국이 연쇄적으로 전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전쟁은 7월 28일부터 시작된 것으로 간주된다.

4. 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최후통첩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남슬라브 운동을 부추기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사라예보 사건을 구실로 세르비아와 전쟁을 결심하고 동맹국 독일 제국에 협조를 요청, 빌헬름 2세로부터 무조건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는 1878년 체결된 독오 동맹에 따른 것이었지만, 1908년 보스니아 위기 이후 주도권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넘어가 있었다.

독일의 지원을 믿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7월 23일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답변 시한은 48시간이었다. 최후통첩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57]

# 모든 반(反)오스트리아 단체 해산.

# 암살 관련자 처벌.

# 반(反)오스트리아 단체 관련 관리 파면.

# 오스트리아 관리의 세르비아 내 조사 협조 허용.

이 조항들은 세르비아의 주권을 침해하는 내용이었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전쟁을 의도했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최후통첩에는 거부 시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내용이 없어, 세르비아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은 이를 "시한이 정해진 요청문"으로 분류했다.[57]

세르비아는 1, 2, 3항은 수용했으나, 4항은 주권 침해를 이유로 거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를 빌미로 7월 28일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4. 3. 국제 관계 악화

1878년 베를린 조약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를 점령하고 통치할 권한을 얻었다. 같은 조약으로 세르비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세르비아 왕국의 오브레노비치 왕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56]

1903년 세르비아 군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알렉산다르 1세가 살해되고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페타르 1세가 즉위하면서, 세르비아 왕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관계는 악화되었다.[56] 1906년에는 돼지 전쟁이라 불리는 관세 전쟁이 발생했고,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인 인구가 많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자 세르비아의 반(反)오스트리아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56]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1913년 제2차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가 승리하며 영토가 크게 확장되자,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대세르비아 실현을 목표로 하였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반(反)오스트리아, 대세르비아주의 혁명 운동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대두되었다.[56]

1913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에게 1914년 6월 보스니아 군사 훈련 시찰을 명령했다. 훈련 후, 대공 부부는 사라예보 국립 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대공 부부의 장남은 조피아가 남편의 안전을 우려하여 동행했다고 전했다.[56]

사라예보 사건은 국지적 분쟁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남슬라브 운동을 부추긴다고 보고, 사건을 계기로 세르비아와 전쟁을 결심했다. 독일 제국빌헬름 2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무조건적 지원, 이른바 "백지 수표"를 약속했다. 이는 1878년 체결된 독오 동맹에 따른 것이었지만, 1908년 보스니아 위기 이후 주도권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넘어가 있었다.[56] 비스마르크는 이를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 경고한 바 있다.[56]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14년 7월 23일 세르비아에 48시간 시한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57]

# 모든 반(反)오스트리아 단체 해산

# 암살 관련자 처벌

# 반(反)오스트리아 단체 관련 관리 파면

# 오스트리아 관리의 세르비아 내 조사 협조 허용

이 조항들은 세르비아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었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가 거부할 것을 예상했다. 세르비아는 4항을 제외한 나머지를 수용할 수 있었지만, 결국 최후통첩을 거부했다.[57]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고, 7월 29일 러시아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각국은 연쇄적으로 전쟁에 돌입했다.

4. 4. 전후 처리

사라예보 재판 진행 중. 프린치프는 첫 번째 줄 중앙에 앉아 있다.


1914년 사라예보 재판 당시 바소 추브릴로비치(Vaso Čubrilović) 사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하면서 제국은 해체되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형성했다.

사라예보 암살자들은 체포되어[9] 공범들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대부분 세르비아 왕국 관리 개입을 포함한 반역죄 공모 혐의로 기소되었다.[36] 단순 살인 공모와 달리 반역죄는 사형 선고가 가능했다. 재판은 1914년 10월 12일부터 23일까지 사라예보에서 열렸고, 10월 28일에 판결이 선고되었다.[36]

사형을 선고받은 성인 피고인들은 재판에서 자신들을 음모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무기 운반을 조율한 벨코 추브릴로비치(Veljko Čubrilović)는 법정에서 "프린치프가 나를 노려보며 매우 강하게 말했습니다. ‘알고 싶다면, 그 이유 때문이며 우리는 상속자를 암살할 것이고, 당신이 그것을 알고 있다면 조용히 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배신하면 당신과 당신의 가족은 파괴될 것입니다.’"라고 진술했다. 그는 프린치프 뒤에 혁명 조직이 있다고 두려워했으며, 법보다 테러가 더 무서웠다고 증언했다.

암살팀 세 명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인정하며, 검찰이 주장했던 세르비아와 나로드나 오드브라나의 책임을 면제받았다. 프린치프는 "우리의 계획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었고 결코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르비아는 여기에 관여하지 않았고 우리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민족주의자로서 모든 남슬라브인의 통합과 오스트리아로부터의 자유를 믿으며, 테러를 통해 목표를 달성하려 했다고 진술했다. 차브리노비치는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슬라브족과 세르비아에 대한 위험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를 죽이려 했다고 증언했다. 그라베즈는 유럽 전쟁으로 이어질 줄 알았다면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들의 주장을 믿지 않고 세르비아 군부 연루를 인정했다.

징역, 사형, 무죄 판결은 다음과 같다.

이름형량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20년
네델코 차브리노비치20년
트리푼 그라베즈20년
바소 추브릴로비치(Vaso Čubrilović)16년
츠베트코 포포비치(Cvjetko Popović)13년
라자르 듀키치(Lazar Đukić)10년
다닐로 일리치(Danilo Ilić)교수형(1915년 2월 3일 처형)
벨코 추브릴로비치(Veljko Čubrilović)교수형(1915년 2월 3일 처형)
네조 케로비치(Neđo Kerović)교수형;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 의해 20년 징역으로 감형
미슈코 요바노비치(Miško Jovanović)교수형(1915년 2월 3일 처형)
야코프 밀로비치(Jakov Milović)교수형;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
미타르 케로비치(Mitar Kerović)무기징역
이보 크란예체비치(Ivo Kranjcević)10년
브란코 자고라츠(Branko Zagorac)3년
마르코 페린(Marko Perin)3년
치비얀 스테파노비치(Cvijan Stjepanović)7년
9명의 피고인무죄



차브리노비치는 살인에 대한 후회를 표명했고, 암살로 인해 고아가 된 세 아이들로부터 용서의 편지를 받았다. 차브리노비치와 프린치프는 감옥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 암살 당시 20세 미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법에 따라 최대 20년형을 받을 수 있었다. 법원은 프린치프의 출생일에 대한 의문이 있었지만, 암살 당시 20세 미만이라고 결론지었다.

살로니카 재판 판결 후 피고인들


1917년, 아피스(Apis)를 포함한 세르비아 군 장교들은 프랑스령 살로니카 전선에서 허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사라예보 사건과 관련 없는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실제로는 알렉산드르 섭정의 정치적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재판받은 사람들 중 4명은 사라예보 사건에서의 역할을 자백했고, 최종 판결은 다음과 같다.

이름판결
아피스(Apis)총살형 (1917년 6월 26일 처형)
류바 블로비치(Ljuba Vulović)총살형 (1917년 6월 26일 처형)
라데 말로바비치(Rade Malobabić)총살형 (1917년 6월 26일 처형)
무하메드 메흐메드바시치(Muhamed Mehmedbašić)징역 15년 (1919년 감형 및 석방)



아피스는 처형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자신이 사라예보 암살을 조직했기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말했다.

5. 암살의 주체와 책임 논란

1878년 베를린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보스니아 주를 점령하고 통치할 권한을 얻었지만, 명목상 주권은 오스만 제국에 남아있었다. 같은 조약으로 세르비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주권 국가로 독립하였다. 1882년 밀란 오브레노비치 4세가 세르비아 왕 밀란 1세로 즉위하여 세르비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세르비아의 오브레노비치 왕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베를린 조약에 의해 정해진 영토를 통치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5]

1903년 5월,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군 장교들이 세르비아 왕궁을 습격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세르비아 왕 알렉산다르 1세와 왕비 드라가는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 이후 왕과 왕비의 시신은 잔혹하게 훼손되었다고 전해진다.[6] 습격자들은 두 사람의 시체를 궁전 창문에서 던져 버리고 왕에게 충실한 세력이 반격할 가능성을 없앴다.[7] 습격을 계획한 자들은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페타르 1세를 새로운 세르비아 왕으로 즉위시켰다.[8]

새로운 왕조는 이전보다 더 민족주의적이고 친러적이었으며, 세르비아 왕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9] 1906년에는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사이에 관세 전쟁("돼지 전쟁")이 발생했다.[10]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인 인구가 많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한다고 선포하자, 세르비아 정부와 국민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며 오스트리아에 대한 감정을 극도로 악화시켰다.[11]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 왕국을 포함한 발칸 동맹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고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의 옛 지배 지역을 획득했다.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에서는 그 지역의 영유권을 놓고 이전 동맹국인 불가리아 왕국과 싸워 승리하였고, 세르비아는 코소보와 북마케도니아의 영유권을 확보했다.[12] 세르비아의 군사적 성공과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에 대한 분노는 "대세르비아" 실현을 목표로 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을 고무시켰다.[13]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이 오스트리아의 병합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반오스트리아적·대세르비아주의적인 혁명 운동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었다.[14]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의 민족주의적 감정은 세르비아 본국의 "문화적" 단체에 의해 선동되었다.[15] 그 영향으로 베오그라드로 이주한 젊은이들 중에는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있었다.[16]

1914년까지 5년 동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크로아티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관리들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실패했다.[17] 1910년 6월 3일, 당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총독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8] 암살 미수범은 총독에게 5발의 총알을 발사한 후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했고, 이 행위는 가브릴로 프린치프 등에게 영감을 주었다.[19]

1913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1914년 6월 보스니아 군사 훈련 시찰을 명령했다.[20] 대공과 그의 아내 조피아는 훈련 후 사라예보를 방문하여 국립 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할 계획이었다.[21] 대공 부부의 장남 막시밀리안 호엔베르크에 따르면, 조피아가 동행한 것은 남편의 안전을 우려해서였다.[22]

가브릴로 프린치프


조피아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왕족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가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와의 결혼은 귀천 결혼이었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는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손이 황위를 계승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승인했다. 시찰이 예정된 6월 28일은 두 사람의 14번째 결혼 기념일이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연방화 구상 지지자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슬라브 지역에서 세 번째 왕국을 형성하여 제국을 개편하는 것에 찬성한다고 여겨졌다.[24] 슬라브계 민족에 의한 세 번째 왕국은 세르비아 민족 통일주의에 대한 방파제가 될 수 있었고, 세르비아 민족 통일주의자들은 대공을 위협으로 인식했다.[25]

사라예보 사건의 암살 주체와 책임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 '''흑수단의 역할''':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고하라.
  • '''세르비아 정부의 책임''':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고하라.

5. 1. 흑수단의 역할

Црна рука|츠르나 루카sr(검은 손)는 1911년 5월 9일 세르비아 왕국 육군 장교들이 결성한 비밀 결사 조직이다.[9] 1903년 5월 세르비아 왕실 부부를 암살한 조직에서 유래했으며,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 대령(통칭 "아피스")이 이끌었다.[9]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가 마케도니아에서 불가리아를 제압한 후, 흑수단은 여러 문제로 쇠퇴했다.[10] 1914년까지 흑수단은 자체 헌법에 따라 활동하지 않았고, 세르비아 군사정보국장 아피스의 지휘 아래 운영되었으며, 활동적인 구성원은 대부분 아피스에게 충성하는 세르비아 장교들이었다.[10]

아피스가 "참모총장 정보부장으로서" 암살을 지시했다고 자백한 점,[11] 군 지휘 계통이 동원되었다는 점, 흑수단의 쇠퇴, 그리고 흑수단 헌법 제16조에 따라 그러한 암살은 최고위원회 이사회 등의 투표에 의해서만 명령될 수 있는데 그러한 명령이 없었다는 점[10]은 세르비아 군사정보국에 책임이 있음을 시사한다.

반면, 밀란 치가노비치가 연루되었다는 점, 관련 주요 장교들이 흑수단 회원이었다는 점,[12][13]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흑수단 지방 책임자 블라디미르 가치노비치가 자문에 참여했다는 점,[14] 그리고 작전에 대한 공식 예산이 없었다는 점은 흑수단에 책임이 있음을 시사한다.

재판에서 베오그라드 출신 세 명의 암살자들은 모든 책임을 자신들에게 돌리려 했다. 네델코 차브리노비치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 계획이 3월 말 우편으로 받은 신문 기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15]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법정에서 이미 독일 신문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방문 계획을 읽었다고 설명했다.[16] 트리프코 그라베즈는 부활절 무렵 자신과 프린치프가 오스카르 포티오렉 총독이나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하기로 합의했고, 조금 후 프란츠 페르디난트로 결정했다고 증언했다.[17]

그러나 3월 26일 다닐로 일리치와 무하메드 메흐메드바시치는 이미 베오그라드에서 신문 기사와 베오그라드의 세 암살자들 사이의 논의 이전에 내려진 지시에 따라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죽이기로 합의했다.[18]

5. 2. 세르비아 정부의 책임

세르비아 정부의 암살 관여 여부는 현재까지도 논쟁의 대상이다. 암살 직후,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암살 계획을 경고했다는 주장을 펼쳤다.[26] 그러나 곧 세르비아는 경고 사실 자체를 부인하며, 암살 계획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26]

세르비아 총리 니콜라 파시치는 암살 계획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경고하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26] 1914년 6월 18일, 파시치 총리는 빈 주재 세르비아 대사 요반 요바노비치 피종에게 암살 계획을 경고하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26] 이에 따라 요바노비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재무장관 레온 빌린스키를 만나 경고했다.[26]

그러나 세르비아 정부의 경고는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하고 모호했다는 비판을 받는다.[26] 빈 주재 세르비아 군사 무관(Attaché) 레샨닌 대령에 따르면, 요바노비치 대사는 빌린스키에게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격앙된 여론으로 인해 황태자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점을 일반적인 용어로 강조했다"고 한다.[26] 요바노비치는 빌린스키와의 회담 후 레샨닌에게 "...빌린스키는 메시지 전체에 큰 중요성을 두지 않고, 작별 인사와 감사를 표하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시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고 전했다.[26]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재무장관은 요바노비치의 경고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26]

1924년, 요바노비치는 자신의 경고가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으며, "세르비아 청년들(군대 내) 중에 공포탄 대신 실탄을 소총이나 권총에 장전하여 발사할 수도 있고, 그 총알이 도발하는 사람(프란츠 페르디난트)을 맞힐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고 공개적으로 진술했다.[26] 그러나 요바노비치의 진술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었고, 레샨닌 대령의 진술과도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된다.[26]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세르비아의 책임을 경시하고, 한국과 유사한 피해자적 측면을 강조한다.

5. 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책임

1878년 베를린 조약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보스니아 주를 점령하고 통치할 권한을 얻었으나, 명목상 주권은 오스만 제국에 남아있었다. 같은 조약으로 세르비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주권 국가로 독립하였다. 1882년 밀란 오브레노비치 4세가 세르비아 왕 밀란 1세로 즉위하여 세르비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세르비아의 오브레노비치 왕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베를린 조약에 의해 정해진 영토를 통치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5]

1903년 5월,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군 장교들이 세르비아 왕궁을 습격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세르비아 왕 알렉산다르 1세와 왕비 드라가는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 이후 왕과 왕비의 시신은 잔혹하게 훼손되었다고 전해진다.[6] 습격자들은 두 사람의 시체를 궁전 창문에서 던져 버리고 왕에게 충실한 세력이 반격할 가능성을 없앴다.[7] 습격을 계획한 자들은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페타르 1세를 새로운 세르비아 왕으로 즉위시켰다.[8]

새로운 왕조는 이전보다 더 민족주의적이고 친러적이었으며, 세르비아 왕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9] 1906년에는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사이에 관세 전쟁("돼지 전쟁")이 발생했다.[10]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인 인구가 많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한다고 선포하자, 세르비아 정부와 국민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며 오스트리아에 대한 감정을 극도로 악화시켰다.[11]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 왕국을 포함한 발칸 동맹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고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의 옛 지배 지역을 획득했다.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에서는 그 지역의 영유권을 놓고 이전 동맹국인 불가리아 왕국과 싸워 승리하였고, 세르비아는 코소보와 북마케도니아의 영유권을 확보했다.[12] 세르비아의 군사적 성공과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에 대한 분노는 "대세르비아" 실현을 목표로 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을 고무시켰다.[13]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이 오스트리아의 병합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반오스트리아적·대세르비아주의적인 혁명 운동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었다.[14]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의 민족주의적 감정은 세르비아 본국의 "문화적" 단체에 의해 선동되었다.[15] 그 영향으로 베오그라드로 이주한 젊은이들 중에는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있었다.[16]

1914년까지 5년 동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크로아티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관리들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실패했다.[17] 1910년 6월 3일, 당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총독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8] 암살 미수범은 총독에게 5발의 총알을 발사한 후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했고, 이 행위는 가브릴로 프린치프 등에게 영감을 주었다.[19]

1913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1914년 6월 보스니아 군사 훈련 시찰을 명령했다.[20] 대공과 그의 아내 조피아는 훈련 후 사라예보를 방문하여 국립 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할 계획이었다.[21] 대공 부부의 장남 막시밀리안 호엔베르크에 따르면, 조피아가 동행한 것은 남편의 안전을 우려해서였다.[22]

조피아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왕족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가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와의 결혼은 귀천 결혼이었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는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손이 황위를 계승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승인했다. 시찰이 예정된 6월 28일은 두 사람의 14번째 결혼 기념일이었다. 역사가 A. J. P. 테일러는 조피아의 처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연방화 구상 지지자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슬라브 지역에서 세 번째 왕국을 형성하여 제국을 개편하는 것에 찬성한다고 여겨졌다.[24] 슬라브계 민족에 의한 세 번째 왕국은 세르비아 민족 통일주의에 대한 방파제가 될 수 있었고, 세르비아 민족 통일주의자들은 대공을 위협으로 인식했다.[25]

6. 현대적 평가와 역사적 의의

유고슬라비아 해체 이후,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대한 평가는 여러 국가에서 다시 이루어졌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들이 프린치프를 테러리스트이자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로 여기는 경향이 강한 반면, 많은 세르비아인들은 그를 민족 영웅으로 간주한다.[13][16]

사라예보 사건은 단순한 암살 사건을 넘어,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충돌했을 때의 파괴적인 결과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조피가 세르비아 민족주의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하면서, 유럽은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유럽 열강들이 발칸 반도에서 벌이던 제국주의적 경쟁과, 오스만 제국의 쇠퇴 이후 발칸 지역에서 고조되던 민족주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은 세르비아인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이는 대세르비아주의를 내세운 흑수단과 같은 비밀결사의 활동으로 이어졌다.[26]

사라예보 사건은 외교적 해결 노력의 중요성과 국제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강대국들의 복잡한 동맹 관계와 군사적 긴장 속에서, 암살 사건은 순식간에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국제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지 못했을 때의 비극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또한,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한국을 포함한 피식민지 국가들에게 민족주의 운동과 독립 투쟁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안겨주었다. 3·1 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은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대한 희망을 갖게 했지만, 동시에 열강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좌절되기도 했다. 사라예보 사건은 민족주의가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극단적인 형태로 발현될 경우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는 사라예보 사건과 프린치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6. 1. 다양한 시각

유고슬라비아 해체 이후, 프린치프에 대한 평가는 여러 국가에서 다시 이루어졌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들이 가브릴로 프린치프를 테러리스트이자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13][16] 반면, 많은 세르비아인들은 그를 민족 영웅으로 간주한다.[13][16]

암살 100주년 기념식으로 빈 필하모닉의 콘서트가 사라예보 시청에서 열렸는데, 이 행사는 유럽 연합이 주최했다.[16] 오스트리아 대통령 하인츠 피셔가 명예 손님으로 참석했다.[14] 제1차 세계 대전 기념식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과 고위 인사들이 보이콧했는데, 그들은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과 함께 "프린치프를 영웅으로" 여겼다.[15]

암살 100주년을 맞아 동사라예보에 프린치프 동상이 세워졌다.[16] 이어 2015년 6월 베오그라드에도 또 다른 동상이 세워졌다.[17] 세르비아 역사 교과서는 세르비아나 프린치프가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데 책임이 없다고 부인하며,[13] 대신 중앙 열강에게 책임을 돌린다.[18] 밀로라드 도딕은 보스니아가 "여전히 분열되어 있다"고 인정했지만, 프린치프는 "자유 투사"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점령국"이었다고 주장했다.[19]

보스니아크-크로아트 뉴스 기관의 편집장 페자드 포르토는 프린치프가 보스니아를 해방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점령국이었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 그의 행동의 결과는 보스니아에 매우 나빴습니다. 보스니아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보스니아 무슬림들은 1968년까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오스트리아-헝가리)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이나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보다 훨씬 더 나은 통치자였습니다.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법치와 같은 문제를 어떻게 신경 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1918년에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밀로라드 도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100년 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발사한 총알은 유럽을 향해 발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유를 위한 총알이었으며, 외국 점령자로부터 해방을 위한 세르비아인들의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프란츠 페르디난드 암살을 언급하며 바소 추브릴로비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전쟁으로 인해 영원히 사라진 아름다운 세상을 파괴했습니다."

6. 2. 역사적 교훈

사라예보 사건은 단순한 암살 사건을 넘어,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충돌했을 때의 파괴적인 결과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조피가 세르비아 민족주의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하면서, 유럽은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유럽 열강들이 발칸 반도에서 벌이던 제국주의적 경쟁과, 오스만 제국의 쇠퇴 이후 발칸 지역에서 고조되던 민족주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특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은 세르비아인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이는 대세르비아주의를 내세운 흑수단과 같은 비밀결사의 활동으로 이어졌다.[26]

사라예보 사건은 외교적 해결 노력의 중요성과 국제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강대국들의 복잡한 동맹 관계와 군사적 긴장 속에서, 암살 사건은 순식간에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국제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지 못했을 때의 비극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또한,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한국을 포함한 피식민지 국가들에게 민족주의 운동과 독립 투쟁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안겨주었다. 3·1 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은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대한 희망을 갖게 했지만, 동시에 열강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좌절되기도 했다. 사라예보 사건은 민족주의가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극단적인 형태로 발현될 경우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는 사라예보 사건과 프린치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은 프린치프를 테러리스트로 보는 반면, 많은 세르비아인들은 그를 민족 영웅으로 여긴다.[40][43] 이러한 역사 인식의 차이는 여전히 발칸 반도에 남아있는 갈등의 불씨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7. 관련 인물



세르비아 군사 정보부는 흑수단(Crna Ruka)의 잔당을 통해 나로드나 오브라나에 침투하여 비밀 터널을 이용해 암살자들과 무기를 베오그라드에서 사라예보로 밀반입했다.

참조

[1] 잡지 The FN Browning 1910 Pistol & The Great War National Rifle Association of America 2014-09-01
[2] 뉴스 Tästä alkaa maailmansota 2014-06-01
[3] 잡지 Milestones: Aug. 9, 1926 http://content.time.[...] 1926-08-09
[4] 웹사이트 The Origin of the Tale that Gavrilo Princip Was Eating a Sandwich When He Assassinated Franz Ferdinand https://www.smithson[...] 2011-09-15
[5] 뉴스 The Funeral of the Archduke https://archive.org/[...] 1914-07-13
[6] 간행물 Documents Diplomatiques Francais III Serie 1911–14,3
[7] 서적 Reports Service: Southeast Europe series https://books.google[...] American Universities Field Staff.
[8] 서적 Istoriski časopis https://books.google[...]
[9] 간행물 Documents Diplomatiques Francais III Serie 1911–14,3
[10] 뉴스 Austria Will Avenge Murder http://newspaperarch[...] 1914-06-29
[11] 잡지 The Forces Behind the Conflict https://archive.org/[...] 1914-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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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웹사이트 Remembering World War I in the Conflict's Flash Point https://www.nytimes.[...] 2014-06-29
[16] 웹사이트 Gavrilo Princip: Bosnian Serbs remember an assassin https://www.bbc.com/[...] 2014-06-28
[17] 웹사이트 Serbia: Belgrade's monument to Franz Ferdinand assassin https://www.bbc.com/[...] 2015-06-08
[18] 웹사이트 Serbia, WWI, and the question of guilt http://www.dw.com/en[...] 2014-07-28
[19] 웹사이트 WWI centennial event without Serbs http://www.dw.com/en[...] 2014-06-28
[20] 잡지 Show Business: The Road http://content.time.[...] 1960-11-14
[21] 웹사이트 Reconstruction of Medallions of Sarajevo Monument of Ferdinand and Sophie in Final Phase http://www.sarajevot[...] 2014-04-08
[22] 웹사이트 Franz Ferdinand's three deaths http://riowang.blogs[...]
[23] 웹사이트 Zlatko Topčić: Odlomak iz romana '28. 6. 1914.' http://penbih.ba/201[...] penbih.ba 2019-08-31
[24] 서적 日本人のための第一次世界大戦史 世界はなぜ戦争に突入したのか 毎日新聞出版
[25] 뉴스 「20世紀はここで始まった」 サラエボ事件の意味を解き明かす会議を開催した教授に聞く(小林恭子) https://news.yahoo.c[...] 2014-07-05
[26] 서적 Disequilibrium, Polarization, and Crisis Model: An International Relations Theory Explaining Conflict https://books.google[...] University Press of America 2013-05-16
[27] 서적 The Assassination of the Archduke
[28] 뉴스 Tästä alkaa maailmansota 2014-06-01
[29] 서적 Collision of Empires
[30] 웹사이트 Full text of "Sarajevo The Story of a Political Murder" https://archive.org/[...] Archiv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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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간행물 Documents Diplomatiques Francais III Serie 1911–14,3
[33] 서적 Reports Service: Southeast Europe series https://books.google[...] American Universities Field Staff.
[34] 서적 Sarajevo https://books.google[...] Tourist Association
[35] 서적 Istoriski časopis https://books.google[...]
[36] 서적 Documents Diplomatiques Francais III Serie 1911–14,3 X Doc.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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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뉴스 テロリストか英雄か サラエボ事件100年で暗殺者の銅像 https://www.cnn.co.j[...] 2014-06-30
[50] 뉴스 「サラエボ事件」あす100年 セルビア、オーストリア 歴史認識で対立 http://www.tokyo-np.[...] 2014-06-27
[51] 웹사이트 サライェヴォ事件とヒトラー誕生日 http://chikyuza.net/[...] ちきゅう座 2013-11-12
[52] 서적 전쟁과 제국주의 https://books.google[...] 신일본출판사 1999-10
[53] 서적 이야기 세계사 2 청아출판사 2002
[54] 서적 쿠오 바디스 역사는 어디로 가는가 1 푸른숲 2002
[55] 서적
[56] 서적 나만 모르는 유럽사 모멘토 2004
[57] 서적 석양 녘의 왈츠 - 제국의 붕괴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Thunder at Twilight: Vienna 1913/1914) 주영사 2009-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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