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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 안드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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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보 안드리치(1892–1975)는 유고슬라비아의 소설가, 시인, 외교관으로, 1961년 "자국 역사의 주제와 운명을 서술할 수 있었던 그의 서사시적 역량"을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보스니아 트라브니크에서 태어나 비셰그라드에서 성장했으며, 작품의 배경은 주로 보스니아로, 다양한 민족과 종교, 문화적 갈등을 다루었다. 안드리치는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여러 유럽 도시에서 근무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베오그라드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대표작인 『드리나 강의 다리』, 『트라브니크 연대기』 등을 집필했다. 그의 작품은 한국에도 번역, 소개되어 보스니아의 역사와 인간의 보편적인 삶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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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 안드리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안드리치의 정면 모습 (안경 착용)
1961년의 안드리치
본명이반 안드리치
출생1892년 10월 9일
출생지돌라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 통치령,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망1975년 3월 13일 (82세)
사망지베오그라드, SR 세르비아, SFR 유고슬라비아
묻힌 곳베오그라드 신 묘지
국적유고슬라비아
모국어세르보크로아티아어
민족크로아티아인
배우자밀리차 바비치 (1958년 결혼, 1968년 사별)
서명
웹사이트ivoandric.org.rs
직업
직업작가
외교관
정치인
활동 기간1911년–1974년
학력
모교자그레브 대학교
빈 대학교
야기엘론스키 대학교
그라츠 대학교
대표 작품
대표작드리나 강의 다리 (1945년)
(그 외 다른 작품들)
수상
수상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 오피시에 (1937년)
독일 독수리 훈장 (1939년)
노벨 문학상 (1961년)
사회주의 노동 영웅 훈장 (1972년)

2. 생애

이보 안드리치는 1892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점령 하의 보스니아 트라브니크에서 크로아티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반'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나, '이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두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는 비셰그라드의 고모에게 그를 맡겼다. 안드리치는 고모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지만, 불안과 고독을 느꼈다고 한다.

사라예보의 벨리카 김나지야에 진학 후, 이웃에 살던 예브게니야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정서적 안정을 찾았다. 청년 보스니아에 가입하여 남슬라브 독립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의 보스니아 해방을 위해 투쟁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정치적 입장 때문에 오스트리아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전쟁 이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에서 공무원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종교부와 외교부에서 근무하며, 바티칸, 부쿠레슈티, 트리에스트, 그라츠, 마르세유, 파리, 마드리드 등에서 근무했다.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제네바국제연맹 유고슬라비아 왕국 대표위원단으로 활동했고, 1939년부터 1941년까지 베를린 주재 유고슬라비아 왕국 특명대사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상부와의 의견 불일치로 퇴직, 베오그라드로 돌아와 은거하며 '보스니아 3부작'(『드리나의 다리』, 『트라브니크 연대기』, 『사라예보의 아가씨』)을 집필했다.

전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 입당, 유고슬라비아 작가 연맹 위원장을 역임하고 노비사드 조약에 서명했다. 196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1968년 아내 사망 후 점차 정치에서 멀어졌다. 1975년 베오그라드에서 사망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892년 10월 9일, 이보 안드리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던 보스니아의 작은 마을 트라브니크 근교 돌라츠에서 크로아티아계 가톨릭 신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2] 본명은 '이반'이었으나, '이보'라는 애칭으로 더 자주 불렸다. 두 살 무렵, 은세공인이었던 아버지 안툰이 결핵으로 사망하자,[2] 어머니 카타리나는 생계를 위해 아들 이반을 비셰그라드에 있는 고모 아나와 경찰관인 매형 이반 마트코비치에게 맡겼다.[2] 안드리치는 고모부부 밑에서 엄격한 교육과 자상한 보살핌을 받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불안과 고독을 느꼈다고 한다.

안드리치가 태어난 트라브니크의 집


안드리치는 1878년 베를린 회의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된 보스니아에서 성장했다.[2] 그는 드리나 강변의 작은 도시 비셰그라드를 "나의 진정한 고향"이라 부르며 소중히 여겼고,[2] 어린 시절부터 지역 주민들의 관습을 면밀히 관찰하며 성장했다.

안드리치가 자란 비셰그라드의 집


여섯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안드리치는 이 시기를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들로 회고했다. 열 살에는 크로아티아 문화 단체인 ''나프레다크''(진보)로부터 3년 장학금을 받아 사라예보로 유학을 떠났다. 1902년 가을, 보스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중등학교인 사라예보 대학교 ()에 등록했다.[2]

사라예보에서 안드리치는 카페트 공장에서 일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이웃에 살던 예브게니야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정서적 안정을 찾았다. 학창 시절, 두로 수르민과 투고미르 알라우포비치 등 크로아티아 출신 강사들의 영향으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특히 라틴어, 그리스어, 독일어 등 언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노벨상 수상자인 블라디미르 프레로그와 이보 안드리치에게 헌정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과학 예술원의 기념패

2. 2. 청년 보스니아 운동과 투옥

사라예보에서 공부하는 동안 안드리치는 남슬라브족의 독립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혁명단체 '청년 보스니아'에 가담했다.[2] 그는 청년 보스니아 운동의 가장 저명한 회원 중 한 명이었다. 1911년 말, 안드리치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진보 운동(SHNO)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SHNO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청년 간의 단결과 우정을 증진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점령에 반대하는 사라예보에 본부를 둔 비밀 단체였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 이후, 안드리치는 '반국가 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3년간 투옥되었다.[2]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다.[2]

2. 3. 외교관 경력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성립된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칭)에서 공무원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종교부에서, 이후에는 외교부에서 근무했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독일 베를린 주재 유고슬라비아 왕국 특명대사였다.[2]

이보 안드리치는 외교관으로 크게 성공했다. 1920년 바티칸 대사관에서 일했고, 그 후에는 부쿠레슈티, 트리에스트, 그라츠 영사관에서 일했다. 1927년에는 마르세유, 파리, 마드리드 영사관에서 일했다.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제네바에 위치한 국제연맹 유고슬라비아 왕국 대표위원단으로 활동했다.[2]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후 상부와의 의견 불일치로 퇴직하고 베오그라드로 돌아왔다.[2]

2. 4. 제2차 세계 대전과 은둔 생활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주독 공사로 베를린에 체류했다.[2] 유고슬라비아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고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종결까지 베오그라드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이 기간 동안,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비셰그라드 마을을 무대로 한 『드리나의 다리』(Na Drini ćuprija|나 드리니 추프리야sh), 프랑스 근무 시대에 열람한 외교 사료에서 착상을 얻은 『Травничка хроника|트라브니크 연대기|de|Travnička hronika|보스니아 이야기sr』(Travnička hronika|트라브니치카 흐로니카sh), 『Das Fräulein (Roman)|사라예보의 아가씨de』(Gospođica|고스포지차sh)를 집필했다고 전해지며, '보스니아 3부작(Bosnian trilogy)'이라고 불린다.[2]

2. 5. 전후 활동과 노벨 문학상 수상

1954년 이보 안드리치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 입당했고 유고슬라비아 작가 연맹 위원장을 역임했다. 같은 해, 세르보크로아티아 문어 통일에 관한 노비사드 조약에 서명했다.[2] 1961년 "자국 역사의 주제와 운명을 서술할 수 있었던 그의 서사시적 역량"을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2] 1968년 아내의 죽음 이후 점차 정치에서 멀어졌다. 1975년 베오그라드에서 사망했다.

3. 작품 세계

이보 안드리치는 1911년 사라예보의 월간 문학지 <<보스니아의 요정>>에 처녀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18년 산문시집 《흑해로부터》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고, 1920년에는 시집 《불안》을 출간했지만 이후 시는 더 이상 쓰지 않았다. 같은 해 단편 <알리야 제르젤레즈의 여행>을 발표했다.

안드리치의 대표작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에 결정적 역할을 한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는 보스니아세르비아 접경 지역의 도시 비셰그라드와 드리나 강 위의 다리를 중심으로 400여 년의 역사를 다룬다. 그는 이 외에도 《트라브니크 연대기》, 《아가씨》, 중편 《저주받은 안뜰》, 《몸통》, 《올루야크 마을》, 《물레방아》, 《삼사라 여인숙에서의 웃음》, 《현지처 마라》, 《제파 강의 다리》 등 100편이 넘는 작품을 집필했다. 구(舊) 유고연방 대통령 요시프 브로즈 티토로부터 국민 훈장을 받기도 했다.

안드리치는 학업과 외교관 생활을 위해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등지를 다녔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늘 보스니아가 있었다.[2] 1924년에는 <터키 지배의 영향하에서 보스니아 정신생활의 발전>이라는 논문으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안드리치는 그라츠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점령을 보스니아에 드리워진 억압으로 묘사했다. 그는 "터키 지배의 영향은 절대적으로 부정적이었다"라고 썼으며, "터키는 남 슬라브 무슬림에게조차 어떤 문화적 내용이나 더 높은 사명을 가져다줄 수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1923년, 안드리치는 모든 공무원이 박사 학위를 받아야 한다는 법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친구들의 도움과 외무부 결정으로 박사 학위를 받을 기회를 얻었다. 1924년 7월, 그라츠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심사 위원회는 그의 논문을 출판할 것을 권고했다.

박사 학위 취득 후, 안드리치는 외무 장관에게 복직을 요청했고, 1924년 9월에 받아들여졌다. 1926년 10월, 마르세유 영사관으로 배치되었고, 12월에는 파리 주재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전근되었다. 프랑스에서 그는 고독과 고립감을 느꼈으며, 파리 기록 보관소에서 트라브니크 주재 프랑스 영사관 보고서를 살펴보며 훗날 소설 《트라브니크 연대기》의 자료로 활용했다.

1928년, 안드리치는 마드리드 부영사로 부임하여 《저주받은 마당》 작업을 시작했고, 1929년에는 브뤼셀의 유고슬라비아 공사관 비서, 1930년에는 제네바의 국제 연맹 파견 유고슬라비아 상임 대표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 베오그라드로 돌아왔고, 1937년에는 밀란 스토야디노비치 총리의 보좌관이 되었으며, 같은 해 프랑스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3. 1. 보스니아에 대한 깊은 애정

안드리치의 작품 대부분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보스니아를 배경으로 한다. 트라브니크, 비셰그라드, 사라예보 등 보스니아의 여러 지역을 자신의 작품 세계의 중요한 키워드로 삼았다.[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점령 하의 보스니아 트라브니크 근교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은 드리나 강에 면한 비셰그라드에서 보냈다.[2]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는 보스니아의 역사, 가치관, 문화를 작품에 담아냈으며, 터키 지배 하의 보스니아 정신생활 발전에 대한 논문으로 그라츠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3. 2. 역사적 통찰과 인간 운명 탐구

안드리치는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등 격동적인 역사를 겪은 보스니아의 현실을 작품에 반영했다. 특히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는 비셰그라드 다리를 중심으로 400년에 걸친 보스니아의 역사를 서술하며, 제국의 흥망성쇠와 인간의 운명을 깊이 있게 묘사했다.[2]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의 삶과 운명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인간의 보편적인 고통과 희망을 탐구했다.

3. 3. 다양한 문학적 영향

안드리치는 학창 시절 두로 수르민과 투고미르 알라우포비치 같은 크로아티아 출신 강사들의 영향으로 문학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특히 알라우포비치를 가장 좋아하여 평생 친구가 되었다.

그는 중등학교 시절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1911년 세르보-크로아트의 통합을 촉진하는 ''보산스카 빌라''(보스니아 요정)라는 저널에 처음 두 편의 시를 발표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전에는 ''비호르''(소용돌이), ''사브레메니크''(현대), ''흐르바츠키 포크레트''(크로아티아 운동), ''크니제브네 노비네''(문학 뉴스)와 같은 저널에 시, 에세이, 리뷰 및 번역을 게재했다. 안드리치가 선호한 문학 형식 중 하나는 서정적 성찰 산문이었으며, 그의 많은 에세이와 짧은 작품은 산문시였다. 이 시기 안드리치의 시는 주로 우울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으며,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월트 휘트먼 등 여러 작가들의 번역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3. 4. 주요 작품

Na Drini ćuprija|드리나 강의 다리sh, Travnička hronika|트라브니크 연대기sh, Gospođica|아가씨sh는 보스니아 3부작으로 불리는 이보 안드리치의 대표작이다. Na Drini ćuprija|드리나 강의 다리sh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접경의 작은 도시 비셰그라드를 가로지르는 드리나 강 위의 다리를 중심으로 400여 년의 인간사를 다룬 소설로, 안드리치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외에도 중편 Prokleta avlija|저주받은 안뜰sh, Trup|몸통sh, U Olujacima|올루야크 마을sh, Vodenica|물레방아sh, Smijeh u SamSari|삼사라 여인숙에서의 웃음sh, Mara milosnica|현지처 마라sh, Most na Žepi|제파 강의 다리sh 외 100편이 넘는 작품을 집필했다.

다음은 이보 안드리치의 주요 작품 목록이다.

} ||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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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년 || Pripovetke|sh ||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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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 Pripovetke II|sh ||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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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 Na Drini ćuprija|드리나 강의 다리sh || 장편 소설, 보스니아 3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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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 Travnička hronika|트라브니크 연대기sh || 장편 소설, 보스니아 3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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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 Gospođica|아가씨sh || 장편 소설, 보스니아 3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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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 Izabrane pripovetke|sh ||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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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 Most na Žepi: Pripovetke|제파 강의 다리sh ||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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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 Pripovijetke|sh ||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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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 Nove pripovetke|sh ||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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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 Priča o vezirovom slonu|재상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sh ||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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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 Priča o kmetu Simanu|sh || 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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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 || Pod gradićem: Pripovetke o životu bosanskog sela|sh ||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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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 Prokleta avlija|악마의 뜰 (프로클레타 아블리야)sh || 중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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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 Panorama|sh ||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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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 Priča o vezirovom slonu, i druge pripovetke|sh ||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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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 Ljubav u kasabi: Pripovetke|sh ||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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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 Aska i vuk: Pripovetke|sh ||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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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 Eseji i kritike|에세이와 비평sh || 에세이, 사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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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 Pisma (1912–1973): Privatna prepiska|편지 (1912–1973): 개인 서신sh || 개인 서신, 사후 출판

|}

4. 한국의 이보 안드리치 수용과 연구

이보 안드리치의 작품은 1960년대부터 한국에 번역, 소개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드리나 강의 다리》[3], 《저주받은 안뜰》 등 대표작을 중심으로 번역되었으며, 이후 다양한 단편집과 에세이가 출간되었다. 한국 독자들은 안드리치의 작품을 통해 보스니아의 역사와 문화를 접하고, 인간의 보편적인 삶과 운명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안드리치의 문학 세계에 대한 연구는 주로 그의 작품에 나타난 역사 인식, 민족주의, 종교 갈등, 인간 실존의 문제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5. 저서 목록


  • 보스니아 종교문화사
  • 드리나 강의 다리
  • 저주받은 뜨락
  • 단편 선집
  • * 아스카와 늑대
  • * 제파 강의 다리 외
  • * 이보 안드리치 단편집
  • 『드리나 강가의 다리』 (마쓰야 겐지 역, 현대 동유럽 문학 전집 고분샤 1966년)
  • 『드리나 강가의 다리』 (다나카 잇세이 역, 대학서림 1985년, 요약판)[3]
  • 『저주받은 뜰』 (구도 사치오 역, 세계 문학 전집 슈에이샤 1967년)
  • 『저주받은 뜰, 몸통, 둘러싸인 자, 마라, 오르야치 마을』 (구리하라 시게오 역, 노벨 문학상 전집 13 주부의 벗사 1972년)
  • 『저주받은 뜰』 (구리하라 시게오 역, 고분샤 1983년)
  • 『보스니아 이야기』 (오카자키 요시히로 역, 동유럽의 문학, 고분샤 1972년)
  • 『고야와의 대화』 (다나카 잇세이 역, 고분샤 1976년)
  • 『아스카의 죽음의 무도』 (이와부치 다쓰지 역, 세계 동물 문학 전집 3 고단샤 1979년)
  • 『사라예보의 여인』 (다나카 잇세이 역, 고분샤 1982년)
  • 『사라예보의 종』 단편집 (다나카 잇세이·야마자키 히로시 공역, 고분샤 1997년)
  • 『재상의 코끼리 이야기』 (구리하라 시게오 역, 동유럽의 상상력·쇼라이샤 2018년)
  • 『옐레나, 없는 여자 외 13편』 (다나카 잇세이·야마자키 히로시·야마자키 가요코 역, 겐기 서방〈루리유르 총서〉 2020년)

참조

[1] 웹사이트 Andrić Prize https://www.ivoandri[...] 2024-09-04
[2] 서적 ドリナの橋 https://dl.ndl.go.jp[...] 恒文社
[3] 간행물 セルビア語・クロアチア語・マケドニア語・スロベニア語対照テキスト付 https://iss.ndl.go.j[...] 国立国会図書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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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연도제목비고
1918년Ex Ponto|엑스 폰토sh산문시집
1920년Nemiri|불안sh시집
1920년Put Alije Đerzeleza|알리야 제르젤레즈의 여행sh단편
1924년{{lang|sh|Pripovetke 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