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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히토시 (유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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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토 히토시는 일본의 유도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유도 헤비급 2연패를 달성하며 일본 유도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현역 시절 야마시타 야스히로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으며, 은퇴 후에는 고쿠시칸 대학과 전일본 유도 연맹에서 지도자로서 활동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2015년 담관암으로 사망했으며, 2018년 국제 유도 연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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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히토시 (유도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88년 하계 올림픽 당시의 사이토
1988년
출생일1961년 1월 2일
출생지아오모리현 아오모리시
사망일2015년 1월 20일 (54세)
사망지오사카부 히가시오사카시
신장180cm
체중143kg
애칭해당사항 없음
선수 정보
국적일본
종목유도
체급95kg 초과급, 무차별급
9단
소속해당사항 없음
코치해당사항 없음
은퇴1989년
올림픽 메달
1984 로스앤젤레스+95 kg 금메달
1988 서울+95 kg 금메달
세계 선수권 대회 메달
1983 모스크바무차별급 금메달
1985 서울+95 kg 은메달
아시안 게임 메달
1986 서울+95 kg 금메달
아시아 유도 선수권 대회 메달
1981 자카르타+95 kg 금메달
1984 쿠웨이트+95 kg 금메달
기타 정보
로마자 표기Saitō Hitoshi

2. 선수 경력

아오모리현 아오모리시 출신으로 중학교 때 유도를 시작하여 도쿄 세타가야구에 있는 고쿠시칸 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고쿠시칸 고등학교에서 계속 유도를 연습하고, 고교 유도 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하였다. 1979년 고쿠시칸 대학에 입학하여 전일본 유도 선수권 대회, 가노 지고로 컵, 전일본 대학 유도 선수권 대회의 결승에서 야마시타 야스히로와 총 7번 대결했으나 모두 패했다. 하지만 다른 경기에서는 여러 차례 무승부를 기록했다.

1983년 고쿠시칸 대학 졸업 후 1983년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 무제한급에서 우승했고, 1984년 하계 올림픽에서 95kg 이상급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1985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린 1985년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조용철과 맞붙었는데, 조용철의 제자리 팔조르기에 팔이 탈구되어 기권, 은메달을 획득했다.[2] 1987년 전국 선수권 대회에서 오른쪽 무릎 부상을 당했으나, 이듬해 대회에 돌아와 우승하여 두 번째 올림픽 출전 기회를 얻었다.

1988년 1988년 하계 올림픽 준결승에서 조용철과 다시 맞붙어 판정승으로 이기고, 결승전에서 동독의 헨리 슈퇴어를 꺾고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하였다.[2]

은퇴 후 고쿠시칸 대학과 전 일본 유도 연맹의 강사가 되었다. 2004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코치를 맡았다. 유도 7단을 보유했으며, 야마시타와 가까운 우정을 유지했다.

2. 1.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1961년 아오모리현 아오모리시에서 태어나[35] 1967년 시립 쓰쓰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몸집이 커서 스모를 했고, 동급생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다.[10] TBS 드라마 유도 일직선을 보고 유도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아버지에게 유도를 하겠다고 맹세하고 유도복을 사서 훈련을 시작했다.[11]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뮌헨으로의 길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올림픽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13]

1973년 시립 쓰쓰이 중학교에 입학하여 유도부에 들어갔다.[35] 스모와 유도를 병행하며 훈련했지만, 중학교 3학년 때 고문 교사가 전근을 가면서 유도부가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 다른 교사에게 고문을 부탁하여 유도부를 유지하게 되었고, 나쓰이 쇼키치의 저서 『유도 입문』을 교재 삼아 훈련했다.[10] 그 결과, 3학년 때 아오모리현 중학교 체육대회 하계 대회 헤비급에서 우승했다.

1974년 도쿄도 세타가야구에 있는 고쿠시칸 중학교로 스카우트되었다. 고쿠시칸 고등학교에서도 계속 유도를 하였고, 2학년 때 인터하이 유도 단체전에서 우승했다. 1979년 고쿠시칸 대학에 입학하여 전일본 유도 선수권 대회, 가노 지고로 컵, 전일본 대학 유도 선수권 대회의 결승에서 총 7번 야마시타 야스히로와 대결했다.

2. 2. 고쿠시칸 대학 시절

1979년 고쿠시칸 대학 체육학부에 진학하여, 같은 해 10월 전일본 학생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결승까지 진출, 당시 전일본 유도 선수권 대회 3연패 중이던 야마시타 야스히로(도카이 대학 4학년)와 처음 맞붙었다. 비록 구르기 안아 조르기로 눌려 패했지만, 야마시타를 흔드는 등 선전하여 다음날 신문에서 "'''포스트 야마시타'''", "'''야마시타 2세'''" 등으로 불렸다.[2]

대학 시절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전일본 주니어 유도 체급별 선수권 대회 헤비급 3연패를 달성했고, 4학년이던 1982년에는 전일본 학생 유도 체급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학생 유도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전일본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는 야마시타 야스히로와 총 7번 대결했으나 모두 패했다. 하지만 다른 경기에서는 여러 차례 무승부를 기록했다.[2]

시니어 대회인 전일본 선발 유도 체급별 선수권 대회에서 1981년에 우승했고, 전일본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는 1981년, 1982년 연속 출전했으나 각각 엔도 스미오, 마츠이 이사오에게 패했다. 하지만 단체전에서는 고쿠시칸 대학 팀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전일본 학생 유도 우승 대회에서 1981년 준우승, 1982년 3위를 기록하는데 기여했다.

2. 3. 국제 대회에서의 활약

1983년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 무제한급에서 우승했다.[35]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95kg 초과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35] 1985년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대한민국조용철에게 패하며 부상을 입고 은메달을 획득했다. 1988년 하계 올림픽 유도 95kg 초과급 결승전에서 동독의 헨리 슈퇴어를 꺾고 금메달을 획득하여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하였다.[2]

2. 3. 1. 대한민국과의 악연

1985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조용철과 맞붙었는데, 경기 시작 직후 조용철이 시도한 제자리 팔조르기에 의해 왼쪽 팔꿈치가 탈구되는 부상을 입었다.[2][20] 일본 선수단은 조용철의 기술이 반칙이라고 IJF에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8][19]

1988년 서울 올림픽 준결승에서 조용철과 다시 만나 판정승을 거두었다.[2]

3. 지도자 경력

1989년 3월에 현역에서 은퇴했다.[35] 1990년 8월부터 2000년 3월까지 고쿠시칸 대학 유도부 감독을 맡았다. 취임 당시 사이토는 자신의 현역 시절 연습 방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단련시키려 했지만, 뜻과는 달리 고쿠시칸 대학 유도부는 오랫동안 침체기에 빠졌다.[24]

2년 정도 지난 어느 날, 대학 후배인 야마우치 나오토(당시 아사히카세이 소속)로부터 "선배는 너무 훌륭해서 무섭다", "선배가 학생 수준에 맞춰야 한다"는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24] 학생들은 체력, 체격, 성격이 각기 다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식을 강요했기 때문에 학생들이 위축되어 있다는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후 체력별 연습 메뉴를 도입하고, 학생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늘리고, 때로는 함께 술을 마시며 어울리는 등 소통을 위해 노력했다.[24]

이러한 시행착오의 성과는 점차 나타나 1999년에는 학생 단체전에서 3연패를 달성했다. 특히 제자 중 한 명인 스즈키 케이지에게는 새벽 3시까지 맨투맨 지도를 할 정도로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25]

한편, 1992년부터 야마시타 야스히로 감독이 이끄는 전일본 대표팀의 중량급 담당 코치를 2기 8년 동안 맡았으며,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부터 야마시타의 후임으로 감독직을 2기 8년 동안 수행했다. 사이토는 "코치일 때의 분위기와 감독이라는 기둥 위에 섰을 때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중압감"이라고 말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유도 경기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유도 경기에서 남자 일본 대표팀은 전체적으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지만, 제자인 스즈키와 이시이 사토시를 금메달로 이끌었고,[35] 과거 자신이 구축한 중량급 세계 제일의 계보를 지켜냈다.

베이징 올림픽 이후 대표팀 감독을 사임하고 전일본 강화 부위원장이 되었으며, 2012년에는 강화 위원장으로 승격했다.[26] 2007년에는 고도칸의 거울 열기 때 형의 연무를 선보였으며, "올림픽보다 긴장했다"는 코멘트를 남겼다.[35]

4. 사망

2013년에 간내 담관암이 발병하여 이후 투병 생활을 하면서 지도에 임했다.[27] 점점 야위어 가는 모습은 누구의 눈에도 띄었지만, 그럼에도 주변에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 훈련이나 시합에 나오지 못할 때는 위궤양이나 인플루엔자 등이라고 씩씩하게 말했다고 한다.

1년 이상의 투병 생활 끝에, 2015년 1월 20일 2시 56분, 간내 담관암에 따른 암성 흉막염으로, 오사카부 히가시 오사카시 내의 시립 종합병원에서 사망했다.[27][28][29]

2월 17일, 일본국 정부는 사망일에 소급하여 종오위에 서훈하고 욱일소수장을 추증했다. 또한 고도칸에서는 유도계에 대한 공적을 기려 9단위에 서열했다.[30]

사망 전날, 아내는 사이토에게 "오늘은 (아이들) 훈련 쉬게 할까? 아이들과 같이 있을래?"라고 말을 걸었지만, 사이토는 힘을 짜내어 "가라"라고 말했다. 이것이 아이들에게 건 마지막 말이 되었다.[13]

사이토는 생전에 "챔피언은 승자이지만, 챔피언만이 승자는 아니다, 3~4년의 부활동 안에서 자신의 힘을 다하는 노력을 이룬 사람도 또한 승자", "설령 레귤러가 되지 못하더라도, 유도를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수행 방식을 해주길 바란다"라고 저서에서 말했다.[24][31]

3월 15일에 도쿄 프린스 호텔에서 개최한 "작별의 모임"에는 1,300명이 참례했다. 회장에는 사이토의 좌우명이었던 "강개목눌"의 글자가 내걸렸고, 옛 라이벌 야마시타 야스히로 전일본유도연맹 부회장과 제자이자 고쿠시칸대학 감독 스즈키 케이지, 전일본유도연맹 회장 소오카 마사지가 조사를 낭독했다.[32][33]

5. 기타

사이토 히토시는 담관암이라는 희귀하고 빠르게 진행되는 불치병으로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6] 사후 고도칸에서 유도 9단으로 추서되었고, 일본 천황으로부터 욱일장 금선 대수장을 받았다.[7] 2018년 9월에는 국제 유도 연맹(IJF)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34] 2022년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 은메달리스트이자 2022년 전일본 무제한급 챔피언인 사이토 타츠루의 아버지이다.[3][4]

5. 1. 야마시타 야스히로와의 관계

현역 시절 사이토 히토시는 야마시타 야스히로의 최대 라이벌이었다.[2] 전일본 유도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세 번 맞붙었으나 모두 패배했다.[14][15][16][17] 1983년 전일본 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는 경기 종료 직전 사이토의 오오소토가리를 야마시타가 코소토가리로 되받아쳐 깃발 판정에서 야마시타가 승리했다. 1984년 전일본 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도 야마시타의 우세승으로 끝났다. 1985년 전일본 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는 사이토가 안다리 되치기를 시도했으나 야마시타의 업어치기를 헛되이 만들었고, 결국 깃발 판정으로 야마시타가 우세승을 거두며 대회 9연패를 달성했다.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야마시타와 8번 대결하면서 사이토는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17]

사이토는 야마시타에게 이길 수 없어 전일본 선수권에서 우승하지 못한 것에 대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자신은 진정한 세계 제일이 아니라는 앙금이 마음속에 항상 남아 있었다"고 회고했다.[14] 또한 "야마시타 2세"라는 식으로 불리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다.[14]

야마시타가 은퇴한 후에도 둘은 깊은 신뢰 관계를 유지했다.[2] 사이토는 야마시타가 은퇴를 결심한 이유가 자신과의 대결 때문이었다는 말을 듣고 감격하여,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자신은 행복하다"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14]

5. 2. 평가와 영향

사이토 히토시는 불굴의 의지와 뛰어난 실력으로 일본 유도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현역 시절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하며 세계 최정상급 기량을 과시했고,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서 후진 양성에 힘쓰며 일본 유도 발전에 공헌했다.[2] 특히, 라이벌이었던 야마시타 야스히로와의 경쟁은 일본 유도사의 명승부로 회자되고 있다.

5. 3. 대중문화

요시다 센샤의 빅코믹스피리츠 연재 만화 전염되는 겁니다에 등장하는 사람 얼굴을 가진 장수풍뎅이 '사이토 씨'의 모델이다. 같은 잡지에 연재된 우라사와 나오키의 YAWARA!에 등장하는 '사이토' 역시 사이토 히토시를 모델로 한 캐릭터이다.[35]

고바야시 마코토가 영 매거진에서 연재하던 유도부 이야기에는 주인공 은사의 후배인 '엔도 타다시' 역으로 등장한다.[35]

참조

[1] Sports-Reference Hitoshi Saito https://www.sports-r[...]
[2] 웹사이트 Judo at the 1988 Seoul Summer Games: Men's Heavyweight https://web.archive.[...]
[3] 웹사이트 Tatsuru SAITO / IJF.org https://www.ijf.org/[...] 2023-03-27
[4] 웹사이트 Son of Judo Legend Wins All-Japan Championships https://blackbeltmag[...] 2022-05-03
[5] 뉴스 Two-time Olympic judo champion Saito dies at age 54 http://mainichi.jp/e[...] 2015-01-20
[6] 뉴스 Ex-Olympic judo champ Saito dies http://www.japantime[...] Japan Times 2015-01-20
[7] 웹사이트 http://www.judo.or.j[...]
[8] 뉴스 斉藤仁氏「お別れの会」に1300人 https://www.nikkansp[...] 2022-09-30
[9] 웹사이트 19歳斉藤がオール一本V 柔道GS、増山も優勝 https://www.sankei.c[...] 産経ニュース 2021-11-08
[10] 뉴스 コラム1 -ものを言わない柔道教師- 成美堂出版 1997-06
[11] 웹사이트 Challenger 斉藤仁 http://doda.jp/chall[...]
[12] 웹사이트 『パンダが町にやってくる』毎日放送archive https://archive.is/2[...] 2012-08-04
[13] 뉴스 斉藤仁さん息子へ最後の言葉「稽古行け」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新聞社 2015-01-21
[14] 뉴스 コラム2 -打倒山下に燃えた日々!- 成美堂出版 1997-06
[15] 뉴스 毎日新聞2014年3月9日 毎日新聞 2014-03-09
[16] 뉴스 全日本柔道選手権大会記録(昭和23年~平成20年) 講道館・全日本柔道連盟 2009-04-29
[17] 간행물 昭和60年全日本選手権大会 ベース볼매거진사 1985-06
[18] 간행물 第14回世界選手権特集 베이스볼매거진사 1985-11
[19] 웹사이트 Cho Yong-Chul's illegal waki-gatame http://www.judocrazy[...]
[20] 뉴스 コラム3 -ケガ・挫折・涙のソウル「金」!- 成美堂出版 1997-06
[21] 뉴스 斉藤仁が執念の日本一でソウル五輪代表に 講道館・全日本柔道連盟 2009-04-29
[22] 웹사이트 夢と感動と愛を与えた日本柔道界の偉人5人 https://spaia.jp/col[...] 【SPAIA】スパイア 2020-11-15
[23] 간행물 特集 第24回オリンピックソウル大会柔道競技 베이스볼매거진사 1988-11
[24] 뉴스 コラム4 -指導者としての試行錯誤- 成美堂出版 1997-06
[25] 뉴스 故 斉藤仁九段のご逝去を悼む 講道館 2015-07-01
[26] 웹사이트 新強化委員長に斉藤氏=11月から新体制-全柔連 http://www.jiji.com/[...]
[27] 웹사이트 柔道五輪連覇の斉藤仁氏が死去 54歳、闘病中 http://www.nishinipp[...] 西日本新聞 2015-01-20
[28] 웹사이트 【訃報】理事 斉藤仁氏 逝去のお知らせ http://www.judo.or.j[...] 全日本柔道連盟告示 2015-01-20
[29] 웹사이트 斉藤仁さん、死因はがん性胸膜炎 https://www.daily.co[...] デイリースポーツ 2015-01-20
[30] 웹사이트 【柔道】斉藤仁さんに旭日小綬章 1月20日に死去 https://web.archive.[...] スポーツ報知 2015-02-18
[31] 뉴스 あとがき -柔道を学んだ結果として社会的にも立派な人に…- 成美堂出版 1997-06
[32] 웹사이트 山下氏が涙の弔辞「あなたというライバルと出会えて幸せでした」/柔道 https://www.sanspo.c[...] サンケイスポーツ 2019-05-11
[33] 웹사이트 斉藤仁氏お別れの会に1300人が参列…山下泰裕氏が弔辞/柔道(2/2ページ) https://www.sanspo.c[...] サンケイスポーツ 2019-05-11
[34] 뉴스 斉藤さんと谷本さん、国際柔道殿堂入りを表彰 https://www.yomiuri.[...] 読売新聞 2018-09-19
[35] 간행물 追悼 斉藤仁全日本強化委員長 베이스볼매거진사 20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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