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시타문 밖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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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카시타문 밖의 변은 1862년(분큐 2년) 1월 15일, 사쿠라다 문 밖의 변 이후 막부의 공무합체 정책에 반발한 존황양이파 지사들이 막부의 중신 안도 노부마사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미토 번과 우쓰노미야 번의 지사들이 연합하여 계획했으나, 실행 직전 계획이 발각되어 미토 번의 낭인들을 중심으로 암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노부마사 암살에는 실패했고, 습격에 가담한 자들은 모두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안도 노부마사는 실각하고 막부의 권위는 더욱 실추되었으며, 이후 보신 전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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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다문 밖의 변은 1860년 3월 24일 에도에서 미토 번 낭인 등이 이이 나오스케 다이로를 암살한 사건으로, 안세이 대옥, 개항 정책, 존왕양이 운동, 쇼군 후계자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막부 권위 실추와 막말 격동기의 서막을 알렸다. - 막말 미토번 - 도젠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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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와 대화재는 1772년 에도에서 발생한 대규모 화재로, 방화로 시작되어 도시 전역을 휩쓸고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내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여 연호가 변경되는 계기가 되었다. - 에도 - 아코 사건
아코 사건은 1701년 아코 번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가 에도 성에서 기라 요시히사에게 칼을 휘두른 사건과, 1703년 아코 번 낭인 47명이 기라 저택을 습격하여 복수한 사건을 일컫는 말로, 일본 역사상 유명한 복수극이자 충의와 의리의 상징으로 다양한 창작물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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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사쿠라다 문 밖의 변으로 대로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후, 노중 구제 히로치카와 함께 막부를 주도한 안도 노부마사는 나오스케의 개국 노선을 계승하고 막부의 위엄을 되찾기 위해 ‘공무합체’를 추진했다. 이 정책에 따라 막부는 천황의 여동생 가즈노미야 지카코와의 혼인을 결정했지만, 존황양이파 지사들은 이에 반발하였고, 노부마사 등에게 분노했다.
1860년 7월 만엔 원년, 미토번의 사이마루 다테마키, 노무라 쓰네노스케, 스미야 도라노스케 등과 조슈번의 가쓰라 고고로, 마쓰시마 고조 등이 연대하여 행동할 것을 약속했다. (헤신마루의 맹약, 미토-조슈 맹약) 이에 따라 노부마사의 암살과 요코하마에 거주하는 외국인 습격을 계획했다. 그러나 조슈번 내에서는 나가이 우타의 공무합체론이 번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고, 번사의 참여가 곤란해졌다. 조슈 측은 계획의 연기를 제안했지만, 실기하는 것을 두려워 한 미토 측은 조슈의 후원없이 독자적으로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미토 지사들은 우쓰노미야 한의 유학자 오하시 도차 일파와 연계하여 노부마사의 암살 계획을 진행했다. 당초 12월 15일에 결행할 예정이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12월 28일로 연기되었고, 다시 1월 15일로 연기되었다. 원래 정월대보름 가례 의식이 있는 날에는 여러 다이묘가 모두 입성하여 장군에게 예를 올렸기 때문에 그때를 노리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행 직전 1월 12일에 계획의 일부가 드러난 오하시 도차 등 우쓰노미야의 참가자가 막부에 체포되었다. 따라서 원래 계획에 따라 진행할 수는 없었지만, 미토 지사를 중심으로 한 나머지 인원만으로 실행하게 되었다.
2. 1. 공무합체 운동과 존왕양이 운동의 대립
사쿠라다 문 밖의 변으로 대로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후, 노중 구제 히로치카와 함께 막부를 주도한 안도 노부마사는 나오스케의 개국 노선을 계승하고 막부의 위엄을 되찾기 위해 ‘공무합체’를 추진했다. 이 정책에 따라 막부는 천황의 여동생 가즈노미야 지카코와의 혼인을 결정했지만, 존황양이파 지사들은 이에 반발하였고, 노부마사 등에게 분노했다.1860년 7월 만엔 원년, 미토번의 사이마루 다테마키, 노무라 쓰네노스케, 스미야 도라노스케 등과 조슈번의 가쓰라 고고로, 마쓰시마 고조 등이 연대하여 행동할 것을 약속했다.(헤신마루의 맹약, 미토-조슈 맹약) 이에 따라 노부마사의 암살과 요코하마에 거주하는 외국인 습격을 계획했다. 그러나 조슈번 내에서는 나가이 우타의 공무합체론이 번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고, 번사의 참여가 곤란해졌다. 조슈 측은 계획의 연기를 제안했지만, 실기하는 것을 두려워 한 미토 측은 조슈의 후원없이 독자적으로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미토 지사들은 우쓰노미야 한의 유학자 오하시 도차 일파와 연계하여 노부마사의 암살 계획을 진행했다. 당초 12월 15일에 결행할 예정이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12월 28일로 연기되었고, 다시 1월 15일로 연기되었다. 원래 정월대보름 가례 의식이 있는 날에는 여러 다이묘가 모두 입성하여 장군에게 예를 올렸기 때문에 그때를 노리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행 직전 1월 12일에 계획의 일부가 드러난 오하시 도차 등 우쓰노미야의 참가자가 막부에 체포되었다. 따라서 원래 계획에 따라 진행할 수는 없었지만, 미토 지사를 중심으로 한 나머지 인원만으로 실행하게 되었다.
2. 2. 미토 번과 조슈 번의 연대
사쿠라다 문 밖의 변으로 대로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후 노중 구제 히로치카와 함께 막부를 주도한 안도 노부마사는 나오스케의 개국 노선을 계승하고 막부의 위엄을 되찾기 위해 ‘공무합체’를 추진했다. 이 정책에 따라 막부는 천황의 여동생 가즈노미야 지카코와의 혼인을 결정했지만, 존황양이파 지사들은 이에 반발하였고, 노부마사 등에게 분노했다.1860년 7월 만엔 원년, 미토번의 사이마루 다테마키, 노무라 쓰네노스케, 스미야 도라노스케 등과 조슈번의 가쓰라 고고로, 마쓰시마 고죠 등이 연대하여 행동할 것을 약속했다. (헤신마루의 맹약, 미토-조슈 맹약) 이에 따라 노부마사의 암살과 요코하마에 거주하는 외국인 습격을 계획했다. 그러나 조슈번 내에서는 나가이 우타의 공무합체론이 번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고, 번사의 참여가 곤란해졌다. 조슈 측은 계획의 연기를 제안했지만, 실기하는 것을 두려워 한 미토 측은 조슈의 후원없이 독자적으로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2. 3. 조슈 번의 입장 변화와 미토 번의 독자 행동
사쿠라다 문 밖의 변으로 대로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후 노중 구제 히로치카와 함께 막부를 주도한 안도 노부마사는 나오스케의 개국 노선을 계승하고 막부의 위엄을 되찾기 위해 ‘공무합체’를 추진했다. 이 정책에 따라 막부는 천황의 여동생 가즈노미야 지카코와의 혼인을 결정했지만, 존황양이파 지사들은 이에 반발하였고, 노부마사 등에게 분노했다.1860년 7월 만엔 원년, 미토번의 사이마루 다테마키, 노무라 쓰네노스케, 스미야 도라노스케 등과 조슈번의 가쓰라 고고로, 마쓰시마 고죠 등이 연대하여 행동할 것을 약속했다. (헤신마루의 맹약, 미토-조슈 맹약) 이에 따라 노부마사의 암살과 요코하마에 거주하는 외국인 습격을 계획했다. 그러나 조슈번 내에서는 나가이 우타의 공무합체론이 번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고, 번사의 참여가 곤란해졌다. 조슈 측은 계획의 연기를 제안했지만, 실기하는 것을 두려워 한 미토 측은 조슈의 후원없이 독자적으로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미토 지사들은 우쓰노미야 한의 유학자 오하시 도차 일파와 연계하여 노부마사의 암살 계획을 진행했다. 당초 12월 15일에 결행할 예정이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12월 28일로 연기되었고, 다시 1월 15일로 연기되었다. 원래 정월대보름 가례 의식이 있는 날에는 여러 다이묘가 모두 입성하여 장군에게 예를 올렸기 때문에 그때를 노리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행 직전 1월 12일에 계획의 일부가 드러난 오하시 도차 등 우쓰노미야의 참가자가 막부에 체포되었다. 따라서 원래 계획에 따라 진행할 수는 없었지만, 미토 지사를 중심으로 한 나머지 인원만으로 실행하게 되었다.
3. 암살 계획
계획은 미토 번의 노무라 이에노스케, 하라 이치노신, 시모노 하야지로, 스미야 토라노스케 등과 우쓰노미야 번의 유학자 오하시 토츠안을 비롯한 시모쓰케 국 지사들의 연합으로 진행되었다.[1] 오하시 토츠안은 막부 타도를 주장하는 왕정복고론자였으며, 처음에는 거병을 계획했으나 인원 부족과 미토 번의 강력한 요청으로 안도 노부마사 암살 계획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1][2] 안도 노부마사의 참간 취의서를 집필한 것도 오하시 토츠안으로 추정된다.[1] 오하시 토츠안 부인의 남동생인 우쓰노미야 상인 기쿠치 교추, 고지마 교스케, 시모쓰케 국 모오카의 의사 고야마 조엔(슌잔), 상인 요코타 토시로와 그의 두 아들, 가와노 겐조 등 초망 출신 인사들이 암살 계획에 협력했다.[1]
3. 1. 우쓰노미야 번과의 연계
미토 번사 노무라 이에노스케, 하라 이치노신, 시모노 하야지로, 스미야 토라노스케 등은 우쓰노미야 번의 유학자 오하시 토츠안을 비롯한 시모쓰케 국 지사들과 연합하여 암살 계획을 진행했다.[1] 오하시 토츠안은 막부 타도를 주장하는 왕정복고론자로, 처음에는 거병을 계획했으나 인원 부족과 미토 번의 강력한 요청으로 안도 습격 계획 입안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1][2] 안도 노부마사의 참간 취의서를 집필한 것도 오하시 토츠안으로 추정된다.[1] 오하시 토츠안 부인의 남동생인 우쓰노미야 상인 기쿠치 교추, 고지마 교스케, 시모쓰케 국 모오카의 의사 고야마 조엔(슌잔), 상인 요코타 토시로와 그의 두 아들, 가와노 겐조 등 초망 출신 인사들이 암살 계획에 협력했다.[1]3. 2. 계획 변경과 실행
계획은 노무라 이에노스케, 하라 이치노신, 시모노 하야지로, 스미야 토라노스케 등 미토 번사들을 중심으로 우쓰노미야 번의 유학자 오하시 토츠안을 비롯한 시모쓰케 국의 지사와의 연합으로 진행되었다。오하시 토츠안은 막부 타도를 설파하는 왕정복고론자로, 당초에는 거병을 꾀했지만 인원이 모이지 않아 미토 번의 강한 의향도 있어서 안도 습격 계획 입안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1]。안도의 참간 취의서를 집필한 것도 토츠안으로 여겨진다。토츠안 부인의 남동생인 우쓰노미야 상인 키쿠치 교츄, 마찬가지로 코지마 쿄스케, 시모쓰케 국 모오카의 의사 코야마 쵸엔(슌잔), 상인 요코타 토시로 (키츠나)와 그의 두 아들, 카와노 켄조 등 초망의 사사들이 참획 협력했다。4. 암살 실행 과정
1862년(분큐 2년) 1월 15일 오전 8시경, 노부마사 노중의 행렬이 사카시타문 밖에 도달하자 미토번의 낭인 히라야마 효스케, 오다 히코사부로, 구로사와 고로, 다카하타 쇼지로, 시모쓰케국 의사 고노 다케시산[7], 에치고국의 의사 가와모토 도타로 6명이 행렬을 습격했다.[4] 미토 번의 낭인 가와베 히다리 지에몬노(川辺左次衛門)는 계획에 참가했지만 지각하여 습격에 참여하지 못했다. 구로사와 고로와 다카하타 쇼지로는 제1차 도젠지 사건의 참가자였다.[3]
먼저 직소를 가장하고 가와모토 도타로가 행렬 앞에 튀어나와 가마에 총을 쏘았으나, 총알은 가마를 빗나가 호위 무사의 다리에 맞았다.[4] 이 발포를 신호로 다른 5명이 행렬에 난입했다. 히라야마 효스케가 가마에 칼을 찌르고 노부마사의 허리에 경상을 입히고 혼자 성 안으로 도망쳤다.
사쿠라다 문 밖의 변 이후 노중은 물론 등성하는 영주의 경비는 더욱 삼엄해져, 거사 당일에도 50명 이상이 경호하고 있었다. 낭인 등 6명은 암살 목적을 이룰 수 없었고, 모두 싸우다가 죽임을 당했다. 호위 무사들도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사망자는 없었다.
지각한 가와베는 조슈번 저택에서 참간(斬奸) 취지서[8]를 전달한 후 할복자살 했다.[5]
4. 1. 습격자들
1862년(분큐 2년) 1월 15일 오전 8시경, 미토번의 낭인 히라야마 효스케, 오다 히코사부로, 구로사와 고로, 다카하타 쇼지로, 시모쓰케국 의사 고노 다케시[7], 에치고국의 의사 가와모토 도타로 6명이 노부마사 노중의 행렬을 습격했다.[4] 미토 번의 낭인 가와베 히다리노스케도 계획에 참가했지만, 지각하여 습격에 참여하지 못했다. 구로사와 고로와 다카하타 쇼지로는 제1차 도젠지 사건의 참가자였다.먼저 직소를 가장하고 가와모토 도타로가 행렬 앞에 튀어나와 가마에 총을 쏘았지만 빗나가 호위 무사의 다리에 맞았다. 이 발포를 신호로 다른 5명이 행렬에 난입했다. 히라야마 효스케는 가마에 칼을 찔러 노부마사의 허리에 경상을 입히고 혼자 성 안으로 도망쳤다.[3]
사쿠라다 문 밖의 변 이후 노중과 영주의 경비는 더욱 삼엄해졌고, 당일에도 50명 이상이 경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낭인 6명은 암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모두 싸우다 죽임을 당했다. 호위 무사들도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사망자는 없었다. 지각한 가와베는 조슈번 저택에 참간 취지서[8][5]를 전달한 후 할복자살했다.
4. 2. 습격과 실패
1862년(분큐 2년) 1월 15일 오전 8시경, 노부마사 노중의 행렬이 사카시타문 밖에 도달하자 미토번의 낭인 히라야마 효스케, 오다 히코사부로, 구로사와 고로, 다카하타 쇼지로, 시모쓰케국 의사 고노 다케시산[7], 에치고국의 의사 가와모토 도타로 6명이 행렬을 습격했다.[4] 미토 번의 낭인 가와베 히다리 지에몬노(川辺左次衛門)는 계획에 참가했지만 지각하여 습격에 참여하지 못했다. 구로사와 고로와 다카하타 쇼지로는 제1차 도젠지 사건의 참가자였다.[3]먼저 직소를 가장하고 가와모토 도타로가 행렬 앞에 튀어나와 가마에 총을 쏘았으나, 총알은 가마를 빗나가 호위 무사의 다리에 맞았다.[4] 이 발포를 신호로 다른 5명이 행렬에 난입했다. 히라야마 효스케가 가마에 칼을 찌르고 노부마사의 허리에 경상을 입히고 혼자 성 안으로 도망쳤다.
사쿠라다 문 밖의 변 이후 노중은 물론 등성하는 영주의 경비는 더욱 삼엄해져, 거사 당일에도 50명 이상이 경호하고 있었다. 낭인 등 6명은 암살 목적을 이룰 수 없었고, 모두 싸우다가 죽임을 당했다. 호위 무사들도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사망자는 없었다.
지각한 가와베는 조슈번 저택에서 참간(斬奸) 취지서[8]를 전달한 후 할복자살 했다.[5]
4. 3. 가와베 히다리노스케의 자결
1862년(분큐 2년) 1월 15일, 사카시타문 밖의 변에 참여할 예정이었던 미토 번의 낭인 가와베 히다리 지에몬노(川辺左次衛門)는 습격에 지각했다.[7] 가와베는 조슈 번 저택에서 참간(斬奸) 취지서[8]를 전달한 후 할복자살했다.[5]5. 결과 및 영향
노중 안도 노부마사 암살 시도는 실패했지만, ‘사쿠라다문 밖의 변’에 이은 막부 각료 습격 사건은 막부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다.[6] 이 사건으로 노부마사는 그해 4월 노중에서 파면되었고, 8월에는 은거와 칩거를 명령받았으며, 이와키 다이라 번은 2만 석을 감봉당했다.[6] 게다가 보신 전쟁에서 은거 중이던 노부마사가 오우에쓰 열번 동맹 참가를 결정하여 패배하면서 다시 칩거 및 감봉(이후 헌금과 교환하여 구 영지 안도) 명령을 받게 되었다.[6]
5. 1. 막부 권위 실추
비록 노중 안도 노부마사의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사쿠라다문 밖의 변’으로 이어진 막부 각료의 습격 사건은 막부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다.[6] 이 사건을 계기로 노부마사는 4월에 노중에서 파면되었고, 8월에는 은거, 칩거를 명령받았고, 이와키 다이라 번 2만 석을 감봉 당했다.[6] 게다가 보신 전쟁에서는 은거한 노부마사가 오우에쓰 열번 동맹 참가를 결단하여 패배, 다시 칩거와 감봉(후에 헌금과 교환하여 구령 안도)을 명령받게 된다.[6]5. 2. 안도 노부마사의 실각
비록 노중 안도 노부마사의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사쿠라다문 밖의 변’으로 이어진 막부 각료의 습격 사건은 막부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다.[6] 이 사건을 계기로 노부마사는 4월에 노중에서 파면되었고, 8월에는 은거, 칩거를 명령받았고, 이와키 다이라 번 2만 석을 감봉당했다.[6]5. 3. 보신 전쟁에 미친 영향
비록 노중 안도 노부마사의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사쿠라다문 밖의 변’으로 이어진 막부 각료의 습격 사건은 막부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다.[6] 이 사건을 계기로 노부마사는 4월에 노중에서 파면되었고, 8월에는 은거, 칩거를 명령받았고, 이와키 다이라 번 2만 석을 감봉 당했다.[6] 게다가 보신 전쟁에서는 은거한 노부마사가 오우에쓰 열번 동맹 참가를 결단하여 패배, 다시 칩거와 감봉(후에 헌금과 교환하여 구령 안도)을 명령받게 된다.[6]6. 역사적 평가
6. 1. 한국의 관점
참조
[1]
일본대백과전서
坂下門外の変
https://kotobank.jp/[...]
[2]
서적
宇都宮市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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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幕末証言 史談会速記録を読む
양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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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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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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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歴史と旅 新・藩史事典
秋田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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