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다문 밖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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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쿠라다문 밖의 변은 1860년 3월 24일, 당시 일본의 최고 권력자였던 이이 나오스케가 에도성 사쿠라다 문 밖에서 암살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이이 나오스케의 전제 정치와 쇄국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일으킨 것으로, 쇼군 후계자 문제와 미일 수호 통상 조약 체결 등 당시 일본 사회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사건 이후 막부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존왕양이 운동이 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결국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으며,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쿠라다문 밖의 변은 일본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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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쿠라다문 밖의 변 | |
|---|---|
| 사건 개요 | |
| 명칭 | 사쿠라다몬 밖의 변 |
| 일본어 명칭 | 桜田門外の変 (Sakuradamon-gai no Hen) |
| 다른 일본어 명칭 | 桜田門の変 (Sakuradamon no Hen) |
| 발생일 | 1860년 3월 24일 (안세이 7년 3월 3일) |
| 발생 장소 | 에도 성사쿠라다 문 밖 (현재의 도쿄 도) |
| 유형 | 암살 사건 |
| 원인 | 안세이 대옥 |
| 목표 | 이이 나오스케 |
| 배경 | |
| 동기 | 1858년 미일 수호 통상 조약 체결에 대한 반대 |
| 가해자 | |
| 주체 | 낭인 무사 |
| 소속 | 미토 번, 사쓰마 번 |
| 공격 인원 | 18명 |
| 주요 가담자 | 세키 데쓰노스케 이나무라 사콘지로 오제키 고타 사이 히사오 구로사와 다메모토 아리무라 지사에몬 |
| 피해자 | |
| 사망자 | 이이 나오스케 |
| 방어 | |
| 소속 | 히코네 번 번사 |
| 사건 결과 | |
| 결과 | 이이 나오스케 사망 막부 권위 실추 존왕양이 운동 격화 |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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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바쿠마츠 시대 이이 나오스케는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쇄국 정책을 폐기하려 했다.[1] 이는 고메이 천황의 지시를 어긴 것이어서 막부는 불충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1859년부터 나가사키, 하코다테, 요코하마 항구가 외국 상인에게 개방되었다.
이이는 안세이 대옥으로 막부 권위를 강화하려 했고,[1] 도쿠가와 이에사다 쇼군 후계자 문제로 미토 번, 히젠 번 등의 가신들을 은퇴시켰다. 이는 미토학 지지자들의 반발을 샀다.[2]
1858년 4월, 이이 나오스케는 대로에 취임하여 쇼군 계승 문제와 미일 수호 통상 조약 체결에 직면했다. 쇼군 후계자 문제에서 난키파는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잇키파는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를 지지했으나, 결국 요시토미가 후계자가 되었다.
고메이 천황의 칙허 없이 미일 수호 통상 조약 등 안세이 5개국 조약이 체결되자, 요시노부와 도쿠가와 나리아키 등 잇키파 다이묘들이 반발했다. 7월 5일 잇키파 제후들이 처벌받고, 7월 6일 이에사다가 사망하며 요시토미가 쇼군이 되었다.
8월 고메이 천황은 무오 밀칙을 미토 번에 내렸고, 나오스케는 안세이 대옥으로 반대파를 탄압했다. 미토 번은 밀칙 대응을 두고 분열했고, 8월 27일 미토 번 관계자들이 처벌받고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영칩거되었다. 막부는 '무오 밀칙' 반환을 요구했고, 미토 번은 굴복했다.
다카하시 다이치로, 가네코 손지로 등 미토 번사와 사쓰마 번 아리무라 지자에몬 등은 이이 나오스케 암살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상경을 계획했으나, 시마즈 히사미쓰는 직접 관여를 억제하여 상경 계획은 좌절되었다.
2. 1. 안세이 5개국 조약
고메이 천황의 칙허 없이 이이 나오스케가 독단으로 안세이 5개국 조약에 조인하였다.[1] 이 조약은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으로, 나가사키, 하코다테, 요코하마 항구가 외국 상인들에게 개방되었다.이는 당시 조정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다. 고메이 천황은 양이론을 지지하며 쇄국 정책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막부가 천황의 허가 없이 조약을 체결한 것은 막부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행위로 여겨졌다.
이이 나오스케는 안세이 대옥을 통해 쇼군 후계자 문제에서 히토쓰바시파, 난키파 등 반대 세력을 탄압했다. 이로 인해 특히 미토 번에서는 다카하시 다이치로, 가네코 마고지로 등 과격 낭인 지사들이 탈번하여 사쓰마 번의 아리무라 지자에몬 등과 연합하여 반란을 꾀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한국의 입장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일본이 서구 열강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고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것은, 이후 조선이 겪게 될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안세이 5개국 조약은 일본이 국제 사회의 불평등한 질서에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조선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2. 2. 안세이 대옥
이이 나오스케는 도쿠가와 막부의 권위를 강화하고 반대파를 탄압하기 위해 안세이 대옥을 일으켰다.1858년, 이이 나오스케는 쇼군 후계자 문제와 미일 수호 통상 조약 체결이라는 두 가지 과제에 직면했다. 병약한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난키파와 잇키파가 대립했는데, 나오스케는 난키파를 지지하여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후계자로 결정했다. 이는 조정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다.[12]
고메이 천황의 허락 없이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비롯한 안세이 5개국 조약을 체결하여 양이론자들의 반발을 샀다. 나오스케는 무고의 밀칙이 천황의 뜻이 아니라 미토 번의 음모라고 주장하며 반대파를 철저히 탄압했다.[14]
이 과정에서 로주 마베 아키카쓰를 교토에 파견하여 밀칙 주모자를 체포하고, 공가, 다이묘, 승려, 낭인, 학자 등 각계각층의 100명 이상을 처벌하거나 탄압했다. 특히, 요시다 쇼인과 같은 진보적 사상가들이 희생되었다.[15]
미토 번에서는 밀칙 반납을 둘러싸고 번론이 분열되었고, 반납 반대파는 미토 가도를 봉쇄하며 저항했다. 결국 미토 번은 막부에 굴복하여 밀칙을 반납했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번사들이 희생되었다.[20][21]
2. 3. 쇼군 후계자 문제
1858년 4월, 히코네번주 이이 나오스케가 대로에 취임하면서 쇼군 계승 문제와 미일 수호 통상 조약 체결이라는 두 가지 과제에 직면했다.[1]병약한 제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난키파와 잇키파가 대립했다. 난키파는 기슈번주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잇키파는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를 지지했다. 결국 이에모치가 쇼군 후계자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혈연을 중시하는 관례와 나오스케를 대로로 추대한 난키파의 의향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차기 쇼군은 연장자가 바람직하다"는 조정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미일 수호 통상 조약 체결에 대해서는 고메이 천황의 칙허를 얻지 못하고 양이론파의 반대가 거셌다. 나오스케는 무칙허 조약 조인에 반대했지만, 시모다 봉행 이노우에 기요나오에게 불가피한 경우 조인해도 좋다고 허가했다. 결국 기요나오는 6월 19일 칙허 없이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비롯한 안세이 5개국 조약 조인을 강행했다. 이는 "쇄국"이 조정과 무관하게 시작되었고, 관례상 조약 체결에 칙허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6월 22일 여러 다이묘에게 조약 체결이 공표되었고, 다음날 요시노부가 등성하여 나오스케를 추궁했다. 6월 24일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비롯한 잇키파 다이묘들이 무칙허 조약 체결을 비난했다. 다음 날 요시토미가 쇼군 이에사다의 양자로 발표되었고, 7월 5일 잇키파 제후들에게 처분이 내려졌다. 7월 6일 이에사다가 사망하고 요시토미가 제14대 쇼군 이에모치가 되었다.
이로 인해 잇키파는 에도 성 내 활동을 제한받았지만, 잇키파 사쓰마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교토에 보내 칙서 강하 운동을 하고, 번병을 이끌고 상경할 계획을 세웠으나 7월 16일 나리아키라가 사망하며 좌절되었다.
칙허 없는 조약 조인과 나리아키 등의 배척은 고메이 천황과 공가들의 분노를 샀다. 8월 천황은 무오 밀칙을 미토번에 하사했고, 관백 구조 나오타다의 내람을 해임했다.[14] 미토 번은 밀칙 사본을 여러 웅번에 회송하려 했으나 번내 항쟁으로 실패했고, 양이파 공가를 통해 친척 다이묘들에게 회송되었지만, 각 번은 막부의 권위를 두려워하여 관여하지 않았다.
나오스케는 밀칙이 미토 번의 음모라며 반대파 탄압을 결심, 마나베 아키카쓰를 교토에 보내고 사카이 다다요시를 교토 쇼시다이로 임명하여 보좌하게 했다. 아키카쓰는 밀칙 주모자로 우카이 키치자에몬 부자를 체포하고, 나가노 슈젠 등과 협의하며 조정을 압박했다. 안세이 대옥으로 이어진 이 탄압으로 황족, 공가, 다이묘, 승려, 낭인 등 100명 이상이 죄를 얻거나 박해받았다.
미토 번에서는 밀칙 대응을 둘러싸고 번론이 분열되었다. 반납 저지파 번사들은 고가네 숙에 결집했고[16], 안세이 대옥이 본격화되자 우카이 키치자에몬 부자가 구금되고 아지마 다이토 등 미토 번 개혁파 중진이 구금되자 다시 고가네 숙 등에 둔집했다. 가네코 손지로 등은 밀칙 사본을 여러 번에 회달시키려 서남 웅번과 연합을 꾀했고, 고도관 내 가시마 신궁 신관들도 사본 회람에 나섰다.[17] 8월 27일 미토 번 관계자들에 대한 형이 집행되어 아지마 다이토는 할복, 우카이 키치자에몬은 참수되는 등 중진들이 처벌받고,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영칩거 처분을 받았다. 막부는 '무오 밀칙' 반환을 요구했고, 미토 번은 굴종해야 했다. 그러나 반납 반대파 기세는 꺾이지 않았고, 막부는 칙명 초안을 만들어 천황 동의를 얻는 방침으로 전환, 12월 번주 도쿠가와 요시아쓰에게 칙서 반납 조지를 전달했다. 미토 번청은 반납론이 주류였지만 반납 저지 운동은 격화되었다. 반납 반대파는 미토 가도를 봉쇄하고 저항했다(나가오카 둔집). 1월 15일 막부는 요시아쓰에게 밀칙 반납을 재촉, 1월 25일을 기한으로 정하고 위반 시 개역 가능성까지 언급했다.[19] 나리아키는 밀칙을 즈이류잔 묘로 옮겼다. 2월 14일 반납 용인론자 번사가 습격당하고, 2월 18일 혼케바시에서 반납 반대파 번사와 용인파 번병이 충돌했다. 2월 24일 번사 사이토 류지로가 할복 자살하며 반납은 연기되었다.[20][21] 나가오카 둔집은 해산했다.
다카하시 다이치로, 가네코 손지로 등 미토 번사와 사쓰마 번 아리무라 지자에몬 등은 구사카베 이사지를 통해 결합을 유지했다. 이들은 이이 나오스케 습격과 동시에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솔병 상경하여 천황 칙서를 얻어 막정을 시정하려 했다.[22] 그러나 시마즈 히사미쓰는 나오스케 습격을 묵인하면서도 직접 관여를 억제, 솔병 상경 계획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존왕양이 급진파 미토 번사들은 나오스케 제거를 위해 단독 실행 방침을 굳혔다.[24]
3. 암살 계획



고메이 천황에게서 칙허를 받지 않고 독단으로 안세이 5개국 조약에 조인하고, 안세이 대옥으로 반대 세력을 탄압해 온 이이 나오스케에 대한 반발은 특히 미토번에서 컸다. 다카하시 다이치로, 가네코 마고지로 등 미토번의 과격 낭인 지사들은 탈번하여 사쓰마번의 아리무라 지자에몬 등과 연락, 사쓰마 군의 상경에 맞춰 의병을 일으키고 고메이 천황의 칙서를 받아 막부를 전복하려 했다. 그러나 사쓰마번 내 정세 변화로 양 번 무사들의 합동 계획은 좌절되었고, 미토 과격파는 독자적으로 다이로 습격을 단행했으며, 사쓰마에서는 아리무라 혼자 가세했다.[1]
이이 나오스케 암살 모의는 미토 번과 사쓰마 번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미토 번에서는 안세이 대옥으로 탄압받던 다카하시 다이치로, 가네코 마고지로 등이 탈번하여 사쓰마 번의 아리무라 지자에몬과 연대했다. 이들은 사쓰마 군이 상경할 때 함께 봉기하여 칙서를 통해 막부를 전복하려 했으나, 사쓰마 번 내부 사정으로 인해 계획은 좌절되었다.
3. 1. 미토 번의 동향
안세이 5년(1858년) 8월, 고메이 천황은 막부의 쇄신과 여러 다이묘의 결속을 요구하는 '무고의 밀칙'을 미토번에 내렸다. 이는 안세이 5개국 조약 체결에 대한 반발이자, 막부를 거치지 않고 다이묘에게 직접 지시를 내린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14]미토 번은 밀칙 사본을 여러 번에 전달하려 했으나, 번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양이파 공가를 통해 다른 다이묘들에게도 밀칙의 내용이 전달되었고, 이는 막부의 권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이 나오스케는 밀칙을 미토 번의 음모로 간주하고, 안세이 대옥을 일으켜 반대파를 철저히 탄압했다. 미토 번에서는 밀칙 반납을 둘러싸고 번론이 분열되었고, 반납 반대파는 미토 가도를 봉쇄하며 저항했다(나가오카 둔집).[18]
이러한 상황에서 존왕양이 운동은 더욱 격화되었다. 미토 번의 가네코 손지로 등은 사쓰마번과 연합하여 이이 나오스케 암살을 계획했다.[22] 결국, 미토 번의 존왕양이파는 단독으로 사쿠라다문 밖의 변을 일으켜 이이 나오스케를 제거했다.[24]
3. 2. 사쓰마 번의 동향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교토에 보내 내칙 강하 운동을 펼치고 번병 5,000명을 이끌고 상경할 계획을 세웠으나, 1858년 7월 16일 나리아키라가 사망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25]이후 시마즈 히사미쓰가 실권을 잡았는데, 히사미쓰는 미토 번사들의 이이 나오스케 암살 계획을 묵인하면서도 사쓰마 번의 직접적인 관여는 억제했다. 그는 아들인 번주 시마즈 시게히사를 통해 존왕양이파 지사들에게 '세이추'라는 칭찬과 함께 후일을 기약하며 탈번 및 과격한 행동을 자제하도록 설득했다. 이러한 대응으로 사쓰마 번의 존왕양이파는 진정되었고, 솔병 상경 계획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미토 번사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23]
막부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이이 나오스케를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한 미토 번의 존왕양이 급진파는 단독으로 암살 계획을 진행했다.[24]
3. 3. 암살 실행 준비
고메이 천황에게서 칙허를 받지 않고 독단으로 안세이 5개국 조약에 조인하고, 안세이 대옥으로 반대 세력을 탄압해 온 이이 나오스케에 대한 반발은 특히 미토번에서 컸다. 미토번의 과격 낭인 지사들은 다카하시 다이치로, 가네코 마고지로 등을 중심으로 탈번하여 사쓰마번의 아리무라 지자에몬 등과 연락, 사쓰마 군의 상경에 맞춰 의병을 일으키고 고메이 천황의 칙서를 받아 모반을 꾀했다. 그러나 사쓰마번 내 정세 변화로 양 번 무사들의 합동 계획은 좌절되었고, 미토 과격파는 독자적으로 다이로 습격을 단행, 사쓰마에서는 아리무라 혼자 가세했다.[1]당일 이른 아침, 일행은 결행 전 연회를 열고 도카이도 시나가와 여관을 출발, 도카이도를 따라 관문을 지나 후다노쓰지를 돌아 아미 고개, 신메이 고개, 나카노 다리를 지나 사쿠라다 거리로 나와 아타고 신사에서 기다린 뒤 사쿠라다문 밖으로 향했다. 이들은 에도번 저택에서 우치보리 길을 따라 등성하는 나오스케를 에도 성 밖 사쿠라다문 밖에서 습격했다. 이이 가에 미리 경고문이 도착했지만, 이이는 호위를 강화하지 않았다.[1]
암살 사건은 1860년 3월 24일, 에도 (현 도쿄)의 모든 다이묘들이 회의를 위해 에도성에 들어갈 예정이었던 3월 3일 축제 날에 발생했다. 암살자들은 이이의 수행단이 성 바로 바깥 사쿠라다 문 근처에서 이이가 부지에 도착했을 때 공격했다.[1] 이이는 자신의 안전에 대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국가의 미래를 위협하는 위험을 보았을 때, 나의 안전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대답하며 관직에서 물러나라는 권고를 거절했다.[1]
이이의 수행단은 약 60명의 사무라이 경호원과 이이의 가마 운반인으로 구성되었다. 총 17명의 미토 낭인들이 미토 출신이 아닌 유일한 그룹 멤버인 아리무라 지자에몬과 함께 이이를 매복했다.[3] 사쓰마 번 출신의 사무라이였던 아리무라 지자에몬[3]은 정면 공격으로 경비병의 주의를 끌게 하고, 다른 암살자가 이이가 탄 가마에 일본에서 만든 콜트 1851 네이비 리볼버로 한 발을 발사했다. 이 총은 매튜 C. 페리 제독이 쇼군에게 선물로 준 화기를 복제한 것이었다. 부상당해 마비된 이이를 밖으로 끌어낸 아리무라는 이이의 목을 베고 세푸쿠를 했다.[4]
공모자들은 그들의 행동 이유를 설명하는 선언문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선언문에서 우라가에 미국인들이 온 이후 정책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외국인과의 상업적 관계, 조약 체결, 그리스도의 그림을 짓밟는 것의 폐지, 외국인들의 사악한 종교 예배 장소 건설 허용, 세 명의 외국인 장관의 거주 허용 등이 국가의 이익에 반하며 국가적 명예에 오점을 남기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사악한 자를 처벌하기 위해 하늘의 도구가 되기로 헌신했으며, 이 끔찍한 독재자를 죽임으로써 심각한 악을 끝내는 임무를 스스로 맡았다"고 밝혔다.[4]
4. 사쿠라다몬 밖의 변
고메이 천황에게 칙허를 받지 않고 독단으로 안세이 5개국 조약에 조인하고, 안세이 대옥으로 반대 세력을 탄압했던 이이 나오스케에 대한 반발은 거셌다. 특히 미토번에서는 다카하시 다이치로, 가네코 마고지로 등 과격 낭인들이 탈번하여 사쓰마번의 아리무라 지자에몬 등과 연합하여 거사를 도모했다. 그러나 사쓰마 번 내부 정세 변화로 양 번의 합동 계획은 좌절되었고, 미토 과격파와 아리무라만이 독자적으로 다이로 습격을 단행했다.
1860년 3월 24일(3월 3일), 일행은 도카이도 시나가와 숙의 여관을 출발하여 아타고 신사에서 대기한 후 사쿠라다 문 밖으로 향했다. 이들은 에도 성 밖 사쿠라다문 밖에서 에도번 저택에서 우치보리 길을 따라 등성하는 나오스케를 습격했다.
4. 1. 습격




사건 당일(1860년 3월 24일, 3월 3일 축제)은 눈이 내려 시야가 좋지 않았다. 이이 나오스케의 호위 무사들은 비옷을 입고 칼 손잡이에 씌워놓은 자루 때문에 습격에 즉각 대응하기 어려웠다. 이는 습격자들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94]
에도 막부 개창 이래 에도 시중에서 다이묘 가마를 습격한 전례가 없었기에, 히코네 번 행렬의 경호는 허술했다. 더욱이 나오스케는 이전부터 불온한 자가 있다는 정보와 당일 새벽의 직접적인 경고에도 불구하고,[41] 경호 강화를 비판받을 것을 우려하여 굳이 내버려 두었다.
이날 미토번 탈번 낭인 17명과 사쓰마 번 출신 아리무라 지자에몬은 무가 연감(武鑑)을 든 구경꾼으로 위장하여 나오스케의 가마를 기다렸다.
오전 8시, 등성을 알리는 북소리가 에도성에서 울리고, 제후들이 행렬을 지어 사쿠라다몬을 통과했다. 오전 9시경, 히코네 번 저택[39]에서 나온 나오스케의 행렬(약 60명)[40]이 내보리 거리를 따라 사쿠라다몬 밖 기즈키 번 저택 앞[44]에 이르렀을 때 습격을 받았다.
먼저 모리 고로쿠로가 가마 행렬에 접근하여 구사카베 사부로에몬을 베어 호위의 주의를 끌었다. 그 후, 구로사와 주자부로(세키 데쓰노스케라는 설도 있음)가 신호용 권총[45]으로 가마를 쏘아 공격을 개시했다.[46]
총탄에 맞은 나오스케는 허리에서 허벅지에 걸쳐 총상을 입고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가마꾼들은 도주했고, 몇몇 수행 무사들이 가마를 옮기려 했으나 베여 쓰러졌다. 히코네 번 무사들은 칼을 뽑기 어려워 칼집으로 저항하거나 맨손으로 칼을 잡아 손가락이 잘리는 등 불리한 상황이었다.[46] 그러나 가사이 주자에몬은 이도류를 사용하여 이나다 주조를 쓰러뜨리는 등 분전했지만, 결국 살해되었다.[49]
지키는 사람이 없어진 가마에 칼이 잇따라 찔렸다. 아리무라 지자에몬이 문을 열고 나오스케의 상투를 잡아 끌어냈다. 나오스케는 기어가려 했지만, 아리무라의 야쿠마루 지겐류 원숭이 울음소리와 함께 휘두른 칼에 목이 베였다.[95]
아리무라는 나오스케의 수급을 칼에 꽂아 올렸으나, 고쇼 오가와라 히데노죠에게 뒤통수를 베였다. 오가와라는 히로오카 네노지로 등에게 베였고, 아리무라도 중상으로 와카도시요리 엔도 쓰네노리 저택 앞에서 자결했다.
히코네 번 저택에서 사람을 보냈지만 이미 늦었고, 사상자와 가마, 피 묻은 손가락과 귀 등을 회수했다. 나오스케의 머리는 엔도 저택에 보내졌고, 히코네 번 측은 싸우다 죽은 사무라이 가타 구로타의 목으로 속여 몸통과 꿰매 붙였다.[59]
습격부터 암살까지는 불과 몇 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가노 호우가이의 작품 《사쿠라다 사건 에마키》에 사건의 경과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4. 2. 이이 나오스케의 죽음
3월 3일 이른 아침, 수토 낭사 일행은 도카이도시나가와 숙[37]의 여관을 출발했다. 일행은 애타고 신사(미나토구애타고)에서 만나기로 한 후, 사쿠라다몬 밖으로 향했다. 이날은 새벽부터 눈이 내려 시야가 좋지 않았고, 히코네 번 호위 무사들은 우비를 걸치고, 칼의 손잡이와 칼집 모두 자루를 씌워 놓아 즉시 방어에 나서기 어려웠다. 이는 습격 측에 유리한 상황이었다.[38]
오전 9시경, 히코네 번 저택[39]의 문이 열리고, 이이 나오스케의 행렬이 나왔다. 히코네 번의 행렬은 총 60명 정도였다.[40]
선두가 마츠다이라 치카요시 저택에 접근하자, 먼저 선봉을 맡은 수토 낭사 모리 고로쿠로가 가마 소송을 가장하여 행렬의 우두머리에게 접근했다. 히코네 번사 히게키부 사부로에몬은 이를 제지하고 붙잡으려 했지만, 모리는 즉시 칼을 휘둘러 히게키부는 얼굴을 베여 앞으로 고꾸라졌다. 모리가 호위의 주의를 전방으로 끌어당긴 후, 수토 낭사 구로사와 츄자부로(세키 데츠노스케, 또는 기타 다수가 다방면에서 일제 사격을 했다는 설도 있다)가 신호 피스톨[45]을 가마를 향해 발사했다.[46] 이를 신호로 낭사 본대에 의한 전방위 가마 발도 습격이 시작되었다.
발사된 탄환에 의해 나오스케는 허리에서 허벅지까지 총상을 입었고, 검술을 발휘하지 못한 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습격에 놀란 가마꾼, 보행 인부들은 물론, 히코네 번사의 대부분도 당황하여 도망쳤다.[48] 남은 십수 명의 무사들은 가마를 움직이려고 시도했지만, 총격으로 부상을 입은 데다 습격 측에 베여 가마는 눈 위에 방치되었다. 호위 임무를 맡은 히코네 번사들은 눈 때문에 칼자루가 젖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양 칼에 자루 덮개를 씌워 놓았고, 이것과 칼집이 방해가 되어 재빨리 발도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칼집 채로 저항하거나, 맨손으로 칼을 잡아 손가락이나 귀를 베이는 등의 상처를 입었다.[46]
이러한 불리한 형세 속에서 히코네 번사도 저항했고, 결과적으로 습격자 측도 피해가 확대되었다. 이도류의 달인으로 번 외에도 알려져 있던 히코네 번 제일의 검호 가와니시 츄자에몬은 우비를 벗어 던지고 자루 덮개를 벗겨 멜빵을 걸고 칼을 뽑아 가마 옆을 지키며 낭사 이나다 쥬조를 쓰러뜨려 더 이상의 습격을 막았다. 마찬가지로 가마 옆의 젊은 검호 나가타 타로에 정비도 이도류로 대분전하여 습격자에게 중상을 입혔다. 그러나 가와니시가 베여 쓰러지고, 나가타도 총상으로 전투 불능이 되었다.[49] 난투로 인해 습격자 측에서 처음 전투에 참가할 예정이 없었던 사이토 간모쓰도 도중에 전투에 참가했다.
이윽고 지키는 자가 없어진 가마에 잇따라 습격자의 칼이 꽂혔다. 먼저 이나다가 칼을 똑바로 하고 한칼에 가마의 문에 몸을 부딪치며 가마를 찔렀다.[52] 이어 히로오카, 우미고가 잇달아 가마를 찔렀다. 이 사이에 이나다는 가와니시 츄자에몬의 반격으로 죽었고, 가와니시도 결국 쓰러졌다. 아리무라 지자에몬이 거칠게 가마의 문을 열어젖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던 나오스케의 상투를 잡고 가마에서 끌어냈다. 나오스케는 이미 피투성이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지만, 무의식적으로 땅을 기어 가려 했다. 아리무라가 낸 야쿠마루 지겐류의 원숭이 울음소리("꺄아악"하는 기합)과 함께 휘두른 사쓰마 칼에 의해 나오스케는 참수되었다. 목은 한 번에 떨어지지 않고, 3번 공을 차는 듯한 소리가 나고 나서야 떨어졌다고 한다. 습격 개시부터 나오스케 살해까지 불과 수 분의 사건이었다.[53][54]
아리무라는 칼끝에 나오스케의 수급을 꽂아 올려 세웠다. 아리무라의 개선가를 듣고 낭사들은 본뜻을 이룬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이 현장을 떠나려 했을 때, 베여 기절해 있던 목부 보좌역의 히코네 번사 오가와라 히데노조가 그 개선가를 듣고 소생하여 주군의 목을 되찾으려 아리무라를 쫓아가 요네자와 번 저택 부근[55]에서 아리무라의 뒤통수를 베었다. 수토 낭사 히로오카 고노지로 등에게 오가와라는 그 자리에서 베여 쓰러졌지만, 현장에 인접한 기즈키 번 저택의 문 안쪽에서 목격한 인물의 표현에 따르면, 오가와라가 몽롱하게 혼자 일어선 직후 수 명의 낭사들에게 짓밟히듯 베인 모습은 눈을 가릴 정도로 처참했다. 한편, 이 일격으로 아리무라도 중상을 입어 보행이 곤란하게 되어 나오스케의 목을 끌고 갔다. 잠시 도주 후, 아리무라는 와카도시요리 엔도 타네무네(오미 미카미 번) 저택 앞에서 자결했다. 이로 인해 나오스케의 목은 엔도 가에 수용되게 되었다.[56]
오가와라는 구조되어 번저택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즉사했다. 오가와라는 자신 외에 수 명이라도 자신과 같은 결사의 인물이 있었다면 결코 주군의 목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유감의 말을 남겼다. 현장에는 습격자 측에서 유일하게 그 자리에서 죽은 이나다 외에 수 명의 히코네 번 무사와 목 없는 나오스케의 시체가 널려 있었고, 눈은 선혈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53] 습격 소식을 들은 히코네 번 저택에서는 즉시 병력이 출격했지만 이미 늦었고, 부득이 병력을 할애하여 사상자와 가마를 수용하고, 더욱이 선혈에 젖어 많은 손가락과 귀, 수 개의 팔이 떨어진 눈까지 철저하게 회수했다.[57]
나오스케의 목은 앞서 언급한 미카미 번 저택에 놓여 있었다. 소재를 알아낸 이이 가문의 사자가 반환을 요청했지만, 엔도 가문은 "막부의 검시가 끝나지 않은 동안은 넘겨줄 수 없다"라고 5번이나 거절하고 그 사자를 돌려보냈다. 그래서 이이 가문, 엔도 가문, 막부가 협의한 끝에, 겉으로는 투쟁 중 사망한 번사의 연령과 체격이 나오스케와 비슷한 가타 구로타의 목으로 위장하고, 속으로는 "엔도 가문은 부상당한 나오스케를 이이 가문에 넘겨준다"는 체면을 취함으로써 받아들였다.[59] 사건 당일 저녁 무렵 나오스케의 목은 이이 가문에 보내졌다(엔도 타네무네는 현역 막부이고 히코네 인근의 번주이기도 하여 유명한 나오스케의 얼굴을 가신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실제로는 눈치챘을 가능성이 높다). 그 후, 이이 가문에서는 "주군은 부상으로 자택 요양 중"이라는 사실을 숨긴 보고서를 막부에 제출하고, 나오스케의 목은 히코네 번 저택에서 번의사 오카지마 겐켄에 의해 몸통과 봉합되었다.
4. 3. 사상자 및 처분
桜田門外の変|사쿠라다몬가이노헨일본어에서 습격자 측은 가마를 공격했던 이나다 주조가 즉사하고, 아리무라 지자에몬 등 4명은 중상을 입고 자수 후 할복했다. 다른 사람들도 자수하거나 체포된 뒤 살해되거나 옥사했다. 마스코 긴파치와 가이고 사키노스케는 잠복하여 메이지 시대까지 살아남았다.[1]이이 나오스케 측은 이이 외에 8명이 사망(즉사 4명, 추후 사망 4명)하고 13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 가문은 가독 상속이 허락되었으나, 나오스케 호위에 실패한 생존자들은 2년 후인 1862년에 처벌받았다. 구사카리 슈고로 등 중상자는 시모쓰케노쿠니 사노의 아게야에 유폐되었고, 경상자는 전원 할복, 상처가 없는 자는 신분에 관계없이 참수되고 가문이 단절되었다.[1]
히코네 번의 이러한 가혹한 처사는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볼 때 주군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묻는 것을 넘어, 지나치게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조치였다고 비판받을 수 있다. 특히, 상처가 없는 자들까지 모두 참수하고 가문을 단절시킨 것은 봉건적 주종 관계의 맹점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구분 | 대상 | 인원 | 처분 | 비고 |
|---|---|---|---|---|
| 습격자 측 | 이나다 주조 | 1명 | 즉사 | 가사이에게 베임 |
| 아리무라 지자에몬 외 3명 | 4명 | 중상 후 자수, 할복 | 히코네 번 무사들의 반격으로 중상 | |
| 마스코 긴파치, 가이고 사키노스케 외 불명 | 불명 | 자수/포박 후 살해/옥사 혹은 잠복 후 메이지 시대까지 생존 | ||
| 히코네 번 측 | 이이 나오스케 | 1명 | 사망 | |
| 사망 | 8명 | 즉사 4명, 추후 사망 4명 | 가독 상속 허락 | |
| 생존자 | 13명 | 중상자는 유폐, 경상자는 할복, 무상자는 참수 및 가문 단절 | 나오스케 호위 실패에 대한 처분 |
5. 사건의 영향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사쿠라다문 밖의 변은 일본 정치와 사회에 단기적, 장기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으로 막부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존왕양이 운동이 격화되었다.[2]
이 사건은 1864년 덴구당의 난을 유발하여, 히코네번 무사들이 '나오스케 공의 복수'를 명분으로 미토번 무사들을 추격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다케다 고운사이 등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사쓰마 번과 미토 번이 제안한 ''고부 갓타이''(천황과 쇼군의 연합) 정책을 막부가 채택하게 만들었지만, 이는 곧 ''존왕양이'' 운동으로 확대되었다.[2][6] 이로 인해 일본은 10년간의 폭력 사태를 겪었고, 무사 계급의 역할이 다시 중요해졌다.[4]
이러한 갈등은 결국 보신 전쟁과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막부가 패배한 후에도 신정부는 이이 나오스케의 정책과 유사하게 서구 열강과의 무역 및 외교 관계를 강화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시마즈 히사미쓰는 분큐 개혁을 통해 막부 정치 쇄신을 요구했고,[79] 이로 인해 이이 나오스케 정권은 청산되었다. 안도 노부마사 등은 권력을 잃었고, 히코네 번은 영지를 감봉당했다.
게이오 시대에 히코네 번은 조슈 정벌과 도바-후시미 전투에 참전했지만, 이후 신정부군에 가담하여 도막의 자세를 보였다. 미토 번에서는 고도칸 전쟁과 마쓰야마 전쟁을 거쳐 도쿠가와 아키타케가 마지막 번주가 되었다.
사쿠라다문 밖의 변 습격자들과 덴구당 등은 야스쿠니 신사에 함께 모셔졌다.[82]
1968년, 사건 발생 109년 만에 미토 시와 히코네 시는 화해하고 친선 도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2013년 히코네 시장 선거에서는 이 사건과 관련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5. 1. 막부 권위 실추
이이 나오스케 암살 사건은 막부의 권위를 크게 떨어뜨렸다. 이 사건으로 막부가 추진하던 정치 노선은 실패했고, 막부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이는 존왕양이 운동이 격화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실력 행사와 무력을 통한 전란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2]사쿠라다문 밖의 변 이후, 바쿠후는 사쓰마 번과 미토 번이 제안한 ''고부 갓타이''( "천황과 쇼군의 연합") 정책을 채택하며 입장을 완화했다. 이 정책으로 이후 몇 년간 양측은 정치적 우위를 다투었고, 이는 곧 폭력적인 ''존왕양이'' 운동으로 확대되었다.[2][6]
이 사건은 일본에 10년간의 폭력을 불러왔고, 무사 통치와 무사 정신 문화를 부활시켰다.[4] 이 사건 이전, 무사 계급은 일본 근대화 속에서 무사로서의 사명감을 잃고 약한 존재로 묘사되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무사들의 위상이 다시 강화되었다.[4]
이러한 갈등은 보신 전쟁에서 쇼군 정권의 군사적 패배와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졌다. 바쿠후 패배에도 불구, 신정부는 이이 나오스케 암살자들보다 그의 정책에 더 가까운 서구 열강과의 무역 및 외교 관계 정책을 채택했다.
5. 2. 존왕양이 운동 격화
이이 나오스케 다이로(大老)가 추진했던 막부 정치 개혁은 실패로 끝났고, 막부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이는 존왕양이 운동이 더욱 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2][6] 또한, 기오이자카의 변까지 이어지는 무력 투쟁의 시대를 열었다.1864년 덴구당의 난이 일어나자, 히코네번 무사들은 '나오스케 공의 복수'를 외치며 나카센도를 봉쇄하고 쓰쿠바 산에서 교토로 향하던 미토번 무사들을 추격하려 했다. 덴구당은 결국 미노와 히다을 거쳐 에치젠으로 들어가 쓰루가에서 항복했고, 다케다 고운사이 등 미토 낭인 무사 352명은 처형당했다.
사쿠라다몬 밖의 변은 외국 침략에 대한 대중 봉기를 일으켰고, 이이 나오스케 암살로 인해 바쿠후는 사쓰마 번과 미토 번이 제안한 ''고부 갓타이''(천황과 쇼군의 연합) 정책을 채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곧 폭력적인 ''존왕양이''(존황양이) 운동으로 확대되었다.[2][6] 이 사건은 일본에 10년간의 폭력을 불러왔고, 무사 통치와 무사 정신 문화를 부활시켰다.[4]
이 갈등은 보신 전쟁에서 쇼군 정권의 군사적 패배와 1868년 메이지 유신 성립으로 해결되었다. 바쿠후가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정부는 이이 나오스케의 정책에 더 가까운 서구 열강과의 무역 및 외교 관계 정책을 채택했다.
5. 3. 메이지 유신으로의 연결
이이 나오스케의 죽음은 그가 추진했던 막부 중심의 정치 체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는 도쿠가와 고산케 중 하나인 미토 도쿠가와 가와 후다이 다이묘 필두인 이이 가문 사이의 갈등을 야기했고, 막부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결국 이는 분큐 시대 이후 존왕양이 운동이 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2]사쿠라다몬 밖의 변은 1867년 대정봉환과 이듬해 에도 개성으로 이어진 메이지 유신의 직접적인 기점이 되었다.
사건 이후, 에도 시내에는 이이 나오스케 암살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사건 현장을 구경했으며, 이이 나오스케의 강압적인 통치와 히코네 번사들의 무능함을 비꼬는 풍자가 유행했다.[58] 서민들은 이 사건을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원한을 갚은 사건으로 여기기도 했다.[78]
이후 시마즈 히사미쓰는 분큐 개혁을 통해 막부 정치의 쇄신을 요구했다.[79] 이 개혁으로 이이 나오스케 정권은 청산되었고, 안도 노부마사 등은 노중에서 파면되었다. 히코네 번은 영지를 감봉당하고 교토 수호직을 박탈당했다.
게이오 2년(1866년) 조슈 정벌에서 히코네 번사들은 막부 측으로 참전했지만 대패했다. 게이오 4년(1868년) 도바-후시미 전투에서는 히코네 번이 신정부군에 가담하여 도막의 자세를 보였다.
1868년 미토 번에서는 도쿠가와 요시아쓰 사후 도쿠가와 아키타케가 번주가 되었고, 고도칸 전쟁과 마쓰야마 전쟁을 거쳐 1869년 마지막 번주가 되었다.
사쿠라다몬 밖의 변 습격자들과 덴구당 등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82]
사건 발생 약 109년 후인 1968년, 미토 시와 히코네 시는 화해하고 친선 도시 제휴를 맺었다. 2013년 히코네 시장 선거에서는 사쿠라다몬 밖의 변과 관련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5. 4. 한국에 미친 영향
이이 나오스케 암살 사건인 사쿠라다문 밖의 변은 일본 내정에 큰 영향을 미쳐, 10년간의 폭력 사태를 불러왔고, 무사 통치와 정신 문화를 부활시켰다.[4] 이 사건은 조선의 개항과 근대화 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일본의 정치적 혼란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정책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잠재적 요인이 되었다.이 사건으로 일본에서는 존왕양이 운동이 확대되었고, 이는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졌다.[2][6]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구 열강과의 무역 및 외교 관계를 강화하는 정책을 채택했는데, 이는 이이 나오스케의 정책과 유사했다. 이러한 일본의 변화는 조선에 대한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조선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 하에 있었고, 일본의 정세 변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6. 그 후
1862년 시마즈 히사미쓰가 군사를 이끌고 상경하여 막부 정치 쇄신을 요구하자, 막부는 마쓰다이라 슌가쿠의 주도로 이이 나오스케에 대한 청산을 도모했다. 그 결과 나오스케의 측근이었던 로주 안도 노부마사를 불러 구제 히로치카를 파면하고, 이이 가문으로부터 교토수호직을 박탈하여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교토수호직에 임명했다. 또한 녹봉도 35만 석에서 25만 석으로 줄었다.[11] 히코네 번에서는 나오스케의 심복이었던 나가노 슈젠이나 우쓰기 로쿠노죠를 참수했지만, 감봉은 면하지 못했다.
사건 이후, 미토 번은 막부의 의심을 풀기 위해 낭사들이 탈번한 자들이며, 자신들은 막부의 법에 따라 그들을 처벌할 것이라고 상신했다. 또한, 관계자들을 수색하고 체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노력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중재 덕분에 미토 번은 큰 처벌 없이 사태를 넘길 수 있었다.[81]
이이 나오스케가 안세이 대옥을 일으켜 존왕양이파를 탄압한 것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사쿠라다문 밖의 변은, 막부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킨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사건 이후 1933년 11월, 미토시에서는 사건으로 사망한 미토 번사 18명을 기리는 '사쿠라다 열사제'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는 도쿠가와 종가 제16대 당주 도쿠가와 이에마사와 히코네시장이 참석하여, 양측 간의 화해가 이루어졌다.[26]
1955년, 이이 나오스케의 묘소가 있는 고토쿠지에서 '이이 나오스케 백년제'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미토 시장과 도쿠가와 종가 제17대 당주 도쿠가와 무네나리가 참석하여, 양측 간의 화해 무드가 더욱 조성되었다.
1960년 3월, 사쿠라다문 밖의 변 백주년을 기념하여 미토시와 히코네시는 친선 도시 제휴를 맺었다. 이후 양 도시는 매년 대표단을 상호 파견하는 등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26]
6. 1. 이이 가문
1862년, 시마즈 히사미쓰가 군사를 이끌고 상경하여 칙사 오하라 시게토미를 받들어 막부 정치 쇄신을 요구하자, 막부는 마쓰다이라 슌가쿠의 주도로 이이 나오스케에 대한 청산을 도모했다. 그 결과 나오스케의 측근이었던 로주 안도 노부마사를 불러 구제 히로치카를 파면하는 동시에, 나오스케의 실정을 이유로 이이 가문으로부터 교토수호직을 박탈하여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교토수호직에 임명했다. 또한 녹봉도 35만 석에서 25만 석으로 줄었다.[11] 히코네번에서는 나오스케의 심복이었던 나가노 슈젠이나 우쓰기 로쿠노죠를 참수했지만, 감봉은 면하지 못했다.6. 2. 미토 번
사건 이후, 미토 번은 막부의 의심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미토 번은 낭사들이 탈번한 자들이며, 자신들은 막부의 법에 따라 그들을 처벌할 것이라고 상신했다. 또한, 관계자들을 수색하고 체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노력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중재 덕분에 미토 번은 큰 처벌 없이 사태를 넘길 수 있었다.[81]그러나 미토 번 내에서는 존왕양이 사상이 강한 급진파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1860년 조슈 번과 맺은 성파의 맹약을 기반으로, 1861년부터 1864년까지 제1차 도젠지 사건, 사카시타 문 밖의 변, 덴구당의 난 등 여러 사건을 일으키며 존왕양이 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덴구당의 난은 미토 번 내부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 덴구당은 전 미토 번주의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하며 교토로 향했지만, 이이 나오스케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히코네 번 무사들이 길을 막았다. 결국 덴구당은 1864년 쓰루가에서 항복했고, 많은 미토 번사들이 처형되거나 추방되었다.[81]
이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고, 대정봉환과 에도 개성을 통해 에도 막부가 막을 내리면서, 미토 번의 존왕양이 운동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6. 3. 현대의 평가와 기념
이이 나오스케가 안세이 대옥을 일으켜 존왕양이파를 탄압한 것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사쿠라다문 밖의 변은, 막부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킨 사건으로 평가받는다.사건 이후 1933년 11월, 미토시에서는 사건으로 사망한 미토 번사 18명을 기리는 '사쿠라다 열사제'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는 도쿠가와 종가 제16대 당주 도쿠가와 이에마사와 히코네시장이 참석하여, 양측 간의 화해가 이루어졌다.[26]
1955년, 이이 나오스케의 묘소가 있는 고토쿠지에서 '이이 나오스케 백년제'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미토 시장과 도쿠가와 종가 제17대 당주 도쿠가와 무네나리가 참석하여, 양측 간의 화해 무드가 더욱 조성되었다.
1960년 3월, 사쿠라다문 밖의 변 백주년을 기념하여 미토시와 히코네시는 친선 도시 제휴를 맺었다. 이후 양 도시는 매년 대표단을 상호 파견하는 등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2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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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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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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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서
ただし、本画像では両端が一部しか掲載されてい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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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麹町永田町 外桜田絵図』(尾張屋清七版)
[9]
문서
『江戸散歩』東京大学史料編纂所(角川書店、2016年)52~55ページ
[10]
문서
『近世日本国民史 桜田事変』徳富 蘇峰
[11]
문서
中国(清)では既に阿片戦争が1840年から2年後まで行われ、不平等条約を欧米列強と結ばされていた。
[12]
문서
徳川斉昭の七男。御三卿・一橋家へ養子に入り、当主となっていた。慶喜自身は将軍家襲封に乗り気ではなかったとされ、「骨が折れるので、天下を取ってから失敗するよりは取らないほうが大きく勝っている」という内容の手紙を父・斉昭へ送っていた(徳川ミュージアム蔵))。徳川慶喜の項を参照。
[13]
서적
畑尚子『幕末の大奥ー天璋院と薩摩藩』(岩波新書、2007年)
[14]
문서
関白を辞めさせるには幕府の了解が必要とされる。江戸時代の関白職は禁中並公家諸法度によった。
[15]
웹사이트
井伊直弼と開国150年祭公式サイト 幕末の政局と井伊直弼
http://www.hikone-15[...]
井伊直弼と開国150年祭実行委員会
2014-04
[16]
문서
千葉県松戸市小金。
[17]
문서
岩崎
[18]
문서
茨城町長岡。
[19]
문서
吉田
[20]
문서
その後、桜田門外の変が起きて密勅は水戸藩領内に留まった。
[21]
문서
岡村
[22]
문서
岩崎
[23]
문서
後に、この約のもと上京した水戸浪士らは孤立した形となった。さらに、事件後の水戸浪士・関鉄之助が薩摩藩へ向かった折、薩摩入藩を拒否された。薩摩藩・精忠組の一部はこれに一時反発した。
[24]
문서
この水戸藩士単独決行の考えは、『斬奸趣意書』の中にも見られる。
[25]
문서
岡村
[26]
문서
茨城県水戸市紺屋町。
[27]
문서
岩崎
[28]
문서
岩崎
[29]
문서
岡村
[30]
문서
安藤信正は直弼の側近として安政の大獄の片棒を担いでいたので、攘夷志士から奸賊と見做されていた。安藤は水戸藩士から後に坂下門外の変で襲撃された。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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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松松平家は彦根井伊家と共に江戸城溜間詰の大名であり、頼胤は直弼と思想的な親交もあったため、条約調印問題や将軍継嗣問題ではどちらも南紀派についた。一方で、高松松平家は水戸徳川家の御連枝であり、加えて前藩主・松平頼恕は徳川斉昭の異母兄、頼胤の養嗣子・松平頼聰はその頼恕の実子であった。頼聰は直弼の娘・松平千代子と結婚し、水戸藩士らの不評を買っていた。なお、安政の大獄の際、頼胤は本家(水戸家)を監督できなかったとして譴責を受けている。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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ただし、前述の様、薩摩藩による京都義挙計画は破綻していた。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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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川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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岡村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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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在の憲政記念館辺り。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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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在の警視庁辺り。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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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都品川区北品川。
[38]
서적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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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在の憲政記念館・国会前庭(北庭)付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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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41]
서적
[42]
서적
[43]
서적
2015-11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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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在の桜田門交差点。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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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時使用されたピストルは、マシュー・ペリーペリー艦隊が1854年、再度来航した際に幕府に贈呈した最新型コルトM1851を、徳川斉昭が入手して藩内で模倣して製造させていた物。十八浪士の一人・杉山弥一郎は鉄砲鍛冶であり、この模倣技術との深い関わりについて、今後の研究結果が待たれる。水戸浪士の多くが襲撃の際にこのピストルを携帯していた。2010年1月16日の報道によると、実際に発砲したものかは定かではないが、このピストルは現物が出現し、そこには高度な施条が刻まれていた。この銃は連合国軍最高司令官総司令部GHQによって没収された後アメリカ合衆国アメリカに渡り、日本に里帰りしている。コルトM1851の項を参照。
[46]
서적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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広島県立歴史博物館所蔵『骨董録』より。
[48]
뉴스
「井伊大老警護の武士逃げ散った」…桜田門外の変 奉公人証言録
http://osaka.yomiuri[...]
読売新聞関西版
2010-07-11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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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時の永田の刀が、子孫の永田茂(鈴木貫太郎の末弟)によって彦根城博物館に、赤備え甲冑等と共に寄贈されている。斬りこみ傷が多数あり、激しい戦闘の生々しさを物語っている。河西忠左衛門の刃こぼれした刀も同博物館に保存されている。
[50]
서적
[51]
서적
[52]
웹사이트
水戸藩開藩四百年記念「桜田門外ノ変」映画化支援の会、稲田重蔵、2014年4月閲覧。
http://mitoppo.jp/mo[...]
2014-04
[53]
서적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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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連の事件の経過と克明な様子は、伝狩野芳崖作『桜田事変絵巻』(彦根城博物館蔵)に描かれている。
[55]
문서
2014年現在の警視庁辺り。
[56]
서적
幕末証言 史談会速記録を読む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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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門のすぐそばを血で汚したままにはできない上に、登城のため通過待ちをしている大名家がいたため。
[58]
서적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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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時点では公式には「井伊直弼は負傷して治療中で且つ存命」ということになっており、首を渡すとなると「直弼は既に死んでいる」ということになってしまうため。
[60]
서적
2015-11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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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田倉濠(和田倉噴水記念公園)辺り。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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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在の皇居(旧江戸城)・大手門交差点辺り。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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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都千代田区丸の内2丁目、丸の内二丁目ビル際辺り。
[64]
웹사이트
水戸藩開藩四百年記念「桜田門外ノ変」映画化支援の会、山口辰之介、2014年5月閲覧。
http://mitoppo.jp/mo[...]
2014-05
[65]
문서
東京都千代田区丸の内1丁目3辺り。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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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都千代田区丸の内1丁目6辺り。
[67]
웹사이트
水戸藩開藩四百年記念「桜田門外ノ変」映画化支援の会、岡部三十郎。2014年5月閲覧
http://mitoppo.jp/mo[...]
2014-05
[68]
서적
[69]
서적
[70]
서적
[71]
서적
[72]
문서
現在の[[新潟県]][[岩船郡]][[関川村]]。[[南魚沼郡]][[湯沢町]]の[[越後湯沢温泉]]とは異なる。
[73]
서적
[74]
문서
現在の[[城里町]]。
[75]
문서
[[昭和10年]]、増子の孫によって『桜田烈士増子金八事大畠誠三郎略伝』が出版された。
[76]
문서
現在の[[常陸大宮市]]。
[77]
서적
[78]
뉴스
日刊ゲンダイ2023年6月13日号12面
日刊ゲンダイ
2023-06-13
[79]
문서
なお、[[生麦事件]]がこの時の久光の帰途に起こっている。
[80]
서적
明治史要
[81]
서적
[82]
서적
[83]
웹사이트
水戸市、都市交流
https://www.city.mit[...]
2021-04-19
[84]
웹사이트
水戸市、都市交流
http://www.city.mito[...]
2013-03-20
[85]
웹사이트
桜田門外の変が争点?…襲撃の子孫が市長選に
https://web.archive.[...]
[86]
방송
銃声とともに 桜は散った〜「桜田門外の変」の謎〜
2015-03-04
[87]
서적
[88]
서적
慵斎野処士墓碑銘
https://dl.ndl.go.jp[...]
常南通信社
[89]
뉴스
タウンニュース「桜田門外」裏面史刻む廣福寺・畑権助の辞世碑
https://www.townnews[...]
[90]
서적
水戸徳川家と幕末の烈公
[91]
서적
水戸綺談
新いばらきタイムス社
[92]
서적
これが水戸黄門だ!
日之出出版
2003-11-19
[93]
웹사이트
滋賀彦根新聞、2012年6月8日付け、豪徳寺の墓に井伊直弼埋葬されず? 地下3㍍に石室なく、滋賀彦根新聞社、2014年5月閲覧。
https://shigahikone.[...]
[94]
문서
이 때 사용된 권총은, 페리 함대가 내항할 때 막부에 증정한 미국제 [[콜드]]M1848를,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입수하여 번 내에서 모방하여 제조한 물건이며, 제조기술수준이 낮아 총 안에 [[강선]]이 새겨지지 않은 것이 판명되었다. 또한, 미토번의 많은 낭인지사가 습격할 때의 권총을 휴대하고 있었다라는 것을 구전으로 그 손자가 전해주고 있다.
[95]
문서
[[사쓰마번]] 지겐류의 특징으로 원숭이의 절규를 모방한 독특한 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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