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마무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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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마무기 사건은 1862년 일본 에도 시대에 발생한 사건으로, 영국 상인 찰스 레녹스 리차드슨이 사쓰마 번의 다이묘 행렬과 마주쳐 사망한 사건이다. 사건의 배경에는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과 존왕양이 운동의 대두, 그리고 사쓰마 번의 입장이 있었다. 사건 발생 후, 영국은 일본에 범인 처벌과 배상을 요구하며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사쓰에이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일본의 개항 이후 발생한 정치적 위기를 보여주는 사례로, 일본 내에서 존왕양이 운동을 격화시켰으며, 사쓰마 번이 서양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에 대한 평가는, 리차드슨의 행동에 대한 비판과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을 지적하는 시각과, 다이묘 행렬에 대한 무례한 행동이 사건을 촉발했다는 시각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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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무기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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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명 | 생맥 사건 |
발생 일시 | 1862년 9월 14일 |
발생 장소 | 무사시 생맥 (현재의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 쓰루미 구 생맥) |
원인 | 사쓰마 번 행렬에 대한 외국인 무례 |
결과 | 영국의 배상 요구, 사쓰에이 전쟁 발발 |
관련자 | |
주요 인물 (사쓰마 번) | 시마즈 히사미쓰 |
피해자 | 찰스 레녹스 리처드슨 (사망) 마가렛 보로데일 클라크 마샬 |
배경 | |
시대적 배경 | 에도 시대 말기, 존왕양이 운동의 영향 |
당시 상황 | 외국인에 대한 반감 고조, 사무라이의 특권 의식 |
경과 | |
사건 발생 | 시마즈 히사미쓰의 행렬 통과 중, 찰스 레녹스 리처드슨 일행이 행렬을 가로질러 무례를 범함. 이에 분노한 사무라이들이 찰스 레녹스 리처드슨을 베어 죽이고, 다른 일행에게도 부상을 입힘. |
사건 이후 | 영국은 에도 막부와 사쓰마 번에 배상을 요구. 사쓰마 번이 배상 요구를 거부하자, 영국은 무력 시위를 감행하여 사쓰에이 전쟁이 발발함. |
영향 | |
정치적 영향 | 존왕양이 운동의 격화, 도막 운동의 촉진 |
외교적 영향 | 외국과의 관계 악화, 불평등 조약 개정의 필요성 증대 |
기타 | |
관련 용어 | 존왕양이 사쓰마 번 사무라이 사쓰에이 전쟁 |
2. 사건의 배경
19세기 중반 미국 페리 제독의 함대가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면서, 17세기 초부터 시행되어 외국과의 교류를 엄격하게 통제했던 鎖国|사코쿠일본어라 불린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1854년 미일화친조약과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비롯한 불평등 조약 체결로 일본은 개항을 하게 되었고, 이는 일본 사회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
개항 이후 일본에서는 서양 세력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존왕양이 운동이 격화되었다. 존왕양이는 왕을 존경하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운동으로, 에도 막부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일본 사회의 불안정을 심화시켰다.[1] 특히,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존왕양이 운동의 중심 세력이었다.
1862년(분큐 2년), 사쓰마번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의 아버지이자 번정을 이끌던 시마즈 히사미쓰는 막부 정치 개혁을 명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에도로 상경했다. (분큐 개혁 참조) 이후 칙사 오하라 시게토미(大原重徳)와 함께 교토로 돌아가는 길에 나마무기 사건이 발생했다.[1]
시마즈 히사미쓰 일행은 8월 21일 에도를 출발, 교토로 향하던 중 요코하마 근처 나마무기 촌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도카이도를 따라 가와사키 다이시 사찰을 방문하기 위해 여행 중이던 영국인 4명과 마주치게 된다. 영국인은 상하이에서 온 상인 찰스 레녹스 리처드슨, 요코하마 상인 우드소프 찰스 클라크와 윌리엄 마셜, 그리고 마셜의 처제 마가렛 왓슨 보라데일이었다.
2. 1.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과 개항
19세기 중반 미국 페리 제독의 함대가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면서, 17세기 초부터 시행되어 외국과의 교류를 엄격하게 통제했던 鎖国|사코쿠일본어라 불린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1854년 미일화친조약과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비롯한 불평등 조약 체결로 일본은 개항을 하게 되었고, 이는 일본 사회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2. 2. 존왕양이 운동의 대두
개항 이후 일본에서는 서양 세력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존왕양이 운동이 격화되었다. 존왕양이는 왕을 존경하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운동으로, 에도 막부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일본 사회의 불안정을 심화시켰다.[1] 특히,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존왕양이 운동의 중심 세력이었다.2. 3. 사쓰마번의 입장
1862년(분큐 2년), 사쓰마번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의 아버지이자 번정을 이끌던 시마즈 히사미쓰는 막부 정치 개혁을 명분으로 7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에도로 상경했다. (분큐 개혁 참조) 이후 칙사 오하라 시게토미(大原重徳)와 함께 교토로 돌아가는 길에 나마무기 사건이 발생했다.[1]시마즈 히사미쓰 일행은 사건 당일 밤, 요코하마 근처 가나가와 숙이 아닌 호도가야 숙으로 숙박을 변경했다. 오쿠보 도시미치의 일기에 따르면, 요코하마 거류지의 보복을 경계하여 번사 2명이 탐색에 나섰다고 한다. 공의 어령인 나마무기 촌 촌 관리는 즉시 가나가와 봉행에 사건을 신고했고, 봉행은 히사미쓰 일행에게 사자를 보내 보고를 요구했다. 그러나 히사미쓰 일행은 다음 날 "낭인 3~4명이 갑자기 나타나 외국인 1명을 쳐서 죽이고 어디론가 사라졌으며, 사쓰마 번과는 무관하다"고 보고했다. 봉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히사미쓰 일행은 서둘러 교토로 향했다. 가나가와 봉행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로주 이타쿠라 가쓰키요는 사쓰마 번 에도 유수역에게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지만, 며칠 후 "아시가루 오카노 신스케가 행렬에 말을 타고 다가온 이방인을 베어 도주했다. 수색 중이나 행방불명이다"라고 허위 보고를 했다.[14] 가나가와 봉행의 상세한 보고로 사건 개요를 파악한 막부는 분노하여 에도 유수역에게 출두를 요구하며 규탄했지만, 사쓰마 번 측은 발뺌했다.
히사미쓰 등은 에도 도착 직후인 1862년 6월 23일, 막부에 소장[4]을 제출하여 다이묘 행렬에 대한 외국인의 "무례"를 지적했다. 소장에는 히사미쓰 행렬이 이미 왕복 과정에서 기마 외국인과 마주쳤는데, 좁은 도카이도에서 다이묘 행렬에 아랑곳하지 않고 옆으로 나란히 넓게 자리를 차지하는 등 무례한 모습이 보였다고 적혀 있었다. 이어서 "사소한 일은 눈감아 주라고 번사들에게 말했지만, 상대방에게 눈에 띄는 무례가 있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각국 공사에게 무례를 삼가도록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막부는 "이미 통지했지만, 말도 통하지 않고 습관도 달라 참아서 원만하게 처리해 달라"고 답했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통지를 하지 않았다.
한편, 도카이도 연변의 백성들은 ‘과연 사쓰마 님’이라며 히사미쓰 행렬을 환영했다고 한다. 1862년 9월 30일, 히사미쓰는 상경 9일 만에 조정에 참석했고, 고메이 천황은 직접 행차하여 히사미쓰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는 무관직이었던 자에게는 이례적인 대우였다. 야마시나 아키라 황자가 이 사건을 소재로 지은 ‘사쓰마의 노장 발충관 천자백관의 위난을 면하게 하고, 영기발랄한 나마무기 지역 해변 십리 달빛을 차게하네’라는 한시는 메이지 시대에 애창되었다. 그러나 나마무기 사건으로 조정이 양이 일색으로 물든 것은 히사미쓰와 사쓰마번의 기대를 넘어선 결과였다. 사쓰마번의 막부 정치 개혁 의도는 양이가 아니었고, 오히려 막부의 외국 무역 독점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존왕양이파가 지배하는 교토 정세에 실망한 히사미쓰는 23일에 교토를 떠나 가고시마로 돌아갔다.
3. 사건의 발생
1862년(분큐 2년) 8월 21일, 사쓰마번 번주 시마즈 모치히사의 아버지이자 번정을 이끌던 시마즈 히사미쓰는 막부 정치 개혁이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군대를 이끌고 에도로 상경했다(분큐 개혁 참조). 이후, 칙사 오하라 시게토미(大原重徳)와 함께 교토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히사미쓰는 오하라 일행보다 하루 먼저 에도를 출발했는데, 이때 인솔한 군대는 400여 명이었다.
히사미쓰의 행렬이 나마무기 마을에 접어들 무렵, 말을 탄 영국인 일행과 마주쳤다. 당시 영국인 일행은 찰스 레녹스 리처드슨을 포함하여 4명이었다.
3. 1. 리처드슨 일행의 도카이도 통행
1862년 9월 14일, 상하이에서 온 상인 찰스 레녹스 리처드슨, 요코하마 거주 상인 우드소프 찰스 클라크와 윌리엄 마셜, 마셜의 처제 마거릿 왓슨 보라데일 등 4명의 영국인들은 도카이도를 따라 가와사키 근처 가와사키 다이시 사찰을 방문하기 위해 여행 중이었다.[1] 리처드슨은 은퇴를 발표하고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들과 사찰을 방문하고 있었다. 이들은 오전 2시 30분에 조약 항구인 요코하마를 배로 출발하여 요코하마 항을 건너 가나가와 마을로 가서 미리 보내놓은 말을 탔다. 그들은 인근 쓰루미구의 나마무기 마을(현재 요코하마)을 지나 북쪽으로 가던 중, 사쓰마 번의 다이묘 시마즈 타다요시의 섭정이자 아버지인 시마즈 히사미쓰의 크고 무장한 수행원과 마주쳤다.[1]분큐 2년(1862년), 사쓰마 번주 시마즈 시게히사의 아버지이자 번정 최고 지도자였던 시마즈 히사미쓰(44세)는 막부 개혁을 위해 700명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에도로 향했고(분큐의 개혁 참조), 칙사 오하라 시게토미와 함께 교토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히사미쓰는 오하라 일행보다 하루 먼저 구력 8월 21일에 에도를 출발했다. 이때 이끌었던 군대는 400명 정도였다.[4]
같은 날 오후 2시쯤, 행렬이 나마무기 마을에 들어섰을 때, 말을 탄 영국인 4명과 마주쳤다. 이들은 요코하마에서 미국인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근무했던 우드소프 찰스 클라크, 요코하마에 거주하는 견사 윌리엄 마셜, 마셜의 사촌이자 영국령 홍콩에 거주하는 영국 상인의 아내로서 요코하마로 관광을 왔던 마거릿 보로데일 부인, 그리고 상하이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해왔고 구경을 위해 일본에 온 찰스 리처드슨이었다. 이날은 일요일이었고, 4명은 도카이도에서 승마를 즐기거나 관광으로 가와사키 대사로 향하고 있었다고 한다. 4명은 외국인 거류지가 있는 요코하마 간나이를 나와 작은 배로 가나가와로 건너가 거기서 말을 타고 도카이도를 따라 에도 방면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3. 2. 충돌의 발생
1862년(분큐 2년), 사쓰마번주 시마즈 모치히사의 아버지이자 번정을 이끌던 시마즈 히사미쓰는 막부 정치 개혁의 대의명분을 내걸고 700명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에도로 상경했다.(분큐 개혁 참조) 이후 칙사 오하라 시게토미(大原重徳)와 함께 교토로 돌아가는 길에, 8월 21일에 히사미쓰는 오하라 일행보다 하루 먼저 에도를 출발했다. 이때 인솔한 군대는 400여 명이었다.행렬이 나마무기 마을에 접어들 무렵, 말을 탄 영국인 일행과 마주쳤다. 이들은 요코하마에서 미국인이 운영하는 상점에 근무하던 우드소프 찰스 클라크, 요코하마에 거주하던 비단 상인 윌리엄 마샬, 마샬의 사촌이자 홍콩에 거주하던 영국 상인의 아내로 요코하마에 관광을 왔던 마가렛 보라데일 부인, 그리고 상하이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하다가 역시 관광을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 있던 찰스 레녹스 리처드슨 일행이었다. 일행은 이날 도카이도에서 승마를 즐기다가, 관광 목적으로 가와사키 다이시(''헤에켄지'')로 향하고 있었다고도 한다.
나마무기 마을 주민 신고서와 가나가와 봉행소 관리의 각서, 그리고 당시 영국공사관 통역견습이었던 어니스트 사토우의 일기를 대조해 보면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행렬의 선두에 있던 사쓰마번사들은 정면에서 행렬로 말을 타고 들어온 영국인 4명에게 몸짓으로 하마하여 길을 비키도록 설명했지만, 영국 사람들은 ‘옆으로 통과’하라고 지시하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행렬은 길 폭을 거의 다 사용하며 진행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네 사람은 점점 행렬 속을 거슬러 오는 모양이 되었다. 총포대도 일단 돌파하고 히사미쓰가 타고 있는 가마 근처까지 말을 몰고 갔고, 그곳에서 수행원들의 목소리에 정말 좋지 않았다고 눈치를 챈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말을 내릴 생각은 하지 못했고, 이번에는 ‘되돌아가라’고 말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말머리를 돌려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멋대로 움직였다. 그때 몇 사람이 칼을 휘둘렀다.
4명은 놀라 도망치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리처드슨은 중상을 입고, 오동나무집(桐屋)이라는 요리집 200m 정도 앞에서 낙마하면서 중지를 찔렸다. 마샬과 클라크도 중상을 입고 보라데일 부인에게 “당신을 도울 수 없기 때문에, 단지 말을 버리고 도망가라”고 외쳤다. 보라데일 부인도 일격을 당했지만, 모자와 머리의 일부가 날아간 그대로, 가장 먼저 요코하마 거류지로 달려 돌아와 구원을 호소했다. 마샬과 클라크는 피를 흘리면서도 말을 타고 가나가와에 당시 미국영사관으로 사용되었던 혼가쿠지에 뛰어들어 도움을 요청했고, 제임스 커티스 헵번 박사의 도움을 받았다.
《사쓰마번 해군사》에 따르면 리처드슨에 첫 일격을 가했던 인물은 나라하라 키자에몬이었으며,[11] 도망 도중에 총포대의 쿠키무라 지큐가 두번째로 베었다. (이후 히사기무라는 이 사건의 회고담을 가고시마 신보 지상에 상세하게 말하고 있다). 또한 당시 번주를 가까이서 모시던 신하였던 마쓰가타 마사요시가 직접 전하는 말에 따르면 가마 속의 히사미쓰는 “눈을 감고 태연한 신색”이었지만, 마쓰카타가 “외국인이 행렬을 범하여, 지금 이것을 정리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천천히 허리에 찬 칼이 빠지도록 스스로도 준비를 했다고 한다. 낙마 후, 빈사 상태의 리처드슨에게 "지금 편하게 해 주겠네"라고 가이샤쿠할 생각으로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은 이에다 노부요시였다고 한다.[12]
4. 사건의 경과 및 반응
1862년 9월 14일, 상하이에서 온 상인 찰스 레녹스 리처드슨을 포함한 영국인 4명이 도카이도를 따라 가와사키 다이시 사찰로 가던 중 나마무기 마을에서 사쓰마 번의 다이묘 시마즈 타다요시의 아버지이자 섭정인 시마즈 히사미쓰의 행렬과 마주쳤다.[1]
리처드슨 일행은 길 중앙으로 말을 몰았고, 시마즈의 가마와 경호원 사이로 끼어들려고 했다. 일본에서 사무라이는 ''기리-스테 고멘''이라는 특권이 있어 하위 계층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판단되면 공격할 수 있었다. 일본 측은 다이묘 행렬 앞에서 말에서 내려 절을 한 유진 밀러 밴 리드의 사례를 들며, 리처드슨 일행의 무례한 태도가 사건을 유발했다고 주장했다.[2]
반면, 서양인들은 영일우호조약에 따른 치외법권을 근거로 리처드슨의 죽음이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일본에 대한 징벌 조치를 요구했다. 영국 정부는 막부와 사쓰마 번에 배상금과 범인 처벌을 요구했다.[2] 이 사건으로 인해 요코하마 칸나이 지구의 외국인 사회는 공포에 휩싸였고, 서양 상인들은 자국 정부에 일본에 대한 응징을 촉구했다.
4. 1. 요코하마 거류지의 반응
이 사건은 도젠지 사건 등 당시까지 일어났던 외국인 살해 사건과는 달리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 다이묘 행렬의 수행원들 다수가 일제히 관련된 사건으로, 비록 시마즈 히사미쓰의 직접적인 명령은 없었더라도 암묵적 동의 하에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 역력했다. 사건 직후 각국 공사, 영사, 각국 해군 장교 등 요코하마 거류민들이 모여 대책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도 ‘시마즈 히사미쓰나 또는 그 고관들을 포로로 잡자’는 의제가 오르고 있어서 자칫하면 전쟁으로 직결될 수도 있어 영국공사관도 대처 방법에 고심을 거듭하게 된다.[10]사건 직후 보로데일 부인의 요청에 따라 먼저 움직인 것은 영국공사관 부속 의관이었던 윌리엄 윌리스였다. 말을 타고 계속되고 있던 사쓰마 번사의 행렬의 옆구리를 빠져 나마무기로 향하는 가운데, 요코하마에 거주하며 가세한 남자들 3명이 추격을 했고, 곧 영국 가나가와 영사 바이스 대위가 이끄는 공사관 소속의 기마호위대도 따라 잡았다. 일행은 지역 주민들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리처드슨의 시체를 발견하여 요코하마로 돌아왔다.[13]
영국 공사 대리 존 닐 중좌는 사쓰마와의 전투가 벌어질 것을 우려하여 기마호위대의 출동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그것을 무시하고 바이스 영사가 출동하였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사건 당일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요코하마 거류민 상당수가 시신을 수습한 바이스 영사를 지지하였고, 무기를 들고 보복을 외쳤다. 프랑스 공사 뒤셰느 드 베르쿠르가 그것을 응원하는 듯한 입장을 취했던 것도 거류민들의 움직임을 자극했다. 그러나 존 닐 중령은 냉정하게 현실적인 전력 부족과 전면전으로 발전할 경우의 불이익을 들어 설득하여 소동을 억누르며 막부와의 외교 교섭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자세를 관철했다.[10]
4. 2. 히사미쓰 일행의 대응
시마즈 히사미쓰 일행은 사건 당일, 요코하마와 가까운 가나가와 숙이 아닌 호도가야 숙으로 숙박 장소를 변경했다. 오쿠보 도시미치의 일기에 따르면, 요코하마 거류지의 보복 움직임을 경계하여 번사 2명이 정찰에 나섰다고 한다. 공의 어령인 나마무기 촌의 촌 관리는 즉시 사건을 가나가와 봉행에 신고했고, 봉행은 히사미쓰 일행에게 보고를 요구했다. 그러나 히사미쓰 일행은 "낭인 3~4명이 외국인 1명을 쳐서 죽이고 어디론가 사라졌으며, 사쓰마 번과는 무관하다"고 보고하고, 봉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급히 교토로 향했다.[14]로주 이타쿠라 가쓰키요는 사쓰마 번 에도 유수역에게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지만, 며칠 후 "아시가루 오카노 신스케가 말을 타고 행렬에 진입한 이방인을 베어 도주했다. 수색하고 있지만 여전히 행방불명이다"라고 허위 설명을 했다.[14] 가나가와 봉행으로부터의 상세한 보고를 통해 사건의 개요를 파악하고 있던 막부는 분노하여 에도 유수역에게 출두를 요구하며 규탄했지만, 사쓰마 번 측은 시치미를 뗐다.
4. 3. 막부의 대응
히사미쓰 일행은 사건 당일 요코하마에서 가까운 가나가와 숙소가 아닌 하도가야주쿠(程ヶ谷宿)에 숙박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당일 일기에서 요코하마 거류지의 보복 움직임을 경계하여 무사 2명이 정찰에 나섰다고 기록했다. 나마무기 마을의 관리는 즉시 사건을 가나가와 봉행에 신고했고, 봉행은 히사미쓰 일행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사건 보고를 요구했다. 그러나 히사미쓰 일행은 다음 날 “낭인 3~4명이 갑자기 나타나 외국인 1명을 베어 죽이고 사라졌으며, 사쓰마 번과는 관계없다”고 신고하고, 부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교토로 향했다.[14] 가나가와 봉행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로주 이타쿠라 가쓰키요는 사쓰마 번 에도 저택 집사에게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지만, 며칠 후 “아시가루인 오카노 신스케가 말을 타고 행렬에 진입한 이방인을 베고 도주했다. 찾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행방을 찾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가나가와 봉행으로부터 자세한 보고를 받고 사건의 개요를 파악하고 있던 막부는 사실과 다른 설명에 분노하여 저택 집사에게 출두를 요구하며 규탄했지만, 사쓰마 측은 모르는 체 넘겼다.1862년 6월 23일, 히사미쓰 등은 에도에 도착한 직후 막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4] 그 문서에 따르면, 왕복하는 길에서 이미 히사미쓰의 행렬이 말을 탄 외국인을 만났는데, 좁은 도카이도에서 다이묘 일행의 통행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란히 넓은 장소를 차지하는 무례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어 “웬만하면 눈 감아 주거나 번사들이 참는 경우도 있지만, 상대방의 극악무도가 도를 넘을 경우 가만히 있을 이유도 없다. 각국 공사들에게 무례한 짓을 삼가도록 알려 달라”고 탄원했다. 막부는 “이미 그런 지시를 내려두었지만, 말도 통하지 않고, 습관도 다르기 때문에 웬만하면 참고 원만히 끝내는 것이 좋다”고 대답했지만, 실제로는 그런 통지문을 외국영사관에 보낸 적이 없었다.
1862년 9월 16일 사건 발생 이틀 후, 에드워드 세인트 존 닐 대리 공사는 요코하마에서 외국 봉행 쓰다 마사미치와 회담했다. 이 회담에서 닐은 “칙사의 통행은 연락이 있었는데, 왜 시마즈 히사미쓰의 통행은 알려오지 않았는가”라고 추궁했다. 이에 대해 봉행은 “칙사는 고귀하지만, 다이묘는 막부 아래에 속하는 것으로 전달할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문제는 없었다”고 대답했다. 닐은 “칙사보다 사쓰마 번의 통행이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것은 뻔한 이야기이다”라고 반론했다. 닐은 본국 외무장관의 보고서에 히사미쓰 통행 소식이 없었다는 것을 명기하고, 외교상 자국에 유리한 막부의 과실을 지적했다.
8월 30일에는 로주 이타쿠라 가쓰키요의 저택에서 닐과 로주 이타쿠라, 미즈노 다다키요와 절충을 하였고, 여기서도 영국 측은 범인의 인도를 거듭 요구했다. 한편, 닐은 이 사건의 배상금 요구에 대해서는 영국 본국의 훈령을 기다렸다가 협상하기로 했다.
당시 막부에서는 다수의 군대를 데리고 막부의 최고 인사에 개입한 히사미쓰에 대해 적의를 가진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나마무기 사건 소식에 “사쓰마가 막부를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 일부러 외국인을 화나게 하는 행동으로 나온다”고 받아들여, 막부의 신하들 다수가 사쓰마를 미워하는 영국을 두려워하여 시종 대책도, 정책도 전혀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작 히사미쓰의 막부 정치 개입에 의해 정사 총재직에 취임한 마쓰다이라 요시나가는 이 사건에 대한 조치 방안(히사미쓰의 귀국 금지 등)을 로주들에게 건의를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일시적으로 등청을 중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편, 도카이도 연변의 민중은 ‘과연 사쓰마 님’이라고 환호하며 히사미쓰의 행렬을 맞았다고 한다.
5. 사건의 여파
이 사건은 도젠지 사건 등 당시까지 일어났던 외국인 살해 사건과는 달리,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 다이묘 행렬의 수행원들 다수가 일제히 관련된 사건이었다. 비록 시마즈 히사미쓰의 직접적인 명령은 없었더라도 암묵적 동의 하에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 역력했다. 사건 직후 각국 공사, 영사, 각국 해군 장교 등 요코하마 거류민들이 모여 대책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시마즈 번의 히사미쓰나 또는 그 고관들을 포로로 잡자'는 의제가 오르기도 하여, 자칫하면 전쟁으로 직결될 수도 있어 영국 공사관도 대처 방법에 고심을 거듭하게 된다.
사건 직후 보라데일 부인의 요청에 따라 먼저 움직인 것은 영국 공사관 부속 의관이었던 윌리엄 윌리스였다. 그는 말을 타고 사쓰마 번사 행렬의 옆구리를 빠져나가 나마무기로 향했다. 요코하마에 거주하던 남자 3명이 이에 가세하여 추격했고, 곧 영국 가나가와 영사 바이스 대위가 이끄는 공사관 소속 기마 호위대도 따라붙었다. 일행은 지역 주민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찰스 레녹스 리차드슨의 시체를 발견하여 요코하마로 돌아왔다.
영국 공사 대리 에드워드 존 닐 중령은 사쓰마와의 전투를 우려하여 기마 호위대의 출동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바이스 영사가 이를 무시하고 출동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사건 당일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요코하마 거류민 상당수는 시신을 수습한 바이스 영사를 지지하며 무기를 들고 보복을 외쳤다. 프랑스 공사 뒤센느 드 벨쿠르가 이에 동조하는 듯한 입장을 취한 것도 거류민들의 움직임을 자극했다. 그러나 존 닐 중령은 냉정하게 현실적인 전력 부족과 전면전으로 발전할 경우의 불이익을 들어 설득, 소동을 억누르고 막부와의 외교 교섭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자세를 관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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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무기 사건은 도쿠가와 막부가 쇄국 정책을 끝내고 외국인의 입국을 허용한 ''바쿠마쓰'' 시대에 일본에서 새로운 정치적 위기를 야기했다. 일본인과 서양인 모두 이 사건에 분노했으며, 각 그룹은 살해에 찬성하거나 반대했다.
일본 측 보고에 따르면, 리처드슨은 도로 중앙으로 계속 말을 몰았고, 시마즈의 가마와 경호원 사이로 끼어들려고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사무라이''는 ''기리-스테 고멘''이라는 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어 하위 계급에게 모욕을 받았다고 여겨지면 칠 수 있었고, 이는 시마즈 수행원에 의한 살인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요코하마 칸나이 지구에 기반을 둔 외국인 사회에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서양인들은 영일우호조약에 따라 치외법권으로 보호받았으며, 일본 문화에서 요구하는 사항에서 면제되었기에 ''기리-스테 고멘''에 의한 리처드슨의 죽음은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많은 서양 상인들은 자국 정부에 일본에 대한 징벌 조치를 취할 것을 호소했다. 영국 정부는 바쿠후(막부)와 사쓰마 다이묘에게 배상금과 함께 범인의 체포, 재판 및 처형을 요구했다.
사쓰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쓰 일행은 요코하마에 가까운 가나가와 숙이 아닌 호도가야 숙으로 숙박 장소를 변경했다. 공의 어령인 나마무기 촌 촌 관리는 즉시 사건을 가나가와 봉행에 신고했고, 봉행은 히사미쓰 일행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보고를 요구했다. 그러나 히사미쓰 일행은 다음 날 "낭인 3~4명이 갑자기 나타나 외국인 1명을 쳐서 죽이고 어디론가 사라졌으며, 사쓰마 번과는 무관하다"고 보고하고는 봉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토로 향했다. 가나가와 봉행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로주 이타쿠라 가쓰키요는 사쓰마 번 에도 유수역에게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지만, 며칠 후 "아시가루 오카노 신스케가 행렬에 말을 타고 다가온 이방인을 베어 도주했다. 탐색 중이지만 행방불명이다"라고 허위 설명을 했다.[14] 가나가와 봉행의 상세한 보고를 통해 사건 개요를 파악하고 있던 막부는 분노하여 에도 유수역에게 출두를 요구하여 규탄했지만, 사쓰마 번 측은 시치미를 뗐다.
다이묘 행렬에 대한 외국인의 "무례"에 대해, 히사미쓰 등은 6월 23일 막부에 소장[4]을 제출했다. 소장에는 왕복 과정에서 히사미쓰 행렬이 이미 기마 외국인과 조우했는데, 좁은 도카이도에서 다이묘 일행 통행에 아랑곳하지 않고 옆으로 나란히 자리를 차지하는 등 무례한 모습이 보였다고 적혀 있었다. 이어서 "번사들에게 사소한 일에는 눈을 감으라고 했지만, 상대방에게 무례가 있을 경우 그대로 넘어갈 수 없다. 각국 공사에게 무례를 삼가도록 알려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이에 대한 막부의 답변은 "이미 통지했지만, 말도 통하지 않고 습관도 다르니 참아서 원만하게 처리해 달라"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통지를 내지 않았다.
5. 1. 영국과의 갈등 심화
영국은 막부에 사죄와 배상금 100000GBP를 요구하고, 사쓰마 번에는 범인 처벌과 배상금 25000GBP를 요구했다.[1] 막부는 영국의 요구에 따라 배상금을 지불했지만, 사쓰마 번은 이를 거부했다.[2]5. 2. 사쓰에이 전쟁 발발 (1863년)
1863년 6월 27일, 영국은 나마무기 사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며 군함 7척을 가고시마 만에 입항시켜 사쓰마 번과 직접 교섭을 시도했다. 그러나 교섭은 결렬되었고, 7월 2일 영국 군함이 사쓰마 번 선박을 나포하자 사쓰마 번은 영국 함대를 포격하여 사쓰에이 전쟁이 발발했다.[3]영국 함대는 가고시마를 포격하여 가고시마 시가 500호 이상이 소실되는 등 큰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영국 함대 역시 피해가 컸고, 7월 4일 가고시마 만을 떠나면서 전투는 마무리되었다.
이 전쟁을 통해 사쓰마 번은 영국 군사력의 위력을 직접 경험하고, 쇄국 주장을 거두고 개국으로 정책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5. 3. 강화 협상
1863년 10월 5일, 사쓰에이 전쟁 이후 영국과 사쓰마 번은 요코하마의 영국 공사관에서 강화 협상을 진행했다.[2] 사쓰마 번은 막부로부터 "해안 방어비" 명목으로 빌린 돈으로 영국 측에 2만 5000파운드(63000JPY)를 배상금으로 지불했다. 강화 조건 중 하나였던 나마무기 사건 가해자 처벌은 "도망 중"이라는 이유로 이행되지 않았다.[2]6. 사건에 대한 평가
나마무기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의 문화적 차이와 국제 정세의 긴장감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은 일본 내 외국인 거류민 사회와 일본 사회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일본 측에서는 사무라이의 ''기리-스테 고멘''이라는 특권을 들어, 시마즈 히사미쓰 행렬에 무례하게 행동한 리처드슨 일행에게 책임을 물었다. 반면, 서양 측에서는 영일우호조약에 따른 치외법권을 주장하며, 일본의 봉건적인 관습을 비판했다.
당시 일본에 체류 중이던 서양인들 사이에서도 리처드슨의 행동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했다. 미국인 상인 유진 밴 리드는 일본 문화를 존중하여 다이묘 행렬에 경의를 표했고, 사쓰마 번 측도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리처드슨 일행의 오만함을 비난하며, "스스로 자초한 재앙"이라고 평가했다.[1]
청나라 주재 영국 공사 프레더릭 라이트-브루스는 리처드슨을 "오만한 모험가"로 묘사하며, 그의 무모한 행동을 비판했다.[22] 네덜란드인 의사 요하네스 폼페 판 메델포르트는 리처드슨의 숙부와의 대화를 기록하며, 리처드슨의 숙부조차 그의 무모함과 고집을 인정했다고 전했다.[24]
뉴욕 타임스는 "일본의 주요 귀족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은 외국인은 물론 일본 신민에게도 허용되지 않았다"며 리처드슨에게 책임이 있다고 평했다.[23]
이처럼 나마무기 사건은 단순한 살인 사건을 넘어, 당시 일본 사회의 특수성과 국제 관계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6. 1. 서양의 시각
서양에서는 나마무기 사건에 대해 다양한 시각이 존재했다. 리처드슨의 행동이 오만하고 무례했다는 비판과 함께, 일본의 봉건적인 관습을 비판하는 시각이 공존했다.뉴욕 타임스는 "이 사건의 잘못은 리처드슨에게 있다. 일본의 가장 주요한 거리인 도카이도에서 일본의 주요 귀족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은 외국인은 물론 일본 신민에게도 허용되지 않았다. 조약은 그에게 거주와 무역의 자유를 부여했지만, 일본의 법과 관습을 위반할 권리를 준 것은 아니다."라고 평했다.[23]
사건 직후 현장에 급히 도착한 윌리엄 윌리스 의사는 리처드슨의 참혹한 시신에 마음 아파하며 전쟁도 해서는 안 된다는 강경론을 펼치는 한편, 형에게 보낸 편지에 "자존심 강한 일본인에게 가장 평범한 외국인이 눈앞에서 사람을 욕하는 듯한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견디기 힘든 굴욕일 것입니다."라고 적었다.[13]
네덜란드인의사 요하네스 폼페 판 메델포르트는 리처드슨의 숙부와의 대화를 기록하며, 리처드슨의 숙부는 "찰스(Charles)는 항상 무모하고 고집이 셌습니다. 저는 그가 결국 그런 일로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폼페는 "리처드슨이 한 일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일까요? (중략) 만약 그런 일이 런던에서 일어났다면 참을 수 있었을까요?"라고 언급하며 리처드슨의 행동을 비판했다.[24]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시마즈 히사미쓰의 행렬과 마주친 미국인 상인 유진 반 리드는 즉시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했고, 사쓰마 번사 측도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반 리드는 일본 문화를 이해하고 있었고, "그들은 오만하게 행동했다. 스스로 자초한 재앙이다"라고 영국인 4명을 비난했다.
당시, 선교사 마거릿 바라는 미국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리처드슨 일행이 막부의 권고를 무시하고 다이묘 행렬에 뛰어들었다고 적었다. 다만, 이 내용은 직접 관찰한 것이 아니라 전해들은 것이었다.[25]
청나라 베이징 주재 영국 공사 프레더릭 라이트-브루스는 리처드슨을 "오만한 모험가"로 기억하며, "기사도적인 본능에 의해 조금도 억제되지 않는, 프로 복서에게서나 볼 수 있는 야만적인 용기를 가진 자"라고 평가했다.[22]
6. 2. 일본의 시각
일본 측의 보고에 따르면, 리처드슨은 도로 중앙으로 계속 말을 몰았고, 시마즈의 가마와 경호원 사이로 끼어들려고 했다. 당시 일본에서 ''사무라이''는 ''기리-스테 고멘''이라는 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하위 계급에게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되면 그들을 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는 시마즈 수행원에 의한 살인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일본은 유진 밀러 밴 리드라는 미국인의 사례를 언급하며, 그는 다이묘 행렬 앞에서 말에서 내려 절을 했다고 주장했다.이 사건은 동젠지 사건 등 이전의 존왕양이 살상 사건과는 달리, 개인적인 행위가 아닌 다이묘 행렬의 수행원 다수가 일제히 공격하여 리처드슨을 죽인 사건이었다. 비록 시마즈 히사미쓰의 직접적인 명령은 없었지만, 암묵적인 동의 하에 이루어졌음이 분명했다. 사건 직후 각국 공사, 영사, 각국 해군 장교, 요코하마 거류민들이 모여 대책 회의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시마즈 히사미쓰, 혹은 그의 고관을 포로로 한다"는 의제가 올라오기도 했다.[10] 이는 자칫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영국 공사관도 대처 방법에 고심하게 되었다.
사건 직후, 보로데일 부인의 요청으로 영국 공사관 소속 의관 윌리엄 윌리스가 처음으로 움직였다. 윌리스는 기마로 사쓰마 번사 행렬 옆을 지나 나마무기로 향했고, 요코하마 거주민 3명과 영국의 가나가와 영사 바이스 대위가 이끄는 공사관 소속 기마 호위대가 뒤따랐다. 일행은 지역 주민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리처드슨의 시신을 발견하여 요코하마로 옮겼다.[13]
영국 대리 공사 존 닐 중좌는 사쓰마와의 전투를 우려하여 기마 호위대 출동을 금지했지만, 바이스 영사가 이를 무시하고 출동하면서 갈등이 발생했다. 사건 당일 밤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요코하마 거류민 대다수는 바이스를 지지하며 무기를 들고 보복을 외쳤다. 프랑스 공사 뒤셰느 드 베르쿠르가 이를 부추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 거류민들의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닐 중좌는 냉정하게 현실적인 전력 부족과 전면전으로 번졌을 때의 불리함을 설명하며 소동을 진압하고, 막부와의 외교 교섭을 중시하는 자세를 유지했다.[10]
문구 3년(1863년) 초, 영국 외무장관 러셀의 훈령이 닐 대리공사에게 도착했다. 이를 바탕으로 2월 19일, 닐은 막부에 사죄와 배상금 10만 파운드를 요구했다. 또한, 사쓰마 번에는 막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다며 함대를 사쓰마에 파견하여 직접 번과 교섭하고, 범인 처벌 및 배상금 2만 5천 파운드를 요구할 것을 통보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의 4개국 함대가 막부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차례로 요코하마에 입항했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상경하여 교토에 체류 중이었기 때문에, 로주 오가사와라 나가미치가 급히 소환되어 여러 외국과의 교섭을 담당하게 되었다. 배상금 지불을 두고 막부 회의가 분열되었지만, 미즈노 타다노리 등의 강경한 주장에 따라 일단 지불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지불 기일 전날(5월 2일) 지불 연기가 외국 측에 통보되자 닐은 격노했다. 닐은 해군성 훈령을 받고 있던 어거스터스 레오폴드 큐퍼 제독에게 위임하여 군사 행동을 시사했고, 요코하마는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지불 거부 경위는 자료에 따라 다른데, 《막말 외교담》에 따르면 쇄국 칙명을 띠고 교토에서 돌아오는 도중 쇼군 후견직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명령했다고 하지만, 요시노부의 친필에 따르면 "쇄국은 명령했지만 지불 거부는 명령하지 않았다"고 한다.
에도에서 다시 열린 평의에서는 미토번의 개입으로 오히려 지불 거부가 결정되었지만, 5월 8일 오가사와라는 해로로 요코하마에 가서 독단으로 배상금 교부를 명령했다. 다음 날 9일, 배상금 전액이 영국 공사관에 수송되었다. 한편, 영국과 로주의 틈바구니에 있던 가나가와 봉행들에게 쇄국령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요시노부는 그들을 설득하지 않고 오가사와라와 엇갈리게 8일에 에도로 돌아갔다. 오가사와라와 요시노부 사이에 지불을 둘러싼 모종의 묵계가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오가사와라는 배상금 지불을 마친 후 다시 상경하려 했지만, 오사카에서 로주 직에서 파면되었다.
6. 3. 기타 관련자들의 평가
당시 일본에 체류 중이던 서양인들은 리처드슨의 행동을 비판하며,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을 지적했다. 특히, 미국인 상인 유진 밴 리드는 일본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다이묘 행렬을 어지럽히는 행위가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 예를 잃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사건 이전에 시마즈의 행렬과 마주쳤을 때 곧바로 하마한 후 말을 길가에 대고 행렬을 방해하지 않도록 길을 양보하였고, 모자를 벗어 행렬에 예를 표했다. 사쓰마 번사 측도 외국인이 행렬에 경의를 나타내고 있다고 이해하여 특별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유진 밴 리드는 "그들은 오만하게 행동했다. 자초한 재앙이다"라고 영국인 4명을 비난하는 의견을 제시하였다.[1]당시의 〈뉴욕타임즈〉는 "이 사건의 잘못은 리처드슨에게 있다. 일본의 가장 주요한 거리인 도카이도에서 일본의 주요 귀족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은 외국인은커녕 일본 백성들에게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조약은 그에게 살 집과 무역의 자유를 주었지만 일본의 법과 관습을 범할 권리를 준 것은 아니다."라고 평하고 있다.[23]
청 베이징 주재 영국 공사 프레더릭 라이트-브루스는 본국의 러셀 외무장관에게 보낸 준공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리처드슨 씨는 기분 전환을 위해 나들이를 나갔다가 다이묘의 행렬과 마주쳤다. 다이묘는 어릴 때부터 주변으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자란다. 만약 리처드슨 씨가 존경을 표하는 것을 거부했다면, 어째서 그보다 분별력 있는 동행들이 강력하게 권고한 대로 되돌아가거나 길가로 비켜서지 않았는가. 나는 이 불쌍한 남자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고용한 죄 없는 쿨리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극도로 잔혹한 폭행을 가한 혐의로, 중형의 벌금형을 선고한 상하이 영사의 조치를 지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스위프트 시대였다면 모호크였을 부류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나라 중산층에서 매우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으로, 기사도적인 본능에 의해 조금도 억제되지 않는, 프로 복서에게서나 볼 수 있는 야만적인 용기를 가진 자이다.[22]
네덜란드인의사 요하네스 폼페 판 메델포르트는 귀국 도중 헤이그에서 우연히 리처드슨의 숙부라는 사람을 만나 설명을 들은 후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그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더니, 이 순박한 노인은 나에게 대답하기를 '정말 그렇습니다. 찰스(Charles)는 항상 무모하고 고집이 셌습니다. 저는 그가 결국 그런 일로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미친 듯한 성향 때문에 영국을 빨리 떠나야만 했습니다. (중략) 시마즈가 한 일은 제 의견으로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영국 정부는 그 경우 아무것도 손대지 말았어야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폼페는 "리처드슨이 한 일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일까요? (중략) 만약 그런 일이 런던에서 일어났다면 참을 수 있었을까요? 예를 들어, 영국 국왕 폐하가 의회 개회식에 참석하는 도중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떨까요?"라고 언급하고 있다[24]。
사건 직후 현장에 급히 도착한 윌리스 의사는 리처드슨의 참혹한 시신에 마음 아파하며 전쟁도 해서는 안 된다는 강경론을 펼치는 한편, 형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자존심 강한 일본인에게 가장 평범한 외국인이 눈앞에서 사람을 욕하는 듯한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견디기 힘든 굴욕일 것입니다. 앞서 발생한 끔찍한 생맥 사건으로 인해 저런 외국인의 행동이 위험하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브라운이나 제임스, 로버트슨 같은 사내들이 선두에는 대군, 맨 뒤에는 천황이 있는 행렬 속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몰고 다녔을 것이라는 강한 의구심이 듭니다."[13]
당시, 선교 기회를 엿보며 일본에 있던 미국인 여성 선교사 마거릿 바라는 미국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그날은 에도에서 남쪽 영지로 돌아가는 어떤 주군의 행렬이 도카이도를 따라 내려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막부의 관리로부터 도카이도에서의 승마를 자제하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 사람들은 당연히 지켜야 할 막부의 권고도 무시하고 이 도로를 지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이묘 행렬과 마주쳤을 때, 길가로 비켜주는 대신 행렬 한가운데로 뛰어들었습니다."[25] 다만 이 광경은 바
7. 사건의 역사적 의의
나마무기 사건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쇄국 정책의 한계를 드러내고, 서양과의 관계 재정립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일본 내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해 존왕양이 운동이 격화되었고, 서양 열강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그러나 사쓰에이 전쟁을 통해 사쓰마번은 서양의 군사력을 실감하고 개국으로 노선을 전환했으며, 이는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졌다.[1]
이 사건은 당시 일본을 방문했던 서양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서양 열강들은 일본에 대한 압력을 강화했다. 특히 영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에 배상금을 요구하고, 사쓰에이 전쟁을 일으켰다.[2]
7. 1. 한국 (조선)에 미친 영향
나마무기 사건과 사쓰에이 전쟁은 당시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경험을 통해 조선은 서양 세력과의 충돌 가능성과 그 결과를 인식하게 되었고, 이는 조선의 개화 정책과 외교 정책 수립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참조
[1]
간행물
Mord in Namamugi
[2]
간행물
Mord in Namamugi
[3]
서적
Historical and Geographical Dictionary of Japan
[4]
뉴스
19世紀後半、黒船、地震、台風、疫病などの災禍をくぐり抜け、明治維新に向かう(福和伸夫)
https://news.yahoo.c[...]
2020-12-03
[5]
웹사이트
生麦事件
2022-03-27
[6]
문서
同所にて平成22年12月より首都高速神奈川7号横浜北線建設のため、一時東側近隣の旧東海道脇に仮移転した。
[7]
웹사이트
"国・神奈川県および横浜市指定・登録文化財目録"
https://web.archive.[...]
横浜市教育委員会
[8]
문서
ちょうど事件が自宅前で起こったため一部始終を間近に見た勘左衛門が、事件当日に神奈川奉行所に出した報告書である。
[9]
문서
神奈川奉行支配定役並・鶴田十郎覚書(嘉永文久年間見聞雑記)『薩藩海軍史』に収録
[10]
문서
『遠い崖―アーネスト・サトウ日記抄』より
[11]
문서
当時京都の薩摩藩邸にかくまわれていた那須信吾の実兄宛書簡は、喜左衛門の弟の奈良原繁|奈良原喜八郎としている。ただし、行列の先を行っていた宮里孫八郎が事件の十数日後に鹿児島の家族に宛てた書簡は、当番供目付だった兄・喜左衛門の名を挙げており、久光の駕籠側にいた松方正義も証言を残しており、リチャードソンへの一太刀目は兄の喜左衛門であったことが今日において定説である。
[12]
문서
「大警視・川路利良: 日本の警察を創った男」(著: 神川武利)より。主に海江田信義の著作と直話に基づく話のようである。
[13]
문서
『ある英人医師の幕末維新 W・ウィリスの生涯』より
[14]
문서
『薩藩海軍史』
[15]
문서
『近世日本国民史 文久大勢一変 維新への胎動(中)生麦事件』引用の「幕府側の所記」
[16]
문서
『近世日本国民史 文久大勢一変 維新への胎動(中)生麦事件』が引用する越前藩中根雪江の記録『再夢記事』
[17]
문서
事件当時、戸塚の宿役人だった川島弁之助の後年の談話である。
[18]
문서
生麦事件のわずか9日前、ジャーディン・マセソン商会横浜支店のS.J.ガウアーは、ヴァイス領事に出していた報告書に「独立心に富んだ大名は、心底から攘夷を望んでいるのではなく、外国との交易をこそ望んでいる」と記している。
[19]
웹사이트
柿生文化を読む
https://www.townnews[...]
神奈川タウンニュース
2024-07-24
[20]
문서
『明治維新と世界認識体系』p.194
[21]
문서
『一外交官の見た明治維新(上)』
[22]
문서
坂野正高「駐清英国公使ブルースの見た生麦事件のリチャードソン」(学士会報1974年、第723号)『遠い崖-アーネスト・サトウ日記抄』より孫引き
[23]
뉴스
"The Anglo-Japanese War."
New York Times
1863-11-15
[24]
문서
山田勝「イギリス紳士の幕末」(日本放送出版協会、2004年)『ポンぺ日本滞在見聞記』より孫引き
[25]
문서
『古き日本の暼見』より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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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2011년 12월 수도고속도로 요코하마 환상북선 건설로 인해, 잠깐 동쪽 인근의 옛 도카이도 쪽으로 임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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