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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칸 죽음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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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다칸 죽음의 행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이 호주와 영국군 포로들을 북 보르네오(현재 사바주)의 산다칸에서 라나우까지 강제 이주시킨 사건이다. 1945년 1월부터 8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가혹한 환경과 학대로 인해 1,900여 명의 포로 중 단 6명만이 살아남았다. 이 사건은 연합군의 진격에 따른 일본군의 결정으로 시작되었으며, 험난한 육로 이동, 식량 부족, 질병, 학살 등이 자행되었다. 킹피셔 작전으로 포로 구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전후 전범 재판을 통해 관련자들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현재 산다칸 전쟁기념공원과 추모 행사 등을 통해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으며, 일본의 전쟁 범죄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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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칸 죽음의 행진
지도 정보
개요
사건명산다칸 죽음의 행진
위치보르네오
시기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발생 시기1945년 1월 ~ 1945년 8월
주요 관련자일본군
목표포로 이송
배경
배경 설명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포로 학대 사건.
산다칸 포로 수용소에서 수용된 연합군 포로들을 라나우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강제 행군.
상세 정보
행군 시작 지점산다칸
행군 종점라나우
행군 횟수3회
강제 행군 목적포로들을 라나우로 이송
강제 행군 상황극심한 기아, 질병, 탈진, 구타, 총살 등
강제 행군 중 많은 포로들이 사망
사망자 수2,434명 (연합군 포로)
생존자 수6명 (호주군 포로)
관련 인물
일본군 지휘관불명
생존 포로앨버트 닐
빌 영
오웬 캠벨
넬슨 쇼트
키스 보티
리처드 브레이스웨이트
결과 및 영향
전후 처리일부 일본군 장교가 전쟁 범죄로 처벌됨
역사적 평가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
전쟁 포로 학대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사건
추가 정보
관련 영화《산다칸 8번 창녀관》(1974년 영화)
《더 챌린지》(1982년 영화)
기념 사업산다칸 기념 공원 조성
라나우 전쟁 기념관 건립

2. 배경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일본군은 북보르네오에서 서해안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따라 동해안 산다간 포로 수용소에 있던 오스트레일리아·영국포로들은 내륙 라나우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과정은 매우 가혹했으며, 포로 2434명 중 6명만이 탈출에 성공하고 나머지는 기아, 질병, 총살 등으로 사망하거나 살해되었다. 일본군 역시 이 과정에서 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약 85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민간인과 현지 주민에게도 피해가 발생했다.

1944년 10월경부터 연합군의 보르네오섬 공습이 이어지자, 1945년 1월 일본군은 포로들에게 건설을 지시했던 산다칸 공항의 수리를 포기했다. 일본 남방군 총사령부는 미군이 보르네오섬 서해안에 상륙할 것으로 예상하고, 타와우에서 약 600km 떨어진 아피에 병력을 집결시키기로 결정했다. 동시에 산다칸의 포로들을 260km 떨어진 내륙의 라나우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는데, 당시 북보르네오에는 제대로 된 육로가 없어 밀림과 습지를 통과해야 하는 험난한 길이었다.[28]

2. 1. 산다칸 포로수용소

산다칸 포로수용소 배치도


1942년과 1943년, 싱가포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의 포로들은 북보르네오(현재의 사바주) 산다간에 군사용 비행장과 포로수용소를 건설하기 위해 수송되었다.[3] 버마 철도와 마찬가지로 포로들은 총칼 아래 강제 노역을 당했고, 매우 적은 식량과 의료 지원을 받으면서 빈번하게 구타를 당했다. 1943년 8월, 지휘관들을 제거하여 포로들을 통제하려는 의도로 대부분의 장교 계급 포로들은 산다칸에서 쿠칭의 바투 린탕 수용소로 이동되었다. 장교들이 제거된 후 남은 포로들의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배급량이 더 줄어들었고, 아픈 포로들도 비행장 공사에 강제로 동원되었다. 공사가 완료된 후에도 포로들은 처음에는 수용소에 남아 있었다. 1945년 1월, 약 1,900명의 포로가 살아남은 가운데, 연합군의 진격으로 비행장이 성공적으로 폭격되어 파괴되었다. 연합군의 상륙이 임박한 이 시점에 수용소 소장인 호시지마 스스무(星島 進) 대위는 남은 포로들을 약 260km 떨어진 라나우라는 도시의 산악 지대로 서쪽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것이 제37군 사령관인 바바 마사오(馬場正雄) 중장의 명령이라고 주장했다.[4]

3. 전개 과정

1944년 10월부터 연합군의 보르네오섬 공습이 잇따르자, 1945년 1월 일본군은 포로들에게 건설 공사를 지시했던 산다칸 공항의 수리(修復)를 포기했다. 미국군이 보르네오섬 서해안에 상륙할 것으로 판단한 일본 남방군 총사령부는, 많은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타와우에서 약 600km 떨어진 서해안의 아피에 병력을 집결시키기로 결정하고, 동시에 산다칸의 포로들을 260km 떨어진 내륙의 라나우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 당시 북보르네오에는 육로가 정비되어 있지 않았고, 밀림과 습지 등 매우 험난한 길이었다[28].

1차 행진 이후, 수용소에는 288명의 포로가 남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쇠약해져 움직일 수 없는 환자들이었고, 나머지는 동료를 돌보기 위해 자발적으로 남은 포로들이었다. 이미 건물은 불타 없어졌고, 그들은 나무와 잎으로 비를 피하며, 의약품과 식량 공급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야생초의 뿌리와 썩은 음식찌꺼기를 먹으며 연명하고 있었다.

2차 행진 이후, 라나우에는 6월 25일 약 190명의 포로가 생존해 있었지만, 6월 28일에는 19명이 더 사망했다. 살아남은 포로들은 하루 70g~75g의 극소량의 식량으로 혹독한 노동(쇠약한 몸으로 20kg이나 되는 식량 운반, 물 긷기, 시설 건설 작업 등)에 종사해야 했다.

7월 7일, 대만인 감시원으로부터 고쿠사와 대위가 포로 전원을 살해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던 키스 보테릴 등 4명이 밤에 탈출하여 3명이 오스트레일리아군에 구출되었다. 7월 18일에는 포로 수용소라는 이름의 초가 지붕 오두막이 완성되었고, 살아남은 포로 72명 중 이질 환자 34명이 바닥 밑에 밀어넣어졌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시체를 매장할 체력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7월 20일에는 강제 노역이 중단되었다. 7월 26일에는 스팁위치 등 2명이 탈출했고, 스팁위치만 살아남았다.

8월 1일 아침, 고쿠사와 대위는 살아남은 33명의 포로를 세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스스로의 발로 묘지까지 가도록 강요당했고, 움직일 수 없는 자는 들것으로 운반되어 전원이 총살당했다.

3. 1. 1차 행진 (1945년 1월 ~ 3월)

1945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광활한 습지, 울창한 정글을 지나 키나발루산 동쪽 사면을 따라 첫 번째 행군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서쪽 해안으로 이동하는 일본 대대를 위해 짐과 보급품을 운반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다고 여겨지는 470명의 포로를 선발했다. 여러 그룹으로 나뉜 포로들은 모두 영양실조에 시달리거나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었으며, 원래 예셀톤(코타키나발루)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여정을 시작했다. 경로는 9일이 걸렸지만, 겨우 나흘 치의 식량만 지급되었다. 바탄 사망 행군과 마찬가지로, 체력이 부족하거나 기진맥진하여 쓰러진 포로들은 현장에서 살해당하거나 버려졌다.[5]

야마모토 쇼이치(山本正一) 대위는 470명의 포로를 12일 만에 이탈자 없이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의약품 공급 증가와 3주 일정을 요구했고 이는 사령부에 의해 거부되었다. 결국 비교적 건강한 470명이 제1단으로 출발하게 되었고, 출발 전 야마모토 대위는 후위 제9반 책임자 아베 카즈오(阿部一雄) 중위에게 이탈한 포로를 처분할 권한을 부여했다.

1945년 1월 29일부터 2월 6일까지 470명이 9개 반으로 나뉘어 간격을 두고 출발했다. 포로들은 열병과 영양실조로 허약해진 몸에 약 30kg의 일본군 짐을 지고 폭우로 질척거리는 밀림을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신발을 신은 포로는 1할 정도였다. 게다가 약속된 식량 보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각 반장은 식량 확보와 보급에 유의했지만 상황은 악화되어 후반부 반은 달팽이와 개구리 등을 먹으며 굶주림을 견뎌야 했다.

열악한 환경 속 행군은 포로뿐 아니라 많은 일본군 병사들에게도 사상자를 냈다. 그리고 이동할 수 없다고 판단된 포로들은 “이탈자를 내지 않기 위해” 아베 중위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에 의해 사살되었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한 포로들에게 안도할 틈은 없었다.

라나우에 도착한 제1반~제5반 포로 약 200명은 식량과 의약품 부족 속에서 노역에 동원되었고, 건강해 보이는 포로들은 45km 떨어진 파기나탄(パギナタン)까지 20kg의 쌀자루를 지고 걸어가도록 강요받았으며, 도중에 쓰러진 포로들은 살해당했다. 제6반~제9반 포로 약 200명은 도중에 약 40명이 이탈했고, 중간 기착지인 파기나탄에서 행군은 중단되었다. 제1반~제5반 포로들이 운반해 온 식량에 의존했지만, 약 한 달 만에 생존자는 100명 정도 더 줄었다.

라나우에 도착한 생존자들은 행군을 멈추고 임시 수용소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한 역사가는 나중에 이렇게 언급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비위생적이고 붐비는 오두막에 몰려들어 이질로 죽어갔다. 6월 26일에는 호주인 5명과 영국군 병사 1명만이 살아남았다."[5]

4월 시점에 라나우에서 모든 생존 포로가 합류했을 때 생존자는 약 150명이었지만, 그 후 제2단이 도착하는 6월 하순에는 생존 포로가 6명뿐이었다.

3. 2. 2차 행진 (1945년 5월 29일 ~ 6월 26일)

1945년 5월 29일, 약 536명의 포로들과 함께 두 번째 강제 행군이 시작되었다.[6] 새로운 산다칸 수용소 소장인 다카쿠와 다쿠오 대위는 약 50명씩의 포로들을 일본군 경비병과 함께 라나우로 향하게 했다. 이 행군은 26일간 지속되었으며, 첫 번째 행군 때보다 더욱 쇠약해진 포로들은 더 적은 식량을 지급받았고, 종종 식량을 구하기 위해 강제로 먹을 것을 찾아야 했다. 산다칸 수용소 1구역은 그 존재의 어떤 증거도 지우려는 시도로 파괴되었다.[7] 라나우에 도착한 포로는 183명에 불과했다. 6월 24일 도착했을 때, 두 번째 행군 참가자들은 1월 첫 번째 행군 당시 생존했던 포로가 단 6명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산다칸 포로수용소에서는 연합군의 공습 피해와 식량 배급 감소로 1945년 3월에는 매일 10명 이상이 사망했다. 4월 이후에는 쌀과 물의 배급이 중단되는 상황이 되어 6월 말에는 포로 수가 830명 남짓으로 줄었다.

5월 17일, 호시지마 대위를 대신하여 다카쿠와 다쿠오 대위가 소장에 취임했다. 공습에 더해 함포 사격까지 받은 다카쿠와는 5월 20일 받았던 포로 이송 명령을 긴급히 실행했다. 5월 29일 밤, 걸을 수 있는 포로 536명은 11개 반으로 나뉘어 출발했으며, 수용소는 일부 건물만 남기고 불태워졌다. 쇠약해진 포로들은 감시원들로부터 격렬한 폭행을 당하고 정글로 몰려가 살해당했다. 행군에서 이탈한 포로들은 와타나베 겐조 중위가 이끄는 감시원들이 폭행하고 몰아세웠고, 그래도 움직이지 못하는 포로들은 뒤따라오는 츠지 조장이 이끄는 반에 인계되어 처형되었다. 처형은 모두 타이완인 감시원들이 실행했다. 포로에게는 하루 85g의 쌀만 지급되었고, 6월 25일에 라나우에 도착한 포로는 183명이었다.

이때 캠벨과 브레이스웨이트 두 사람이 따로 탈출하여 미군에 인계되어 살아 돌아왔다.

3. 3. 3차 행진 (1945년 6월 9일)

두 번째 행군이 출발한 후 산다칸에는 약 250명이 남았다. 대부분의 포로들은 너무 병들어 일본군은 처음에 그들을 굶겨 죽일 계획이었고, 많은 포로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주변 숲에서 음식을 찾아 헤매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1945년 6월 9일, 75명의 남성들을 추가로 마지막 행군에 보내기로 결정되었다. 남은 남자들은 너무 약해서 50km를 넘어 생존한 사람은 없었다. 지친 나머지 쓰러지는 사람마다 일본군 경비병에 의해 총살당했다.[8]

1945년6월 9일, 모리타케 중위는 이와시타 소위 등 37명의 일본군 병사들과 함께 75명의 포로를 선발하여 출발시켰다. 이 제3단은 일본군 병사 1명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전멸했다.

3. 4. 라나우에서의 학살 (1945년 8월)

7월 말, 라나우에는 식량 부족과 일본군의 잔혹한 학대로 인해 38명의 포로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모두 너무 아프고 약해서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은 생존자들을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들은 8월에 경비병들에게 살해되었는데, 이는 8월 14일 종전 후 최대 12일 후일 가능성이 있다.[10] 일본 점령 3년 동안 북보르네오 인구의 약 16%가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8]

4. 탈출과 생환

넬슨 쇼트, 윌리엄 H. 스티크피치, 키스 보터릴; 2700명의 포로 사망 행군의 유일한 생존자로 여겨지는 6명의 호주인 중 3명


총 6명의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만이 탈출에 성공했다. 두 번째 행군 중에 오웬 캠벨 포병과 리처드 브레이스웨이트 폭격수는 정글로 탈출하여 현지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결국 연합군 부대에 의해 구출되었다. 7월에 넬슨 쇼트 일병, 윌리엄 스티크피치 준위, 키스 보터릴 일병, 윌리엄 맥스햄 상병은 라나우에서 탈출하여 역시 현지 주민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현지 주민들은 그들에게 음식을 주고 종전까지 일본군으로부터 숨겨주었다.[11]

6명의 생존자 중 4명(스티크피치, 보터릴, 쇼트, 캠벨)만이 도쿄라바울에서 열린 여러 전범 재판에 증거를 제출하여, 전 세계는 그 범죄와 잔혹 행위에 대한 목격자 진술을 접할 수 있었다. 호시지마 대위는 전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1946년 4월 6일 교수형에 처해졌다.[11] 다카쿠와 대위와 그의 부관인 와타나베 겐조 대위 역시 포로 살해와 학살을 저지른 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각각 1946년 4월 6일과 1946년 3월 16일에 교수형과 총살형에 처해졌다.

5. 킹피셔 작전 (Operation Kingfisher)

킹피셔 작전(Operation Kingfisher)은 1945년 초 산다칸 수용소의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계획되었다가 폐기된 작전이다. 이 작전은 부정확한 정보 때문에 무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작전 자체가 최고 기밀이었기 때문에 제안된 작전의 정확한 세부 사항은 불분명하지만, 포로들을 후송하기 위해 호주 공수부대원들을 그 근처에 투하하는 것을 포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작전 취소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된 날짜는 없지만, "포로들에 대한 정보" 때문에 아가스 1팀(Agas 1 team)이 서해안 작전으로 재배치된 시점을 고려하면, 작전이 중단된 시기는 4월 16일에서 19일 사이로 추정된다.[1] 아가스 정찰 임무는 6월 초까지 계속해서 보고서를 작성하고 수용소를 조사했으며, 고트 체스터(Gort Chester) 소령은 수집한 증거에 따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조언을 요청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이후 아가스 팀은 수용소에 포로가 남아 있지 않다고 잘못 보고하여 계획된 모든 작전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9]

작전 자체가 실행 가능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1945년 5월 아가스 팀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라나우(Ranau) 비행장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항공으로 포로들을 후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대기 중인 잠수함을 이용해 육로로 후송하는 방안도 고려되었지만, 포로들의 끔찍한 상태 때문에 곧 폐기되었다.[9] 호주 공수부대원들과 왕립 해병대는 작전 대기 상태에 있었고, 아가스 팀으로부터 최신 정보를 받으면 즉시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러한 정보는 전달되지 않았다.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은 수용소 사망자 수에 대한 전체 보고서가 접수된 후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토마스 블레이미(Thomas Blamey) 장군과 다른 호주 장교들은 적절한 항공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보고서는 연합군이 행동 직전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며 부정확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감시가 완료되기 전에 작전을 중단하기로 한 결정은 호주 군부가 내린 것으로 일반적으로 추정된다.[1]

6. 전범 재판

심문받는 일본 헌병(왼쪽 앞)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실시한 BC급 전범 재판에 따라 수용소 측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은 형이 선고되었다. 살해를 실행한 대만인 감시원들에게는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이름직책형벌
호시지마 신대위교수형(사형)
야마모토 마사오대위교수형(사형)
아베 카즈오중위사형
타카쿠와 타케오대위교수형(사형)
와타나베 겐조중위총살형(사형)
무로스미 히사오상사무기징역



산다칸 포로수용소를 총괄하는 보르네오 포로수용소 쿠칭 본부에 지령을 내린 제37군 사령부의 마바 정로중장(군사령관)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제1회 포로 이동을 계획한 야마와키 마사타카 중장(전 군사령관)은 이 건에 대해 기소되지 않았다. 보르네오 포로수용소 전체의 최고 책임자였고, 관계자 중 비교적 인도적이었던 스가 다쓰지 대좌는 9월 16일에 자살했기 때문에 기소되지 않았다.

이러한 죄상 입증에는 거의 심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형의 근거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28]

7. 분석 및 연구

포로 학대와 처형이 실제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는 견해도 있다. 제네바 조약에 따르더라도 허약한 포로에게 가혹한 이동을 시킨 것에 대해서는 일본군에 책임이 있지만, 제25연대 제2대대 관계자의 간행물에는 호송되는 포로와 일본군 사이에 식량 등의 불공평이나 학대는 없었다는 증언이 있다. 또한 라바울 호주군 총사령부 군법회의 재판에서 생존한 오스트레일리아군 출신의 전 포로는 "행군은 매우 힘들었지만, 포로에 대한 처우는 일본군 병사와 동일했다"고 증언하고 있다.[28]

7. 1. 일본군의 책임

야마모토 쇼이치(山本正一) 대위는 470명의 포로를 12일 만에 이탈자 없이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의약품 공급 증가와 3주 일정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결국 비교적 건강한 470명이 제1단으로 출발하게 되었고, 야마모토 대위는 후위 제9반 책임자 아베 카즈오(阿部一雄) 중위에게 이탈한 포로를 처분할 권한을 부여했다.[28]

1945년 1월 29일부터 2월 6일까지 470명의 포로들은 열병과 영양실조로 허약해진 몸에 약 30kg의 일본군 짐을 지고 폭우로 질척거리는 밀림을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이동할 수 없다고 판단된 포로들은 아베 중위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에 의해 사살되었다.[28]

라나우에 도착한 포로들은 식량과 의약품 부족 속에서 노역에 동원되었고, 건강해 보이는 포로들은 45km 떨어진 파기나탄(パギナタン)까지 20kg의 쌀자루를 지고 걸어가도록 강요받았으며, 도중에 쓰러진 포로들은 살해당했다. 4월 시점에 라나우에서 모든 생존 포로가 합류했을 때 생존자는 약 150명이었지만, 6월 하순에는 생존 포로가 6명뿐이었다.[28]

5월 29일, 타카쿠와 타쿠오(高桑卓男) 대위는 걸을 수 있는 포로 536명을 출발시키면서 수용소는 일부 건물만 남기고 불태워졌다. 쇠약해진 포로들은 감시원들로부터 격렬한 폭행을 당하고 정글로 몰려가 살해당했다. 행군에서 이탈한 포로들은 와타나베 겐조(渡辺源三) 중위가 이끄는 감시원들이 폭행하고 몰아세웠고, 그래도 움직이지 못하는 포로들은 뒤따라오는 츠지(辻) 조장이 이끄는 반에 인계되어 처형되었다. 포로에게는 하루 85g의 쌀만 지급되었고, 6월 25일에 라나우에 도착한 포로는 183명이었다.[28]

제네바 조약에 따르더라도 허약한 포로에게 가혹한 이동을 시킨 것에 대해서는 일본군에 책임이 있다. 하지만, 제25연대 제2대대 관계자의 간행물에는 호송되는 포로와 일본군 사이에 식량 등의 불공평이나 학대는 없었다는 증언이 있다. 또한 라바울 호주군 총사령부 군법회의 재판에서 생존한 오스트레일리아군 출신의 전 포로는 "행군은 매우 힘들었지만, 포로에 대한 처우는 일본군 병사와 동일했다"고 증언하고 있다.[28]

7. 2. 생존자들의 증언

포로 학대와 처형이 실제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제네바 조약을 기준으로 보면 허약한 포로에게 가혹한 이동을 시킨 것에 대해 일본군에게 책임이 있지만, 제25연대 제2대대 관계자의 간행물에는 호송되는 포로와 일본군 사이에 식량 등의 불공평이나 학대는 없었다는 증언이 있다. 또한 라바울 호주군 총사령부 군법회의 재판에서 생존한 오스트레일리아군 출신의 전 포로는 "행군은 매우 힘들었지만, 포로에 대한 처우는 일본군 병사와 동일했다"고 증언하고 있다.[28]

7. 3. 정보 은폐 논란

전쟁 후 산다칸 죽음의 행진과 관련된 많은 정보는 가족과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초기에는 육군에 제출된 기록과 수용소에서 발견된 기록 간의 정보가 상충되었고, 생존자들의 증언 또한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반된 기록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사망 날짜나 사인이 잘못 기록되었는데, 수용소 기록에는 종종 처형된 수감자들의 사망 원인이 질병으로 기록되곤 했다.[1]

하지만 1946년 전범 재판 이후, 정보 은폐의 이유는 신뢰할 수 있는 정보 부족에서 가족들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으로 바뀌었다. 행진의 참상은 너무나 끔찍해서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제시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언론은 명시적으로 정보 은폐를 요청받지는 않았지만, 정부와 합의하여 수용소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만 공개하기로 했다. 특히 육군 기록 담당자들도 정보를 얻지 못했고, 전범 수사와 관련된 증언, 기록 및 일반적인 정보에 접근하기 위해 언론 보도에 의존했다.[1]

이 기간 동안 수용소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전쟁 희생자 묘지 위원회를 위한 유해 수습과 수용소 기록 회수가 포함되었다. 1947년 조사가 끝난 후 그 결과는 관련 정부 기관에 최소 30년 동안 비밀로 분류되어 전달되었다.[1] 일부에서는 이러한 정보 은폐를 싱가포르 전투의 상대적 실패와 킹피셔 작전(Project Kingfisher)의 포기와 관련하여 군의 개입 부족을 은폐하려는 시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확인되지 않았다.[9]

이 기록들이 봉인된 시점과 1980년대에 이르러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 사이에는 대중에게 거의 정보가 공개되지 않았다. 전쟁 중 이 부대의 움직임에 관한 일부 책은 더 일찍 출판되었지만, 이 책들은 이 부대가 포로로 잡혀 있던 기간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19] 1945년부터 이 문서들이 공개될 때까지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했던 가족들은 거의 정보를 얻지 못했고, 대개 사망 사실 확인만 받았다. 영국 가족들은 특히 이 정보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조사관, 역사가, 군인들의 노력으로 이러한 이야기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산다칸이 다시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많은 가족들에게는 친척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을 처음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9]

포로 학대와 처형이 실제로 있었는지 여부는 불명확하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제네바 조약에서 보더라도 허약한 포로에게 가혹한 이동을 시킨 것에 대해서는 일본군에 책임이 있지만, 제25연대 제2대대 관계자의 간행물에는 호송되는 포로와 일본군 사이에 식량 등의 불공평이나 학대는 없었다는 증언이 있다. 또한 라바울 호주군 총사령부 군법회의 재판에서 생존한 오스트레일리아군 출신의 전 포로는 "행군은 매우 힘들었지만, 포로에 대한 처우는 일본군 병사와 동일했다"고 증언하고 있다.[28]

8. 영향 및 유산

“포로(POW) 길”을 표시하는 표지판


산다칸 죽음의 행진 당시 사용된 “포로 길”은 1945년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군대에 의해 기록되었다. 이 길은 산다칸에서 라나우에 있는 “마지막 수용소”까지 이어지며, 주요 지점들은 표지판으로 표시되어 있다.

2005년부터 이 길의 경로는 두 명의 오스트레일리아 전쟁 사학자 케빈 스미스(Kevin Smith) 박사와 리넷 실버(Lynette Silver) 사이에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20][21] 스미스 박사는 텔루피드에서 길이 리와구 계곡을 경유하여 미루루(Miruru) 쪽으로 우회전했다고 주장했지만, 리넷은 오스트레일리아 전몰자 묘지 관리국의 유해 발굴팀이 발견하고 2012년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역사 및 지도 부서가 감사한 손으로 그린 지도에 따르면 미루루로 간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20][21][22] 강제 노역으로 일본 제국 육군(IJA)을 위해 이 길을 개척하고 사망 행군을 목격한 리넷의 주장은 당시 길을 개척했던 마지막 생존자 투아티 아카우(Tuaty Akau)와 주딘(Zudin)의 증언으로 뒷받침되어 논쟁은 종지부를 찍었다.[20][21][23] 두 증인은 모두 사망했는데, 주딘은 2017년 5월 14일 87세의 나이로 호흡 곤란으로, [24] 투아티는 2018년 10월 29일 10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5]

2011년, 미래의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스콧 모리슨(2018년 취임)은 당시 국방 장관 제이슨 클레어 등과 함께 텔루피드에서 라나우의 마지막 수용소까지 6일 동안 도보 여행을 하며 리넷 실버 부부와 20명의 오스트레일리아 학생들과 함께 이 길을 완주하기로 결정했다.[26] 2016년, 영국의 서튼 발렌스 스쿨(SVS) 결합 육군 사관후보생단(CCF) 27명(여학생 7명 포함)이 바우토(Bauto)에서 무룩(Muruk)까지 5일간 숲길을 걷는 여정을 했다.[27]

8. 1. 추모와 기억

1948년, 호주 언론인 콜린 심프슨(콜린 심프슨)은 산다간 죽음의 행진 발자취를 따라가기 위해 영국령 북부 보르네오를 방문, 호주 방송 위원회(Australian Broadcasting Commission)의 '오스트레일리안 워크어바웃' 프로그램 라디오 다큐멘터리에서 생존자 여섯 명의 회고록을 기록했다. 이 대본은 "보르네오의 여섯 명"(Six from Borneo, 1948)으로 출판되었다.[12]

산다간 기념 공원은 현재 산다간 포로 수용소(포로 수용소) 옛터에 자리 잡고 있다.


1962년 사바주 쿤다상(Kundasang)에 산다간과 라나우에서 사망한 이들을 기리는 추모 공원과 정원(전쟁 기념관 및 정원)이 건립되었다.[13][14]

산다간 죽음의 행진은 2004년 오라토리오(oratorio) "산다간 탄식곡"(Sandakan Threnody)으로 각색되었다. 탄식곡(threnody)은 사망자를 추모하는 찬가를 의미한다. 이 오라토리오는 호주 작곡가 조나단 밀스(조나단 밀스)가 작곡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1942년부터 1943년까지 산다간에 투옥되었다.

2011년, 서호주 투디야이(Toodyay District High School) 9학년과 10학년 연극 학생들은 투디야이 지역 사회의 도움을 받아 1947년 ABC 라디오극 "보르네오의 여섯 명"의 업데이트된 버전을 재연출했다. 2011년 9월 9일, 원본 녹음 일부가 1947년 이후 처음으로 ABC 라디오(WA 퍼스 720)에서 재녹음된 부분과 함께 방송되었다. 이 연극은 2011년 말 투디야이 지역 라디오에서 방송될 예정이었고, 이후 호주 전역 다른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 제공될 예정이었다. 재녹음본 사본은 호주 국립 영화 및 음향 기록 보관소와 서호주 퍼스의 ABC 도서관에 제출되었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서호주(Western Australia) 학생들은 주지사의 ANZAC 학생 투어에 참여하여 산다간(Sandakan), 라나우(Ranau), 그리고 죽음의 행진 경로를 따라 여러 장소들을 방문, 잔혹 행위에 대해 배우고 제2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동남아시아(South-East Asia)에서 호주 포로(POW)들의 경험에 대한 인식을 높였다.

산다간은 2014년 7월 8일 아베 신조(아베 신조) 총리가 호주 의회 연설에서 언급되었다. 이는 일본 지도자의 호주 의회 첫 연설이었다.[15][16][17][18] 1995년부터 산다칸에는 산다칸 전쟁기념공원(Sandakan Memorial Park)이 있다. 추모비와 추모관도 건립되어 있으며, 포로와 지역 주민 유족들에 의한 위령제가 매년 계속되고 있다.[29][30]

호주에서 다나카 토시유키(田中利幸)(역사학자)의 저서 『알려지지 않은 전쟁범죄 일본군은 호주인들에게 무엇을 했는가』(大月書店, 1993년) 영역본이 1996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후, 산다칸 수용소 사건과 인도네시아 방카섬(バンカ島)에서의 호주군 군의관 학살 사건, 위안부 강요(미수) 사건, 인육 식인 사건 등이 미국과 호주에서 알려지게 되었다.[31]

아그네스 키스(Agnes Keith)의 소설 『Three Came Home』에서 행진 중 죽기 전 포로들이 일본군에 의해 찢겨져 무덤에 던져졌다는 이야기가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면서, 서구 사회에 "산다칸 죽음의 행진"에서 일본군의 잔혹한 이미지가 형성되었다고도 한다.[28]

2014년 7월 8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호주 의회 연설에서 "일본국과 일본 국민을 대표하여 마음으로부터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라고 말했다.

2023년 7월, 현지 말레이시아, 호주, 영국, 일본 전몰자 유족 및 관계자들이 현지 키나발루산(キナバル山) 기슭에 모여 합동 위령법요를 개최했다.[32]

8. 2. 역사적 교훈

1995년부터 산다칸에는 산다칸 전쟁기념공원(Sandakan Memorial Park)이 조성되어 있다. 추모비와 추모관도 건립되었으며, 포로와 지역 주민 유족들에 의해 매년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29][30]

1996년 미국에서는 역사학자 다나카 도시유키(田中利幸)의 저서 『알려지지 않은 전쟁범죄 일본군은 호주인들에게 무엇을 했는가』(大月書店, 1993년) 영역본이 출간되었다. 이를 계기로 산다칸 수용소 사건, 인도네시아 방카섬(バンカ島)에서의 호주군 군의관 학살 사건, 위안부 강요(미수) 사건, 인육 식인 사건 등이 미국과 호주에 알려지게 되었다.[31]

여류 작가 아그네스 키스(Agnes Keith)는 소설 『Three Came Home』에서 행진 중 죽기 전 포로들이 일본군에 의해 찢겨져 무덤에 던져졌다는 이야기를 썼다. 이 소설은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서구 사회에서는 "산다칸 죽음의 행진"을 통해 일본군의 잔혹한 이미지가 형성되었다고도 한다.[28]

2014년 7월 8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호주 의회 연설에서 "일본국과 일본 국민을 대표하여 마음으로부터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라고 말했다.

2023년 7월, 말레이시아, 호주, 영국, 일본 전몰자 유족 및 관계자들이 현지 키나발루산(キナバル山) 기슭에 모여 합동 위령법요를 개최했다.[32]

8. 3. 한일 관계에 미치는 영향

1995년부터 산다칸에는 산다칸 전쟁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추모비와 추모관이 건립되었으며, 포로와 지역 주민 유족들에 의한 위령제가 매년 계속되고 있다.[29][30]

1996년 미국에서 다나카 토시유키(田中利幸)의 저서 『알려지지 않은 전쟁범죄 일본군은 호주인들에게 무엇을 했는가』가 영역본으로 출간되면서 산다칸 수용소 사건이 미국과 호주에 알려지게 되었다.[31]

아그네스 키스(Agnes Keith)의 소설 『Three Came Home』에는 행진 중 죽기 전 포로들이 일본군에 의해 찢겨져 무덤에 던져졌다는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으며, 이는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었다. 이를 통해 서구 사회에 "산다칸 죽음의 행진"에서 일본군의 잔혹한 이미지가 형성되었다고도 한다.[28]

2014년 7월 8일, 아베 신조 총리는 호주 의회 연설에서 "일본국과 일본 국민을 대표하여 마음으로부터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라고 말했다.

2023년 7월, 현지 말레이시아, 호주, 영국, 일본 전몰자 유족 및 관계자들이 키나발루산 기슭에 모여 합동 위령법요를 개최했다.[32]

참조

[1] 서적 Sandakan : a conspiracy of silence Sally Milner Pub 1999
[2] 웹사이트 Sandakan Death March: Japanese Inhumanity http://www.diggerhis[...]
[3] 웹사이트 Final footsteps of POWs http://www.smh.com.a[...] 2012-11-25
[4] 뉴스 Borneo Death March /Of 2,700 Prisoners, 6 Survived : An Old Soldier Remembers a Wartime Atrocity https://www.nytimes.[...] 1999-03-23
[5] 웹사이트 The Marches http://www.ww2austra[...]
[6] 웹사이트 Sandakan Death March http://www.users.big[...]
[7] 웹사이트 Laden, Fevered, Starved http://www.dva.gov.a[...]
[8] 웹사이트 Dark Tourism, Hate and Reconciliation https://www.research[...]
[9] 서적 Sandakan Random House Australia 2012
[10] 웹사이트 Remembering Sandakan: 1945–1999 http://www.dva.gov.a[...]
[11] 웹사이트 Stolen Years: The War Crimes Trials http://www.awm.gov.a[...] Australian War Memorial 2013-08-14
[12] 비디오 Six from Borneo : documentary drama of the death marches https://www.awm.gov.[...] Australian Broadcasting Commission 2022-03-24
[13] 웹사이트 Kundasang War Memorial – Destinations, Sabah Tourism Board Official Website (Sabah Malaysian Borneo) http://www.sabahtour[...] Sabahtourism.com 2013-08-14
[14] 웹사이트 :: Lest We Forget - Sandakan - Ranau - Kundasang - Petagas :: http://www.sabahtour[...] 2010-01-02
[15] 웹사이트 Remarks By Prime Minister Abe to the Australian Parliament Tuesday, 8 July 2014 http://japan.kantei.[...] Prime Minister of Japan and his cabinet webpage 2015-03-08
[16] 뉴스 Shinzo Abe's 'Sincere condolences' for Kokoda and Sandakan http://www.theaustra[...] The Australian 2015-03-08
[17] 뉴스 Shinzo Abe's condolences for those lost at Sandakan: a horror from the past, a moment to stop time http://www.smh.com.a[...] Sydney Morning Herald 2015-03-08
[18] 웹사이트 ADDRESS BY THE PRIME MINISTER OF JAPAN Tuesday 8 July 2014 http://parlinfo.aph.[...] Hansard 2015-03-08
[19] 서적 The grim glory : the official history of 2/19 Battalion AIF 1/19 RNSWR Association 2006
[20] 뉴스 Death March trail cutter found http://www.dailyexpr[...] Daily Express 2016-08-23
[21] 뉴스 Stunning recognition for 2 Death March witnesses http://www.dailyexpr[...] Daily Express 2018-09-09
[22] 뉴스 Stick to known Death March route http://www.dailyexpr[...] Daily Express 2011-10-02
[23] 뉴스 The biggest Death March surprises http://www.dailyexpr[...] Daily Express 2017-01-01
[24] 뉴스 Crucial Death March witness dies http://www.dailyexpr[...] Daily Express 2017-05-26
[25] 뉴스 Last known Death March track cutter dies http://dailyexpress.[...] Daily Express 2018-11-04
[26] 뉴스 New Australian PM re-lived Death March! http://www.dailyexpr[...] Daily Express 2018-08-26
[27] 뉴스 Here to experience the Death March http://www.dailyexpr[...] Daily Express 2016-07-28
[28] 서적 사ンダカン死の行進 2003
[29] 웹사이트 Sandakan Memorial Park http://www.sabahtour[...] マレーシアサバ州政府観光局
[30] 뉴스 ボルネオ島で起きた悲劇「サンダカン死の行進」 終戦から78年の今年“加害者”日本の遺族が“被害者”遺族らとともに初めて現地に集う「和解の旅」【news23】 https://newsdig.tbs.[...] TBS NEWS DIG
[31] 서적 Hidden Horrors: Japanese War Crimes in World War II Westview Press 1996-06
[32] 뉴스 ボルネオ島で起きた悲劇「サンダカン死の行進」 終戦から78年の今年“加害者”日本の遺族が“被害者”遺族らとともに初めて現地に集う「和解の旅」【news23】 https://newsdig.tbs.[...] TBS NEWS D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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