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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니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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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니움 전쟁은 기원전 343년부터 기원전 290년까지 로마 공화정과 삼니움족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세 차례에 걸친 전쟁이다. 삼니움족은 아펜니노 산맥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고, 로마는 캄파니아 지역의 세력 다툼에 개입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1차 삼니움 전쟁은 기원전 343년부터 341년까지 비교적 짧게 진행되었으며, 캄파니아를 로마의 영향력 아래 두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2차 삼니움 전쟁은 기원전 326년부터 304년까지 20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로마는 카우디움 전투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겪었지만, 결국 승리하여 군사 제도를 개혁하고 마니플루스 전술을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3차 삼니움 전쟁은 기원전 298년부터 290년까지 벌어졌으며, 로마는 센티눔 전투에서 승리하며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에 대한 패권을 확립하였다. 삼니움 전쟁의 결과로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장악하고, 동맹 세력을 확대하여 군사력을 강화함으로써 이탈리아 반도의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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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니움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삼니움 전쟁
일부로마 확장
시기제1차: 기원전 343년 – 기원전 341년
제2차: 기원전 327년 – 기원전 304년
제3차: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90년
장소이탈리아 중부 및 남부 일부
결과로마가 이탈리아 중부 및 남부 일부(현대 라치오, 아브루초, 몰리세, 캄파니아, 바실리카타 및 북부 아풀리아 지역)를 장악
교전 세력
전투 세력 1로마 공화국
라틴 동맹
캄파니아
전투 세력 2삼니움
아이쿠이족
일부 헤르니키족
에트루리아
움브리아인
세노네스 갈리아인
일부 북부 아풀리아 도시
지휘관
지휘관 1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퀸투스 아울리우스 케르레타누스
지휘관 2겔리우스 에그나티우스
관련 전투
제1차 삼니움 전쟁몬스가우루스
사티쿨라
수에술라
제2차 삼니움 전쟁네아폴리스
임브리니움
카우디네 협곡
라우툴라에
바디모 호수
보비아눔
제3차 삼니움 전쟁티페르눔
카메리눔
센티눔
아퀼로니아

2. 배경

삼니움족은 아펜니노 산맥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하며 주변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려 했다. 동쪽으로는 아풀리아, 남쪽으로는 캄파니아까지 진출하면서 현지 농경 민족들과 갈등을 빚었는데, 이는 주로 목초지를 둘러싼 문제였다.[1] 삼니움족의 영토 확장에 그리스 식민 도시들은 발칸 반도의 다른 식민 도시에, 캄파니아 지역의 민족들은 로마에 지원을 요청했다. 로마는 이 요청을 수락하고 삼니움족을 설득하려 했으나, 삼니움족은 로마인을 무시하고 사절을 모욕했다. 결국 로마가 군대를 이끌고 가면서 삼니움 전쟁이 발발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와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354년 로마와 삼니움족은 리리스 강(현재의 가리글리아노)을 경계로 하는 조약을 체결했다.[1][2] 이 강은 라티움과 캄파니아의 경계였으며, 현대의 라치오와 캄파니아 지역 경계와 같다. 당시 캄파니아는 리리스 강에서 나폴리 만과 살레르노 만까지 뻗어 있는 평야 지역을 가리켰다. 이 조약으로 로마는 리리스 강 북쪽, 삼니움족은 남쪽에 위치하게 되었으나, 로마가 캄파니아에 개입하면서 이 조약은 깨졌다.

3. 제1차 삼니움 전쟁 (기원전 343년 ~ 기원전 341년)

제1차 삼니움 전쟁은 기원전 343년부터 기원전 341년까지 약 3년간 벌어졌다. 로마군이 평야 지대 전투에서 승리한 후, 삼니움족과 로마는 휴전 협정을 맺었다. 로마 장군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는 희생을 원치 않았고, 라틴 동맹 도시들이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3] 이 전쟁으로 로마는 카푸아를 중심으로 한 캄파니아 지방을 얻었고, 캄파니아 주민들에게는 라틴 시민권이 주어졌다.

리위우스는 제1차 삼니움 전쟁에 대한 연속적인 기록을 남긴 유일한 자료를 제공한다. 승리자 명단(Fasti Triumphales)에는 이 전쟁 당시 로마의 두 차례 개선식이 기록되어 있으며, 리위우스가 기술한 일부 사건은 다른 고대 저술가들도 언급하고 있다.

3. 1. 발발

삼니움족이 시디키니를 공격하자, 캄파니아인들이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다.[4] 로마는 캄파니아의 요청을 수락하고 삼니움족에 전쟁을 선포했다.[13]

리비우스에 따르면, 처음 로마는 삼니움족을 설득하려 했으나, 삼니움족은 로마 사절을 모욕하며 무시했다.[12] 결국 로마는 군대를 파견했고, 이는 제1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343년~기원전 341년)으로 이어졌다.

3. 2. 경과

로마는 처음에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구릉 지대에 사는 삼니움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시도했지만, 무례하게 대우받았다. 이에 격분한 로마와 삼니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을 후세에는 '''제1차 삼니움 전쟁'''이라고 부른다.[3] 제1차 삼니움 전쟁은 기원전 343년부터 기원전 341년까지 약 3년간의 짧은 전쟁이었다. 평야에서의 전투에서는 로마가 압승했지만, 몇 년 후 로마와 삼니움 사이에 화의가 체결되었다. 이는 사령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가 과도한 유혈 사태를 원치 않았고, 삼니움 전쟁에서 로마가 다른 라틴 동맹 도시들에 참전을 강요했기 때문에 동맹 도시들의 반란을 초래하여, 그 진압을 위해 로마는 서둘러 전쟁을 종결지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3] 이 전쟁으로 카푸아를 중심으로 한 캄파니아 지방을 로마의 지배권에 넣었다. 그리고 캄파니아 지방의 시민들에게는 라틴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4. 제2차 삼니움 전쟁 (기원전 326년 ~ 기원전 304년)

기원전 327년, 로마는 캄파니아 지방 전역에 라틴족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삼니움족은 그리스계 주민이 많은 나폴리(네아폴리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삼니움족과 캄파니아인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캄파니아인은 로마에 보호를 요청했고, 로마는 이를 수락하여 다시 삼니움족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를 제2차 삼니움 전쟁이라 부르며, 이 전쟁은 20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전쟁 초기, 로마는 삼니움족을 상대로 고전하며 심각한 패배를 겪었다. 기원전 321년, 로마군은 삼니움족 거주 산악 지대 심장부로 진격했다가 삼니움군에 포위되었다. 항복한 로마군은 무장 해제되었고, 후세에 “카우디눔의 수치”라 불리는 굴욕적인 항복을 강요당하여 600명의 기병이 인질로 삼니움에 억류되었다.[16] 이듬해 로마는 다시 삼니움에 진격했지만, 기원전 315년 라우툴라에 전투에서 로마군은 다시 완패했다.[23]

잇따른 로마의 패배로 로마를 지지해 온 캄파니아인들도 로마를 버릴지 말지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로마와 일부 삼니움계 부족 사이에 화의가 맺어졌지만, 다른 많은 삼니움족은 기원전 311년 북쪽의 에트루리아인과 손을 잡고 로마를 양면 공격하려고 획책했다. 이 두 적에게 로마는 처음에는 패배를 거듭했지만, 기원전 311년과 기원전 304년에 삼니움과 에트루리아 양쪽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열세에 몰린 양측은 로마와 화의를 맺고 제2차 삼니움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전투를 통해 로마의 군제에 변혁이 있었다. 우선 에트루리아인의 전술에서 중장보병 전술을 도입하여 로마군의 기반으로 삼았고, 항상 전황에서 유리했던 삼니움족의 군제에서 유연성이 풍부한 마니풀루스를 고안하여 로마 군제에 도입했다. 또한 이 무렵 로마군은 처음으로 해군을 창설했다.

4. 1. 발발

삼니움족이 캄파니아로 쳐들어오자, 캄파니아 지역 민족들은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고, 로마는 이를 수락했다. 처음에는 삼니움족을 설득하려 했으나, 삼니움족은 로마인을 무시하고 사자를 욕보였다. 결국 로마가 군대를 이끌고 가면서 삼니움 전쟁이 시작되었다.[14]

놀라의 묘지 프리즈에서 나온 삼니움 병사들, 기원전 4세기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343년 로마의 두 집정관인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와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가 모두 삼니움인들을 상대로 진군했다. 발레리우스는 군대를 캄파니아로, 코르넬리우스는 사티쿨라에 진영을 설치하고 삼니움으로 진군했다.[14] 리비우스는 로마가 삼니움인들에 맞서 세 번의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전한다. 첫 번째 전투는 가우루스 산 근처 쿠마이에서 해질녘에 벌어졌는데, 하루 종일 격렬한 전투 끝에 발레리우스가 승리했다.[15] 두 번째 전투는 삼니움인들이 코르넬리우스 코수스와 그의 군대를 산길에 가두려 했을 때 로마인들에게 재앙이 될 뻔했다. 그러나 트리부누스인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가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언덕 꼭대기를 점령하여 삼니움인들의 주의를 끌었고, 로마군은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데키우스와 그의 부대는 밤에 안전하게 빠져나갔고, 다음날 아침 공격을 받아 패배했다.[16] 삼니움인들은 군대를 모아 캄파니아 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수에술라를 포위 공격했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수에술라로 강행군을 했다. 보급품이 부족하고 로마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한 삼니움인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군대를 흩어놓았다. 이는 발레리우스가 먼저 삼니움인들의 방비가 허술한 진영을 점령하고, 이어 식량을 구하러 나간 병사들을 흩어놓으면서 세 번째 로마의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17] 이러한 로마의 성공은 팔레리이가 로마와 맺은 40년간의 휴전을 영구적인 평화 조약으로 전환하도록 설득했고, 라티움인들은 로마에 대한 계획된 전쟁을 포기하고 대신 파엘리그니에 대한 전쟁을 벌였다. 카르타고는 주피터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에 봉헌할 12.5kg 무게의 왕관을 가지고 로마에 축하 사절단을 파견했다. 두 집정관은 모두 삼니움인들에 대한 개선식을 거행했다.[18] ''파스티 트리움팔레스''에는 발레리우스와 코르넬리우스가 각각 9월 21일과 9월 22일에 삼니움인들에 대한 개선식을 거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9]

현대 역사가들은 리비우스가 묘사한 이 세 전투의 역사적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해왔다. 이 시대에 대한 리비우스의 전투 장면은 대부분 그와 그의 정보원에 의한 자유로운 재구성이었다.[20] 로마군이 죽인 삼니움인들의 수와 획득한 전리품의 양은 과장되었다.[21] 역사가들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의 이야기와 포에니 전쟁 때인 258년 시칠리아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사건 사이의 많은 유사점을 지적했다. 고대 자료에 따르면, 로마 군대가 협곡에 갇힐 위험에 처했을 때 군사 트리부누스가 300명의 부대를 이끌고 적진 한가운데 언덕 꼭대기를 점령했다. 로마 군대는 탈출했지만 300명 중 트리부누스만 살아남았다. 고대에 더 유명했던 후자의 이야기가 전자의 묘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가능성은 낮다.[22]

Salmon (1967)은 343년의 전역과 그가 이중으로 간주하는 후기 사건 사이에 여러 다른 유사점을 발견했다. 제1차와 제2차 삼니움 전쟁 모두 코르넬리우스가 삼니움을 침략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로마 군대가 함정에 빠진 방식은 기원전 321년 카우디네 포크 전투의 참사와 비슷하며, 기원전 306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르비나와 기원전 297년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사티쿨라의 영웅의 아들)의 전역과 유사하다. 그는 또한 발레리우스 코르부스의 두 차례 캄파니아 승리가 같은 지역에서 215년 한니발에 대항한 로마 작전의 이중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23] 반면, ''파스티 트리움팔레스''의 기록은 어느 정도 로마의 성공을 뒷받침한다. Salmon의 재구성에 따르면, 기원전 343년에는 단 한 번의 전투가 있었는데, 아마도 주노 가우라 신전 근처 카푸아 외곽에서 벌어졌고, 로마의 근소한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24]

Oakley (1998)는 이러한 이중설을 기각하고 세 번의 전투가 있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삼니움인들은 로마군이 도착했을 때 캄파니아에서 상당한 지역을 확보했을 것이며, 발레리우스의 두 번의 승리는 카푸아와 쿠마이에 대한 삼니움인들의 쌍둥이 공격의 결과일 수 있다. 삼니움인들의 매복은 삼니움 전쟁에 대한 리비우스의 서술에서 어느 정도 상투적인 모티브이지만, 이것은 단순히 이 전쟁이 벌어진 산악 지형을 반영할 수 있다.[25] 보존된 데키우스의 이야기는 258년 군사 트리부누스의 이야기를 본떠 만들어졌지만, 데키우스는 여전히 343년에 어떤 영웅적인 행위를 했을 수 있으며, 그 기억이 나중에 과장된 이야기의 기원이 되었을 수 있다.[26]

Forsythe (2005)는 코르넬리우스 코수스와 데키우스 무스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부분적으로 기원전 340년 데키우스의 희생을 예고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P. 데키우스는 어떤 영웅적인 행위를 했을 수 있으며, 그로 인해 340년에 그의 가문에서 처음으로 집정관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의 세부 사항은 남아 있지 않다. 대신, 후대의 편년사가들은 카우디네 포크에서의 참사와 기원전 258년 군사 트리부누스의 이야기를 결합하여 리비우스가 기록한 완전히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원본에서는 로마인들이 패배하고 죽었지만, 여기서는 데키우스의 부하들이 죽지 않고 로마인들이 큰 승리를 거둔다는 점이 다르다.[27]

4. 2. 경과

기원전 327년, 로마는 캄파니아 지방 전역에 라틴족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삼니움족은 그리스계 주민이 많은 네아폴리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삼니움족과 캄파니아인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캄파니아인은 로마에 보호를 요청했고, 로마는 이를 수락하여 다시 삼니움족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를 제2차 삼니움 전쟁이라 부르며, 이 전쟁은 20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전쟁 초기, 로마는 삼니움족을 상대로 고전하며 심각한 패배를 겪었다. 기원전 321년, 로마군은 삼니움족 거주 산악 지대 심장부로 진격했다가 삼니움군에 포위되었다. 항복한 로마군은 무장 해제되었고, 후세에 “카우디눔의 수치”라 불리는 굴욕적인 항복을 강요당하여 600명의 기병이 인질로 삼니움에 억류되었다.[16] 이듬해 로마는 다시 삼니움에 진격했지만, 기원전 315년 라우툴라에 전투에서 로마군은 다시 완패했다.[23]

잇따른 로마의 패배로 로마를 지지해 온 캄파니아인들도 로마를 버릴지 말지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로마와 일부 삼니움계 부족 사이에 화의가 맺어졌지만, 다른 많은 삼니움족은 기원전 311년 북쪽의 에트루리아인과 손을 잡고 로마를 양면 공격하려고 획책했다. 이 두 적에게 로마는 처음에는 패배를 거듭했지만, 기원전 311년과 기원전 304년에 삼니움과 에트루리아 양쪽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열세에 몰린 양측은 로마와 화의를 맺고 제2차 삼니움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전투를 통해 로마의 군제에 변혁이 있었다. 우선 에트루리아인의 전술에서 중장보병 전술을 도입하여 로마군의 기반으로 삼았고, 항상 전황에서 유리했던 삼니움족의 군제에서 유연성이 풍부한 마니풀루스를 고안하여 로마 군제에 도입했다. 또한 이 무렵 로마군은 처음으로 해군을 창설했다.

5. 제3차 삼니움 전쟁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90년)

기원전 298년, 네아폴리스에서 시작된 제3차 삼니움 전쟁은 로마의 세력 확장에 대한 삼니움족의 저항으로 발발했다. 로마는 북쪽의 에트루리아인, 갈리아인과 대치하는 동시에 남쪽의 삼니움족과도 전쟁을 치러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전까지 부족 간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아 각개격파가 가능했지만, 이번에는 모든 적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했다.

로마는 고전 끝에 남쪽의 삼니움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기원전 295년 센티눔 전투에서 갈리아인과 연합한 삼니움족을 격파했다. 이어서 기원전 293년 아퀼로니아 전투에서도 승리했으나, 삼니움족은 기원전 291년까지 끈질기게 저항했다.

결국 삼니움족은 로마에 복속되었고, 이 전쟁을 통해 로마는 남부 그리스 식민 도시와 포 강 이북을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는 삼니움 편에 섰던 그리스 도시들과 캄파니아 도시들도 로마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42]

5. 1. 발발

기원전 328년 프레겔라이에 로마 식민지(정착지)가 건설된 것이 제2차 삼니움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프레겔라이는 리리스 강 동쪽 지류와 트레수스 강(오늘날의 사코 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한 볼스키 도시였는데, 캄파니아에 있었고 삼니움의 지배를 받을 지역이었다. 볼스키족으로부터 함락되어 삼니움에 의해 파괴된 도시였다.[35]

팔레오폴리스("옛 도시")는 현재 나폴리(그리스 도시였음)의 이전 정착지였으며, 더 새롭고 큰 네아폴리스("새 도시")와 매우 가까웠다. 팔레오폴리스가 캄파니아에 거주하는 로마인들을 공격하자, 로마는 배상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 전쟁이 선포되었다. 기원전 327년 두 집정관 군대가 캄파니아로 향했다. 퀸투스 푸블리리우스 필로는 나폴리를 공격했고, 그의 동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는 삼니움의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내륙에 자리 잡았다.[35]

인근 캄파니아 도시 놀라는 팔레오폴리스/네아폴리스에 2000명의 군대를 보냈고, 삼니움은 4000명을 보냈다. 로마에서는 삼니움이 프리베르눔, 푼디, 폼미아이(리리스 강 남쪽의 볼스키 도시들)의 도시들에서 반란을 부추기고 있다는 보고도 있었다. 로마는 삼니움에 사절을 보냈지만, 삼니움은 전쟁 준비를 하고 있지 않고, 폼미아이와 푼디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팔레오폴리스에 파견된 삼니움 병사들은 정부가 보낸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그들은 또한 프레겔라이 건설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는데, 최근 그 지역을 점령했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에 대한 공격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캄파니아에서 전쟁을 요구했다.[35]

이러한 사건들 이전에도 긴장이 있었다. 기원전 337년 아룬키와 시디키니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고, 로마는 아룬키를 지원했다. 기원전 336년 아우소니가 시디키니에 합류했고, 로마는 이들을 격퇴했다. 기원전 335년 로마는 아우소니의 주요 도시인 칼레스를 점령하고 주둔했다. 기원전 334년 2500명의 민간인이 로마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칼레스로 파견되었다. 로마는 시디키니 영토를 황폐화시켰고, 삼니움에서 2년 동안 로마와의 전쟁을 요구하는 소리가 있었다는 보고가 있었다.[36]

기원전 330년 파브라테리아와 루카의 볼스키 도시들은 삼니움으로부터 보호받는 대가로 로마의 지배를 받겠다고 제안했고, 상원은 삼니움에 그들의 영토를 공격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같은 해 프리베르눔과 푼디의 볼스키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켜 다른 볼스키 도시와 그 지역의 두 로마 식민지의 영토를 황폐화시켰다. 기원전 329년 프리베르눔은 함락되거나 항복했다.[36]

삼니움은 캄파니아에 대한 로마의 개입에 군사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한 가지 요인은 루카니아인(삼니움의 남쪽 이웃)과 이오니아 해에 있는 그리스 도시 타란토(라틴어로 타렌툼, 현대 타란토) 사이의 갈등이었을 수 있다. 타란토인들은 그리스 왕 에피루스의 알렉산드로스의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기원전 334년에 이탈리아로 건너왔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는 삼니움과 캄파니아 근처에 있는 파에스툼에 상륙했다. 삼니움은 루카니아인에 합류했고, 두 세력은 알렉산드로스에게 패배했으며, 그 후 알렉산드로스는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1년 또는 기원전 330년 전투에서 사망했다.[37][38]

5. 2. 경과

로마는 센티눔 전투(기원전 295년)에서 삼니움-갈리아 연합군을 격파하고, 아퀼로니아 전투(기원전 293년)에서 승리하는 등 연승을 거두었다.[42] 삼니움족은 기원전 291년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로마에 복속되었다.[42] 이 전쟁에서 처음에는 삼니움 측에 섰던 그리스 도시와 캄파니아 도시 등 각 지역 도시들도 로마와 동맹 관계를 맺게 되면서, 로마의 패권은 남부 그리스 식민 도시와 포 강 이북을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 거의 전역에 미치게 되었다.

6. 결과 및 영향

삼니움 전쟁 결과, 삼니움족은 로마에 복속되었고, 로마는 이탈리아반도 중부 지역 패권을 장악했다.[1][2] 로마는 이 전쟁을 통해 군사 제도를 개혁하고 동맹 세력을 확대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특히 기원전 321년 카우디네 포크 전투에서 로마군이 삼니움군에게 포위되어 굴욕적인 항복을 한 사건은 로마에 큰 충격을 주었다.[43] 이 사건으로 로마는 군사적, 정치적 개혁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로마는 삼니움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군사 전략과 전술을 개선했다. 또한, 로마는 주변 도시들과 동맹을 강화하여 군사력을 보강했다. 아풀리아의 여러 도시들이 로마에 복종하면서 로마 세력은 더욱 확장되었다.[45]

삼니움 전쟁은 로마가 이탈리아반도의 강자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전쟁을 통해 로마는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으며, 이후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통일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7. 역사적 의의

삼니움 전쟁은 로마가 이탈리아반도 중부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지중해 세계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한 중요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로마는 군사, 정치, 외교 등 여러 방면에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삼니움 전쟁의 경험은 로마 군사 제도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삼니움 전쟁에서 로마는 캄파니아 지역의 도시들을 지원하며 삼니움과 충돌했다. 이 과정에서 로마군은 산악 지형에서의 전투 경험을 쌓았고, 이는 훗날 로마군의 전술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의 활약은 로마군의 용맹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16]

제2차 삼니움 전쟁에서는 로마군이 삼니움 군대에 포위되어 항복하는 카우디네 포크의 굴욕을 겪기도 했다.[43] 하지만, 로마는 이 굴욕을 극복하고 결국 삼니움을 제압하며 이탈리아반도 중부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 과정에서 로마는 프로콘술 제도를 도입하여 군사 지휘권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등 정치, 군사 제도를 발전시켰다.[39]

참조

[1] 서적 Diodorus
[2] 서적 Livy
[3] 서적 Livy
[4] 서적 Livy
[5] 서적 Livy
[6] 서적 Livy
[7] 서적 Livy
[8] 서적 Livy
[9] 서적 Livy
[10] 서적 Livy
[11] 서적 Livy
[12] 서적 Livy
[13] 서적 Livy
[14] 서적 Livy
[15] 서적 Livy
[16] 서적 Livy, Stratagems, De Divinatione
[17] 서적 Livy
[18] 서적 Livy
[19] 웹사이트 Fasti Triumphales : Roman Triumphs http://attalus.org/t[...]
[20] 서적 Oakley 1998
[21] 서적 Salmon, Oakley 1967, 1998
[22] 서적 Salmon, Oakley, Forsythe 1967, 1998, 2005
[23] 서적 Salmon 1967
[24] 서적 Salmon 1967
[25] 서적 Oakley 1998
[26] 서적 Oakley 1998
[27] 서적 Forsythe 2005
[28] 서적 Livy, D.H., Appian
[29] 서적 Oakley, Forsythe 1998, 2005
[30] 서적 Forsythe 2006
[31] 서적 Livy
[32] 서적 Oakley 1998
[33] 서적 Oakley 1998
[34] 서적 Salmon, Forsythe 1967, 2005
[35] 서적 Livy
[36] 서적 Livy, viii, 8.19–21
[37] 서적 Livy, viii, 8.17, 8.24
[38] 서적 Justin: Epitome of the Philippic History of Pompeius Trogus, 12.2
[39] 서적 Livy, viii, 8.22–23, 8.25–26
[40] 서적 Livy, viii, 8.29
[41] 서적 Livy, viii, 8.36–37
[42] 서적 Livy, viii, 8.38–39
[43] 서적 Livy, viii, 9.2–6
[44] 서적 Appian, History of Rome: The Samnite Wars, 1.10
[45] 서적 Livy, viii, 9.20
[46] 서적 Salmon, viii. p. 226
[47] 간행물 Frederiksen, JRS 58 (1968)
[48] 서적 Livy, viii, 9.5
[49] 서적 Livy, viii, 9.6–7
[50] 서적 Livy, viii, 9.8–12
[51] 서적 Livy, viii, 9.12–15
[52] 서적 Livy, viii, 9.21
[53] 서적 Livy, 9.22–23
[54] 서적 Livy, viii, 9.24–27
[55] 서적 Livy, viii, 9.29
[56] 서적 Livy, viii, 9.31–32
[57] 서적 Livy, 9.33–37
[58] 서적 Livy, 9.38–39
[59] 서적 Livy, viii, 9.40–41
[60] 서적 Livy, viii, 9.42–43
[61] 서적 Livy, viii, 9.43–44
[62] 서적 Livy, viii, 10.1
[63] 서적 Livy, viii, 9.45
[64] 서적 Livy, viii, 10.1, 3, 9, 10
[65] 서적 Cornell, T., J., ''The Beginnings of Rome'', pp. 357–358
[66] 서적 Livy, viii, 10.3–5, 10
[67] 서적 Livy, X.10
[68] 서적 Livy, X.11
[69] 서적 Dionysius of Halicarnassus, Excerpts from Books, xvii/xviii.1–2
[70] 서적 Dionysius of Halicarnassus, Excerpts from Books xvii/xviii.3
[71] 서적
[72] 서적
[73] 서적
[74] 서적
[75] 서적
[76] 서적
[77] 서적
[78] 서적
[79] 서적
[8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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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서적
[8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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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서적
[90] 서적
[91] 서적
[92] 서적
[93] 서적
[94] 서적
[95] 서적
[96] 서적
[97] 서적
[98] 서적 Abridgment of Roman History
[99] 서적
[100] 서적 Roman antiquities
[101] 서적
[102] 서적 Epitome of Roman history
[103] 서적 Samnium and the Samnites
[104] 서적 A Critical History of Early Rome
[105] 서적 Periochae
[106] 서적 The Beginning of Rome
[107] 서적 The Beginnings of Rome
[108] 서적 The Histories
[109] 서적 The Hi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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