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직추임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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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직추임문제는 오다 노부나가가 조정으로부터 세 관직(세이이타이쇼군, 태정대신, 간파쿠) 중 하나를 제안받은 사건을 말한다. 가주지 하루토요와 오다 노부나가의 관계, 오다 노부나가의 관직 임명 과정을 배경으로 1582년 5월에 논의되었다. 이 문제의 발언자가 조정 측인지 오다 노부나가 측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으며, 오다 노부나가가 실제로 어떤 관직을 원했는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이 사건은 오다 노부나가가 조정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지만, 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그의 진의는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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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다 노부나가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 오다 노부나가 - 아케치 미쓰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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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직추임문제 | |
|---|---|
| 삼직추임문제 | |
![]() | |
| 발생 시기 | 고종 즉위 직후 |
| 관련 인물 | 흥선대원군 조대비 김병학 조두순 김좌근 김흥근 |
| 배경 | |
| 세도 정치 하의 폐단 | 탕진된 국고 기강 해이 탐관오리 만연 매관매직 성행 |
| 전개 | |
| 조대비의 수렴청정 |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지명 대원군에게 삼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임명 권한 부여 |
| 대원군의 인사 개혁 | 김병학, 조두순 등 척신 세력 축출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인재 부족으로 인한 난관 봉착 |
| 결과 | |
| 척신 세력의 반발 | 대원군의 인사 정책에 대한 불만 증가 대원군 탄핵 시도 |
| 대원군의 결단 | 삼직 추임 중단 인재 등용에 어려움 인정 |
| 영향 | 대원군의 개혁 정치에 대한 기대감 감소 척신 세력의 영향력 유지 |
2. 가주지 하루토요와 오다 노부나가
가주지 하루토요는 교토의 귀족 가문인 가주지 가문(勧修寺家)의 14대 당주였다. 무가전주(武家伝奏)로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과 교류하였다. 이시야마 합전 때는 칙사로서 노부나가와 혼간지(本願寺) 사이의 화해를 주선하기도 하였다. 하루토요가 남긴 일기 『하루토요코키』(晴豊記)는 오다 노부나가와 혼노지의 변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어 사료 가치가 높은 1급 사료로 평가받는다. 하루토요는 혼노지의 변 전날인 덴쇼 10년(1582년) 6월 1일, 오다 노부나가의 교토 상경을 축하하기 위한 칙사로서 구교 간로지 쓰네모토(甘露寺経元)와 함께 혼노지에 파견되어 노부나가와 회견하였으며, 혼노지의 변 이후에는 니조고쇼(二条御所)의 상황 등에 대해서도 기록하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오와리 시절 가즈사노스케를 자칭했고,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꺾은 후에는 오와리노카미를 칭했지만, 조정으로부터 직접 관직을 받지는 않았다. 이는 조정에 헌금을 하여 빈고노카미나 미카와노카미 등의 관직을 얻었던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와는 대조적이다.
3. 오다 노부나가의 관직 임명과 삼직 추임 문제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받들어 교토 상경한 후에도 노부나가는 단조소추나 단조다이히와 같은 비교적 낮은 관직에 머물렀다. 그러나 1573년 아시카가 요시아키 추방 후 노부나가의 관위는 급격히 상승했다. 덴쇼 2년에 산기에 임관한 이후 불과 3년 만에 종2위·우대신으로 승진했다. 이는 무가로서는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이래 처음있는 우대신 임관이었으며, 또한 노부나가 이전에 이보다 상위의 관직에 생전에 임관한 무가는 다이라노 기요모리(태정대신)·아시카가 요시미쓰(태정대신)·아시카가 요시노리(좌대신)·아시카가 요시마사(좌대신) 4명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덴쇼 6년 4월에 우대신 겸 우콘노에다이쇼를 사임한 후 관직에 취임하지 않고, 이후 4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산위로 지냈다.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노부나가의 임관이 문제가 되었다. 먼저, 덴쇼 9년 3월에 조정으로부터 좌대신 취임을 요청받았지만, 노부나가는 오기마치 천황의 양위를 조건으로 답변했지만,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덴쇼 10년 4월, 무가 덴소 가주지 하루토요는 교토 쇼시다이 무라이 사다카쓰의 저택을 방문하여 노부나가의 임관에 대해 논의했다. 하루토요는 자신의 일기 『하루토요코키』에 이 논의를 기록했다. 이 논의 속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세이이타이쇼군, 태정대신, 관백 가운데 하나에 임관한다'''는 것이 조정 측 또는 오다 노부나가 측에서 제안되었다.
삼직 추임 문제란, 이 임관을 제안한 것이 조정 측이었는지 노부나가 측이었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노부나가가 장래에 조정을 어떻게 다루려고 생각했는지를 고찰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이지만, 노부나가로부터의 공식적인 답변이 밝혀지기 전에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기 때문에, 노부나가 자신이 어떤 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영원한 수수께끼가 되어 버렸다.
3. 1. 삼직 추임 문제의 배경
오다 노부나가는 고슈 정벌을 통해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키고 호조 가문을 종속시키는 등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조정은 노부나가의 세력 확장을 '간토 평정'으로 해석하고, 이에 상응하는 관직을 제안하려 했다. 당시 무가전주였던 가주지 하루토요는 교토 쇼시다이 무라이 사다카쓰와 이 문제를 논의했다.[14]
하루토요는 자신의 일기 『하루토요코키』에 이 논의를 기록했는데, '''오다 노부나가가 세이이타이쇼군, 태정대신, 관백 가운데 하나에 임관한다'''는 것이 조정 측 또는 오다 노부나가 측의 제안이었다고 전한다.
3. 2. 『하루토요코키』에 기록된 삼직 추임 논의
天正十年|덴쇼 10년일본어 4월 25일, 무라이 사다카쓰(村井貞勝)의 저택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임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1] 같은 해 5월 4일의 기록에는 노부나가가 '쇼군이 되어야 한다'는 언급이 있으며, 이는 조정의 공식 의향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
4. 삼직 추임 문제를 둘러싼 해석 논쟁
오다 노부나가와 조정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대립설과 융화설이 존재한다. 다니구치 가쓰히로는 각 설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1]
- 대립설: 아키타 히로키, 아사오 나오히로, 이케 토오루, 이마야 아키라, 오쿠노 타카히로, 타치바나 쿄코, 후지키 히사시, 후지타 타츠오
- 융화설: 키리노 사쿠진, 다니구치 가쓰히로, 하시모토 마사노리, 호리 아라타, 미키 세이이치로, 야마모토 히로후미, 와키타 오사무, 타카자와 히토시
삼직 추임 문제에 대해 대립설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명확하게 반응하지 않은 것은 조정에서 멀어지려는 자세, 혹은 조정에 대한 압박을 나타낸 것이라고 보았다. 아키타는 "천황을 자신의 권력 기구에 편입시키려 했기 때문"이라고 보았고, 아사오는 "관위 제도의 틀 밖에서 조정의 틀에서 벗어나려 했다"고 했으며, 이마야는 "관직 취임을 천황의 양위와 교환 조건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융화설에서는 조정에서 멀어지려는 자세를 보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니구치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에 대항하여 우콘노에다이쇼[16]에 임관했으므로, 노부나가에게 관위는 불필요했다고 보았다. 그 외에도 궁정 의례에서 해방되기 위해(와키타 설), 노부타다의 관위 승진을 원했기 때문에(호리, 다니구치 설), 비공식적으로 태정대신 취임을 승낙하고 있었다(하시모토, 와키타[17] 설) 등의 견해가 있다. 다카자와는 고토노고텐조 일기에 노부나가가 두 번째 말 행차(馬揃え) 뒤에 사네히토 친왕의 즉위 때 관위를 받겠다고 명언했다는 기사가 있음을 지적하며, 단순히 시기적인 문제로 삼을 정도는 아니라고 하였다.
삼직 추임 문제에 대해서는 양측 모두 조정이 주도했다고 보는 것이 유력했지만, 타치바나 쿄코가 오다 노부나가의 의향이었다는 새로운 설을 제창하여 논쟁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조건 제시가 혼노지의 변 직전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미처 답변을 할 겨를이 없었다고 보기도 한다.
노부나가의 대답 내용에 대해서는 태정대신설, 세이이타이쇼군설, 사퇴설 등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나, 현재까지 정설로 여겨지는 견해는 확정되지 않았다.[23]
4. 1. 발언자는 누구인가?
1968년 (쇼와 43년) 이와사와 요시히코가 내각문고(현 국립공문서관)에 있던 『덴쇼 10년 여름 기록』(天正十年夏記)이 『하루토요코키』(晴豊公記)의 단편(断簡)임을 발표하면서, '삼직 중 하나에 추임하는 것이 좋겠다'는 발언의 주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졌다.[18] 이와사와는 이 발언의 주체를 (오기마치 천황의 의향을 받은) 하루토요로 보았다.그러나 역사연구가인 다치바나 교코는 『하루토요코키』의 문체 분석을 통해 이 발언의 주체가 무라이 사다카쓰라고 주장하며,[20] 이는 오다 노부나가의 의향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호리 신은 삼직 추임이 오다 노부나가의 의향이라고 할 수 없으며, 5월 4일의 하루토요의 말도 하루토요 개인의 견해라고 반론하였다.[22]
4. 2. 오다 노부나가의 대답 내용
이 논쟁은 현재도 지속되고 있으며, 아직 정설로 여겨지는 견해는 확정되지 않았다.[23]4. 2. 1. 태정대신설
오다 노부나가가 헤이시를 자칭했고,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같은 깃발과 인장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23] 혼노지의 변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가 노부나가를 '대상국(大相国)'이라고 불렀다는 점도 근거 중 하나이다.[6]4. 2. 2. 세이이타이쇼군설
『하루토요코키』에 '쇼군이 되어야 한다'는 언급이 있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다치바나 교코, 오와다 데쓰오 등이 이 설을 지지한다.[24][7]엔도 아키라는 모리 가문이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오다 가문과의 결전을 앞두고 있었고, 노부나가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자신이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관하거나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쇼군 해임을 조정에 요청했다고 주장한다.[25]
한편으로 당시 세이이타이쇼군은 아시카가 씨의 가직(家職)이었고, "아시카가 씨 이외의 쇼군은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이 일본 사회에 정착되어 있었다. 기노시타 마사노리는 조정이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쇼군 해임을 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노부나가가 쇼군으로 취임하더라도 반(反) 노부나가 세력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계속 인정하면 의미가 없어진다(메이오 정변으로 쇼군에서 해임되었던 아시카가 요시타네는 그를 지지하는 다이묘들로부터 여전히 쇼군으로 인정받았으며, 결국 교토 상경을 완수하고 자신의 권력을 되찾았다)고 지적하였다.[26][8]
4. 2. 3. 사퇴설
오다 노부나가는 오기마치 천황과 사네히토 친왕에게 회신하겠다고 했고, 무라이에게도 회신이 있었음에도 이후 조정에 노부나가 임관을 위한 움직임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하루토요코키』에 기록되어 있다.[27][28][29] 또한 노부나가가 이전에 우다이진 겸 우콘노에노타이쇼를 사임하였을 때 "실로 만국이 안녕하고 사해가 평균하게 된 때에 거듭 등용의 칙명에 응하여..."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만국이 안녕하고 사해가 평균하게' 된 때란 곧 일본을 통일하기 전에는 관직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뜻을 비친 것으로 해석된다.[27][28][29]호리 신, 다니구치 가쓰히로, 후지이 료지 등이 이 설을 지지한다.[27][28][29]
참조
[1]
서적
検証 本能寺の変
吉川弘文館
[2]
간행물
本能寺の変拾遺
[3]
간행물
信長への三職推任について
[4]
서적
信長と天皇
講談社
[5]
간행물
織田信長と三職推任
[6]
서적
近世公家社会の研究
吉川弘文館
[7]
서적
明智光秀
PHP研究所
[8]
서적
戦国期足利将軍家の権力構造
岩田書院
[9]
간행물
織豊期王権論
[10]
서적
信長の天下所司代 筆頭吏僚 村井貞勝
[11]
서적
天皇と天下人
講談社
[12]
논문
織田権力論の再検討―京都馬揃・三職推任を中心に―
[13]
논문
織田信長と武家官位
[14]
문서
당초에는 가즈사노카미(上総守)를 자칭하였으나 [[가즈사국]](上総国)은 친왕이 가미를 맡는 친왕임국(親王任国)으로 인신(人臣)이 가즈사노카미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가즈사노스케로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15]
서적
検証 本能寺の変
吉川弘文館
[16]
문서
우콘노에노타이쇼는 또한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와도 연고가 있는 관직이기도 하였다.
[17]
문서
혼노지의 변 직후인 7월 17일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는 오다 노부나가를 「대상국」(大相国)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태정대신 관직 추증이 궁중에서 논의된 것은 그로부터 3개월 뒤의 일이었고, 그러한 관직 추증의 선명(宣命)에는 「거듭 태정대신으로 하여」(重而太政大臣)라는 한 줄의 문장이 있어서 두 번 태정대신의 사령이 나왔다고 해석될 수 있으며, 혼노지의 변 직전인 고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가 갑자기 태정대신 사임이 결정된 것을 근거로 한다.
[18]
간행물
本能寺の変拾遺
[19]
문서
다른 사용례에 따를 경우 이 발언의 주체를 하루토요라고 하게 되면, 하루토요가 자신의 언동에 대해서 '제가 하셨습니다.' 식으로 존댓말을 붙이고 있는 것이 되어 문법상 구문이 무너진다.
[20]
간행물
信長への三職推任について
[21]
서적
信長と天皇
講談社
[22]
간행물
織田信長と三職推任
[23]
서적
近世公家社会の研究
吉川弘文館
[24]
서적
明智光秀
PHP研究所
[25]
서적
本能寺の変本当の謎-反逆者は二人いた-
並木書房
[26]
서적
戦国期足利将軍家の権力構造
岩田書院
[27]
간행물
織豊期王権論
[28]
서적
信長の天下所司代 筆頭吏僚 村井貞勝
[29]
서적
天皇と天下人
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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