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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드 프랑스 (14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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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를 드 프랑스 (1446년)는 샤를 7세와 마리 당주의 아들로, 베리 공작, 노르망디 공작, 아키텐 공작을 역임했다. 형 루이 11세가 왕위에 오른 후 베리 공국을 받았으나, 공익 동맹에 참여하여 반기를 들었다. 이후 노르망디 공국을 받았지만 통치 능력 부족으로 왕실의 통제를 받았다. 부르고뉴 공작 샤를에게 샹파뉴를 양도받기도 했으며, 아키텐 공국을 받았다. 부귀공 마리와의 결혼을 추진했으나, 1472년 결핵과 성병 합병증으로 사망하면서 무산되었고, 그의 영지는 왕실로 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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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드 프랑스 (1446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샤를 드 프랑스 (1446-1472)
베리 공 샤를 왕자, 장 푸케 그림
이름샤를 드 프랑스
다른 이름Charles de Valois
칭호노르망디 공작
규옌(아키텐) 공작
출생일1446년 12월 26일
출생지프랑스, 투르
사망일1472년 5월 24일/25일
사망지보르도
가문발루아 가문
아버지샤를 7세
어머니마리 당주
작위
베리 공작1461년 - 1465년 (샤를 2세)
이전샤를 1세
이후왕령 편입 (프랑수아: 루이 11세의 막내 아들)
노르망디 공작1465년 - 1466년

2. 어린 시절

샤를은 샤를 7세와 마리 당주의 막내이자 넷째 아들로 투르에서 태어났다. 그의 맏형인 도팽 루이는 아버지와 끊임없이 다툼을 벌였고 1456년부터는 부르고뉴 공국 궁정에서 망명생활을 해왔으며, 일부에서는 왕위가 샤를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그러나 1461년에 샤를 7세가 사망하자, 루이가 왕위에 올랐다.

루이 11세는 즉위 후 동생 샤를에게 영지로서 베리 공국을 주었다.

3. 베리 공작 시절

루이 11세는 즉위 후 동생 샤를에게 베리 공작령영지로 하사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샤를은 1465년 5월 샤를 드 샤롤레 백작 및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같은 다른 강력한 귀족들과 함께 공익 동맹에 가담하여 동맹의 수장이 되었다.[1] 이는 반란으로 이어졌고, 10월에 루이 11세와 샤롤레 백작 사이에 콩플랑 조약이 체결되면서 끝을 맺었다.

4. 노르망디 공작 시절

샤를은 조약에 따라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영지를 통제할 수 없었고, 이전 동맹이었던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갈등을 겪었다. 루이 11세는 왕실 군대를 노르망디로 파견하여 공국을 직접 통제했다. 이후 프랑수아 2세와 화해한 샤를은 브르타뉴로 피신하여 1468년 9월까지 머물렀다. 그곳에서 샤를과 프랑수아 2세는 루이 11세와 앙세니 조약을 체결하고, 당시 부르고뉴 공작이 된 이전의 샤를을 버리기로 약속했다.[2]

5. 아키텐 공작 시절

1468년 10월, 루이 11세는 페론에서 열린 회담 중에 부르고뉴 공작 샤를에게 감금되었다. 루이 11세는 석방을 대가로 노르망디에 대한 보상으로 샹파뉴를 동생 샤를에게 양도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풀려난 루이 11세는 강요에 의해 한 약속을 어겼다. 1469년 4월, 루이 11세는 샤를과 화해하고 아키텐 공국을 양도하였다.[1]

아키텐 공작으로서의 샤를의 문장


샤를은 부르고뉴 공작의 외동딸이자 상속녀인 부르고뉴의 마리와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루이 11세는 이 결혼을 반대하여 교황 바오로 2세에게 사절을 보내 근친상간을 이유로 교황청 허가를 내주지 못하게 하였다.

결혼 계획은 1472년 5월 샤를이 보르도에서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샤를은 결핵성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의 정부인 콜레트 드 샹브와 함께 앓던 병이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샤를이 적자 없이 사망하면서, 그의 영지는 왕실로 반환되었다.[2]

6. 결혼 시도와 사망

샤를은 조약에 따라 노르망디 공국을 추가 영지로 받았다. 그러나 그는 새 영지를 통제할 능력이 없었고, 이전 동맹이었던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갈등을 겪었다. 루이 11세는 왕실 군대를 노르망디로 보내 공국을 직접 통제했다. 샤를은 프랑수아 2세와 화해한 후 브르타뉴로 피신했고, 1468년 9월까지 그곳에 머무르며 루이 11세와 앙세니 조약을 체결, 당시 부르고뉴 공작이 된 용담공 샤를을 버리기로 약속했다.

1468년 10월, 루이 11세는 페론 회담 도중 용담공 샤를에게 감금되었다. 루이 11세는 석방 조건으로 샹파뉴를 샤를에게 양도하기로 했으나, 풀려난 후 약속을 어겼다. 1469년 4월, 루이 11세는 샤를에게 아키텐 공국을 양도하며 화해했다.

샤를은 용담공 샤를의 외동딸이자 상속녀인 부귀공 마리와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루이 11세는 이 결합을 반대하여 교황 바오로 2세에게 사절을 보내 근친상간을 이유로 교황청 허가를 막으려 했다. 교황은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결국 샤를은 1472년 5월 보르도에서 사망하면서 결혼은 무산되었다. 사인은 결핵성병의 합병증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정부인 콜레트 드 샹베(Colette de Chambes)가 투아르 자작 루이 당부아즈의 질투심 많은 아내가 탄 독이 든 생선을 먹고 사망했다고 한다.[2]

샤를이 적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영지는 왕실로 돌아갔다. 그의 사생아 딸인 안 바타르드 드 발루아(Anne bâtarde de Valois)는 뤼세크(Russec) 남작 프랑수아 드 볼비르(François de Volvire)와 결혼했으나, 1490년대에 자식 없이 사망했다.[3]

7. 사후

샤를은 정부 콜레트 드 샹브(Colette de Chambes)와의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1]

이름출생 연도비고
잔 드 기옌(Jeanne de Guyenne)1470년도미니코회 수녀
안(Anne)1471년1490년 루페크 남작 프랑수아 드 볼비르(François de Volvire)와 결혼. 자녀는 없었다.


8. 문장

샤를 드 프랑스는 1461년부터 1465년까지 베리 공작, 1465년부터 1469년까지 노르망디 공작, 1469년부터 1472년까지 기옌 공작 작위를 가졌으며, 각 작위에 따라 다른 문장을 사용했다.

8. 1. 베리 공작 시절 문장 (1461년–1465년)

8. 2. 노르망디 공작 시절 문장 (1465년–1469년)

8. 3. 아키텐 공작 시절 문장 (1469년–1472년)

9. 가계

샤를 7세와 앙주의 마리의 아들이다.

9. 1. 조상

16. 장 2세8. 샤를 5세4. 샤를 6세2. 샤를 7세1. 베리 공작 샤를 드 발루아
17. 보헤미아의 본9. 부르봉의 잔5. 바이에른의 이자보rowspan="4" |
18. 부르봉 공작 피에르 1세10. 바이에른 공작 슈테판 3세
19. 이자벨 드 발루아11. 타데아 비스콘티3. 앙주의 마리
20. 바이에른 공작 슈테판 2세22. 베르나보 비스콘티6. 나폴리의 루이 2세
21. 시칠리아의 엘리자베스23. 베아트리체 델라 스칼라7. 아라곤의 욜랑드
22. 베르나보 비스콘티12. 나폴리의 루이 1세
23. 베아트리체 델라 스칼라13. 마리 드 샤티용14. 아라곤의 후안 1세
24. 장 2세26. 샤를 드 샤티용, 블로아 백작15. 바르의 욜랑드
25. 보헤미아의 본27. 펜티에브르의 잔
26. 샤를 드 샤티용28. 아라곤의 페드로 4세
27. 펜티에브르의 잔29. 시칠리아의 엘레오노라
28. 아라곤의 페드로 4세30. 로베르 1세, 바르 공작
29. 시칠리아의 엘레오노라31. 마리 드 발루아


참조

[1] 문서 The Duchy of Aquitaine had been held since pre-heraldic times by the English kings, firstly by King Henry II of England|Henry II who married the heiress Eleanor of Aquitaine thus the duchy was symbolised heraldically only by the arms of Plantagenet
[2] 웹인용 Nicole de Chambes http://geneweb.inria[...] Gene Web 2008-07-09
[3] 웹인용 Anne de Valois http://geneweb.inria[...] Gene Web 200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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