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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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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은 1885년 불가리아와 동루멜리아의 통일에 반대하며 세르비아가 불가리아에 선전포고하면서 발발했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원 약속과 영토 획득 가능성, 그리고 불가리아로 망명한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불만으로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세르비아는 슬리브니차 전투에서 패배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개입으로 휴전했다. 1886년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국경은 변경되지 않았고, 불가리아의 통일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전쟁은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무기와 인간'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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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 명칭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
일부불가리아 위기
날짜1885년 11월 14일 – 1885년 11월 28일 그레고리력
장소세르비아 동부와 불가리아 서부
결과불가리아의 승리
영토 변경세르비아 패배 후 불가리아 통일 인정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동루멜리아와 통합하여 불가리아 영토 거의 두 배 증가
교전 세력
지휘관
지휘관 1밀란 1세
페타르 토팔로비치
밀로이코 레샤닌
지휘관 2알렉산더르 1세
아타나스 우주노프
다나일 니콜라예프
병력
병력 160,000명
병력 250,000명
사상자
사상자 1770명 사망
4,570명 부상
사상자 2550명 사망
4,232명 부상
기타 정보
불가리아군이 국경을 넘는 모습
불가리아군이 국경을 넘는 모습, 안토니 피오트로프스키 그림

2. 배경

1885년 불가리아와 동루멜리아의 통일은 베를린 조약으로 형성된 발칸 반도의 세력 균형을 뒤흔들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고, 세르비아는 불가리아의 성장이 자국의 입지를 약화시킬 것을 우려했다. 특히 세르비아의 밀란 1세는 친러시아 성향의 반체제 인사들이 불가리아로 망명하는 상황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4]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원 약속과 영토 보상에 대한 기대감으로, 밀란 1세는 불가리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세르비아는 브레고보 지역의 국경 분쟁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불가리아의 성장을 저지하고 발칸 반도에서 세르비아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불가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예상하고 병력을 남동쪽 국경에 배치했기 때문에, 세르비아는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불가리아 측 자료는 세르비아군의 불가리아 영토 침입을 적대 행위의 시작으로 보았다. 불가리아군은 세르비아가 공격할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국경에서 멀리 배치되었으며, 여러 차례 침입 후 1885년 11월 1일(율리우스력 11월 13일)에 마침내 총격전이 벌어졌다.[4]

2. 1. 불가리아 통일과 열강의 반응

불가리아 통일과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


1885년 9월 6일(율리우스력 9월 18일), 불가리아와 오스만 제국의 자치령이었던 동루멜리아는 플로브디브에서 통일을 선포했다.[4] 베를린 조약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동루멜리아는 주민 대다수가 불가리아계였다. 이 통일은 러시아를 포함한 열강들의 의지와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발칸 반도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특히 통일에 반대했다. 불가리아의 서쪽 이웃인 세르비아 또한 발칸 반도 내 자신의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 게다가 세르비아의 통치자 밀란 1세(1868~1889)는 세르비아 군대에 의해 진압된 티목 반란을 선동했던 니콜라 파시치와 같은 친러시아 반대파 지도자들이 불가리아로 망명한 것에 격분했다.

통일 선포 후, 발칸 반도에 대불가리아 국가가 건설될까 두려워한 그리스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그들은 그리스 정부에 불가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촉구했다. 세르비아는 그리스에 불가리아에 대한 공동 군사 행동을 제안했지만, 그리스는 이를 거절했다.

두 나라 모두 영토 변화는 없었지만, 열강들은 통일을 인정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맞서 오랫동안 함께 싸우면서 형성된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사이의 신뢰와 우정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었다.

2. 2. 세르비아의 입장과 밀란 1세의 결정



1885년 9월 6일(율리우스력 9월 18일), 불가리아와 오토만 제국의 자치령이었던 동루멜리아는 플로브디브에서 통일을 선포했다. 주민 대다수가 불가리아계였던 동루멜리아는 7년 전 베를린 조약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지역이었다. 이 통일은 러시아를 포함한 열강들의 의지와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발칸 반도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특히 통일에 반대했다. 불가리아의 서쪽 이웃인 세르비아 또한 발칸 반도 내 자신의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 게다가 세르비아의 통치자 밀란 1세(1868~1889)는 세르비아 군대에 의해 진압된 티목 반란을 선동했던 니콜라 파시치와 같은 친러시아 반대파 지도자들이 불가리아로 망명한 것에 격분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원 약속과 불가리아로부터의 영토 이득(발칸 반도 서부에서의 양보에 대한 대가)에 끌린 밀란 1세는 1885년 11월 2일(율리우스력 11월 14일) 불가리아에 선전포고했다. 군사 전략은 주로 기습에 의존했는데, 불가리아는 오토만 제국의 공격을 예상하고 동남쪽 오토만 국경 근처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켰기 때문이다.

2. 3. 국경 분쟁과 전쟁의 명분



세르비아는 브레고보 분쟁을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다. 티목 강은 두 나라의 국경을 이루는데, 수년에 걸쳐 물길이 바뀌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 결과, 브레고보 마을 근처의 세르비아 국경 초소가 강의 불가리아 쪽 제방에 위치하게 되었다. 세르비아는 불가리아에 초소 철수를 요구했고, 불가리아가 이를 거부하자 세르비아는 불가리아 병력을 강제로 추방했다.[4]

3. 세르비아군

세르비아군은 당시 최신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포병 장비는 상대적으로 열세였다. 군사 작전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는 세르비아군의 총 병력은 약 6만 명이었다. 밀란 1세는 자신의 군대를 니샤바군과 티목군 두 개의 군대로 나누었다. 니샤바군은 서부 국경을 따라 불가리아 방어선을 돌파하고 소피아를 점령하여 이흐티만 고지대를 향해 진격하는 주요 목표를 맡았다. 이곳에서 군대는 남동쪽에서 진군하는 불가리아군과 맞서 격파할 예정이었다.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과의 지난 두 차례 전쟁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고등 교육을 받은 지휘관과 병사들이 있다는 이론적 우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밀란 1세는 전쟁의 영광을 독차지하기 위해 경험 많은 장군들을 배제하고, 충성심을 기준으로 지휘관을 임명하는 등 군 내부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1]

3. 1. 군사력과 장비

세르비아군은 당시 최신 표준이었던 마우저-밀로바노비치 단발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이 소총은 뛰어난 탄도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포병은 장비가 부실하여 여전히 라 히트 시스템의 전장식 대포를 사용하고 있었다. 드 방주 시스템의 후장식 대포는 주문 및 대금이 지불되었지만 1886년까지 세르비아에 도착하지 않았다.

현대식 소총은 당시 유럽 최고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 발발 2년 전에 도입되었기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사용법을 잘 숙지하지 못했다. 소총의 이론적 성능이 경험이 부족한 세르비아 장교들을 오도하여 반 마일 이상의 거리에서 집중 사격을 명령하게 했고, 이는 귀중한 탄약을 거의 효과 없이 낭비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구매된 탄약의 양은 이전의 훨씬 더 오래되고 발사 속도가 느린 소총의 탄환 소모량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3. 2. 밀란 1세의 군 지휘와 문제점

밀란 1세는 이전 전쟁에서 공을 세운 요반 벨리마르코비치, 주라 호르바토비치, 밀로이코 레시야닌 등의 장군들을 지휘부에서 배제했다. 대신 그는 스스로 군 사령관을 맡고, 대부분의 사단 지휘권을 자신의 충성심을 기준으로 선발한 장교들에게 부여했다. 예를 들어, 모라바 사단의 페타르 토팔로비치는 이전에 군사 조직이 부실한 티목 반란을 진압한 경력이 있었다.[1]

또한, 밀란 1세는 불가리아 군사력을 과소평가하고 국내 반란을 우려하여 1차 보병(30세 미만의 징집병)만 동원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세르비아 가용 인력의 절반 정도만 동원하는 것으로, 오스만 제국과의 이전 전쟁에서 경험을 쌓은 베테랑 병사들을 활용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1]

당시 유럽 최고 수준의 소총이었던 마우저-밀로바노비치 소총[1]은 도입된 지 2년밖에 되지 않아 많은 병사들이 사용법을 숙지하지 못했다. 또한, 소총의 성능을 과신한 세르비아 장교들은 원거리 집중 사격을 명령하여 탄약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탄약 구매량도 이전의 구식 소총을 기준으로 책정되어 부족했으며, 세르비아 전술이 백병전보다 화력을 강조했기 때문에 네슈코프 비스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1]

4. 불가리아군

슬리브니차 전투 당시의 알렉산더 바텐베르크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의 위협에 맞서 통일이 선포되었을 때 러시아가 불가리아 군대의 지휘관들을 철수시키고,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대비해 주력 부대를 남동쪽 국경에 배치해야 하는 등 두 가지 심각한 불리함을 안고 싸워야 했다. 이 때문에 불가리아군은 "대위들의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휘 경험이 부족했고, 주력 부대의 재배치에는 최소 5~6일이 걸릴 상황이었다.

4. 1. 러시아 군사 고문단 철수와 지휘 공백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의 위협에 맞서 두 가지 심각한 불리함을 안고 싸워야 했다. 통일이 선포되었을 때, 러시아는 그때까지 불가리아 군대의 모든 대규모 부대를 지휘했던 군 장교들을 철수시켰다. 이로 인해 남은 불가리아 장교들은 계급이 낮았고 소대보다 큰 부대를 지휘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이 전쟁은 "대위들의 전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한 불가리아 정부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했기 때문에, 불가리아 군의 주력은 남동쪽 국경에 있었다. 불가리아 전역으로의 재배치에는 최소 5~6일이 걸릴 것이었다.

4. 2. 전략적 이점과 한계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의 위협에 맞서 두 가지 심각한 불리함을 안고 싸워야 했다. 통일이 선포되었을 때, 러시아는 그때까지 불가리아 젊은 군대의 모든 대규모 부대를 지휘했던 군 장교들을 철수시켰다. 남은 불가리아 장교들은 계급이 낮았고 소대보다 큰 부대를 지휘한 경험이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전쟁은 "대위들의 전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한 불가리아 정부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공격을 예상했기 때문에, 불가리아 군의 주력은 남동쪽 국경에 있었다. 불가리아 전역으로의 재배치에는 최소 5~6일이 걸릴 것이었다.[1]

불가리아의 주요 이점은 강한 애국심과 높은 사기, 그리고 정당한 대의를 위해 싸운다는 병사들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반면 세르비아는 상황이 달랐다. 세르비아 군주 밀란 1세는 군대에 보낸 선언문에서 세르비아 병사들에게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불가리아를 돕기 위해 파병된다고 속였다. 따라서 세르비아 병사들은 불가리아와 싸우게 된 사실에 처음에는 놀랐다. 아마도 군주 밀란 1세가 군대를 동원하고 지휘하면서 반항과 불안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군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불가리아는 세르비아보다 열세인 소화기를 보유했지만, 크루프사가 설계한 최신 강철제 후장식 대포를 포함하여 세르비아보다 훨씬 우수한 포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불가리아 전략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첫 번째 견해는 알렉산더르 1세 친왕이 지지했으며, 이흐티만 고지에서의 총력전을 예상했다. 이 계획의 단점은 수도 소피아를 전투 없이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세르비아가 전쟁을 중단하고 열강의 중재를 요청하게 만들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러한 이유로 불가리아 지휘부는 최종적으로 슬리브니차 지역에서 주요 충돌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는 전략 계획을 선택했다. 올림피 파노프 대위는 이 최종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

5. 군사 작전



전쟁은 세르비아군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었으나, 슬리브니차 전투를 기점으로 불가리아군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1]

5. 1. 슬리브니차 전투 (11월 16-19일)

알렉산더 1세 공은 11월 16일 저녁에 도착하여, 구체프(Guchev) 소령이 지휘하는 9개 대대와 약 2000명의 자원봉사자, 32문의 대포로 구성된, 잘 준비된 방어진지를 발견했다. 이 진지는 슬리브니차 시 앞 능선의 주요 도로 양쪽에 거의 4km에 달하는 참호와 포대를 포함하고 있었다. 오른쪽은 가파른 산악 지형이었고, 왼쪽은 비스케르 구릉을 향해 브레즈닉으로 이어지는 더 쉬운 지형이었다.[1]

11월 16일, 세르비아 중앙 3개 사단도 드라고만 고개에서 벌어진 치열한 불가리아군의 지연 작전 후 회복을 위해 멈춰섰다. 모라바 사단은 남쪽에 있는 목표 지점인 브레즈닉에서 다소 떨어져 있었고, 북쪽의 진격은 다뉴브 강을 따라 막혔다.[1]

11월 17일 아침은 비와 안개가 끼었지만, 예상했던 세르비아군의 공격은 없었다. 오전 10시에 알렉산더는 3개 대대에게 우익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들은 다뉴브 사단을 기습했고, 다뉴브 사단은 결국 재집결하여 그들을 밀어냈다. 주요 세르비아군의 공격은 사거리가 부족한 포병의 지원 없이 중앙에서 시작되었다. 불가리아군의 집중적인 사격으로 인해 약 1200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벤데레프(Benderev) 대위가 이끄는 지원 부대가 우익의 고지를 탈환하고 다뉴브 사단을 도로로 밀어냈다.[1]

11월 18일 새벽, 세르비아군은 불가리아군 방어선의 약한 좌익을 공격했다. 마침 프레슬라프 연대의 2개 대대가 도착하여 방어선을 강화했다. 중앙에서의 추가 공격은 세르비아군의 큰 사상자를 내며 격퇴되었고, 벤데레프는 산악지대에서 2개의 추가 지점을 점령했다.[1]

11월 19일, 세르비아군은 모라바 사단과 합류하려는 시도로 카르눌(현재 데리안) 근처 불가리아군 좌익에 대한 공격을 위해 2개 사단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소피아 출신의 포포프(Popov) 대위가 이끄는 3개 대대의 불가리아군이 비스케르 구릉에서 모라바 사단을 저지하여 이러한 우회 공격은 실패했다. 알렉산더는 이제 반격을 명령했고, 이로 인해 세르비아군은 양쪽 측면에서 밀려났지만, 야간이 되자 완전한 붕괴는 막았다.[1]

5. 2. 불가리아군의 반격과 피로트 점령 (11월 19-28일)

피로트 시가전


슬리브니차 전투는 이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였다. 세르비아군은 후퇴하면서 제한적인 후위전만 수행했고, 11월 24일에는 세르비아로 돌아왔다. 북쪽의 티목 사단은 11월 29일까지 비딘 포위 공격을 계속했다.[1]

주력 불가리아군은 구체프와 니콜라예프가 이끄는 두 개의 강력한 사단과 지원 부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피로트로 집결했다. 세르비아군은 도시 서쪽 고지대에 진지를 구축했다. 11월 27일, 알렉산더 공이 직접 최종 공격을 이끌면서 불가리아군이 세르비아군 우익을 측면에서 공격했다. 세르비아군은 피로트를 버리고 니슈로 후퇴했으며 예비군의 총동원령을 내렸지만, 휴전 전에는 전선에 도착하지 못했다.[2]

6. 전쟁의 종결과 평화 조약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개입으로 부쿠레슈티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3] 이 전쟁은 불가리아의 국제적 지위를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불가리아는 승리를 통해 불가리아 통일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세르비아는 이전까지 무적이라고 여겨졌던 군대가 패배하면서 큰 상처를 입었다. 이후 세르비아는 군대 개혁을 단행했지만, 이는 훗날 오브레노비치 왕조의 몰락에 부분적으로 기여했다.[3][5]

세르비아의 패배 원인으로는 밀란 1세 국왕의 잘못된 판단과 리더십이 주로 꼽힌다.[6][7] 밀란 1세는 전쟁을 "소피아까지 산책하는 것"과 같다고 가볍게 여겼으며,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병력 동원에 소극적이었다. 또한 그는 베를린 회의 조건에 대한 독단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전쟁을 결정했다. 스토얀 노바코비치를 비롯한 세르비아 정치 지도자들은 국왕의 전쟁 결정에 반대하며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

세르비아 국민들 역시 전쟁에 대한 열의가 없었고, 전쟁의 명분을 이해하지 못했다.[8] 많은 세르비아 장교와 공무원들은 불가리아인을 "이웃"이자 "정교회 형제"로 여기며 전쟁에 반대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군사 기구 일각에서는 불가리아인들이 세르비아 민간인에게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전쟁을 지지하기도 했다.[8]

6. 1.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개입과 휴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개입하면서 세르비아는 패배하게 되었다. 11월 28일, 벨그라드 주재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 케벤휠러-메치 백작 루돌프는 불가리아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군사 행동 중단을 요구했다. 그는 불가리아가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위협했다.[3] 그 결과, 같은 날인 11월 28일에 휴전이 체결되었다.[3]

그러나 세르비아는 동맹국의 요구로 군사 활동이 중단된 후에도 비딘 점령을 시도했고, 이를 향후 협상에 이용하고자 했다. 이후 1886년 3월 3일, 부쿠레슈티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조약에 따라 불가리아-세르비아 국경은 변경되지 않았다.[3]

6. 2. 부쿠레슈티 조약 (1886년 3월 3일)

1886년 3월 3일, 부쿠레슈티에서 세르비아 왕국불가리아 공국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3] 조약에 따라 불가리아-세르비아 국경은 전쟁 이전 상태로 유지되었다.[3] 이 조약으로 불가리아 통일은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7. 전쟁의 결과와 영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개입으로 11월 28일 휴전이 체결되었지만, 세르비아는 비딘 점령을 위한 시도를 계속하며 협상에 이용하려 했다.[3] 1886년 3월 3일, 부쿠레슈티 조약을 통해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불가리아-세르비아 국경은 변경되지 않았다.[5]

이 전쟁은 불가리아 통일을 유지하고 불가리아의 국제적 지위를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면, 세르비아는 패배로 인해 군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크게 손상되었다. 이후 군대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오브레노비치 왕조의 몰락에 부분적으로 기여했다.[3][5]

세르비아 군사 기구 일각에서는 구 세르비아 지역에서 세르비아 민간인에 대한 불가리아인들의 잔혹 행위(살인, 절도, 강간 포함)를 이유로 전쟁을 지지했다.[7] 전쟁 후 밀란은 북마케도니아로 관심을 돌렸고,[6] 세르비아 군대와 정치 엘리트는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군대와 전술을 현대화했다.[7]

7. 1. 불가리아의 입장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불가리아 통일을 확고하게 유지했고, 불가리아의 국제적 지위도 강화되었다.[3]

7. 2. 세르비아의 입장

세르비아는 전쟁에서 패배하여 군사적, 외교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개입으로 군사 행동이 중단되었고,[3] 1886년 부쿠레슈티 조약을 통해 평화가 체결되었지만, 국경 변경은 없었다.[5]

이 전쟁으로 세르비아 군대는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으며, 이전까지 무적으로 여겨졌던 군대에 대한 인식에 큰 상처를 남겼다.[3] 세르비아는 군대 개혁에 착수했지만, 이는 훗날 오브레노비치 왕조 몰락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5]

밀란 1세의 판단 착오와 리더십은 패배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6][7] 그는 전쟁을 "소피아까지 산책하는 것"과 같이 가볍게 여겼고,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전체 병력의 3분의 1만 동원하는 등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다. 또한, 개인적인 변덕과 베를린 회의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으로 전쟁을 결정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다.[7]

세르비아 국민들은 전쟁에 대한 열의가 없었고,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8] 이 전쟁은 밀란 1세의 "내각 전쟁"으로 여겨졌으며, 그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8]

전쟁 이후, 밀란 1세는 북마케도니아 지역으로 관심을 돌렸고,[7] 세르비아 군대와 정치 엘리트는 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군대와 전술을 현대화하는 데 힘썼다.[7]

7. 3. 밀란 1세에 대한 비판

밀란 1세의 잘못된 판단과 리더십은 이 전쟁에서 세르비아가 패배한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6][7] 밀란 1세는 이 전쟁을 "소피아까지 산책하는 것"과 같다고 쉽게 생각하여 세르비아 군대의 3분의 1만 동원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음모 가능성을 끊임없이 걱정하여 나머지 군대를 세르비아 국경 내에 유지하려 했다.[6] 또한, 밀란 1세는 자신의 개인적인 변덕과 베를린 회의 조건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저명한 세르비아 정치가 스토얀 노바코비치를 비롯한 세르비아 정치 지도자들은 국왕의 전쟁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 노바코비치는 불가리아와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하며, 발칸 국가들은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공의 통치 기간처럼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밀란 1세의 행동을 권위적이고 허세 가득하며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6]

세르비아 국민들은 대체로 전쟁에 열의가 없었고, 전쟁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8] 학자 슬로보단 요바노비치는 세르비아 국민들이 이 전쟁을 밀란 1세의 "내각 전쟁"으로 여겼다고 전했다. 정치인 밀란 피로차나츠는 밀란 1세가 애국심 때문이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진 빚을 갚기 위해 해외 자금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6] 많은 세르비아 장교와 공무원들은 전쟁에 반대하며 불가리아인들을 세르비아인들의 "이웃"이자 "정교회 형제"라고 불렀다. 학자 밀란 댜. 밀리체비치는 많은 벨그라드 시민들이 전쟁에 항의했고, 세르비아인과 불가리아인은 "거의 같은 민족"이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밀란 1세의 배우자 나탈리 역시 전쟁에 반대했다.[6]

8. 대중 문화에 미친 영향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은 조지 버나드 쇼의 1894년 희곡 ''무기와 인간''의 배경이 된다.[9][10]

참조

[1] 백과사전 Bulgaria/History
[2] 서적 Handbook for the Diplomatic History of Europe, Asia, and Africa 1870–1914 National Board for Historical Service, Government Printing Office 2013-02-02
[3] 서적 The Decline of Bismarck's European Order: Franco-Russian Relations, 1875–1890 Princeton University Press
[4] 간행물 Short history of the Serbo-Bulgarian war in 1885 Bulgarian ministry of war, Military History commission
[5] 서적 The Struggle for Mastery in Europe, 1848–1918 Clarendon Press
[6] 웹사이트 NEPROMISLJENI RAT: Srbija ga je izgubila, a kralj Milan za poraz krivio sebe https://www.istorijs[...] 2023-01-11
[7] 웹사이트 Srpsko-bugarski rat 1885. godine - uzroci istorijskog nesporazuma - Kulturni centar Novog Sada - Културни центар Новог Сада https://www.kcns.org[...] 2023-01-11
[8] 학술지 Bugarska borba za ujedinjenje 1878–1886
[9] 서적 Plays: Pleasant and Unpleasant Grant Richards 2018-09-27
[10] 웹사이트 Arms and the Man the Serbo-Bulgarian War of 1885 http://www.grades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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