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거문도 사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거문도 사건은 1885년 영국 해군이 대한제국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이다.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한 후 거문도가 전략적 요충지로 부상했고,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했다. 조선은 묄렌도르프를 통해 러시아와의 밀약을 추진하는 등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영국은 거문도를 요새화하고 임차하려 했으나, 조선과의 협상은 실패했다. 러시아의 반발과 청나라의 중재로 인해 영국은 1887년 철수했다. 이 사건으로 조선의 주권이 훼손되었으며, 영국과 러시아 간의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일본은 거문도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시각을 강화했고,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의 멸망을 축하하는 논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85년 영국 - 1885년 영국 총선
    1885년 영국 총선은 자유당이 승리했으나 과반수에는 미치지 못했고, 아일랜드 의회당의 약진과 당내 분열, 보수당의 농촌 지역 강세 등으로 인해 연립정부의 출현과 아일랜드 자치 문제가 부각되는 정치적 불안정성을 야기했다.
  • 영국-한국 관계 - 조영 통상 조약
    조영수호통상조약은 1882년 조선과 영국 간에 체결되었으며 불평등 조항과 치외법권을 포함하고, 1910년 한일 병합으로 실효되었다.
거문도 사건
위치 정보
사건 개요
명칭거문도 사건
다른 이름포트 해밀턴 사건
발생 기간1885년 ~ 1887년
발생 위치거문도
관련 국가대영제국
주요 내용영국 해군의 거문도 불법 점령 및 요새화
결과영국 해군 철수, 러시아의 남하 정책 저지 실패
배경
당시 국제 정세러시아 제국의 남하 정책, 청나라의 약화
영국 해군의 목표러시아 해군 극동 함대 견제 및 불법 점령
사건 진행
1885년 4월 15일영국 해군, 거문도 무단 점령 및 포트 해밀턴으로 개칭
점령 이유러시아의 남하 정책 견제
점령 과정청나라의 반발을 무시한 채 강행, 요새 구축 및 군사 시설 건설
러시아의 반응영국과 외교 교섭을 시도하며 무력 충돌 회피
대한제국의 반응사건 발생 인지, 영국 측에 항의
결과 및 영향
영국 해군 철수1887년, 러시아 제국과의 합의로 거문도에서 철수
철수 이유러시아의 남하 정책이 중단되지 않고, 외교적 부담 증가
영국과 러시아대립 관계가 더욱 심화되는 계기가 됨
대한제국의 영향외세의 침략에 대한 경각심 증대
러시아의 영향남하 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
사건의 의의열강의 각축전의 한 단면, 대한제국 국력의 취약성 확인
기타
로마자 표기Geomun-do Sageon, Port Hamilton Incident

2. 배경

1860년 러시아 제국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한 이후, 거문도는 러시아 동양 함대의 전략적 요충지로 부상했다. 영국은 1845년 거문도를 조사하고 '해밀턴 항'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등 일찍부터 거문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조선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묄렌도르프를 통해 러시아와 비밀 협약(조러 밀약설)을 추진했다. 한편, 영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서 식민지 경쟁('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었으며, 1885년 펜제 사건으로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러시아 함대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거하게 되었다.

3. 경과

1885년 4월 15일 (음력 3월 1일), 영국 왕립해군은 에이작스급 장갑함을 포함한 3척의 함대를 거문도(포트 해밀턴)에 파견하여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다.[19][6][9] 영국군은 거문도에 영국 국기(유니언 잭)를 게양하고 포대를 설치하는 등 요새화를 시작했다. 또한 거문도 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19]

영국 정부는 거문도 점령 사실을 일본에는 점령 2일 후인 4월 17일 (음력 3월 3일)에 즉시 통고했으나, 조선에는 5월 19일 (음력 4월 6일)에 이르러서야 주청 영국 공사관을 통해 통고했다. 조선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점령 약 3주 후인 5월 7일경에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실을 파악했다.[10]

조선 조정은 청 정여창의 군함 편으로 엄세영과 묄렌도르프를 거문도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점령군 사령관은 철군은 영국 정부의 권한이라고 주장하며 철군을 거부하였고, 결국 엄세영 일행은 일본 나가사키에 소재한 영국 영사관에 가서 영국과 외교 교섭을 벌였다.

영국은 거문도를 정식으로 임차하려 했으나, 조선과의 교섭은 난항을 겪었다. 영국은 주조선 영국 총영사 윌리엄 조지 애스턴에게 "거문도를 영국의 급탄지로서 임차 교섭을 하되 금액은 1년에 5000GBP 이내로 할 것"을 훈령하였고, 애스턴은 이에 김윤식을 필두로 한 통리아문과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6][11]

러시아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강력히 항의하며, 러시아 또한 제주도 등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겠다고 위협했다.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은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여 적극 중재에 나섰다.[6][12]

1885년 9월, 아프가니스탄 문제에서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영국은 더 이상 거문도 점령을 정당화하기 어려웠다. 영국 외무성은 이홍장, 북경 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라디젠스키와의 논의 끝에 러시아가 조선의 영토를 취하지 않을 것임을 보장받았으며, 이에 영국 왕립해군은 1887년 2월 거문도에서 철수하였다.[8][14]

4. 협상 과정

조선은 영국과의 직접 협상 대신 주변국들을 통한 거중조정(居中調整)을 모색했으나, 영국의 압력으로 실패했다. 조선 조정은 청나라의 정여창 군함 편으로 엄세영과 묄렌도르프를 거문도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점령군 사령관은 영국 정부의 권한이라며 철군을 거부하였고, 엄세영 일행은 일본 나가사키의 영국 영사관에서 영국과 외교 교섭을 벌였다.[19]

영국은 주조선 영국 총영사 윌리엄 조지 애스턴에게 거문도를 영국의 급탄지로 임차하는 교섭을 하도록 훈령하였고, 윌리엄 조지 애스턴김윤식을 필두로 한 통리아문과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러시아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강력히 항의하며, 러시아 또한 제주도 등 조선 영토를 점령하겠다고 위협했다. 청나라의 북양대신 이홍장도 청나라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섰다.

1885년 9월, 영국과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합의하면서 영국의 거문도 점령 명분은 약화되었다. 영국 외무성은 이홍장, 베이징 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라디젠스키와의 논의 끝에 러시아가 조선 영토를 취하지 않을 것임을 보장받았다.

5. 결과 및 영향

1887년 2월 27일, 영국 해군은 러시아로부터 조선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확약을 받고 거문도에서 철수했다.[8][14] 이 사건으로 조선의 주권은 크게 훼손되었고, 청나라종주권이 강화되었다.[10] 영국은 철수 후에도 군사 시설을 파괴했지만, 영국인들은 그 후에도 거문도를 자주 방문했다.

이홍장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조선 현상 유지와 조선 영토 불가침을 확약받은[8][14] 청나라는 이 사건에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효과적으로 행사했다.[10] 당시 조선의 외교 협상은 조선 정부가 아닌 청나라를 통해 이루어졌고, 국사 인사조차도 청나라 정부가 결정했다.[16]

세계적으로 볼 때, 이 사건은 아프가니스탄과 터키 등에서 벌어진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이었다.[10]

5. 1. 일본의 시각

후쿠자와 유키치김옥균 등 조선 개화파를 지원하였으나, 1884년 갑신정변 실패에 좌절감을 느꼈다.[17] 그는 1885년 3월 16일 자 신문인 『시사신보(時事新報)』에 '탈아론'으로 알려진 사설을 게재했다.[17] 거문도 사건에 대해, 러시아의 남하 정책은 조선 병합으로 이어질 것이므로, 차라리 영국이 섬을 보호하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10]

福沢諭吉일본어의 서생(書生)이었던 이노우에 카쿠고로(井上角五郎)는 조선 정부에 열국의 공사(公使)·영사(領事)의 의견을 참고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청나라 이홍장 휘하의 원세개는 이를 일축했고, 고종의 외교 고문이었던 독일인 메렌도르프도 이노우에를 비난했다.[18][10]

1885년 8월 13일, 후쿠자와는 『시사신보』에 "조선 인민을 위해 그 나라의 멸망을 축하한다"는 논설을 게재했다.[10] 그는 조선 왕실의 무법함, 귀족들의 횡포, 세법 문란 등으로 백성들은 사유재산권, 생명권, 명예를 보호받지 못한다고 비판했다.[10] 또한, 조선 정부는 외교에 무능하고, 청나라에 사대하며, 러시아와 내통하는 등 매국 행위를 한다고 주장했다.[10] 따라서 조선 백성이 러시아나 영국의 백성이 되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10]

후쿠자와는 거문도 주민들이 영국 통치하에서 임금을 받고, 안전을 보장받는 것을 조선 관료와 귀족들에게 착취당하는 것보다 낫다고 보았다.[10] 그는 조선의 멸망을 애도하면서도, 조선 국민을 위해서는 축하한다고 밝혔다.[10]

일본 정부는 이 논설에 놀라 『시사신보』를 발행 정지 처분했다.[10] 1910년 한국 병합 이후, 일본은 거문도를 포함한 조선 전체를 영유하게 되었다.

6. 같이 보기

참조

[1] 서적 The Russo-Japanese war in global perspective: World War Zero https://books.google[...] Brill Academic Pub
[2] 서적 Balance of Intrigue: International Rivalry in Korea & Manchuria, 1884–1899 University Press of Florida
[3] 서적
[4] 서적 A History of Korea: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5] 서적 The Russo-Japanese war in global perspective: World War Zero https://books.google[...] Brill Academic Pub
[6] 웹사이트 コトバンク「巨文島事件」 https://kotobank.jp/[...]
[7] 서적 Balance of Intrigue: International Rivalry in Korea & Manchuria, 1884–1899 University Press of Florida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A History of Korea: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15] 서적
[16] 서적 日本の植民地の真実 扶桑社 2003-10-31
[17] 서적
[18] 서적
[19] 웹사이트 https://terms.naver.[...]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