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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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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동은 남조 양나라의 인물로, 후경의 난 당시 후경에 의해 허수아비 황제로 옹립되었으나, 3개월 만에 후경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회음왕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원제가 후경을 죽이고 난을 평정하자 풀려났지만, 원제가 복위를 경계하여 배를 침몰시켜 익사했다. 그는 실제 권력이 없었으며, 사후에 할아버지 소통과 아버지 소환을 황제로 추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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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소동
전체 이름소(蕭) 동(棟)
시대 이름천정(天正)
시대 이름 (기간)551년
통치
재위 기간551년 10월 6일 - 552년 1월 1일
계승양나라 황제
이전 통치자간문제
다음 통치자소기 (서쪽)
다음 통치자효원제 (중앙 및 남쪽)
다음 통치자후경 (남동쪽)
개인 정보
사망일552년 5월 3일
아버지소환
어머니왕부인
배우자장부인
배우자 유형후궁
가문난링 소
중국어 정보
중국어 (간체)萧栋

2. 생애

무제의 장손이자 소통의 맏아들인 소환의 아들이다. 아버지 소환이 죽자 예장왕(豫章王) 작위를 물려받았다.[4]

548년 후경의 난이 일어나자 농부로 변장하여 숨어 지냈다. 551년, 후경간문제를 폐위시키고 소동을 허수아비 황제로 옹립했다. 이는 후경 자신이 황제 자리를 찬탈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소동은 황제로 즉위했으나 실권은 전혀 없었으며, 즉위 3개월 만에 후경에게 선양할 것을 강요받았다.

퇴위 후 회음왕(淮陰王)으로 강등되어 동생 소교(蕭橋), 소규(蕭樛)와 함께 유폐되었다. 552년, 원제(소역)가 후경의 난을 평정하면서 소동 형제는 감옥에서 풀려났다. 원제가 수도를 강릉으로 옮기면서 소동 일행도 배를 타고 강릉으로 이송되었으나, 원제는 소동이 다시 황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부하 주매신에게 명하여 그들이 탄 배를 양쯔강에 침몰시켰다. 결국 소동은 두 동생과 함께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소동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무제의 맏아들이자 첫 황태자였던 소통의 맏아들인 유장왕(豫章王) 소환(蕭歡)의 맏아들이었다. 소통이 531년 5월에 사망했을 때, 무제는 유교의 계승 원칙에 따라 소환을 황태자로 세우는 것을 고려했으나 결국 실행하지 않고 유장왕으로만 봉했다. 대신 무제는 소통의 동생인 소강을 황태자로 삼았다. 소동의 어머니는 소환의 부인인 왕 공주(王公主)였으며, 역사에 기록된 남동생으로는 소교(蕭橋)와 소규(蕭樛)가 있다. 541년 1월 21일 아버지 소환이 사망하자,[4] 소동은 유장왕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548년, 장군 후경이 반란을 일으켜 549년 수도 건강을 점령했다. 후경은 소동을 포함한 양나라 황족들을 사실상 가택 연금 상태에 두었다. 그해 말 무제가 사망하고 소강이 간문제로 즉위했지만, 실권은 후경에게 있었다.

551년, 후경은 간문제의 동생인 소역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건강으로 물러났다. 자신의 세력이 약화되었다고 판단한 후경은 황위를 찬탈하기로 결심하고, 그 명분을 쌓기 위해 먼저 간문제를 폐위하고 소동을 황제로 옹립했다. 당시 소동은 수도 지역의 기근 때문에 아내 장 공주와 함께 텃밭을 가꾸며 생계를 보충하고 있었다. 황실 행렬이 그를 궁궐로 데려가기 위해 저택에 도착했을 때, 소동은 크게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면서 황제의 수레에 올랐다. 후경은 그를 황제로 선포했지만, 이는 후경 자신의 찬탈을 위한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소동의 즉위는 3개월 만에 끝났다. 후경은 소동에게 선양을 강요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황위에서 물러난 소동은 회음왕(淮陰王)으로 강등되어 동생 소교, 소규와 함께 유폐되었다. 이후 소역의 군대가 후경의 난을 진압하고 건강을 수복하자 소동은 구출되어 배를 타고 강릉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이송 도중 소역의 밀명을 받은 주매신(朱買臣)에 의해 배가 침몰당하면서 동생들과 함께 익사하였다.

2. 2. 후경의 난과 즉위

아버지 소환이 죽자 예장왕 작위를 물려받았다.[4]

548년 후경이 반란을 일으키자(후경의 난), 소동은 농부로 변장하여 숨어 지냈다. 수도 건강이 함락된 후 후경은 소동을 포함한 소씨 황족들을 사실상 가택 연금 상태에 두었다. 무제가 사망하고 간문제가 후경의 통제 하에 즉위했다.

551년, 후경은 소역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건강으로 물러나 황위를 찬탈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간문제를 폐위시키고, 소동을 새로운 황제로 내세웠다. 황제의 행렬이 소동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그는 부인 장씨와 함께 당시의 기근을 대비해 텃밭을 가꾸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소동은 울면서 황제의 수레에 올랐고, 후경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소동의 즉위는 후경이 황제 자리를 빼앗기 위한 수순이었으며, 실제로 즉위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후경에게 선양하도록 강요받았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소동은 회음왕(淮陰王)으로 강등되었고, 동생 소교(蕭橋), 소규(蕭樛)와 함께 유폐되었다.

이후 소역이 후경을 제거하고 난을 평정하자 소동과 동생들은 유폐에서 풀려났다. 소역이 강릉으로 천도하면서 소동 일행도 배를 타고 강릉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역은 소동이 다시 황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부하 주매신에게 명하여 이동 중인 배에 구멍을 내 침몰시켰다. 결국 소동은 두 동생과 함께 물에 빠져 익사했다.

2. 3. 짧은 통치와 퇴위

아버지 소환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예장왕(豫章王)이 되었다.

후경의 난이 일어나자, 소동은 농부로 변장하여 농사를 지으며 숨어 지냈다. 후경은 간문제를 폐위시킨 뒤, 자신의 찬탈을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 소동을 허수아비 황제로 내세웠다. 소동은 즉위 후 할아버지 소통과 아버지 소환을 황제로 추존했으며, 어머니 왕태비를 황태후로 높이고 아내 장공주(張公主)를 황후로 책봉했다. 그러나 실제 권력은 모두 후경의 손아귀에 있었다.

황제가 된 지 불과 3개월 만에 소동은 후경에게 선양할 것을 강요받았다. 후경은 스스로 한(漢)나라 황제가 되었고, 퇴위한 소동은 회음왕(淮陰王)으로 강등되어 동생 소교(蕭橋)와 소구(蕭玖)와 함께 비밀 감옥에 갇혔다.

이후 상동왕이었던 원제(소역)가 군대를 이끌고 후경을 토벌하고 난을 평정하자, 소동과 그의 동생들은 감옥에서 풀려났다. 원제가 수도를 강릉으로 옮길 때 소동 역시 배를 타고 강릉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원제는 소동이 다시 황제가 될 것을 경계하여, 부하 주매신(周愪)에게 지시하여 소동이 탄 배에 일부러 구멍을 내 침몰시켰다. 결국 소동은 두 동생과 함께 물에 빠져 익사했다.

2. 4. 죽음

후경의 난소역(원제)에 의해 평정된 후, 소동과 그의 동생 소교, 소규는 감옥에서 풀려났다. 552년 봄, 왕승변이 수도 건강을 탈환하고 후경을 몰아내자, 소역은 왕승변에게 소동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왕승변은 후경과 싸울 수는 있지만 황제였던 인물을 죽이는 책임은 질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소역은 다른 장군인 주매신에게 소동 살해를 지시했다.

한편, 후경이 도주하자 소동과 그의 형제들은 감옥에서 탈출했지만 여전히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들은 장군 두시(杜崱)를 만나 쇠사슬을 풀 수 있었다. 이때 동생 소교와 소구는 "드디어 오늘 부자연스러운 죽음을 면하게 되었구나"라며 기뻐했지만, 소동은 "우리가 행운을 맞이할지 불운을 맞이할지 알기 어렵다. 나는 여전히 두렵다"고 말하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원제가 강릉으로 천도할 때, 소동 형제들도 배를 타고 강릉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소동이 다시 황제가 될 것을 두려워한 원제의 밀명을 받은 주매신은 소동 형제들을 자신의 배로 초대하여 술을 대접했다. 술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주매신의 부하들이 소동과 두 동생을 붙잡아 양쯔강에 던져 익사시켰다. 다른 기록에는 원제가 소동의 복위를 경계하여 일부러 그들이 탄 배에 구멍을 내 침몰시켰다고도 한다.

3. 가계

'''소동의 조상'''
번호관계이름비고
1본인소동552년 사망
2아버지소환
3어머니왕태후
4친할아버지소통501년–531년
5친할머니자오더 황후(소명태자비 채씨)
8증조부양 무제464년–549년
9증조모무태후484년–526년 (소명태자의 생모 정귀빈)
10외증조부
(친할머니의 아버지)
채준467년–523년
16고조부소순지
17고조모문헌황후 장씨471년 사망
18(증조모 9의 부)정도천
20(외증조부 10의 부)채흥종415년–472년


3. 1. 부모

아버지는 양나라의 황족인 소환(蕭歡)이며, 어머니는 왕태후(王太后)이다. 소환은 소명태자 소통(蕭統)의 아들이자 양 무제 소연(蕭衍)의 손자이다. 소동은 아버지 소환의 뒤를 이어 예장왕(豫章王)에 봉해졌다.

3. 2. 형제

소동에게는 두 명의 동생 소교와 소규가 있었다. 소동이 후경에게 제위를 선양한 후 회음왕으로 강등되자, 소교, 소규와 함께 유폐되었다. 이후 후경의 난이 소역에 의해 진압되면서 세 형제는 구출되어 배로 강릉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송 도중 소역의 밀명을 받은 주매신이 배를 침몰시켜 소동은 두 동생과 함께 익사하였다.

3. 3. 배우자


  • 장씨 王妃 張氏중국어

4. 연호

회음왕원년
서력
(西曆)
551년
간지
(干支)
신미(辛未)
연호
(年號)
천정(天正)
원년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Book of Liang
[3] 서적 Book of Liang
[4] 서적 Book of Li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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