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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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 원제 소역은 남조 양나라의 황족으로, 508년에 태어나 555년에 사망했다. 그는 양 무제의 아들이자 간문제의 동생으로, 형주 자사를 거쳐 후경의 난 이후 황위에 올랐다. 학문을 좋아하고 예술적 재능이 있었으나, 외교적 실책과 내분으로 국가를 쇠퇴하게 만들었다. 서위의 침공으로 강릉이 함락되자 14만 권의 장서를 불태우고 피살되었으며, 그의 치세는 미신에 의존하고 과단성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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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8년 출생 - 소기
소기는 양 무제의 아들로, 익주자사 재임 중 쓰촨성 지역을 발전시키고 후경의 난 이후 황제를 칭했으나, 이복형 양 원제 소역과의 갈등과 서위의 침공으로 인해 살해당했다. - 양 (남조)의 사도 - 진패선
진패선은 남조 양나라의 장군으로 후경의 난을 평정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진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이며,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국가 기틀을 다지고 북제의 침공을 막아내는 등 군사적 역량을 발휘했다. - 양 (남조)의 사도 - 소륜
소륜은 양나라 무제의 아들로, 총명하고 문장에 능했으나 기행과 불법을 저질러 파면과 복직을 반복했으며, 후경의 난을 진압하려다 실패하고 서위의 공격으로 사망하여 소릉장무왕으로 추증되었다. - 554년 사망 - 성왕 (백제)
성왕은 백제의 제26대 왕으로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는 등 백제 중흥을 위해 노력했으며 불교를 장려하고 왜에 불교를 전파했지만, 신라와의 관계 악화로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 554년 사망 - 서위 폐제
서위 폐제 원흠은 북위 효문제의 손자이자 서위 문제의 장남으로, 우문태와의 갈등으로 폐위 및 살해된 서위의 제2대 황제이다.
양 원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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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소역(蕭繹) |
자 | 세상성(世誠) |
소자 | 칠부(七符) |
묘호 | 세조(世祖) |
시호 | 효원황제(孝元皇帝) |
생애 | |
출생 | 508년 9월 16일 |
사망 | 555년 1월 27일 |
정치 | |
왕조 | 양나라 |
연호 | 승성(承聖) |
재위 기간 | 552년 12월 13일 ~ 555년 1월 27일 |
가계 | |
아버지 | 무제 |
어머니 | 문선황태후 |
배우자 | 서소패, 하왕풍 |
즉위 전 | |
작위 | 상동군왕(湘東郡王) |
즉위일 | 514년 9월 3일 |
사후 | |
계승 | 민제, 양 선제(서량) |
능묘 | 강릉 |
2. 생애
양 무제 소연(蕭衍)과 귀빈(貴嬪) 완령영(阮令嬴) 사이의 일곱째 아들로 508년 8월에 태어났다. 7살 때 상동왕(湘東郡王)에 봉해졌으며, 이후 형주자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강릉(江陵)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다. 547년에는 형주, 옹주 등 9개 주의 군사도독을 겸임하게 되었다.
549년 하남왕 후경이 난을 일으켜 수도 건강을 함락시키고 양 무제를 유폐시켜 아사하게 만들자, 소역은 형주에서 후경 토벌을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권력 강화에 방해가 되는 형제들과 갈등을 빚어, 하동왕 소예를 제거했고 이에 반발한 소예의 동생 소찰은 서위에 투항하는 등 내분이 심화되었다.
소역은 왕승변, 진패선 등의 활약으로 마침내 552년 후경을 토벌하고 난을 평정했다. 후경의 머리는 소역에게 보내져 아버지의 제물로 사용되었다. 이후 익주에서 황제를 칭했던 무릉왕 소기마저 토벌하여 제거한 뒤, 552년 11월 강릉에서 황제로 즉위하였다(원제). 그는 후경의 난으로 폐허가 된 수도 건강 대신 강릉을 새로운 수도로 삼고 도시를 정비했다.
그러나 후경의 난으로 양나라의 국력은 크게 쇠퇴하였고, 영토의 상당 부분을 북조의 서위와 북제에 빼앗긴 상태였다. 원제는 서위와의 외교 관계에서 오만한 태도를 보이다 실책을 범했고, 이는 서위의 침공을 초래했다. 554년, 서위는 소찰을 앞세워 강릉을 공격했다. 원제는 제대로 항전하지 못하고 강릉이 포위되자 절망하여, 궁궐에 소장하고 있던 고금 도서 14만 권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만 권의 책을 읽고 오늘 이렇게 일생을 마치는구나. 죽을 바에 책들이 무슨 소용인가? 문무의 도가 오늘 밤에 끝장나는구나."라는 그의 한탄과 함께 후대에 큰 비판을 받는 사건이다.
결국 554년 12월, 강릉 외성이 함락되면서 원제는 사로잡혔고, 곧 조카 소찰의 지시에 의해 살해되었다. 향년 47세였다. 그의 죽음 이후 서위는 소찰을 황제로 세워 괴뢰 정권인 후량을 세웠다.
소역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과 서화, 문장에 능통하여 <양직공도>와 같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성격적으로는 나약하고 의심이 많으며 결단력이 부족했고, 미신을 깊이 믿고 잔인한 면모도 보였다. 후경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내분과 외교적 실책, 그리고 문화재 파괴라는 큰 오점을 남기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소역(蕭繹)은 508년 8월 무제 소연(蕭衍)과 귀빈(貴嬪) 완령영(阮令嬴) 사이에서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완령영은 본래 성이 석(石)씨였으며, 남제의 왕족 소요광(蕭遙光)과 황제 소보권(蕭寶權)의 후궁이었으나 후에 무제가 완씨 성을 하사하였다. 소역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대여섯 살 때 이미 사서오경을 암송하여 무제의 칭찬을 받았다.천감 13년(514년) 7월, 7세(만 6세)의 나이로 상동군왕(湘東郡王)에 봉해졌다. 처음으로 영원장군(寧遠將軍)과 회계군태수를 맡았고, 이후 경차장군(輕車將軍)의 호를 받았다. 그 뒤 중앙 조정에 들어가 시중(侍中), 선위장군(宣威將軍), 단양윤(丹陽尹)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보통 7년(526년) 10월에는 서중랑장(西中郎將)과 형주자사로 임명되어 강릉(江陵)으로 부임했다. 이후 관직이 계속 올라 중대통 4년(532년) 9월에는 평서장군(平西將軍), 대동 원년(535년) 12월에는 안서장군(安西將軍), 대동 3년(537년) 윤달에는 진서장군(鎮西將軍)으로 승진했다.
대동 5년(539년) 7월,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안우장군(安右將軍)과 호군장군(護軍將軍)이 되었고, 석두수(石頭戍)의 군무를 겸임했다. 대동 6년(540년) 12월에는 진남장군(鎮南將軍)과 강주 자사로 임명되어 심양(尋陽)으로 부임했다. 대동 8년(542년) 2월, 안성군(安城郡)에서 유경궁(劉敬躬)이 반란을 일으키자, 소역은 부하 조자영(趙子悅)을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게 했다. 같은 해 3월 반란이 평정되자 유경궁은 수도 건강으로 압송되었다.
태청 원년(547년) 1월, 소역은 다시 진서장군, 형주 자사로 임명되어 강릉으로 돌아갔다. 이때 형주, 옹주 등 9개 주의 군사 지휘권까지 맡게 되었다.
소역은 학문에 조예가 깊어 많은 책을 읽었으나, 젊은 시절 안질을 앓아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6] 이러한 신체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학문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문학적 소양은 뛰어났지만, 군사적인 능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의 아내인 서소패(徐昭佩) 공주와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2. 후경의 난과 황제 즉위
549년, 하남왕 후경이 난을 일으켜 수도 건강을 함락시키고 무제 소연을 유폐시켰으며, 무제는 곧 유폐된 상태에서 굶어 사망했다. 이에 소역은 사도로서 황제를 대신하여 정무를 처리하는 승제(承制)를 선포하고 강릉을 자신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는 무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당분간 이를 숨겼다.소역은 후경 토벌을 명분으로 군사를 모으는 한편, 자신의 권력 장악에 잠재적 위협이 되는 다른 황족들과 대립했다. 그는 하동왕이자 상주자사였던 소예와 갈등을 겪었다. 처음에는 아들 소방등을 보내 소예를 공격했으나 소방등은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망했다. 이후 왕승변을 파견하여 550년 장사를 함락시키고 소예를 살해했다. 소예의 동생인 악양왕 소찰은 형을 구원하려 강릉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서위에 투항하여 소역의 적대 세력이 되었다. 또한 익주자사 무릉왕 소기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여 그의 아들 소원조의 동진을 막았다.
한편, 후경은 551년 간문제 소강을 협박하여 예장왕 소동에게 양위하게 하고 그를 황제로 세웠다가, 같은 해 11월 소동마저 폐위시키고 스스로 한(漢)나라 황제를 칭했다. 그러나 552년 3월, 왕승변과 진패선이 이끄는 소역의 군대가 건강을 공격하여 탈환하자 후경은 동쪽으로 도주했다. 후경은 도주 과정에서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그의 시신은 건강으로 보내져 백성들에 의해 훼손될 정도로 극심한 원한을 샀다. 이로써 3년에 걸친 후경의 난은 평정되었다. 소역은 후경의 머리를 받아 아버지 무제의 제물로 사용했다. 소역의 명령으로 소동과 그의 형제들도 제거되었다.
후경의 난이 평정된 후, 익주에서 황제를 칭했던 무릉왕 소기는 소역에게 화해를 청했으나 거절당하고 552년 7월 토벌되어 살해되었다. 경쟁자들을 제거한 소역은 552년(승성 원년) 11월, 마침내 강릉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후경의 난으로 폐허가 된 옛 수도 건강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릉을 새로운 수도로 삼아 건강을 모델로 도시를 개축했다.
2. 3. 치세와 몰락
후경의 난이 평정된 후 양나라는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영토의 상당 부분을 서위와 북제에 빼앗겼다. 파촉(익주) 지방, 형주 북부, 장강 이북 지역을 상실하여 영토가 장강 이남으로 축소되었다.552년 11월, 소역은 강릉에서 황제로 즉위(원제)하였으나, 수도를 폐허가 된 건강으로 옮기지 않고 강릉에 계속 머물렀다. 황제가 된 후에도 경쟁자 제거에 힘썼는데, 552년 황제를 참칭했던 동생 소기를 553년 토벌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기는 서위에 도움을 요청하여 익주를 공격하게 했는데, 소기는 제거되었지만 익주 지역은 서위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원제는 익주를 서위에 넘겨준 것을 후회하며 554년 봄, 서위에 국경 반환을 요구하는 한편 북제와 연계하여 서위를 압박하려 했다. 또한, 강릉에 온 서위 사신을 북제 사신보다 박대하는 외교적 실책을 범했다. 이에 서위의 실권자 우문태는 격분하여, 이미 서위에 복속해 있던 조카 소찰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우근에게 5만 군사를 주어 강릉을 공격하게 했다.
554년 11월, 서위군은 강릉을 포위했고, 소찰은 길잡이 역할을 했다. 외부의 구원군은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곧 외성이 함락되었다. 절망한 원제는 궁궐에 소장하고 있던 고금도서 14만 권을 불태운 뒤[7] 항복했다. 12월, 원제는 소찰의 지시로 살해되었으며, 당시 나이는 47세였다. 서위는 소찰을 후량의 황제(선제)로 세웠고, 이로써 강릉 일대에 서위의 괴뢰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2. 4. 평가
소역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대여섯 살 때부터 사서오경을 암송하여 아버지 무제의 칭찬을 받았다. 성장해서는 많은 책을 읽었으며, 눈병으로 한쪽 눈을 잃은 후에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책 수집을 즐겨 방대한 장서를 모았으나, 이는 훗날 그의 손으로 사라지게 된다. 서화와 문장에도 뛰어나 여러 저작을 남겼고, 조서를 내릴 때도 붓만 들면 바로 완성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전하는 <양직공도>는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나, 원본은 소실되었고 북송 시대의 모사본이 남아 있다.그러나 성격적으로는 나약하고 원대한 계획이 부족했으며, 의심이 많아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황로 사상을 숭상하여 서위 군대가 강릉을 포위했을 때도 태평스럽게 <노자>를 강의하여, 신하들이 갑옷을 입고 강의를 듣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신을 깊이 믿어 금기하는 것이 많았고, 실용적인 문제 해결(성벽 수리 등)을 미루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억지로 꾸미기를 좋아하고 시기심이 많았으며 잔인한 면모도 있었다. 강릉이 포위되었을 때, 감옥의 죄수들을 풀어 군사로 활용하자는 건의를 무시하고 오히려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기도 했다(실행되지는 않음).
후경의 난을 평정하는 데 기여했지만, 그 과정에서 형제인 소예, 소찰 등과 갈등을 빚으며 내분을 자초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서위의 개입을 불러왔다. 난 평정 이후 양나라의 국력은 크게 쇠약해졌고, 영토의 절반 이상을 서위와 북제에게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익주를 근거지로 황제를 칭했던 소기와의 화해를 거부하고 무력으로 진압하여 내부 통합의 기회를 놓쳤으며, 서위와의 외교 관계에서도 오만한 태도로 일관하다 침공의 빌미를 제공하는 등 외교적 실책도 컸다. 서위의 침공 가능성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고 적절한 대비를 하지 않아 결국 강릉 함락과 자신의 죽음을 초래했다.
특히 강릉 함락 직전, 절망감 속에서 "만 권의 책을 읽고 오늘 이렇게 일생을 마치는구나. 죽을 바에 책들이 무슨 소용인가? 문무의 도가 오늘 밤에 끝장나는구나."라고 외치며 궁궐에 소장하고 있던 고금의 도서 14만 권을 스스로 불태운 사건은 그의 어리석음과 문화 파괴 행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는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항우의 함양 파괴에 비견될 만한 행위로, 후대에 큰 비판을 받고 있다.
3. 가족 관계
양 원제는 남량의 황족으로, 부친은 소연이며 모친은 완령영이다. 여러 형제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으며, 특히 후경의 난 시기에 이러한 관계가 두드러졌다.
정비(正妃)로는 서소패를 맞이했으나 관계가 좋지 않았고, 그녀 사후 평생 정실 부인을 두지 않았다. 서소패 외에도 여러 후궁을 두었으며, 이들 사이에서 최소 6명의 아들과 4명 이상의 딸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배우자로는 왕비 서소패, 경제 소방지의 생모인 귀비 하씨(夏氏), 소방제와 소방략의 생모인 귀빈 왕씨(王氏), 민회태자 소방거의 생모인 귀인 원씨(袁氏) 등이 있다. 자녀로는 장남 소방등, 차남 소방제, 4남 소방거(민회태자), 9남 소방지(경제), 10남 소방략 등이 있다.
자세한 부모, 형제, 배우자, 자녀 관계는 아래 관련 문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1. 부모
부친은 남량의 초대 황제인 소연(蕭衍)이다.모친은 양 무제의 후궁이었던 완령영(阮令嬴)이다. 완령영의 원래 성씨는 석(石)씨였으나, 양 무제에 의해 완(阮)씨로 바뀌었다. 그녀는 남제의 왕자였던 소요광(蕭遙光)과 황제 소보권의 후궁이기도 했다. 사후 문선황태후(文宣皇太后)로 추존되었다.
3. 2. 형제
소역에게는 여러 형제가 있었으며, 이들과의 관계는 후경의 난이라는 혼란 속에서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소강''': 소역의 형으로, 양 무제 사후 후경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으나 실권은 없었다. 소역은 강릉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며 간문제의 즉위와 연호인 '대보'(大寶)를 인정하지 않고, 무제의 연호 '태청'(太淸)을 계속 사용하였다. 이는 후경이 실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간문제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인 것이었다.
- '''소통''': 소역의 형으로, 일찍 사망하여 소명태자로 추존되었다. 그의 아들, 즉 소역의 조카인 소찰(악양왕)은 옹주 총독으로 있으면서 소역과 대립하였다. 소찰은 소역의 공격을 받자 서위에 투항했고, 이로 인해 한수 이북의 양나라 영토가 서위에 넘어가게 되었다.
- '''소관''': 소역의 형으로, 소릉왕에 봉해졌다. 후경의 난 당시 강하에 주둔하고 있었다. 소역이 조카인 하동왕 소유를 공격할 때, 소관은 소유를 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소관이 후경을 공격하려 하자, 소역은 형의 성공을 경계하여 왕승변 등을 보내 압박했다. 이에 소관은 북쪽으로 피신하여 여남으로 이동했고, 소역은 그의 세력권이었던 영주(郢州)를 장악했다.
- '''소기''': 소역의 동생으로, 무릉왕에 봉해졌으며 익주를 중심으로 쓰촨과 충칭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후경의 난 당시, 소기는 자신의 아들 소원조(蕭圓照)를 보내 소역을 돕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소역은 소원조를 신주(信州) 총독으로 임명하면서도 백제성에 머물게 하여 더 이상 동쪽으로 진군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동생의 세력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소역이 황제로 즉위한 후에도 소기는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며 잠재적인 경쟁자이자 대립 상대로 남았다.
3. 3. 배우자
봉호 | 별칭 | 이름(성씨) | 생몰년도 | 비고 |
---|---|---|---|---|
상동왕비(湘東王妃) | 서소패(徐昭佩) | ? ~ 549년 | 소방등, 익창공주 소함정의 생모.[9] 소역과의 관계가 매우 나빴으며, 소역이 찾아올 때마다 얼굴 반쪽만 화장하여 조롱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여러 남자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549년 아들 소방등이 전투에서 사망하자 소역에게 자살을 강요당했다. | |
귀비(貴妃) | 황태후(皇太后) | 하왕풍(夏王豊) | 소방지의 생모. 소방지가 즉위하자 황태후가 되었다.[10] | |
귀빈(貴嬪) | 왕씨(王氏) | 정혜세자 소방제, 시안왕 소방략의 생모. | ||
귀인(貴人) | 원씨(袁氏) | 민회태자 소방거의 생모. | ||
양인(良人) | 왕씨(王氏) | [11] | ||
홍야주(弘夜姝) | ||||
이도아(李桃兒) |
- '''생모 불명의 자녀'''
- * 황녀: 소함개
- * 황녀: 소함지
- * 황녀: 안창공주 - 서소패의 종자였던 서철에게 시집갔으며, 아들 서문원을 낳았다.
3. 4. 자녀
정비(正妃)인 서소패(徐昭佩)와의 사이는 매우 나빴으며, 서소패는 549년 소역의 강요로 자살하였다. 이후 소역은 평생 정실 부인을 두지 않았다. 여러 부인에게서 최소 6명의 아들과 4명 이상의 딸을 두었다.순서 | 봉호 | 시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비고 |
---|---|---|---|---|---|---|
장남 | 상동왕세자(湘東王世子) | 무열(武烈) | 소방등( 蕭方等|소방등중국어 ) | 528년 ~ 549년 | 왕비 서소패[12] | 하동왕 소예와의 전투 중 사망.[13] 다른 이름은 실상(實相). |
차남 | 상동왕세자(湘東王世子) | 정혜(貞惠) | 소방제( 蕭方諸|소방제중국어 ) | 537년 ~ 552년 | 귀빈 왕씨 | 후경의 난 중 살해됨.[14] 다른 이름은 지상(智將). |
3남 | 황태자(皇太子) | 민회(愍懷) | 소방구( 蕭方矩|소방구중국어 ) | ? ~ 554년 | 귀인 원씨[15] | 서위군에 의해 살해됨.[16] 다른 이름은 덕규(德規). 일부 기록에는 4남으로 기록됨. |
4남 | 진안군왕(晉安郡王) | - | 소방지( 蕭方智|소방지중국어 ) | 543년 ~ 558년 | 귀비 하씨 (하왕풍)[17] | 양나라 제6대 황제 경제(敬帝). 다른 이름은 혜상(慧相). 일부 기록에는 9남으로 기록됨. |
5남 | 시안군왕(始安郡王) | - | 소방략( 蕭方略|소방략중국어 ) | ? ~ 554년 | 귀빈 왕씨 | 서위군에 의해 살해됨.[18] 일부 기록에는 10남으로 기록됨. |
6남 | - | - | 소방규( 蕭方規|소방규중국어 ) | ? ~ ? | ? |
'''황녀'''
- 익창공주(益昌公主) 含貞|소함정중국어 : 생모는 왕비 서소패.
- 소함개( 含介|소함개중국어 ) : 생모 미상.
- 안창공주(安昌公主) : 생모 미상. 서철(徐徹)과 혼인하여 아들 서문원(徐文遠)을 둠. 서철은 서소패의 종족(同族)이다.
- 소함지( 含芷|소함지중국어 ) : 생모 미상.
'''기타 측실'''
- 홍야주(紅陽主)
- 이도아(李桃兒)
4. 학문과 예술
양 원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대여섯 살 때부터 사서오경을 암송하여 아버지 양 무제의 칭찬을 받았다. 역대 중국 황제 중에서도 학문을 매우 사랑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장성해서는 수많은 책을 읽었으며, 어린 시절 병으로 한쪽 눈을 잃었음에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았다.[8]
책 수집에도 열성적이어서 강릉의 궁궐 내 동죽각전에는 그가 모은 고금의 도서가 14만 권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문장과 서화에도 뛰어나 여러 저술을 남겼으며, 조서를 내릴 때도 붓만 들면 바로 완성할 정도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그의 편저로는 제자백가의 형식을 본뜬 『금루자』가 있다.
그는 형주 자사로 재임하던 시절 양나라에 조공하러 온 여러 나라 사절들의 모습을 그린 『양직공도』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당시 형주와 수도 건강에서 외국 사절의 모습을 직접 조사하고, 배자야가 편찬한 『방국사도』 등을 참고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8] 양 원제가 직접 그린 원본과 당나라 화가 염립본의 모사본은 전해지지 않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북송 시대의 모사본이다.
노장사상에도 깊이 심취하여, 서위 군대가 강릉을 포위한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태평스럽게 『노자』(도덕경)를 강의했고, 신하들은 갑옷을 입은 채로 강의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554년 11월, 서위군에 의해 강릉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큰 절망감에 빠졌다. "만 권의 책을 읽었으나 오늘 이런 날을 맞이하는구나. 죽을 바에야 책들이 무슨 소용인가? 문무의 도가 오늘 밤에 끝장나는구나!"(원문: 讀書萬巻,猶有今日。)라고 외치며, 자신이 평생 수집한 14만 권의 장서를 동죽각전에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는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항우의 함양 파괴에 비견될 만한 문화적 손실로 평가받는다. 결국 그는 내성으로 퇴각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2]
서적
Book of Liang
https://zh.wikisourc[...]
[3]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sinocal.sinic[...]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6]
서적
Book of Liang
[7]
서적
Zizhi Tongjian
[8]
논문
梁職貢図について
東方學會
1963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충장세자(忠壯世子)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남안현개국후(南安縣開國侯)/상동왕세자(湘東王世子)
[16]
문서
[17]
문서
흥량현개국후(興梁縣開國侯)
[1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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