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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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약은 남북조 시대의 학자이자 정치가, 문인으로, 송, 제, 양나라 3대에 걸쳐 벼슬을 지냈다. 그는 양 무제를 도와 양나라 건국에 기여하여 건창현후에 봉해졌으며, 이부상서, 상서령 등을 역임했다. 문학적으로는 영명체 시풍을 창시하고 사성팔병설을 주창하여 당나라 시가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역사서 《송서》 편찬에 참여했으며, 경릉팔우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등 당시 문단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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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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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심약(沈約) |
자 | 휴문(休文) |
작위 | 건창현후(建昌縣侯) |
시호 | 은(隱) |
출생 | 441년 |
사망 | 513년 |
국적 | 남조 송, 제, 양 |
직업 | 문인, 정치가, 역사가 |
활동 시기 | 남조 |
저서 | |
주요 저서 | 『송서』 『제기』 『진서』 『사성보』 |
가문 | |
출신 가문 | 오흥 심씨(吳興沈氏) |
아버지 | 심림자(沈林子) |
생애 | |
주요 경력 | 비서승 상서 태자첨사 건창현후 표기장군 상서령 중서감 |
2. 가문 내력
조부 심림(沈林)은 송나라의 정로장군(征虜將軍)이었고, 부친 심박(沈璞)은 송나라 회남태수(淮南太守)였다.
심약은 심약의 아들로 태어났다. 심씨는 본래 군사로 두각을 나타낸 강남의 호족이었으나, 심약 자신은 어린 시절 아버지(沈璞)를 효무제에게 잃었기에 학문에 정진하여 학식을 쌓았다. 남조 송, 제, 양의 3대에 걸쳐 섬겼으며, 남조 제의 경릉왕 소자량의 초청을 받아 그의 문학 살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경릉팔우" 중 한 명으로 꼽혔다. 이후 소연(후의 남조 양의 무제)의 거병에 협력하여 남조 양 건국에 공을 세워 상서령에 임명되었으며, 건창현후에 봉해졌다. 만년에는 무제의 미움을 받아 근심 속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처음에는 "문"으로 정해졌으나 무제의 명에 의해 "은"으로 바뀌었다.[1]
3. 생애
3. 1. 초기 생애와 학문
심약은 심약의 아들로 태어났다. 심씨는 본래 군사로 두각을 나타낸 강남의 호족이었으나, 심약 자신은 어린 시절 아버지(沈璞)를 효무제에게 잃었기에 학문에 정진하여 학식을 쌓았다.[1]
3. 2. 남조에서의 관직 생활
송나라 때 안서외병참군과 상서도지낭을 지냈고, 제나라 때 국자감 좨주와 사도좌장사, 동양태수(東陽太守)를 지냈다. 양나라 때 양 무제 소연을 도와 양나라를 건국한 공로로 건창현후(建昌縣侯)에 봉해지고, 이부상서(吏部尙書), 상서복야(尙書僕射), 상서령(尙書令), 좌광록대부(左光綠大夫), 시중(侍中)을 역임하였다.[1]
3. 3. 소보융의 죽음과 심약
소연이 502년 4월 30일 양 무제로 즉위한 후, 처음에는 소보융(폐위된 제나라의 황제)을 발령왕으로 봉하고 남해군을 봉토로 하사하며 잘 대우하려 했다. 그러나 심약은 "조조가 일찍이 '뜬구름 같은 명성을 얻기 위해 진짜 재앙을 참지 마라'라고 말했다."[10]라고 간언했다. 이를 들은 무제는 소보융에게 죽음을 명했다. 소보융이 죽기 직전, 심약은 심각한 병에 걸려 소보융이 칼로 자신의 혀를 자르는 꿈을 꾸었다. 심약은 이 꿈에 대해 중국 무속의 무당에게 묻자, 무당은 그의 꿈이 사실이라고 확인했다. 심약은 이후 승려들을 불러 소보융의 영혼에게 자신이 소연을 설득하여 왕위를 포기하도록 한 것이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리고 달래는 의식을 행했다.[11]
3. 4. 만년과 죽음
심약은 남조 송, 제, 양 3대에 걸쳐 벼슬을 한 인물로, 심씨 가문은 본래 군사로 두각을 나타낸 강남의 호족이었다. 하지만 심약은 어린 시절 아버지(沈璞)를 효무제에게 잃고 학문에 정진하여 학식을 쌓았다. 남조 제의 경릉왕 소자량의 초청을 받아 그의 문학 살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경릉팔우" 중 한 명으로 꼽혔다. 이후 소연(후의 남조 양의 무제)이 거병할 때 협력하여 남조 양 건국에 공을 세워 상서령에 임명되었고 건창현후에 봉해졌다.
만년에는 무제의 미움을 받아 근심 속에 사망했다. 시호는 처음에는 "문"으로 정해졌으나 무제의 명에 의해 "은"으로 바뀌었다.[1]
4. 문학적 업적
심약은 제나라 때 양 무제(梁 武帝) 소연(蕭衍)과 함께 경릉팔우(竟陵八友)의 한 사람으로, 정형시와 관련된 음조 개발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최초로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6][7] 그는 사성팔병설을 주창하여 영명체와 근체시의 근거를 성립하였고, 악부라는 용어를 한나라 민요 형식의 시에 처음 적용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임방(任昉)의 문장과 함께 심약의 시는 당대에 제일로 꼽혔으며, 궁체시의 선구가 되었다. 역사서로는 『송서』, 『진서』, 『제기』 등을 편찬했고, 유협이 『문심조룡』을 세상에 내놓으려 할 때 심약에게 보여 평가를 구하기도 했다. 그의 문집은 100권이었으나 흩어져 없어졌고, 현재 전해지는 문집은 명대 이후에 재편집된 것이다.
4. 1. 영명체(永明體)와 사성팔병설(四聲八病說)
심약은 제나라 때 양 무제(梁 武帝) 소연(蕭衍)과 함께 경릉팔우(竟陵八友)의 한 사람이었으며, 사성팔병설을 주창하여 영명체(永明體)와 근체시(近體詩)의 근거를 성립하였다.[6][7]같은 '팔우'의 동료인 사조, 왕융 등과 함께 시의 음률・형식미를 자각적으로 추구하여, '영명체'라고 불리는 시풍을 만들어냈다. 그 이론으로 사성(평성・상성・거성・입성)・팔병의 설을 주장했다.
4. 2. 궁체시(宮體詩)
양나라 무제(梁 武帝) 소연(蕭衍)과 함께 경릉팔우(竟陵八友)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임방(任昉)의 문장과 심약(沈約)의 시를 제일로 꼽았으며, 심약은 궁체시(宮體詩)의 선구가 되었다.[4]4. 3. 기타
심약은 시를 매우 좋아했으며, 버튼 왓슨이 《기억에 관한 여섯 편의 시》라고 부르는 연작시를 썼다. 이 시는 하루 중 여섯 번의 시간에 그의 연인을 묘사한 것으로, 고전 중국 시에서는 이례적으로 상당히 노골적인 묘사에 가깝다.[4] 다음은 그 중 그녀가 잠들었을 때를 기억하는 시의 일부 구절이다.::::::...
::::::애원하기도 전에 얇은 옷을 풀고,
::::::애무가 찾아올 때까지 베개에 기대 있네.
::::::그녀 곁의 사람이 지켜볼까 두려워,
::::::촛불 아래서 얼굴을 붉히네.[5]
심약은 이후 많은 고시의 근간이 되는 사상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한나라 민요 형식의 시에 일반적인 의미로 '악부'라는 용어를 처음 적용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한나라 황실 악부를 지칭하는 이전의 의미와는 대조적이다.
심약은 역사서 『송서』, 『진서』, 『제기』를 편찬했다. 한시 분야에서는 '영명체'라고 불리는 시풍을 만들어냈으며, 사성(평성・상성・거성・입성)・팔병의 설을 주장했다. 남조의 동시대 문단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무명이었던 유협이 『문심조룡』을 세상에 내놓으려 했을 때 심약에게 보여 평가를 구했다. 『양서』 본전(本傳)에 따르면 그의 문집은 100권이었으나 흩어져 없어졌고, 현재 전해지는 문집은 명대 이후에 재편집된 것이다.
5. 역사적 업적
심약은 유송 왕조의 역사를 담은 《송서》 저술과 편찬에 크게 기여했다. 《송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그가 저술한 《악지》(19권~22권)이다. 그러나 역사학자 배자야는 이 작업을 더욱 간결하게 정리하여 《송략》(《宋略》)을 만들었다. 심약은 《송략》을 읽은 후 "이것은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이다."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었다.[9]
6. 저서
심약은 유송 왕조의 역사를 담은 《송서》 저술과 편찬에 크게 기여했다. 《송서》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그의 《악지》(19권~22권)이다.[9] 역사서로는 『송서』, 『진서』, 『제기』를 편찬했다. 한시 분야에서는 '팔우'의 동료인 사조, 왕융 등과 함께 시의 음률・형식미를 자각적으로 추구하여, '영명체'라는 시풍을 만들어냈다. 그 이론으로 사성(평성・상성・거성・입성)・팔병의 설을 주장했다. 남조의 동시대 문단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무명이었던 유협이 『문심조룡』을 세상에 내놓으려 했을 때, 심약에게 보여 평가를 구했다고 한다. 『양서』 본전(本傳)에 따르면 그의 문집은 100권이었으나 흩어져 없어졌고, 현재 전해지는 문집은 명대 이후에 재편집된 것이다.
7. 평가
명문 세족 출신이었지만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학문에 정진했다. 정치가로서뿐만 아니라 문인으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남제 때 양 무제 소연과 함께 경릉팔우(竟陵八友)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임방의 문장과 심약의 시는 최고로 손꼽혔으며, 심약은 궁체시(宮體詩)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1] 또한 불교에 능통하여 사성팔병설을 주장하고, 영명체(永明體)와 근체시(近體詩)의 근거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1]
8. 참고 문헌
- 梁書|양서중국어 권13, 중화서국
- 南史|남사중국어 권57, 중화서국
참조
[1]
서적
Book of Liang, vol. 13
Book of Liang
[2]
서적
Book of Liang, vol. 02
Book of Liang
[3]
논문
Religious anxiety and political interest in Western Han omen interpretation
[4]
서적
(Unknown Title)
[5]
서적
(Unknown Title)
[6]
서적
(Unknown Title)
[7]
서적
(Unknown Title)
[8]
서적
(Unknown Title)
[9]
서적
Book of Liang, vol. 30
Book of Liang
[10]
서적
Zizhi Tongjian, vol. 145
Zizhi Tongjian
[11]
서적
Book of Liang, vol. 13
Book of Li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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