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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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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기는 508년에 양 무제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무릉왕, 영원장군, 팽성 태수, 양주자사 등을 역임했다. 후경의 난 당시 촉(蜀)에 있으면서 난을 평정하려 하지 않았고, 무제가 죽은 후 황제를 자칭했으나, 이복형인 양 원제와의 대립과 서위의 침공으로 위기에 직면했다. 결국 서위의 침공과 원제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되어 번맹에게 피살되었으며, 소역은 소기와 그 가족의 성씨를 도철씨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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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작위양나라의 비정통 황제
소기(蕭紀)
시호무릉정헌왕(武陵貞獻王)
통치
재위 시작552년 5월 16일
재위 종료553년 8월 20일
즉위식천정(天正) 원년 4월 8일 (552년 5월 16일)
연호천정(天正) 552년 ~ 553년
이전 통치자회음왕(淮陰王)
다음 통치자효원제(孝元帝)
재위2 시작514년 9월 3일
재위2 종료552년 5월 16일
즉위식2천감(天監) 13년 7월 29일 (514년 9월 3일)
작위2무릉군왕(晉安郡王)
출생과 사망
출생일천감(天監) 7년 (508년)
사망일천정(天正) 2년 7월 26일 (553년 8월 20일)
가족 관계
아버지무황제(武皇帝) 소연(蕭衍)
어머니수용(修容) 갈씨(葛氏)

2. 생애

소기는 508년무제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6] 어릴 때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경박한 것을 싫어했다.[6] 배움에 많이 근면하지 않았고, 호화로움을 가벼이 여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514년, 무제는 소기를 무릉왕(武陵王)으로 봉했고, 영원장군(寧遠將軍)과 팽성(彭城)의 태수, 양주자사(楊州刺史) 등을 겸직하게 하였다.[6] 이후 익주자사(益州刺史)를 맡았다.

후경의 난이 일어났을 때, 소기는 촉(蜀)에 있으면서 난을 평정하려고 하지 않았다.[5] 아버지인 무제가 죽은 뒤, 551년에 그제야 후경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갔다. 552년에 소기는 맏아들인 무릉세자 소원조의 제의를 받아들여 성도에서 황제로 즉위하였고, 연호를 천정(天正)으로 개원하였다. 하지만, 동쪽에서는 이복형인 원제가 후경을 죽이고 난을 평정한 뒤 즉위했다.[5] 소기는 항상 소역을 '칠관(七官)'으로 불렀다.[5]

소기의 군대는 서릉협(西陵峽)에 이르러 원제가 있는 강릉의 여러 군대와 대치했다. 원제는 서위에 원조를 요청했고, 서위가 군대를 보내 촉을 공격함과 동시에 원제의 군대도 서릉협으로 진공했다.[5] 결국 소기는 황제가 되자마자 서위의 침공과 원제의 토벌로 곧 위태로운 지경에 직면하게 되었다.[5]

553년에 서위가 성도를 포위하자 소기의 군대는 사기가 떨어졌고, 강릉에 닿기도 전에 후방이 무너졌으므로 전투에서 계속 패하였다. 마침내 원제의 부장인 번맹(樊猛)에게 서릉협에서 포위되어 곤란함에 처했다. 소기는 황금을 떡같이 주조한 뒤에 엽전 꾸러미처럼 꿰어 자신의 부하 장수들과 군사들에게 보이면서 격려하여 적들을 막도록 하였는데, 항상 싸움이 끝나고 난 뒤에는 그것을 주지 않아 휘하 제장들의 반감을 샀다.[5] 결국 서릉협의 협구(峽口)에서 번맹에게 피살되니 향년 46세였다.[5] 소역은 소기와 그의 가족의 속적을 끊었고 성씨를 도철씨(饕餮氏)로 바꿔 버렸다.[6]

2. 1. 초기 생애

소기(蕭紀)는 508년무제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6] 어릴 때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경박한 것을 싫어했다.[6] 배움에 많이 근면하지 않았고, 호화로움을 가벼이 여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514년, 무제는 소기를 무릉왕(武陵王)으로 봉했고, 영원장군(寧遠將軍)과 팽성(彭城)의 태수, 양주자사(楊州刺史) 등을 겸직하게 하였다.[6] 이후 익주자사(益州刺史)를 맡았다. 소기는 경제를 크게 발전시켰고, 량(梁)나라의 영토를 비한족 지역 깊숙이 확장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익주는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군사적으로 강해졌다.

후경의 난이 일어났을 때, 소기는 촉(蜀)에 있으면서 난을 평정하려고 하지 않았다.[5] 아버지인 무제가 죽은 뒤, 551년에 그제야 후경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갔다. 552년에 소기는 맏아들인 무릉세자 소원조의 제의를 받아들여 성도에서 황제로 즉위하였고, 연호를 천정(天正)으로 개원하였다. 하지만, 동쪽에서는 이복형인 원제가 후경을 죽이고 난을 평정한 뒤 즉위했다.[5] 소기는 항상 소역을 '칠관(七官)'으로 불렀다.[5]

소기의 군대는 서릉협(西陵峽)에 이르러 원제가 있는 강릉의 여러 군대와 대치했다. 원제는 서위에 원조를 요청했고, 서위가 군대를 보내 촉을 공격함과 동시에 원제의 군대도 서릉협으로 진공했다.[5] 결국 소기는 황제가 되자마자 서위의 침공과 원제의 토벌로 곧 위태로운 지경에 직면하게 되었다.[5]

553년에 서위가 성도를 포위하자 소기의 군대는 사기가 떨어졌고, 강릉에 닿기도 전에 후방이 무너졌으므로 전투에서 계속 패하였다. 마침내 원제의 부장인 번맹(樊猛)에게 서릉협에서 포위되어 곤란함에 처했다. 소기는 황금을 떡같이 주조한 뒤에 엽전 꾸러미처럼 꿰어 자신의 부하 장수들과 군사들에게 보이면서 격려하여 적들을 막도록 하였는데, 항상 싸움이 끝나고 난 뒤에는 그것을 주지 않아 휘하 제장들의 반감을 샀다.[5] 결국 서릉협의 협구(峽口)에서 번맹에게 피살되니 향년 46세였다.[5] 소역은 소기와 그의 가족의 속적을 끊었고 성씨를 도철씨(饕餮氏)로 바꿔 버렸다.[6]

2. 2. 후경의 난과 황제 즉위

514년, 무제가 소기를 무릉군왕(武陵郡王)으로 봉했고, 영원장군(寧遠將軍)과 팽성(彭城)의 태수, 양주자사(楊州刺史) 등을 겸직하게 하였다.[5] 소기는 뒤에 나와서 익주자사(益州刺史)를 맡았다.[5]

후경의 난이 일어났을 때, 소기는 촉(蜀)에 있으면서 난을 평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다.[5] 548년, 반란군 장군 후경은 수도 건강을 포위했고, 많은 지방 총독들이 포위를 풀기 위해 건강으로 군대를 보냈으나 소기는 처음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건강이 함락되고 무제가 549년에 사망한 후, 소기는 마침내 550년 봄에 행동을 취하여 그의 태자 소원조(蕭圓照)가 지휘하는 3만 명의 군대를 파견했으며, 이 군대가 그의 형제인 양양왕 소역의 명령을 따르기를 원한다고 주장했다.

아버지인 무제가 죽은 뒤, 551년에 그제야 후경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형섬(荊陝)을 포위하려고 했다.[5] 552년에 소기는 맏아들인 무릉세자 소원조의 제의를 받아들여 성도를 수도로 즉위하였고, 연호를 천정(天正)으로 개원하였다.[5] 부하 유효승(劉孝勝)의 자신이 황위에 오르라는 요청을 거부하면서도 황제에게만 적합한 수레와 의복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즉위 후, 소기는 후경을 토벌하기 위해 천정 원년(552년) 8월에 동정을 시작했다.

한편, 동쪽에서는 이복형인 원제가 후경을 죽이고 난을 평정한 뒤 즉위했다. 그러자 소기는 항상 소역을 '칠관(七官)[5]'으로 불렀다.[5] 4월 단계에서 후경은 소역에 의해 멸망했으나, 소기의 장남인 소원조는 계략을 써서 후경이 멸망한 사실을 소기에게 알리지 않고, 오히려 소역이 후경에게 멸망했다고 거짓 보고를 올린 것을 믿었다.

이때 소기의 군대는 이미 서릉협(西陵峽)에 이르러 원제가 있는 강릉의 여러 군대와 대치했다.[5] 그러자 원제는 서위에 원조를 요청하니 서위가 군대를 보내 촉을 공격하였고, 동시에 원제의 군대도 서릉협으로 진공했다.[5] 550년 겨울, 소기는 군대를 이끌고 성도를 떠나 양쯔강을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소역은 소기의 의도를 의심하여 그에게 편지를 보내 멈추라고 요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촉(巴蜀) [즉, 익주 및 주변 지역] 사람들은 용감하지만 사납고, 쉽게 감정적으로 변하고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형제님께서 그들을 감시하여 제가 도적 [즉, 후경]을 멸망시킬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메모를 첨부했다. "지리적으로 당신과 저는 유비손권과 같으며, 우리는 각자 자신의 영토에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의 혈통으로 볼 때, 우리는 노나라와 위나라와 같으며, 끊임없이 소통할 수 있습니다."

결국 소기는 황제가 되자마자 서위의 침공과 원제의 토벌로 곧 위태로운 지경에 직면하게 되었다.[5] 553년에 드디어 서위가 성도를 포위하자 소기의 군대는 사기도 떨어진데다 강릉에 닿기도 전에 후방이 이미 무너졌으므로 전투에서 계속 패하였다. 마침내 원제의 부장인 번맹(樊猛)에게 서릉협에서 포위되어 곤란함에 처했다.[5] 소기는 황금을 떡같이 주조한 뒤에 엽전 꾸러미처럼 꿰어 자신의 부하 장수들과 군사들에게 보이면서 격려하여 적들을 막도록 하였는데, 항상 싸움이 끝나고 난 뒤에는 그것을 주지 않아 휘하 제장들의 반감을 샀고, 이 때문에 크게 패하여 여기에 이르게 되고 말았다.[5]

소역은 소기와 그의 가족의 속적을 끊었고 성씨를 도철씨(饕餮氏)로 바꿔 버렸다.

2. 3. 양 원제와의 대립과 최후

소기는 학문에 힘쓰지 않았고, 사치를 좋아했다. 514년, 무제는 소기를 무릉군왕(武陵郡王)으로 봉하고, 영원장군(寧遠將軍), 팽성(彭城) 태수, 양주자사(楊州刺史) 등을 겸직하게 했다. 이후 익주자사(益州刺史)를 맡았다.

후경의 난 당시 소기는 촉(蜀)에 있으면서 난을 평정하려 하지 않았다. 551년, 무제가 죽은 뒤에야 후경 토벌을 명분으로 군대를 동쪽으로 이동시켜 형주(荊州)와 섬주(陝州)를 포위하려 했다. 552년, 맏아들 소원조의 제안으로 성도를 수도로 삼아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천정(天正)으로 정했다. 그러나 이복형인 원제가 이미 후경을 죽이고 난을 평정한 뒤 황제로 즉위하자, 소기는 원제를 '칠관(七官)'이라 부르며 대립했다.[5]

소기의 군대는 서릉협(西陵峽)에 이르러 원제의 강릉 군대와 대치했다. 원제는 서위에 원군을 요청했고, 서위는 군대를 보내 촉을 공격하는 동시에 원제의 군대도 서릉협으로 진격했다. 553년, 서위가 성도를 포위하자 소기의 군대는 사기가 떨어졌고, 원제의 부장 번맹(樊猛)에게 서릉협에서 포위되었다.

소기는 황금을 떡처럼 주조하여 엽전 꾸러미처럼 꿰어 부하들에게 보이며 격려했지만, 실제로는 주지 않아 반감을 샀다. 결국 크게 패한 소기는 번맹에게 황금을 주며 원제를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했으나, 번맹은 "천자를 어떻게 볼 수 있겠소! 당신을 죽이면 황금은 어디로 가겠소!"라며 거절하고 소기와 셋째 아들 소원만의 목을 베었다.

원제는 소기와 그 가족의 속적을 끊고 성씨를 도철씨(饕餮氏)로 바꾸었다. 소기의 딸 소묘유의 묘지에는 소기를 '승상 무릉정헌왕(武陵貞獻王)'이라 칭했다.[6]

2. 4. 가족 관계

소기(蕭紀)의 조부는 태조(太祖) 문황제(文皇帝) 소순지(蕭順之)이고, 조모는 문헌황후(文獻皇后) 장상유(張尙柔)이다. 부친은 고조(高祖) 무황제(武皇帝) 소연(蕭衍)이며, 모친은 양 무제의 후궁인 수용(修容) 갈씨(葛氏)이다.[7][8][9][10][11][12][13]

-봉호이름생몰년도생모별칭비고
1황태자(皇太子)소원조(蕭圓照)? ~ 553년[7][8]
2서양군왕(西陽郡王)소원정(蕭圓正)? ~ 553년[9][10]
3경릉군왕(竟陵郡王)소원만(蕭圓滿)? ~ 553년[11]
4남초군왕(南譙郡王)소원보(蕭圓普)? ~ 553년[12]
5의도군왕(宜都郡王)소원숙(蕭圓肅)539년 ~ 584년[13]



-봉호이름생몰년도생모부마별칭비고
1회남공주(淮南公主)소묘유(蕭妙瑜)530년 ~ 630년임정충장공(臨貞忠壮公)
양부
[14][15]
2공주(公主)허창현백(許昌縣伯)
정전(鄭詮)


3. 평가

참조

[1] 서적 Book of Liang
[2]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s http://db1x.sinica.e[...]
[3] 서적 Zizhi Tongjian
[4] 서적 Zizhi Tongjian
[5] 문서 일곱 번째 아들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동생인 소기가 형인 소역을 칠관으로 칭하였으므로 낮추어 부른 것이다.
[6] 서적 《新出魏晋南北朝墓志疏证》 中华书局 2004
[7] 문서 무릉왕세자(武陵王世子)
[8] 문서 성도 정벌 후 아사 시켜 죽임.
[9] 문서 강안현개국후(江安縣開國侯)
[10] 문서 성도 정벌 후 아사 시켜 죽임.
[11] 문서 무릉왕 소기와 함께 참형에 처함.
[12] 문서 성도 정벌 후 아사 시켜 죽임.
[13] 문서 소기의 후손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서위에 귀순하여, 안화현공(安化縣公)과 극성군공(棘城郡公) 등을 하사받음.
[14] 문서 천금군군(千金郡君)
[15] 문서 소원숙과 같이 서위에 귀순 후 혼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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