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노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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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노반은 동오의 초대 황제 손권의 딸로, 주유의 아들 주순과 전종에게 시집갔으며 '전공주'로 불렸다. 손화의 실각을 획책하고, 손준과 간통하며 동생 손노육을 죽이는 등 권력 다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손량 옹립 후 권력을 잡았으나, 손침 제거 시도 실패로 유배되었고, 이후 행적은 기록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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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노반 | |
---|---|
기본 정보 | |
이름 | 손노반 |
다른 이름 | 전공주 (全公主) |
자 | 대호 (大虎) |
작위 | 공주 |
생년 | 미상 |
사망년도 | 미상 |
부모 | 아버지: 손권 / 어머니: 보련사 |
배우자 | 주순, 전종 |
자녀 | 전익, 전오 |
가문 | 손씨 |
2. 생애
주유의 아들 주순에게 시집갔지만 주순이 요절하고 전종과 재혼해 '''전공주'''(全公主)라고 불리게 되었다.[36] 어머니 보련사 사후, 손화가 황태자로 세워져 손화의 어머니인 왕부인이 황후 후보가 되자 아버지 손권에게 참언하여 철회시켰다. 그것이 원인으로 손화가 자신을 원망하는 듯 하자 그의 실각을 획책하였다.
이궁의 변 당시 손노반은 손패파에 가담하였다. 적오 13년(250년), 손권이 손화를 폐하고 손패를 자살케 한 뒤 손량을 태자로 세웠다. 다시 병상에 누운 손권이 손화의 무죄를 깨닫고 소환하려 했으나 손노반이 강력히 반대하여 소환하지 않았다.[37] 손패 사후 손권의 총애를 받게 된 막내동생 손량에게 접근하여 남편의 종형인 전상의 딸을 권했다. 또한 손량이 즉위한 뒤에는 그녀를 전황후로 세웠다.[38][39]
그 이후 손노반은 실권을 쥐게 된 손준과 간통하였으며,[40] 손화를 자살로 몰아넣었다. 오봉 원년(254년), 손영과 손의 등이 손준 암살 계획을 세웠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듬해인 오봉 2년(255년), 손노반은 손노육이 손화의 폐위에 반대했던 것을 기억하고 손준에게 “노육도 암살 계획에 가담한 것 같다”고 무고하여 친여동생인 손노육을 죽였다.[41][42] 손준이 죽은 뒤 손노육의 죽음의 진상을 안 손량에게 추궁당하자 노육과 주거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주웅, 도 쿠데타 주모자 중 한명이라고 모함하여 처형시켰다.[43]
태평 3년(258년), 손량이 손침의 전횡에 질려, 전상·손노반과 장군 유승 등과 모의하여, 손침을 주살하려 계획했으나,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손노반은 그에 연좌되어 예장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33]. 이후의 소식은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주유의 장남 주순에게 시집갔지만, 주순은 요절했다.
황룡 원년(229년), 아버지 손권이 즉위했을 때 31세의 위장군 전종에게 재가하여, '''전공주'''[27]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한, 전종의 장남인 전서와 노반은 동갑이었다.
적오 원년(238년), 어머니 보련사가 사망했고, 더 나아가 적오 4년(241년)에는 황태자 손등도 사망했기 때문에, 황후와 황태자는 공석이었다. 이듬해에 손화가 대신 황태자로 세워졌다. 손화와 그의 어머니 왕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손화의 실각을 획책하게 되었다. 황태자 손화와 노왕 손패의 두 파가 대립하자, 손패파는 남편 전종의 일족, 더 나아가 어머니 일족인 보즐 등을 아군으로 삼아, 참언으로 장휴·육손 등 손화파의 중신들을 함정에 빠뜨렸다. 어느 날, 손권이 병상에 눕게 되자, 손화가 종묘[28]에서 기도하게 되었다. 그러자 노반은, 손화가 종묘를 잠시 떠나 자신의 비의 숙부 댁에 들렀다는 정보를, 단순히 들어 알고만 있었을 뿐인데도 "태자는 종묘에서 기도하지 않고, 오로지 비의 친정과 계략을 꾸미는 듯합니다. 왕부인도 병을 기뻐하는 듯합니다."라고 아버지에게 무고했다. 손권이 이에 격노하자, 왕부인은 실의 속에 병사했다. 그 일로 인해, 손화도 아버지로부터 소외당하게 되었다[29].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적오 7년(244년)경, 이미 장공주로 진봉된 것으로 여겨진다[30].
그 후 정치적인 우위를 구축했지만, 옛일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 노반은, 아버지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 반숙 (후의 반황후)과 소생인 손량에게 접근하기 위해 남편의 족손녀로 전상의 딸 (후의 전황후)을 손량에게 시집보내기를 아버지 황제에게 권했다. 적오 13년(250년), 손권은 싸움 양쪽 모두 벌을 받는다는 이유로 손화를 폐적하고, 손패에게도 죽음을 명하여, 손량을 황태자로 세웠다. 태원 원년(251년) 11월, 다시 병상에 눕고 기력이 쇠약해진 손권은, 손화의 무죄를 깨닫고 소환하려 했지만, 노반은 손준과 손홍과 함께 반대하여, 결국 소환할 수 없었다[31].
손량이 황제에 즉위한 후, 전황후가 손량의 후가 된 일로 인해, 전씨 일족은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노반도 일정한 권세를 쥐었다. 집정자인 손준은 자주 여러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그의 누나가 전상의 아내이자 전황후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노반의 비호를 받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밀통 관계가 되었다. 그 후, 손준은 노반의 뜻을 받아 손화를 자살로 몰아넣었다. 오봉 원년(254년), 손영·손의 등이 잇따라 손준의 암살 계획을 세우지만, 모두 실패했다. 오봉 2년(255년), 여동생 손로육이 손화의 폐적에 반대했던 것을 앙심을 품었던 노반은, 손준에게 "로육도 손의의 암살 계획에 가담했던 것 같습니다"라고 무고하여, 주살시켰다[32][33].
손준 사후의 태평 연간, 노육의 죽음의 진상을 알게 된 손량으로부터 추궁당해 궁지에 몰리자, 주거의 아들 주웅과 도 쿠데타의 주모자 중 한 명이었다고 참언하여, 처형했다[32][33][34].
태평 3년(258년), 손량은 손침의 전횡에 질려, 전상·손로반과 장군 유승 등과 모의하여, 손침을 주살하려 계획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전황후 또는 전황후의 어머니[35]의 움직임을 사전에 감지한 손침이, 그해 9월 26일에 선수를 쳐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노반은 예장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33]. 이후의 소식은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전공주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손화와 사이가 좋지 않아, 중상모략으로 손화를 황태자 지위에서 끌어내린다.
2. 1. 초기 생애와 혼인
손노반은 동오의 초대 황제 손권과 그의 후궁 보련씨의 장녀였다. 주유의 아들 주순에게 시집갔지만 주순이 요절하자,[4] 황룡 원년(229년), 31세의 위장군 전종에게 재가하여, '''전공주'''(全公主)라고 불리게 되었다.[27] 전종과의 사이에서 전익(全懌)과 전오(全吳) 두 아들을 두었다.[8][9]적오 원년(238년), 어머니 보련사가 사망하고, 적오 4년(241년)에는 황태자 손등도 사망하여 황후와 황태자 자리가 비게 되었다. 이듬해 손화가 황태자로 세워졌으나, 손노반은 손화 및 그의 어머니 왕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아 손화의 실각을 획책하였다.[29] 손권이 병상에 눕자 손노반은 손화가 종묘에서 기도하지 않고 비(妃)의 친정과 계략을 꾸민다고 모함하였고, 왕부인은 실의 속에 병사하였다. 이 일로 손화는 아버지로부터 소외당하게 되었다.[29]
이후 정치적인 우위를 구축한 손노반은 아버지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 반숙 (후의 반황후)과 소생인 손량에게 접근하기 위해 남편의 족손녀이자 전상의 딸 (후의 전황후)을 손량에게 시집보내기를 권했다. 적오 13년(250년), 손권은 손화를 폐하고 손량을 황태자로 세웠다. 태원 원년(251년), 손권은 손화의 무죄를 깨닫고 소환하려 했으나, 손노반이 손준, 손홍과 함께 반대하여 소환하지 못했다.[31]
2. 2. 손화 모함과 이궁의 변
손노반은 주유의 아들 주순에게 시집갔지만 주순이 요절하고 전종과 재혼해 전공주(全公主)라고 불리게 되었다.[36] 어머니 보련사 사후, 손화가 황태자로 세워져 손화의 어머니인 왕부인이 황후 후보가 되자 아버지 손권에게 참언하여 철회시켰다. 그것이 원인으로 손화가 자신을 원망하는 듯 하자 그의 실각을 획책하였다.[10] 한번은 손권이 병 때문에 황실 사당에서의 행사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손화에게 그 자리를 대신하도록 명했는데, 손노반은 손화가 황실 사당에 있지 않고 처가에 머물며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손권에게 보고했다. 또한 손권에게 왕부인이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고 모함하여, 왕부인은 비통함 속에 죽었고, 손화는 아버지의 총애를 잃었다.[12]이궁의 변 당시 손노반은 손패파에 가담하였다.[13] 적오 13년(250년), 손권이 손화를 폐하고 손패를 자살케 한 뒤 손량을 태자로 세웠다.[15] 다시 병상에 누운 손권이 손화의 무죄를 깨닫고 소환하려 했으나 손노반이 손준, 손홍과 함께 강력히 반대하여 소환하지 않았다.[37][31] 손패 사후 손권의 총애를 받게 된 막내동생 손량에게 접근하여 남편의 종형인 전상의 딸(전황후)을 권했다. 또한 손량이 즉위한 뒤에는 그녀를 전황후로 세웠다.[38][39][16]
그 이후 손노반은 실권을 쥐게 된 손준과 간통하였으며,[40] 손화를 자살로 몰아넣었다. 오봉 원년(254년), 손영과 손의 등이 손준 암살 계획을 세웠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듬해인 오봉 2년(255년), 손노반은 손노육이 손화의 폐위에 반대했던 것을 기억하고 손준에게 “노육도 암살 계획에 가담한 것 같다”고 무고하여 친여동생인 손노육을 죽였다.[41][42][32][33] 손준이 죽은 뒤 손노육의 죽음의 진상을 안 손량에게 추궁당하자 노육과 주거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주웅, 도 쿠데타 주모자 중 한명이라고 모함하여 처형시켰다.[43][32][33][34]
태평 3년(258년), 손량이 손침의 전횡에 질려, 전상·손노반과 장군 유승 등과 모의하여, 손침을 주살하려 계획했으나,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35] 손노반은 그에 연좌되어 예장으로 유배되었다.[42][33]
2. 3. 손량 옹립과 권력 장악
손노반은 주유의 아들 주순에게 시집갔지만 주순이 요절하고 전종과 재혼하여 '''전공주'''(全公主)라고 불렸다.[36] 황룡 원년(229년), 아버지 손권이 즉위했을 때 손노반은 31세의 위장군 전종에게 재가했다.[27]어머니 보련사 사후, 손화가 황태자로 세워져 손화의 어머니인 왕부인이 황후 후보가 되자 아버지 손권에게 참언하여 철회시켰다. 그것이 원인으로 손화가 자신을 원망하는 듯 하자 그의 실각을 획책하였다.[10] 적오 원년(238년), 어머니 보련사가 사망했고, 더 나아가 적오 4년(241년)에는 황태자 손등도 사망했기 때문에, 황후와 황태자는 공석이었다. 이듬해에 손화가 대신 황태자로 세워졌다. 손화와 그의 어머니 왕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손화의 실각을 획책하게 되었다. 한번은 손권이 병 때문에 황실 사당에서의 행사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손화에게 그 자리를 대신하도록 명령했다. 장휴는 손화의 아내인 장태자비의 삼촌이었는데, 황실 사당 근처에 살았기에 손화를 그 기간 동안 자신의 저택에 머물도록 초대했다. 손노반은 하인들을 보내 손화를 염탐하게 한 후, 아버지에게 손화가 황실 사당에 있지 않고 처가에 머물며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녀는 또한 손권에게 왕부인이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고 말함으로써 왕부인을 험담하는 기회로 삼았다. 손권은 딸의 말을 믿고 왕부인에게 격분했다. 왕부인은 나중에 비통함 속에서 죽었고, 손화는 아버지의 총애를 잃었다.[12]
이궁의 변 당시 손노반은 손패파에 가담하였다.[13] 황태자 손화와 노왕 손패의 두 파가 대립하자, 손패파는 남편 전종의 일족, 더 나아가 어머니 일족인 보즐 등을 아군으로 삼아, 참언으로 장휴·육손 등 손화파의 중신들을 함정에 빠뜨렸다. 250년, 손권은 손패에게 자살을 강요하고 손화를 태자 자리에서 폐위시킴으로써 권력 투쟁이 종결되었다. 권력 투쟁에 연루된 많은 관리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거나, 관직에서 쫓겨났다.[15]
손패 사후 손권의 총애를 받게 된 막내동생 손량에게 접근하여 남편의 종형인 전상의 딸을 권했다.[16] 손량을 정치적 동맹으로 얻고 싶었던 그녀는 아버지에게 손량과 남편 전종의 어린 친척인 전상(全尚)의 딸인 권혜의 결혼을 주선하도록 조언했다. 손권은 딸의 조언을 받아들여 손량과 권혜의 결혼을 주선했다. 또한 손량이 즉위한 뒤에는 그녀를 전황후로 세웠다.[38][39] 250년, 손화를 폐위시킨 후, 손권은 손량을 새로운 태자로 만들었고, 권혜는 태자비가 되었다.
태원 원년(251년) 11월, 다시 병상에 눕고 기력이 쇠약해진 손권은, 손화의 무죄를 깨닫고 소환하려 했으나, 손노반은 손준과 손홍과 함께 반대하여, 결국 소환할 수 없었다.[31][37]
그 이후 손노반은 실권을 쥐게 된 손준과 간통하였으며,[40] 손화를 자살로 몰아넣었다.[17] 오봉 원년(254년), 손영과 손의 등이 손준 암살 계획을 세웠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듬해인 오봉 2년(255년), 손노반은 손노육이 손화의 폐위에 반대했던 것을 기억하고 손준에게 “노육도 암살 계획에 가담한 것 같다”고 무고하여 친여동생인 손노육을 죽였다.[41][42] 손준이 죽은 뒤 손노육의 죽음의 진상을 안 손량에게 추궁당하자 노육과 주거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주웅, 주손도 쿠데타 주모자 중 한명이라고 모함하여 처형시켰다.[43]
태평 3년(258년), 손량이 전횡이 심해진 손침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자 손노반은 그에 연좌되어 예장군으로 귀양 갔다.[42] 손량은 손침의 전횡에 질려, 전상·손로반과 장군 유승 등과 모의하여, 손침을 주살하려 계획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전황후 또는 전황후의 어머니[35]의 움직임을 사전에 감지한 손침이, 그해 9월 26일에 선수를 쳐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2. 4. 손노육 살해와 몰락
손노반은 주유의 아들 주순에게 시집갔지만 주순이 요절하자 전종과 재혼하여 전공주(全公主)라고 불렸다.[36] 황룡 원년(229년), 아버지 손권이 즉위했을 때 전종에게 재가했다.[27]어머니 보련사 사후, 손화가 황태자로 세워졌으나 사이가 좋지 않아 그의 실각을 획책하였다. 손권에게 손화와 그의 어머니인 왕부인을 참언하여 왕부인이 황후가 되는 것을 철회시켰고, 손화가 자신을 원망하는 듯 하자 이궁의 변 당시 손패파에 가담하였다.[37] 손노반은 손화가 종묘[28]에서 기도할 때 비의 숙부 댁에 들렀다는 정보를 듣고 "태자는 종묘에서 기도하지 않고, 오로지 비의 친정과 계략을 꾸미는 듯합니다. 왕부인도 병을 기뻐하는 듯합니다."라고 무고하여 손권을 격노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왕부인은 실의 속에 병사했고, 손화도 아버지로부터 소외당하게 되었다.[29]
적오 13년(250년), 손권이 손화를 폐하고 손패를 자살케 한 뒤 손량을 태자로 세웠다.[37] 손노반은 병상에 누운 손권이 손화의 무죄를 깨닫고 소환하려 하자 강력히 반대하여 소환하지 못하게 했다.[31][37] 손패 사후 손권의 총애를 받게 된 막내동생 손량에게 접근하여 남편의 종형인 전상의 딸(전황후)을 권하여 황후로 세웠다.[38][39]
그 이후 손노반은 실권을 쥔 손준과 간통하였으며,[40] 손화를 자살로 몰아넣었다.[41] 오봉 2년(255년), 손노반은 손노육이 손화의 폐위에 반대했던 것을 기억하고 손준에게 “노육도 암살 계획에 가담한 것 같다”고 무고하여 친여동생인 손노육을 죽였다.[41][42] 손준이 죽은 뒤 손노육의 죽음의 진상을 안 손량에게 추궁당하자 노육과 주거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주웅, 주손도 쿠데타 주모자 중 한명이라고 모함하여 처형시켰다.[21][22][43]
태평 3년(258년), 손량이 손침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자 손노반은 그에 연좌되어 예장(豫章郡; 현재의 난창, 장시 성 주변)으로 귀양 갔다.[23][42]
3. 평가
3. 1. 긍정적 평가
3. 2. 부정적 평가
4. 가족 관계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5. 1. 삼국지연의
5. 2. 기타 매체
참조
[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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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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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https://books.google[...]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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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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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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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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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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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 〈보부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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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 〈손화전〉의 주석에 인용된 《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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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 〈전부인전〉
[39]
서적
삼국지 〈손량전〉
[40]
서적
삼국지 〈손준전〉
[41]
서적
삼국지 〈손휴주부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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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 〈손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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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 〈주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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