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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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승종은 명나라 말기의 문신으로, 젊은 시절 수려한 외모로 묘사되었으며, 16세에 생원이 된 후 국자감에서 공부하고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그는 요동 경략으로 임명되어 국방 강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유하 전투 패배 이후 면직되었다. 숭정제 시기에 다시 기용되어 청군에 맞서 싸웠지만, 대릉하 전투 패배로 면직되었고, 75세에 고양성 전투에서 일가족과 함께 전사했다. 사후 숭정제는 관직을 회복시키고 제사를 지냈으며, 남명 홍광제와 청나라 건륭제에 의해 시호가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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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승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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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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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명 | 孫承宗 |
자 | 稚繩 |
출생일 | 1563년 |
출생지 | 명나라 북직예 보정부 고양현 |
사망일 | 1638년 |
국적 | 명나라 |
군사 복무 | |
복무 | 명나라 |
복무 기간 | 1593년~1638년 |
근무 | 명군 |
최종 계급 | 병부상서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명-청 전쟁 |
2. 생애
손승종은 젊은 시절 외모가 특출났으며, "철같이 단단한 얼굴과 칼날 같은 눈썹, 수염은 창처럼 뻗어 있었다"라고 전해진다.[4] 1578년, 16세의 나이로 생원이 되었고, 이후 강벽(姜璧)과 방수사(房守士) 등 조정 관리들의 집에서 가정 교사로 일하며 관직 생활을 접하게 되었다. 1593년, 베이징으로 가서 국자감에서 공부하였고, 이듬해 순천향시(順天鄉試)에서 5등으로 급제하였다.[4] 방수사가 도찰원 우부도어사(都察院右副都御史) 겸 대동지방 순무(巡撫)로 승진하자, 손승종은 그를 따라 대동으로 가서 자제들을 가르쳤다. 대동은 당시 명나라의 변방 요충지였는데, 손승종은 노장 및 퇴역 병사들과 변방 사정을 깊이 논하며 "검을 숨기고 변방을 돌아다니며 요새와 관문을 샅샅이 탐문하여 변방 사정을 꿰뚫었다"는 평가를 받았다.[5]
1604년, 진사 시험에서 방안(榜眼)으로 합격하여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로 임명되었고, 한림원에서 10년간 근무했다. 이후 잠사부 우춘방 좌중윤(詹事府右春坊左中允), 잠사부 좌춘방 좌유덕(左諭德) 겸 한림원 시독(侍讀)으로 임명되었다.[6] 1620년에는 폐광세를 철폐하고 궁중 내탕금(內帑)을 풀도록 상소하였다. 이 시기 동림당 인사들인 고반룡(高攀龍)과 조남성(趙南星) 등과 친밀하게 교류하였다. 태창제가 즉위 한 달 만에 사망하고, 16세의 황장자(皇長子)가 태자로 책봉되지 못한 채 급히 즉위하여 천계제가 즉위하면서, 손승종은 희종의 스승이 되었다.
천계 2년, 손승종은 예부 우시랑(禮部右侍郎)으로 승진하고,[7] 동림당 인사들의 추천으로 병부 상서 겸 동각대학사에 임명되어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요동(遼東)을 시찰했다. 그는 "장수를 중시하여 군사를 맡기고, 문관의 간섭을 줄여야 한다"는 군사 개혁을 추진하며, 원숭환(袁崇煥) 등 유능한 인재들을 기용했다.[8] 영원(寧遠) 등 주요 성과 보루를 복구하고 군사를 훈련시켜 변방 안정에 기여했다.[9]
천계 5년, 유하 전투[10]에서 마세룡(馬世龍)이 패배하자,[11][12] 위충현(魏忠賢)은 이를 빌미로 손승종을 탄핵했고,[13] 결국 손승종은 사직했다.[14] 숭정 2년, 청군이 장성을 넘어 침입하자 다시 기용되어 조대수(祖大壽)를 지지하며 산해관에서 근무, 요동 지역 안정을 도모했다. 숭정 3년, 준영대첩(遵永大捷)을 이끌었으나, 숭정 4년 대릉하(大凌河) 전투에서 패배 후 면직되어 7년간 고향에 머물렀다.
숭정제 즉위 후, 숭정 2년(1629년) 청군이 장성을 넘어 침입하자 손승종은 다시 기용되었다. 원숭환이 투옥된 이후에도 손승종은 조대수를 적극 지지하였으며, 산해관으로 근무지를 옮겨 해안 장성을 수리하고 요동 지역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숭정 3년(1630년), 조대수와 마세룡 등이 영평, 준화, 천안, 난주 등 4개 성을 회복하여 "준영대첩"이라 불렸다. 그러나 숭정 4년(1631년) 8월, 대릉하 전투에서 청군에 패하고 조대수가 항복하면서 손승종은 면직되어 7년간 고향에 머물렀다.
숭정 11년(1638년), 청군이 보정을 공격하고 고양을 침입하자, 손승종은 75세의 나이로 가족과 함께 항전하였으나 고양성이 함락되면서 일가 40여 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손승종은 붙잡힌 후 황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자결하였다. 숭정제는 그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제사를 올렸다. 남명 홍광제 시절 문충(文忠), 청나라 건륭제 41년(1776년)에는 충정(忠定)으로 추서하였다.[15]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손승종은 젊은 시절 외모가 특출났으며, "철같이 단단한 얼굴과 칼날 같은 눈썹, 수염은 창처럼 뻗어 있었다"라고 전해진다.[4] 1578년, 16세의 나이로 생원이 되었고, 이후 강벽(姜璧)과 방수사(房守士) 등 조정 관리들의 집에서 가정 교사로 일하며 관직 생활을 접하게 되었다. 1593년, 베이징으로 가서 국자감에서 공부하였고, 이듬해 순천향시(順天鄉試)에서 5등으로 급제하였다.[4] 1604년, 진사 시험에서 방안(榜眼)으로 합격하여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로 임명되었고, 한림원에서 10년간 근무했다. 이후 잠사부 우춘방 좌중윤(詹事府右春坊左中允), 잠사부 좌춘방 좌유덕(左諭德) 겸 한림원 시독(侍讀)으로 임명되었다.[6]1620년에는 폐광세를 철폐하고 궁중 내탕금(內帑)을 풀도록 상소하였다. 이 시기 동림당 인사들인 고반룡(高攀龍)과 조남성(趙南星) 등과 친밀하게 교류하였다. 태창제가 즉위 한 달 만에 사망하고, 16세의 황장자(皇長子)가 태자로 책봉되지 못한 채 급히 즉위하여 천계제가 즉위하면서, 손승종은 희종의 스승이 되었다.
2. 2. 요동 경략과 국방 강화
손승종은 젊은 시절부터 명나라 조정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베이징에서 국자감에서 공부하고, 순천향시(順天鄉試)에 합격한 후, 대동 지방에서 변방의 실정을 체험하며 군사적 식견을 쌓았다.[4][5]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를 거쳐, 천계제 즉위 후에는 황제의 스승으로 발탁되어 정치 권력의 중심으로 진입했다.천계 2년, 손승종은 예부 우시랑(禮部右侍郎)으로 승진하고,[7] 동림당 인사들의 추천으로 병부 상서 겸 동각대학사에 임명되어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요동(遼東)을 시찰했다. 그는 "장수를 중시하여 군사를 맡기고, 문관의 간섭을 줄여야 한다"는 군사 개혁을 추진하며, 원숭환(袁崇煥) 등 유능한 인재들을 기용했다.[8] 영원(寧遠) 등 주요 성과 보루를 복구하고 군사를 훈련시켜 변방 안정에 기여했다.[9]
천계 5년, 유하 전투[10]에서 마세룡(馬世龍)이 패배하자,[11][12] 위충현(魏忠賢)은 이를 빌미로 손승종을 탄핵했고,[13] 결국 손승종은 사직했다.[14] 숭정 2년, 청군이 장성을 넘어 침입하자 다시 기용되어 조대수(祖大壽)를 지지하며 산해관에서 근무, 요동 지역 안정을 도모했다. 숭정 3년, 준영대첩(遵永大捷)을 이끌었으나, 숭정 4년 대릉하(大凌河) 전투에서 패배 후 면직되어 7년간 고향에 머물렀다.[15]
2. 3. 숭정제 시기의 복귀와 최후
손승종은 태창제가 한 달 만에 사망하고 천계제가 즉위하면서 황제의 스승이 되어 정치 권력의 중심으로 진입하였다.[6] 천계 2년(1622년), 동림당 인사들의 추천으로 병부 상서 겸 동각대학사가 되어 요동(遼東)을 시찰했다. 요동경략으로 임명된 후, 손승종은 "장수를 중시하여 군사를 맡기고, 문관의 간섭을 줄여야 한다"며 군사 개혁을 단행하였다.[8] 원숭환, 손원화, 녹선계, 모원의 등을 기용하고, 영원 등 주요 성 9곳과 보루 45곳을 복구하며 군사 11만을 훈련시켜 변방을 안정시켰다.[9]천계 5년(1625년) 8월, 유하 전투[10]에서 마세룡이 패배하자,[11][12] 위충현은 손승종이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탄핵하였다.[13] 결국 희종은 손승종에게 병을 이유로 사직하도록 명하였고, 고제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14]
숭정제 즉위 후, 숭정 2년(1629년) 청군이 장성을 넘어 침입하자 손승종은 다시 기용되었다. 원숭환이 투옥된 이후에도 손승종은 조대수를 적극 지지하였으며, 산해관으로 근무지를 옮겨 해안 장성을 수리하고 요동 지역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숭정 3년(1630년), 조대수와 마세룡 등이 영평, 준화, 천안, 난주 등 4개 성을 회복하여 "준영대첩"이라 불렸다. 그러나 숭정 4년(1631년) 8월, 대릉하 전투에서 청군에 패하고 조대수가 항복하면서 손승종은 면직되어 7년간 고향에 머물렀다.
숭정 11년(1638년), 청군이 보정을 공격하고 고양을 침입하자, 손승종은 75세의 나이로 가족과 함께 항전하였으나 고양성이 함락되면서 일가 40여 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손승종은 붙잡힌 후 황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자결하였다. 숭정제는 그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제사를 올렸다. 남명 홍광제 시절 문충(文忠), 청나라 건륭제 41년(1776년)에는 충정(忠定)으로 추서하였다.[15]
3. 평가
3. 1. 긍정적 평가
3. 2. 부정적 평가
4. 대중문화 속 손승종
참조
[1]
서적
[2]
서적
Statecraft and Intellectual Renewal in Late Ming China: The Cross-Cultural Synthesis of Xu Guangqi (1562-1633)
BRILL
2021
[3]
서적
[4]
문서
石匮书后集·孙承宗传
[5]
문서
明史·孙承宗传
[6]
문서
東林列傳
[7]
문서
崇禎長編卷之十三
[8]
문서
明熹宗实录
[9]
문서
三朝野纪
[10]
문서
[11]
문서
三朝辽事实录
[12]
문서
明熹宗实录
[13]
문서
明熹宗实录
[14]
문서
明熹宗实录
[15]
문서
欽定勝朝殉節諸臣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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