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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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동식은 일제강점기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대한제국 장성에서 송경철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1911년 송동식으로 개명했다. 장성성산초등학교 졸업 후 목포고등상업학교를 중퇴하고 광주사범학교를 자퇴한 그는, 비밀결사 성진회와 독서회 활동을 통해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대통령 표창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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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식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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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송동식 |
본명 | 송경철(宋景喆) → 송동식(宋東植) |
거주지 | 일제 강점기 조선 전라남도 광주부 |
출생지 | 대한제국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면 영천리 361번지 |
사망지 | 대한민국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부흥리 |
국적 | 대한민국 |
본관 | 여산 |
가족 관계 | |
형제 | 2남 1녀 중 차남(막내) |
친척 | 송광섭(할아버지) |
부모 | 송의진(부), 강릉 유씨 부인(모) |
학력 | |
학교 | 전남 광주사범학교 보통사범학과 |
학력 정보 | 2학년 2학기 중퇴(1924년 10월) |
활동 정보 | |
활동 기간 | 1924년~1934년 |
직업 | 항일 독립 운동가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
주요 활동 | 광주 학생 항일 운동 |
경력 | |
경력 1 | 전남 광주 광산 송정 지역 성진회 사무위원 |
경력 2 | 전남 광주 지역 독서회 조직교양부 부장대우 겸 조직책임위원 |
경력 3 | 전남 지역 소재 보통학교 졸업 동문 총련합 독서회 회장 겸 대표위원장 |
상훈 | |
훈장 |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 추서(1968. 03. 01.) |
훈장 2 |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1990. 08. 15.) |
웹사이트 |
2. 생애
대한제국 전남 장성(長城)의 장성면에서 '''송경철'''(宋景喆)이라는 아명(兒名)으로 출생하였고, 1911년 5세 때 '''송동식'''(宋東植)으로 개명(改名)하였다. 1920년 3월, 전남장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3월 전남목포고등상업학교 1학년 수료와 함께 전퇴, 전남광주사범학교 보통사범학과 2학년에 편입학하였다. 같은 해 1924년 10월, 전남 광주사범학교 보통사범학과 2학년 2학기를 중퇴(자퇴)하였다. 이후 전남 광주 광산 송정 지역의 중심적인 대한제국 광복 및 회복을 촉구하는 항일 학생 비밀 결사 단체 《전남 광주 광산 송정 지역 성진회(醒進會)》가 1927년 3월 해체되었지만, 주동 학생들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1928년 10월, 김시성(金時成)의 하숙집에서 성진회 사업을 계속 수행하기로 결의하고 각 학교 접수 관련 단위로 활동을 분담하였다. 광주사범학교를 중퇴한 송동식은 김시성과 함께 광주사범학교 접수를 맡았다.
1929년 3월, 송동식은 광주사범학교 졸업생 및 재학생 회원 12명과 함께 광산군 송정 읍내 청요리점 《고흥 연빈루》에 모여 학교 졸업 이후에도 항일 학생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의하고 단결을 다짐하였다. 1929년 6월, 일본에서 돌아온 장재성(張載性)이 조직적 활동을 주장하면서, 송동식은 다른 학생 지도자들과 함께 「전남 광주 지역 독서회 중앙본부」를 조직하였다. 여기서 송동식은 김순복(金順福)과 함께 조직교양부 부장대우 겸 조직책임위원으로 선임되어 독서회 클럽 편성 및 연구방법 지도를 맡았다.
1929년 7월, 송동식은 광주사범학교 졸업 동문 독서회 사무위원 임종근(林鍾根)으로부터 독서회 회원의 항일 독립 운동 정신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찍어낸 인쇄물을 모두 교부받아 회원들에게 배포하며 항일 독립 운동 의식을 고취하였다. 같은 해 9월, 전남 광주형무소 뒷산에 모여 〔전남 지역 소재 보통학교 졸업 동문 총련합 독서회〕를 조직하고, 송동식은 동회의 회장 겸 대표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 활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1930년 10월, 전남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하여 1931년 6월, 경북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고, 1931년 11월 3일 만기 출감하였다.
2. 1. 어린 시절과 개명
송동식은 대한제국 전남 장성(長城)의 장성면의 면내에서 '''송경철'''(宋景喆)이라는 아명(兒名)으로 출생하였고, 1911년 5세 때에 '''송동식'''(宋東植)으로 개명(改名)하였다. 1920년 3월, 전남장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3월 전남목포고등상업학교 1학년 수료와 함께 전퇴, 전남광주사범학교의 보통사범학과 2학년에 편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1924년 10월, 전남의 광주사범학교의 보통사범학과 2학년 2학기를 중퇴(자퇴)하였다.이후 전남 광주 광산 송정 지역의 중심적인, 대한제국 자국 광복 및 대한제국 회복 등을 촉구하는 정통 민족 운동 성향의 항일 학생 비밀 결사 단체였던 《전남 광주 광산 송정 지역 성진회(醒進會)》가 1927년 3월 해체되었지만, 주동 학생들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이들은 1928년 10월, 김시성(金時成)의 하숙집에 모여 성진회의 사업을 계속 수행하기로 하고 각 학교 접수 관련 단위로 활동을 분담하였다. 광주사범학교를 중퇴한 송동식은 김시성과 함께 광주사범학교 접수를 맡았다.
1929년 3월, 송동식은 광주사범학교 졸업생 및 재학생 회원 12명과 함께 광산군 송정 읍내 청요리점 《고흥 연빈루》에 모여 학교 졸업 이후에도 대한제국 독립 촉구 성향 항일 학생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의하고 단결을 다짐하였다. 1929년 6월, 일본에서 돌아온 장재성(張載性)이 조직적 활동을 주장하면서, 송동식은 다른 학생 지도자들과 함께 「전남 광주 지역 독서회 중앙본부」를 조직하였다. 여기서 송동식은 김순복(金順福)과 함께 조직교양부 부장대우 겸 조직책임위원으로 선임되어 독서회 클럽의 편성 및 연구방법의 지도를 맡았다.
1929년 7월, 송동식은 광주사범학교 졸업 동문 독서회 사무위원 임종근(林鍾根)으로부터 독서회 회원의 항일 독립 운동 정신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찍어낸 인쇄물을 모두 교부받아 회원들에게 배포하며 항일 독립 운동 의식을 고취하였다. 같은 해 9월, 전남 광주형무소 뒷산에 모여 〔전남 지역 소재 보통학교 졸업 동문 총련합 독서회〕를 조직하고, 송동식은 동회의 회장 겸 대표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 활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1930년 10월, 전남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하여 1931년 6월, 경북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고, 1931년 11월 3일 만기 출감하였다.
2. 2. 학창 시절과 중퇴
1911년 5세 때 '''송동식'''(宋東植)으로 개명(改名)하였고, 1920년 3월에 전남장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1924년 3월에 전남목포고등상업학교 1학년 수료와 함께 전퇴를 하고 나서, 전남광주사범학교의 보통사범학과 2학년에 편입학한 그는, 같은해 1924년 10월에 결국, 전남의 광주사범학교의 보통사범학과 2학년 2학기를 중퇴(자퇴)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자국 광복 및 대한제국 회복 등을 촉구하는 정통 민족 운동 성향의 항일 학생 비밀 결사 단체였던 《전남 광주 광산 송정 지역 성진회(醒進會)》가 1927년 3월에 해체된 후에도, 그 주동 학생들은 1928년 10월 김시성(金時成)의 하숙집에 모여 성진회의 사업을 계속 수행하기로 결의하고 각 학교 접수 관련 단위로 활동을 분담하였다. 이미 4년 전(1924년)의 10월에 광주사범학교를 중퇴(2학년 당시 자퇴)까지 한 송동식 그는, 일단 전남 광주 광산 송정 지역 성진회 관련 사업으로 김시성과 함께 송동식 자신이 지난날에 중퇴한 광주사범학교를 접수할 것을, 그리고 김몽길(金夢吉)은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접수할 것을, 마지막으로 조길룡(曺吉龍)·유치오(兪致五)는 광주고등농림학교를 접수할 것을 각각 책임으로써 맡았다. 결국 이렇게 송동식 자신이 이전에 자퇴한 학교(광주사범학교)를 중심으로써 대한제국 항일 독립 투쟁 등을 전개하였다.2. 3. 성진회 활동과 광주 학생 항일 운동
1911년 5세 때에 '''송동식'''(宋東植)으로 개명(改名)하였고, 1920년 3월에, 전남장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1924년 3월에 전남목포고등상업학교 1학년 수료와 함께 전퇴를 하고 나서, 전남광주사범학교의 보통사범학과 2학년에 편입학한 그는, 같은해 1924년 10월에 결국, 전남의 광주사범학교의 보통사범학과 2학년 2학기를 중퇴(자퇴)하였는데, 이후로도 전남 광주 광산 송정 지역의 중심적인, 대한제국 자국 광복 및 대한제국 회복 등을 촉구하는 정통 민족 운동 성향의 항일 학생 비밀 결사 단체였던 《전남 광주 광산 송정 지역 성진회(醒進會)》가 회원들 중에서도 이반자(이단 분자)가 생겨, 1927년 3월에 해체되었는데 그후에도 그 주동 학생들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들은 대한제국 항일 독립 운동의 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기 위해 1928년 10월, 김시성(金時成)의 하숙집에 모여 성진회의 사업을 계속 수행하기로 결의하고 각 학교 접수 관련 단위로 활동을 분담하였다. 이미 4년 전(1924년)의 10월에 광주사범학교를 중퇴(2학년 당시 자퇴)까지 한 송동식 그는, 일단 전남 광주 광산 송정 지역 성진회 관련 사업으로 김시성과 함께 송동식 자신이 지난날에 중퇴한 광주사범학교를 접수할 것을, 그리고 김몽길(金夢吉)은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접수할 것을, 마지막으로 조길룡(曺吉龍)·유치오(兪致五)는 광주고등농림학교를 접수할 것을 각각 책임으로써 맡았다. 결국 이렇게 송동식 자신이 이전에 자퇴한 학교(광주사범학교)를 중심으로써 대한제국 항일 독립 투쟁 등을 전개하던 그는, 이듬해 1929년 3월, 선배 성진회 회원이자 당시의 전남 광주고등농림학교의 농업학과의 두 교사인 전남 광주 광산 송정 학우회 총무위원 임종근(林鍾根)·동회 총무위원 김기주(金基柱) 등의 전남 광주고등농림학교 농업학과 제자들 졸업식에 즈음하여, 송동식 자신이 지난날 1924년 10월에 중퇴한 학교(광주사범학교)의 졸업생 및 재학생 회원 12명과 함께 당시 전남 광산군 송정 읍내 청요리점 《고흥 연빈루》에 모여 아무리 학교 졸업 이후에도 대한제국 독립 촉구 성향 항일 학생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의하고 광주사범학교와 광주고등농림학교라는 두 학교의 졸업생과 재학생간의 모든 단결을 다짐하였다. 그후 1929년 6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돌아온 장재성(張載性)이 성진회 해체 이후 분산적으로 지속되었던 항일 학생 운동에 대하여 조직적 활동을 주장하면서 송동식 그는, 강달모(姜達模)·김상환(金相奐)·김보섭(金普燮)·조길룡(曺吉龍) 등 전남 광주 고을 내의 각 학교 학생 지도자들과 함께 김기권(金基權)의 집에 모여 구체적 활동 방안에 대하여 논의하고 나서 「전남 광주 지역 독서회 중앙본부」를 조직하였다. 이때 부서 및 결의 사항도 정하였는데, 결국 여기서 송동식 그는 김순복(金順福)과 함께 조직교양부 부장대우 겸 조직책임위원으로 선임되어 독서회 클럽의 편성 및 연구방법의 지도를 맡았다. 한편 전남 광주 지역 독서회 동 중앙 본부는 독서회원의 친목 단결 및 재정활동 지원을 위해 학생소비조합을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이것에 아울러 조직 확대를 위해 하부 조직으로서 전남 광주 고을 내에 있는 각 학교에 각기각기로 독서회를 조직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전남 광주 지역 독서회 중앙본부 총무기획실 실장 장재성(張載性) 및 동본부 임원 학생들과 수수 차례에 걸쳐 소비조합 설치에 대하여 의논하고 동년(1929년)의 9월에 동 조합을 조직하였다.또한 이미 동년(1929년)의 7월에 강달모·박노기(朴魯淇) 등 광주사범학교 졸업생 15여명과 함께 수피아여자고등보통학교 뒷산에 모여 비밀결사 조직을 협의하고 동년(1929년)의 9월에 전남 광주형무소 뒷산에 또다시 모여, 〔전남 지역 소재 보통학교 졸업 동문 총련합 독서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송동식 그는 동회의 회장 겸 대표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한편 동년(1929년)의 7월에 그는 광주사범학교 졸업 동문 독서회 사무위원 임종근(林鍾根)으로부터 독서회 회원의 항일 독립 운동 정신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찍어낸 인쇄물을 모두 교부받아 이를 독서회 회원들에게 배포하며 항일 독립 운동 의식을 고취하였다. 이렇게 전남 지역 소재 보통학교 졸업 동문 총련합 독서회 활동을 통하여 대한제국 항일 독립 운동 성향 민족 정신을 함양하던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 활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렇게 그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 관련 주도 및 기획을 방조한 이이자 요주자로 낙인찍힘으로 인하여 체포되고, 전남 지역 소재 보통학교 졸업 동문 총련합 독서회 사무위원 임종근과 동회 총무위원 김기주는 둘 모두 광주고등농림학교 농업학과 교사 직함에서 집단 해직되었으며, 이토록 송동식 그 또한, 독서회 관련으로 1930년 10월에 전남 광주지법(전남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결국 항소하여 1931년 6월, 경북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고, 1931년 11월 3일, 만기 출감하였다.
2. 4. 독서회 조직과 활동
1924년 3월, 전남목포고등상업학교 1학년 수료와 함께 전퇴를 하고 나서, 전남광주사범학교의 보통사범학과 2학년에 편입학한 그는, 같은해 1924년 10월에 결국, 전남의 광주사범학교의 보통사범학과 2학년 2학기를 중퇴(자퇴)하였는데, 이후 전남 광주 광산 송정 지역의 중심적인, 대한제국 자국 광복 및 대한제국 회복 등을 촉구하는 정통 민족 운동 성향의 항일 학생 비밀 결사 단체였던 《전남 광주 광산 송정 지역 성진회(醒進會)》가 회원들 중에서도 이반자(이단 분자)가 생겨, 1927년 3월에 해체되었는데 그후에도 그 주동 학생들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들은 대한제국 항일 독립 운동의 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기 위해 1928년 10월, 김시성(金時成)의 하숙집에 모여 성진회의 사업을 계속 수행하기로 결의하고 각 학교 접수 관련 단위로 활동을 분담하였다. 이미 4년 전(1924년)의 10월에 광주사범학교를 중퇴(2학년 당시 자퇴)까지 한 송동식 그는, 일단 전남 광주 광산 송정 지역 성진회 관련 사업으로 김시성과 함께 송동식 자신이 지난날에 중퇴한 광주사범학교를 접수할 것을, 그리고 김몽길(金夢吉)은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접수할 것을, 마지막으로 조길룡(曺吉龍)·유치오(兪致五)는 광주고등농림학교를 접수할 것을 각각 책임으로써 맡았다. 결국 이렇게 송동식 자신이 이전에 자퇴한 학교(광주사범학교)를 중심으로써 대한제국 항일 독립 투쟁 등을 전개하던 그는, 이듬해 1929년 3월, 선배 성진회 회원이자 당시의 전남 광주고등농림학교의 농업학과의 두 교사인 전남 광주 광산 송정 학우회 총무위원 임종근(林鍾根)·동회 총무위원 김기주(金基柱) 등의 전남 광주고등농림학교 농업학과 제자들 졸업식에 즈음하여, 송동식 자신이 지난날 1924년 10월에 중퇴한 학교(광주사범학교)의 졸업생 및 재학생 회원 12명과 함께 당시 전남 광산군 송정 읍내 청요리점 《고흥 연빈루》에 모여 아무리 학교 졸업 이후에도 대한제국 독립 촉구 성향 항일 학생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의하고 광주사범학교와 광주고등농림학교라는 두 학교의 졸업생과 재학생간의 모든 단결을 다짐하였다.그후 1929년 6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돌아온 장재성(張載性)이 성진회 해체 이후 분산적으로 지속되었던 항일 학생 운동에 대하여 조직적 활동을 주장하면서 송동식 그는, 강달모(姜達模)·김상환(金相奐)·김보섭(金普燮)·조길룡(曺吉龍) 등 전남 광주 고을 내의 각 학교 학생 지도자들과 함께 김기권(金基權)의 집에 모여 구체적 활동 방안에 대하여 논의하고 나서 「전남 광주 지역 독서회 중앙본부」를 조직하였다. 이때 부서 및 결의 사항도 정하였는데, 결국 여기서 송동식 그는 김순복(金順福)과 함께 조직교양부 부장대우 겸 조직책임위원으로 선임되어 독서회 클럽의 편성 및 연구방법의 지도를 맡았다. 한편 전남 광주 지역 독서회 동 중앙 본부는 독서회원의 친목 단결 및 재정활동 지원을 위해 학생소비조합을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이것에 아울러 조직 확대를 위해 하부 조직으로서 전남 광주 고을 내에 있는 각 학교에 각기각기로 독서회를 조직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전남 광주 지역 독서회 중앙본부 총무기획실 실장 장재성(張載性) 및 동본부 임원 학생들과 수수 차례에 걸쳐 소비조합 설치에 대하여 의논하고 동년(1929년)의 9월에 동 조합을 조직하였다.
또한 이미 동년(1929년)의 7월에 강달모·박노기(朴魯淇) 등 광주사범학교 졸업생 15여명과 함께 수피아여자고등보통학교 뒷산에 모여 비밀결사 조직을 협의하고 동년(1929년)의 9월에 전남 광주형무소 뒷산에 또다시 모여, 〔전남 지역 소재 보통학교 졸업 동문 총련합 독서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송동식 그는 동회의 회장 겸 대표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한편 동년(1929년)의 7월에 그는 광주사범학교 졸업 동문 독서회 사무위원 임종근(林鍾根)으로부터 독서회 회원의 항일 독립 운동 정신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찍어낸 인쇄물을 모두 교부받아 이를 독서회 회원들에게 배포하며 항일 독립 운동 의식을 고취하였다.
2. 5.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참여와 투옥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붙잡혔다.대한제국 전남 장성(長城)의 장성면의 면내에서 '''송경철'''(宋景喆)이라는 아명(兒名)으로 출생한 그는, 1911년 5세 때에 '''송동식'''(宋東植)으로 개명(改名)하였고, 1920년 3월에, 전남장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1924년 3월에 전남목포고등상업학교 1학년 수료와 함께 전퇴를 하고 나서, 전남광주사범학교의 보통사범학과 2학년에 편입학한 그는, 같은해 1924년 10월에 결국, 전남의 광주사범학교의 보통사범학과 2학년 2학기를 중퇴(자퇴)하였는데, 이후로도 전남 광주 광산 송정 지역의 중심적인, 대한제국 자국 광복 및 대한제국 회복 등을 촉구하는 정통 민족 운동 성향의 항일 학생 비밀 결사 단체였던 《전남 광주 광산 송정 지역 성진회(醒進會)》가 회원들 중에서도 이반자(이단 분자)가 생겨, 1927년 3월에 해체되었는데 그후에도 그 주동 학생들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들은 대한제국 항일 독립 운동의 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기 위해 1928년 10월, 김시성(金時成)의 하숙집에 모여 성진회의 사업을 계속 수행하기로 결의하고 각 학교 접수 관련 단위로 활동을 분담하였다. 이미 4년 전(1924년)의 10월에 광주사범학교를 중퇴(2학년 당시 자퇴)까지 한 송동식 그는, 일단 전남 광주 광산 송정 지역 성진회 관련 사업으로 김시성과 함께 송동식 자신이 지난날에 중퇴한 광주사범학교를 접수할 것을, 그리고 김몽길(金夢吉)은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접수할 것을, 마지막으로 조길룡(曺吉龍)·유치오(兪致五)는 광주고등농림학교를 접수할 것을 각각 책임으로써 맡았다. 결국 이렇게 송동식 자신이 이전에 자퇴한 학교(광주사범학교)를 중심으로써 대한제국 항일 독립 투쟁 등을 전개하던 그는, 이듬해 1929년 3월, 선배 성진회 회원이자 당시의 전남 광주고등농림학교의 농업학과의 두 교사인 전남 광주 광산 송정 학우회 총무위원 임종근(林鍾根)·동회 총무위원 김기주(金基柱) 등의 전남 광주고등농림학교 농업학과 제자들 졸업식에 즈음하여, 송동식 자신이 지난날 1924년 10월에 중퇴한 학교(광주사범학교)의 졸업생 및 재학생 회원 12명과 함께 당시 전남 광산군 송정 읍내 청요리점 《고흥 연빈루》에 모여 아무리 학교 졸업 이후에도 대한제국 독립 촉구 성향 항일 학생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의하고 광주사범학교와 광주고등농림학교라는 두 학교의 졸업생과 재학생간의 모든 단결을 다짐하였다. 그후 1929년 6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돌아온 장재성(張載性)이 성진회 해체 이후 분산적으로 지속되었던 항일 학생 운동에 대하여 조직적 활동을 주장하면서 송동식 그는, 강달모(姜達模)·김상환(金相奐)·김보섭(金普燮)·조길룡(曺吉龍) 등 전남 광주 고을 내의 각 학교 학생 지도자들과 함께 김기권(金基權)의 집에 모여 구체적 활동 방안에 대하여 논의하고 나서 「전남 광주 지역 독서회 중앙본부」를 조직하였다. 이때 부서 및 결의 사항도 정하였는데, 결국 여기서 송동식 그는 김순복(金順福)과 함께 조직교양부 부장대우 겸 조직책임위원으로 선임되어 독서회 클럽의 편성 및 연구방법의 지도를 맡았다. 한편 전남 광주 지역 독서회 동 중앙 본부는 독서회원의 친목 단결 및 재정활동 지원을 위해 학생소비조합을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이것에 아울러 조직 확대를 위해 하부 조직으로서 전남 광주 고을 내에 있는 각 학교에 각기각기로 독서회를 조직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전남 광주 지역 독서회 중앙본부 총무기획실 실장 장재성(張載性) 및 동본부 임원 학생들과 수수 차례에 걸쳐 소비조합 설치에 대하여 의논하고 동년(1929년)의 9월에 동 조합을 조직하였다.
또한 이미 동년(1929년)의 7월에 강달모·박노기(朴魯淇) 등 광주사범학교 졸업생 15여명과 함께 수피아여자고등보통학교 뒷산에 모여 비밀결사 조직을 협의하고 동년(1929년)의 9월에 전남 광주형무소 뒷산에 또다시 모여, 〔전남 지역 소재 보통학교 졸업 동문 총련합 독서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송동식 그는 동회의 회장 겸 대표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한편 동년(1929년)의 7월에 그는 광주사범학교 졸업 동문 독서회 사무위원 임종근(林鍾根)으로부터 독서회 회원의 항일 독립 운동 정신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찍어낸 인쇄물을 모두 교부받아 이를 독서회 회원들에게 배포하며 항일 독립 운동 의식을 고취하였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 관련 주도 및 기획을 방조한 이이자 요주자로 낙인찍힘으로 인하여 체포되고, 전남 지역 소재 보통학교 졸업 동문 총련합 독서회 사무위원 임종근과 동회 총무위원 김기주는 둘 모두 광주고등농림학교 농업학과 교사 직함에서 집단 해직되었으며, 이토록 송동식 그 또한, 독서회 관련으로 1930년 10월에 전남 광주지법(전남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결국 항소하여 1931년 6월, 경북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고, 1931년 11월 3일, 만기 출감하였다.
3. 서훈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고자 1968년 3월 1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을 수여하였고, 1990년 8월 15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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