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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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병조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1926년 임시의정원 부의장과 의장을 역임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김구와 대립하며, 임시정부 내에서 민족유일당 운동과 관련된 갈등을 겪었으나, 김구, 차리석과 함께 임시정부 사수를 주장했다. 1939년과 1940년에도 국무위원으로 재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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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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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송병조 |
명칭 | 국무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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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대수 | 13 |
취임일 | 1933년 3월 6일 |
퇴임일 | 1933년 6월 24일 |
국적 | 대한민국 임시정부 |
출생일 | 1877년 12월 23일 |
출생지 | 조선 평안도 용천 |
사망일 | 1942년 2월 25일 (64세) |
사망지 | 중화민국 |
전임 | 이동녕 |
전임 대수 | 12 |
후임 | 송병조 |
후임 대수 | 14 |
국무령 (2번째 임기) | |
국가2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대수2 | 14 |
명칭2 | 국무령 |
취임일2 | 1933년 6월 24일 |
퇴임일2 | 1933년 10월 |
전임2 | 송병조 |
전임 대수2 | 14 |
후임2 | 이동녕 |
후임 대수2 | 15 |
2. 생애
송병조는 1926년 임시의정원 부의장 및 의장에 선출되었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겸직하며 활동했다.[1] 1935년 임정 국무위원들이 민족유일당 운동을 위해 대거 사퇴했을 때, 그는 김구, 차리석과 함께 임시정부 사수를 주장했다. 1939년과 1940년에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재선되었다.[1]
2. 1. 임시정부 활동 초기
1926년 2월 18일 여운형의 사퇴로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고, 1926년 8월 18일에는 최창식(崔昌植)의 후임으로 임시의정원 의장이 되었다.[1] 같은 날 임시정부 국무위원에도 선출되어 의정원 의장과 임정 국무위원직을 겸직하였다.[1]김구와 대립하던 송병조는 평소 김구 일파의 움직임을 알지 못했고, 김구 역시 송병조의 움직임을 알지 못했다.[1] 송병조 일파는 김구가 아나키스트들을 사주하여 테러를 일으킨 것으로 파악하였다.[1]
2. 2. 김구와의 갈등
평소 김구와 사이가 좋지 않던 그는 김구 일파의 움직임을 알지 못했고, 김구 역시 그의 움직임을 서로 알지 못했다. 김구와 대립하고 있던 송병조 일파는 김구가 아나키스트들을 사주하여 테러를 자행하게 한 것으로 파악하였다.[1]2. 3. 임시정부 유지 노력
1935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중 양기탁, 유동열,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등이 민족유일당 운동을 하겠다며 국무위원직을 사직하고 통일당에 참가하여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유지하기가 매우 힘든 상황에 놓였다.[1] 그러나 송병조는 김구, 차리석과 함께 임시정부 사수를 주장하며 임시정부를 유지하였다.2. 4. 충칭 임시정부 시기
1939년 10월 치장에서 열린 국무위원 선거에서 차이석, 이동녕, 김구, 홍진, 조완구, 조소앙, 지청천 등과 함께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다시 선출되었다.[1]1940년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동하고, 제4차 개헌을 통해 주석지도체제로 변경될 때도 국무위원으로 재선출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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