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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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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청천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간부 양성에 힘썼으며, 한국독립군 총사령관과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광복 후에는 대동청년단을 창설하고 제헌 국회의원, 국무위원,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1957년 사망 후 건국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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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지청천
한글지청천
한자池靑天
가타카나チ・チョンチョン
히라가나ち・せいてん
로마자 표기Ji Cheong-cheon
다른 이름지대형 (본명), 백산 (아호), 이청천 (일명)
출생일1888년 3월 7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북부 진장방 삼청동계 30번지
사망일1957년 1월 15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본관충주 지씨
종교유교 (성리학)
국적대한민국
웹사이트지청천(독립유공자 공훈록)
가족 관계
배우자윤용자
자녀지달수(장남), 지복영(딸), 지정계(차남)
부모지재선(부), 경주 이씨 부인(모)
형제누나 2명
친인척재종숙부 지운영(시인 겸 사진가), 재종숙부 지석영(의학자 겸 국어학자), 외손자 이준식(대학 교수)
군사 경력
복무 기간1909년 ~ 1946년
소속광복군
계급광복군 총사령관
정치 경력
직책무임소장관
임기1948년 7월 21일 ~ 1948년 9월 27일
대통령이승만
총리이범석
후임이윤영
정당무소속
주요 경력광복군 총사령관, 독립군 총사령관, 한중연합군 총참모장, 재선(제헌,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국회 외무국방위원장
서훈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기타
1945년 광복 직후의 지청천 장군
광복군 성립식에서의 지청천

2. 생애

서울(옛 한성)에서 태어나 육군무관학교에 재학 중 학교가 폐교되자 일본으로 유학,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1914년 제26기로 졸업하고 일본 제국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1]

일본 육군 중위로 복무하던 중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며 독립군 간부 양성에 힘썼다.[1] 이로 인해 일본 육군 중위 직위를 박탈당했다.[4] 1920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서로군정서 교관을 지냈으며, 같은 해 청산리 전투 이후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여단장을 맡았다.[1]

1921년 연해주 자유시(스보보드니) 참변으로 군단이 와해되고 잠시 소련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어 만주로 돌아왔다.[1] 이후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1925년)[1], 한국독립당 군사위원장(1930년)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독립군을 창설하여 총사령관으로서 만주에서 한중연합작전을 이끌었다.[1]

1933년경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고, 1940년 충칭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시까지 항일 무장 투쟁을 지휘했다.[1] 전쟁 말기에는 미국 전략사무국(OSS)과 연계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으나,[5]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되지는 못했다.[1]

1946년 귀국하여 1947년 대동청년단을 창설하고 단장을 맡는 등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무임소 장관,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제헌 국회의원 및 제2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다.[1]

1957년 사망하였으며, 사후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1]

2. 1. 생애 초기

육군무관학교에 재학하던 중 학교가 폐교되자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의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1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6기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일본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되었다.[1]

2. 1. 1. 출생과 가계 배경

조선 한성부 진장방 삼청동계(지금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30번지에서 아버지 지재선(池在善)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아명(兒名)은 수봉(壽鳳), 관명(冠名)은 석규(錫奎)였다. 아버지 지재선은 충주 지씨 시조 지경(池鏡)의 31대손이다. 그의 가계는 고려 시대 문하찬성사를 지낸 지용기(池湧奇)의 후손이며, 조선 중기 이괄의 난을 진압하고 병자호란 때 신계(新溪)에서 청나라 군대와 싸우다 전사한 무관 지계최(池繼催) 등을 배출한 집안이었다.

지청천이 출생할 무렵인 1880년대 후반은 서양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던 시기였다. 일본, 청조(淸朝),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열강의 조선 침략 시도가 이어졌고, 1885년에는 영국이 불법적으로 거문도를 점령하는 사건(거문도 사건)도 발생하였다. 국내적으로는 갑신정변 이후 개화파와 외세 침입을 물리치려는 반외세 세력 및 봉건 세력 간의 대립이 첨예화되었다. 1882년에는 반외세 운동의 지도자였던 흥선대원군청나라 군대에 납치되어 중국 허베이성 보정부(保定府)에 유폐되기도 하였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봉건 사회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군대 내 부패를 계기로 임오군란이 발생하여 국방력 약화 문제가 드러나기도 하였다.

2. 1. 2. 유년기

5세 때 아버지가 장중풍(腸中風)으로 사망했으며,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 경주 이씨는 외아들인 지청천을 엄격하게 키웠으며, 어려운 경제적 상황 속에서도 지, 덕, 체를 아우르는 교육에 힘썼다.

2. 2. 무관학교 입교와 일본 유학

구한말인 1906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0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했다. 당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는 1907년 여름 군대해산으로 인해 폐교 위기를 넘기고 축소된 상태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입교 절차가 매우 까다로워 유력 인사의 보증이나 추천이 필요했다. 지청천은 모친이 집안 사람을 통해 엄 귀비에게 부탁하여 가까스로 입교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7]

그러나 이듬해인 1909년 8월, 지청천이 2학년일 때 통감부의 압력으로 군부가 폐지되면서 무관학교 역시 폐교 처분을 받았다. 이때 일본 측은 재학 중이던 1, 2학년 생도 50여 명을 일본 도쿄의 陸軍中央幼年学校|육군중앙유년학교일본어로 유학 보내 위탁 교육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지청천은 동기생 및 후배들과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이때까지는 본명인 지대형(池大亨)을 사용했다.

유학 도중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일본 육군사관학교 보병과로 편입되었고, 1914년 26기생으로 졸업하여 일본 육군 보병 少尉|소위일본어로 임관했다.[1] 이후 中尉|중위일본어로 진급하여 복무하던 중,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 교관(교성대장)으로 부임하여 독립군 간부 양성에 힘썼다. 망명할 당시 일본군의 兵書|병서일본어(전술 교범)와 군용 지도를 가지고 나왔다고 전해진다. 그는 당시 독립군 내에서 유일하게 정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인물이었기에, 그의 존재는 독립군에게 매우 중요했다. 신흥무관학교에서는 일본 육사 23기 선배인 김광서(金擎天)와 함께 활동하며 독립군 전력 강화에 기여했다.[1] 그의 망명으로 인해 일본 정부는 육군 보병 중위직을 박탈하고 従七位를 반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4]

2. 3. 결혼과 개명

어머니의 명에 따라 파평 윤씨 집안의 윤용자(尹容慈)와 혼인하였다. 결혼 첫날 밤, 지청천은 아내에게 자신이 이미 군인의 길을 선택하여 나라와 겨레를 지키기로 결심했기에 평안한 삶을 함께 누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므로, 자신과 뜻을 같이 한다면 고생을 감수하고 늙으신 어머니를 잘 모셔주며, 만약 자녀가 생긴다면 잘 교육시켜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만약 이것이 무리한 요구라면 시집오지 않아도 좋다고 덧붙이며 아내의 의사를 물었다. 18세의 신부 윤용자는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했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남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이후 지청천은 일제의 추적을 피하고 독립운동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기존의 이름 '석규(錫奎)' 대신 '청천(靑天)'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또한 성씨인 '지(池)'씨는 흔하지 않아 쉽게 신분이 노출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이(李)'씨로 바꾸어 '이청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일설에 따르면, 만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조선총독부 경찰에게 검문당했을 때 얼떨결에 '이청천'이라고 답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동지인 김광서(金光瑞) 역시 이때 '응천(應天)'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2. 4. 독립운동

일본 육군 중위로 복무하던 중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1] 만주에서는 신흥무관학교서로군정서 등에서 교관으로 활동하며 독립군 간부 양성에 힘썼고, 이로 인해 일본 육군 중위 직위를 박탈당했다.[1][4]

1920년 청산리 전투 이후 대한독립군단 조직에 참여하여 여단장을 맡았으나,[1]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부대가 와해되는 시련을 겪었다.[1] 이후 만주로 돌아와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1925년)[1], 한국독립당 군사위원장(1930년)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독립군을 창설하여 총사령관으로서 만주에서 한중연합작전을 이끌었다.[1]

1933년경 중국 관내로 활동 무대를 옮겨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9] 임시정부 의정원 활동을 거쳐 1940년 충칭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항일 무장 투쟁의 최전선에 섰다.[1]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미국 전략사무국(OSS)과 연계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으나,[5]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되지는 못했다.[1]

2. 4. 1. 신흥무관학교와 서로군정서 활동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해 독립군 간부 양성에 힘썼다.[1] 당시 일본 육군사관학교 23기 선배인 김경천과 함께 일본 육사를 졸업한 그의 존재는 독립군에게 큰 힘이 되었다.[1] 이 일로 일본 육군 보병 중위 직위를 박탈당하고 종칠위(従七位) 서훈을 반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4]

1920년에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쳐 만주 서로군정서의 초빙을 받아 간부 겸 교관으로 활동했다.[1] 같은 해 가을,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이 큰 승리를 거두자 일본군은 대대적인 보복 작전을 전개했다. 이를 피해 신흥무관학교를 폐교하고 병력을 이끌고 간도 밀산(密山) 방면으로 이동했다.[1] 그곳에서 서일, 홍범도, 김규식, 김좌진 등 여러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흩어진 독립군 부대들을 모아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여단장에 취임했다.[1][8]

1921년 대한독립군단은 소련의 지원을 기대하며 연해주의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이동했으나, 6월 자유시 참변(흑하사변)이 발생하여 소련 적군(赤軍)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때 지청천도 잠시 포로가 되었으나 이후 석방되었다.[1] 참변 이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오하묵 등과 함께 '''고려혁명군'''을 결성하고(1921년 8월)[8], 같은 해 10월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독립군 재건을 모색했다.[8] (이 고려혁명군은 이후 김규식, 이범석 등이 길림성에서 만든 고려혁명군(1923년 5월)과는 다른 조직이다.[8])

1922년 4월경, 고려혁명군관학교의 교육 방침을 둘러싸고 소련 당국과 갈등을 빚어 체포되기도 했으나,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어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1][8] 만주로 돌아온 후 신민부, 대한의용군사회, 대한국민단, 대한통군부 등 여러 항일 무장 단체 결성에 기여했으며[1], 1925년에는 양기탁, 오동진 등과 함께 만주 지역의 주요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를 조직하고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에 취임하여 독립군 통합과 무장 투쟁을 이끌었다.[1]

2. 4. 2. 대한독립군단과 자유시 참변

1920년 청산리 대첩 이후, 일본군이 재만 독립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과 보복을 전개하자, 지청천은 서로군정서 병력을 이끌고 다른 독립군 부대들과 함께 간도를 거쳐 밀산(密山)으로 이동했다.[1] 그곳에서 서일, 홍범도, 김규식, 김좌진 등 여러 독립운동 단체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군 부대들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여단장에 취임했다.[1]

대한독립군단은 코민테른의 지원 약속을 받고 연해주의 자유시(스보보드니, Свобо́дный|스보보드니rus)로 이동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독립군 부대의 지휘권을 둘러싼 내부 갈등과 소련 적군의 개입으로 자유시 참변(흑하사변)이 발생했다.[1] 이 과정에서 대한독립군단은 소련 적군에 의해 강제로 무장 해제되었고 많은 독립군이 희생되었다. 지청천 역시 자유시에서 적군에게 체포되어 포로가 되었으나, 이후 석방되어 만주로 돌아왔다.[1]

자유시 참변 이후 지청천은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오하묵 등과 함께 1921년 8월 고려혁명군을 결성했다. (이는 김규식, 이범석 등이 1923년 5월 길림성에서 만든 고려혁명군과는 다른 조직이다.) 같은 해 10월에는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독립군 간부 양성에 힘썼다. 하지만 1922년 4월경, 군관학교 교육 방침을 둘러싸고 소련 당국과 마찰을 빚어 다시 체포되었다가, 같은 해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2. 4. 3. 정의부, 한국독립당, 한국독립군 활동

1920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쳐 만주로 이동, 서로군정서 간부로 활동했다. 청산리 대첩 이후 일본군의 보복을 피해 병력을 이끌고 서일, 홍범도, 김규식, 김좌진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여단장을 맡았다.[1]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이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오하묵 등과 함께 고려혁명군을 결성하고,[1] 같은 해 10월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22년 4월 소련 당국과의 교육 방침 갈등으로 체포되었으나,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7월 석방되어 만주로 돌아왔다.[1]

이후 여러 항일 무장 단체 결성에 기여했으며, 1925년에는 양기탁, 오동진 등과 함께 '''정의부'''를 조직하여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에 취임했다.[1]

김좌진이 암살된 후인 1930년 7월,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여 당 군사위원장을 맡았고,[1] 동시에 '''한국독립군'''을 별도로 창설하여 총사령관에 취임했다.[8][1] 한국독립군은 만주에서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대전자령 전투, 쌍성보 전투 등 한중연합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8]

1933년 5~6월경, 지청천은 이범석 등 1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중국 본토로 이동했다.[9] 같은 해 후반 김구 세력과 합류하였으나, 1934년에는 이견으로 탈당하고 '''신한독립당'''을 창설했다.[9] 1935년에는 김원봉, 김규식 등이 주도한 '''민족혁명당'''에 참여했으나,[8] 김원봉과의 갈등 끝에 1937년 4월 탈당하고 '''조선혁명당'''을 창당했다.[8]

2. 4. 4.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활동

193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군사작전 준비를 맡았다. 1940년 중일 전쟁의 여파로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전하자 지청천도 함께 이동하였다. 그해 9월 17일 충칭에서 거행된 광복군 창설식에 참여하였고, 곧이어 광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항일전을 이끌었다. 이후 영국 측의 제안에 따라 광복군 병력을 인도·버마 전선에 파견하는 공작 계획을 승인하기도 했다.

1942년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이 되었으나, 상당 부분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광복군 제2, 3지대 역시 각기 독자적인 세력 확장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어, 총사령관인 지청천이 전체 병력을 실질적으로 통솔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1944년에는 중국군에 있다가 광복군으로 편입한 장준하 등으로부터 김원봉이 일본군 출신 한인 병사들 사이에서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장준하는 김원봉의 계략과 그 대리인 역할을 한 이소민 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지청천에게 전달했다.[10] 이후 지청천은 직접 광복군 부대를 사열하며 내부 결속을 다지려 노력했다.

광복군 일부 대원들의 군기 문란 행위가 계속되자 김원봉은 이를 이용하려 했다.[11] 특히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 편입된 학도병 부대를 대상으로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 작용을 가했다.[11] 1945년 10월 7일, 지청천이 상하이로 이동했을 때 일본군 출신 학도병 부대가 총사령관인 그의 사열을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장준하 등은 해당 부대 장교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하여 설득(장준하는 이를 '회유작전'이었다고 회고했다[11])에 나섰다. 장준하 등은 김원봉의 계획을 이청천에게 보고하는 한편, 일본군 출신 탈영자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그 대리인 노릇을 했던 책임자 황모와 이소민에 대한 자료를 주어 그들을 불신임시켰다.[11] 설득은 효과가 있었고, 학도병 부대는 지청천의 사열을 받게 되었다.[12]

한편, 1945년 8월 11일에는 미국 전략사무국(OSS)과 연계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던 중, 김구 주석에 의해 국내정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5] 그러나 작전 실행 직전인 8월 15일 일본포츠담 선언 수락을 발표하며 항복함으로써 실제 교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1]

2. 5. 광복 이후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서 항일전을 준비하던 중 1945년 8월 10일 일본포츠담 선언 수락 소식을 접했다. 8월 11일 국내 진공 작전을 위한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5] 일본군과 교전하지 못한 채 광복을 맞이하였다.[1]

1946년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1947년 4월 대동청년단 창설을 시작으로 정치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초대 무임소 장관과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제헌의원, 제2대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1]

1957년 사망하였으며, 사후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1]

2. 5. 1. 귀국과 대동청년단 결성

1947년 4월 22일 김포공항에서 지청천 장군의 귀국을 영접하는 김구, 김규식, 이승만, 프란체스카 도너


1946년 4월 22일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그의 귀국 현장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프란체스카 도너, 이범석 등이 직접 마중 나왔다.

귀국 후 이승만의 권유로 청년 단체 조직에 나섰다. 1946년 9월, 기존의 대동청년단에 26개 청년 단체를 통합하여 우익 성향의 청년 단체인 대동청년단을 확대 개편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이승만은 지청천을 중심으로 한 대동청년단에 족청 계열을 흡수시키기도 했다. 이후 독립촉성국민회 최고위원, 한중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1월부터 정부 수립 방식을 둘러싸고 남북협상론과 단독정부 수립론이 대립하자,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하며 임시정부를 떠나 독립촉성국민회에 합류하였다.

1948년 3월에는 미군정 하에서 좌우 대립 과정 중 포고령 위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두한의 구명을 위해 이범석 등과 함께 존 R.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에게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구명 운동을 벌였다. 같은 해 4월에는 김구·김규식 등이 추진한 남북협상에 참여하지 않고, 신익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였다.

1948년 5월 5.10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성동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6월 1일에는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13] 6월 17일부터는 제헌국회 외교국방분과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2. 5. 2. 정치 활동

1946년 4월 22일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그의 귀국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프란체스카 도너, 이범석 등이 직접 마중나왔다.

귀국 후 이승만의 권고로 청년단체 조직에 나서, 1946년 9월 26개 청년단체를 통합하여 우익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을 확대 개편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이승만은 지청천을 중심으로 한 대동청년단에 족청을 흡수시키기도 했다. 이후 독립촉성국민회 최고위원, 한중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48년 1월부터 정부 수립 방식을 둘러싸고 남북협상론과 단독정부 수립론이 대립하자, 그는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하며 임시정부를 떠나 독립촉성국민회에 입당하였다. 같은 해 3월, 좌우 대립 과정에서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김두한의 감형을 위해 이범석 등과 함께 존 하지에게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구명 운동을 벌였다. 1948년 4월에는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에 참여하지 않고 신익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성동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6월 1일에는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13] 6월 17일부터는 제헌국회 외교국방분과위원으로도 활동했다.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무위원 겸 무임소 장관에 임명되었다.

1949년에는 신익희, 임영신, 윤치영 등과 함께 이승만 지지 기반의 대한국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최고위원으로 활동했으나, 이후 탈당하여 민주국민당으로 옮겨 최고위원 및 대표 최고위원을 지냈다. 1949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이 결성될 때 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14]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서울 성동구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하여 임시 국회에서 외무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국민방위군 설치법, 해안경비법 등의 제정에 기여했다.

1951년 5월 10일 이시영 부통령이 사표를 제출하자 이에 대해 존경과 안타까움을 표하며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의 책임감을 강조했다. 5월 16일 제2대 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섰으나[15] 1차, 2차 지명전에서 각각 2표를 얻는 데 그쳐 낙선했다.

1953년 6월 11일에는 대만과의 동맹 체결을 주장하며, 미국과 같은 강대국에 의존하기보다 약소국들이 연합하여 공산주의에 맞서고 자주적인 생존과 번영을 도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후 자유당에 입당하여 원내대표위원, 중앙당 중앙위원 등을 역임했다. 정치 활동 외에도 대한적십자사 중앙집행위원, 대한군인유가족협회 회장, 대한민국반공통일연맹 최고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2. 6. 사망

1957년 1월 15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성동구 신당동 자택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1월 21일 오전 10시부터 중앙청 야외음악당에서 거행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1]

1995년에는 그가 살았던 터에 지청천장군집터 표석[16]이 설치되었다. 또한, 2018년 12월 10일에는 지청천 일기가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737호로 지정되어 그의 기록이 국가적으로 보존되게 되었다.

3. 가족 관계

(차녀 지복영의 아들)이준식1956년 출생, 대학교수 겸 정치인[17]차남지정계독립운동가, 군인 (대한민국 육군 소위 복무 중 전사)재종숙지운영서화가, 사진가재종숙지석영의사[18]



지복영은 광복군에서 활동하던 항일운동가였고, 아들 지달수, 지정계 역시 항일운동가였다. 귀국 후 지청천은 두 아들 지달수와 지정계를 국방경비대에 입대시켰고, 이후 국방경비대가 국군으로 바뀌면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아들 지정계는 육군 소위로 1948년 여순 반란 사건 때 토벌대로 교전 중 전사했다.

4.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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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선거 종류대수직책선거구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순위결과비고
1948년총선1대국회의원서울 성동구대동청년단41,532 (75.22%)1위당선초선
1950년총선2대국회의원서울 성동구 갑민주국민당10,551 (28.35%)1위당선재선


참조

[1] 웹사이트 지청천(池靑天) https://encykorea.ak[...] 2023-08-13
[2] 뉴스 [독립운동 애국지사, 그들은 달랐다] 가족 독립운동가 https://news.imaeil.[...] 2021-10-29
[3] 웹사이트 [뉴시스아이즈]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 지낸 지청천 전 의원 일가 https://mobile.newsi[...] 2016-12-27
[4] 간행물 官報 1920年1月17日 二七六頁 https://dl.ndl.go.jp[...]
[5] 서적 p.275 2023
[6] 기타
[7] 서적 한국시 시만강좌,47집 이청천 편
[8] 웹사이트 지청천 - Daum 백과사전 http://enc.daum.net/[...]
[9] 서적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10] 서적 장준하전집 1 : 돌베개 세계사 2001
[11] 서적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12] 서적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13] 웹사이트 '헌법기초위원회' - 네이트 백과사전 http://100.nate.com/[...]
[14] 웹사이트 '대한청년단' - 네이트 백과사전 http://100.nate.com/[...]
[15] 서적 한국정치론 오름 2006
[16] 웹사이트 지청천장군집터 표석 위치 https://www.google.c[...]
[17] 뉴스 <지청천 ‘자유일기’> “외조부는 극우 아닌 민족주의자 http://www.seoul.co.[...]
[1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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