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귀비 이르건기오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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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순귀비 이르건기오로씨는 청나라 건륭제의 후궁으로, 1758년에 태어나 1797년에 사망했다. 1776년 궁에 들어가 귀인으로 봉해졌다가 순빈으로 진봉되었으며, 건륭 59년에는 순비가 되었다. 가경제가 즉위한 후 순귀비로 추존되었고, 유릉 비원침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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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귀비 이르건기오로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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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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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순귀비 (循貴妃) |
본관 | 이르건 기오로 (伊爾根覺羅; 출생 시) 아이신 교로 (愛新覺羅; 혼인 후) |
출생 | 건륭 23년 9월 28일 (1758년 10월 29일) |
사망 | 가경 2년 11월 24일 (1798년 1월 10일) |
사망 장소 | 자금성 |
매장지 | 청동릉 유릉 비원침 |
추증 시호 | 순귀비 (循貴妃) |
가계 | |
아버지 | 계림 (桂林), 양광총독 |
배우자 | 건륭제 (1776년 결혼, 1797년 사별) |
자녀 | 없음 |
책봉 | |
초봉 | 귀인 |
이후 | 빈 → 순빈 → 순비 |
2. 생애
건륭 23년 9월 28일에 태어났다.
건륭 41년 (1776년). 재외팔기군 수녀 선발에 뽑혀 궁으로 들어왔다. 원래는 귀인으로 책봉되었다. 이르건기오로씨는 사은절을 올린 뒤, 건륭제가 빈으로 진봉해주자, 다른 사은절을 올리게 된다. 그해 11월 14일에 순빈으로 봉해지고, 순빈의 물품을 받았고, 11월 18일에 입궁하였다. 순(循)이라는 봉호는 만주어로는 「jlungga」에서 따왔고, 온화하다는 뜻을 갖고있다. 그래서 궁중 문서에서는 주륭아빈(珠隆阿嬪)이라고도 기록되어있다.
건륭 44년 (1780년) 10월에 순빈 책봉례를 행했다. 그해 12월 6일, 아버지인 총독 계림이 병사하자, 건륭제는 은 3백냥을 내려 위로하였다. 순빈의 병이 깊었었는데, 순빈의 맥을 보면 간화화(肝火化)가 주요 원인임을 알 수 있다. 그녀의 목 왼쪽 폐병과 기침도 이 때문이다. 비록 태이는 청간양영(清肝養榮), 소간해울제법(疏肝解郁諸法)을 사용했지만, 모두 큰 효과가 없다. 태의가 치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순빈의 몸이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륭 59년 (1794년) 12월, 정식으로 순비 책봉례가 행해졌다.
가경 2년 (1797년) 9월 17일, 순비의 40살 천추경이 행해졌다. 건륭제가 천추에 하사한 물건은, 이미 5월에 하사하였다. 건륭제는 경사방을 불러 건청궁을 총지위하는 등 죄를 스리도록 했다. 그해 11월 24일, 이르건기오로씨는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그 후에 건륭제가 정식으로 귀비로 추증했다는 기록이 있다.《昌瑞山万年统志》, 《清皇室四谱》 등 청궁 문서에는 모두 귀비라고 불렀는데 이유는 알 수 없다.
가경 4년 9월 11일, 귀비의 금관은 유릉비원침에 묻혔다.
건륭 41년(1776년), 후비 선발 면접 시험인 '선수녀'에 합격하여 처음에는 '''귀인'''으로 봉해졌으나, 이후 빈으로 개봉되어 '''순빈'''으로 입궁한다.
건륭 44년 10월에 순빈으로서 정식 책봉을 받지만, 12월에 아버지 계림이 사망하고, 순빈은 간염과 이로 인한 우울증을 앓게 되어, 태의들이 치료에 힘썼으나 순빈의 정신 상태에 문제가 있어 효과를 보지 못했다.
건륭 59년(1794년), '''순비'''로 책봉된다.
가경 2년(1797년), 결핵으로 사망하여 유릉의 비원침에 묻혔다.
건륭제가 공식적으로 순비를 '''순귀비'''로 추증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창서산만년통지》, 《청황실사보》 등의 청대 자료에는 순귀비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2. 1. 초기 생애와 입궁
순귀비 이르건기오로씨는 건륭 23년 9월 28일(1758년 10월 29일)에 태어났다. 아버지 구이린(桂林)은 1778년부터 1780년까지 양광총독을 역임했고, 조부 허녠(鶴年)은 1757년부터 1758년까지 양광총독을 역임했다.건륭 41년(1776년), 재외팔기군 수녀 선발에 뽑혀 입궁하여 귀인으로 책봉되었다가 그해 11월 14일에 순빈으로 봉해졌다. '순(循)'이라는 봉호는 만주어로 'jlungga'에서 따온 것으로, 온화하다는 뜻이다. 1776년 12월 28일, 자금성에 들어가 건륭제로부터 "순빈"의 작위를 받았다.
건륭 44년(1780년) 10월, 순빈 책봉례를 행했다. 그해 12월 6일, 아버지 총독 계림이 병사하자 건륭제는 은 3백냥을 내려 위로하였다. 순빈은 간화화(肝火化)가 주요 원인인 병을 앓고 있었는데, 목 왼쪽 폐병과 기침도 이 때문이었다. 태의가 치료에 힘썼으나, 순빈의 몸이 좋지 않아 큰 효과가 없었다.
건륭 59년(1794년) 12월, 정식으로 순비 책봉례가 행해졌다. 1794년 12월 또는 1795년 1월에 "순비"로 승격되었다.
2. 2. 순빈 시절
건륭 41년 (1776년), 재외팔기군 수녀 선발에 뽑혀 궁으로 들어왔다. 이르건기오로씨는 귀인으로 책봉되었다가 건륭제의 명으로 빈으로 진봉되었다. 그해 11월 14일에 순빈으로 봉해지고, 순빈의 물품을 받았고, 11월 18일에 입궁하였다. 순(循)이라는 봉호는 만주어로는 「jlungga」에서 따왔고, 온화하다는 뜻을 갖고있다. 그래서 궁중 문서에서는 주륭아빈(珠隆阿嬪)이라고도 기록되어있다.건륭 44년 (1780년) 10월에 순빈 책봉례를 행했다. 그해 12월 6일, 아버지인 총독 계림이 병사하자, 건륭제는 은 3백냥을 내려 위로하였다. 순빈은 병이 깊었는데, 태의가 진단한 바로는 간화화(肝火化)가 주요 원인이었다. 그녀의 목 왼쪽 폐병과 기침도 이 때문이었다. 태의는 청간양영(清肝養榮), 소간해울제법(疏肝解郁諸法)을 사용했지만, 순빈의 몸이 너무 좋지 않아 큰 효과가 없었다.
2. 3. 순비 진봉과 사망
건륭 41년(1776년), 이르건기오로씨는 재외팔기군 수녀 선발에 뽑혀 귀인으로 책봉되었으나, 곧 빈으로 진봉되어 사은절을 올렸다. 그해 11월 14일에 순빈(循嬪)으로 봉해지고, 순빈의 물품을 받았으며 11월 18일에 입궁하였다. 순(循)이라는 봉호는 만주어 「jlungga」에서 따온 것으로, 온화하다는 뜻이며, 궁중 문서에는 주륭아빈(珠隆阿嬪)이라고도 기록되어있다.건륭 44년(1780년) 10월, 순빈 책봉례가 거행되었다. 같은 해 12월 6일, 아버지인 총독 계림이 병사하자 건륭제는 은 3백냥을 내려 위로하였다. 순빈은 간화화(肝火化)가 주요 원인인 병을 앓고 있었는데, 목 왼쪽 폐병과 기침도 이 때문이었다. 태의들이 청간양영(清肝養榮), 소간해울제법(疏肝解郁諸法)을 사용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건륭 59년 (1794년) 12월, 정식으로 순비(循妃) 책봉례가 행해졌다.
가경 2년 (1797년) 9월 17일, 순비의 40살 천추경이 행해졌고, 건륭제가 하사한 물건은 이미 5월에 내려졌다. 그해 11월 24일, 이르건기오로씨는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이후 건륭제가 정식으로 귀비로 추증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창서산만년통지(昌瑞山万年统志)》, 《청황실사보(清皇室四谱)》 등 청궁 문서에는 모두 귀비로 불렀다.
가경 4년 9월 11일, 귀비의 금관은 유릉비원침에 묻혔다.
2. 4. 사후
가경 2년(1797년) 11월 24일, 이르건기오로씨는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그 후에 건륭제가 정식으로 귀비로 추증했다는 기록이 없다. 《창서산만년통지》, 《청황실사보》 등 청궁 문서에는 모두 귀비라고 불렀는데 이유는 알 수 없다.가경 4년 9월 11일, 귀비의 금관은 유릉비원침에 묻혔다. 순귀비 이르건 기오로씨는 가경제 치세 중인 1798년 1월 10일에 사망하였다. 당시 그는 건륭제의 15번째 아들이었다. 가경제는 사후에 그녀를 "순귀비"로 추존하고 귀비에 걸맞은 장례를 치르게 했다.
3. 가족 관계
순귀비의 가문은 아쿠리 지방에 있었는데, 후궁 책문을 따라 '율자명가(毓自名家)'라고 하였다.
이름 | 배우자 | 비고 | |
---|---|---|---|
9대조 | 호성액 | 현손둔은 호균교, 4대손 두카스는 박사, 5대손 하이세이는 호령정, 만도 공부상서, 콰주, 6대손 예주는 호군교, 동태는 전임낭중, 7대손 타뉴는 좌령, 명보는 원외랑을 역임하였다. | |
증조부 | 춘산 | 호성액의 6대손으로, 강희 51년 진사, 한림원 서길사, 내각학사 겸 예부시랑, 좌령을 거쳐 성경 병부시랑을 역임하였다. | |
조부 | 학년 | 건륭 원년 진사에 합격, 서길사로 뽑혔고, 좌령, 내각학사, 광동 순무, 산동 순무, 양광총독 등을 지냈으며, 건륭 22년에 사망. 태자 태보, 병부상서계를 증여하고 현량사에 입사하였다. | |
부 | 계림 | 일찍이 곡식 출신으로, 산시성 안찰사, 호부시랑, 사천총독을 지냈다. 군대에서 매일 술을 마시고 즐기다가 청나라 군대의 전손이 되어 적수이려를 당했다. 건륭 38년 7월, 삼등 시위계급을 받고, 군대에 명령을 받들어 군량미 수송을 감독, 건륭 40년, 일등 시위대를 맡겼다가, 사천제독에게 서임하고, 다시 양광으로 전임되어 병졸하였다. | |
고모 | 선봉 참령 종실 선록의 적복진 | 고퇴 5품관 말이숭아의 장남, 화석혜헌간친왕 푸라타의 현손. | |
자매 | 게하라샤르의 옥경지의 계처 | 협판대학사 린닝의 장남. |
순귀비의 본명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4. 작위
이르건 기오 씨 부인은 1758년 10월 29일에 입궁하였다.[1] 1776년 12월 28일 제5계급 후궁인 순빈(循嬪)으로 책봉되었으며,[1] 이후 제6계급 후궁인 귀인(貴人)으로 강등되었다가 1779년 11월 14일 다시 순빈으로 책봉되었다.[2] 1794년 12월 또는 1795년 1월, 제4계급 후궁인 순비(循妃)로 진봉되었다.[3] 가경제 즉위 후인 1799년 10월 9일, 제3계급 후궁인 '''순귀비'''(循貴妃)로 추존되었다.[4]
참조
[1]
문서
乾隆四十一年 十一月 十八日
[2]
문서
乾隆四十四年 十月 七日
[3]
문서
乾隆五十九年 十二月
[4]
문서
嘉庆四年 九月 十一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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