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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렌스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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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몰렌스크 전쟁은 1632년부터 1634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러시아 차르국 사이에서 벌어진 분쟁이다.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의 사망으로 인한 연방의 약세를 틈타 러시아가 스몰렌스크를 탈환하려 하면서 시작되었다. 러시아군은 스몰렌스크를 포위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반격으로 인해 1634년 폴랴노프카 조약을 통해 전쟁이 종결되었다.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고, 폴란드는 러시아 차르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이 전쟁은 양국 모두에게 서유럽식 군사 전술의 도입을 촉진했으며, 폴란드의 승리로 끝나 17세기 초부터 이어진 주변국과의 전쟁을 마무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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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렌스크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스몰렌스크 현
스몰렌스크 현 (붉은색으로 표시된 분쟁 지역)
분쟁 명칭스몰렌스크 전쟁
시기1632년 가을 – 1634년 봄
장소스몰렌스크 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결과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승리 (폴랴노프카 조약)
교전 세력1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교전 세력2자포로제 코사크
교전 세력3러시아 차르국
지휘관1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지휘관2크시슈토프 라지비우
지휘관3미하일 셰인
병력130,000–35,000명
병력1 상세후사르 3,120명, 코사크 기병 260명, 서구 기병 1,700명, 서구 보병 10,500명, 용기병 1,040명, 폴란드 보병 2,200명, 자포로제 코사크 보병 수천 명
병력223,961명
사상자1알 수 없음
사상자2알 수 없음
영토 변화러시아가 스몰렌스크 탈환에 실패함. 러시아는 세르페이스크를 받음.
관련 전투
전투 목록도로고부시
푸티블
폴로츠크
스몰렌스크
벨라야

2. 배경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가 1632년에 사망하면서 동유럽의 정세는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연방의 귀족(슐라흐타)들은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를 새 국왕으로 빠르게 선출했지만, 주변 국가들은 이 기회를 틈타 연방의 약화를 노렸다.

스웨덴의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루스 차르국과 오스만 제국에 사절을 보내 연방을 적대시하는 군사 동맹을 제안했다.[5] 그러나 러시아는 대동란 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국력을 회복한 상황에서, 데울리노 조약으로 연방에 빼앗긴 스몰렌스크를 되찾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스몰렌스크는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양국 간 분쟁의 핵심 지역이었다.

당시 러시아 차르의 아버지이자 총주교였던 필라레트는 궁정 내 반(反) 폴란드 파벌을 이끌며 스몰렌스크 수복을 강력하게 주장했다.[8][35] 젬스키 소보르(러시아 의회) 또한 폴란드에 대한 복수와 영토 회복을 요구하며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켰다.[36]

한편, 연방은 전쟁 준비가 미흡했다. 1631년 국왕 상비군은 3,000명 정도였고, 스몰렌스크 수비대는 500명에 불과했다. 국경 수비병력은 대부분 직업 군인이 아닌 100~200명 수준의 지역 자원병이었다.[6]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러시아는 스몰렌스크 수복을 위한 단독적인 군사 행동을 결정했고, 이는 결국 스몰렌스크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2. 1.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위 계승 분쟁

1632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가 사망했다. 연방의 귀족 계급(슐라흐타)은 곧 지그문트 3세의 장남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를 새 국왕으로 선출했으나, 주변국들은 연방이 약화될 것을 기대하며 선거가 장기화되기를 바랐다.[5] 특히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루스 차르국과 오스만 제국에 사절을 보내 연방에 대항하는 군사 동맹 결성을 제안했다.[5]

당시 연방은 전쟁 준비가 부족했다. 1631년 국왕 상비군은 3,000명 정도였고, 스몰렌스크 수비대는 500명에 불과했다. 국경 수비병력은 대부분 직업 군인이 아닌 100~200명 정도의 지역 자원병이었다.[6] 세임(연방 의회)은 1632년 봄 4,500명의 병사를 고용했고, 1632년 여름까지 스몰렌스크 지역의 보이보드(지방 장관)였던 사무엘 드루츠키-소콜린스키는 총동원령으로 500명의 지역 지원병과 2,500명의 상비군 및 코사크를 모았다.[6] 5월 세나트(연방 원로원)는 군대 규모 확대를 승인했으나, 리투아니아 대헤트만(군사령관) 레프 사피에하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야전헤트만 크시슈토프 라지비우는 병사 2,000명을 추가로 증강했다.[7]

한편, 대동란 시대의 혼란에서 회복한 루스 차르국은 연방이 국왕 사망으로 약화되었다고 판단, 데울리노 조약으로 연방에 할양한 스몰렌스크를 되찾기 위해 단독으로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5] 이 전쟁의 주창자는 차르의 아버지인 필라레트 총주교였고,[8] 총대주교는 궁정 내 반(反) 폴란드 파벌의 지도자였다.[35] 젬스키 소보르(러시아 의회)는 잃어버린 영토 회복을 외치며 러시아군을 서쪽으로 진군시켰다.[36]

2. 2. 러시아 차르국의 스몰렌스크 수복 야욕

러시아는 대동란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회복하면서, 데울리노 조약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빼앗겼던 스몰렌스크 지역 수복을 목표로 삼았다.[5] 이 지역은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양국 간 분쟁의 중심지였다.[35]

당시 차르의 아버지이자 총주교였던 필라레트는 궁정 내 반(反) 폴란드 파벌을 이끌며 스몰렌스크 수복을 강력히 주장했다.[8][35] 젬스키 소보르(러시아 의회) 역시 폴란드에 대한 복수와 영토 회복을 요구하며 전쟁 분위기를 조성했다.[36]

2. 3. 주변국들의 개입 시도

1632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가 사망하자, 연방의 귀족 (슐라흐타)들은 그의 아들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를 새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주변국들은 연방의 약화를 기대하며 선거 과정이 길어지기를 바랐다.[5] 특히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루스 차르국과 오스만 제국에 사절을 보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대항하는 군사 동맹을 제안했다.[5] 이는 당시 유럽의 종교적, 정치적 갈등과 맞물려 복잡한 국제 관계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3. 교전

미하일 보리소비치 셰인이 이끄는 러시아군은 1632년 10월 초 리투아니아 국경을 넘어 스몰렌스크로 진격하며 전쟁을 시작했다.[5][7][8][9] 셰인은 1609년-1611년 스몰렌스크 공성전에서 도시를 방어했던 경험이 있었다. 러시아군은 진격하면서 여러 도시와 성을 함락시켰고, 10월 28일 도로고부시를 점령한 후 스몰렌스크를 포위했다.[5][7][8][9]

러시아군의 규모는 23,961명에서 최대 34,500명까지 다양하게 추산되며, 160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스트렐치(streltsy)같은 전통적인 머스킷 총(musket) 부대 뿐만 아니라, 서유럽상비군, 드라군(dragoons), 라이터(reiters) 등으로 편성된 14,000명에서 17,000명 규모의 8개 연대를 포함하여 이전보다 상당히 현대화된 군대였다.

3. 1. 러시아군의 초기 공세

미하일 보리소비치 셰인이 이끄는 러시아군은 1632년 10월 초 리투아니아 국경을 넘어 스몰렌스크 전쟁을 시작했다.[5][7][8][9] 셰인은 1609년-1611년 스몰렌스크 공성전에서 도시를 방어한 경험이 있는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러시아군은 진격하면서 여러 도시와 성을 함락시켰고, 10월 28일에는 도로고부시를 점령한 뒤 스몰렌스크를 포위했다.[5][7][8][9]

러시아군의 규모는 자료에 따라 23,961명에서 최대 34,500명까지 다양하게 추산되며, 160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전과 비교하면 러시아군은 상당히 현대화되었다. 스트렐치(streltsy)는 전통적인 머스킷 총(musket)을 사용하였으나, 서유럽상비군, 드라군(dragoons), 라이터(reiters) 등으로 편성된 군대를 이끌 외국인 장교들을 고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셰인의 군대에는 이러한 서구식 군대가 14,000명에서 17,000명 규모로 8개 연대에 편성되어 있었다.

3. 2. 스몰렌스크 공방전 (1632-1633)

1609년-1611년의 스몰렌스크 공성전에서 도시를 방어했던 미하일 보리소비치 셰인이 이끄는 러시아군은 1632년 10월 도로고부시를 점령하고 스몰렌스크를 포위했다.[5][7][8][9] 러시아군은 25,000명에서 34,500명 사이였으며, 160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5][8][10][11] 이들은 서유럽식 상비군, 드라군, 라이터 등으로 구성된 14,000~17,000명의 병력을 포함하여 이전보다 상당히 근대화된 군대였다.[11]

스몰렌스크에서 항복하는 미하일 셰인. 작가 미상.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측에서는 스몰렌스크 보이보드 알렉산데르 코르빈 고시에프스키가 이끄는 약 1,600명의 수비대와 지역 귀족들로 구성된 약 1,500명의 지원병이 스몰렌스크를 방어하고 있었다.[5] 이 도시는 최근 이탈리아식 보루로 요새화되었다.[11]

셰인은 요새 주위에 포위선을 구축하고 터널과 갱도를 이용하여 도시 성벽과 탑을 파괴했다.[5][9] 1632년 12월과 1633년 3월에 걸쳐 러시아군의 대형 대포가 도착하여 포격 후 공격을 개시했으나 격퇴되었다.[5][8] 그러나 포위는 계속되었고, 수비대는 사상자와 보급 물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6] 1633년 6월에는 일부 병사들이 탈주를 시도하기도 했다.[12]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무엘 드루츠키 소콜린스키의 지휘 하에 스몰렌스크는 1633년까지 버텼다.[13] 한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새 왕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는 구원군을 조직했다. 세임은 1633년 봄까지 구원군 파견을 위한 전비 지출을 승인했다.[14][15] 편성된 구원군은 약 21,500명으로, 윙드 후사르 24개 호롱기에프(약 3,200기), 코사크 기병 27개 호롱기에프(약 3,600기), 라이터 10개 대대(약 1,700기), 리투아니아 페티호르 연대 7개(약 780기), 드라군 7개 대대(약 2,250기)와 보병 약 20개 대대(약 12,000명) 등으로 구성되었다.[16]

리투아니아 야전헤트만 크시슈토프 라지비우와 고시에프스키는 스몰렌스크 근처에 야영지를 세우고 러시아군의 배후를 공격했다.[13] 1633년 여름, 브와디스와프 4세가 직접 이끄는 약 25,000명의 구원군이 스몰렌스크 근처에 도착했다.[5][10][17] 9월에는 티모시 오렌다렌코가 이끄는 10,000~20,000명의 코사크 원군이 도착하여 연방군이 수적으로 우세하게 되었다.[9][18][19]

브와디스와프 4세는 아쿼버스머스킷으로 교체하고 대포를 표준화하는 등 군대 현대화를 추진하여 전투에서 큰 효과를 보았다.[5][10][11] 윙드 후사르를 포함한 연방 기병의 활약으로 러시아군은 참호에서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8] 9월 말, 연방군은 러시아군의 주요 보급 거점을 점령하고 10월 4일까지 포위를 무너뜨렸다.[10][21]

셰인의 군대는 주요 야영지로 후퇴했으나 10월 중순 연방군에 의해 포위되었다.[5][21] 러시아군은 원군을 기다렸지만, 크림 타타르의 침입과 내부 갈등으로 인해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했다.[9][10][22][23]

결국 셰인은 1634년 1월 항복 협상을 시작하여 2월 25일에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3월 1일에 철수했다.[5][10][24] 러시아군은 대포 대부분을 남겨두고 군기를 가진 채 철수했으며, 3개월간 연방군과 교전하지 않기로 약속했다.[24]

3. 3.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반격

1633년, 새로 선출된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스몰렌스크 구원에 나섰다. 세임은 1632년 10월 러시아의 침공 소식을 접하고 구원군 파견을 논의했으나, 1633년 봄까지 지연된 끝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승인하고 650만 즈워티의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약 21,500명의 병력을 소집했다. 이 병력에는 24개 코러기에프의 윙드 후사르(~3,200명), 27개 코사크 기병 코러기에프(~3,600명), 10개 라이터 중대(~1,700명), 7개 리투아니아 페티호르 연대(~780명), 7개 용기병 연대(~2,250명), 그리고 약 20개 보병 연대(~12,000명)가 포함되었다. 특히 1만 명이 넘는 보병은 이전에는 연방 군대에서 흔하지 않았던 서유럽식 모델을 기반으로 조직되었다.

리투아니아 야전 헤트만이자 빌뉴스 총독인 크시슈토프 라지비우는 알렉산데르 코르빈 고시에프스키 총독과 협력하여 스몰렌스크에서 약 30km 떨어진 곳에 진영을 구축하고 러시아 포위군의 후방을 습격하여 물류를 방해했다. 라지비우 헤트만은 여러 차례 러시아 전선을 돌파하여 약 1,000명의 병사와 보급품을 스몰렌스크로 가져와 요새를 강화하고 방어군의 사기를 높였다.

1633년 여름, 브와디스와프 4세가 직접 이끄는 약 25,000명의 구원군이 스몰렌스크 근처에 도착했다. 9월 초, 티모시 오렌다렌코가 이끄는 1만~2만 명의 코사크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연합 왕국군은 수적으로 우세해졌다. 오렌다렌코와 마르친 카자노프스키 휘하의 코사크들은 러시아 후방선을 습격하여 라지비우와 고시에프스키 휘하의 폴란드-리투아니아 부대가 포위 공격을 해제하는 데 합류할 수 있게 했다.

브와디스와프 4세는 서유럽식 군사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의 전투력을 향상시켰다. 그는 소총병을 머스킷병으로 교체하고 연방 포병을 표준화(3~6파운드 연대포 도입)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다. 윙드 후사르를 포함한 연합 왕국의 기병은 러시아군의 기동성을 크게 제한하여 참호에 머물도록 강요했다. 1633년 9월 28일, 연합 왕국군은 러시아의 주요 보급 거점을 점령했고, 10월 4일까지 포위 공격이 해제되었다.

3. 4. 기타 전투

1633년 7월, 러시아군은 폴라츠크, 벨리즈, 우시뱌트, 오제리슈체를 점령했다.[9] 특히 폴라츠크에서는 도시와 요새 일부를 점령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27] 그러나 비쳅스크와 므츠슬라우에 대한 공격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에 의해 성공적으로 격퇴되었다.[28] 폴란드군은 푸티블을 포위 공격했지만, 동맹이었던 코사크 군의 이탈로 인해 실패했다.[28]

1633년 가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전년도에 러시아군이 점령했던 중요한 러시아 보급 기지인 도로고부시를 탈환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는 셰인의 군대에 보급하려던 계획이 좌절되었다.[29] 1634년 1월까지도 러시아는 보급 계획 수행에 필요한 병력을 모으지 못했다.[30] 같은 해 가을, 왕관령 대헤트만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츠폴스키는 남부 국경에서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물리치고,[31] 러시아 도시 세프스크를 포위했다. 코니에츠폴스키는 요새를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많은 러시아군을 묶어두어 스몰렌스크 북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았다.[31]

1634년 봄, 스몰렌스크가 구원받은 후, 연합군은 벨라야 요새로 진군했으나, 벨라야 공성전은 참패로 끝났다. 그러나 뱌지마는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33]

이처럼 스몰렌스크 외에도 여러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러시아군은 1632년에 여러 중요 지점을 점령했지만, 주력군과 대포의 도착 지연으로 인해 결국 전쟁에서 패배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6]

4. 폴랴노프카 조약

1634년 봄, 러시아는 미하일 셰인이 이끄는 군대가 패배하고, 타타르족이 남부 국경을 공격하는 상황에 직면했다.[9][11] 1633년 전쟁을 지지하던 필라레트 총주교가 사망하면서 전쟁 수행 의지가 약해졌다.[8] 미하일 1세는 전쟁을 끝내고자 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브와디스와프 4세 역시 스웨덴과의 알트마르크 조약 만료를 앞두고 러시아와의 관계 설정이 필요했다.[9] 프워츠크 주교 스타니스와프 우비엔스키는 셰인의 항복 2주 후 "우리들의 행복은 이때까지의 국경을 유지하는 것과 건강과 복리를 보장하는 것이다."라고 기록했다.[9]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최고 권력 기관인 세임(Sejm)은 더 이상의 분쟁을 원하지 않았고, 양측은 1634년 4월 30일 협상을 시작하여[34] 5월에 폴랴노프카 조약을 체결했다.[5][9][10]

4. 1. 조약의 내용

1634년 폴랴놉카 조약이 체결되면서 스몰렌스크 전쟁은 끝났다. 양측은 전쟁 이전의 영토 경계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러시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20000RUB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그 대신 폴란드의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는 러시아 차르에 대한 권리 주장을 포기하고, 러시아의 왕권 상징물을 모스크바로 반환했다.[5][9][10]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브와디스와프 4세의 차르 지위 포기는 국경 지대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이로써 차르 미하일 1세의 정통성이 완전히 인정받게 되었고, 국내 안정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군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러시아는 외교적으로 승리한 셈이었다.[9][35]

4. 2. 조약의 의의와 영향

폴랴노프카 조약은 17세기 동유럽의 세력 균형을 재확인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러시아 차르국 간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양국은 전쟁 지속을 원치 않아 협상을 시작했고, 1634년 5월에 조약을 체결했다.[9] 조약 내용은 영토 현상 유지를 확정하고 러시아가 전쟁배상금(2만 황금 루블)을 지불하는 대신, 브와디스와프 4세는 차르 칭호를 포기하고 러시아의 레갈리아(왕권의 상징)를 모스크바에 반환하는 것이었다.[5][9][10]

러시아 관점에서는 브와디스와프 4세의 차르 지위 포기가 국경 지대 요구 철회보다 더 중요한 문제였다.[9] 미하일 1세의 정통성이 완전히 인정되어 국내 안정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러시아는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는다.[9][35]

1634년 스몰렌스크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브와디스와프 4세의 승리를 기념하는 메달

5. 결과

스몰렌스크 전쟁은 양측 모두에게 상당한 군사적, 경제적 손실을 안겨주었다. 이 전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약 4,300,000 즈워티의 국고 손실을 입었다.

스몰렌스크 요새 해방 후 스몰렌스크 근처에서 말을 탄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 얀 마테이코 그림, 제2차 세계대전 때 소실.


1634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남쪽에서 튀르크 군에게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고, 폴란드-오스만 전쟁을 끝냈다.[33] 이 승리는 폴랴노프카 조약과 더불어 17세기 초부터 거의 끊임없이 계속되어 온 이웃 국가들과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었다.

스몰렌스크 전투는 바르샤바에 있는 무명용사 묘소에 "SMOLENSK 18 X 1632–25 II 1634"라는 비문으로 기념되고 있다.

5. 1. 군사적 측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러시아 차르국은 모두 서유럽식 군사 전술, 편제, 장비를 도입하여 군사력을 강화하려 했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러시아보다 더 혁신적인 모습을 보였다.[11] 러시아군의 주요 패배 요인으로는 스몰렌스크에 대포를 늦게 반입한 점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기병대에 의해 보급로가 차단된 점이 꼽힌다.[11]

전쟁 이후, 미하일 셰인 등 러시아군 지휘관들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반역죄로 처형되었다.[8][35][36]

5. 2. 정치적, 외교적 측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스몰렌스크를 지켜냈지만, 국력 소모는 피할 수 없었다. 러시아는 스몰렌스크 수복에는 실패했지만, 폴랴노프카 조약을 통해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9] 특히 러시아는 이 조약을 통해 미하일 1세의 정통성을 완전히 인정받아 국내 안정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9]

전쟁 초기, 러시아는 총주교 필라레트의 사망으로 전쟁 의지가 약해졌고, 미하일 1세는 분쟁 종식을 모색했다.[8][9] 반면,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는 과거 러시아 차르로 선출되었던 점을 들어 차르 지위를 요구하며 전쟁 지속을 희망했다. 또한, 스웨덴과의 알트마르크 조약이 만료되는 시점에 러시아와 동맹하여 스웨덴을 공격하려는 계획도 있었다.[9] 그러나 폴란드 의회(세임)는 더 이상의 분쟁을 원치 않았고, 프워츠크의 주교(Bishop of Płock) 스타니스와프 우비엔스키(Stanisław Łubieński)는 국경 유지 및 평화를 희망하는 입장을 표명했다.[9]

결국 양국은 교섭을 시작하여 1634년 5월 폴랴노프카 조약을 체결했다.[5][9][10] 조약 내용은 영토 현상 유지, 러시아의 전쟁배상금(2만 황금 루블) 지불, 브와디스와프 4세의 차르 칭호 포기, 러시아 왕권 상징물의 반환 등이었다.[5][9][10]

전후 브와디스와프 4세는 러시아에 세르페이스크를 양도하고 반(反) 스웨덴 동맹을 제안했지만, 세임의 반대와 러시아 측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37]

6. 더 읽어보기


  • 미로스와프 나기엘스키, ''Diariusz kampanii smoleńskiej Władysława IV 1633–1634'' (2006), DiG, ISBN 8371814100
  • 다리우시 쿠피시, ''Smoleńsk 1632–1634'' (2001), Bellona, ISBN 8311092826

참조

[1] 서적 Russia's Wars of Emergence 1460-1730 https://www.google.c[...] Routledge 2013-09-13
[2] 서적 Russia in the Early Modern World: The Continuity of Change https://www.google.c[...] Rowman & Littlefield 2022-01-25
[3] 웹사이트 Legal foundations of administration in Belarusian lands in the 14th-18th centuries (overview) https://archives.gov[...] 2024-11-26
[4] 서적 Smoleńsk 1632-1634 Bellona 2001
[5] 서적 Historia Polski, 1505–1764 Państwowe Wydawnictwo Naukowe
[6] 서적 Diariusz kampanii smoleńskiej Władysława IV 1633–1634 DiG
[7] 문서 Nagielski, p. 8–9.
[8] 웹인용 Smolensk War, 1632–1634 http://www.historyof[...] 2007-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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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서적 The Rise of the Fiscal State in Europe, C. 1200–1815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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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문서 Nagielski, 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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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문서 Nagielski, p. 21–23.
[20] 문서 Nagielski, p. 24.
[21] 문서 Nagielski, p. 26–27.
[22] 서적 The Thirty Years' War https://archive.org/[...] Routledge
[23] 문서 Nagielski, p. 36–37.
[24] 문서 Nagielski, p. 43–44.
[25] 문서 Nagielski, p. 46.
[26] 문서 Nagielski, p. 10.
[27] 문서 Nagielski, p. 14.
[28] 문서 Nagielski, p. 15.
[29] 문서 Nagielski, p. 29.
[30] 문서 Nagielski, p.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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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문서 Nagielski, p. 47–50.
[33] 서적 Historia Polski Wydawnictwo Ossolińskich
[34] 문서 Nagielski, p. 50.
[35] 서적 The Economy and Material Culture of Russia, 1600–1725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hicago Press
[36] 서적 God's Playground Znak
[37] 서적 (제목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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