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카와 미쓰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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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부카와 미쓰요리는 일본 무로마치 시대의 무장으로, 시부카와 요시유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시카가 요시미쓰로부터 이름을 받아 미쓰요리라 칭했으며, 빗추, 셋쓰, 아키 등의 슈고를 역임했다. 1396년 큐슈 탄다이로 임명되어 쇼니 씨, 기쿠치 씨 등을 평정하는 데 힘썼으며, 히젠국을 근거지로 삼아 시부카와 씨가 규슈에서 세력을 유지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조선과 무역을 통해 외교적 관계를 맺었고, 1419년 큐슈 탄다이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후, 1446년 교토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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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카와 미쓰요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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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시부카와 씨(渋川氏) |
이름 | 시부카와 미쓰요리(渋川満頼) |
아명 | 조주오마루(長寿王丸) |
법명 | 도진(道鎮) |
별명 | 무사시지로(武蔵次郎) |
계명 | 서상원도진수악(瑞祥院道鎮秀岳) |
생년 | 분추(文中) 원년/오안(応安) 5년(1372년) |
몰년 | 분안(文安) 3년 3월 13일(1446년 4월 9일) |
시대 |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전기 - 중기 |
관직 | |
관위 | 종5위하 |
관직 | 우효에노스케(右兵衛佐) 좌근위장감(左近衛将監) |
정치 | |
막부 |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
직책 | 규슈 단다이(九州探題) |
수호 | 빗추(備中国) 셋쓰(摂津国) 아키(安芸国) 히젠(肥前国) |
주군 |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 요시모치(足利義持) |
가족 | |
아버지 | 시부카와 요시유키(渋川義行) |
형제 | 미쓰요리 미쓰유키(満行) 요시나가(義長) 기라 미쓰사다(吉良満貞)의 부인 |
아내 | 시바 요시마사(斯波義将)의 딸 |
자녀 | 요시토시(義俊) 도시아키라(俊詮) 우지시게(氏重) |
2. 생애
분추(文中) 원년/오안(応安) 5년(1372년) 시부카와 요시유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 이름자 한 자를 받아 '''미쓰요리'''(満頼)라 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여러 지역의 슈고(守護)를 역임했다.
오에이(応永) 3년(1396년) 이마가와 사다요의 후임으로 규슈 단다이에 임명되어 반막부 세력 평정에 힘썼다. 히젠국을 규슈 단다이의 분국(分国)으로 정하고 시부카와 씨가 규슈에서 세력을 유지할 기반을 쌓았다.
조선과 적극적으로 교역하여 자신을 구주도독(九州都督), 진서절도사(鎮西節度使) 등으로 칭하며 조선에서 교역 허가 도서(図書)를 받고 수도서인이 되었다.
오에이(応永) 13년(1406년) 출가하여 도진(道鎮)이라 하였으며, 오에이(応永) 26년(1419년) 규슈 단다이에서 물러나 아들 요시토시에게 넘겨주었다. 분안(文安) 3년(1446년) 교토(京都)에서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슈고직 역임
분추(文中) 원년/오안(応安) 5년(1372년) 시부카와 요시유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3대 쇼군(将軍) 아시카가 요시미쓰로부터 이름자 한 자를 받아 '''미쓰요리'''(満頼)라 하였다.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덴주(天授) 원년/에이와(永和) 원년(1375년)부터 메이토쿠(明徳) 4년(1393년)까지 빗추국(備中国), 덴주(天授) 5년/고랴쿠(康暦) 원년(1379년)부터 고와(弘和) 2년/에이토쿠(永徳) 2년(1382년)까지 셋쓰국(摂津国), 오에이(応永) 원년(1394년)부터 오에이(応永) 7년(1400년)까지 아키국(安芸国)의 슈고(守護)를 역임했다.
2. 2. 규슈 단다이 임명과 활동
오에이 3년(1396년)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이마가와 사다요(료슌)를 파면하고, 그 후임으로 시부카와 미쓰요리를 규슈 단다이에 임명했다. 미쓰요리는 쇼니 씨, 기쿠치 씨, 아소 씨 등 반(反) 막부 세력을 평정하기 위해 힘썼고, 쇼니 사다요리, 기쿠치 다케토모와 전투를 벌였다. 특히 쇼니 씨와는 이후 여러 대에 걸쳐 인연을 맺게 된다. 미쓰요리는 여러 다이묘를 통제하는 능력은 료슌에 미치지 못했지만, 무난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히젠국을 단다이의 분국(分国)으로 정하고, 센고쿠 시대 전기까지 시부카와 씨가 규슈에서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쌓았다. 지쿠젠국에서 히젠으로 본거지를 옮기고, 히젠 야부군 아야베에 아야베 성을 세워 슈고관(守護館)으로 삼았다. 이는 시부카와 씨 대대의 거점이 되었다.한편으로 조선과 적극적으로 무역을 하였으며, 스스로를 규슈 도독(九州都督), 진서절도사(鎮西節度使) 등으로 칭하며 조선 국왕으로부터 무역 허가 도서(図書)를 받아 수도서인이 되었다.
2. 3. 조선과의 관계
조선과 적극적으로 교역하였으며, 자신을 구주도독(九州都督), 진서절도사(鎮西節度使) 등으로 칭하며 조선으로부터 교역 허가 도서(図書)를 받고 수도서인이 되었다. 이러한 외교적 노력은 당시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2. 4. 은퇴와 사망
1406년(오에이 13년) 출가하여 도진(道鎮)이라 칭하였다. 1419년(오에이 26년) 규슈 단다이 직을 아들 요시토시에게 물려주고 은퇴하였다. 이후 규슈 단다이는 시부카와 씨가 대대로 세습하게 되었다.1446년(분안 3년) 3월 13일에 교토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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