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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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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관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대관식에 사용된 왕관으로,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팔각형 형태에 금색 리벳으로 고정된 철제 띠로 연결된 8개의 금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진주와 보석으로 장식되었다. 12세기에 처음 언급되었으며, 제국 레갈리아의 중요한 품목이었다. 현재는 오스트리아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에 전시되어 있으며, 아헨, 프랑크푸르트, 카를슈테인 성 등에도 복제품이 있다. 제국관은 독일 제국 문장관의 영감이 되었고, 2008년 오스트리아 기념 주화의 주요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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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관
기본 정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제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제관
국가신성 로마 제국
소유
현재 소유자제국 보물 창고
명칭
독일어 명칭라이히스크로네 (Reichskrone)

2. 역사

### 중세 시대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샤를마뉴가 제국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1512년경). 뉘른베르크의 게르마니셰스 국립박물관 소장. 왕관은 샤를마뉴 사후 1세기 반 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림은 시대착오적이다.


여덟 개의 경첩이 달린 금판으로 된 왕관은 962년 오토 1세의 제국 대관식을 위해 서독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으며, 콘라트 2세를 위해 나중에 추가되었을 수도 있다(아치가 'CHVONRADUS'라는 이름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1] 하지만 일부 중세 역사가들은 왕관이 나중에 의뢰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왕관이 "10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가장 자주 추정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여러 학자들은 판의 비문이나 성경 구절등을 근거로 11세기 후반 혹은 12세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 하기도 한다.[2] 왕관에 대한 첫 번째 보존된 언급은 12세기에 나오며, 이것이 동일한 왕관이라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로마 왕들은 신성 로마 제국이 끝날 때까지 이 왕관을 쓰고 대관했다. 왕관은 제국 레갈리아()의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으며, 여기에는 제국 십자가(), 제국 검(), 성스러운 창()도 포함되었다. 대관식 동안 새 왕에게 홀()과 제국 가지()와 함께 수여되었다.

신성 로마 황제관은 아마도 오토 1세를 위해 제작되었으며,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왕관의 형태는 원형이 아닌 독특한 팔각형이며, 동로마 제국 황제 왕관과 유사하게 만들어졌다. 왕관은 판에 금색 리벳으로 고정된 두 개의 철 스트립으로 팔각형 형태를 이루는 구조이며, 이 철편이 설치된 시점은 불명확하다. 왕관의 각 판은 약 22캐럿의 금으로 만들어졌고, 주변에는 진주와 보석이 박혀 있다. 돌은 면으로 절단되지 않고 둥근 형태로 연마되었으며, "엔카보숑"이라고 불리는 고대 로마 제국의 기법이다. 왕관은 144개의 귀석과 진주로 장식되어 있다.

### 근세 시대

962년 오토 1세의 제국 대관식을 위해 서독에서 여덟 개의 경첩이 달린 금판으로 된 왕관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으며,[1] 콘라트 2세를 위해 나중에 추가되었을 수도 있다(아치가 'CHVONRADUS'라는 이름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1] 하지만 일부 중세 역사가들은 왕관이 나중에 의뢰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2] 존 B. 프리드는 왕관이 콘라트 3세의 로마 제국 대관식을 위해 준비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2] 라인하르트 슈타츠는 "이사야 텍스트를 모든 군주에게 그의 날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해석"했고, 데니스 A. 카이저는 "오토 2세가 왕관을 의뢰했으며 히스기야 판이 오토 1세의 심각한 질병으로부터의 회복을 언급한다"고 주장했다.[2] 왕관에 대한 첫 번째 보존된 언급은 12세기에 나오며, 이것이 동일한 왕관이라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로마 왕들은 신성 로마 제국이 끝날 때까지 이 왕관을 쓰고 대관했다. 왕관은 제국 레갈리아()의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으며, 여기에는 제국 십자가(), 제국 검(), 성스러운 창()도 포함되었다. 대관식 동안 새 왕에게 홀()과 제국 가지()와 함께 수여되었다.

신성 로마 황제관은 아마도 신성 로마 제국의 어느 지역에서 오토 1세를 위해 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레갈리아, 특히 제국의 왕관은 1349년부터 1421년까지 보헤미아 (현재의 체코 공화국)에 보관되었으며, 카를슈테인 성은 그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1424년부터 1796년까지, 그들은 모두 프랑코니아의 뉘른베르크에 보관되었으며, 대관식을 위해서만 도시를 벗어날 수 있었다.

현재 왕관과 임페리얼 레갈리아의 나머지는 비엔나의 호프부르크 궁전에 전시되어 있다. 동일한 복제품이 샤를마뉴의 옛 궁전, 현재 시청사의 크뢰눙스잘에 있는 독일의 아헨에 존재한다. 프랑크푸르트의 역사 박물관에도 왕관과 레갈리아의 복제품이 있다. 후기 황제의 대부분은 도시의 대성당('''쾰른 대성당''')에서, 한때 신성 로마 황제의 왕궁이 있던 팔츠의 선거구의 트리펠스 요새에서 대관식을 치렀기 때문이다. 최신 허가된 복제품은 성 바츨라프 왕관의 복제품과 함께 카를슈테인의 체코 성에 보관되어 있다.

신성 로마 황제관은 원형이 아닌 독특한 형태의 왕관으로 제작되었다. 그 디자인은 의도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왕관과 유사하게 만들어졌다고 여겨진다. 왕관은 판에 금색 리벳으로 고정된 2개의 철 스트립이 왕관을 함께 유지하고 팔각형 형태를 이루는 구조이다. '''이 철편이 설치된 시점은 불명확하다'''. 링을 추가하기 전에, 판은 긴 금색 핀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판과 아치를 분리하여 운송을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 왕관의 각 판은 약 22캐럿의 하이 캐럿 골드로 만들어졌다. 주변에는 진주와 보석이 박혀 있으며, 이는 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장식 양식을 더욱 호화롭게 만든다. 돌은 면으로 절단되지 않고 둥근 형태로 연마되었다. 이 기법은 고대 로마 제국의 기법이며, 이러한 보석은 "엔카보숑"이라고 설명되며, 현재에도 제조되고 있다. 진주와 돌은 금속에 새겨진 개구부에 넣고 가는 철사로 고정했다. 그 효과는 빛이 닿으면 돌이 마치 내부에서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왕관은 144개의 귀석 (사파이어, 에메랄드, 자수정을 포함) (동로마 제국의 프로토콜에서는 황제에게 어울리는 녹색과 파란색 귀석)과 거의 같은 수의 진주로 장식되어 있다.

### 현대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관은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반 사이에 오토 1세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2] 12세기에 처음으로 제국관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는데, 이 왕관이 현재 알려진 왕관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2]

대부분의 로마 왕들은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이 왕관을 쓰고 대관식을 거행했다. 제국관은 제국 십자가(), 제국 검(), 성스러운 창()과 함께 제국 레갈리아()의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다. 대관식에서는 홀( )과 제국 가지()도 함께 수여되었다.

제국관은 제작된 후 수 세기 동안 림부르크 수도원, 하르츠부르크 성, 고슬라르 제국 궁전, 트리펠스 성, 하게나우 제국 궁전, 발트부르크 성, 크라우트하임 성, 키부르크 성, 라인펠덴 성, 뮌헨 알터 호프 등 다양한 장소에 보관되었다. 1349년 카를 4세는 제국관을 프라하 인근 카를슈테인 성으로 옮겼고, 1424년 지기스문트는 비셰그라드를 거쳐 뉘른베르크로 옮겨 성령 병원에 영구 보관했다(대관식 기간 제외).

1796년 프랑스 혁명 전쟁의 위협으로 제국관은 레겐스부르크의 성 엠머람 수도원으로 옮겨졌고, 1800년에는 제국의 수도 빈으로 옮겨졌다. 1806년 제국이 해체된 후에도 빈에 보관되다가 1938년 안슐루스 이후 나치 독일에 의해 다시 뉘른베르크로 옮겨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역사 미술 벙커에 보관되었다가 1945년 미군에 의해 회수되어 1946년 오스트리아로 반환되었다. 현재 제국관과 제국 레갈리아는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에 전시되어 있다.

독일 아헨의 시청사와 프랑크푸르트 역사 박물관, 트리펠스 요새, 카를슈테인 성에는 제국관의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제국관은 원형이 아닌 팔각형 형태이며, 동로마 제국 황제관과 유사하게 디자인되었다. 8개의 경첩이 달린 금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금색 리벳으로 고정된 두 개의 철 스트립이 왕관을 결합한다. 각 판은 22캐럿 금으로 제작되었고, 진주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보석은 면으로 절단되지 않고 둥글게 연마된 "엔카보숑" 기법으로 제작되었으며, 가는 철사로 고정되어 빛을 받으면 내부에서 빛나는 듯한 효과를 낸다. 왕관은 144개의 귀석(사파이어, 에메랄드, 자수정 등)과 거의 같은 수의 진주로 장식되어 있다.

2. 1. 중세 시대



여덟 개의 경첩이 달린 금판으로 된 왕관은 962년 오토 1세의 제국 대관식을 위해 서독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으며, 콘라트 2세를 위해 나중에 추가되었을 수도 있다(아치가 'CHVONRADUS'라는 이름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1] 하지만 일부 중세 역사가들은 왕관이 나중에 의뢰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왕관이 "10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가장 자주 추정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여러 학자들은 판의 비문이나 성경 구절등을 근거로 11세기 후반 혹은 12세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 하기도 한다.[2] 왕관에 대한 첫 번째 보존된 언급은 12세기에 나오며, 이것이 동일한 왕관이라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로마 왕들은 신성 로마 제국이 끝날 때까지 이 왕관을 쓰고 대관했다. 왕관은 제국 레갈리아()의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으며, 여기에는 제국 십자가(), 제국 검(), 성스러운 창()도 포함되었다. 대관식 동안 새 왕에게 홀()과 제국 가지()와 함께 수여되었다.

신성 로마 황제관은 아마도 오토 1세를 위해 제작되었으며,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왕관의 형태는 원형이 아닌 독특한 팔각형이며, 동로마 제국 황제 왕관과 유사하게 만들어졌다. 왕관은 판에 금색 리벳으로 고정된 두 개의 철 스트립으로 팔각형 형태를 이루는 구조이며, 이 철편이 설치된 시점은 불명확하다. 왕관의 각 판은 약 22캐럿의 금으로 만들어졌고, 주변에는 진주와 보석이 박혀 있다. 돌은 면으로 절단되지 않고 둥근 형태로 연마되었으며, "엔카보숑"이라고 불리는 고대 로마 제국의 기법이다. 왕관은 144개의 귀석과 진주로 장식되어 있다.

2. 2. 근세 시대

962년 오토 1세의 제국 대관식을 위해 서독에서 여덟 개의 경첩이 달린 금판으로 된 왕관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으며,[1] 콘라트 2세를 위해 나중에 추가되었을 수도 있다(아치가 'CHVONRADUS'라는 이름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1] 하지만 일부 중세 역사가들은 왕관이 나중에 의뢰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2] 존 B. 프리드는 왕관이 콘라트 3세의 로마 제국 대관식을 위해 준비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2] 라인하르트 슈타츠는 "이사야 텍스트를 모든 군주에게 그의 날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해석"했고, 데니스 A. 카이저는 "오토 2세가 왕관을 의뢰했으며 히스기야 판이 오토 1세의 심각한 질병으로부터의 회복을 언급한다"고 주장했다.[2] 왕관에 대한 첫 번째 보존된 언급은 12세기에 나오며, 이것이 동일한 왕관이라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로마 왕들은 신성 로마 제국이 끝날 때까지 이 왕관을 쓰고 대관했다. 왕관은 제국 레갈리아()의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으며, 여기에는 제국 십자가(), 제국 검(), 성스러운 창()도 포함되었다. 대관식 동안 새 왕에게 홀()과 제국 가지()와 함께 수여되었다.

신성 로마 황제관은 아마도 신성 로마 제국의 어느 지역에서 오토 1세를 위해 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레갈리아, 특히 제국의 왕관은 1349년부터 1421년까지 보헤미아 (현재의 체코 공화국)에 보관되었으며, 카를슈테인 성은 그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1424년부터 1796년까지, 그들은 모두 프랑코니아의 뉘른베르크에 보관되었으며, 대관식을 위해서만 도시를 벗어날 수 있었다. 현재 왕관과 임페리얼 레갈리아의 나머지는 비엔나의 호프부르크 궁전에 전시되어 있다.

동일한 복제품이 샤를마뉴의 옛 궁전, 현재 시청사의 크뢰눙스잘에 있는 독일의 아헨에 존재한다. 프랑크푸르트의 역사 박물관에도 왕관과 레갈리아의 복제품이 있다. 후기 황제의 대부분은 도시의 대성당('''쾰른 대성당''')에서, 한때 신성 로마 황제의 왕궁이 있던 팔츠의 선거구의 트리펠스 요새에서 대관식을 치렀기 때문이다. 최신 허가된 복제품은 성 바츨라프 왕관의 복제품과 함께 카를슈테인의 체코 성에 보관되어 있다.

신성 로마 황제관은 원형이 아닌 독특한 형태의 왕관으로 제작되었다. 그 디자인은 의도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왕관과 유사하게 만들어졌다고 여겨진다. 왕관은 판에 금색 리벳으로 고정된 2개의 철 스트립이 왕관을 함께 유지하고 팔각형 형태를 이루는 구조이다. 이 철편이 설치된 시점은 불명확하다. 링을 추가하기 전에, 판은 긴 금색 핀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판과 아치를 분리하여 운송을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

왕관의 각 판은 약 22캐럿의 하이 캐럿 골드로 만들어졌다. 주변에는 진주와 보석이 박혀 있으며, 이는 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장식 양식을 더욱 호화롭게 만든다. 돌은 면으로 절단되지 않고 둥근 형태로 연마되었다. 이 기법은 고대 로마 제국의 기법이며, 이러한 보석은 "엔카보숑"이라고 설명되며, 현재에도 제조되고 있다. 진주와 돌은 금속에 새겨진 개구부에 넣고 가는 철사로 고정했다. 그 효과는 빛이 닿으면 돌이 마치 내부에서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왕관은 144개의 귀석 (사파이어, 에메랄드, 자수정을 포함) (동로마 제국의 프로토콜에서는 황제에게 어울리는 녹색과 파란색 귀석)과 거의 같은 수의 진주로 장식되어 있다. 유사한 보석이 박힌 장식 스타일은 이 시기에 많은 종류의 귀중한 오브젝트, 특히 성유물 상자, 핵심 보석, 또는 십자가의 로스에어와 같은 행렬 또는 제단의 십자가, 그리고 책 표지와 같은 귀중한 오브젝트에 사용되었다.

2. 3. 현대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관은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반 사이에 오토 1세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2] 12세기에 처음으로 제국관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는데, 이 왕관이 현재 알려진 왕관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2]

대부분의 로마 왕들은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이 왕관을 쓰고 대관식을 거행했다. 제국관은 제국 십자가(), 제국 검(), 성스러운 창()과 함께 제국 레갈리아()의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다. 대관식에서는 홀( )과 제국 가지()도 함께 수여되었다.

제국관은 제작된 후 수 세기 동안 림부르크 수도원, 하르츠부르크 성, 고슬라르 제국 궁전, 트리펠스 성, 하게나우 제국 궁전, 발트부르크 성, 크라우트하임 성, 키부르크 성, 라인펠덴 성, 뮌헨 알터 호프 등 다양한 장소에 보관되었다. 1349년 카를 4세는 제국관을 프라하 인근 카를슈테인 성으로 옮겼고, 1424년 지기스문트는 비셰그라드를 거쳐 뉘른베르크로 옮겨 성령 병원에 영구 보관했다(대관식 기간 제외).[4]

1796년 프랑스 혁명 전쟁의 위협으로 제국관은 레겐스부르크의 성 엠머람 수도원으로 옮겨졌고, 1800년에는 제국의 수도 빈으로 옮겨졌다. 1806년 제국이 해체된 후에도 빈에 보관되다가 1938년 안슐루스 이후 나치 독일에 의해 다시 뉘른베르크로 옮겨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역사 미술 벙커에 보관되었다가 1945년 미군에 의해 회수되어 1946년 오스트리아로 반환되었다.[4][5] 현재 제국관과 제국 레갈리아는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에 전시되어 있다.[6]

독일 아헨의 시청사와 프랑크푸르트 역사 박물관, 트리펠스 요새, 카를슈테인 성에는 제국관의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제국관은 원형이 아닌 팔각형 형태이며, 동로마 제국 황제관과 유사하게 디자인되었다. 8개의 경첩이 달린 금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금색 리벳으로 고정된 두 개의 철 스트립이 왕관을 결합한다. 각 판은 22캐럿 금으로 제작되었고, 진주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보석은 면으로 절단되지 않고 둥글게 연마된 "엔카보숑" 기법으로 제작되었으며, 가는 철사로 고정되어 빛을 받으면 내부에서 빛나는 듯한 효과를 낸다. 왕관은 144개의 귀석(사파이어, 에메랄드, 자수정 등)과 거의 같은 수의 진주로 장식되어 있다.

3. 디자인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관은 둥근 형태가 아닌 팔각형으로, 비잔틴 황제의 왕관이나 아헨의 아헨 궁정 예배당의 형태를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7] 여덟 개의 경첩 판은 상단이 아치형으로,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는 두 개의 철제 띠가 금색 리벳으로 고정되어 왕관을 지탱한다. 각 판은 고순도 으로 제작되었으며, 진주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보석은 패싯으로 절단되지 않고 둥근 형태로 연마된 ''카보숑''으로, 금속에 뚫린 구멍에 얇은 철사로 고정되었다. 빛이 비치면 보석 내부에서 빛나는 듯한 효과를 낸다.

왕관에는 사파이어, 에메랄드, 자수정 등 144개의 보석과[7] 비슷한 수의 진주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보석 장식은 성유물함, 행렬 또는 제단 십자가(''크룩스 젬마타'')나 성 에머람 황금 코덱스와 에흐터나흐 황금 코덱스 같은 귀중한 책 표지에도 사용되었다.

오른쪽 앞면 판에는 두 천사와 함께 있는 예수가 묘사되어 있다


thumb

오른쪽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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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개의 작은 판('그림판'(''Bildplatten''))에는 성경의 인물과 장면이 비잔틴 "침몰(Senkschmelz)" 스타일의 클로이존네 에나멜로 표현되어 있다.

  • 오른쪽 앞면 판에는 두 체루빔 사이에 위엄을 갖춘 그리스도가 묘사되어 있고, "나로 인해 왕들이 통치한다"(''P[er] ME REGES REGNANT''; 잠언 8:15)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7]
  • 오른쪽 뒷면 판에는 이사야 예언자가 히스기야 왕에게 말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 "보라, 내가 네 생명에 십오 년을 더하리라"(열왕기하 20:6)라는 두루마리 내용과 함께 "ISAIAS P[ro]PHETA · EZECHIAS REX"라는 글귀가 있다.
  • 왼쪽 앞면 판에는 솔로몬 왕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라"(잠언 3:7)라는 두루마리를 들고 있으며, "REX SALOMON"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왼쪽 뒷면 판에는 다윗 왕이 "유명한 왕은 정의를 행하는 것을 기뻐한다"(시편 99:4)라는 두루마리를 들고 있고, "REX DAVID"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다른 네 개의 판('돌판'(''Steinplatten''))은 귀한 돌과 진주로만 장식되어 있다. 앞면과 뒷면 판의 열두 개 돌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석(요한계시록 21:19-21)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면 판 중앙 상단의 삼각형 사파이어는 한때 ''와이즈''(즉, '고아')라 불린 유명한 돌을 대체한 것이다.

왕관은 콘라트 2세의 것으로 추정되는 단일 아치(또는 후프)를 가지고 있으며,[8] "로마인의 왕"(''Rex Romanorum'')이라는 글귀와 제국 양식이 새겨져 있다.[8] 아치 왼쪽에는 "신의 은총으로" (''CHVONRADUS DEI GRATIA''), 오른쪽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ROMANORU[M] IMPERATOR AUG[USTUS]'')라는 글귀가 시드 펄로 새겨져 있다.[9] 앞면 판 위와 아치 앞에는 헨리 2세의 가슴 십자가였던 보석 십자가가 부착되어 있다.[1]

양쪽 돌판에는 펜던트 보석이 달린 체인이 걸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세 개의 작은 구멍이 있다. 펜딜리아는 현재는 사라진 비잔틴 황제의 왕관의 특징이었다. 왕관 내부의 현재 붉은 벨벳 모자는 17세기의 것이다. 황실 왕관은 미터 위에 착용했으며, 루돌프 2세를 위해 만들어진 오스트리아 황실 왕관으로 이어졌다.

3. 1. 구조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관은 둥근 형태가 아닌 팔각형으로, 비잔틴 황제의 왕관이나 아헨의 아헨 궁정 예배당의 형태를 본뜬 것으로 추정된다.[7] 여덟 개의 경첩 판은 상단이 아치형으로,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는 두 개의 철제 띠가 금색 리벳으로 고정되어 왕관을 지탱한다. 각 판은 고순도 으로 제작되었으며, 진주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보석은 패싯으로 절단되지 않고 둥근 형태로 연마된 ''카보숑''으로, 금속에 뚫린 구멍에 얇은 철사로 고정되었다. 빛이 비치면 보석 내부에서 빛나는 듯한 효과를 낸다.

왕관에는 사파이어, 에메랄드, 자수정 등 144개의 보석과[7] 비슷한 수의 진주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보석 장식은 성유물함, 행렬 또는 제단 십자가(''크룩스 젬마타'')나 성 에머람 황금 코덱스와 에흐터나흐 황금 코덱스 같은 귀중한 책 표지에도 사용되었다.

네 개의 작은 판('그림판'(''Bildplatten''))에는 성경의 인물과 장면이 비잔틴 "침몰(Senkschmelz)" 스타일의 클로이존네 에나멜로 표현되어 있다.

  • 오른쪽 앞면 판에는 두 체루빔 사이에 위엄을 갖춘 그리스도가 묘사되어 있고, "나로 인해 왕들이 통치한다"(''P[er] ME REGES REGNANT''; 잠언 8:15)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7]
  • 오른쪽 뒷면 판에는 이사야 예언자가 히스기야 왕에게 말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 "보라, 내가 네 생명에 십오 년을 더하리라"(열왕기하 20:6)라는 두루마리 내용과 함께 "ISAIAS P[ro]PHETA · EZECHIAS REX"라는 글귀가 있다.
  • 왼쪽 앞면 판에는 솔로몬 왕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라"(잠언 3:7)라는 두루마리를 들고 있으며, "REX SALOMON"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왼쪽 뒷면 판에는 다윗 왕이 "유명한 왕은 정의를 행하는 것을 기뻐한다"(시편 99:4)라는 두루마리를 들고 있고, "REX DAVID"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다른 네 개의 판('돌판'(''Steinplatten''))은 귀한 돌과 진주로만 장식되어 있다. 앞면과 뒷면 판의 열두 개 돌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석(요한계시록 21:19-21)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면 판 중앙 상단의 삼각형 사파이어는 한때 ''와이즈''(즉, '고아')라 불린 유명한 돌을 대체한 것이다.

왕관은 콘라트 2세의 것으로 추정되는 단일 아치(또는 후프)를 가지고 있으며,[8] "로마인의 왕"(''Rex Romanorum'')이라는 글귀와 제국 양식이 새겨져 있다.[8] 아치 왼쪽에는 "신의 은총으로" (''CHVONRADUS DEI GRATIA''), 오른쪽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ROMANORU[M] IMPERATOR AUG[USTUS]'')라는 글귀가 시드 펄로 새겨져 있다.[9] 앞면 판 위와 아치 앞에는 헨리 2세의 가슴 십자가였던 보석 십자가가 부착되어 있다.[1]

양쪽 돌판에는 펜던트 보석이 달린 체인이 걸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세 개의 작은 구멍이 있다. 펜딜리아는 현재는 사라진 비잔틴 황제의 왕관의 특징이었다. 왕관 내부의 현재 붉은 벨벳 모자는 17세기의 것이다. 황실 왕관은 미터 위에 착용했으며, 루돌프 2세를 위해 만들어진 오스트리아 황실 왕관으로 이어졌다.

3. 2. 장식

왕관은 둥근 모양이 아닌 팔각형 모양으로, 비잔틴 황제의 왕관 또는 아헨의 아헨 궁정 예배당의 모양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여덟 개의 경첩 판은 상단이 아치형으로 되어 있다. 두 개의 철제 띠가 금색 리벳으로 고정되어 왕관을 함께 잡아준다. 링을 추가하기 전에는 긴 금색 핀으로 판을 고정하여 운송을 위해 판과 아치를 분리할 수 있었다.

왕관의 각 판은 약 22캐럿의 고순도 으로 만들어져 "버터"색을 띠며, 진주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보석은 패싯으로 절단되지 않고, 둥근 모양으로 연마되어 금속에 잘린 구멍에 넣고 얇은 철사로 고정된 ''카보숑'' 형태로 되어 있다. 빛이 비치면 보석이 내부에서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왕관은 사파이어, 에메랄드, 자수정 등 144개의 보석과 같은 수의 진주로 장식되어 있다. 성 에머람 황금 코덱스와 에흐터나흐 황금 코덱스와 같은 귀중한 책 표지에 사용된것과 유사하게 보석 장식이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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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판 (Bildplatten) ====

더 작은 네 개의 판, 즉 '그림판'(''Bildplatten'')은 성경의 인물과 장면을 클로이존네 에나멜로 표현했으며, 비잔틴 "침몰(Senkschmelz)" 스타일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에나멜 처리된 각 판은 융기된 필리그리 세팅에 파란색 사파이어와 진주로 둘러싸여 있다.[7]

  • 오른쪽 앞면 판에는 "나로 인해 왕들이 통치한다"(''P[er] ME REGES REGNANT''; 잠언 8:15)라는 빨간색 에나멜 비문 아래 두 체루빔 사이에 있는 위엄을 갖춘 그리스도가 묘사되어 있다.
  • 오른쪽 뒷면 판에는 침대에 앉아 있는 히스기야 왕에게 말하는 예언자 이사야가 묘사되어 있다. 이사야는 "보라, 내가 네 생명에 십오 년을 더하리라"(열왕기하 20:6)라는 글이 적힌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이사야와 히스기야 위에는 "ISAIAS P[ro]PHETA · EZECHIAS REX"라는 빨간색 에나멜로 된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왼쪽 앞면 판에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라"(잠언 3:7)라는 글이 적힌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솔로몬 왕이 묘사되어 있으며, 그 위에 "REX SALOMON"이라는 빨간색 에나멜로 된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왼쪽 뒷면 판에는 "유명한 왕은 정의를 행하는 것을 기뻐한다"(시편 99:4)라는 글이 적힌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다윗 왕이 묘사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는 그의 이름이 "REX DAVID"라는 빨간색 에나멜로 새겨져 있다.


==== 돌판 (Steinplatten) ====

다른 네 개의 판, 즉 '돌판'(''Steinplatten'')은 다양한 크기로 되어 있으며 융기된 필리그리 세팅에 귀한 돌과 진주로만 장식되어 있다. 앞면과 뒷면 판에 있는 열두 개의 돌은 아마도 유대교 대제사장의 흉갑 또는 ''호센''(출애굽기 39:9-14)에 있는 열두 개의 돌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석(요한계시록 21:19-21)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일 것이다.

앞면 판의 중앙 상단 돌은 유명한 돌을 대신하는 삼각형 사파이어로, 현재는 사라진 ''와이즈''(즉, '고아'라고 불림)로 알려졌으며, 아마도 포도주색 불꽃이 있는 커다란 흰색 오팔이거나, 유별나게 빛나는 가넷 또는 붉은색 지르콘이었으며 중세 시대의 전설의 대상이었다. 중세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알베르투스 대제는 1250년에 그것에 대해 기록했다.

언제, 왜 황실 왕관에서 제거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마지막 언급은 1350년 카를 4세가 명령한 재고 목록에 있다.

왕관은 앞면에서 뒷면 판까지 "로마인의 왕"(''Rex Romanorum'')이라고 불린 최초의 독일 군주인 콘라트 2세에게 속했을 수도 있는 이름과 제국 양식이 새겨진 단일 아치(후프)를 가지고 있다.[8] 이 아치의 왼쪽에는 "신의 은총으로" (''CHVONRADUS DEI GRATIA'')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ROMANORU[M] IMPERATOR AUG[USTUS]'')가 새겨져 있다.[9] 앞면 판 위와 아치 앞에는 헨리 2세에게 속했던 가슴 십자가였으며 나중에 황실 왕관에 부착된 십자가가 있다.[1] 아치와 십자가는 콘라트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양쪽 돌판에는 각각 세 개의 작은 구멍이 있는데, 아마도 ''펜딜리아''로 알려진 펜던트 보석이 달린 체인이 걸려 있었을 것이다. 이것들은 현재는 사라진 비잔틴 황제의 왕관의 특징이었으며,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에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모자이크 초상화에서도 볼 수 있다.

왕관 내부의 현재 붉은 벨벳 모자는 17세기의 것이다. 이전에 황실 왕관은 미터 위에 착용했다.

3. 2. 1. 그림판 (Bildplatten)

왕관의 각 판은 약 22캐럿의 고순도 으로 만들어져 왕관에 "버터"색을 띠게 하며, 진주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보석은 패싯으로 절단되지 않았지만(왕관이 만들어졌을 때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기술), 둥근 모양으로 연마되어 금속에 잘린 구멍에 넣고 얇은 철사로 고정된 ''카보숑''으로 고정되었다. 그 결과 빛이 비치면 보석이 내부에서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왕관은 사파이어, 에메랄드, 자수정을 포함한 144개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으며(비잔틴 황실 의전에 따라 파란색, 녹색, 보라색의 보석은 황제에게 적합하다), 약 같은 수의 진주가 장식되어 있다.

더 작은 네 개의 판, 즉 '그림판'(''Bildplatten'')은 성경의 인물과 장면을 클로이존네 에나멜로 표현했으며, 비잔틴 "침몰(Senkschmelz)" 스타일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에나멜 처리된 각 판은 융기된 필리그리 세팅에 파란색 사파이어와 진주로 둘러싸여 있다.[7]

  • 오른쪽 앞면 판에는 "나로 인해 왕들이 통치한다"(''P[er] ME REGES REGNANT''; 잠언 8:15)라는 빨간색 에나멜 비문 아래 두 체루빔 사이에 있는 위엄을 갖춘 그리스도가 묘사되어 있다.
  • 오른쪽 뒷면 판에는 침대에 앉아 있는 히스기야 왕에게 말하는 예언자 이사야가 묘사되어 있다. 이사야는 "보라, 내가 네 생명에 십오 년을 더하리라"(열왕기하 20:6)라는 글이 적힌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이사야와 히스기야 위에는 "ISAIAS P[ro]PHETA · EZECHIAS REX"라는 빨간색 에나멜로 된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왼쪽 앞면 판에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라"(잠언 3:7)라는 글이 적힌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솔로몬 왕이 묘사되어 있으며, 그 위에 "REX SALOMON"이라는 빨간색 에나멜로 된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왼쪽 뒷면 판에는 "유명한 왕은 정의를 행하는 것을 기뻐한다"(시편 99:4)라는 글이 적힌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다윗 왕이 묘사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는 그의 이름이 "REX DAVID"라는 빨간색 에나멜로 새겨져 있다.


다른 네 개의 판, 즉 '돌판'(''Steinplatten'')은 다양한 크기로 되어 있으며 융기된 필리그리 세팅에 귀한 돌과 진주로만 장식되어 있다. 앞면과 뒷면 판에 있는 열두 개의 돌은 아마도 유대교 대제사장의 흉갑 또는 ''호센''(출애굽기 39:9-14)에 있는 열두 개의 돌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석(요한계시록 21:19-21)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일 것이다.

3. 2. 2. 돌판 (Steinplat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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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네 개의 판, 즉 '돌판'(''Steinplatten'')은 다양한 크기로 되어 있으며 융기된 필리그리 세팅에 귀한 돌과 진주로만 장식되어 있다. 앞면과 뒷면 판에 있는 열두 개의 돌은 아마도 유대교 대제사장의 흉갑 또는 ''호센''(출애굽기 39:9-14)에 있는 열두 개의 돌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석(요한계시록 21:19-21)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일 것이다.

앞면 판의 중앙 상단 돌은 유명한 돌을 대신하는 삼각형 사파이어로, 현재는 사라진 ''와이즈''(즉, '고아'라고 불림)로 알려졌으며, 아마도 포도주색 불꽃이 있는 커다란 흰색 오팔이거나, 유별나게 빛나는 가넷 또는 붉은색 지르콘이었으며 중세 시대의 전설의 대상이었다. 중세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알베르투스 대제는 1250년에 그것에 대해 기록했다.

언제, 왜 황실 왕관에서 제거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마지막 언급은 1350년 카를 4세가 명령한 재고 목록에 있다.

3. 3. 상징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관은 둥근 모양이 아닌 팔각형 모양으로, 비잔틴 황제의 왕관이나 아헨의 아헨 궁정 예배당의 모양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7] 왕관의 여덟 개 판은 상단이 아치형이며, 두 개의 철제 띠가 금색 리벳으로 고정되어 있다. 각 판은 약 22캐럿의 고순도 으로 만들어졌으며, 진주와 카보숑 형태로 연마된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7][8][9]

왕관에는 사파이어, 에메랄드, 자수정 등 144개의 보석과 진주가 장식되어 있다.[7] 네 개의 작은 판에는 성경의 인물과 장면이 클로이존네 에나멜로 표현되어 있으며, 비잔틴 "침몰(Senkschmelz)" 스타일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7][8] 오른쪽 앞면 판에는 두 체루빔 사이에 있는 위엄을 갖춘 그리스도와 "나로 인해 왕들이 통치한다"(''P[er] ME REGES REGNANT'')라는 비문이,[7] 오른쪽 뒷면 판에는 히스기야 왕에게 말하는 예언자 이사야와 관련 구절 및 "ISAIAS P[ro]PHETA · EZECHIAS REX"라는 비문이 묘사되어 있다. 왼쪽 앞면 판에는 솔로몬 왕과 "여호와를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라"라는 구절, "REX SALOMON"이라는 비문이, 왼쪽 뒷면 판에는 다윗 왕과 "유명한 왕은 정의를 행하는 것을 기뻐한다"라는 구절, "REX DAVID"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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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성서 묘사


다른 네 개의 판은 귀한 돌과 진주로만 장식되어 있으며, 앞면 중앙 상단의 삼각형 사파이어는 '와이즈'(고아)라고 불렸던 오팔 또는 가넷, 지르콘으로 추정되는 보석을 대체한 것이다.[7] 왕관 앞면에서 뒷면 판까지 이어지는 아치에는 "로마인의 왕"(''Rex Romanorum'')이었던 콘라트 2세의 이름과 제국 양식이 새겨져 있다.[7][8][9] 아치 왼쪽에는 "신의 은총으로" (''CHVONRADUS DEI GRATIA''), 오른쪽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ROMANORU[M] IMPERATOR AUG[USTUS]'')라는 문구가 시드 진주로 새겨져 있다.[7][9] 앞면 판 위에는 헨리 2세의 가슴 십자가였던 보석 십자가가 부착되어 있다.[1] 양쪽 돌판에는 펜딜리아가 걸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구멍이 세 개씩 있다.[7] 왕관 내부의 붉은 벨벳 모자는 17세기의 것이다.[7]

4. 독일 제국의 문장관

독일 제국의 문장관


제국관은 1871년 독일 제국과 그 황제의 문장에 맞춰 설계된 독일 국가관의 영감이 되었다.[5] 후자의 경우, 원래의 단일 아치와 정면 십자가 대신 작은 보주와 십자가를 지지하는 네 개의 반아치를 가지고 있었다.[5]

이러한 변화는 빌헬름 시대의 관을 신성 로마 제국의 강력한 유산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면서, 빈(독일 제국 외부)에 보관된 관과 구별하기 위해 이루어졌다.[5] 현재는 분실된 나무 모형이 제작되었지만, 1918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실제 관은 제작되지 않았다.[5]

그 결과, 비록 그 모형에서 실제 관이 존재하는 것처럼 묘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니더발트 기념비(1871-1883), 헤르만 비슬리체누스의 고슬라 황궁의 "제국의 신격화" 그림(), 또는 베를린의 바이덴담 다리(1896) 등에서, 이는 단지 문장관으로만 남았다.[5]

5. 복제품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명령에 따라 1915년 동일한 복제품이 제작되어 아헨에 전시되었다. 이 복제품은 현재 14세기에 샤를마뉴의 아헨 궁전 유적 위에 세워진 아헨 시청의 "대관식 홀(Krönungssaal)"에 보관되어 있다.

프랑크푸르트 역사 박물관에도 왕관과 제국 레갈리아 사본이 있으며, 옛 팔츠 선제후국의 트리펠스 성 요새와 성 바츨라프 왕관의 사본과 함께 체코의 카를슈테인 성에도 보관되어 있다.

뢰머(Römer)를 위해 1913년에 제작되었으며, 현재 프랑크푸르트 역사 박물관에 소장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관은 2008년에 주조된 고액 기념 주화인 100유로 신성 로마 제국 제국관 기념 주화의 주요 모티프로 선정되었다. 앞면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관이, 뒷면에는 오토 1세 황제가 로마의 구 성 베드로 대성전을 배경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6. 기념

1915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명령에 따라 제국관의 동일한 사본이 제작되어 아헨에 전시되었으며, 현재도 14세기에 샤를마뉴의 아헨 궁전 유적 위에 세워진 아헨 시청의 "대관식 홀(Krönungssaal)"에 보관되어 있다.

프랑크푸르트 역사 박물관에도 왕관과 제국 레갈리아 사본이 있으며, 옛 팔츠 선제후국의 트리펠스 성 요새와 성 바츨라프 왕관의 사본과 함께 체코의 카를슈테인 성에도 보관되어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관은 2008년에 주조된 고액 기념 주화인 100유로 신성 로마 제국 제국관 기념 주화의 주요 모티프로 선정되었다. 앞면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관이, 뒷면에는 오토 1세 황제가 로마의 구 성 베드로 대성전을 배경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참조

[1] 문서 The Encyclopædia Britannica states that the Imperial Crown was probably made for Otto I in the workshops of [[Reichenau Abbey]].
[2] 서적 Frederick Barbarossa: The Prince and the Myth Yale University Press 2016
[3] 웹사이트 In Memoriam, 1996, Walter Horn, History of Art: Berkeley https://oac.cdlib.or[...] 2023-05-20
[4] 웹사이트 Recovering Gold and Regalia: a Monuments Man investigates https://www.aaa.si.e[...] 2014-04-11
[5] 웹사이트 From Charlemagne to Hitler: The Imperial Crown of the Holy Roman Empire and its Symbolism https://cpb-eu-w2.wp[...] 2017-00-00
[6] 웹사이트 History of the collection https://www.kaiserli[...]
[7] 문서 The depiction of the Lord of Host or God the Father as a Holy Roman Emperor becomes commonplace in medieval art (e.g., the [[Vienna Coronation Gospels]]), thus, in turn making the emperor himself a living image of God in medieval political thought and imperial propaganda.
[8] 서적 A History of Medieval Political Thought: 300–1450 Routledge 1996
[9] 문서 The Encyclopædia Britannica suggests that originally this arch was replaced for each succeeding emperor until after the reign of Conrad II, when the present arch was kept permanent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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