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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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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창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을 의미하며, 요한 복음서에 언급되어 있다. 역사적으로는 여러 성창 후보들이 존재하며, 바티칸의 창, 빈의 창, 에치미아진의 성창, 안티오키아의 창 등이 있다. 빈의 창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유물로 여겨졌으며, 아서왕 전설과 같은 문학 작품에서도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한다. 현대에는 오컬트적 해석과 과학적 검증을 둘러싼 논란이 있으며, 한국 개신교, 천주교, 사회에서도 다양한 관점으로 논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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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창

2. 성서의 언급

성창은 요한 복음서에만 유일하게 언급되며, 공관 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요한 19장 34절에 따르면, 로마 병사 중 하나가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그 즉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1] λόγχη|lonkhē|롱케el라는 단어가 요한 복음서에서 사용되었다.[1]

이 병사의 이름은 복음서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외경인 니고데모 복음서에서 롱기누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3][4] 이후 기독교 전통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라불라 복음서의 세밀화에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 창을 찌르는 병사의 머리 위에 ΛΟΓΙΝΟΣ|LOGINOS|로기노스el라고 쓰여 있기도 하다.[5]

전통적으로 예수를 찌른 로마 병사는 성 롱기누스라고 불리는데, 그는 백내장을 앓고 있었는데 창을 찌를 때 떨어진 예수의 피가 눈에 떨어지자 시력을 회복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3. 성창 후보들

역사적으로 성창이라고 주장되는 유물은 여러 곳에 존재하며, 그 진위 여부는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다. 다음은 성창으로 주장되는 유물들이다.



빈의 황실보물관에 전시된 성창


성창 위 명각

3. 1. 바티칸의 창

1492년 오스만 제국술탄 바예지드 2세예루살렘 성분묘교회에 있던 것으로 알려진 이 창을 교황 인노첸시오 8세에게 선물했다.[5] 바예지드 2세는 술탄의 자리를 노리던 동생을 이탈리아에 유폐하기 위한 교환 조건으로 창을 내세웠다. 이후 이 창은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 보관되어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묘사된 사진만으로는 로마의 것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성창 유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성 롱기누스 조각상 위 기둥에 조각된 로지아에 보관되어 있다.[6][7]

성창 유물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루살렘 성무일도서''(약 530년)는 예루살렘 성묘 교회에 전시된 창을 묘사하고 있다.[8][3] 카시오도루스는 ''Expositio Psalmorum''(ca. 540-548)에서 예루살렘에 창이 계속 존재한다고 주장했다.[9][10] 피아첸차 순례자 (ca. 570)는 창을 시온 교회에 있는것으로 기록했다.[11][12] 투르의 그레고리는 ''Libri Miraculorum''(ca. 574-594)에서 창과 수난의 다른 유물들을 묘사했다.[13][14]

잔 로렌초 베르니니 (1638)의 성 롱기누스 조각상


18세기 중반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생트 샤펠 창의 정확한 그림을 얻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창과 비교했다. 그는 두 조각이 원래 하나의 창이었음을 확인했다고 전해진다.[57]


3. 2. 빈의 창 (호프부르크의 창)

신성 로마 황제의 레갈리아 중 하나인 성창은 오토 1세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오랫동안 뉘른베르크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나폴레옹의 침공 이후 에서 보관되고 있다. 안슐루스 이후에는 나치에 의해 뉘른베르크로 반환되었지만, 종전 후에는 빈으로 돌아왔다.[87]

빈에 있는 성창은 오스트리아 빈의 호프부르크 왕궁에 있는 황실 보물고에 전시되어 있다.[58] 이 창은 전형적인 날개 달린 창의 머리 부분으로,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것이다.[58]

창 머리는 카를 4세가 1354년경에 추가한 독특한 금색 커프스로 감싸져 있다. 이 커프스에는 "LANCEA ET CLAVVS DOMINI"("주의 창과 못")라는 라틴어가 새겨져 있으며, 이 창이 한때 롱기누스에 의해 사용되었고 성스러운 못 중 하나가 창 머리에 통합되었음을 확인한다.[53][61] 이 금색 커프스는 하인리히 4세를 위해 1084년에서 1105년 사이에 제작된 더 오래된 은색 커프스를 덮고 있으며, 은색 커프스 역시 성스러운 못을 언급하지만 창 머리를 성 마우리시우스의 창으로 식별한다. 은색 커프스의 양쪽에 있는 금색 줄무늬에는 또 다른 라틴어 비문이 새겨져 있다.[59][61]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에 따르면, 창을 처음 얻은 독일 군주는 926년에 이를 구입한 헨리 1세였다.[59] 헨리는 부르고뉴의 루돌프 2세로부터 구입했다.[60][61] 루돌프는 "사무손 백작"으로부터 창을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60][59] 코르베의 비두킨트에 따르면, 독일의 콘라트 1세는 918년에 죽음을 앞두고 신성한 창을 포함한 자신의 왕실 휘장을 헨리에게 보냈다. 헨리는 그의 뒤를 이어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62]

933년 3월 15일, 헨리는 리아데 전투에서 마자르족을 상대로 자신의 군대를 이끌때 창을 들었다. 그 이후로 오토 왕조는 창을 승리를 보장하는 부적으로 여겼다.[59]

오토 3세는 창의 두 개의 복제품을 의뢰했다. 그 중 하나는 996년에 헝가리의 바이크 공에게 주어졌고, 그는 나중에 헝가리의 이슈트반 1세로 즉위했다.[59] 다른 하나는 1000년 그니에즈노 회의에서 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 1세에게 증정되었다.[63][64] 폴란드 창은 현재 크라쿠프의 요한 바오로 2세 대성당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65]

1424년, 지기스문트는 창을 포함한 유물들을 자신의 수도 프라하에서 자신의 출생지인 뉘른베르크로 옮겼고, 영원히 그곳에 보관하도록 명했다.[68]

1796년 봄, 프랑스 혁명군이 뉘른베르크에 접근하자, 지역 당국은 제국 보물을 요한 알로이스 폰 휘겔에게 넘겼다.[69][70]

빈 미술사 박물관은 창의 연대를 8세기로 추정했다.[58] 영국의 금속 공학자 로버트 페더는 2003년 1월 다큐멘터리를 위해 이를 시험했다.[71][72] 그는 X선 회절, 형광 테스트 및 기타 비침습적 절차를 기반으로 창의 주요 몸통을 늦어도 7세기로 추정했다.[72]

얼마후, 빈의 고고학 연구를 위한 학제 간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X선 및 기타 기술을 사용하여 다양한 창을 검사하고 빈 창이 8세기에서 9세기 초에 제작되었으며 못은 동일한 금속으로 제작되었으며 서기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을 배제했음을 결정했다.[73]

3. 3. 에치미아진의 성창

바가르샤파트에 보관된 성창


성창은 아르메니아의 종교적 수도인 바가르샤파트(구 에치미아진)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전에는 게가르드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었다.[75] 13세기 아르메니아어 필사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 유물"에 따르면, 예수를 찌른 창은 사도 타대오에 의해 아르메니아로 가져와졌다고 한다.[75]

1655년, 프랑스 여행가 장-밥티스트 타베르니에는 아르메니아에서 이 유물을 본 최초의 서양인이었다. 1805년 러시아군이 수도원을 점령하면서 유물은 조지아 트빌리시로 옮겨졌다가,[76] 이후 아르메니아로 반환되었다. 현재는 바가르샤파트의 마누기안 박물관에 17세기 성유물함에 안치되어 전시되어 있다. 매년 사도 성 타대오와 성 바르톨로메오 기념일 동안 유물이 예배를 위해 꺼내진다.[77]

일화에 따르면, 성창을 가지고 온 사람은 12사도 중 한 명인 타대오이다.[87] 타대오는 성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현지 이교도들에게 두려움을 받아 목이 잘렸다고 한다. 타대오는 죽기 전에 몇몇 이교도를 기독교로 개종시켰고, 기독교인들은 타대오가 죽은 후 성창을 비밀 동굴에 숨겼는데, 현재 게가르트 수도원이 있는 장소이다. 성창은 그곳에서 200년 동안 잠들었다고 전해진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창이 로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며, 예수 시대의 유대인 병사가 사용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3. 4. 안티오키아의 창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은자 피에르가 롱기누스의 창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78] 그러나 이 주장은 여러 기록에서 다르게 나타나는데, 안나 콤네나는 은자 피에르를, 다른 기록에서는 피에르 바르톨로메오나 보에몽 부하의 자작극으로 언급한다. 성 안드레아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베드로 바르톨로메오는 안티오키아의 성 베드로 교회에서 창을 발견했다고 주장했고,[78] 많은 십자군은 이를 안티오키아 전투 승리의 징표로 여겼다.[78][20]

안티오키아에서 성창의 발견


크리스토퍼 총대주교의 전기에 따르면, 성창으로 여겨지는 유물은 10세기 초부터 성 베드로 교회의 보물 중 하나였다고 한다.[79] 1084년 셀주크 제국 군대로부터 숨겨졌다가 1098년에 십자군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주장도 있다.[80]

하지만 창의 진위 여부에 대한 의심이 커지자, 바르톨로메오는 신명 재판을 자청하여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으나, 심한 화상을 입고 며칠 후 사망했다.

4. 역사적 기록과 논란

예수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600년 후, 예루살렘페르시아군에 점령당했다. 이때 이 창은 두 개로 나뉘었는데,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창의 앞부분이 부러진 것이었다.[87]

창의 앞부분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옮겨져 보석으로 장식되어 십자가 중심부에 묻혔다. 그리고 당시 기독교 교회였던 콘스탄티노플 소재 아야 소피아에서 보관되었는데, 80년 뒤에 본체도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와서 한동안 그곳에 보관되었다. 600년 뒤 프랑스 국왕 루이 9세가 창의 앞부분 조각을 사들였다. 신과의 연결을 나타내는 성유물을 가진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로써 그 나라의 위신을 높이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리에 보관되던 창의 앞부분은 프랑스 혁명으로 행방불명되었다.

한편 창의 본체는 15세기에 이슬람 세력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던 때에도 그 자리에 보존되었다. 1492년오스만 제국술탄 바예지드 2세예루살렘 소재 성묘 교회에 존재하던 것으로 알려진 이 창을 교황 인노첸시오 8세에게 기증했다. 술탄의 자리를 노리던 동생을 이탈리아에 유폐하기 위해 창을 교환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다. 이후 창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보관되어 공개되지 않고 있다.

4. 1. 십자군 시대

제1차 십자군안티오키아 공방전 당시 은자 피에르는 론지노의 창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 전투에서 십자군은 승리했지만, 결국 피에르는 성창의 진위 여부 때문에 시죄법 재판을 받고 죽었다. 이로 인해 피에르와 성창을 옹호하던 생질의 레몽이 십자군 내부에서 약해지고, 보에몽의 입김이 세지게 되었다.[78]

성창의 발견자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안나 콤네나 공주의 기록에 따르면 은자 피에르가 발견했다고 하며, 또 다른 기록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나타난다.

  • 은자 피에르와 동명이인인 피에르 바톨로메오가 발견했다는 기록[78]
  • 보에몽 밑의 어느 꾀바른 부하의 자작극이라는 기록


1098년 6월 안티오키아 공방전 동안, 베드로 바르톨로메오라는 수도사는 자신이 성 안드레로부터 성창이 안티오키아의 성 베드로 교회에 묻혀 있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보고했다. 대성당에서 많은 발굴 작업이 이루어진 후, 바르톨로메오는 창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교황 사절인 아데마르 드 르퓌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의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십자군은 이 창의 발견을 안티오키아 전투에서의 승리에 기여했다고 여겼으며, 이 전투는 공방전을 종식시키고 도시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78][20]

크리스토퍼 총대주교의 전기와 같은 그리스 정교회 자료에 따르면, 성창으로 여겨지는 유물이 10세기 초부터 성 베드로 교회의 보물 중 하나였다고 한다.[79] 역사가 클라우스-페터 토트는 이 유물이 1084년 셀주크 제국의 군대로부터 숨기기 위해 매장되었으며, 1098년에 십자군이 발견할 수 있도록 했다고 주장했다.[80]

제1차 십자군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고전할 때, 툴루즈 백작 레몽 휘하의 페트루스 바르톨로메오라는 자가 성 안드레아의 계시를 통해 성창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십자군 장병들의 사기가 높아져 승리를 거두었지만, 창의 진위를 의심하는 자들도 많았기에 스스로 신명재판을 자청했다. 페트루스 바르톨로메오는 창을 들고 불길에 뛰어들었으나 화상을 심하게 입고 며칠 후 사망했으며, 창은 그 후 행방불명되었다.

4. 2. 중세 시대

제1차 십자군 전투에서 성창을 앞세우는 르퓌의 아데마르(주교관을 쓴 사람).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6백 년 뒤, 예루살렘은 페르시아군에 점령당했다. 이때 이 창은 두 개로 나뉘었다.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창의 앞부분이 부러진 것이었다.[87]

앞부분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옮겨져 보석으로 장식되어 십자가 중심부에 묻혔다. 그리고 당시 기독교 교회였던 콘스탄티노플 소재 아야 소피아에서 거두었는데, 80년 뒤에 본체도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와서 한동안 그곳에 보관되었다. 600년 뒤 프랑스 국왕 루이 9세가 창의 앞부분 조각을 사들였다. 신과의 연결을 나타내는 성유물(聖遺物)을 가진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로써 그 나라의 위신을 높이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리에 보관되던 창의 앞부분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행방불명되었다.

한편 창의 본체는 15세기에 이슬람 세력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던 때에도 그 자리에 보존되었다. 1492년오스만 제국술탄 바예지드 2세는 예루살렘 소재 성묘 교회에 존재하던 것으로 알려진 이 창을 교황 인노첸시오 8세에게 기증했다. 술탄의 자리를 노리던 동생을 이탈리아에 유폐하기 위해 창을 교환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다. 이후 창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보관되어 공개되지 않고 있다.

1차 십자군안티오키아 공방전 당시 은자 피에르는 롱기누스의 창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 전투에서 십자군은 승리했지만 결국 피에르는 성창의 진위 여부때문에 시죄법 재판을 받고, 죽었다. 이로 인해 피에르와 성창을 옹호하던 생질의 레몽이 십자군 내부에서 약해지고, 보에몽의 입김이 세지게 된다.

성창의 발견자에 대한 설은 여러가지가 있다. 은자 피에르가 발견했다는 설은 안나 콤네나의 기록이고, 또다른 기록으로는 피에르 바톨로메오가 발견했다는 설과 보에몽 밑의 어느 꾀바른 부하의 자작극이라는 설 등이 있다.

4. 3.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레갈리아 중 하나인 Reichskleinodien|제국 보물de 성창은 오토 1세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오랫동안 뉘른베르크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나폴레옹의 침공 이후 에서 보관되고 있다. 안슐루스 이후에는 나치 정권에 의해 뉘른베르크로 반환되었지만, 종전 후에는 빈으로 돌아왔다.[87]

로버트 페더의 상세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창의 대부분은 철로 만들어졌다. 바깥쪽을 덮고 있는 금제 칼집에는 "신의 못, 신의 창"이라고 적혀 있다. 이는 금제 칼집 아래에 십자가가 그려진 못이 박혀 있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청소 시 분해된 사진에서 황금 칼집 아래에 또 한 겹의 은제 칼집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중 한 장에는 라틴어로 "성 마우리치우스의 창"이라고 적혀 있었다. 은제 칼집의 다른 부분에는 "로마 황제 하인리히 3세가 성스러운 못과 성 마우리치우스의 창을 보강하기 위해 이 은제 칼집을 만들게 했다"고 라틴어로 적혀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창은 이집트에서 로마 군대의 대장이었던 마우리치우스의 것이었다. 마우리치우스와 그의 부대는 기독교인이었다. 286년,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그는 창을 들고 유럽으로 원정했다. 스위스 레만 호 주변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였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반란이 진압된 상태였다. 반란군이 기독교인임을 알게 된 마우리치우스는 황제에게 처형을 거부할 것을 간청했다. 이에 격분한 황제는 마우리치우스와 그의 부대 전원을 처형하라고 명령했고, 죽음을 앞두고도 흔들리지 않는 마우리치우스의 신앙심은 중세 기사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그는 기사 및 전사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마우리치우스 처형 후, 창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것이 되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동서로 분열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제국의 패권을 건 전투 직전, 빛나는 십자가와 "이 표식 아래, 너는 승리하리라"라는 문구를 꿈에서 보았다. 이에 감동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자신의 병사들의 방패에,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머리글자를 그리게 했다. 더 나아가, 전투에 성창을 가지고 임하여 승리를 거두고 기독교에 기울었다고 한다. 후년에 제국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종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기독교를 공인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수백 년 후, 창은 카롤루스 대제의 손에 들어갔다. 그가 교황으로부터 황제로 임명된 후, 성창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된다.

이후, 은제 칼집 위에 황금 칼집을 씌운 것은 카를 4세로 여겨진다. 그는 차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노리고 있었다. 카를 4세의 후손들이 생활고에 시달리자, 뉘른베르크 시 의회에 팔아넘겼다.[87]

2003년 1월, 영국의 야금학자이자 기술공학 작가인 로버트 페더는 다큐멘터리를 위해 창의 테스트를 진행했다.[89][90][91] 실험실 환경에서 조사할 뿐만 아니라, 창을 지탱하고 있는 금과 은의 섬세한 칼집을 제거하는 전례 없는 허가를 받았다. X선 회절, 형광 검사, 기타 보존적 치료법에 의한 조사를 바탕으로, 창의 본체 연대를 늦어도 7세기로 추정했다.[89][91] 못(오랫동안 십자가의 못이라고 주장되어 왔으며, 칼날에 박혀 있고, 작은 놋쇠 십자가로 고정되어 있었다)에 대해서도, 이후 곧 빈 고고학 연구소의 연구자들이 X선 등의 기술을 사용하여 다양한 창을 조사한 결과, 창은 8세기 무렵부터 9세기 초의 것이며, 못 또한 같은 금속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밝혀져, 서기 1세기의 시대와는 관련이 없다고 단정되었다.[92]

5. 전설과 문학 속 성창

성창은 아서 왕 전설, 특히 성배 탐색 이야기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한다.

5. 1. 아서 왕 전설

아서왕 이야기에서 아서왕은 대마법사 멀린의 유언에 따라 모든 원탁의 기사들에게 성배와 성창을 찾으라 명했다. 그러나 성배와 성창을 찾은 기사는 퍼시발, 보호드, 갤러해드 세 명 정도였고, 이것은 완벽한 도덕성을 가진 자만이 성배와 성창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기사들이 찾지 못했다는 것은 원탁의 기사들 상당수가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뜻이었다. 그 뒤 원탁은 사분오열되어, 랜슬롯이 아서왕의 아내 기네비어와 내연 관계로 도주하고, 기사들은 아서왕파와 랜슬롯파로 나뉘어 대결 끝에 베디비어 경만이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아르날도 델리라의 작품, 3막에 등장하는 성창(파르지팔)


성창은 크레티앙 드 트루아가 미완성으로 남긴 12세기 로맨스 소설인 ''그라알 이야기, 페르세발''에 묘사된 피 흘리는 창과 동일시되었다.[81] 이 이야기는 또한 어부 왕을 다치게 한 ''자벨로''를 언급하는데, 이는 피 흘리는 창과 동일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81][82] 크레티앙은 피 흘리는 창에 초자연적인 파괴력을 부여하는데, 이는 어떤 기독교 전통과도 일치하지 않는다.[81]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레티앙의 시를 이어서 쓴 사람들은 피 흘리는 창의 신비를 요한복음 19:34에 나오는 창과 동일시하여 설명하려 했다.[81][3][83]

크레티앙의 ''페르세발''은 볼프람 폰 에셴바흐에 의해 독일 서사시 ''파르치팔''로 각색되었다.[84][85] 크레티앙과 마찬가지로, 볼프람은 피 흘리는 창을 묘사하는데, 이는 롱기누스의 창과 쉽게 일치될 수 없는 방식이다.[81] ''파르치팔''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1882년 오페라 ''파르지팔''의 주요 자료가 되었으며, 여기서 어부 왕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에 의해 부상을 입는다.[86]

기독교 설화적 성격이 짙은 아서 왕 전설의 성배 탐색 부분에도 성창이 등장한다.

성배의 성 카보넥을 방문한 원탁의 기사들 앞에 성배와 함께 나타나, 창끝에서 피를 흘리는 하얀 창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5. 2. 문학 작품

크레티앙 드 트루아의 미완성 로맨스 소설 ''그라알 이야기, 페르세발''(12세기)에는 성창이 피 흘리는 창으로 묘사되었다.[81] 이 이야기에는 어부 왕을 다치게 한 ''자벨로''도 언급되는데, 이는 피 흘리는 창과 동일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81][82] 크레티앙은 피 흘리는 창에 초자연적인 파괴력을 부여했지만, 이는 기독교 전통과는 일치하지 않는다.[81] 그럼에도 크레티앙의 시를 이어서 쓴 작가들은 피 흘리는 창의 신비를 요한복음 19:34에 나오는 창과 동일시하여 설명하려 했다.[81][3][83]

볼프람 폰 에셴바흐는 크레티앙의 ''페르세발''을 독일 서사시 ''파르치팔''로 각색했다.[84][85] 볼프람 역시 피 흘리는 창을 묘사하지만, 이는 롱기누스의 창과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81] 리하르트 바그너의 1882년 오페라 ''파르지팔''은 ''파르치팔''을 주요 자료로 삼았으며, 여기서는 어부 왕이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에 의해 부상을 입는다.[86]

아서 왕 전설의 성배 탐색 부분(기독교 설화적 성격이 짙음)에도 성창이 등장한다. 원탁의 기사들이 성배의 성 카보넥을 방문했을 때, 성배와 함께 창끝에서 피를 흘리는 하얀 창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6. 현대적 의미와 논란

성창은 현대에 들어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며, 그 진위 여부를 둘러싼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일부 오컬트 전통에서는 성창을 소유한 자에게 세계를 지배하는 힘이 주어진다고 믿는다.[92] 아돌프 히틀러의 호프부르크 왕궁에서 성창에 영감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나치 독일이 성창을 뉘른베르크로 옮긴 것을 신성 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자처한 행위로 해석하기도 한다(대게르만 제국 참조).

빈의 창은 여러 차례 과학적 조사를 거쳤지만, 정확한 제작 연대와 진위는 아직 논란의 대상이다. 2003년 영국의 야금학자 로버트 페더는 창을 조사하여 늦어도 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했다.[89][91] 그러나 빈 고고학 연구소는 창이 8세기에서 9세기 초에 만들어졌으며, 창에 박힌 못 또한 같은 금속으로 만들어져 서기 1세기의 유물과는 관련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92]

6. 1. 오컬트적 해석

일부 오컬트 전통에서는 성창을 소유한 자에게 세계를 지배하는 힘을 부여한다는 믿음이 존재한다.[92] 아돌프 히틀러의 호프부르크 왕궁에서 성창에 영감을 받았다는 속설도 있으며, 나치 독일이 성창을 뉘른베르크로 옮긴 것을 신성 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자처한 행위로 해석하기도 한다(대게르만 제국 참조).

6. 2. 과학적 검증

빈의 창은 여러 차례 과학적 조사를 받았지만, 정확한 제작 연대와 진위 여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2003년 1월, 영국의 야금학자이자 기술공학 작가인 로버트 페더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창을 조사했다.[89][90][91] 금과 은으로 된 칼집을 제거하고 X선 회절, 형광 검사 등 보존적 치료법을 통해 조사한 결과, 창의 본체는 늦어도 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했다.[89][91]

하지만 빈 고고학 연구소의 연구자들은 X선 등의 기술을 사용하여 다양한 창을 조사한 결과, 창은 8세기 무렵부터 9세기 초의 것이며, (창에 박혀있는) 못 또한 같은 금속으로 만들어져 서기 1세기의 유물과는 관련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92]

7. 한국에서의 성창

한국 개신교는 성경에 기록된 성창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구원을 상징하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반면 한국 천주교는 성창을 성유물로 존경하지만,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더불어민주당 등 진보 진영은 성창을 종교적 상징보다는 역사적 유물로 보며, 관련 해석과 논란에 주목한다. 반면 국민의힘 등 보수 진영은 성창을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며, 영적 의미를 강조한다.

7. 1. 한국 개신교의 관점

요한 복음서 (19,31-37)는 성창에 관해 언급한 유일한 성경 기록이며, 다른 공관 복음서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복음서에 따르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로마 병사들은 예수의 다리를 부러뜨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미 숨을 거두셨기 때문에 다리를 부러뜨릴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로마 병사(외경에서 론지노로 불림)가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다.[19]

오리게네스는 이 현상을 기적으로 보았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나온 것처럼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교회(더 정확하게는 세례성사와 성체성사)가 나왔다고 해석한다.[19]

7. 2. 한국 천주교의 관점

요한 복음서(19,31-37)는 성창에 대해 언급한 유일한 성경 구절이며, 다른 공관 복음서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복음서에 따르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로마 병사들은 예수의 다리를 부러뜨리려 했다. 그러나 예수가 이미 숨을 거둔 것을 확인한 병사(외경에서 론지노로 불림)는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오리게네스는 피와 물이 동시에 나온 현상을 기적으로 보았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를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나온 것처럼,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교회(세례성사와 성체성사)가 탄생한 것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7. 3. 한국 사회에서의 논의

요한 복음서(19,31-37)에서만 성창에 대해 언급하며, 다른 공관 복음서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복음서에 따르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로마 병사들은 예수의 다리를 부러뜨리려 했다. 그러나 예수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리를 부러뜨릴 필요가 없었다. 한 로마 병사(외경에서 론지노로 나옴)가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다.[1]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요한 19,34)[1]

피와 물이 동시에 나온 것은 오리게네스에 의해 기적으로 여겨졌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를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나온 것처럼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교회(세례성사와 성체성사)가 나온 것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한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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