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라트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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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라트 3세는 1138년 로마 왕으로 선출된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첫 번째 독일 왕이었다. 그는 하인리히 4세의 외손자이자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로, 1125년 로타르 3세가 황제로 선출되자 대립왕으로 활동했다. 1135년 로타르 3세에게 굴복한 후, 1138년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오만공과의 갈등을 겪었다. 그는 제2차 십자군에 참여했으나 실패했고, 1152년 조카 프리드리히 3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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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트 3세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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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콘라트 3세 |
독일어 이름 | Konrad |
이탈리아어 이름 | Corrado |
작위 | |
독일 왕 (공식적으로 로마인의 왕) | 재위: 1138년 3월 7일 – 1152년 2월 15일 대관식: 1138년 3월 13일, 아헨 이전: 로타르 3세 이후: 프리드리히 1세 |
이탈리아 왕 | 재위: 1128년–1135년 대관식: 1128년 6월 29일, 밀라노 이전: 하인리히 5세 이후: 프리드리히 1세 |
가문 | |
왕가 | 호엔슈타우펜 가 |
아버지 | 프리드리히 1세 |
어머니 | 아그네스 폰 바이블링겐 |
배우자 | |
배우자 목록 | 게르트루트 폰 콤부르크 게르트루트 폰 슐츠바흐 |
자녀 | |
자녀 목록 | 하인리히 베렌가르 프리드리히 4세 |
생애 | |
출생 | 1093년 또는 1094년 |
사망 | 1152년 2월 15일 (59–60세) |
사망 장소 | 밤베르크, 바이에른 |
매장 장소 | 밤베르크 대성당 |
2. 생애
콘라트 3세는 1093년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의 딸인 아그네스와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1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1115년 숙부인 황제 하인리히 5세에 의해 프랑켄 공작으로 임명되었고, 1116년 형 프리드리히 2세와 함께 독일의 섭정으로 행세하였다.
1125년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하자, 선제후들은 상속권 원칙을 무시하고 주플린부르크 왕가의 작센 공작 로타르 3세를 황제로 선출했다. 콘라트는 이에 반발하여 1127년 12월 18일 뉘른베르크에서 대립왕이 되었고, 1128년 6월에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왕이 되었다.
1132년 독일로 돌아온 그는 형 프리드리히와 로타르 3세에게 계속 대항하였지만, 1135년 로타르를 황제로 인정하고 자신의 영지를 되찾는 데 주력했다. 1137년 로타르 3세가 죽자, 1138년 3월 7일 콘라트는 코블렌츠에서 로타르의 후계자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로타르 3세의 사위 하인리히 오만공은 바이에른과 작센에서 콘라트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콘라트는 하인리히 오만공에게서 모든 영토를 빼앗아 작센 공국을 알브레히트 곰에게, 바이에른 공국을 레오폴트 4세에게 주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오만공은 신하들의 충성을 유지했고, 1139년 그가 사망한 후에도 그의 아들 하인리히 사자공과 벨프 6세가 전쟁을 계속했다. 1142년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벨프 가문과 화해했다.
1142년 콘라트는 보헤미아 원정을 성공시켜 매부 블라디슬라프 2세를 보헤미아 군주로 임명하였다. 1146년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의 제2차 십자군 제창에 호응하여 십자군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아들 하인리히 베렝가르를 후계자로 정한 뒤 팔레스타인으로 출발했다. 1147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나 소아시아에 도착했지만, 독일 군대는 셀주크 제국 군대에 패배하고 프랑스 군대와 합류하였다. 콘라트는 병이 나서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의 간호를 받았다. 성지에서 몇 차례 원정을 했으나 성과가 없었고, 마누엘 1세와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를 공격하기 위한 동맹을 맺었다. 루지에로가 프랑스의 루이 7세 및 벨프 가문과 연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콘라트는 독일로 돌아갔다.
1150년 아들 하인리히가 죽고 벨프 가문과 전투 중 사망했으며, 1152년 벨프 가문과 휴전을 맺었다. 콘라트는 교황에게서 황제관을 받지 못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되지 못하고 로마왕 칭호만 받았다. 1152년 후계자로 조카 프리드리히 3세를 지명하고 죽었다.
2. 1. 초기 생애와 권력 기반
1093년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의 딸인 어머니 아그네스와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1115년 숙부인 황제 하인리히 5세에 의해 프랑켄의 공작으로 임명되었고, 1116년 슈바벤 공작인 형 프리드리히 2세와 함께 독일의 섭정으로 행세하였다.[5]1125년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하자 상속권 원칙을 무시하고 주플린부르크 왕가의 작센 공작 로타르가 황제로 선출되었다. 콘라트는 이에 반발하여 1127년 12월 18일 뉘른베르크에서 대립왕이 되었고, 1128년 6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왕이 되었다.[5]
1132년 독일로 돌아온 그는 형 프리드리히와 로타르 3세에게 계속 대항하였지만, 1135년에는 결국 로타르를 황제로 인정하고 자신의 영지를 되찾는 데 주력했다.[6]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기원은 슈바벤 공국에 있는 것으로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1105년 건설된 호엔슈타우펜 성에서 이름이 유래했듯이, 콘라트 3세의 증조부인 슈타우펜의 프리드리히는 뢰어링거리스 지역의 백작이었고, 1053년에는 슈바벤 궁방백작이 되었다. 그의 아들인 부렌의 프리드리히는 현재의 베셴베우렌 근처에 거주했으며, 1050년경 엘자스의 에기스하임-다그스부르크 백작령 출신의 힐데가르트 백작 부인과 결혼했다.[1]
콘라트의 아버지는 독일의 왕 헨리 4세와 슈바벤 공작 라인펠덴의 루돌프 사이의 갈등, 즉 서임권 투쟁을 이용했다. 1077년 루돌프가 포르하임에서 독일의 반왕으로 선출되자, 호엔슈타우펜의 프리드리히는 왕관에 충성을 지켰고, 1079년 헨리 4세에게 슈바벤 공국을 봉토로 받았으며, 왕의 미성년 딸인 바이블링겐의 아그네스와의 약혼도 포함되었다. 그는 1105년 사망하여 두 아들, 콘라트와 그의 형인 프리드리히 2세를 남겼고, 슈바벤 공작 작위는 프리드리히 2세가 상속받았다. 그들의 어머니는 바벤베르크 가의 마르크그라프 레오폴트 3세와 재혼했다.[3][4]
2. 2. 왕위 계승 분쟁과 대립왕
112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하자, 선제후들은 상속권 원칙을 무시하고 주플린부르크 왕가의 작센 공작 로타르 3세를 황제로 선출했다. 콘라트는 이에 반발하여 1127년 12월 18일 뉘른베르크에서 대립왕으로 선출되었고, 1128년 6월에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했다.[5]1132년 독일로 돌아온 그는 형 프리드리히와 함께 로타르 3세에게 계속 대항했지만, 1135년 결국 로타르를 황제로 인정하고 자신의 영지를 되찾는 데 주력했다. 1137년 로타르 3세가 사망하자, 1138년 3월 7일 콘라트는 코블렌츠에서 로타르의 후계자로 선출되었으며, 주로 남부 독일의 제후들이 그를 독일 왕으로 인정했다.[7] 그러나 로타르 3세의 사위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오만공은 바이에른과 작센에서 콘라트에 대항하여 반기를 들었다. 약 5년간의 내전을 치른 후 1142년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벨프 가문과 화해했다.[6]
콘라트는 1127년에 대립왕으로 선출된 후, 1128년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여 몬차에서 밀라노 대주교에 의해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1130년에 독일로 귀국했고, 1135년에는 로타르 3세와 화해하여 왕위를 포기했다. 1136년에는 로타르 3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동행했다.[18]
1137년 로타르 3세가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망하자, 1138년 3월 7일 코블렌츠에서 선제후들의 선거를 통해 콘라트 3세가 새로운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다. 로타르 3세는 자신의 후계자로 사위인 하인리히 10세를 원했으나, 선제후들은 강력한 군주의 등장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약소 세력이었던 콘라트 3세를 선택했다.[19][20]
2. 3. 독일 왕 즉위와 벨프 가문과의 갈등
1125년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죽자, 선제후들은 상속권 원칙을 무시하고 주플린부르크 왕가의 작센 공작 로타르 3세를 황제로 선출했다. 콘라트는 이에 반발하여 1127년 12월 18일 뉘른베르크에서 대립왕이 되었고, 이듬해 1128년 6월에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왕이 되었다.[5]1132년 독일로 돌아온 그는 형 프리드리히와 함께 로타르 3세에게 계속 대항했지만, 1135년 결국 로타르를 황제로 인정하고 자신의 영지를 되찾는 데 주력했다. 1137년 로타르 3세가 죽자, 1138년 3월 7일 콘라트는 로타르의 후계자로 선출되었으며, 주로 남부 독일의 제후들이 그를 독일 왕으로 인정했다.[7] 그러나 로타르 3세의 사위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오만공은 바이에른과 작센에서 콘라트에 대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콘라트는 하인리히 오만공에게서 모든 영토를 빼앗아 작센 공국을 알브레히트 곰에게, 바이에른 공국을 레오폴트 4세에게 주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오만공은 신하들의 충성을 유지했고, 1139년 그가 사망한 후에도 그의 아들 하인리히 사자공과 그의 형제 벨프 6세가 전쟁을 계속했다. 약 5년간의 내전을 치르고 1142년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벨프 가문과 화해했다.[6]
2. 4. 제2차 십자군 참전
1146년 콘라트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가 슈파이어에서 제2차 십자군을 제창하는 설교를 듣고, 루이 7세와 함께 성지로의 대원정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8] 1147년 3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콘라트와 모인 제후들은 베르나르 클레르보에게 벤디시 십자군 모집을 위임했다.[8] 출발에 앞서 귀족들에게 자신의 어린 아들 하인리히 베렝가르를 왕으로 선출하고 대관식을 거행하도록 하여 자신의 사후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고 출발했다.[9]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육로를 통해 헝가리를 거쳐 비잔티움 제국 영토를 통과하면서 혼란을 야기했다. 1147년 9월, 독일군은 프랑스 군대보다 먼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9][10]
콘라트는 기독교 세력이 장악한 지역을 통과하는 아나톨리아 해안 도로를 따라 대부분의 비전투원들을 보내고,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아나톨리아를 가로질러 이동했다. 1147년 10월 25일, 도리라이움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에게 패배했다. 콘라트와 대부분의 기사들은 탈출했지만, 대부분의 보병들은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남은 2천 명의 독일군은 니케아로 이동했으나, 많은 생존자들이 탈영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콘라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프랑스군의 호위를 받아 로파디움으로 이동하여 루이 7세가 이끄는 주력 프랑스 군대에 합류했다. 콘라트는 에페소에서 심각한 병에 걸려 콘스탄티노플에서 요양을 보냈고, 그곳에서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가 직접 간호했다. 회복 후 콘라트는 아크레로 항해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는 실패로 끝난 다마스쿠스 공성전에 참여했고, 동맹국들에게 염증을 느껴 아스칼론 공격 시도도 실패하자 콘라트는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독일로 돌아왔다.[10]
1146년 12월,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의 십자군 참전 권유를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에게 위임받고 설득되어 1147년의 제2차 십자군에 참가하였다. 3월 프랑크푸르트 제후 회의에서 장남 하인리히 6세를 로마 왕으로 선출시키고, 마인츠 대주교에게 부재중인 독일을 맡긴 후 동방으로 출발하였다. 도중 동로마 제국군과의 충돌이 있었으나, 9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매형 마누엘 1세와 회견하였다.[24]
마누엘 1세는 행군의 어려움을 이유로 무슬림과의 전투를 중지하라고 말했지만 콘라트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부동생인 프라이징의 오토가 이끄는 부대는 해안선으로 보내고, 남은 군대를 이끌고 아나톨리아 반도 내륙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식량이 떨어져 기아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하였고, 군대가 약화된 틈을 타 룸 셀주크 왕조의 무슬림 군대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였다(도뤼라이움 전투). 콘라트 3세는 가까스로 후퇴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고(오토의 부대도 무슬림 군대에게 습격당해 궤멸됨), 1148년에 해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회견하였다. 다마스쿠스를 포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다마스쿠스 포위전), 9월 예루살렘을 떠나 이듬해 1149년에 귀국하였다. 제2차 십자군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인리히 사자공 등 참가하지 않은 독일 제후들이 다른 십자군을 결성하여 벤드족을 토벌하는(벤드 십자군) 등 북독일에서의 왕권의 영향력 저하가 나타났다.[25][26]
2. 5. 외교 관계와 말년
1142년 콘라트는 보헤미아로 원정을 성공시키고 매부 블라디슬라프 2세를 보헤미아의 군주에 임명하였다. 1146년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의 제2차 십자군 제창에 호응하여 십자군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팔레스타인으로 출발했다. 1147년 프랑스의 루이 7세보다 먼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나 소아시아에 도착했지만, 독일 군대는 셀주크 제국 군대에게 패배하고 나중에 프랑스 군대와 합류하였다. 그러나 콘라트는 곧 병이 나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의 간호를 받았다.[9][10] 성지에서 몇 차례 성과 없는 원정을 한 후, 마누엘 1세와 시칠리아의 왕 루지에로 2세를 공격하기 위한 동맹을 맺었다. 루지에로가 프랑스의 루이 7세 및 바이에른의 벨프 가문과 연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콘라트는 서둘러 독일로 돌아갔다.[11]1150년 아들 하인리히가 죽고 벨프 가문과 전투 중 사망했으며, 1152년 벨프 가문과 휴전을 맺었다. 콘라트는 교황으로부터 직접 황제관을 받지 못해 정식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되지 못하고 로마왕 칭호만 받았다. 1152년 후계자로 조카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3세를 지명하고 죽었다.[12]
콘라트 3세는 줄츠바흐의 베렌가르 2세의 딸이자, 그의 누이 줄츠바흐의 베르타가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와 결혼한 줄츠바흐의 게르트루트와 결혼했다. 게르트루트는 콘라트 자녀들의 어머니였고, 비잔티움과의 동맹을 굳건히 하는 연결고리였다.[14]
콘라트 3세는 동로마 제국 황제 요하네스 2세와 동맹을 맺고, 그의 아들 마누엘 1세에게 이복 여동생 베르타 폰 졸츠바흐를 시집보냈다. (1146년 결혼) 황제가 아님에도 자신을 동로마 황제와 동등한 존재로 여기며 시칠리아 왕 루제로 2세의 팽창 정책을 저지하려 했다.[23]
1146년 12월, 로마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의 십자군 참전 권유를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에게 위임받고 설득되어 1147년 제2차 십자군에 참가하였다. 도중 동로마 제국군과의 충돌이 있었으나, 9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매형 마누엘 1세와 회견하였다.[24] 회의에서 마누엘 1세는 행군의 어려움을 이유로 무슬림과의 전투 중지를 권고했지만, 콘라트는 이를 거절하였다. 아나톨리아 반도 내륙으로 진격하였으나, 군대가 약화된 틈을 타 룸 셀주크 왕조 군대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였다. 콘라트 3세는 가까스로 후퇴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고, 1148년 해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회견하였다. 다마스쿠스를 포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다마스쿠스 포위전), 9월 예루살렘을 떠나 이듬해 1149년 귀국하였다. 한편 마누엘 1세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루제로 2세·벨프 6세의 동맹에 대한 대항 자세를 계속하였다.[25][26]
독일로 귀국한 후 벨프 6세·사자왕 등 벨프 가문과의 전투를 재개하였으나 결착을 보지 못하였다. 로마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르놀도 다 브레시아 등 시민 계층과 에우게니우스 3세로부터 각각 황제 대관과 맞바꾼 지원을 요청받았으나, 1152년 병으로 쓰러져 조카 프리드리히 1세(바르바로사)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곧 세상을 떠났다.[27]
3. 가족관계
배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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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콘라트 3세는 첫 부인 게르트루트 폰 콤부르크와의 사이에서 딸만 세 명을 낳았고, 둘째 부인 줄츠바흐의 게르트루트와의 사이에서는 두 명의 아들을 얻었다.[14] 장남 하인리히 베렌가는 1150년 벨프 가문과의 전투 중에 사망했다.[14] 콘라트 3세가 사망할 당시, 차남 프리드리히 4세는 여섯 살의 어린 나이라 왕위는 형의 아들인 조카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게 돌아갔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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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World Monarchies and Dynas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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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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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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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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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Tode der römisch-deutschen Könige und Kaiser (1150–1349)
https://digi.ub.uni-[...]
[13]
서적
Die Tode der römisch-deutschen Könige und Kaiser (1150–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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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적
Die Hohenstaufen
https://books.google[...]
BoD – Books on Demand
[15]
문서
「3世」はローマ王の前身である東フランク王コンラート1世から数えた数字。
[16]
문서
ローマ王は帝位の前提となった東フランク王位から改称された王号。現代から見れば実質ドイツ王だが、当時国家・地域・民族としてのドイツは成立途上である。またイタリアとブルグントへの宗主権を備える。
[17]
문서
当時はまだ神聖ローマ帝国という国号はなく、古代ローマ帝国内でローマ人と混交したゲルマン諸国及びその後継国家群の総称を漠然とローマ帝国と呼び、皇帝は古代帝国の名残であるローマ教会の教皇に任命され戴冠していた
[18]
간행물
成瀬、P213、瀬原、P375、P385。
[19]
간행물
成瀬、P216。
[20]
간행물
瀬原、P386。
[21]
간행물
瀬原、P387。
[22]
간행물
瀬原、P387 - P388。
[23]
간행물
成瀬、P216 - P217、瀬原、P388 - P389。
[24]
간행물
ハラム、P176 - P179、P192 - P194、P198 - P199、P207 - P209、瀬原、P389 - P391。
[25]
간행물
成瀬、P217 - P218。
[26]
간행물
ハラム、P181 - P182、P212 - P220、P226、瀬原、P391 - P392。
[27]
간행물
瀬原、P397 - P400。
[28]
간행물
瀬原、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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