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프리드리히 추 메클렌부르크 대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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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돌프 프리드리히 추 메클렌부르크 대공자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의 귀족으로, 아프리카 탐험가, 독일령 토골란트의 마지막 총독, 발트 연합 공국의 공작, 그리고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을 역임했다. 그는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중앙 아프리카를 탐험하고 관련 저서를 발간했으며, 1912년부터 1914년까지 토골란트 총독으로 재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 발트 연합 공국 공작에서 퇴위했으며, 1926년부터 1956년까지 IOC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아프리카 탐험은 학술적으로 평가받지만, 식민 통치와 관련된 행적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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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프리드리히 추 메클렌부르크 대공자 | |
---|---|
기본 정보 | |
![]() | |
전체 이름 | 아돌프 프리드리히 알브레히트 하인리히 |
출생 | 1873년 10월 10일 |
출생지 | 슈베린,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독일 제국 |
사망 | 1969년 8월 5일 |
사망지 | 오이틴, 서독 |
매장지 | 라체부르크 대성당, 라체부르크,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서독 |
가문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가문 |
아버지 |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
어머니 |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공녀 마리 |
결혼 및 자녀 | |
배우자 | 로이스-슐라이츠의 공녀 빅토리아 페오도라 (1917년 결혼, 1918년 사별) 슈톨베르크-로슬라의 공녀 엘리자베트 (1924년 결혼) |
자녀 | 메클렌부르크 공녀 보이츨라바 페오도라 |
공직 | |
독일 토골란트 총독 | 재임: 1912년 6월 19일 – 1914년 8월 31일 이전: 에드문트 브뤼크너 이후: 한스 게오르크 폰 도링 (대행) |
독일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 | 재임: 1948년 - 1949년 이전: 카를 리터 폰 할트 |
독일 국가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 | 재임: 1949년 - 1951년 이전: 카를 리터 폰 할트 이후: 카를 리터 폰 할트 |
기타 정보 | |
작위 | 메클렌부르크 공작 |
국가 원수 | 빌헬름 2세 |
총리 |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
종교 | 기독교루터교 |
2. 생애
아돌프 프리드리히는 1873년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의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와 그의 세 번째 부인인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의 마리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남동생은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의 남편인 헨드릭 공이었다.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중앙아프리카와 콩고 분지, 나일강 유역 등을 탐험했으며, 1912년부터 1914년까지는 독일령 토골란트 총독을 역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 복무하기도 했다.
1918년에는 발트 연합공국의 공작으로 추대되었으나, 독일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면서 공작위는 소멸되었다. 이후 1926년부터 1956년까지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을 역임하는 등 스포츠 행정가로 활동했다.
1917년 로이스 젊은 계열의 하인리히 27세 공의 딸 페오도라와 결혼했으나, 페오도라는 딸 보이츠라바-페오도라를 출산한 직후 사망했다. 1924년 이복 형의 미망인인 엘리자베트와 재혼했다. 1969년 아돌프 프리드리히가 사망한 후, 엘리자베트와 함께 라체부르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3]
2. 1. 가문과 배경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의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와 그의 세 번째 부인인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의 마리 사이에서 태어났다.[3] 그의 이복형제 중에는 네덜란드 빌헬미나 여왕의 배우자인 헨드릭 공이 있었다.[3]2. 2. 아프리카 탐험 (1907-1911)
1907년부터 1908년까지 아돌프 프리드리히는 중앙아프리카 그라벤 지역을 탐험하며 아프리카 대륙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횡단했다.[3] 이 공로로 1908년 라이프치히 지리학 협회로부터 에두아르트 포겔 메달을 받았다.[3] 아돌프 프리드리히가 토고에 체류하면서 수집한 곤충 표본은 베를린의 베를린 자연 박물관,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젠켄베르크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3]1910년부터 1911년까지는 차드호, 콩고 분지 북부 강, 나일강 유역(현재의 수단)을 탐험했다.[3] 그의 탐험대는 콩고강 지류의 원시림 지역과 차드호 분지를 탐사했으며, 일부는 바르엘가잘강까지 진출했다.[3] 다른 탐험대는 카메룬 남부와 기니만의 섬들로 이동했다. 아돌프 프리드리히 추 메클렌부르크 대공자의 저서 《Vom Kongo zum Niger und Nil|콩고에서 나이저 강으로, 나일 강으로de》는 이 탐험에 대한 기록으로, 상세한 내용과 이미지로 인해 오늘날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3]
2. 3. 독일령 토골란트 총독 (1912-1914)
1912년 6월 19일부터 1914년 8월 31일까지 아돌프 프리드리히는 독일령 서아프리카의 토고(Togoland) (현 토고)의 마지막 총독을 역임했다.[3] 그는 1960년 토고 독립 공식 기념식에 초청받기도 했다.[3]2. 4. 발트 연합 공국 공작 추대 (1918)
1918년 11월 5일, 아돌프 필라르 폰 필라우 남작을 수반으로 하는 전 발트 지역 임시 섭정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임시 섭정위원회는 중세의 리보니아 연맹이 존재했던 영역(현재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에 해당)에 발트 연합 공국을 건국할 것을 제안했다.[3] 이 국가는 쿠를란트, 리가, 레트갈렌(Latgale), 쥐트리플란트(Vidzeme), 노르드리플란트(남부 에스토니아), 욀(사레마, Ösel), 에스틀란트(북부 에스토니아) 등 7개의 칸톤 연합으로 구성될 예정이었다.[3] 수도는 리가로 정해졌다.[3] 이 괴뢰 국가의 원수에는 아돌프 프리드리히가 선택되었지만, 그는 어떠한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새롭게 발족한 섭정위원회가 통치를 맡게 되었다.[3] 4명의 발트 독일인, 3명의 에스토니아인, 3명의 라트비아인으로 구성된 임명된 섭정 위원회는 독일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국제적 승인도 없이 1918년 11월 28일까지 활동했다.[3] 그러나 발트 연합 공국은 독일 제국 외에 승인 국가도 없이 1918년 11월 28일에 소멸했다.[3]2. 5. 스포츠 행정가 (1926-1956)
1926년부터 1956년까지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을 역임했다.[3] 1948년부터 1949년까지 독일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 1949년부터 1951년까지 독일 국가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3]2. 6. 결혼과 사망
아돌프 프리드리히는 두 번 결혼했다. 1917년 4월 24일 게라에서 로이스 젊은 계열의 하인리히 27세 공과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엘리제 공주의 딸인 로이스-슐라이츠의 공주 빅토리아 페오도라와 결혼했다. 빅토리아 페오도라는 외동딸 메클렌부르크의 공녀 보이즐라바 페오도라를 출산한 직후인 1918년 12월 18일에 사망했다.[3] 1924년 10월 25일, 아돌프 프리드리히는 이복 형 메클렌부르크의 요한 알베르트 공작의 미망인인 스톨베르크-로슬라의 엘리자베스 공주와 재혼했다.엘리자베스 공주는 1969년 오이틴에서 남편이 사망한 지 불과 몇 주 후에 사망했다. 아돌프 프리드리히와 엘리자베스는 라체부르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유산과 평가
아돌프 프리드리히의 아프리카 탐험 기록은 학술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딴 도마뱀 속인 ''아돌푸스''와 카멜레온 종인 ''키뇽기아 아돌피프리데리치'',[1] 시클리드 어종인 ''하플로크로미스 아돌피프리데리치'',[2] 그리고 대형 나무 종인 ''아닌게리아 아돌피프리데리치'' 등이 존재한다. 특히 1910년-1911년 탐험을 바탕으로 한 2권의 저서 ''Vom Kongo zum Niger und Nil''(''콩고에서 나이저강과 나일강까지'')은 상세한 내용과 이미지로 인해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토고에 체류하면서 수집한 곤충들의 표본은 베를린의 베를린 자연 박물관,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젠켄베르크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의 식민 통치에 기여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따라 수립된 발트 연합공국이라는 괴뢰 국가 수립에 연루된 점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아돌프 프리드리히는 1912년부터 1914년까지 독일령 서아프리카의 토고 마지막 총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스포츠 행정가로서 국제 협력과 스포츠 정신을 고취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26년부터 1956년까지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을 역임했고, 1949년부터 1951년까지 독일 국가 올림픽 위원회(NOK)의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다. 하지만, 그의 과거 행적과 완전히 분리하여 평가하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그의 제국주의적 행적을 비판하는 경향이 강하며, 국민의힘 등 보수 진영에서는 그의 탐험 업적과 국제 스포츠계 기여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참조
[1]
서적
The Eponym Dictionary of Reptiles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11
[2]
웹사이트
Order CICHLIFORMES: Family CICHLIDAE: Subfamily PSEUDOCRENILABRINAE (h-k)
http://www.etyfish.o[...]
Christopher Scharpf and Kenneth J. Lazara
2018-08-21
[3]
웹사이트
Death of Duchess Woizlawa Feodora of Mecklenburg-Schwerin
https://mecklenburg-[...]
House of Mecklenburg-Schwerin
2019-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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