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카를 폰 우라흐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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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헬름 카를 폰 우라흐 공작은 1864년 뷔르템베르크 가문 출신으로 태어나, 군 복무를 하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모나코 공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프랑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1918년 리투아니아 의회로부터 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추대되어 민다우가스 2세로 즉위했으나, 독일의 패전으로 인해 왕위는 곧 폐지되었다. 그는 두 번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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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다우가스는 13세기 중반 리투아니아의 통치자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왕국으로 승격시키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최초의 리투아니아 국왕이 되었으나, 그의 통치는 내외부 갈등과 1263년 암살로 끝맺었으며 리투아니아 국가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빌헬름 카를 폰 우라흐 공작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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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빌헬름 카를 플로레스탄 게로 크레센티우스 |
출생일 | 1864년 3월 3일 |
출생지 | 모나코 |
사망일 | 1928년 3월 24일 |
사망지 | 라팔로, 이탈리아 왕국 |
매장지 | 루트비히스부르크 궁전 교회 |
왕가 | 우라흐 |
아버지 | 빌헬름 1세 |
어머니 | 플로레스틴 드 모나코 |
작위 | |
작위 | 우라흐 공작 |
재위 기간 | 1869년 7월 17일 – 1928년 3월 24일 |
선대 공작 | 빌헬름 |
후대 공작 | 카를 게로 |
왕위 계승 | 리투아니아 왕 선출자 |
재위 기간 | 1918년 7월 11일 – 1918년 11월 2일 |
배우자 | |
배우자 | 아말리에 인 바이에른 빌트루트 폰 바이에른 |
자녀 | 마리 가브리엘레 공주 엘리자베트 폰 우라흐 공주 카롤라 공주 빌헬름 폰 우라흐 공자 카를 게로 공자 마르가레테 공주 알브레히트 폰 우라흐 공자 에버하르트 공자 메히틸트 공주 |
기타 정보 | |
다른 이름 | 민다우가스 2세 (리투아니아어: Mindaugas II) 우라흐 공작 빌헬름 2세 뷔르템베르크 백작 독일어: Wilhelm Karl Florestan Gero Crescentius, 2. Herzog von Urach, Graf von Württemberg, Wilhelm II von Urach 독일어: Fürst Wilhelm von Urach, Graf von Württemberg, 2. Herzog von Urach |
2. 생애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방계 가문 출신인 초대 우라흐 공작 빌헬름 1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이자 모나코의 플로레스탕 1세 공의 딸인 플로레스틴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69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2대 우라흐 공작이 되었다. 어머니 플로레스틴이 조카 알베르 1세를 대신하여 모나코의 정무를 돌보았기 때문에, 빌헬름은 어린 시절을 주로 모나코에서 보내며 프랑스 문화에 익숙하게 성장했다.
가문의 전통에 따라 군인의 길을 걸어 뷔르템베르크 군에 입대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에는 직업 군인으로서 장군으로 복무하며 폴란드, 세르비아, 벨기에 등 여러 전선에서 활동했다.
어머니를 통해 모나코 공위 계승권을 가졌으나, 독일계 공작이라는 점 때문에 프랑스의 반대에 부딪혀 계승 가능성이 낮아졌다. 1913년에는 알바니아 공국의 군주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다른 인물이 선출되었다. 1918년에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리투아니아 왕국의 국왕으로 추대되어 민다우가스 2세라는 칭호를 받기로 했으나, 독일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면서 리투아니아가 공화국 체제를 선택함에 따라 실제 즉위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2. 1. 초기 생애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방계 가문 수장이었던 초대 우라흐 공작 빌헬름 1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이자 모나코의 플로레스탕 1세 공의 딸인 플로레스틴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1869년 4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2대 우라흐 공작 작위를 계승했다. 빌헬름은 어린 시절 대부분을 모나코에서 보냈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 플로레스틴이 조카인 알베르 1세 공이 해양학 연구 및 탐사를 위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때마다 섭정으로서 모나코의 국정을 돌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장 배경으로 인해 빌헬름은 자연스럽게 프랑스 문화에 익숙하게 자랐다.
2. 2. 군 경력
빌헬름은 가문의 전통에 따라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1883년에 뷔르템베르크 군에 입대하여 직업 군인으로 복무했다.[6][7]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그는 중장 계급이었으며, 독일 제국 육군의 제26 보병 사단(제1 왕립 뷔르템베르크)의 사령관을 맡고 있었다.[6][7]1914년 11월까지 제26 보병 사단은 프랑스와 벨기에에 대한 독일의 초기 공격 작전에 참여했다. 당시 벨기에의 여왕은 빌헬름의 처제인 벨기에의 엘리자베스였다. 1914년 12월, 사단은 동부 전선으로 이동하여 폴란드에서 브주라 강을 건너는 전투에 참전했다. 1915년 6월부터 9월까지는 러시아 제국 군대의 대규모 후퇴 작전인 대철수 기간 동안 바르샤바 북쪽에서 네만 강 근처까지 수백 마일을 진격하며 폴란드 점령에 기여했다.
1915년 10월에서 11월 사이에는 세르비아 전역에 투입되어,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벨그라드 서쪽에서 크랄레보까지 진격했다. 이후 사단은 다시 서부 전선으로 이동하여 1915년 12월부터 1916년 7월까지 벨기에 이프르 지역에서 복무했다. 1916년 8월부터 11월까지는 솜 전투에 참여하여 ''슈바벤 요새''(뷔르템베르크 지역의 옛 이름인 슈바벤에서 유래)를 방어했으나, 이 전투에서 사단은 큰 피해를 입었다.[8]
1916년 12월 30일, 빌헬름은 제너럴 오피서 커맨딩으로 임명되어 서부 전선의 제64 군단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는 1917년 1월 5일에 공식적으로 지휘권을 인수했으며, 군단이 해체된 1918년 12월 10일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9] 1917년 2월 25일에는 기병 대장으로 진급했다.[10] 그의 부관으로는 오토 유겐과 훗날 유명해지는 에르빈 롬멜이 있었다.[11]
2. 3. 모나코 공위 계승 문제
어머니 플로레스틴 공주를 통해 빌헬름은 모나코 공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사촌인 알베르 1세 공에게는 아들 루이 2세가 있었으나, 루이 2세는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고 적법한 자녀도 없었다. 만약 루이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할 경우, 빌헬름이 공위를 계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그러나 프랑스 공화국은 독일계 공작인 빌헬름이 모나코를 통치하는 것을 꺼렸다. 프랑스의 압력으로 모나코는 1911년 루이 2세의 사생아인 발렌티누아 공작부인 샤를로트를 상속녀로 인정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샤를로트는 1918년 모나코 왕위 계승 위기의 일환으로 1918년 조부 알베르 1세에게 입양되었다. 이로 인해 빌헬름은 루이 2세와 샤를로트에 이어 모나코 공위 계승 서열 3위로 밀려났다.
또한, 1918년 7월 프랑스와 모나코는 프랑스-모나코 조약을 체결하여, 향후 모나코 공은 프랑스 또는 모나코 시민이어야 하며 프랑스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즉위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2]
1922년 루이 2세가 즉위한 후, 빌헬름은 1924년 프랑스의 먼 친척인 샤브릴랑 백작 가문을 위해 모나코 공위 계승권을 최종적으로 포기했다.
2. 4. 알바니아 공 후보
1913년, 빌헬름은 알바니아 공국의 왕위 후보로 고려된 여러 공작 중 한 명이었다.[3] 그는 특히 알바니아 북부의 가톨릭 신자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트리에스테에서 열린 알바니아 의회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1914년에는 빌헬름 폰 비트 공작이 알바니아의 공으로 최종 선출되면서 빌헬름의 알바니아 왕위 계승은 이루어지지 않았다.2. 5. 리투아니아 국왕 추대
1918년 6월 4일, 리투아니아 평의회는 새롭게 독립한 리투아니아의 왕으로 빌헬름을 초청하기로 투표했다.[12] 빌헬름은 이에 동의하여 1918년 7월 11일 공식적으로 선출되었고, 리투아니아의 전설적인 군주 이름을 딴 민다우가스 2세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의 선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12]- 빌헬름은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였다. 리투아니아는 전통적으로 가톨릭 국가였기 때문에 이는 중요한 요소였다.
- 그는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가 속한 호엔촐레른가의 일원이 아니었다. 당시 빌헬름 2세는 리투아니아를 프로이센과의 동군연합 아래 두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리투아니아 평의회는 이를 경계했다.
- 빌헬름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군 경력을 쌓은 경험 많은 군인이었다.
- 1918년 3월 체결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당시 리투아니아 지역에 대한 독일의 영향력이 강했기에, 리투아니아는 장차 있을지 모를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하여 독일의 보호를 기대할 수 있었다.

빌헬름은 리투아니아 평의회와의 약속에 따라 리투아니아에 거주하며 리투아니아어를 배워야 한다는 조건을 수락했다.[14] 또한, 그는 리투아니아 대공 카지미르 4세 야기에우워의 딸인 바르바라 야기에우워의 후손이기도 했다.
그러나 빌헬름의 국왕 추대는 처음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리투아니아 평의회 의원 20명 중 미콜라스 빌지슈카, 스테포나스 카이리스, 스타니슬로바스 나르타비추스, 요나스 빌레이시스 등 4명의 사회주의 성향 의원들은 이에 반대하며 평의회를 탈퇴했다. 페트라스 클리마스 의원 역시 반대표를 던졌으나 평의회에는 잔류했다. 독일 정부는 빌헬름의 선출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가톨릭 정치인이자 언론인인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는 빌헬름을 지지했다.
빌헬름은 결국 리투아니아 땅을 밟지 못했고,[13] 슈투트가르트 남쪽에 위치한 자신의 거처 리히텐슈타인 성에 머물며 리투아니아어를 배우기 시작했다.[14] 리히텐슈타인 성의 작은 예배당에는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빌헬름의 리투아니아 국왕 선출을 환영하는 내용의 편지가 액자에 담겨 보관되어 있다.[15]
빌헬름이 선출된 지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졌다. 상황이 변하자 리투아니아 평의회는 1918년 11월 2일, 빌헬름을 국왕으로 추대했던 결정을 철회하고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독일의 반전(反戰) 소설가 아르놀트 츠바이크는 1937년 발표한 소설 Einsetzung eines Königs|아인제충 아이네스 쾨니히스de (왕의 즉위)에서 1918년 민다우가스 2세의 짧았던 통치 시기를 배경으로 다루었다.[17]
2. 6. 리투아니아 국왕 재위와 퇴위
1918년 7월 4일, 리투아니아 평의회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리투아니아 왕국의 국왕으로 빌헬름을 추대하기로 결정했다.[12] 빌헬름은 7월 11일 이를 수락하고 민다우가스 2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하기로 했다. 리투아니아 평의회가 빌헬름을 국왕으로 추대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12]이유 | 설명 |
---|---|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 | 리투아니아는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였다. |
호엔촐레른 가문 비소속 |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 황제가 원했던 프로이센과의 동군연합을 피할 수 있었다. |
군 경력 | 실전 경험이 있는 군인이었다. |
독일의 지원 기대 |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독일의 영향력이 강해진 상황에서, 향후 러시아의 침공 위협에 대비해 독일의 보호를 기대할 수 있었다. |
빌헬름은 리투아니아 평의회와의 약속에 따라 리투아니아에 거주하며 리투아니아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을 받았다.
그러나 빌헬름의 즉위는 처음부터 논란을 일으켰다. 리투아니아 평의회 의원 20명 중 미콜라스 빌지슈카, 스테포나스 카이리스, 스타니슬로바스 나르타비추스, 요나스 빌레이시스 등 사회주의 성향 의원 4명은 이에 반대하며 평의회에서 탈퇴했고, 페트라스 클리마스 의원도 반대표를 던졌으나 평의회에는 잔류했다. 독일 정부 역시 빌헬름의 선출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빌헬름은 결국 리투아니아를 방문할 기회를 얻지 못했고,[13] 슈투트가르트 남쪽에 위치한 자신의 거주지 리히텐슈타인 성에 머물면서 리투아니아어를 배우기 시작했다.[14]
1918년 11월 2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리투아니아 평의회는 빌헬름을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한 결정을 철회하고,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로써 빌헬름의 짧은 리투아니아 국왕 재위는 막을 내렸다.
리히텐슈타인 성의 작은 예배당에는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빌헬름의 리투아니아 국왕 선출을 환영하는 내용의 편지가 액자에 담겨 보관되어 있다.[15] 2009년 빌헬름의 손자인 이니고 폰 우라흐 공자는 빌뉴스에서 가진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만약 리투아니아 왕위를 제안받는 영광을 얻는다면,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16] 독일의 반전 소설가 아르놀트 츠바이크는 1937년 소설 ''Einsetzung eines Königs'' (왕의 대관)에서 1918년 민다우가스 2세의 선출을 배경으로 다루었다.[17]
3. 결혼과 자녀
빌헬름은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1892년 7월 4일 결혼한 아말리에 인 바이에른(1865–1912)이다. 그녀는 바이에른의 왕가인 비텔스바흐가의 방계 출신으로, 바이에른의 카를 테오도르 공작의 딸이자 엘리자베트 황후의 조카였다. 또한 비르자이의 리투아니아 공주 루드비카 카롤리나 라지비우의 직계 후손이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대의 왕 아우구스토 3세와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이러한 혈통은 빌헬름이 리투아니아의 왕으로 추대되는 데 영향을 미친 요소 중 하나였다. 아말리에와의 사이에서 5남 4녀, 총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다.
1924년 11월 26일, 빌헬름은 바이에른의 마지막 국왕 루트비히 3세의 딸인 바이에른의 빌트루트 공주(1884–1975)와 재혼했다. 이 결혼에서는 자녀가 없었다.
4. 평가
빌헬름은 어머니 플로레스틴 드 모나코 공녀를 통해 모나코 공국의 정당한 계승권자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다. 당시 모나코 공 알베르 1세의 유일한 아들인 루이 2세는 결혼하지 않았고 적법한 자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독일계 공작이 모나코를 통치하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프랑스의 압력 하에 모나코는 1911년 루이 2세의 사생아인 발렌티누아 공작부인 샤를로트를 상속녀로 인정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1918년에는 1918년 모나코 왕위 계승 위기 속에서 그녀를 정식으로 입양하였다.[2] 또한 1918년 7월 체결된 프랑스-모나코 조약은 향후 모나코 공이 프랑스 또는 모나코 시민이어야 하며 프랑스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다.[2]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빌헬름의 계승 순위는 루이 2세와 샤를로트 다음으로 밀려났으며, 그는 결국 1924년 모나코 공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1913년에는 알바니아 왕위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기도 했다.[3] 그는 알바니아 북부 가톨릭 신자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1914년 빌헬름 폰 비트 공이 최종 선출되면서 무산되었다.
빌헬름의 이름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건은 1918년 단명한 리투아니아 왕국의 국왕으로 추대된 일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말기,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리투아니아 평의회는 1918년 7월 11일 빌헬름을 리투아니아의 국왕 민다우가스 2세로 선출했다.[12] 이러한 결정에는 그가 가톨릭 신자라는 점(리투아니아는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였다), 리투아니아를 프로이센과의 동군연합으로 만들려던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의 호엔촐레른가 소속이 아니라는 점, 군사적 경력을 갖추었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12] 또한 전쟁의 위협 속에서 독일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도 있었다. 국왕으로 추대되면서 빌헬름은 리투아니아에 거주하며 리투아니아어를 배워야 한다는 조건을 수락했지만,[14] 실제로 리투아니아 땅을 밟지는 못했다.[13] 그의 선출은 처음부터 논란이 있었으며, 평의회 내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탈퇴하기도 했다. 결국 1918년 11월,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자 리투아니아 평의회는 군주제 도입 결정을 철회하고 공화국 수립을 선포함으로써 그의 짧은 재위는 공식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직전 유럽의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와 독일의 영향력 아래 놓였던 신생 독립국들의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는 사례로 평가된다.
독일의 반전 작가 아르놀트 츠바이크는 1937년 발표한 소설 ''Einsetzung eines Königs'' (왕의 즉위)에서 1918년 민다우가스 2세의 선출 과정을 다루기도 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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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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