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령 서아프리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독일령 서아프리카는 1884년부터 1919년까지 존재했던 독일 제국의 식민지들을 포괄하는 지역을 지칭하며, 현재의 카메룬, 토고, 기니, 나이지리아, 가봉, 콩고 공화국, 차드,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가나 등에 걸쳐 있었다. 독일은 17세기부터 서아프리카 지역에 관심을 보였으나, 188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식민 지배를 시작했다. 구스타프 나흐티갈을 제국 판무관으로 임명하여 토고와 카메룬을 보호령으로 만들고, 베를린 회담을 통해 국제적인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독일은 나이저강 유역에서 영토를 확장하려는 시도에는 실패했으며, 서아프리카 신디케이트를 통한 간접 지배 시도 역시 실패했다. 독일령 서아프리카는 카메룬 총독과 토고 제국 위원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 패배로 인해 독일은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다.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독일령 서아프리카 - 독일령 카메룬
독일령 카메룬은 1884년 아프리카 분할 과정에서 독일이 설립한 식민지로, 독일 기업의 경제적 진출과 열강의 아프리카 진출에 대한 우려 속에 성립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군에 점령당해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고, 경제적 이익 추구와 원주민 착취, 억압으로 특징지어지는 시대였다. - 독일령 서아프리카 - 구스타프 나흐티갈
구스타프 나흐티갈은 아프리카, 특히 사하라 중부 지역 탐험에 기여한 독일의 탐험가, 의사이자 외교관으로, 튀니지 총영사와 서아프리카 특별 판무관을 역임하며 독일의 식민지 확장 정책에 관여했다. - 카메룬의 역사 - 남카메룬
남카메룬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영국이 통치한 카메룬 지역의 일부로, 1961년 카메룬 공화국에 편입되었으나, 영어 사용 인구는 차별 대우를 주장하며 독립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 카메룬의 역사 - 암바조니아
암바조니아는 카메룬의 영어 사용 지역 자치권 회복과 독립을 주장하는 분리주의 세력이 사용하는 명칭으로, 1858년 흑인 노예 해방을 위한 이주지 건설에서 시작되어 1961년 카메룬 공화국과 통합되었으나, 1972년 자치 지위를 상실한 후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고, 2017년 임시 정부가 독립을 선언하며 카메룬 정부와 무력 충돌을 겪고 있다. - 가나의 역사 - 아샨티 제국
아샨티 제국은 17세기 오세이 투투 1세의 지휘 아래 가나 남부 내륙에서 건국되었으며, 군사적 연합에서 시작하여 '황금 의자'를 중심으로 종교적 연합의 성격을 띠었고, 영국과의 전쟁 끝에 1901년 병합되었으며, 가나 독립 후 입헌 군주제 왕국으로 인정받아 현재 아샨티 국왕이 존재한다. - 가나의 역사 - 영국령 토골란드
영국령 토골란드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이 점령한 독일령 토골란드 지역으로, 국제연맹과 유엔의 통치를 거쳐 1957년 가나 독립과 함께 가나에 합병되었다.
독일령 서아프리카 | |
---|---|
식민지 정보 | |
명칭 | 독일령 서아프리카 |
원어 명칭 | Deutsch-Westafrika (도이치-베스트아프리카) |
존속 기간 | 1884년 – 1919년 |
시대 | 아프리카 분할 |
지위 | 식민지 |
종주국 | 독일 제국 |
시작 연도 | 1884년 |
종료 날짜 | 1919년 6월 28일 |
종료 사건 | 베르사유 조약 |
![]() | |
종교 | 기독교 토착 신앙 |
통계 년도 | 1912년 (토고 포함) |
면적 | 880,709km² |
인구 | 5,645,000명 |
2. 1884년 이전의 서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독일의 관심
독일의 서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은 17세기와 18세기 쿠를란트-젬갈렌 공국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요새 건설과 교역을 시도했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러한 초기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720년 이후 한동안 중단되었던 독일의 서아프리카 진출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C. 보어만(C. Woermann), 얀첸 & 토르멜렌(Jantzen & Thormählen), 뵐버 & 브롬(Wölber & Brohm), GL 가이저(GL Gaiser)와 같은 독일 무역 회사들과 북독일 선교 협회와 같은 개신교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재개되었다.[1][2][3][4]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일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져, 현재의 기니, 토고, 카메룬 지역에 무역 거점을 확보하고 현지 통치자들과 협정을 맺는 등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1882년 영국과 프랑스가 체결한 협약(1882년 영불 협약)은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일 상인들에게 큰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독일 제국 정부에 적극적인 개입과 보호 조치를 요청하기 시작했다.[5] 이러한 현지 상인들의 요구와 더불어, 당시 독일 사회 내에서 점증하던 식민주의에 대한 관심과 제국주의적 팽창 욕구는 1882년 12월 6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독일 식민 협회(Deutscher Kolonialverein)가 설립되는 배경이 되었다.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헤르만 공을 초대 회장으로 한 이 협회는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며 독일 정부의 식민 정책 추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6]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독일이 1884년 이후 서아프리카 지역에 본격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하는 배경이 되었다.
2. 1. 초기 독일-서아프리카 관계의 배경
독일의 서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은 17세기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쿠를란트-젬갈렌 공국과 브란덴부르크령 골드코스트는 이 지역에 요새와 무역 기지를 건설하며 교역을 시도했다. 그러나 1720년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서아프리카에서 독일의 활동은 거의 없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C. 보어만(C. Woermann), 얀첸 & 토르멜렌(Jantzen & Thormählen), 뵐버 & 브롬(Wölber & Brohm), GL 가이저(GL Gaiser) 등 독일 무역 회사들이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활동을 재개했다.[1][2] 또한, 북독일 선교 협회와 같은 독일의 개신교 선교사들도 이 시기부터 활동하기 시작했다.[3][4]
1880년대 초, 독일이 서아프리카에서 주로 관심을 가졌던 지역과 활동은 다음과 같다.
지역 | 주요 활동 및 거점 | 관련 인물/단체 |
---|---|---|
기니 | 카피타이와 코바의 무역 기지 | 프리드리히 콜린 |
토고 | 1857년부터 운영된 바구이다와 아네호(리틀 포포)의 무역 기지 | 독일 무역 회사 |
카메룬 | 빔비아, 말림바, 바탕가, 크리비 등 해안 마을과의 무역 기지 및 협정 두알라족 지역(아콰타운, 벨타운, 디도타운) 내 무역 기지 (영국 및 기타 유럽 상인들과 유사한 협정 포함) | 독일 무역 회사 |
1882년 영국과 프랑스가 맺은 협약(1882년 영불 협약)은 함부르크 상인들에게 자신들의 이익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를 낳게 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독일 제국 정부에 보호 조치를 요청하기 시작했다.[5] 당시 서아프리카에서 활동하던 독일 상업 집단은 정부와 해군의 지원을 필요로 했으며, 동시에 식민지화를 지지하는 사회적 움직임도 힘을 얻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882년 12월 6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독일 식민 협회(Deutscher Kolonialverein)가 설립되었다. 초대 회장은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헤르만 공이 맡았으며, 협회는 곧 약 15,000명의 회원을 확보했다.[6]
2. 2. 19세기 독일의 서아프리카 활동 재개
독일의 서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은 17세기와 18세기, 쿠를란트-젬갈렌 공국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아프리카에 요새를 건설하고 항구를 통해 교역을 시작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1720년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서아프리카에서 독일인의 활동은 거의 없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C. 보어만(C. Woermann), 얀첸 & 토르멜렌(Jantzen & Thormählen), 뵐버 & 브롬(Wölber & Brohm), GL 가이저(GL Gaiser)와 같은 독일 무역 회사들이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활동을 재개하였다.[54][55] 또한, 북독일 선교사회와 같은 독일의 장로교 선교사들도 이 시기 서아프리카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56][57]
1880년대 초까지 독일의 서아프리카 활동이 활발했던 주요 지역은 다음과 같다.
지역 | 주요 내용 |
---|---|
기니 | 카피타이와 코바(Kapitaï와 Koba)의 무역소 (프리드리히 콜린(Friedrich Colin) 운영) |
토고 | 바구이다(Baguida) 및 아네호(Aného, 리틀 포포)의 무역소 (1857년부터 운영 시작) |
카메룬 | 빔비아(Bimbia), 말림바(Malimba), 바탕가(Batanga), 크리비(Kribi) 등 해안 마을과의 무역 및 협정. 두알라족(Duala people) 지역(아콰 타운, 벨 타운, 디도 타운)에도 독일 무역 기지가 있었으며, 영국 등 다른 유럽 상인들과 유사한 협정을 맺었다. |
독일 제국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뤼베크, 함부르크, 브레멘 등 주요 도시의 상공인들로부터 서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독일의 개입을 요구받았다. 1883년 상인 아돌프 뵈르만(Adolph Woermann)이 독일-서아프리카 무역 식민지 건설 계획을 제출하기도 했으나, 비스마르크는 처음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60][7]
1882년에 체결된 영국-프랑스 간 협약은 함부르크 상인들의 이익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고, 이들은 독일 제국 정부에 자신들의 활동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기 시작했다.[58] 이와 동시에 서아프리카에서 활동하던 독일 상인들은 정부와 해군의 지원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며, 독일 사회 내에서도 제국주의와 식민지 확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82년 12월 6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독일 식민 협회(Deutscher Kolonialverein)가 설립되었다. 이 협회는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헤르만 공을 초대 회장으로 선출했으며, 곧 약 15,000명의 회원을 확보하며 영향력을 키워나갔다.[59]
3. 서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제국 판무관
그러나 1883년 12월, 독일 제국 정부는 현지 독일 무역상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토착 지배자들과의 협상을 통해 서아프리카 지역을 보호령으로 만들기 위한 절차에 착수하기로 결정하고 제국 판무관을 파견하기로 했다.[61][8][5]
1884년 5월, 비스마르크는 구스타프 나흐티갈(Gustav Nachtigal)을 제국 판무관으로 임명했다. 나흐티갈에게는 서아프리카 해안을 탐사하며 독일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는 임무가 주어졌다.[9] 비스마르크는 나흐티갈이 체결하는 조약을 통해 독일의 주권을 확립하고, 확보된 지역을 상업 회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10][5] 나흐티갈의 활동은 이후 독일령 토고와 독일령 카메룬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
3. 1. 구스타프 나흐티갈의 임명과 임무
독일 제국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재상은 뤼베크, 함부르크, 브레멘의 원로원으로부터 서아프리카에 대한 독일의 개입 가능성에 대한 의견을 요청받았다. 이에 대해 상인 아돌프 뵈르만(Adolph Woermann)은 1883년 독일-서아프리카 무역 식민지 건설 계획을 재상에게 제출했으나, 비스마르크는 처음에는 다소 회의적으로 반응하며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7] 그러나 독일 무역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1883년 12월 독일 제국 정부는 현지 통치자들과 공식적인 조약을 체결하여 서아프리카 지역을 보호령으로 편입하기 위한 절차를 밟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제국 특사를 파견하기로 했다.[8][5]
1884년 5월, 비스마르크는 구스타프 나흐티갈(Gustav Nachtigal)을 제국 특사로 임명했다. 그의 임무는 아프리카 대륙의 서쪽 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기존 독일의 영유권을 확인하고, 필요한 경우 새로운 영유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9] 비스마르크는 나흐티갈이 체결하는 조약을 통해 서아프리카의 주요 지역에 대한 독일의 주권을 확립하고, 이 지역들을 상업 회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10][5]
1884년 6월, 나흐티갈은 군함 SMS Möwe를 타고 상가레야 만(Baie de Sangareya)과 로스 섬(Îles de Los)에 도착했다. 그는 카피타이와 코바 지역의 통치자들과 조약을 맺기 위해 상륙 부대를 보냈으나,[11] 이미 현지 족장들은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한 상태였고 새로운 조약 체결을 거부했다.[12] 이에 나흐티갈은 베냉만(Bight of Benin)에 있는 독일 무역 기지로 방향을 돌렸다.[8]
1884년 7월 5일, 나흐티갈은 오늘날의 토고빌(Togoville)인 지역의 통치자 믈라파 3세(Mlapa III)와 조약을 맺고 해안 영토를 독일의 보호령으로 선포했다.[13] 이는 훗날 독일령 토고(Togoland) 식민지의 기초가 되었다.[14] 이어 1884년 7월 14일, 그는 두알라(Douala)의 벨 타운(Bell town)에 독일 국기를 게양하고 해당 지역을 독일의 보호 아래 둔다는 조약에 서명했으며, 이로써 독일령 카메룬(Kamerun) 식민지가 시작되었다.[5] 나흐티갈은 비아프라만(Bight of Biafra) 주변의 여러 항구를 방문하며 몇 주를 보낸 후, 가봉, 앙골라, 독일령 남서아프리카(South West Africa)로 항해했다. 그는 1884년 12월 카메룬으로 돌아왔고, 1885년 1월에는 니제르 삼각주에 도착했다.[15] 1885년 1월 29일, 그는 마힌랜드(Mahinland)를 독일 보호령으로 편입하는 조약을 체결했다.[16] 이후 독일로 귀국하던 중, 나흐티갈은 말라리아에 걸려 1885년 4월 기니만 해상에서 사망했다.[17]
3. 2. 나흐티갈의 서아프리카 탐사
독일 제국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뤼베크, 함부르크, 브레멘 등 주요 도시의 상공인들로부터 서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독일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받았다. 특히 1883년, 보어만(Woermann)은 비스마르크에게 독일-서아프리카 무역 식민지 설립 계획을 제출했으나, 비스마르크는 초기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60][7] 그러나 같은 해 12월, 독일 제국 정부는 현지 독일 무역상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서아프리카 지역 토착 지배자들과 공식적인 조약을 체결하여 보호령을 확보하기 위해 제국 판무관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61][8][5]
1884년 5월, 비스마르크는 구스타프 나흐티갈(Gustav Nachtigal)을 제국 판무관으로 임명했다. 그의 임무는 아프리카 대륙 서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기존 독일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새로운 영토 확보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었다.[9] 비스마르크는 나흐티갈이 체결하는 조약들을 통해 서아프리카 주요 지역에 대한 독일의 주권을 확립하고, 이 지역들을 상업 회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10][5]
1884년 6월, 나흐티갈은 독일 군함 뫼베(Möwe)를 타고 상가레야 만(Baie de Sangareya)과 로스 섬(Îles de Los)에 도착했다. 그는 카피타이와 코바 지역의 통치자들과 조약을 맺기 위해 부하들을 보냈으나,[11] 이미 해당 지역 족장들은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한 상태였고 추가적인 조약 체결을 거부했다.[12] 이에 나흐티갈은 베냉만으로 항로를 변경했다.[8]
1884년 7월 5일, 나흐티갈은 오늘날의 토고빌(Togoville)에서 족장 음라파 3세(Mlapa III)와 조약을 맺고 토고 해안 지역을 독일의 보호령으로 선포했다.[13] 이는 훗날 독일령 토고 식민지의 기초가 되었다.[14] 이어 1884년 7월 14일, 나흐티갈은 두알라(Douala)의 벨 타운에 독일 제국 국기를 게양하고 이 지역을 독일의 보호 하에 둔다는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독일령 카메룬의 시작을 알렸다.[5] 그는 비아프라 만 일대의 여러 항구를 시찰한 후 가봉, 앙골라,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등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1884년 12월 카메룬으로 잠시 돌아왔다가 1885년 1월에는 니제르 삼각주 지역에 도달했다.[15] 1885년 1월 29일, 나흐티갈은 마힌랜드(Mahinland)를 독일 보호령으로 편입하는 조약을 체결했다.[16] 임무를 마치고 독일로 귀환하던 중, 나흐티갈은 말라리아에 걸려 1885년 4월 기니만 해상에서 사망했다.[17]
4. 서아프리카 함대
구스타프 나흐티갈이 서아프리카에서 독일 제국의 권익 확보를 위한 기초 작업을 마친 후, 독일 정부는 현지에서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고 식민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해군력 투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1884년 9월 30일, 빌헬름 1세 황제는 해군 참모총장 에두아르트 폰 크노르 제독을 사령관으로 하는 서아프리카 함대(Westafrikanisches Geschwader)의 창설을 명령했다.[18]
함대는 기함인 코르벳함 SMS 비스마르크를 필두로 SMS 그나이제나우, SMS 아리아드네, SMS 올가 등 코르벳함과 증기 수송선 아들러(Adler)로 구성되었다. 1884년 10월 말 서아프리카로 파견된 함대의 주된 임무는 독일의 보호령을 순찰하며 제국의 권위를 세우고,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현지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이었다. 특히 카메룬 지역에서는 독일 국기를 불태우는 등 반독일 움직임이 일어나자, 크노르 제독은 즉각 상륙 부대를 투입하여 관련 마을을 파괴하고 봉기를 진압하는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19]
서아프리카 함대는 독일의 초기 식민지 경영 과정에서 해군력을 통한 지배력 강화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함대는 1885년 7월 일시적으로 해산되었으나, 같은 해 9월 재편성되었다가 12월에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20] 이후 독일 제국 해군은 이 지역에 대한 상설적인 해군력 주둔을 위해 서아프리카 기지(Westafrikanische Station)를 창설하고 군함을 배치했다.[21]
4. 1. 서아프리카 함대의 창설과 구성

구스타프 나흐티갈이 서아프리카에서 독일의 권익 확보 임무를 마친 후, 독일 정부는 확보한 권리와 영향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해군의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1884년 9월 30일, 빌헬름 1세 황제는 해군 참모총장 에두아르트 폰 크노르 제독을 사령관으로 하는 서아프리카 함대(Westafrikanisches Geschwader) 창설을 명령했다.[18] 함대는 다음과 같은 함선들로 구성되었다.
함대는 1884년 10월 30일 서아프리카를 향해 출항했다. 카보베르데 제도에 도착한 후 함대는 나뉘어, SMS 아리아드네는 라이베리아와 기니만 연안을 담당하고, SMS 그나이제나우는 동아프리카로 파견되었다. SMS 비스마르크와 SMS 올가는 1884년 12월 18일 카메룬강 하구에 도착했다.[19]
함대가 도착하기 직전, 나흐티갈과 조약을 맺었던 두알라족의 망가 은둠베 벨 추장이 이끄는 세력이 독일 국기를 내리고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크노르 제독은 이를 즉각적인 반란으로 간주하고 무력 개입을 결정, 상륙 부대를 파견하여 반항하는 마을들을 파괴하고 추장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884년 12월 20일, 연안 증기선 판(Fan)과 두알라(Duala)를 이용해 307명의 병력이 히코리타운에 상륙했다. 상륙 부대는 강 건너편에서 얀첸 & 토르멜렌(Jantzen & Thormählen) 공장이 공격받고 관리자들이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조스타운을 습격하여 관리자들을 구출하고 마을을 파괴했다. 다음 날인 12월 21일, SMS 올가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 현지 마을들에 포격을 가했다. 상륙 부대는 12월 22일 함선으로 복귀했다. 크노르 제독이 탑승한 SMS 올가는 반독일 봉기가 일어난 지역에 머물며 상황을 통제했다. 점차 소요는 진정되었고, 1885년 1월에는 폭력 사태가 종식되었다. 3월에는 공장 관리자를 살해한 책임자들이 처형을 위해 독일 측에 넘겨졌다.[19]
1885년 3월 23일, 포함 SMS 하비히트가 카메룬강의 상주 함선으로 도착하여 SMS 올가의 임무를 인계받았고, SMS 올가는 수송선 아들러와 함께 독일로 귀환했다. 한편, SMS 비스마르크는 서아프리카 해안을 순항하며 여러 지역에 독일 제국 국기를 게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885년 7월 7일, 카메룬의 초대 제국 총독으로 율리우스 폰 조덴이 부임하자 SMS 비스마르크는 동아프리카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포함 SMS 시클롭(Cyclop)이 서아프리카 기지에 두 번째 포함으로 배치되었다.[18] 독일 보호령 내 부족 간의 갈등과 불안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서아프리카 함대는 1885년 7월에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그러나 함대는 1885년 9월에 칼 파셴(Karl Paschen) 대령의 지휘 아래 SMS 슈토슈, SMS 프린츠 아달베르트, SMS 그나이제나우로 재편성되었다. 이 함선들은 본래 크노르 제독의 지휘하에 동아프리카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서아프리카 해안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케이프타운에 도착했을 때, 독일의 다른 식민지에서 소형 포함에 대한 수요가 많아 SMS 그나이제나우는 다시 동아프리카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결국 SMS 프린츠 아달베르트와 SMS 슈토슈만이 서아프리카에서 잠시 활동한 후 독일로 귀환했으며, 서아프리카 함대는 1885년 12월에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20] 이후 독일 제국 해군은 서아프리카 해역을 전담하는 서아프리카 기지(Westafrikanische Station)를 창설하여 새로운 독일 식민지 항구들에 군함을 상시 배치하게 되었다.[21]
4. 2. 카메룬에서의 군사 작전
구스타프 나흐티갈이 서아프리카에서 독일의 권리를 확립하는 임무를 마친 후, 독일 정부는 이를 강화하기 위해 해군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884년 9월 30일, 빌헬름 1세 황제는 해군 참모총장 에두아르트 폰 크노르 제독의 지휘 아래 서아프리카 전대를 창설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8] 이 전대는 코르벳함 SMS 비스마르크 (기함), SMS 그나이제나우, SMS 아리아드네, SMS 올가 및 증기 수송선 아들러(Adler)로 구성되었다. 전대는 10월 30일에 서아프리카로 출발했다. 카보베르데 제도에 도착한 후, 전대는 나뉘어 SMS 아리아드네는 라이베리아와 기니만 해안을 담당하고, SMS 그나이제나우는 동아프리카로 파견되었다. 1884년 12월 18일, SMS 비스마르크와 SMS 올가는 카메룬강에 도착했다.[19]
전대가 도착하기 직전, 나흐티갈과 조약을 맺었던 망가 은둠베 벨 추장의 정착촌이 불타고 독일 국기가 내려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크노르 제독은 즉시 개입을 결정하고 상륙 부대를 파견하여 반란을 일으킨 마을을 파괴하고 추장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1884년 12월 20일, 연안 증기선 판(Fan)과 두알라(Duala)를 이용해 307명의 병력이 히코리타운에 상륙했다. 상륙 부대는 강 건너편의 반란군이 얀첸 & 토르멜렌(Jantzen & Thormählen) 공장을 공격하고 관리자들을 납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조스타운(Joss Town)을 습격하여 마을을 파괴했다. 다음 날인 12월 21일, SMS 올가는 밀물을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현지 마을에 포격을 가했다. 상륙 부대는 12월 22일에 배로 복귀했다. 크노르 제독이 탑승한 SMS 올가는 반독일 봉기가 일어난 지역에 머물렀다. 점차 상황이 안정되어 1885년 1월에는 폭력 사태가 종식되었고, 3월에는 공장 관리자를 살해한 책임자들이 처형을 위해 넘겨졌다.[19]
1885년 3월 23일, 포함 SMS 하비히가 카메룬강의 기지 임무를 맡게 되면서 SMS 올가와 아들러는 독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편, SMS 비스마르크는 해안을 따라 순항하며 여러 지역에 독일 제국 국기를 게양했다. 1885년 7월 7일, 카메룬의 초대 제국 총독 율리우스 폰 소덴이 도착하자 SMS 비스마르크는 동아프리카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포함 SMS 시클롭이 서아프리카 기지에 두 번째 포함으로 배치되었다.[18] 독일 보호령 내 부족 간의 갈등과 불안이 평화 조약으로 진정되자, 서아프리카 전대는 1885년 7월에 해산되었다.
그러나 1885년 9월, 칼 파셴 대령은 SMS 슈토슈, SMS 프린츠 아달베르트, SMS 그나이제나우로 전대를 재편성하여 서아프리카 해안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케이프타운에 도착했을 때, 독일의 소형 포함에 대한 수요가 많아 SMS 그나이제나우는 다시 동아프리카로 보내졌고, SMS 프린츠 아달베르트와 SMS 슈토슈만이 서아프리카에서 잠시 활동한 후 독일로 돌아갔다. 결국 서아프리카 전대는 1885년 12월에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20] 이후 독일 제국 해군은 서아프리카 해역을 담당하는 서아프리카 기지를 창설하고, 새로운 독일 식민지의 항구에 군함을 배치했다.[21]
5. 베를린 회담과 영토 조정
나흐티갈의 탐사와 서아프리카 함대 파견을 통해 서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 독일은 이를 국제적으로 공인받을 필요성을 느꼈다. 비스마르크는 식민지 확보가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외교적 협상력을 높이는 데 유용하다고 판단하여, 프랑스의 지지를 얻어 1884년 11월부터 1885년 2월까지 베를린 회담을 개최했다.[62][22][63][23] 이 회담은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지 보유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향후 아프리카 분할 과정에서 열강들이 따라야 할 규칙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63][23]
베를린 회담 자체에서는 콩고 분지 외에 독일이 점유한 토고나 카메룬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없었으나,[28] 회담을 통해 열강 간 영유권 주장을 인정하는 절차(실효적 점유 원칙)가 확립되면서 독일의 서아프리카 영유권은 사실상 인정받게 되었다.[29][30] 회담 이후 독일은 영국, 프랑스와 개별적인 협상을 통해 독일령 카메룬과 독일령 토고의 국경을 확정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은 핵심 지역인 카메룬과 토고에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대가로, 마힌란트(Mahinland)를 영국에,[31] 카피타이(Kapitaï)와 코바(Koba) 지역을 프랑스에 양도하는 등 일부 영토 조정을 단행했다.[14] 또한, 콩고 강 하류의 노키(Nokki) 지역에 대한 권리는 포르투갈에 넘겨주었다.[35] 이러한 일련의 조약을 통해 독일령 서아프리카의 구체적인 경계가 설정되었다.
5. 1. 베를린 회담의 배경과 목적

독일은 나흐티갈의 탐사를 통해 서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서아프리카 함대를 파견하여 해군력으로 이를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영유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인정이 필요했다. 당시 독일의 재상이었던 비스마르크는 식민지 획득 자체에 큰 비용이 들고 직접적인 경제적, 군사적 이득은 적다고 판단했지만, 이를 다른 열강과의 외교 협상에서 유리한 카드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62][22] 그의 주요 외교 목표 중 하나는 대영 제국이 구축한 광범위한 비공식적 영향력(이른바 '비공식 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국제적 합의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지지를 얻어 베를린에서 국제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의의 목적은 독일이 확보한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국제적 인정을 받고, 향후 모든 열강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영유권을 주장할 때 따라야 할 공통된 규칙을 수립하는 것이었다.[63][23]
베를린 회담 (서아프리카 회담[64][24][25][26] 또는 콩고 회담으로도 불림)은 1884년 11월에 시작되어 1885년 2월에 막을 내렸다.[27] 회의의 공식 의제는 주로 콩고 분지에 집중되었으며, 독일이 이미 점유하고 있던 토고나 카메룬 같은 지역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28]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담에서는 열강들이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서로의 영유권 주장을 인정받기 위한 절차를 확립했는데, 이는 나흐티갈이 사용했던 방식처럼 실제 탐사와 점유를 통해 효력을 발생시킨다는 원칙이었다. 이 원칙에 따라 다른 열강들의 주장과 더불어 독일령 서아프리카의 존재 역시 회담을 통해 사실상 인정받게 되었다. 회담 기간 동안에는 중복되는 영유권 주장을 정리하고 국경을 획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논의도 함께 진행되었다.[29][30]
베를린 회담이 종료된 지 두 달 만인 1885년 4월 22일, 독일은 영국과 카메룬산 일대를 경계로 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듬해인 1886년 5월 6일에는 영국과의 추가 조약을 통해 독일령 카메룬의 국경을 동쪽으로 더 확장했다. 또한 1885년 12월 24일에는 프랑스와의 협정을 통해 캄포 강을 독일령 카메룬의 남쪽 경계로 확정했다.
이러한 국경 협상이 진행되면서 독일은 독일령 토고 (토골란트)와 독일령 카메룬에서의 핵심적인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다른 지역에 대한 일부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885년 10월 24일 마힌란트(Mahinland)는 독일이 다른 지역에서 영토 보상을 받는 대가로 대영 제국의 보호령이 되었다.[31] 또한 1885년 12월 24일에는 카피타이(Kapitaï)와 코바(Koba) 지역을 프랑스가 독일령 토고 (토골란트)의 영유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프랑스에 할양하였다.[14]
한편, 1884년 에두아르트 슐체(Eduard Schulze)가 이끄는 탐험대가 콩고 강 인근의 노키(Nokki)에 독일 식민지를 건설하려 시도했으나, 독일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지는 못했다.[32][33][34] 국제 아프리카 연맹은 독일의 주장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명확한 국경은 설정되지 않았다. 결국 베를린 회담 과정에서 비스마르크는 노키 지역에 대한 독일의 권리를 포르투갈에 양도하는 데 동의했다.[35]
5. 2. 베를린 회담의 결과와 영토 조정
나흐티갈의 탐사를 통해 서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서아프리카 함대를 파견하여 해군력으로 이를 뒷받침한 독일은 이 지역에서의 지배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 재상이었던 비스마르크는 식민지 획득이 많은 비용을 수반하고 직접적인 경제적, 군사적 이익이 크지 않더라도, 다른 열강과의 외교 협상에서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22] 그의 외교 목표 중 하나는 대영 제국이 구축한 광범위한 비공식적 영향력(소위 '비공식 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국제적 합의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프랑스의 협조를 얻어 베를린 회담을 개최하여,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지 획득을 공인받고 향후 모든 열강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영유권을 주장할 때 따라야 할 규칙을 정립하고자 했다.[23]
베를린 회담은 '서아프리카 회담'[24][25][26] 또는 '콩고 회담'으로도 불리며, 1884년 11월 베를린에서 시작되어 1885년 2월까지 이어졌다.[27] 회담의 공식 의정서는 주로 콩고 분지 문제를 다루었으며, 토고나 카메룬과 같이 독일이 이미 점유하고 있던 지역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담은 열강들이 서아프리카에서 서로의 영유권을 인정받기 위해 따라야 할 절차, 즉 나흐티갈이 실행했던 방식과 같은 '실효적 점유'의 원칙을 확인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독일령 서아프리카를 포함한 독일의 주장은 다른 열강들의 수많은 영유권 주장과 함께 사실상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회담 기간 동안에는 중복되는 영유권 주장을 정리하고 국경을 획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양자 간 논의도 활발히 진행되었다.[29][30]
베를린 회담 이후, 독일은 구체적인 조약을 통해 독일령 카메룬과 독일령 토고의 경계를 확정하고 일부 영유권을 조정했다. 주요 영토 조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날짜 | 관련 국가 | 주요 내용 | 비고 |
---|---|---|---|
1885년 4월 22일 | 대영 제국 | 카메룬산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독일령 카메룬의 국경 설정 조약 체결 | |
1885년 10월 24일 | 대영 제국 | 독일이 마힌란트(Mahinland)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영국으로부터 다른 지역에서의 영토 보상을 받음. 마힌란트는 영국의 보호령이 됨.[31] | 토고, 카메룬 영토 집중 위한 조정 |
1885년 12월 24일 | 프랑스 | 캄포 강을 독일령 카메룬의 남쪽 경계로 확정하는 협정 체결 | |
1885년 12월 24일 | 프랑스 | 프랑스가 독일령 토고의 영유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독일이 카피타이(Kapitai)와 코바(Koba) 지역을 프랑스에 할양.[14] | 토고 영유권 인정 대가로 양도 |
1886년 5월 6일 | 대영 제국 | 독일령 카메룬의 국경을 동쪽으로 확장하는 추가 조약 체결 |
한편, 1884년 에두아르트 슐체(Eduard Schulze)가 이끄는 탐험대가 콩고 강 하류의 노키(Nokki) 지역에 독일 식민지를 건설하려 시도했으나, 독일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지는 못했다.[32][33][34] 레오폴드 2세가 주도한 국제 아프리카 협회는 독일의 이러한 영유권 주장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경계는 설정되지 않았다. 결국 베를린 회담 과정에서 비스마르크는 노키(Nokki)에 대한 독일의 권리를 포르투갈에 양도하기로 합의했다.[35]
6. 나이저강을 향한 경주
베를린 회담 이후, 아프리카 내륙 진출의 중요한 통로였던 나이저강 유역을 둘러싸고 독일 제국, 프랑스, 영국 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독일은 고틀리트 레온하르트 가이저, 파울 스타우딩어, 프리드리히 콜린, 한스 그루너 등 여러 인물들을 통해 나이저강 유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무관세 교역권을 얻으려 시도했으나,[65][36] 프랑스 및 영국과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66][37][67][38] 결국 독일은 1897년 국경 협정에서 토골란드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간의 국경을 일부 유리하게 조정하는 미미한 성과를 얻는 데 그쳤다.[68][39][40][41]
6. 1. 나이저강 경쟁의 배경
베를린 회담에서는 주로 콩고에서의 영유권 분쟁을 다루었지만, 내륙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통로였던 나이저강을 둘러싸고 독일 제국, 프랑스, 영국 사이의 경쟁 또한 치열했다. 고틀리트 레온하르트 가이저가 마힌란트에서 시도했던 사업은 실패했지만, 독일 상인들은 여전히 나이저강 상류 지역에서의 무관세 교역을 갈망했다.[65][36]1885년과 1886년 사이, 파울 스타우딩어는 베누에 지역 탐험을 통해 소코토 칼리파국 및 관두 에미르국과 관계를 수립하려 했지만, 이는 영토 점령이나 보호령 설립으로 이어지지 못했다.[66][37] 또한, 프리드리히 콜린이 기니에서 나이저강의 발원지에 도달하려던 시도 역시 독일이 카피타이와 코바 지역(콜린란트라고도 불림)을 프랑스에 넘겨주기로 합의하면서 무산되었다.
1894년과 1895년에는 토고 위원회의 자금 지원을 받은 한스 그루너가 탐험대를 이끌고 나이저강 중류 지역에서 독일 영토 확보를 시도했다. 그루너와 그의 동료 에른스트 폰 카납-케른하임은 나이저강을 따라 이동하며 관두와 구르마 지역 추장들과 '보호 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67][38] 하지만 프랑스와 영국 대표들 역시 같은 추장들과 유사한 협정을 이미 맺었거나 곧이어 체결했기 때문에, 독일이 맺은 조약은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에리히 클링, 가스통 티에리, 루트비히 볼프, 줄리어스 폰 제크 아우프 노이호펜 등 다른 독일인들의 나이저강 진출 시도 역시 비슷한 이유로 성공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독일은 나이저강 유역 확보를 위한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으며, 1897년 국경 협정 당시 토골란드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사이의 국경을 일부 유리하게 조정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68][39][40][41]
6. 2. 독일의 나이저강 진출 시도와 실패
베를린 회담에서는 주로 콩고에서의 영유권 분쟁이 다루어졌지만, 아프리카 내륙 진출의 핵심 통로였던 나이저강 유역을 둘러싼 독일 제국, 프랑스, 영국 간의 경쟁도 치열했다. 고틀리트 레온하르트 가이저의 마힌란트 탐험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독일 상인들은 나이저강 상류에서의 면세 무역권을 확보하고자 했다.[65][36]1885년과 1886년 사이, 파울 스타우딩어는 베누에 지역 탐험을 통해 소코토 칼리파국 및 관두 에미르국과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이는 영토 점령이나 보호국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66][37] 기니에서 나이저강 발원지에 도달하려던 프리드리히 콜린의 시도 역시, 독일이 카피타이와 코바(소위 '콜린스란트') 지역을 프랑스에 양도하기로 합의하면서 무산되었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토고 위원회의 지원을 받은 한스 그루너는 나이저강 중류 지역에서 독일 영토 확보를 목표로 탐험을 이끌었다. 그루너와 그의 동료 에른스트 폰 카납-케른하임은 나이저강을 따라 이동하며 관두와 구르마 지역 추장들과 보호 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67][38] 하지만 이미 프랑스와 영국 대표들이 해당 추장들과 유사한 협정을 맺은 상태였기 때문에, 독일이 맺은 조약은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에리히 클링, 가스통 티에리, 루트비히 볼프, 줄리어스 폰 제크 아우프 노이호펜 등 다른 독일인들의 나이저강 진출 시도 또한 비슷한 이유로 성공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독일은 나이저강 유역에서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1897년 국경 협정 당시 토골란드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사이의 국경선을 일부 유리하게 조정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68][39][40][41]
7. 서아프리카 신디케이트
1884년 10월, 비스마르크의 지원으로 서아프리카 식민지의 행정을 담당할 신디케이트 설립이 추진되었다.[69][42] 그러나 식민 회사들의 반대로 간접 통치 계획은 실패하였고,[69] 신디케이트는 1886년 해체되었다.[70][43]
7. 1. 서아프리카 신디케이트의 설립과 해체
1884년 10월, 비스마르크의 지원 아래 서아프리카 식민지의 내부 행정을 인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디케이트가 설립되었다.[69] 이는 서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독일의 간접적인 지배를 실현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관련된 식민 회사들은 신디케이트에 자신들의 권리를 넘기는 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독일 정부가 직접 식민지를 관리할 것을 요구하였다.[69] 이로 인해 서아프리카를 간접적으로 통치하려던 비스마르크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1886년, 서아프리카 신디케이트는 해체되었다.[70]8. 독일령 서아프리카의 행정
독일령 서아프리카의 식민 사업은 구스타프 나흐티갈이 서아프리카 제국 위원으로 임명되면서 시작되었으며, 그는 카메룬, 토고, 남서아프리카에 공식적으로 "보호령"(Schutzgebiete|슈츠게비테de)을 설립했다.[44] 초기에는 카메룬 총독과 토고 위원에게 적용되는 법령이 공동으로 제정되어 두 지역을 함께 관리하는 체계를 보였다. 이후 토고는 1893년부터 제국 위원(Landeshauptmann|란데스하우프트만de)이 다스리는 별도의 식민지로 운영되다가, 1898년 총독의 지위로 격상되었다.[46] 식민 통치 체제 및 관련 기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8. 1. 식민 통치 체제
독일령 서아프리카의 식민 통치는 구스타프 나흐티갈이 서아프리카 제국 위원으로 임명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카메룬, 토고, 남서아프리카 지역에 공식적으로 "보호령"(Schutzgebiete|슈츠게비테de, 문자 그대로 "보호 구역")을 설립했다. 초기에는 이 식민지들의 최고 관리직인 카메룬 총독과 토고 및 남서아프리카 위원들에게 적용되는 법령이 공동으로 제정되었다.[44]이후 카메룬과 토고에 대해서는 여러 법령이 함께 발표되었다. 토고는 1898년까지 별도의 식민지로 운영되었으나, 제국 위원(Landeshauptmann|란데스하우프트만de, 1893년부터 사용)이 통치했고, 이 위원은 카메룬 총독과 동일한 수석 위원(Oberkomissar|오버코미사르de)의 감독을 받았다. 카메룬의 초대 총독이었던 율리우스 폰 조덴은 토고의 수석 위원을 겸임하기도 했다. 1898년, 토고의 제국 위원 직위는 총독으로 격상되었다.[46]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법원으로는 "카메룬과 토고 보호령 항소 법원"(Kaiserliches Obergericht der Schutzgebiete von Kamerun und Togo|카이저리헤스 오버게리히트 데어 슈츠게비테 폰 카메룬 운트 토고de)이 있었다.[47]
'Deutsch-Westafrika|도이치-베스트아프리카de'(독일령 서아프리카)라는 명칭은 공식적인 행정 용어는 아니었지만, 카메룬과 토고 두 식민지를 함께 지칭하는 비공식 간행물에서 사용되었다.[48][49] 또한, 카메룬, 토고, 나이지리아, 골드 코스트 등지에서 활동했던 무역 회사 중 하나는 1896년 설립된 "Deutsch-Westafrikanische Handelsgesellschaft|도이치-베스트아프리카니셰 한델스게젤샤프트de"(독일 서아프리카 무역 회사)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이 회사는 1904년 "Deutsch-Westafrikanische Bank|도이치-베스트아프리카니셰 방크de"(독일 서아프리카 은행) 설립에도 관여했다.[51]
9. 독일령 서아프리카의 영토
1884년부터 1919년까지 독일령 서아프리카 지역의 영토는 다음과 같다. (단,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는 빠져있다.)
9. 1. 영토 목록
1884년부터 1919년까지 독일의 서아프리카 통치 지역은 다음과 같다.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제외)[52]영토 | 기간 | 면적 (대략) | 인구 (대략) | 현재 국가 |
---|---|---|---|---|
알트카메룬 (북동부 제외) | 1884–1919 | 488000km2 ("엔텐슈나벨" 제외) | 2,588,000 | 카메룬 나이지리아 |
암바스만/빅토리아 | 1887–1919 | ? | 12,000 | 카메룬 |
엔텐슈나벨 | 1894–1911 | 12000km2 | ? | 카메룬 차드 |
카피타이와 코바 | 1884–1885 | 2310km2 | 35,000 | 기니 |
마힌랜드 | 1885 | 5210km2 | 10,000 | 나이지리아 |
노이카메룬 (독일령 콩고) | 1911–1919 | 295000km2 | 2,000,000 | 가봉 콩고 공화국 차드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
살라가 지역 (동부) | 1899–1919 | 2800km2 | ? | 가나 |
토고 | 1884–1919 | 87200km2 (동부 살라가 지역 포함) | 1,000,000 | 가나 토고 |
총계 | 879510km2 | 5,645,000 |
10. 독일 식민 지배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한국의 관점)
독일 제국이 아프리카 분할 과정에서 차지했던 서아프리카 지역에서의 식민 통치는 현지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독일의 식민 지배는 단순한 통치를 넘어 현지 주민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으로 점철되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비판적인 성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독일 식민 당국은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현지 주민들에게 가혹한 강제 노동을 부과했으며, 전통적인 토지 소유 구조를 무시하고 광범위한 토지 수탈을 자행했다. 이러한 경제적 착취는 현지 주민들의 삶의 기반을 뿌리째 흔들었다. 또한, 독일은 자신들의 문화를 우월한 것으로 간주하며 현지 고유의 언어와 전통, 사회 구조를 억압하고 파괴하려는 문화 말살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식민 정책의 기저에는 인종 차별적인 이데올로기와 폭력적인 통치 방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과 같은 사건은 독일 식민 지배의 잔혹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국은 일제 강점기라는 혹독한 식민 지배를 경험했기에,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 지배가 남긴 고통에 대해 깊이 공감하며 더욱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제국주의 열강이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와 폭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책임 있는 자세가 요구된다. 식민주의 역사가 남긴 교훈을 잊지 않고,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
참조
[1]
서적
Friedrich Fabri und der Imperialismus in der Bismarckzeit. Revolution – Depression – Expansion
https://www.imis.uni[...]
2005
[2]
서적
Colonialism in Africa 1870-1960
https://books.google[...]
CUP Archive
[3]
서적
Zwischen Sklaverei und christlicher Ethnogenese
https://books.google[...]
Waxmann Verlag
[4]
간행물
German Imperialism in Africa: The Distorted Images of Cameroon, Namibia, Tanzania, and Togo
1992
[5]
서적
Germans in the Cameroons
https://archive.org/[...]
Yale University Press
[6]
문서
Auflagenhöhe der ''Deutsche Kolonialzeitung'' im Februar 1885 (source: {{ZDB|214536-4}})
[7]
서적
"Das Ringen um den nationalen Staat – Die Gründung und der innere Ausbau des deutschen Reiches unter Otto von Bismarck 1850 bis 1890."
Propyläen Verlag
1994
[8]
서적
Deutsche Colonialgeschichte
http://access.bl.uk/[...]
Verlag von Paul Frohberg
2019-01-27
[9]
서적
Rogue Empires: Contracts and Conmen in Europe's Scramble for Africa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7-04-10
[10]
서적
The German Colonial Empire
https://books.google[...]
UNC Press Books
2012-12-01
[11]
웹사이트
Kamerun
http://www.deutsche-[...]
2017-11-12
[12]
웹사이트
Ein Bayer im Auftrag Seiner Majestät
http://www.sueddeuts[...]
Süddeutsche Zeitung
2017
[13]
서적
The Statesman's Yearbook 2014: The Politics, Cultures and Economies of the World
https://books.google[...]
Springer
[14]
서적
'Histoire des Togolais. Des origines aux années 1960 (Tome 3 : le Togo sous administration coloniale)'
https://books.google[...]
KARTHALA Editions
2011-06-28
[15]
문서
Allgemeine Deutsche Biographie
Duncker & Humblot
[16]
서적
"Deutsche Colonialgeschichte: Erwerbung der Reichsschutzgebiete bis zur Erledigung des Carolinenstreites"
http://access.bl.uk/[...]
Verlag von Paul Frohberg
2019-02-12
[17]
웹사이트
Nachtigal, Gustav
https://www.deutsche[...]
Neue Deutsche Biographie
2019-02-03
[18]
서적
"Reichsgewalt bedeutet Seegewalt. Die Kreuzergeschwader der Kaiserlichen Marine als Instrument der deutschen Kolonial- und Weltpolitik 1885 bis 1901"
Oldenbourg Verlag
2012
[19]
서적
Das Buch von der Deutschen Flotte
https://books.google[...]
"BoD – Books on Demand"
[20]
서적
Die Deutschen Kriegsschiffe
Mundus Verlag
[21]
웹사이트
Flottenstationen
http://www.ub.bildar[...]
Frankfurt University
2019-02-06
[22]
웹사이트
The Scramble for Africa
https://www.gresham.[...]
Gresham College
2019-02-09
[23]
서적
European Imperialism and the Partition of Afric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2-11-12
[24]
간행물
The Berlin West Africa conference of 1884–85 revisited: A report
1985
[25]
웹사이트
Berlin West Africa Conference
https://www.britanni[...]
Encyclopaedia Britannica
2019-02-09
[26]
서적
Berlin Conference of 1884–1885
Oxford University Press
[27]
서적
Encyclopedia of the Age of Imperialism, 1800-1914: A-K
https://books.google[...]
Greenwood Publishing Group
[28]
웹사이트
General Act of the Berlin Conference on West Africa, 26 February 1885
https://loveman.sdsu[...]
San Diego State University
2019-02-09
[29]
서적
Ends of British Imperialism: The Scramble for Empire, Suez, and Decolonization
https://books.google[...]
I.B.Tauris
[30]
간행물
Between law and history: the Berlin Conference of 1884-1885 and the logic of free trade
http://eprints.soas.[...]
2015
[31]
웹사이트
Jahresberichte für deutsche Geschichte
http://pom.bbaw.de/e[...]
Berlin-Brandenburg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
2019-02-12
[32]
뉴스
The West African Problems
https://timesmachine[...]
1885-01-21
[33]
웹사이트
Hansa. Zeitschrift für Seewesen
http://digiview.gbv.[...]
2019-02-12
[34]
웹사이트
Deutsche Colonialgeschichte
http://access.bl.uk/[...]
Verlag von Paul Frohberg
2019-02-12
[35]
서적
Afrikanische Gesellschaft und Afrikafonds, in Deutsches Kolonial-Lexikon
1920
[36]
서적
Bismarck und der Imperialismus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1976
[37]
서적
Deutsche Männer in Afrika - Lexicon der hervorragendsten deutschen Afrika-Forscher, Missionare etc.
http://www.forgotten[...]
Bernhard Nöhring
2019-02-12
[38]
서적
Togo unter deutscher Flagge
https://books.google[...]
BoD – Books on Demand
2019-01-18
[39]
서적
A Political Chronology of Afric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3-09-02
[40]
서적
Slavery, Colonialism and Economic Growth in Dahomey, 1640-1960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41]
저널
Les rivalités franco-anglaise et franco-allemande de 1894-1898, dernière phase de la course au Niger : la mission Ganier dans le haut Dahomey, 1897-1898
https://www.persee.f[...]
2019-02-12
[42]
저널
The Metamorphoses of Middlemen: The Duala, Europeans, and the Cameroon Hinterland, ca. 1800 - ca. 1960
1972
[43]
서적
Geschichte Deutschlands
Propyläen Verlag
1993
[44]
문서
Die deutsche Kolonial-Gesetzgebung
https://archive.org/[...]
[45]
문서
Findbuch Fonds Allemand (Fa) Verwaltung des Deutschen Schutzgebiets Kamerun
https://www.bundesar[...]
Das Bundesarchiv
2019-02-13
[46]
문서
Togo, die Aufrichtung der deutschen Schutzherrschaft und die Erschließung des Landes
http://brema.suub.un[...]
1914
[47]
문서
(Die deutsche Kolonial-Gesetzgebung p.187)
[48]
문서
F. Karsch: Insekten von Baliburg (Deutsch-Westafrika)
https://archive.org/[...]
1892
[49]
서적
Deutschlands Kolonien. Band 2
Verlag des Vereins der Bücherfreunde Schall & Grund
1898
[50]
서적
Deutsches Kolonial-Lexikon
Quelle & Meyer
2015-03-16
[51]
서적
Deutsches Kolonial-Lexikon
Quelle & Meyer
2015-03-16
[52]
웹사이트
Statistische Angaben zu den deutschen Kolonien
http://www.dhm.de/le[...]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53]
서적
Geschichte der deutschen Kolonien
Ferdinand Schöningh
2004
[54]
웹인용
Friedrich Fabri und der Imperialismus in der Bismarckzeit Revolution - Depression - Expansion
https://www.imis.uni[...]
2020-05-22
[55]
서적
Colonialism in Africa 1870-196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9
[56]
서적
Zwischen Sklaverei und christlicher Ethnogenese
[57]
저널
"German Imperialism in Africa: The Distorted Images of Cameroon, Namibia, Tanzania, and Togo"
https://journals.sag[...]
[58]
서적
Germans in the Cameroons
https://archive.org/[...]
Yale University Press
1938
[59]
뉴스
Auflagenhöhe der Deutsche Kolonialzeitung
https://zdb-katalog.[...]
2020-05-22
[60]
서적
Das Ringen um den nationalen Staat – Die Gründung und der innere Ausbau des deutschen Reiches unter Otto von Bismarck 1850 bis 1890..
Berlin: Propyläen Verlag
1994
[61]
서적
Deutsche Colonialgeschichte
http://access.bl.uk/[...]
Leipzig: Verlag von Paul Frohberg
2020-05-22
[62]
저널
The Scramble for Africa
https://www.gresham.[...]
2011-11-22
[63]
서적
European Imperialism and the Partition of Afric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2-11-12
[64]
웹인용
Berlin West Africa Conference
https://www.britanni[...]
2022-03-16
[65]
서적
Bismarck und der Imperialismus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1976
[66]
서적
Deutsche Männer in Afrika - Lexicon der hervorragendsten deutschen Afrika-Forscher, Missionare etc
Lübeck: Bernhard Nöhring
1894
[67]
서적
Togo unter deutscher Flagge
https://books.google[...]
Classic Library
2019-01-18
[68]
서적
Slavery, Colonialism and Economic Growth in Dahomey, 1640-1960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69]
서적
The Metamorphoses of Middlemen: The Duala, Europeans, and the Cameroon Hinterland, ca. 1800 - ca. 1960
https://www.jstor.or[...]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African Historical Studies
1972
[70]
서적
Das Ringen um den nationalen Staat – Die Gründung und der innere Ausbau des deutschen Reiches unter Otto von Bismarck 1850 bis 1890
Geschichte Deutschlands
199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