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르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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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무르 병합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러시아 제국이 아무르강 유역을 병합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이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했으며, 17세기에는 러시아와 청나라 간의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국경이 정해졌으나, 1840년대부터 러시아는 태평양 진출을 위해 아무르강을 활용하려 했다. 1858년 아이훈 조약과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아무르강 북쪽과 우수리강 동쪽의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니콜라이 무라비요프, 예프피미 푸탸틴,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이그나티예프 등 러시아 측 인물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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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 병합 | |
---|---|
지도 | |
사건 | |
명칭 | 아무르 병합 |
로마자 표기 | Amureu byeonghap |
한자 표기 | 兼併阿穆爾 |
러시아어 명칭 | Присоединение Приамурья и Приморья к России |
로마자 표기 | Prisoyedineniye Priamur'ya i Primor'ya k Rossii |
위치 | 외만주 |
관련 조약 | |
아이훈 조약 | 1858년 |
베이징 조약 | 1860년 |
영토 변화 | |
아이훈 조약에 의해 양도 | #d0c087 색상으로 표시 |
베이징 조약에 의해 양도 | #e78080 색상으로 표시 |
참고 자료 | |
참고 자료 | 마치 (1996) |
2. 배경
수문학 상으로, 스타노보이산맥은 북극으로 흘러가는 강들과 아무르강으로 흘러드는 강들을 분리시킨다.[2] 경제학적으로, 시베리아 타이가의 남동쪽 끝부분은 아무르강 중류와 접하여 농경에 유리했다.[2]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600년대부터 이 지역은 중국, 한국, 만주 문화권의 북쪽 가장자리였다.[2]
17세기 중엽, 야쿠츠크에서 출발한 러시아 탐험가들이 스타노보이산맥을 넘어오면서 러시아 제국이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2] 1689년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은 아무르강 유역을 두고 충돌하였으며, 네르친스크 조약을 통해 양국의 국경을 스타노보이산맥과 아르군강으로 확정했다.[2]
하지만 1840년대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제임스 쿡의 항해 이후 영국, 프랑스, 미국 선박들이 태평양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러시아 역시 알래스카 지역의 치안을 우려한 그리고리 셰리코프와 니콜라이 레자노프가 태평양을 항해했다.[2] 러시아는 해외 세력의 진출이 시베리아 동해안의 해상 방어를 위협한다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아무르강을 활용하여 태평양으로 진출하고자 했다.[2]
2. 1. 지정학적 배경
스타노보이산맥은 북극으로 흘러가는 강들과 아무르강으로 흘러드는 강들을 분리시킨다.[2] 이 산맥은 시베리아 타이가의 남동쪽 가장자리를 형성하며, 아무르강 중류를 따라 일부 지역은 농업에 적합하다.[2] 7세기부터 이 지역은 중국, 한국, 만주 문화권의 북쪽 변두리를 구성했다.[2]1630년대부터 러시아 제국의 요원들이 유라시아의 태평양 해안에 도달하기 시작했고, 아무르 지역과 중국과의 잠재적인 직접 접촉을 알게 되었다. 1643년 러시아 원정대는 스타노보이 산맥을 넘어 아무르강 지류에 도달했다. 이후 러시아와 청나라 간의 관계 수립에는 여러 적대 행위가 있었으며,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에서 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르군 강을 국경으로 확정하여, 러시아의 확장을 저지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1840년대까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18세기 제임스 쿡의 항해 이후 영국, 프랑스, 미국 선박들이 태평양에 진입하기 시작했고, 그리고리 셸리호프 및 니콜라이 레자노프와 같은 러시아 탐험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러한 항해는 알래스카의 러시아 식민지에 관한 것이었으며, 시베리아 동부 해안의 방어 문제와 아무르강을 태평양으로의 공급 경로로 사용하는 가능성을 제기했다.[2]
2. 2. 러시아의 동진과 청나라의 상황
수문학 상으로, 스타노보이산맥은 북극으로 흘러가는 강들과 아무르강으로 흘러드는 강들을 분리시킨다.[2] 경제학적으로, 시베리아 타이가의 남동쪽 끝부분은 아무르강 중류와 접하여 농경에 유리했다.[2]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600년대부터 이 지역은 중국, 한국, 만주 문화권의 북쪽 가장자리였다.[2]
17세기 중엽, 야쿠츠크에서 출발한 러시아 탐험가들이 스타노보이산맥을 넘어오면서 러시아 제국이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2] 1689년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은 아무르강 유역을 두고 충돌하였으며, 네르친스크 조약을 통해 양국의 국경을 스타노보이산맥과 아르군강으로 확정했다.[2]
하지만 1840년대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제임스 쿡의 항해 이후 영국, 프랑스, 미국 선박들이 태평양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러시아 역시 알래스카 지역의 치안을 우려한 그리고리 셰리코프와 니콜라이 레자노프가 태평양을 항해했다.[2] 러시아는 해외 세력의 진출이 시베리아 동해안의 해상 방어를 위협한다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아무르강을 활용하여 태평양으로 진출하고자 했다.[2]
3. 아무르강 유역 분쟁과 조약 체결
3. 1. 네르친스크 조약 (1689년)
17세기 중엽 러시아 탐험가들이 스타노보이산맥을 넘어오면서 러시아 제국이 아무르강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2] 1643년 러시아 탐험가들이 스타노보이산맥을 넘어왔고, 1689년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은 아무르강 유역을 두고 충돌하였다.[2]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 간의 충돌 이후, 네르친스크 조약이 체결되어 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르군 강을 양국 국경으로 설정했다.[2]수문학 상으로, 스타노보이산맥은 북극으로 흘러가는 강들과 아무르강으로 흘러드는 강들을 분리시킨다. 18세기에는 제임스 쿡의 항해 이후 영국, 프랑스, 미국 선박들이 태평양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러시아 역시 알래스카 지역의 치안을 우려한 그리고리 셰리코프와 니콜라이 레자노프가 태평양을 항해했다.[2] 러시아는 해외 세력의 진출이 시베리아 동해안의 해상 방어를 위협한다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아무르강을 활용하여 태평양으로 진출하고자 했다.[2]
3. 2. 아이훈 조약 (1858년)
1845년, 발트 독일 탐험가 알렉산더 폰 미덴도르프는 아무르 지역을 방문하여 러시아 정부를 대신하여 보고서를 작성했다. 1847년, 니콜라이 무라비요프가 동 시베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르쿠츠크로 떠나기 전에 무라비요프는 이 지역의 작업을 조정하기 위해 "아무르 위원회"를 만들었다. 1849년 그는 육로로 오호츠크로 이동한 후 캄차카의 페트로파블로프스크로 갔다. 이로 인해 동부의 주요 러시아 해군 기지가 오호츠크에서 페트로파블로프스크로 이전하게 되었다.1849년부터 1855년까지, 겐나디 네벨스코이 중위 함장이 지휘하는 러시아 탐험대가 태평양 해안선, 사할린 섬, 아무르강 하구를 탐험했다. 군사력을 구축하기 위해 무라비요프 총독은 현지 광산에서 2만 명의 농노를 무장시켜 자바이칼 코사크를 창설했다. 1854년 5월부터 6월까지 그와 1,000명의 병력이 아무르강을 따라 니콜라예프스크로 항해했고, 아이훈의 만주 총독은 그들의 통과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크림 전쟁 소식이 1854년 7월 중국에 전해졌다. 1855년에는 러시아와 일본이 시모다 조약을 체결하여 사할린과 쿠릴 열도에 대한 분쟁을 잠정적으로 해결했다.
제2차 아편 전쟁이 1856년에 발발했고, 2년 후 영국과 프랑스는 광둥을 점령했다. 이 소식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전해지자 알렉산드르 고르차코프는 "러시아 극동 정책을 활성화"할 때라고 결정했다. 무라비요프에게 전권이 부여되었고, 예프피미 푸탸틴 제독이 베이징으로 파견되어 더 유리한 관계를 협상했다.
1856년과 1857년 동안 무라비요프는 더 많은 정착민을 아무르강으로 보냈다. 1858년에는 그 자신이 아무르강을 따라 여행했는데, 그의 지시는 포로를 구출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훈에 도착한 그는 현지 총독에게 아이훈 조약으로 알려지게 될 조약을 제시했다. 이 조약은 아무르강 북쪽의 모든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하고, 우수리강 동쪽과 아무르강 남쪽 지역은 추가 협상이 있을 때까지 중-러 공동 관리 지역으로 선언했다. 현지 총독은 조약에 서명했지만 베이징의 청나라 정부는 이를 무효라고 선언하며 비준을 거부했다. 무라비요프는 아무르강을 따라 계속 내려가 우수리강 하구에 하바롭스크를 건설했다. 1858년 9월,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그를 정식 장군으로 진급시키고 "아무르스키"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다음 해,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장군은 태평양 연안을 탐험하기 위한 원정대를 파견하여 현재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도달했다.
3. 3. 베이징 조약 (1860년)
예프피미 푸탸틴은 톈진 조약에서 연합군의 중재자로 활동하며, 1858년 6월 13일 청나라와 별도의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은 국경 조정을 약속했지만, 아이훈 조약 체결 사실을 푸탸틴이 몰랐고, 연합군 철수 후 청나라는 조약 이행을 거부했다. 1859년 6월 연합군의 다구 포대 재점령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청나라는 조약 비준을 거부했다.이때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이그나티예프가 등장하여, 1859년 3월 러시아 무기와 교관을 청나라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청나라의 조약 거부로 무기 인도는 실패했다. 이그나티예프는 베이징에서 협상을 시도하는 한편, 상하이에서 영국 및 프랑스 군과 합류하여 베이징 지도 제공 및 통역으로 연합군에 기여했다.
1860년 10월,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베이징에 입성하고 황제가 러허 성으로 피신하자, 이그나티예프는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연합군과 청나라 간의 베이징 조약 체결(1860년 10월 24일, 25일)에 기여했고, 이후 청나라를 설득하여 1860년 11월 14일 러-청 간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이 조약으로 톈진 조약이 비준되었고, 아무르 강 북쪽과 우수리 강 동쪽의 모든 땅(약 91만 제곱킬로미터)이 러시아에 할양되었다. 러시아는 외교적 수완과 다른 열강의 힘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약점을 파고들어 영토를 획득했다.

4. 조약 이후의 상황과 영향
4. 1. 러시아의 극동 진출 확대
4. 2. 청나라의 쇠퇴와 영토 상실
4. 3. 현대 중러 국경선 형성
5. 역사적 평가와 의의
5. 1. 한국에 대한 함의
6. 관련 인물
6. 1. 러시아 측 인물
니콜라이 무라비요프는 1847년 동 시베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어 아무르 지역의 작업을 조정하기 위해 "아무르 위원회"를 만들었다. 1854년 5월부터 6월까지 무라비요프와 1,000명의 병력이 아무르강을 따라 니콜라예프스크로 항해했고, 아이훈의 만주 총독은 그들의 통과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1858년 아이훈 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아무르강 북쪽의 모든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하고, 우수리강 동쪽과 아무르강 남쪽 지역은 중-러 공동 관리 지역으로 선언했다. 이후, 하바롭스크를 건설하였고, 1859년에는 태평양 연안을 탐험하여 현재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도달했다. 이러한 공로로 알렉산드르 2세는 그에게 "아무르스키"라는 칭호를 부여했다.예프피미 푸탸틴 제독은 톈진 조약 체결 과정에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캬흐타에서 입국이 거부되자 아무르 강을 따라 항해하여 배를 톈진으로 가져갔고, 연합군이 다구 포대를 점령했을 때 중재자로 나서 톈진 조약을 이끌어냈다.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이그나티예프는 베이징 조약 체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연합군과 중국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며, 1860년 11월 14일에 체결된 러-중 베이징 조약을 통해 톈진 조약을 비준하고 아무르 강 북쪽과 우수리 강 동쪽의 모든 땅을 러시아에 할양하는 데 기여했다.
6. 2. 청나라 측 인물
6. 3. 그 외 인물
7. 같이 보기
참조
[1]
서적
Eastern Destiny: Russia in Asia and the North Pacific
Greenwood
1996
[2]
서적
Eastward to Empire: Exploration and Conquest on the Russian Open Frontier, to 1750
Montreal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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