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나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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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사나사마는 수나라 말기에 카간으로 추대되었으나, 당나라에 귀순하여 무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동돌궐이 멸망한 후 당나라에 투항하여 화순군왕에 봉해졌으며, 힐리가한의 옛 부락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후 을미니숙사리필가한으로 임명되어 몽골 고원으로 돌아갔으나, 반란에 실패하고 당나라에 돌아와 우무위장군이 되었다. 고구려 정벌에 참전했다가 전사했으며, 당 태종은 그를 기리기 위해 소릉에 안장하고 비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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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나사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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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휘호 | 俟力苾可汗 |
칭호 (로마자) | Yǐmíníshúqílìbiékěhàn |
칭호 (한자) | 乙彌泥熟俟利苾可汗 |
본명 | 아사나 시모 |
출생 | 583년 |
사망 | 647년 5월 16일 |
사망 장소 | 장안 |
매장지 | 소릉 |
민족 | 아시나족 |
아버지 | 투흐루크 샤드 |
재위 | |
즉위 | 639년 8월 13일 |
재위 기간 | 639년 - 647년 |
이전 통치자 | 일리그 카간 |
다음 통치자 | 체비 카간 |
2. 생애
수 개황(開皇) 19년(599년) 도람가한과 달두가한의 공격을 받아 계민가한(당시에는 돌리가한)이 수나라로 도망쳐왔을 때 적북(磧北) 지역의 여러 부족들은 아사나사마를 받들어 카간으로 삼았다. 훗날 계민가한이 돌궐로 귀국하였을 때 아사나사마는 그에게 가한의 칭호를 돌려주었다.[11] 아사나사마는 현명하고 판단력이 뛰어났으며, 역대 시필가한이나 처라가한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11] 그러나 용모가 호인(胡人)과 닮아서 돌궐인인 아사나 종족이 아니라는 의심을 샀고 협필특근(夾畢特勒, 의쉬바라 테긴)이 되었으나 설(設, 샤드)는 되지 못하였다.[11]
당나라 건국 초창기에 아사나사마는 여러 번 힐리가한의 명으로 당나라에 사자로 왔으며, 고조는 그의 성의에 기뻐하고 그를 화순군왕(和順郡王)에 봉하였다. 태종 즉위 후 동돌궐 여러 부족들이 당나라와 내통해 힐리가한으로부터 이반하는 와중에 아사나사마만은 힐리가한 옆에 남았고 끝까지 당나라에 저항하였으며 630년 3월에 힐리가한이 당군에 잡혔을 때 그 역시 잡혔다.
639년 6월, 당 태종은 아사나사마의 충의를 높이 사 그를 우무후대장군(右武候大将軍) ・ 화주도독(化州都督)에 제수하고 힐리가한이 거느리던 옛 부락을 아사나사마에게 통치하게 해서 하남(河南)에 머무르게 하고 회화군왕(懐化郡王)에 봉하였다. 또한 아사나사마를 을미니숙후리필가한(乙弥泥孰俟利苾可汗)으로 삼고 이씨 성을 하사해 좌둔위장군 아사나충을 좌현왕, 좌무위장군(左武衛将軍) 아사나니숙을 우현왕으로 삼아 함께 몽골 고원으로 돌려보냈다.
641년 아사나사마(이사마)는 10만 명이 넘는 백성과 강한 병사 4만 명, 말 9만 필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서 옛 정양성에 자신의 아장(오르두)을 세웠다. 그는 그곳에서 당 태종의 성은을 길이 잊지 않으며 북쪽을 지키는 당 왕조의 수비견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러나 3년 뒤인 644년[12] 12월에 인심을 잃어 거느리고 있던 부락들이 이반해버렸다. 아사나사마(이사마)는 이를 수치스러워 하며 당나라에 입조해 숙위로써 머무르기를 바랐고, 우무위장군(右武衛将軍)이 되었다.
645년 아사나사마(이사마)는 고구려 정벌 전투 도중에 화살을 맞았다. 태종이 직접 그의 피를 빨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상처가 원인이 되어 아사나사마는 장안에서 사망했다. 태종은 그를 병부상서(兵部尚書) ・ 하주도독(夏州都督)에 추증하고 소릉에 배장하였으며, 백도산(白道山)을 본떠 그의 봉분을 조성하고 화주에 그의 비석을 세웠다.
2. 1. 초기 생애와 돌궐에서의 활동
수나라 개황(開皇) 19년(599년) 두람 가한(都藍可汗)과 달두 가한(達頭可汗)에게 공격받은 계민 가한(啓民可汗)(당시는 돌리 가한(突利可汗))이 수나라로 도망치자, 사막 북쪽의 여러 부족들은 아사나사마를 받들어 가한으로 삼았다. 이후 계민 가한이 귀국하자, 아사나사마는 가한의 지위를 반납했다.[11]아사나사마는 현명하고 판단력이 뛰어나 역대 시필 가한(始畢可汗)과 처라 가한(處羅可汗)의 총애를 받았다.[11] 그러나 용모가 호(胡)인과 닮았고, 돌궐인인 아사나 씨(阿史那)가 아니라는 의심을 받아 협필 특근(夾畢特勤, 고유 칭호)이 되었고, 설(設, 총독)은 되지 못했다.[11]
2. 2. 당나라로의 귀순과 활약
599년, 도람가한과 달두가한의 공격을 받아 계민가한(당시에는 돌리가한)이 수나라로 도망쳐왔을 때 적북(磧北) 지역의 여러 부족들은 아사나사마를 받들어 카간으로 삼았다. 훗날 계민가한이 돌궐로 귀국하였을 때 아사나사마는 그에게 가한의 칭호를 돌려주었다.[11] 아사나사마는 현명하고 판단력이 뛰어났으며, 역대 시필가한이나 처라가한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11] 그러나 용모가 호인(胡人)과 닮아서 돌궐인인 아사나 종족이 아니라는 의심을 샀고 협필특근(夾畢特勒, 의쉬바라 테긴)이 되었으나 설(設, 샤드)는 되지 못하였다.[11]중국에서 당나라가 수립된 초창기에 아사나사마는 몇 번이나 힐리가한의 명으로 당에 사자로 왔으며, 고조는 그의 성의에 기뻐하고 그를 화순군왕(和順郡王)에 봉하였다. 태종이 즉위하고 동돌궐 여러 부족들이 당과 내통해 힐리가한으로부터 이반하는 와중에 아사나사마만은 힐리가한 옆에 남았고 끝까지 당에 저항하였으며 630년 3월에 힐리가한이 당군에 잡혔을 때 그 역시 잡혔다. 아사나사마의 충의를 높이 산 당 태종은 639년 6월에 그를 우무후대장군(右武候大将軍) ・ 화주도독(化州都督)에 제수하고 힐리가한이 거느리던 옛 부락을 아사나사마에게 통치하게 해서 하남(河南)에 머무르게 하고 회화군왕(懐化郡王)에 봉하였다. 또한 아사나사마를 을미니숙후리필가한(乙弥泥孰俟利苾可汗)으로 삼고 이씨 성을 하사해 좌둔위장군 아사나충을 좌현왕, 좌무위장군(左武衛将軍) 아사나니숙을 우현왕으로 삼아 함께 몽골 고원으로 돌려보냈다.
641년 아사나사마(이사마)는 10만 명이 넘는 백성과 강한 병사 4만 명, 말 9만 필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서 옛 정양성에 자신의 아장(오르두)을 세웠다. 그는 그곳에서 당 태종의 성은을 길이 잊지 않으며 북쪽을 지키는 당 왕조의 수비견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인 644년[12] 12월에 인심을 잃어 거느리고 있던 부락들이 이반해버렸다. 아사나사마(이사마)는 이를 수치스러워 하며 당 왕조에 입조해 숙위로써 머무르기를 바랐고, 우무위장군(右武衛将軍)이 되었다.
645년 아사나사마(이사마)는 고구려 정벌 전투 도중에 화살을 맞았다. 태종은 그를 병부상서(兵部尚書) ・ 하주도독(夏州都督)을 추증하고 소릉에 배장하였으며, 백도산(白道山)을 본떠 그의 봉분을 조성하고 화주에 그의 비석을 세웠다.
2. 3. 동돌궐 부흥 시도와 실패
수나라 개황(開皇) 19년(599년) 두람 가한(都藍可汗)과 달두 가한(達頭可汗)에게 공격받은 계민 가한(啓民可汗)(당시는 돌리 가한(突利可汗))이 수나라로 도망치자, 사막 북쪽의 여러 부족들은 아사나사마를 받들어 가한으로 삼았다. 이후 계민 가한이 귀국하자, 아사나사마는 가한의 지위를 반납했다.[11]아사나사마는 현명하고 판단력이 뛰어나 역대 시필 가한(始畢可汗)과 처라 가한(處羅可汗)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용모가 호(胡)인과 닮았고, 아사나 씨(돌궐인)가 아니라는 의심을 받아 협필 특근(夾畢特勤, 고유 칭호)이 되었고, 설(設, 총독)은 되지 못했다.[11]
당나라 무덕(武德)(618년~626년) 초 아사나사마는 여러 번 힐리가한(頡利可汗)의 명으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고, 고조는 그의 성의에 기뻐하여 그를 화순군왕으로 봉했다.
정관(627년~649년) 초 동돌궐 여러 부족이 당나라와 내통하여 힐리가한으로부터 이반하는 가운데, 아사나사마는 홀로 힐리가한 곁에 남아 끝까지 저항하다가, 정관 4년(630년) 3월, 힐리가한과 함께 붙잡혔다.
정관 13년 6월, 태종은 그의 충의를 칭찬하여 우무후대장군·화주도독을 내리고, 힐리가한의 옛 부하들을 통솔하게 하여 하남에 거주하게 했으며, 회화군왕에 봉했다. 또한 아사나사마를 '''을미니숙사리필가한(乙弥泥孰俟利苾可汗)'''으로 삼고, 이씨 성을 하사했으며, 좌둔위장군 아사나충을 좌현왕, 좌무위장군 아사나니숙을 우현왕으로 삼아 다시 몽골 고원으로 돌려보냈다.
정관 15년, 이사마는 백성 10여만 명, 정예 병사 4만 명, 말 9만 필을 이끌고 하천을 건너 옛 정양성(定襄城)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사마는 몽은을 낙장으로 삼고, 북쪽의 번견이 되어 당나라를 지킬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3년 후(644년[12]) 12월, 민심을 얻지 못해 부하들이 이반해 버렸다. 이사마는 그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 당나라에 입조하여 숙위에 머물기를 희망하여, 우무위장군을 제수받았다.
2. 4. 죽음과 사후
645년 아사나사마는 고구려 정벌에 종군했다가 유탄에 맞았다. 태종이 직접 그의 피를 빨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상처가 원인이 되어 아사나사마는 장안에서 사망했다. 태종은 그를 병부상서(兵部尚書) ・ 하주도독(夏州都督)에 추증하고 소릉에 배장하였으며, 백도산(白道山)을 본떠 그의 봉분을 조성하고 화주에 그의 비석을 세웠다.[11]백암성 포위전에서 아사나사마는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는데, 당 태종이 직접 그의 상처에서 고름을 빨아내 병사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고 한다.[5] 태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또 다른 돌궐 장군 거비말리의 부상도 치료했다.[6] 그는 당 태종의 부인 장손황후의 능 근처에 매우 영예롭게 매장되었으며, 당 태종 또한 나중에 이곳에 묻히게 된다.
3. 대중 문화에서의 등장
참조
[1]
웹사이트
舊唐書 列傳 卷一百四十一至一百五十
http://ef.cdpa.nsysu[...]
2007-10-31
[2]
웹사이트
On the Genealogical Line of Türks' Ashina Simo: The Royal Genealogy of the First Türkic Qaγanate and the Ordos Region during the Tang Period
http://id.nii.ac.jp/[...]
2018-07-28
[3]
서적
Gök-Türkler
2012
[4]
웹사이트
兩千年中西曆轉換
http://www.sinica.ed[...]
[5]
문서
Zhizhi Tongjian
[6]
서적
Skaff 2012
https://books.google[...]
[7]
문서
Jiu Tangshu
https://zh.wikisourc[...]
[8]
간행물
A Comparative Analysis of Chinese Historical Sources and Y-DNA Studies with Regard to the Early and Medieval Turkic Peoples
2017
[9]
논문
Son of Heaven and Son of God: Interactions among Ancient Asiatic Cultures regarding Sacral Kingship and Theophoric Names
2002-11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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