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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폰수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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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폰수 5세는 1432년에 태어나 1481년에 사망한 포르투갈의 국왕이다. 1438년 6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섭정 통치를 거쳐 친정을 시작했다. 그는 북아프리카 원정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아프리카인"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대서양 탐험을 지원했으나 적극적인 행정 활동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했으나 실패했고, 말년에는 아들 주앙 2세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은퇴했다. 그는 두 번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며, 아프리카 원정과 탐험 지원, 카스티야 왕위 계승 시도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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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폰수 5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게오르크 폰 에힝겐의 "여행기"에 있는 동시대 초상화, c. 1470년
칭호포르투갈 국왕
재위 기간1438년 9월 13일 – 1477년 11월 11일
재위 기간11477년 11월 15일 – 1481년 8월 28일
선대 국왕에두아르두
후대 국왕주앙 2세
섭정
출생일1432년 1월 15일
출생 장소신트라 국립 궁전, 포르투갈 왕국
사망일1481년 8월 28일
사망 장소리스본, 포르투갈
매장지바탈랴 수도원
배우자이사벨 드 코임브라(1447년 결혼, 1455년 사망)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1475년 결혼)
자녀주앙, 포르투갈 왕자
주아나, 포르투갈 공주
주앙 2세
왕가아비스 가문
아버지두아르트 1세
어머니레오노르 데 아라곤
서명
호칭
별칭아프리카인 (o Africano)
대관식
대관식 유형칭송
대관식 날짜1446년 1월 15일

2. 어린 시절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


아폰수 5세는 1432년 신트라에서 두아르트 왕과 아라곤의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인 주앙 왕자(1429~1433)가 사망한 후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1438년 아버지 두아르트가 사망하자 불과 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2]

어린 아폰수 5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 엘레오노르의 섭정 아래 놓였으나, 외국인이자 여성이었던 왕비는 인기가 없었다. 1438년 말 코르테스는 엘레오노르와 두아르트 왕의 동생인 코임브라 공작 페드루의 공동 섭정을 요구했으나 실패했고, 1439년 페드루를 단독 섭정으로 임명했다. 엘레오노르는 이에 저항했지만 지지를 얻지 못하고 카스티야로 도망쳤다.[2][3]

페드루는 귀족 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1442년 아폰수 5세는 삼촌 아폰수를 브라간사 공작으로 임명하여 페드루의 견제 세력으로 삼았고, 1445년 페드루는 자신의 딸 코임브라의 이사벨과 아폰수 5세를 결혼시켜 섭정 지위를 확보하려 했다.[2] 1448년 아폰수 5세가 성년이 되자 페드루는 권력을 넘겨주었다.

2. 1. 섭정기

두아르트와 아라곤의 엘레아노르의 장남으로 신트라에서 태어난 아폰수 5세는 1438년, 불과 6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14]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 엘레아노르가 섭정을 맡았으나,[15] 아라곤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점과 부족한 정무 감각은 국민적인 거부감을 일으켰다. 외국인에 대한 부정적 정서는 1383년 이후 28년간 이어진 카스티야와의 전쟁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섭정에 대한 반대 여론이 일어났고 포르투갈 귀족들 사이에서 지지 기반이 약했던 모후의 지위는 흔들렸다.

1439년 코르테스(의회)는 섭정을 아폰수 5세의 삼촌인[14] 코임브라 공작 페드루로 교체하는 결정을 내렸다.[15] 페드루의 주요 정책은 왕국 내 거대 귀족 계층들의 성장을 억제하고 왕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포르투갈은 그의 통치하에 번영하였지만, 그의 법들이 강력한 귀족들의 야욕을 억제했기에 정치적인 상황은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2. 2. 브라간사 공작

주앙 1세의 서자이자[16] 섭정 페드루의 이복형제인 아폰수(1377~1461)는, 코르테스에서 섭정으로 선출된 페드루의 정책에 가장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주앙 1세는 아폰수를 총애하여 아비스 왕조 개국공신 누누 알바르스 페레이라의 외동딸 베아트리스와 혼인시켰고, 아폰수는 페레이라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16]

그러나 아폰수는 가족 내 낮은 지위를 문제 삼아 반목을 조장했으며,[17] 아폰수 5세의 신임과 권력을 얻고자 섭정 페드루와 끊임없이 갈등했다. 1442년, 아폰수는 국왕으로부터 초대 브라간사 공작으로 임명받아 강력한 권력과 부를 가진 대귀족이 되었다.

2. 3. 알파로베이라 전투

1448년 6월 9일, 아폰수 5세는 성년이 되어 친정을 시작하면서 섭정이었던 코임브라의 페드루에게서 권력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브라간사 공작은 국왕과 페드루 사이를 이간질하고 음모를 조장하여, 페드루를 반란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갈등을 증폭시켰다.[14] 같은 해 9월 15일, 아폰수 5세는 섭정 기간 동안의 모든 법령과 포고령을 무효화했다.[17]

숙부인 엔히크 항해왕자가 양측을 중재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했고,[17] 결국 1449년 5월 알파로베이라 전투에서 아폰수 5세와 페드루가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페드루의 군대는 격퇴되었고 페드루는 전사했다.[15][18] 이 전투의 결과로 포르투갈의 유력한 귀족 가문이 사라지면서, 브라간사 공작이 사실상 포르투갈의 통치자가 되었다.

3. 원정과 탐험 사업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의 당대 초상화 (1600년 아우구스부르크에서 그려졌지만, 1470년대 초의 그림을 배경으로 함)


아폰수 5세는 항해왕자 엔리케가 이끈 대서양 탐험을 지원했지만, 1460년 엔리케 사후에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행정적으로 소극적이었던 아폰수 5세는 법률 개정이나 상업 발전보다는 아버지 두아르트 1세와 주앙 1세의 유산을 보존하는 데 힘썼다. 1469년 페르낭 고메스에게 기니만 무역 독점권을 부여했다.[5]

1452년 교황 니콜라오 5세는 아폰수 5세에게 "사라센인, 이교도 및 기타 모든 불신자"를 세습 노예로 만들 권리를 부여하는 교황령 Dum Diversasla를 발표했고, 1455년 Romanus Pontifexla 교황령에서 재확인되었다. 이러한 교황령들은 이후 노예 무역과 유럽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6]

3. 1. 아프리카 원정

1471년 아르질라 정복


아폰수 5세는 주앙 1세 치세 동안 모로코에서 정복한 세우타를 넘어 북아프리카로 관심을 돌렸다. 1458년 알카세르세게르를 정복하고, 1471년에는 아르질라를 정복했다. 탕헤르는 1460년부터 1464년 사이에 여러 차례 빼앗고 되찾는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아폰수 5세는 "아프리카인"(Africanopt)이라는 별명을 얻었다.[4]

아폰수 5세는 항해왕자 엔리케가 이끈 대서양 탐험을 지원했지만, 1460년 엔리케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사업을 계속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행정적으로 소극적인 국왕이었던 아폰수 5세는 법률 개정이나 상업 발전을 추구하지 않고 아버지 에두아르두와 조부인 주앙 1세의 유산을 보존하는 것을 선호했다. 1469년 아폰수 5세는 페르낭 고메스에게 기니만의 무역 독점권을 부여했다.[5]

1452년, 교황 니콜라오 5세는 "사라센인, 이교도 및 기타 모든 불신자"를 세습 노예로 만들 권리를 아폰수 5세에게 부여하는 교황령 Dum Diversasla을 발표했다. 이는 1455년 니콜라오 5세에 의해 발표된 Romanus Pontifexla 교황령에서 재확인되고 확대되었다. 이러한 교황령들은 후대의 노예 무역과 유럽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일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6]

3. 1. 1. 팽창주의 정책

브라간사 공작이 장악한 포르투갈은 귀족 중심의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했고, 귀족들은 많은 토지와 특권을 받았다.[18] 이로 인해 귀족 세력은 강해졌고 왕권은 약화되었다.[18] 아폰수 5세(1438~1481)는 국내 정치에서 약화된 왕권을 해외 원정을 통해 강화하고자 했다.

아폰수 5세는 북아프리카로 눈을 돌려 주앙 1세 때 모로코로부터 정복한 세우타를 넘어 영토를 확장하고자 했다. 1458년 알카세르세게르를, 1471년 아르질라를 정복했고, 1460년부터 1464년 사이에는 탕헤르를 여러 차례 빼앗고 되찾았다. 이러한 업적으로 아폰수 5세는 "아프리카인"(Africanopt)이라는 별명을 얻었다.[4]

1458년 알카세르세게르 함락 후, 아폰수 5세는 "포르투갈과 알가르베스의 왕" 칭호를 사용했는데, 여기서 알가르베스는 포르투갈 남부 알가르베 왕국과 아프리카의 새 영토를 모두 가리킨다.

항해왕자 엔리케의 대서양 탐험을 지원했으나, 1460년 엔리케 사후에는 탐험을 계속하지 않았다. 아폰수 5세는 법률 개정이나 상업 발전보다는 에두아르두와 주앙 1세의 유산을 보존하는 소극적인 왕이었다. 1469년 페르낭 고메스에게 기니만 무역 독점권을 부여했다.[5]

1452년 교황 니콜라오 5세는 아폰수 5세에게 "사라센인, 이교도 및 기타 모든 불신자"를 세습 노예로 만들 권리를 부여하는 교황령 Dum Diversasla을 발표했고, 1455년 Romanus Pontifexla 교황령에서 재확인되었다. 이 교황령들은 노예 무역과 유럽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6]

3. 1. 2. 십자군 준비

오스만 투르크가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며 유럽에 큰 충격을 주었고, 1456년에는 중부 유럽을 침입해 벨그라드를 포위하였다. 교황 칼리스토 3세(209대 1455~1458)는 오스만에 맞서기 위해 십자군 조직을 호소했다.[19][20] 하지만 대부분의 유럽 군주들은 자국의 상황과 나라별 경쟁 등의 이유로 크게 호응하지 않았으나,[21] 아폰수 5세는 적극적인 지원 의사를 밝히고 십자군 원정을 준비해나갔다. 아폰수 5세의 이런 노력은 1458년 교황이 사망하자 구심점을 잃어버린 채 목표를 상실하였다.[22]

3. 1. 3. 아프리카의 왕

포르투갈십자군 원정을 위해 준비했던 군사들을 북아프리카 원정으로 돌렸다.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왕국을 정복하려 한 것이다.[18] 주앙 1세 통치 시기인 1415년에 실시한 북아프리카 원정으로 세우타를 정복했었다. 하지만 이후 모로코인들은 세우타 대신 탕헤르로 교역 장소를 옮기면서 세우타는 고립되어버렸다. 1437년 항해왕자 엔히크의 주도하에 탕헤르 원정이 진행되었으나 실패로 끝나면서 아프리카 정복사업은 중단되었다.

아폰수 5세의 원정대는 1458년 알카세르세게르를, 1471년에 아르질라를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탕헤르는 1460년과 1464년 사이에 몇 차례 얻고 잃기를 하였으나 1481년에 정복하였다. 이로 인해 아폰수 5세에게는 '아프리카의 왕'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15]

3. 2. 대서양 노예 무역

1441년 안탕 곤살베스가 금, 쇠가죽 방패, 타조알 등과 함께 10명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처음으로 포르투갈에 데려오면서 노예 무역이 시작되었다.[24] 당시 아조레스와 마데이라 제도에서 사탕수수 재배가 한창이었기에 노동력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같은 해 모리타니 북부에서 노예들을 들여오기 시작했다.[25]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대서양 노예 무역이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노예제가 흔한 일이었다.[26] 훗날 노예 무역이 활성화되어 유럽인이 노예 무역으로 유명한 아프리카 중부 서해안에 진출하기 전에도 그 지역 아프리카인들의 30~60%가 노예였다.[27] 이들은 백인들의 노예로 지낸 것이 아니라 그 지역 지배 계층 흑인들의 노예로 지내고 있었다. 따라서 거래된 흑인 노예들은 백인 노예상들이 납치한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 추장들과 거래를 통하여 들여왔다.[27]

1444년에 포르투갈의 항구 도시이자 해양 탐험의 전진기지로 사용되어 온 라구스에 처음으로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하여 판매하는 노예 시장(Mercado de Escravos)이 생겼다.[28][29][25] 이후 아프리카 흑인 노예 무역은 활성화되어 16세기에 이르러서 리스본 인구 중 10%는 아프리카 흑인일 정도였다.[28][30][31]

3. 3. 노예무역의 정당성

1452년, 교황 니콜라오 5세는 칙령(''Dum Diversas'')을 통해 사라센인[33]과 이교도들을 공격하고 정복하여 점령할 수 있는 포르투갈의 권리를 인정하고,[34] 이들을 세습 노예화 할 수 있는 권한을 아폰수 5세에게 부여하였다.

이는 레콩키스타와 북아프리카 원정 중 생포된 포로들의 노예화에 대한 종교적,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한 조치였다. 노예화는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이교도와 불신자를 줄이는 차원에서 실시되었고, 노예들을 강제 개종시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35][28] 1455년, 교황 니콜라오 5세는 로마누스 폰티펙스 칙령을 통해 이를 재확인하였다. 이러한 교황의 칙령들은 이후 노예 무역과 유럽의 식민지 활동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였다.[6]

3. 4. 탐사와 개척 사업

숙부 엔히크 왕자가 주도하는 대서양 탐험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1460년에 엔히크 왕자가 사망한 후에는 지원을 하지 않았다. 엔히크 왕자의 대서양 탐험사업은 경제적인 실익이 적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추진되다 보니 막대한 부채를 남기고 사망했기 때문이다.[36] 그 대신 이미 개척된 지역과의 무역과 식민지 정착에 노력하였다. 1474년부터는 아프리카 무역과 탐험 업무를 왕세자 주앙(1455~1495)에게 위임하였다. 주앙 왕세자는 1479년에 체결된 알카소바스 조약에 따라 스페인 인들의 불법 교역을 적극적으로 근절시켰으며 부왕과 달리 서아프리카 연안에 대한 탐사 작업을 재개하여 인도로 가는 신항로 개척을 위해 노력하였다.

4. 카스티야 왕위 계승전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가 1474년 사망한 후, 그의 이복동생 이사벨 1세와 딸 후아나 사이에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후아나는 엔리케 4세가 성불구자라는 의혹[37][38][39] 속에서 왕비와 벨트랑의 불륜으로 태어났다는 소문[40] 때문에 정통성에 논란이 있었다.

아폰수 5세는 이 분쟁에 개입하여 1475년 자신의 조카 후아나와 약혼하고 카스티야를 침공했다.[7] 그는 5,600명의 기병과 14,000명의 보병을 이끌고 카스티야로 진입했다.[8] 1476년 토로 전투에서 페르디난드 2세가 이끄는 카스티야 군대와 맞붙었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졌다.[8] 이후 프랑스루이 1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갔으나 실패하고 1477년 포르투갈로 돌아왔다.[4]

결국 1479년 알카소바스 조약을 통해 포르투갈은 이사벨 1세를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자로 인정해야 했고, 후아나는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4. 1. 기본 배경

1474년 12월, 이웃 나라인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가 사망한 후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인 이사벨 1세와 엔리케 4세의 딸 후아나(1462~1530)는 서로 자신이 적법한 왕위 계승권자라고 주장하며 지지하는 귀족들과 함께 카스티야 여왕임을 선포하였다. 이 분쟁은 예견된 사건으로, 엔리케 4세의 딸 후아나는 출생 시부터 생부에 대한 논란 속에 다수의 귀족들로부터 왕위 계승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은 엔리케 4세가 성불구자[37][38][39]라는 정황 증거 속에 그의 딸 후아나가 왕비와 초대 알부케르크 공작 벨트랑(1443~1492) 사이의 불륜으로 태어났다고 보았다.[40]

엔리케 4세는 1440년 15세에 나바라의 블랑쉬와 혼인했으나 13년간 후사가 없었다. 1453년 세고비아의 루이스 주교는 저주에 의한 발기부전을 이유로 혼인 무효를 선언했다.[41][42] 귀족들은 엔리케가 성불구자라는 의구심 속에 딸 후아나의 왕위 계승권을 부인했다. 정통성 결여와 엔리케 4세의 무능한 국정 운영, 왕실의 불륜 등으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엔리케 4세는 두 번째 왕비 조안을 출궁시켰다. 출궁당한 왕비는 또 다른 애인들과 불륜 속에 2명의 자식을 더 낳았고, 귀족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1468년에 엔리케 4세는 결혼 무효를 선언하였다.[43]

같은 해 토로스 데 귀산도(Toros de Guisando) 협정으로 내전이 종식되며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인 이사벨이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엔리케 4세가 이사벨에게 무리한 정략결혼을 강요하자, 이에 반발한 이사벨은 1469년에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세자와 비밀 결혼을 하였다. 이로써 토로스 데 귀산도 협정은 파기되고 이사벨의 왕위 계승권은 엔리케 4세에 의해 박탈당했다. 이는 이사벨이 엔리케 4세가 동의하지 않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협정 조항을 위반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후계에 대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엔리케 4세가 사망하고 말았다.

4. 2. 포르투갈의 개입

아폰수 5세는 카스티야 왕위를 탐내어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분쟁에 개입하였다. 1475년, 그는 자신의 조카이자 엔리케 4세(Henry IV of Castile)의 딸인 후아나와 정혼하고, 그녀를 왕위 계승자로 내세워 카스티야를 침공했다.[7] 후아나는 포르투갈의 주아나(Joan of Portugal)(아폰수 5세의 누이)가 벨트란 데 라 쿠에바(Beltrán de La Cueva)라는 귀족과 불륜으로 낳았다는 소문 때문에 왕위 계승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7]

아폰수 5세는 1457년 프라 마우로 지도(Fra Mauro map)의 사본을 제작 의뢰했다.


1475년 5월 12일, 아폰수 5세는 5,600명의 기병과 14,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카스티야에 진입했다.[8] 1476년 3월, 토로 전투(Battle of Toro)에서 아폰수 5세와 주앙 왕자의 군대는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Ferdinand II of Aragon), 멘도사 추기경, 알바 공작이 이끄는 카스티야 군대와 맞붙었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졌다.[8] 양측 모두 승리를 주장했지만, 이 전투로 인해 아폰수 5세가 카스티야 왕위를 획득할 가능성은 크게 훼손되었다.[7]

전투 후, 아폰수 5세는 루이 11세(Louis XI)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으나, 프랑스 왕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1477년 포르투갈로 돌아왔다.[4]

4. 3. 종전과 결과

1476년 3월, 토로 전투에서 아폰수 5세의 군대는 주앙 왕자가 이끄는 지원군과 합류하여 카스티야 군대와 대치하였으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44] 이 전투는 육상뿐 아니라 해상에서도 벌어졌는데, 해상 전투에서는 포르투갈이 유리한 상황이었다.[45] 아폰수 5세는 프랑스루이 1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직접 프랑스로 갔으나, 동맹을 맺지 못하고 1477년에 포르투갈로 돌아와야 했다.[46]

4년간의 지리한 전쟁 끝에, 1479년 포르투갈과 카스티야는 알카소바스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을 통해 포르투갈은 이사벨 1세를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자로 인정해야 했고, 후아나는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비록 포르투갈이 대서양과 북아프리카 탐사 및 무역에서 유리한 조건을 얻었지만, 왕위 계승권을 포기해야 했던 아폰수 5세는 크게 실망하여 아들 주앙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은퇴하였다. 이후 신트라(Sintra)의 수도원에서 은거하다 1481년에 사망했다.[15]

5. 결혼과 후손

아폰수 5세는 1447년에 코임브라의 이자벨라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1455년에 이자벨라가 사망하자, 아폰수 5세는 1475년에 포르투갈의 조아나로도 알려진 카스티야의 후아나와 재혼했다. 후아나는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의 딸이었는데, 이 결혼은 교황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아폰수 5세는 후아나를 통해 카스티야의 왕위를 계승하려 했으나, 카스티야의 이사벨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의 짧은 전쟁 후 실패했다.

이름출생사망참고
코임브라의 이자벨라와의 사이에서 (1432년 – 1455년 12월 2일 / 결혼: 1447년 5월 6일)
인판테 주앙1451년 1월 29일1451년포르투갈 왕자 (1451년).
인판타 주아나1452년 2월 6일1490년 5월 12일포르투갈 왕녀 (1452년–1455년). 포르투갈의 성 주아나 또는 산타주아나 공주라고 알려짐. 1693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12세에 의해 시복됨.
인판테 주앙1455년 3월 3일1495년 10월 25일13대 포르투갈 국왕으로 계승.
카스티야의 후아나와의 사이에서 (1462년–1530년 / 결혼: 1475년 5월 30일)
마리아 소아르스 다 쿠냐(Maria Soares da Cunha, 1446년 이전–?)와의 사이에서 (두아르트 왕과 아폰수 5세, 필리파 다 쿠냐의 주요 종자인 페르낭 드 사 알코포라두의 딸)
알바루 소아르스 다 쿠냐1466년경1557년사생아. 포르투 시의 구아르다-모르 드 페스트(Guarda-Mor de Peste, 질병 주요 감시단)이자 킨타스(Quintas) 가문의 군주. Maria Machado와 첫 번째 결혼, Inês da Mota와 두 번째 결혼, 자녀 있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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